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 겨울바람이 불었다

하늘일기 | 2017.07.07 15:57:32 댓글: 1 조회: 1882 추천: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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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름하게 저녁이 다가오고 있었다. 찐득찐득 몸에 땀이 배여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옴에도 불구하고 지혜는 이불속에서 나올념을 하지 않았다.

<삑삑삑...>

현관 문이 열리며 그가 들어섰다.

<<아직도 이불속이야?!>>

약간은 날카로운, 성가시듯 내뱉는 중저음이 귀속을 파고 들자 지혜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 지혜야. 뭐가 문제인데? 우리 지금 잘해가고 있잖아...>>

어깨를 토닥이는 그의 손길이 싫었다. 아니, 어쩌면 싫어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밀쳐버렸는지도 모른다.

<<대체 왜 그래!>>

그는 화가 났다. 벌떡 잃어서더니 양손을 허리춤에 얹었다. 최악의 기분임을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 여기서 그만해요...>>

순간 그의 손이 허리춤에서 떨어졌다. 주먹을 꽉 쥐던 그가 아슬아슬하게 한마디 내뱉었다.

<<이유가... 뭐야? 조금만 더 기다려주기로 했잖아.>>

<<지쳤어... 여기서 끝내... , 떠날거야.>>

떠난다고 내뱉는 목소리는 단호하고 힘이 있었다. 늘 나긋나긋하던 지혜의 다른 모습이였다.

그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리고 두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어스름하던 저녁은 밤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렇게 가로등불빛이 하나둘 새여들기 시작할쯤 나지막하게 그가 물었다.

<<조금만 더... 생각해볼순 없겠니...?>>

<<... ...>>

아무런 대답도 할수 없었다. 그와의 감정을 끝내버리기엔 너무 긴 시간을 함께했다. 그는 첫사랑이였다, 아니 첫남자였다. 애송이의 순수했던 감정으로 끝없이 바라만 봤던 남자였다. 그렇게 그와 함께 한 시간이 저그만치 7년이였다. 23살부터 7, 그 시간동안 그는 지혜에게 세상의 전부였고 그에게 지혜는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그런 그 감정을 스스로 끊어버리려 했다. 아니, 스스로 끊어버려야만 한다. 그래서 이 악물고 있으면서도 더 생각해볼수 없겠냐는 그의 질문에 답을 할수 없었다.

<<지혜야. 조금만 더 생각할 시간을 갖자...>>

그는 돌아섰다. 축처진 어깨는 한없이 처량한 모습이였다. 터덜터덜 걸어나가는 그의 뒤모습을 보며 달려가 안고 싶었다. 이불을 꽉 움켜쥐였다. 이불사이로 파고드는 손톱에 손바닥이 아파왔지만 눈물을 꾹 참으며 숨소리마저 조심히 뱉었다.

-

문이 닫혔다. 그가 갔다.

그제서야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대학시절부터 동아리 선배로 알고지내던 사이였다. 부모없이 고아로 자란 지혜에게 친오빠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세상에서 유일하게 기댈수 있는 사람이였다. 그런 사람과의 관계를 이쯤에서 마무리할때가 된 것이다.

전화벨이 울렸다.

조심스레 베개밑에 처박혀있던 핸드폰을 들어보았다. 저장하지 않은 낯설지만 또 낯설지 않은 번호가 뜨고 있었다.

<<...>>

나그막하게 전화를 받았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통화를 하는 모습은 당금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해보였다. 전화기 너머에서 담담한듯하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갔어요...>>

지혜는 이 한마디를 내뱉고 핸드폰을 맥없이 내려놓았다. 그의 동의 따윈 필요없는 이별이였다.

띠링-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李佳玲6281939分向您尾号0810的储蓄卡帐户转帐存入收入人民币300000.00>

두눈을 꼭 감았다. 7년의 사랑이였다. 누가 뭐라고 하던 7년을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하기만 했다. 그러나 이제는 더러운 끝이 되어버렸다. 7년의 사랑과 맞바꾼 돈 30만원. 이것이 혈육하나 없는 지혜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청춘비였다.




그녀는 아름다운 사람이였다. 도도하면서도 우아한 매력이 넘치는 여자이였다. 담담한 표정으로 지혜를 바라보는 눈빛에 지혜는 애꿎은 쥬스잔만 만지작 거렸다.

<<지혜씨. 마셔요. 커피는 마시면 안되겠죠?>>

그녀의 말에는 가시가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아무 대답도 할수 없었다. 그조차도 모르는 사실을 그녀가 알고 있다는것에 소름이 돋았다.

<<두사람 관계. 결혼초부터 알았어요. 어차피 저랑 승민씨는 집안에서 맺어준 사이니까 사랑따윈 없었거든요...>>

그녀는 잠시 말을 잇지 않았다. 그리고 씁쓸한 표정으로 얼음이 가득한 아메리카노잔을 입에 갖다 댔다. 목이 마른 듯 한모금 추기고 나서야 다시 말을 이어갔다.

<<맞아요. 두사람 사귀는 사이에 제가 끼여든 제3자였어요. 그런데 지금은... 지혜씨가 가정 파탄범이 되는거예요.>>

숨을 쉴수 없었다. 맞는 말이였다.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불륜은 불륜이였다. 애초부터 두사람의 만남은 잘못된 만남이였을지도 모른다. 애초부터 둘은 사귀지 말았어야 했다. 고아였던 지혜와 기업을 운영하고 있던 그의 사랑, 그것은 현실앞에 산산쪼각 나는 한 장의 종이장에 불과했다.

<<승민씨의 사업 부도. 막아준건 저희 아버지였어요. 처음에는 사랑이 없는 결혼 생활. 지겹고 싫었는데 이젠 놓기가 싫네요...>>

그녀는 조용히 얘기하면서 초음파 사진 네장을 내밀었다. 지혜의 손이 덜덜 떨렸다.

<<첫장은 결혼 초 임신했던 아기에요. 두 번째 장은 결혼 3년째 되던해 아기 초음파구요. 세 번째는 결혼 5년째 아기 초음파 사진이예요. 네 번째는... 보다 싶이 잦은 유산으로 인한 자궁 손상, 불임 판정을 받은 검사 결과구요.>>

저릿... 머릿속이 백지장이 되듯 하얗게 되다가 다시 통증이 다가왔다. 너무 담담하게 모든 것을 말하는 그녀가 무서운 존재로 느껴졌다.

<<승민씨가 애기를 원하지 않았어요. 이쯤에서 이젠 결정을 해야 될 때가 된 것 같아 오늘 실례를 무릅쓰고 만나자고 한거예요.>>

그녀의 정중한 말투에 더욱더 마음이 옥죄여 왔다.

<<지혜씨 임신 소식을 알면 승민씨는 날 떠날 수 있을거예요. 대신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가 되겠죠. 승민씨 아버지 마지막 유언이 회사를 꼭 잘 지키라는것이였어요. 아마 잘 알고 있겠죠? 승민씨 회사, 아버님과 어머님이 어렵게 성공시킨 회사라는거...>>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여자로서 불임이라... 저한테는 최악의 진단이에요. 허울뿐인 가정에서 왜 승민씨에게 최선을 했는지 저조차도 잘 모르겠네요.>>

그러나 지혜는 알 것 같았다. 리가령, 그의 와이프는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지금 그녀의 눈빛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여태껏 모든 것을 인내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와 헤여지면 선불로 30, 아기를 지우면 70. 입금해드릴게요. 지혜씨 한사람의 선택으로 모든 것이 달라질거예요. 내일 저녁. 전화 드릴게요.>>

그녀는 까닥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멀어졌다. 짙은 디오 향수 냄새가 코를 찌르자 욱 하고 쓴물이 밀려올라왔다. 화장실에서 먹었던 것을 게워내고 나자 속이 조금은 나아진 느낌이였다.

그를 사랑했다. 미치도록 사랑해서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젠 결정을 지을때가 된 것이다.




임신 6.

축복받아야 할 임신소식.

그러나 지혜는 한없이 울기만 했다. 고아였던 자신에게 생긴 첫 혈육...



지혜는 조용히 일어나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그리고 이미 정리해놓았던 옷들을 차곡차곡 트렁크에 넣었다. 간소하게 짐을 챙긴후 지혜는 운동화를 챙겨들었다.

현관문앞에서 문고리를 잡고 조심스레 뒤를 돌아보았다. 지혜는 결혼을 꿈꾸었다. 그와 함께 사는 소소한 행복을 바랬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그에게 이혼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였다. 아니 어쩌면 애초에 결혼을 할 때 지혜를 위한 이혼같은 것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제야 뇌리를 스치듯 차겁게 파고드는 생각에 지혜는 쓴 웃음을 지었다. 7년의 사랑, 모든 것을 내려놓을 시간이였다.



무더운 여름이였다. 뜨끈한 바람이 불어왔다.

<<내겐 사랑... 남들 눈엔 불륜...>>

허망하게 중얼거린 지혜는 걸음을 재촉했다. 지혜의 손에 상해-일본 행 티켓이 쥐여있었다. 마음을 도려낸 듯 아픈 지혜에겐 뜨거운 여름 바람도 칼날 같이 차가운 겨울 바람이였다.




지혜는 남은 여생을 아기와 단둘이 살아볼 계획이였다. 이기적으로 느껴졌지만 그것이 지혜에게 유일한 안식처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였다.




그해 여름, 지혜는 매서운 겨울바람을 맞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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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망 (♡.188.♡.221) - 2017/07/07 17:08:19

불륜이 없으면 소설이 안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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