너를 탐내도 될까? (78회)

죽으나사나 | 2024.05.12 17:19:48 댓글: 16 조회: 402 추천: 1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567969
너를 탐내도 될까? (78회) 받아들여야 할. 

“이한 씨! 어디에 가시는 거예요?”

대표의 비서실에 전해줄 자료가 있어서 들렀던 정연이가 사무실을 급하게 빠져나가는 이한을 발견하고 불렀다.

“아, 정연 씨.”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던 이한은 정연을 보자 굳었던 얼굴을 조금은 폈다.

“병원에 가야 해서 급히 나가는 중이었습니다.”

“병원엔 왜요? 이한 씨 어디 아픈 가요?”

정연의 커다란 두 눈이 더 커졌다. 걱정스레 이한의 얼굴을 살폈다.

“저는 아니고…”

잠시 머뭇거리던 이한이가 입을 열었다.

“하정 씨가 쓰러졌답니다.”

“네??? 하정이요??”

정연이가 깜짝 놀라 빽 하고 소리를 질러버렸다.

***

<내 딸 하정아,

미안해, 하정아.

아빠가 미안했어.

사랑해. 하정아…>

<아빠??>

젊고 건강하셨던 아빠가 하정이 앞에 나타났다. 얼마나 햇살같이 웃으시는지 그분의 주변이 눈부실 지경이었다.

<아빠. 이제 괜찮은 거야? 이제 안 아픈 거야?>

<그럼~~ 이제 그 어디도 안 아파. 봐봐. 튼튼하지?>

아빠는 미소를 잃지 않은 채 팔뚝에 힘을 주며 힘자랑을 했다.

<아빠!!!>

하정이 아빠의 품에 와락 안기며 눈물을 흘렸다.

<보고 싶었어. 아빠 이제 어디도 가지 말고 내 곁에 있어. 응? 제발 부탁이야.>

하정의 응석에 아빠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줬다.

<아빠는 항상 네 곁에 있어. 하정아.>

<거짓말. 없잖아. 그 어디에도 아빠는 이제 없잖아!>

아빠에게서 떨어져 나간 하정이가 울부짖었다.

<네가 아빠를 기억하는 한 아빠는 네 마음속에 있을 거야. 아빠는 하정을 떠난 게 아니야. 항상 하정이 곁에서 하정을 지켜주고 있으니까 아빠가 없다고 무서워하지도 말고 잘 지내야 해. 우리 하정이 이제 든든한 어른이잖아. 엄마도 잘 챙기고 있고.>

<아빠…>

너무나도 자상한 아빠의 말투에 하정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웃고 있는 아빠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이제 괜찮아. 하정아. 하정이 곁에는 그 사람도 있잖아. 우리 하정을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누구를… 말하는 거야?>

<알고 있잖아. 너도. 너무 기다리게 하지 말고 이제 마음을 열어. 아빠는 하정이가 방황을 그만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아빠가 없이는 행복이라 할 수가 없어.>

하정이 고개를 푹 떨구었다.

<알아. 아빠가 곁에 없다고 생각되는 날이 거듭될수록 우리 여린 딸은 엄마가 속상해할까 봐 울고 싶어도 꾹꾹 참았다는걸. 근데 하정아.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 괜찮아. 가끔 어떤 일들은 참는다고 나아지는 게 아니야. 아빠는 네 곁에 다른 방식으로 남아있지만 하정이가 가끔 아빠의 모습이 그리울 땐 울어도 돼.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말해도 돼. 참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야.>

아빠는 흐느끼는 하정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하정을 다시 안아주며 토닥토닥했다.

포근하다. 아빠의 온기.

하정이 아빠의 품에서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보고 싶었어. 아빠. 정말이야…

으흑….


VIP 병실에 의식 없이 누워있던 하정의 꼭 닫힌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정의 손을 꼭 잡고 있던 기혁은 느꼈다. 하정의 온몸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다는걸.

꿈을 꾸는 건지 이마 사이가 좁혀졌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빠…“

기혁은 그녀한테서 흘러내리고 있는 투명한 이슬을 손등으로 열심히 닦아주었다.

“괜찮아요. 하정 씨.”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그녀의 몸이 더 이상 떨지 않을 때까지 최면을 걸 듯이 중얼거렸다.

하정은 금세 진정되었고 다시 잠들었다.

”드르륵-“

병실 문이 열리고 장 대리와 자원봉사 현장에 있던 책임자가 들어왔다. 아직도 의식이 없는 하정과 기혁을 번갈아보며 조용히 목례를 했다.

장 대리는 오늘 놀란 가슴을 몇 번이나 쓸어내려야 하는지 몰랐다. 저를 따라 처음으로 자원봉사에 나간 하정에게 큰 사고가 난 줄 알고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녔다.

다행히 흘러내린 토사에 깔린 게 아니라 도로변까지 내려왔던 하정이가 구석에 쓰러져 있는 걸 발견했다.
장 대리는 현장에 금방 도착한 구급차에 따라 올라 하정이 같이 병원으로 이동하고 있었고 출발한지 얼마 안 되어 하정의 주머니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그녀는 하정이 대신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추스르며 전화를 받았고 상황 설명을 해주려 했다.

그러나 긴장이 풀린 장 대리가 설명은커녕 갑자기 울음이 터뜨렸으니 … 상대방이 얼마나 놀랐을까 싶었다.

그리고,

전화가 걸려온 사람이 영진 그룹 권기혁 대표라는 것도 병원에 와서 알았다. 재벌 가에 관심이 많은 장 대리는 당연히 그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동영상 파문으로 권 대표와 일적으로 만난 적이 있다던 하정이가 이번 일을 해결하러 간 건 알았지만 쓰러졌다는 말에 권 대표가 이렇게 바로 뛰어올 줄을 몰랐다.

그러면서 분명 맥스 측에서나, 오늘 공동으로 작업했던 자원봉사 단체에서 지시한 적이 없었는데 응급실에서 대기 중이던 하정이가 어느새 단독 병실로 옮겨졌고 여러 검사가 진행되었다.

겉보기에는 하정에게 큰 상처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원래 그렇게 많은 검사를 하나 싶을 정도로…

그리고 얼마 안 지나 권기혁이 비서로 보이는 사람하고 같이 도착하고 나서 알았다. 그들은 도착하기도 전에 저희들보다 더 빠르게 상황 파악을 하고 있었다는걸. 병원에서 칼같이 빠른 움직임에는 그와 관련이 있었다는걸.

기혁은 잠든 하정을 다시 한번 꼼꼼히 확인을 하고 이들과 같이 병실 밖으로 나왔다.

“아직… 안 깨어났나요?”

회사에 전화로 현재 상황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온 장 대리가 머뭇거리며 하정의 상태에 대해 물었다. 물어야 할 상대가 권기혁이라는 게 아직도 실감이 안 나서 커다란 몸집의 그를 연신 힐끔거렸다.

“네. 교수님 말로는 다행히 큰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기혁이 담백하게 답했다. 표정엔 변화가 없는 기혁을 살짝 올려다보던 장 대리가 또 한 번 머리를 푹 숙여 고마움을 표했다.

“대표 님. 감사… 합니다. 덕분에 이렇게 좋은 병실로 올라올 수 있었던 것도, 윤 대리 님의 상태를 빨리 확인할 수 있어서…"

그리고 장 대리는 기혁에게 맥스 측에서 큰 사고가 날 뻔한 하정을 살피러 온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러자 하정이를 조용히 쉬게 하고 싶다며, 그는 단번에 거절했다.

맥스 측은 어느 누구도 아닌 영진 그룹 말에는 껌뻑 죽는 시늉도 해야 할 때라 장 대리는 그의 뜻을 맥스에 알렸고 알겠다는 답을 들었다.

곧이어 하정의 가족이나 지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우르르 모이는 걸 보았다.

이제 하정이 곁에 가족이 있을 테니 볼일을 보러 가라는 기혁의 말에 장 대리는 단체 책임자와 함께 그곳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은 온통 의문투성이였다가 옆을 급히 스쳐 지나가는 간호사와 의사의 소곤거리는 대화에 장 대리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져 갔다.

”환자분 검사 결과 임신 맞습니다.”

“그래. 빨리 대표 님한테 알려야겠네.”

자리에 우뚝 멈춰 선 장 대리는 빠른 발걸음으로 움직여 하정이가 있던 병실로 들어가는 그들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자원봉사 단체에서 연락 온 전화를 받고 금방 끊은 책임자가 넋을 잃은 장 대리를 불렀다.

“아, 아닙니다.”

장 대리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엘리베이터 앞으로 성큼 걸어갔다.

임신이라니… 윤 대리 님이 임신이라고?

남자친구도 없다고 했었던 거 같은데.

설마, 설마??

***

”네에?? 하정이가 임신…“

정연은 하정이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으면 놀라서 정신이 없을 미연이가 걱정되었다. 그래서 하정의 집에 들러 미연이와 같이 오느라 병원에 늦게 도착한 그녀는 의사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질러 댔다.

그러곤 아직 하정이가 깨지 않은 병실이라는 걸 자각하고 제 입을 꽉 틀어막았다.

“몸 상태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는데 봉사까지 하고 계셔서 탈진 상태로 쓰러진 것으로 보입니다. 태아에게 안전한 수액을 놓은 상태고요 영양 공급을 집중적으로 해야 합니다. 이제 환자분 깨어나시면 초음파 검사도 진행하겠습니다.“

”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깜짝 놀라 얼굴이 하얘진 정연에 비해 기혁과 미연은 그렇지 않았다. 조금 긴장한 얼굴이긴 했지만 정연이처럼 소스라치게 놀란 기색은 전혀 아니었고 조용히 의사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꼭 미리 알고라도 있었던 것처럼. 하정이가 임신 중이라는걸.

***

“정신이 들어? 하정아.”

VIP 전용 단독 병실에 처음 발을 들인 정연이가 제 집에 있는 사이즈보다 더 큰 소파에 앉아 과일을 깎으며 병실 내부를 훑고 있었다. 그러다 하정의 옆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대기하던 미연의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하정이 아직 정신이 제대로 안 돌아오는지 저를 부르는 소리에 큰 반응이 없이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하정아. 나 정연이야. 오정연. 알아보겠어?”

또 한 번 저를 부르는 소리에 그녀의 눈동자가 천천히 정연에게 향했다.

“… 응.”

초조하게 기다린 끝에 하정이가 고개를 끄덕이었고 미연과 정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냥 잠을 자는 거라고 의사한테서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걱정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무슨 애가 몸도 안 좋았다면서 겁도 없이 자원봉사를 하러 간 거니? 정말 너 때문에 못 살아!"

미연이가 입을 떼기 전에 정연이가 일부러 잔소리를 늘렸다. 아주머니가 너 때문에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아냐는 둘만의 시그널이었다.

"미안해. 엄마..."

정연의 뜻을 알아차린 하정이가 바로 미연에게 사과를 했다.

"괜찮아. 이리 깨어났으면 된 거야."

미연이 하정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너 깨어나면 알리라 했는데. 나 교수 님 불러 올게."

미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을 나섰다.

하정의 앞에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기색이 역력한 정연이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만 달싹이고 있었다.

"나 어쩌다가 여기에 온 거야?"

누가 봐도 일반 병실이 아니었으니 주위를 둘러본 하정이가 물어왔다.

"응... 뭐. 너네 회사에서 마련했나 봐. 봉사하다가 큰일 날 뻔한 거라."

"아... 그래?"

정연의 에둘러 하는 말에 하정은 다른 생각을 안 했다.

실은 정연이가 거짓말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해야 하는 거죠? 대표 님께서 오셨단 말을 왜 하정에게 하면 안 되는 거죠?]

병원 측에 하정의 건강 회복에 관해 꼼꼼하게 챙길 것을 당부하고 권기혁과 이한은 돌아간다고 했었다. 그 말이 이해가 안 가던 정연이가 어려운 제 상사에게 따지 듯이 물었다. 왜 그러는지. 왜 오늘 했던 일을 숨겨야 하는지.

어떤 말이던 꼭 들어야겠다는 의지가 담긴 정연을 무심히  내려보던 기혁이가 입을 뗐다.

[하정 씨는 임신했다는 사실마저도 몰랐고 믿고 싶지 않아 할 겁니다. 저를 밀어내는 중이라 임신이라는 사실은 큰 타격으로 갈 것이고... 하정 씨가 이 상황을 받아들일 시간을 주는 겁니다.]

담담하게 뱉은 기혁의 음성과 태도는 근엄했다.

정연이는 뭐라 반박할지 갈피를 못 잡고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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