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새를 찾아서(제42회)

권영주 | 2013.12.02 11:57:41 댓글: 18 조회: 1278 추천: 8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1992133

42.

주영진이 야심차게 준비한 퀸즈 새로운 프로젝트의 기획방안 유출사건은 그날 조회때 나의 오지랖으로 그렇게 밋밋하게 마무리를 지은듯 했다.검토서를 사내 게시판에 제출하는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어려운것은 그 뒤에 이어지는 정동현부장과의 그 미묘한 괴리감 때문이었다.그날이후로 그는 회사에서 나를 기다려 퇴근하지도 않았고,내가 살고있는 집에 드나드는 일도 더이상 없었다.복제한 키는 줄곧 나의 가방안에 들어있었지만,내게는 어쩐지 그것을 건네줄 계기가 없었다.

 

날씨가 제법 쌀쌀해지더니 사계절 따뜻해보이는 이 도시에도 하얀 김이 서리기 시작했다.가을의 끝자락을 거두어주는 긴 장마비가 추적대고 있을때,퀸즈 인터넷사업부는 놀라운 성적을 보이기 시작했다.우선 화숙이가 맡고있던 덤핑도매거래처가 기하학적으로 늘어나서 오랜 시간동안 퀸즈의 큰 골칫거리 문제로 존재했던 재고적치 상품들과 불량제품들을 원만히 처리해낸다는것이 그 첫번째 성과였다.놀라운것은 단지 그것만이 아니었다.

 

진희씨,방송일정이 코앞인데 그렇게 출장 나가시면 어떡해요...저번에도 이런적 있었잖아요...!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이 어쩜 약속을 밥먹듯이 깨는거죠?...아뇨 됐어요.진희씨 없으면 우리가 모델 못구한다고 생각하시죠?...알았어요.마지막으로 통보하는거에요.일정 맞춰 돌아오지 않으면 계약 위반으로 홈쇼핑 MD님이 위약금 청구 들어갈거에요.알아서 하세요!

 

수화기를 메치듯이 내려놓으며 윤지영이 의자에 깊숙히 기대앉았다.나는 모니터 사이로 힐끔 그녀를 보았다.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그녀가 다시 자리를 고쳐앉으며 서류들을 번졌다.나는 웃으면서 물었다.

 

온대요?

올거에요.위약금 얘기만 나오면 말을 들었으니까요.다만...

 

윤지영은 나를 힐끗 바라보다가 다시 서류들을 번지면서 말했다.

 

혹시 그쪽에서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다면 위약금 물어도 안오겠죠.그럴 경우를 대비해서 지금 다른 모델들 이력서들을 찾아놓으려구요.

 

나는 소리없는 미소를 지으며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한창 주문정리로 눈코뜰새없던 령이가 그와중에 불쑥 한마디 끼어들었다.

 

지영씨 많이 컸네.대책마련도 할줄 알고.

본인 일이나 하셔.정리 다 못해서 또 야근하지 말고.

은희가 빨리 하면 돼요.난 항상 퇴근전엔 정리 끝낸다니까요.

 

둘이 티각태각 하자 은희가 한쪽에서 재빠르게 말했다.

 

됐거든요.좀 더 일찍 정리해줘야 내가 빨리 끝내든가 하죠.자기가 피해를 주고선 나한테 밀지 말고.

둘다 입으로 일해?

 

권혜경의 엄한 목소리가 들리자 둘은 혀를 홀랑 내밀고는 각자 자기 업무에 몰두했다.내 입가의 미소가 진하게 번졌다.항상 덤벙대던 령이가 까근한 정리를 할수 있다는것과,매사 느릿느릿하던 은희가 업무속도를 빨리할수 있다는것도 놀랍지만,이 모든 사람들의 변화에 상반되는,권혜경의 드팀없는 업무태도도 사람을 감탄케 하고있었다.

 

퇴근시간이 되자 다들 업무를 마쳤는지 주섬주섬 정리를 하고 내게 인사를 건넨다.나는 머리를 끄덕여 가볍게 인사를 받았다.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던 권혜경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나를 보았다.

 

또 야근이에요?

업무의 연장이라고 해두죠.

 

나는 여전히 입에 미소를 걸고 말했다.그녀는 고개를 흔들더니 나직히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이젠 한달도 넘는데...정아씨는 데이트도 안해요?

데이트...할 사람이 없네요.

 

내 대꾸가 씁쓸하게 들렸는지 그녀가 웃는듯마는듯 나를 보았다.

 

한창 꽃같은 나이에 그러는건 아니죠.나처럼 결혼하고 애까지 딸린 유부녀도 아니고 정아씨 주위엔 따르는 사람도 많을텐데.

죄송하지만,서른을 앞뒀으니 꽃같은 나이는 아니거든요.그리고 따르는 사람은 더욱 없구요.

 

내가 피씩 웃자 그녀도 그만 웃어버렸다.실은 낮에 일이 끝나면 주차장에서 보자는 정동현의 짤막한 메시지를 받고,괜스레 설레이는 기분으로 그에게 넘겨줄 키가 있는지 한번 더 체크하긴 했었다.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매일 하던 일을 중단할수는 없었다.문쪽으로 몸을 돌리려다가 권혜경이 다시 말했다.

 

왔네요,그런 사람.

 

미처 의문도 제기하기도전에 그녀가 씽하니 문을 나선다.그녀가 나간쪽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나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리고 권혜경의 인사를 받고 내쪽으로 다가오는 사람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대표님.

퇴근 안해요?

 

살짝 미간을 모으며 묻는 주영진에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무리가 좀 남았어요.

그럼 기다릴께요.일봐요.

 

그가 나를 마주한 의자에 스스럼없이 걸터앉는다.나는 난감한 얼굴이 되어 그를 보았다.

 

한참...걸릴거 같은데요...

상관없으니 일 봐요.

 

그가 무심하게 말하며 내 책상위의 모델잡지를 가져다가 뒤적였다.나는 다시 모니터로 눈길을 돌렸지만 도저히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그날 조회이후로 나와 주영진은 단 한번도 독대한적이 없었다.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아마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진것도 바로 그날부터였으리라.

 

무슨 용건이라도 있으신지...

내 용건보다는 팀원들 뒤수습이 더 중요할텐데요.어서 일봐요.

 

나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한달동안 놀라운 변화를 가져오긴 했지만 아직 미흡한 점도 많은 부서였다.하지만 한창 열의를 내어 일하는 팀원들에게 마냥 지적만을 할수는 없기때문에 나는 매일 어김없이 남아서 업무 마무리 작업을 하군 했는데 그것이 주영진의 예리한 눈은 피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뭔가 말하려다 말고 나는 다시 일에 집중했다.낮에 메모해두었던 부족한 점들을 찾아 가급적 티 안나게 수정하고 오류가 날법한 정리들에는 보기 편하게 주해를 끼워넣었다.마지막으로 윤지영의 방송일정 체크를 하고 화숙이의 거래처들을 몇개 등급으로 분류해준 다음 나는 컴퓨터를 끄고 일어섰다.

 

다 됐어요.

날 이기느라 힘드시겠다...

 

야유인지 조롱인지 모를 어조로 그가 말했다.그의 약점을 노리고 출사표를 던진 그와의 마지막 독대가 떠올라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원하는 대답이 아닌거 알죠?

 

그가 잡지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섰다.우리는 테이블을 사이두고 마주선 상태로 되었다.순간 그의 얼굴에 스치는 회의인지 절망인지 모를 서글픈 표정때문에 나는 마음 한구석이 은근히 불안해졌다.

 

무슨 일...있었어요?

촉은 빠르네요.본사 주주총회에서 감사를 선임해서 화남지사에 파견했어요.

본사에서 내려온 사람이 없지 않나요?

내려보낼 필요가 없죠.애초부터 여기 있는 사람이니까.

 

주영진의 말끝에 묘한 적의가 느껴졌다.순간 내 뇌리를 스치는 한사람의 이름이 입밖으로 튀어나왔다.

 

정동현부장...

 

주영진이 침묵으로 대답했다.나는 퀸즈지사의 이런 반전들에 갑자기 머리속이 혼란스러워졌다.지금부터 칼자루는 다시 정동현이 쥐고 잇었지 않는가.그리고 그를 감사로 선임한데엔 분명 전무의 입김이 강했을것이다.노련한 전무와 치밀한 정동현부장을 대처할만한 힘이 눈앞의 주영진에게 있단 말인가.

 

그래도 아무것도 모르는 감사보다는 원래 여기를 잘 알고있는 사람이 낫지 않나요?

 

나의 이런 위로가 얼마나 무기력한지는 주영진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서도 알수 있었다.하지만 나는 그이상의 적절한 말들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정동현이 어쩐지 안보인다 싶었는데 그동안 이런 일을 계획하고 있었던걸까.아니면 그의 본의가 아닌 역시나 전무의 꼭두각시로 움직이게 되는것일까.

 

괜찮을거에요.그동안 잘해오고 계셨잖아요.

잘한게 없어요.충분히 개선이 가능한 한 부서를 통채로 해체하려고 했었고,사람 관리와 보안을 철저히 못해서 기획서 유출 사건도 있었구요...그리고 또...

 

그는 맥없이 의자에 주저앉았다.그리고는 고개를 숙이고 나직히 말을 이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반대하는데도 감시목적을 내세우며 인권침해 논란까지 일으켰으니...

다 지나간 일이잖아요...

 

나는 어떻게 그를 위로하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다가 정수기쪽으로 다가가서 따뜻한 물 한컵을 받았다.주영진에게 다가와서 넘겨주려다가 그가 고개를 파묻고 있어서 테이블위에 종이컵을 놓아두고 돌아서는데,문득 그가 느닷없이 고개를 쳐드는 바람에 종이컵이 미끄러져 그의 몸에 물이 흠뻑 쏟아졌다.

 

세상에...

 

나는 급히 테이블위의 티슈를 뽑아서 그의 옷위에 있는 물기를 털어주었다.그는 요지부동하고 앉아있더니 문득 손을 내밀어 한참 분망한 내 팔을 잡았다.그리고는 그대로 나를 자기쪽으로 끌어당겼다.

 

주영진씨...

 

나는 급히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나는 어정쩡하게 서있는 자세가 되었고 그는 나를 껴안은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있었다.바로 화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다음 말에 나는 잠깐 주춤했다.

 

1분만 시간을 줘요.

이러지 마세요.

한때는 내가 당신한테 어깨를 빌려줬었잖아.그 보상으로 1분만 이러고 있자는데 과한건 아니잖아요.

주영진씨......

 

나는 여전히 거부하듯 강경하게 말했다.하지만 그를 밀어내는 손에는 큰 힘이 들어있지 않았다.한동안 정적이 흐른후에 그는 나직히 한숨을 쉬더니 내게서 자신의 팔을 풀었다.

 

미안해요.

...

당신 마음 알아요.그 사람 바라보는것도 알고...그래서 이렇게라도 잠깐 떼를 써볼수밖에...

...

그리고 고마웠어요...그날 조회때...당신이 나서주지 않았다면 수습이 더 어려웠을지도...

주영진씨가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에요.

 

내 중얼거림을 그는 주의하지 못한듯 했다.아니,불현듯 들려오는 다른 한 목소리에 내 중얼거림이 묻혔다고 하는것이 더 적절했다.

 

두사람 여기서 뭐해?

 

......

 

잠깐만요...날 좀 기다려요.

 

주차장으로 나가는 지하1층 로비에서 나는 겨우 정동현을 따라잡을수 있었다.그는 내 목소리에 멈춰섰지만 고개는 돌리지 않고 있었다.그의 뒷모습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는것을 보며 나는 오늘의 이 오해가 말로는 설명하기 어렵겠다는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아무리 변명한다 해도 텅 빈 사무실에서 주영진과 그토록 가까운 거리에 밀착해 있은것은 누가 봐도 애매한 장면이 아닐수 없었다.가방도 챙길새없이 허둥지둥 따라나오긴 했지만,막상 그가 멈춰서자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그런 내 망설임을 예상했다는듯 그가 다시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내 몸은 내 의지의 지배를 벗어나 자신이 으례 해야 할 행동을 하고있었다.달려나가 그의 앞을 가로막은 내 눈에 물기가 잠시 어렸다.

 

동현씨...

역시 편견이 아니었어.

 

마가을 찬바람처럼 싸늘한 그의 어조에 나는 금세 맥을 버렸다.그러자 눈안의 물기도 곧 거두어졌다.

 

무슨...뜻이죠?

 

애써 차분하게 묻고있지만 내 목소리가 조금은 떨리고 있었다.

 

이리저리 직장 옮겨다니는 당신에 대해 말이야,항상 새것을 좋아하고 낡은것을 버려버리는 그 경박한 속물근성을 내가 애초에 알았었는데...

 

그가 놀랍도록 잔인한 말을 이처럼 스스럼없이 내뱉을수 있다는것에,나는 또 한번 몸을 떨었다.하지만 그런것도 잠시,나는 눈안의 물기를 말끔히 거두어낸후,흐트러진 머리를 쓸어넘기고 허리를 곧게 폈다.

 

그래서요?

잠깐 눈이 멀어 악마를 천사로 보았다고.

 

이번에는 차라리 심장이 칼에 찔려 이대로 호흡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잠깐 뇌리를 스쳤다.나는 간신히 시선을 들어 그를 보았다.하지만 그는 이런 내가 역겹기라도 한듯 아예 눈길조차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더 할얘기 있어?없으면 이만.

...그동안...그랬어요?

 

실은 그동안 본사에서 파견한 감사역할 충실히 집행하느라고 그렇게도 바빴냐고 빈정거릴 심산이었다.이렇게 수모를 당했으면 적어도 이정도는 돌려줘야 하는것이였다.하지만 나는 이처럼 바보같은 질문을 던지고 나서 초라하게 시선을 내렸다.잠깐 침묵이 흐르고,그는 내가 묻는 의미를 금세 알아차린듯 했다.

 

바빴어.

 

그는 한달동안의 무관심을 이처럼 간단한 한마디로 일축해버린후 고개를 돌려 쓴웃음을 지었다.

 

...알아서 바빠준셈이지.그래야 당신같은 파랑새가 다음 둥지 찾아 떠날테니까.

 

눈앞이 아득해졌다.그리고 이런 그를,더이상 내게 이런 말들을 내뱉는 그를 잡을 그 어떤 꼬물만큼한 이유도 생각나지 않았다.피가 터지도록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드디어 한걸음 물러서는 내 곁으로 그가 찬바람을 씽 일구며 지나갔다.그리고 바람에 실려온 그의 흔적이 서서히 내 눈물을 끄집어냈다.

 

내 가방을 챙겨 뒤따라 내려온 주영진에게 그런 내 초라한 모습이 들켜버린것이 이제는 더이상 민망하지도 않았다.주영진은 온 얼굴이 눈물로 뒤덮인 나를 보다가 발을 탕 구르며 문밖으로 향했다.

 

내가 가서 얘기할께요.

 

나는 그를 제지시킬념도 하지 않고 묵묵히 몸을 돌렸다.주차장 입구쪽에서 들려오는 아츠러운 경적소리가 내 가슴을 차갑게 긁었다.

 

......

 

복은 쌍으로 오지 않고 화는 홀로 오지 않는다는 말이 이처럼 마음에 와닿기까지 옹근 7년이란 시간이 흘렀다.그동안 수많은 일터를 전전하면서 그토록 지켜왔던 내 소신이 이 회사에서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는것을 나는 너무나 뒤늦게야 깨닫게 된것이다.불과 1년도 안되는 시간,깊이 빠지긴 했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나는 이 모든것을 떠날 때가 닥쳐온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 직감은 정동현이 감사의 의무수행을 내세워 주영진에게 그동안 회사업무에 대한 집행보고서를 요구한것과,곧 다가오는 크리스마스 이브,하필이면 크리스마스 파티 겸 송년회가 열리는 그날 임시주주총회소집을 청구한 사실이 사내에 퍼지자 한층 더 강렬해졌다.나는 다시는,내 눈앞에서 그 누군가가 처참하게 무너지는것을 볼 용기가 없었다.그 몸서리치는 경험은 7년전 그 한번이면 족했다.

 

내가 원하지 않는 이 모든것을 주도하고있는 장본인이 바로 정동현이라는것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것인가.나는 그 사람을 나름 알고있다고 생각했었다.아니,적어도 그 사람은 조금이나마 퀸지 지사에 애정을 가지고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경영지원부가 해체되고 부장자리가 유명무실해졌을 때,회사를 떠나지 않고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그에게 조금도 감탄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하지만 그가 굳이 떠나지 않았던건,단순히 퀸즈지사에 대한 애정이나 미련때문이었을까.

 

그날 주영진이 정동현을 따라나가고,두 사람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나는 알지 못했다.아니,알 생각도 없었다.그처럼 잔인한 말을 해버리는 그에게 궁금증을 보인다는것마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그후 주영진은 몇번이나 단독으로 나를 찾아왔지만,항상 뭔가 말할듯 말듯 하다가 체념하는 눈치었다.나는 그런 주영진이 은근히 고마웠다.이미 내 모든 치부를 봐버린 그의 앞에서,마음속깊이 깔린 그 작은 궁금증만은 들켜버리고 싶지 않은것이 내 마지막 자존심이었다.주영진은 나의 자존심을 지켜주었다.

 

나의 이런 자존심을 지켜주는데에는 또 일부 사람들의 노력이 크게 한몫 했다.새롭게 재정비한 부서 치고 반년사이 이처럼 눈부신 성과를 거둔다는것은 퀸즈지사가 설립된 이래 처음이라고 사람들은 입을 모았다.이제 인터넷사업부는 시장운영부를 빼고 회사에서 두번째로 목소리를 낼수 있는 영향력 있는 부서가 되었다.권혜경과 윤지영은 머리를 건뜻 쳐들고 다녔고,화숙이는 령이와 은희를 데리고 새로운 도매거래처를 개발하느라 밤낮으로 바쁘게 지냈다.그바람에 기존의 업무들은 새로운 신입사원들이 맡아하게 되었고,그 신입사원들의 교육은 여전히 회사에서 별로 바쁘지 않은 내가 책임지기로 했다.

 

한매니저님,저 한가지 궁금한점이 있는데요...

 

입사한지 열흘밖에 안되는 향이가 눈을 반짝거리며 나에게 물었다.

 

왜 퀸즈는 지사들이 다 쇼핑몰을 운영하는데도 이렇게 자체쇼핑몰을 따로 두고있을까요?납품업체 관리나 운영관리만 해주면 더 쉬운게 아닌가요?

일종 피라미트식 운영방식이에요.

 

나는 향이가 알기 쉽게 종이에 간단한 금자탑 구조를 그려주었다.

 

퀸즈 각 지사 쇼핑몰들은 결제를 할때 수익의 일부를 본사 쇼핑몰에 결제되게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어요.이런 구축망은 지사에 대한 영업이나 판매관리가 훨씬 쉽게 이루어지게 하죠.이것이 본사 쇼핑몰이 자체 매출이 별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관리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 이유에요.

그럼 본사 쇼핑몰은 왜 우리 화남지사가 관리하고 있는거죠?

그건...내가 알기에는 원래는 화동지사에서 관리를 하고있다가 지금 대표님이 아닌 전대표님이 화남지사로 내려오시면서 그 경영권을 가지고 오신걸로 알고있어요.하청업체 관리나 공장오더 관리도 화남지사가 지역적으로 더 유리하긴 하니까요.

한매니저님은 어떻게 이런 세세한 부분까지 우리한테 알려주시는거죠?솔직히 권팀장님은...

 

향이는 잠깐 주위를 둘러보다가 누구도 없는것을 확인하자 다시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제가 조금이라도 물어보면 눈을 부라리시면서 아직 그것도 모르냐?혹은 그걸 니가 알아서 뭐해?이렇게 호통치시거든요.

 

나는 들고있던 볼펜을 돌려 향이의 이마를 가볍게 찔렀다.그리고는 피씩 웃었다.

 

입사하자마자 요런 이간부터 배우면 안되죠.열정은 높이 사고있으니 본인 일이나 열심히 하세요.

그럼...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물어봐도 돼요?:

 

나는 향이의 끈질긴 의지에 그만 웃으면서 두손을 들었다.

 

빨리 물어봐요.정말 마지막 질문이죠?

한매니저님은...진짜 곧 떠나는가요?

 

나는 웃음을 거두었다.나의 떠날 생각이 이런 햇내기 신입 사원에게도 읽혀졌다는것에 순간 당황했다.

 

어떻게...그건 왜 물어요?

권팀장님한테서 들었어요.한매니저님은 어차피 곧 떠날 사람이라고....그러니 한매니저님이 어떻게어떻게 가르쳤다 그런 말은 본인앞에서 일절 하지 말라고.

...

 

향이는 내 침묵을 다른 뜻으로 오해하고 급히 두손을 흔들었다.

 

이건 이간질이 아니에요.정말로 한매니저님 떠나시면 아쉽고 서운해서 그래요.우린 진짜 매니저님이 좋거든요.

 

나는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권혜경을 나무랄 일이 아니었다.그녀와의 면담에서 내가 한 말이었고,그것은 진심이었다.나는 그냥 그녀가 그것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였고,또 지금까지 부서를 위해 어깨곁고 노력해왔음에도 불구하고,어린 신입사원 앞에서까지 나를 이미 떠난 사람 취급했다는것이 잠시 섭섭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저녁이 되자 나의 이 섭섭함을 더해주는 또 하나의 인물이 등장했다.윤지영과 팔짱을 끼고 회사에 나타난 그녀로 인해 직원들이 잠시 술렁였다.긴 웨이브에 짤룩한 허리,털달린 모직 코트에 악어가죽으로 만든 백을 들고 이진희가 도도하게 부서안으로 걸어들어왔고,나는 내심 반가운 마음이 들었으나 어떤 인사를 건네야 할지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의 덤덤한 시선이 내게로 향하자 바로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에요,진희씨...

 

그녀의 시선이 잠시 내 얼굴에 머물렀다가 1초도 안되는 사이 바로 치워졌다.그리고 다시 무표정한 기색으로 부서안을 둘러보던 그녀는,윤지영이 서류들을 챙기자 방긋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요,우리.

 

진한 향수냄새를 남기고 그녀는 바람처럼 문밖으로 사라졌다.나는 서글피 입꼬리를 올리다가 천천히 시선을 떨구었다.이제는 더이상 이 회사의 그 어떤 인간관계에도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제는 진짜 떠나야 할 시간이 온것이다.


추천 (8) 선물 (0명)
IP: ♡.61.♡.97
HAUS (♡.191.♡.166) - 2013/12/02 15:32:48

읽고나니 웬지 허전한 이 기분
한정아씨한데 좋은 소식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권영주 (♡.42.♡.219) - 2013/12/04 23:38:10

하우스님,글이 많이 어둡게 흘러가고있죠?한정아도 행복해질 날이 있겠죠.다음회 기대해주세요~

난세가인 (♡.36.♡.145) - 2013/12/03 18:03:04

주인공남녀 애정전선에 위기는 서브남의 기회!! ..라고 생각하는 일인인데요...
대표가 된 이후에 웬지 옛날 정동현부장을 닮아가는 주영진씨가 안타깝고
예전에 둘 사이가 그리웠더랬어요.ㅋ작가님은 여주에게 감정이입해서
마음아플텐데 전 아직도 서브남주를 밀고 있어서 죄송해요. ㅋ
이 글 이제 막바지로 향해 가는거 같은데..
마무리 잘하구요. 담회도 기대할께요.^

권영주 (♡.42.♡.219) - 2013/12/04 23:44:39

난세가인님,글을 쓰면서 서브남주에게는 별로 기회를 주지 않는 성격이라 생각해보면 주영진이 억울하게 되었네요.^^막바지에 와서 조금 힘을 실어줄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아 있긴 한데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점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저는 감정에서 唯美라는 느낌을 좀 중시하는 편이어서요...정동현이 왜 여주에게 그런 느낌을 주었는지 좀 더 설득력있는 내용이 뒷받침해줘야 할거 같기도 해요.^^항상 읽어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해피투데이 (♡.70.♡.7) - 2013/12/03 20:46:36

저번에 여주가 업무배치를 한후
직원들의 적극성과 업무성과가 뚜렷하게 보이네요~
역시, 조직에는 리더가 중요한거 같아요.
그나저나 묘하게 굴러가는 사랑관계.
얼음장 부장은 여주의 가슴에 대못을 치고
주영진은 비밀을 지켜주는 남자다운 매너로
여주의 마음에 들어오는것 같은데...
아무튼 막상막하라서 감히 추측은 못하겠습니다.
근데 님의 글 특정상 결국에는 부장을 택할것 같은데 ㅎㅎ
그나저나 가슴에 칼을 품은 이진희가 드디어 나타나는군요.
캄캄한 여주의 내일이 휴~~
한숨 쉬면서 담집 기대합니다.
좋은 글 써줘서 감사합니다^^

권영주 (♡.42.♡.219) - 2013/12/04 23:56:38

해피투데이님,오랜만에 뵙네요.^^그동안 생계에 정신이 팔려 취미생활을 접을 지경에까지 이르렀네요.당분간은 너무 자주 오지는 못할거 같지만 올때마다 항상 이 마당을 지켜주는 님들이 반겨주시니 기분이 좋습니다.저의 글 특성상 부장을 택하겠지만,뭔가 그럴수밖에 없는 이유를 생각하느라니 머리가 아픕니다.님도 건필하시길 바라구요,이제 시간여유가 생기면 님의 역사소설을 마스터하여 그단락의 역사에 대한 이해를 한결 더 높이고 싶습니다.글 마무리 잘하시길 바랄께요.

천사LQve (♡.91.♡.127) - 2013/12/04 12:04:07

ㅠㅠ 언니 넘 오랜만에 나타나셨네~
앞의 내용이 가물가물할 정도...
그나저나 한 매니저님 가엾어라... 너무 외로워 보임다.. 주영진도 불쌍하고..
주영진과 정동현 부장 둘 사이에 또 무슨 얘기가 오갔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요즘 날씨에 참 잘 어울리는 분위기속의 한 단락인 것 같슴다.
다음집은 또 어떤 길로 나갈지 기대할게효~
날씨 쌀쌀한데 감기 조심하시공~ 언니 화이팅~^^

권영주 (♡.42.♡.219) - 2013/12/05 00:01:01

천사러브,좀 시간이 걸렸지?여러가지 일들이 생겨서 경황이 없었어.요즘 광주 분위기도 좀 많이 스산해.한동안 이런 우중충한 날씨가 지속될듯.차라리 좀 더 춥고 한랭한 겨울이 왔으면 좋겠어.^^너도 감기 조심하고 시간 날때 보자.^^

노벨과개미 (♡.214.♡.7) - 2013/12/04 15:50:44

작가님 오랜만이네요 ..
글을 읽으니 어쩐지 약간의 쓸슬한 감정이 밀려오네요 ..
회사란 대개 거의 다 사람들 사이가 냉냉하지만 그래도 서글픈건 어쩔수 없네요 ..
회사상황이 격하게 생생하게 다가와서 생각에 잠기네요

정아씨가 떠나는건 도피가 아닌가요 ..
7년전에도 도피엿다면 이번에도 도망치는거 아니엿음 좋겟네요
회사란 어디가나 다 마찬가지니깐요 ..
어디에도 진심이 통하기 어려운 곳 아닐가요

정부장 이번집 정말 맘에 안드네요 ..
차라리 주영진을 응원하고싶어지네요
드라마에서 항상 짝사랑하는 사람이 맘에 걸렸는데
이번에 작가님 주영진이랑 맺어주면 알될가요 ....

권영주 (♡.42.♡.219) - 2013/12/05 11:04:03

노벨과개미님,정말 오랜만이네요...한정아는 인간관계에 대해 아직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것 같습니다.어쩌면 님의 말 그대로 도피일수도 있어요.이번은 그 어떤 계기로 도피를 끝내고 제대로 현실을 직시할수 있었으면 좋겠네요.^^주영진을 응원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니 정부장 좀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될거 같네요.ㅋㅋ그리고 짝사랑하는 사람들도 좋은 결실이 있게 되지 않을까요.^^

(♡.166.♡.45) - 2013/12/04 18:09:42

오랜만이네요
항상 재밋게 읽고잇어요

권영주 (♡.42.♡.219) - 2013/12/05 11:04:43

풀님,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글을 너무 끌어서 죄송스러운 마음뿐입니다.ㅠㅠ

빙점 (♡.124.♡.208) - 2013/12/05 12:56:13

정동현팬입니다. 잘 읽고 갑니다.

권영주 (♡.42.♡.166) - 2013/12/07 15:35:57

빙점님,저도 정동현팬입니다.ㅋㅋ항상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황금단 (♡.238.♡.80) - 2013/12/05 21:39:38

언니~년말이라 많이 바쁘시죠? 바쁜시간 내서 이렇게 올려주신글 잼있게 읽었습니당.
요번집은 일고 나니 좀 씁쓸하네요.
정동현이과 주영진의 싸움(?)에 한정아가 가운데서 다치는거같아 걱정되네요.
7년전의 그 사건이라을 자꾸 떠올리며 떠날생각하는 한정아에게
짠~하고 좋은 일과 이쁜 사랑이 찾아오길 바래봅니다.
쉽게 허무하게 떠날 한정아가 아닐것같아요.
담집에 모든게 다 밝혀지진 않겠지만ㅋㅋㅋ
그래도 또 기대해봅니당.
올한해 남은 한달 마무리 잘하시고 추운 겨울 감기조심하세요^^

권영주 (♡.42.♡.166) - 2013/12/07 15:38:13

황금단,년말이라 바쁜건 아닌데 요즘 하던 일에 사고 좀 터져서...수습하느라 정신없었어.한정아가 떠날 생각을 하는거 보면 파랑새 특성과 어울리긴 하는듯.이젠 왜 그런 버릇이 있게 되었는지 밝혀질 때도 온거 같아.항상 들려줘서 고맙고 너도 한해 마무리 잘하길~^^

newsky (♡.239.♡.170) - 2013/12/06 09:49:43

너무 오랜만이네요 권영주님...많이 바쁘신가봐요?
자작방에 들릴때면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글이라서 여간만 반갑지 않네요.
정부장님이랑 정아씨 또 이렇게 엇갈리는건가요?결과가 해피엔딩일거라 믿고 있어서 요런 모순들도 다 잘 풀어가겠지 생각하고 있어요.
빨리빨리 결과를 보고 싶은 급한 마음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기다리며 읽는것이 나름대로의 묘미가 있네요.
감기조심하시고 건필하세요~^^

권영주 (♡.42.♡.166) - 2013/12/07 15:45:18

newsky님,오랜만이네요.요즘 하던 일에 문제가 좀 생겨서 수습하느라 바빴어요.^^글이 너무 늦어져서 죄송한 마음뿐이네요.결과가 해피라고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저도 그렇게 쓰기에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시간 있으시면 님 좋은 글도 기대해도 될까요~

22,953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보라
2006-08-09
33
63724
해피투데이
2013-12-22
0
507
금독수리
2013-12-22
0
878
금독수리
2013-12-22
0
1283
여자의맘
2013-12-20
4
2215
여자의맘
2013-12-20
1
1953
닝멍77
2013-12-19
3
1202
킹마더
2013-12-18
4
1799
여자의맘
2013-12-18
2
2163
짱 부자
2013-12-16
2
1069
여자의맘
2013-12-16
1
2221
Blue07
2013-12-14
2
1210
여자의맘
2013-12-14
1
2217
여자의맘
2013-12-13
1
2562
xingyu
2013-12-13
3
900
MtotheK
2013-12-12
0
1194
여자의맘
2013-12-12
2
2326
여자의맘
2013-12-11
1
2745
여자의맘
2013-12-10
0
3219
후회없다
2013-12-06
2
1482
후회없다
2013-12-06
0
4127
행복하네
2013-12-05
4
1531
Blue07
2013-12-04
4
1567
xingyu
2013-12-03
3
891
특별한사람
2013-12-03
3
2464
고소이
2013-12-02
3
824
권영주
2013-12-02
8
1278
Blue07
2013-12-01
1
1183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