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조선족자치주의 개황

ion | 2003.03.03 02:07:17 댓글: 0 조회: 23613 추천: 47
분류연변조선족자치주 https://life.moyiza.kr/yanbian/1198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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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의개황

지리적위치:

  중국 동북 길림성 동부에 위치해 있는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중국,로씨야,조선 3국 접경지대에 위치해있고 동해에 린접해있 다.동부는 로씨야와 이웃하고 변경선의 총길이는 232.7km이며 남 부는 조선과 이웃하고 변경선의 총길이는 522.5km로서 중국동북의 대외련결의 중요위치를 차지하고있을뿐만아니라 구라파-아세아대 륙의 중심지역이다.그리고 중국과 조선,한국,일본 등 나라와 래왕 함에 있어서 제일 가까운 지역이다.연변은 동해와 제일 가까와 15km떨어져있고 로씨야의 보세르만과 다만 41km떨어져있다.개방도 시 훈춘은 동해연안의 주요항구-로씨야의 보세르,자루비노,해삼 위,조선의 라진,청진,한국의 속초,부산,일본의 신슈꾸,아까다 등 항구와 제일 가까이는 42km떨어져있고 제일 멀어서 해삼위를 지나 로씨야 적탑일대를 지나가는데 해삼위를 지나 서부 씨비리아 철 도를 에돌기보다 1500km단축된다

행정구역:

  1952년 9월 3일에 성립된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총면적이 42, 700평방키로메터에 달하고 연길,훈춘,도문,돈화,룡정,화룡 등 6개 시와 왕청,안도 2개 현을 관할한다.주정부소재지는 연길 이다.

기후조건:

  연변의 기후는 중온대 습윤성계절풍기후에 속하여 봄이면 건조하고 바람이 많으며 6월부터 8월까지 비가 많고 가을이면 시원하고 겨울이면 충위가 심하다.년평균기온는 섭씨 2-6도이고 제일 추운 기온은 섭씨 령하23-34도이며 제일 더운 기온은 섭 씨 34-38도이다.년일조시수가 2150-2480시간이고 년강우량이 40 0-650mm이다.강우량이 6,7,8월 3개월에 집중되여 전년강우량의 60%를 차지한다.년평균바람속도는 2-4m/초이다.

인구와 취업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총인구는 220만명이다.그가운데서 조선족인구는 85만 4천명으로서 전 주 인구의 39.7%를 차지 하고 한족인구는 전 주 인구의 57.4%를 차지하며 기타 소수민 족으로는 만족,회족,몽골족,좡족 등이다.인구증가률이 0.4%이 다.연변의 도시문화정도는 보다 높고 비농업인구가 124,3만명 에 달한다.연변에는 량호한 훈련을 받은 숙련된 로동력이 많 고 비용도 중국연해지구보다 낮다.근년래 해외투자가 많아짐에 따라 연변로동생산률도 부단히 제고되고있다.1997년 전 주에는 12만 4천명의 각 부류의 과학기술일군이 있는데 그중 자연과학기 술일군은 7만 3천명에 달한다.이외 해외로무사업에 종사하는 과학 기술일군이 2만명이다.연변은 만명당 3037명이 대학문화정도에 달하는바 전국비례의 2.1배로서 길림성평균수치보다 훨씬 높다. 로동자들의 소질은 우리 나라 많은 지구보다 높기에 선진기술과 과학적관리경험을 쉽게 접수할수 있다.

자연자원:

  연변의 삼림면적은 347.2만헥타르이고 삼림피복률은 78.2%이며 림목축적량은 3.32억립방메터이고 120여가지의 목본식물이 자라 고있다.주로 홍송,백송,모래불송,락엽송,가문비나무,달피나무,봇 나무 등이다.
  연변은 광물자원이 풍부하다.금속광물자원으로는 연,아연,동, 알루미늄,망간,몰리브덴이 위주이다.비금속광물로는 석탄,석유( 저장량이 1억톤),모래암,용수정,운모,고령토,세멘정초,안산효암 ,규소토 및 석규석 등이다.전 주적으로 이미 탐사해낸 석탄저장 량은 12억톤에 달한다.현재 석탄의 년생산량은 414만톤이고 년 발전량은 23.67억키로와트시로서 전력이 충족하다.140만키로와트 의 발전능력을 구비한 훈춘발전소는 이미 20만키로와트의 발전능 력을 구비하였고 60만키로와트의 2기공정은 국가계획에 들었다.
  연변에는 하천이 많다.전 주에는 크고 작은 하천이 487줄기로 서 물에네르기 매장량은 140만키로와트에 달한다.목전 물에네르 기 실제 리용량은 4.7만키로와트이고 건설중에 있는 장비량은 8. 5만키로와트이며 전 주의 수력자원잠재력은 아직도 상당히 크다.
  연변의 지방특산물은 비교적 풍부한바 야생동물은 500야종,야 생경제식물은 1500여종이다.인삼,록용,담비는 <<동북의 3가지 5 보배>>로 불리우고있다.연변은 중국의 저명한 약재 보물고의 하 나이다.중외인의 주목을 끄는 세계원시상태의 완정한 자연종합체 인 장백산과 두만강하류의 <<한눈에 3국이 안겨>오는 변경유람지 역은 국내외 유람객의 유람명승지이다.

경제발전상황:

  공업은 이미 일정한 토대를 갖추었다.동북아구역개발과 경제발전을 추진하는 인력,물질적토대를 튼튼히 갖춘 연변은 장기적으로 투자할 리상적지역이다.
  997년 연변 전 주의 국내총생산치는 112억원 인민페로서 1996년보다 5.1% 장성했다.전 주의 국내 년평균 총생산치는 5127원,제3산업의 증가 액은 46.7억원으로서 국내총생산액의 41.6%를 차지하며 공농업총생산치 는 110억원에 달하여 전해보다 4%장성되였으며 전 주의 매인당 사회상 품생소매액은 2884원이다.
  연변공업은 구전하여 특색있는 공업체계가 이미 형성되였다.목재가공 ,제지,의약,식품,담배,방직,에네르기,건재,화공 등 십여가지 중점항업 과 연길담배공장,개산툰화학섬유팔프공장,석현종이공장,연변오동약업집 단회사,연변석유화학본공장,연길늄업집단회사 등 국내,성내에 이름난 대기업들이 일떠섰다.
  연변의 시장체계건설은 온당한 발걸음을 내디디고있는바 전 주에는 경공업품시장 183개,상업망 75개,생산자료시장 20개,금융시장 2개,부동 산시장 4개,인재 시장 6개,로무시장 8개,과학기술시장 7개,정보시장 3 개,증권시장 1개가 있다.전주 실업보험에 참가한 국가소유기업소가 99% 에 달하고 인원수는 96%,집체기업소가 97%,인원수가 85%에 달한다.
  연변경작지면적은 23만헥타르,주요농작물은 벼,옥수수,콩이다.1997년 량식총생산량은 65만톤이고 이미 돈화,룡정 2개 상품알곡생산기지가 초보적으로 형성되였다.기타 농작물로는 아마,잎담배,남새,과일,버섯 등이다.인삼은 특산물로서 특수공예작물로 재배되고있다.
  연변의 림업생산은 립체개발,다종경영,회전발전의 새 길을 개척하였 는바 1997년 총조림면적은 4015헥타르,저산림개조면적은 7141헥타르,산 발적인 식수는 84.6만그루이다.련속 16년간 큰 삼림화재가 없었다.
  연변의 목축업발전은 상당히 신속하고 전업사양수준은 진일보 제고되 였다.1997년 육류총생산량은 5.5만톤에 달한다.제일 많이 사양하는것은 닭,오리,소,돼지,양,토끼,사슴 등이다.소사양은 40만마리,돼지는 29.8 만마리,가금은 367만마리로 발전했다.어업발전도 상당히 빠른바 1997년 수산품생산총량은 3700만톤이다.
  대외경제무역도 새로운 발전을 가져왔다.1997년 전 주 대외무역수출입 총액은 2.3억딸라에 달하여 전해보다 8.3%장성되였다.그중 수입총액은 1.1억딸라에 달하고 수출총액은 1.2억딸라이다.
1997년까지 전 주에는 비준설립한 외상투자기업소가 682개,외자실제리용 액은 4.1억딸라,그중 공업항목이 514항으로서 총외상투자기업소의 74.5% 를 차지한다.
  외상투자의 주요항업은 목재가공,식품,음료수,화학공업,약품,방직,복장 ,건축재료 등이다.외국상인이 투자한 가운데서 합자기업소가 387개,합작 기업이 79개,독자기업소가 216개이다.투자래원은 향항(88개),대만(78개) ,조선(37개),일본(68개),필리핀(2개),싱가포르(4개),한국(393개),로씨야( 6개),미국(39개),오스트랄리아(2개),오문(1개) 등 국가와 지구이다.

유람관광:

  연변은 독특한 자연인문경관을 가지고있다.웅위롭고 풍경이 독특하 고 경치가 아름다운 장백산은 이미 중외의 이름난 유람명승지로 되였 다.주요한 유람구는 백운봉,천지,폭포,온천군,미인송과 <<닭이 울면 3국이 듣고 개가 짖으면 3개 변경이 듣는>>변경풍모이다.
  목전 연변에 이미 개발된 8개 유람구로는 장백산경치관광유람구,연 길민속유람구,훈춘변경경치유람구,룡정력사유적유람구,두만강변경유람 구,화룡룡왕산유람구,돈화륙정산유람구 등이다.이미 개통된 12개 유람 업종은 장백산풍경유람구,장백산동기설산유람구,원지만족발원지유람, 연변조선족자치주민속유람,중조변경유람,중국-로씨야변경유람,두만강 수상유람,발해고대유적유람,룡정력사유적유람,화룡약물보건유람,직승 비행기항공유람,사냥유람 등이다.주요유람지는 장백산풍경,장백산천지 ,장백산 폭포,거룡천(온천),은환호(소천지),곡지림해(지하살림),천녀 욕궁지(원지),방천풍경,화룡선경대,돈화정각사,연명호,룡정민속 박물관 ,안도홍기촌,도문교두국문 등이 포함된다.

옌지

延吉

(병)Yanji (웨)Yenchi.

중국 지린 성[吉林省] 동부의 도시.

현급(縣級) 시로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의 행정중심지이며, 북한-중국 국경지역의 북부 산악지대에 있다. 주민의 절반 이상이 조선족이다. 19세기말까지 옌지의 대부분이 미개발지역이었다. 기본적으로 기름진 두만강 유역과 창바이 산맥[長白山脈]의 험준한 산줄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1820~50년에 중국인들이 불법적으로 이주해와서 살았으며, 1860년 중국정부는 러시아가 이곳을 잠식할 수도 있다고 판단하여 이곳을 먼저 차지하기 위해 이주금지조치를 해제했다. 그러나 이곳은 지리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중국인은 소수가 이주해온 반면, 수많은 조선인이 이주해왔다. 1885년 특별관청이 설치되어 조선인 이주자들을 통제하고 세금을 거두었다. 1895년 옌지 현이 설치되었다. 이 지역은 처음에는 한국과 중국 간에 국경분쟁이 일어났던 곳이며, 1905년 일본이 한국을 강점한 뒤부터는 일본과 중국 사이에 끊임없는 국경분쟁이 일어났던 곳이다. 1930년대 일본 점령하에 투먼[圖們]에서 서쪽으로는 지린까지, 북쪽으로는 자무쓰[佳木斯]까지 철도가 개통되었다. 이 철도는 이 지역 발전에 큰 몫을 했는데, 그뒤 창바이 산맥의 삼림을 개발하기 위한 연장 노선이 건설되었다.

옌지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요한 상업 중심지이며, 주변 농업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의 집산지이다. 식품가공·도정(搗精)·착유(搾油)·아마가공 공장 등과 도자기·가구·편물을 비롯한 수많은 소비재 생산공장들이 있으며 농기구도 생산한다. 제2의 산업 중심지는 남서쪽으로 15㎞ 떨어진 룽징[龍井]으로, 여기에는 기계제작·제지소·발전소 등이 있다. 옌지는 중국 내 소수민족인 조선족의 중요한 문화 중심지이며, 한국어 라디오 방송국과 신문사가 있다. 의과대학과 기타 일반 단과대학으로 구성된 연변대학교가 있다. 인구 240,300(1987).

경제

연변조선족자치주는 풍부한 천연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지리적으로 러시아·한반도가 인접해 있어 대외무역에 유리한 경제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자치주에는 29가지 공업 분야의 각종 업종에 1,390여 개소의 공업 기업소가 있으며 풍부한 삼림·광물·수력 자원을 이용한 임산·야금·제지·석탄 공업이 주로 발전했으나, 1987년 이후부터는 연변전자공업공사가 설립되는 등 기계·전자 분야의 발전이 두드러지고 있다. 농업분야에서는 수확고가 평균 60만~70만t에 달하며 주요농작물로는 잎담배의 연간 생산량이 2만 5,000t, 원삼(元蔘)은 1,000여t, 과일은 15만t 정도를 생산하고 있다. 이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과수원을 보유하고 있는 연변의 특색 가운데 하나이다. 상업은 국영상업(8개 업종에 342개의 독립 채산단위 및 538개의 영업소가 있음)과, 농산품의 유통을 담당하는 합작 상업조직으로 '공급판매합작사'가 있으며, 생산물의 유통은 최근 확대되고 있는 도시와 농촌의 시장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연변은 변경지역이라는 지리적 특색으로 인하여 대외무역이 비교적 활발하다. 무역교역국은 1991년 현재 20여 개국에 달하고 연간 외화수입은 1,500만 달러 정도이다. 해산물·쌀·목재·고무·강재·화학·공업 원료 등을 포함해서 140여 가지 정도를 수입하고, 수출품목은 기름과 식료품이 31.6%, 축산물과 지방 특산물이 15.8%, 경공업과 방직업이 35.1%, 화학공업·기계전기제품 17% 등이다.

교육

초기의 교육상황은 주로 전통적인 서당교육을 통하여 초등수준의 교육을 실시했으나, 점차 근대적인 성격의 학교가 설립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조선이 사실상 일본의 통치권에 들어가자, 1906년 이상설이 룽징에 서전서숙을 세웠으며, 이후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반일 민족교육기관이 계속 설립되었다. 또한 1932년에는 항일유격정부인 노동민주정부가 '소학교의무교육법'을 발표하여, 일제의 황국신민화정책에 저항하기도 했다.

1952년 9월 3일 연변조선족자치주가 공식적으로 인정되면서, 1950년대에는 초·중등교육의 확대보급, 단일민족학교 설립, 교원양성과 교과서편찬사업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정책이 실시되었다. 그 결과 1965년 소학교는 1,274개교, 중학교 278개교, 중등전문학교 5개교, 대학 3개교로 확대되었다. 1966년 이후 10년에 걸친 문화혁명은 연변지역의 교육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쳐 각종의 민족학교들이 해산되어 조선인의 취학률이 80%에서 30%로 감소했으며 조선어교육을 폐지하고, 연변 지역에 제공되던 교육재정보조가 취소되는 등 교육여건이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문화혁명이 끝난 후 1982년 9월 자치주 교육국에서 '연변교육 30년'을 발표하여 민족 교육을 재건하려는 방침을 제시했다. 초등교육 부문에서는 조선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단일민족학교 운영을 재개하면서, 조선어교육을 강화했고, 초등교육확대정책이 실시되었다. 중등교육 부문에서는 사범교육이 확대되었고, 위생학교·경찰학교·예술학교 등 다양한 중등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고등교육 부문에서는 학교 규모의 확대와 전공학과를 증설하는 조치가 취해졌고, 본과생 중심의 교육에서 연구생·본과생·전과생의 3단계 교육으로 변화되었다. 또한 성인고등교육기관·과학연구기관 등의 부속기관이 설치되었고, 1989년에는 연변만이 아니라 중국 최초의 사립대학인 연변과학기술대학의 건설공사가 착공되어 진행중이다. 이 대학은 한국 민간단체의 지원을 받은 학교로 1993년 9월에 개교할 예정이다. 1991년 현재 소학교는 1,302개교(학생 27만 580명, 교원 1만 3,300명), 중학교는 241개교(학생 19만 1,330명, 교원 1만 3,980명), 중등전문학교 9개교(학생 3,998명, 교원 776명), 대학 5개교(학생 5,959명, 교원 2,316명) 등이 있다.

문화

연변 조선족자치주의 문화적 특징은 중국의 소수 민족으로서 조선족의 문화적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의식주 생활과 관혼상제의 의식에서 고유한 조선족의 문화적 풍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자치주는 1991년 현재 문화(예술)관 9개소, 문화분관 8개소, 문화소 115개소 등의 대중문화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1956년 이후 자치주 내의 각 시·현에는 전문 문공단이 설립되었고, 1991년 현재 13개의 전문 예술공연단체가 있다. 이들의 공연활동은 각종 경연대회를 열기도 하지만 예술 공연, 미술·사진 전람회도 개최하고 있다. 문화단체는 1953년 7월 결성된 연변 문화예술계연합회(연변 문련)를 비롯하여 연변작가협회·연변음악가협회·연변희극가협회·연변미술가협회 등이 있고, 문화유산을 보호·관리 및 발굴하는 업무를 관장하는 문화유물관리위원회가 있다. 이밖에 연변박물관, 연변조선족민속박물관, 룽징 시 민속박물관, 그리고 둔화·훈춘·허룽·룽징 등의 시와 현 문화유물관리소가 있다. 연변박물관은 고대 역사유물 5,400여 점, 민속문물 2,000여 점, 혁명유물 3,000여 점 등이 있다. 특히 1973년 허룽 현 팔가자북대(八家子北大)의 발해 옛 무덤군에서 발굴된 구리거울, 유약이 칠해진 손잡이 달린 단지, 금으로 도금된 물고기 모양의 장식품, 도기와 벼루 등은 국가의 1급품에 속한다. 또한 연변박물관에서 자체로 발굴한 발해국 정혜공주 묘에 있는 발해 벽화는 귀중한 유물로 평가받고 있다.

언론출판

1991년 현재 연변에서 발행되는 신문의 총수는 35종이며, 매기당 총발행부수는 36만여 부이다. 이들 중 〈연변일보〉는 자치주에서 가장 먼저 창간되었다. 자치주 내의 출판사는 4개사, 잡지사는 7개사, 인쇄공장은 모두 120개사로 이 가운데 연변 신화인쇄공장은 1984년 제판과 인쇄 및 제본에 자동화를 실현했다. 1988년 1년간 자치주 내에서 발행된 도서의 양은 1,394만 권이다.

연변의 라디오 방송은 '연길신화방송국'으로 출발했다. 1948년 '연변인민방송국'으로 개칭되었고, 1956년부터 중국어 지방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조선말 방송과 동일한 주파수로 나누어 방송했다. 이외에 1991년 현재 자치주에는 4개의 무선방송국과 8개의 무선중계방송소가 있다. 텔레비전 방송은 1973년부터 시작되었고, 텔레비전 수상기 보급 수량은 1991년 현재 약 30만 대에 이르고, 연변 텔레비전 방송국에서는 매일 3시간 30분씩 방송하고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중국 지린 성[吉林省]의 동남부에 있는 연변지방(이전의 간도지방)에 성립된 중국 내 유일한 조선족자치주.

자치주내 조선족은 81만 5,000명으로 전체 인구의 40.7%를 차지하고 있다. 행정적으로는 옌지[延吉]·투먼[圖門] 등 5개시와 3개현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변지역은 조선시대말부터 조선족이 이주하여 개척한 곳으로 일제시대에는 독립운동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1945년 8월 20일 소련군과 동북항일연군은 간도 임시정부를 수립했으나, 그해 11월 중국공산당은 간도 임시정부를 해산시키고 '연변행정독찰 전원공사'를 설치했고, 1948년 3월 연변전구를 창립했다. 그후 1952년 9월 3일 연변전구가 철폐되고 '연변조선족자치구'가 설립되었으며, 1955년 12월 연변조선족자치구를 '연변조선족자치주'로 승격되었다. 당시 자치주는 1개시와 5개현을 관할했으며, 자치주 소재지는 옌지였다. 1958년 10월 지린 시[吉林市]에서 관할했던 둔화 현[敦化縣]을 연변에 귀속시켰다. 1965년 5월 옌지 현 투먼 진[圖門鎭]과 왕칭 현[汪淸縣], 스셴 진[石峴鎭]을 합하여 투먼[圖門市]를 설립했다. 1985년 5월 둔화 현을 둔화시로 고쳤고, 1988년 7월 훈춘[琿春]·룽징[龍井] 2개현이 시로 승격되었다.

1991년 현재 연변 조선족자치주는 옌지·투먼·둔화·룽징·훈춘 허룽 등의 6개시와 안도·왕칭의 2개현을 관할하고 있으며, 자치주의 소재지는 옌지이다. 연변 조선족자치주의 행정조직은 도시가두판사처 16개, 도시주민위원회 735개, 향(鄕)·진(鎭) 109개(그 가운데 진이 39개), 촌민위원회 1,394개, 자연촌 2,642개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 4만 2,700㎢, 인구 약 2,000,000명(1988).

연변조선족이 도시로 대규모 이동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90년대>

- 조선족들이 중국에 동화되는 것이 문제인 이유는.

<중국어도 알고 한국어도 아는 사람들이 많아야 중국의 국가 이익에도 부합한다. 만주족 이 동화됐는데, 만주족은 원래 중국인들과 문화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족은 문화적으로 많이 다르고 우리 부모들이 이 문화를 지키려 애썼는데 동화되면 많은 문제들이 파생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 어떤 문제인가.

<우선 민족교육에의 영향을 꼽을 수 있다. 도시로의 급속한 인구진출은 농촌의 붕괴를 의 미한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조선족소학교는 85년 4백 19개였는데 95년에는 1백 77개로 줄 었다. 중학교는 1백 18개에서 49개로 줄었다. 이는 한국어를 할줄 아는 조선족의 감소를 의 미한다.>

- 한국업체들의 진출이 조선족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지 않았는가.

<소득을 늘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 함께 부정적인 결과도 초래했다. 중국에서 연 변이 <한국화> 된다는 비판이 나올 경우 <한국화> 라는 말속에는 향락 풍조나 고물가 현 상 등도 포함된다. 향락풍조의 전파는 심각하다. 가라오케 바의 급속한 증가가 그 상징이다. 연길의 가라오케 바들이 한국인들을 상대로 하는 것들이지만 조선족들도 자주 찾는다 가라 오케 바의 경우 여급에게 주는 팁만 200원(한국돈 2만원 가량)이다. 중국에서 정교수 한달 월급이 8백원이다. 그런데 가라오케 바에 가서 술 한번 먹고 1만∼만원씩 쓰고 나온다. 일상 생활에서도 조선족들은 과소비와 낭비들이 심해졌다. 예전에는 벼농사를 하는 조선족들이 옥수수 농사를 하는 중국인들보다 잘 살았다. 요즘에는 조선족들보다 중국인들의 저축이 더 많은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 북경 등 대도시에 진출한 조선족들의 상황은.

<북경인구 1천1백만 가운데 조선족은 3만 여명에 불과하다. 그런데 북경에 등록된 가라오 케바 1백 80개소 중 1백 60개소가 조선족 소유이다. 이들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물 론 농촌 진출 조선족들 많다. 올 봄 북경당국에서 범죄타격운동을 벌려 매춘부를 구속했는 데 3분의 1이 조선족이다 옛날 조선족 여성들이 북경으로 관광 갈 때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조선족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다녔다. 부분적 청년들도 도시로 진출한 후 적지 않게 범죄 로 빠진다.>

- 조선족에 닥친 위기를 극복하는 방안은.

<우리 부모들이 처음 만주 땅으로 이주해왔을 때와 상황이 비슷하다. 당시 중국인들은 조 선족들이 일본군국주의를 따라 들어왔다며 불신했다 일본측은 독립운동을 벌리는 조선족들 을 가장 심하게 탄압했다. 요즘 중국인들의 조선족에 대한 시각이 부정적으로 변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불법체류, 선상반란 사건 등을 이유로 조선족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결국 조선족 자체의 노력으로 이 같은 위기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선 우리 언어를 잃지 않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조선족 청년들에 대한 언어 교육이 확대돼야한다 그리고 이들이 취업 해 자리잡을 수 있도록 기술교육을 해야 한다. 한국이 민간차원에서 조선족의 교육을 지원 해 주길 희망한다.>

조선족의 분포 및 그 특점

차철구

조선족의 이주과정은 곧 조선족의 분포과정이다. 동북아지역의 조선족은 이주, 재이주, 분포, 재분포의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일본투항이후 미군이 일본과 한국을 점령하였다. 그때 미군점령군당국은 주로 재한국일본교민과 재일본한국교민 문제를 처리하였다. 통계에 따르면 전후 재한일본교민은 거의 귀국하였다. 그때 상당부분의 재일교포들은 조선반도로 되돌아갈것을 요구했었다. 1945년 10월부터 1947년 9월까지 이태사이에 미국은 조선남부로 재일교포 110여만인을 되돌려보냈다. 그외 약 70~80만인은 그냥 일본에 남아 있었다. 이부분 사람들의 《법률지위》문제에 대하여 한국과 일본은 장기간 단판하여 왔으나 1965년 쌍방이 《관계정상화》를 실현해서야 해결은 받았다. 재일조선족들은 일본경내에 쫙 널려 있는데 주로 서해안지역과 혹가이도에 분포되여있다. 이를테면 돗또리, 오까야마, 야마구찌, 후꾸오가, 나가사끼, 가나자와, 후꾸이, 이시까와, 도야마, 니이가다, 아끼다 등지이다.

구쏘련 인구통계에 따른면 전후 구쏘련의 조선족인구는 1959년에 31만 3,000여인; 1970년에 35만 7,000여인; 1979년에 38만 9,000여인이다. 구쏘련과학원 민족연구소의 쓰 이 쁘로끄의 저작《세계인구》에 따르면 1983년 재구쏘련 조선족인구는 40만인에 달한다. 1970년의 통계에 따르면 쏘련의 조선족이 로씨야에 10만 3,100여인, 까자흐스딴에 8만 5,000여인, 우즈베끼스딴에 14만 7,500여인, 끼르끼쯔끼스딴에 9,400여인, 따쥐끼스딴에 8,400여인, 뚜르메니끼스딴에 3,500여인이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후 민족압박을 제거하고 민족평등을 실현하고 또 민족구역자치를 실시했기에 조선족은 중화민족의 일원으로 되여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에 적극 뛰여들었었다.1953년(제1차인구조사) 중국족선족의 인구는 112만 569인이고 1982년(제3차인구조사)에는 176만 5,204인이였다. 1982년은 1953년에 비해 57.5% 장성했다.

우리나라 조선족인구는 주로 동북3성과 내몰골자치구에 분포되여있다.

1982년 동북3성의 조선족인구는 도합 173만 3,970인(료녕성 19만 8,252인, 길림성 110만 4,074인, 흑룡강성 43만 1,644인)으로서 전국 조선족총수의 98.2%를 차지했다. 그중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조선족인구는 75만 4,567인으로서 전국조선족인구의 42.77%를 차지했다. 내몽골자치구의 조선족인구는 1만 7,580인, 기타 성, 구의 조선족인구는 1만 3,367인이다.

1990년 제4차 인구조사에 따르면 전국 조선족인구는 192만 597인으로서 전국 총인구의 0.169%를 차지, 그 절대치는 전국 56개 민족가운데서 17위를 차지했다. 제1차인구조사때부터 제4차인구조사때까지 37년간 조선족인구의 평균성장률은 1.5%로서 전국 평균장성속도인 1.8%보다 낮았다.

동북3성의 조선족인구는 186만 4,760인(그중 료녕 23만 378인, 길림 118만 1,964인, 흑룡강 45만 398인)으로서 전국조선족총인구의 97.09%를 차지했다. 내몽골자치구의 조선족인구는 2만 2,641인으로서 전국의 1.178%를 차지하고 기타성, 구의 조선족인구는 2만 2,641인으로서 전국의 1.178%를 차지했다. 동북3성에 조선족이 1만인이상인 시, 지구(인구에 따라 배렬)로는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길림성 길림시, 흑룡강성 목단강시, 길림성 통화지구, 흑룡강성 송화강지구, 료녕성 심양시, 흑룡가성 가목사시, 료녕성 무순지구, 흑룡강성 계서시, 길림성 백산시, 료녕성 철령지구, 흑룡강성 이춘시, 료녕성 본계시 등 19개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우리나라 조선족의 가장 큰 집거구이다. 1990년 전 주 조선족인구는 82만 1,479인으로서 전 주 인구의 39.5% 차지, 전국 조선족총인구의 42.77%이다. 전 주 8개 시, 현의 조선족인구분포(인구에 따라 배열)를 보면 룡정시 18만 3,994인, 연길시 17만 7,547인, 화룡시 13만 6,894인, 훈춘시 9만 2,100인, 왕청현 8만 5,049인, 도문시 6만 9,166인, 안도시 2만 4,745인이다. 다른 한 조선족자치지방인 장백조선족자치현의 1990년 조선족인구는 1만 4,508인으로서 전 현 총 인구의 16.7%를 차지한다.

이상 분석으로부터 볼수 있다싶이 동북아지역 조선족 인구분포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특점이 있다.

1.인구가 상대적으로 집중되였다.

중국조선족은 98%이상의 인구가 동북3성과 내몽골자치구에 집중되여있고 구쏘련의 조선족은 99.5%의 인구가 로씨아와 중아세아 4개 나라에 분포되여있다. 재일조선인은 주로 서해안지역과 혹까이도에 분포되여있다.

조선족인구가 상대적으로 집중되여 있는것은 조선족의 벼농사를 짓는것과 밀접한 련관이 있다. 조선인들은 이주해들어 온후 논 관개와 개발에 유리한 대소하천류역과 평원지역을 찾아 자리를 잡았던것이다. 비교적 집중하여 거주했기에 조선족들은 민족 향심력과 응집력이 매우 강하다.

2.대부분이 변계에 거주하고 있다.

우리나라 조선족이 비교적 집중된 지구, 시, 현은 대다수가 중, 로, 조 3국변계에 위치했다. 이를테면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중, 로, 조 3국변계에, 길림성 장백조선족자치현, 집안현, 료녕성의 단동시는 중조변계에, 흑룡강성 목단강시, 가목사시, 계서시와 내몽골자치구, 만주리시는 중로변계에 위치해있다. 상술한 지역의 조선족인구는 동북조선족총인구의 62%좌우 차지한다.

조선족은 또 다수가 철도연선과 철도와 가까운 주위에 거주, 인구는 변계로부터 내지로 들어오면서 점차 줄어들었다. 구쏘련의 조선족은 당초 구쏘련의 극동지역에 분포되여있었는데 후에 우리나라와 린접한 지역과 중아시아지역에로 확장되였다. 그것은 10월혁명후와 제2차세계대전전야에 국제국내형세의 핍박에 못이겨 대량의 조선족들이 구쏘련의 내지로 재차 이전했기 때문이다.

중, 로, 조 3국 조선족들이 이웃하여 가까이 거주하고 교통이 편리한데다가 또 바다를 사이두고 일본과 마주하고있기에 변계 민간사이의 상호래왕은 100여년 력사를 갖고있다. 구역경제협력이 발전됨에 따라 각국 조선족지간의 련계는 더한층 발전하게 될 것이다.

3.특수한 인적관계가 있다.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조선족의 가장 큰 집거구인 연변조선족자치주에는 아직도 교포, 교포가족, 친족들이 5,000여인 있다. 조선족가운데는 조선, 구쏘련, 일본 등 나라인들과 친밀한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적지않다. 중, 로, 조 3국 교접점에 있는 훈춘시에는 조선과 혈연관계가 있는 사람이 1만 5,000여인, 일본과 혈연관계가 있는 사람이 1,000여인, 로씨야교포가 5,000여인 된다.

실천이 증명하다싶이 이런 특수한 인적 관계는 구역 경제협력발전을 추진하는 홀시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다.

4.전문가 학자 사회명인과 갑부들이 적지 않다.

구쏘련의 조선족학자가운데는 학술계에서 명망이 높은 원사(院士)와 통신원사들이 있다. 이를테면 막씸 빠블로위치 김은 구쏘련문화를 전공한 력사학자로서 1979년 구쏘련과학원 원사칭호를 수여받았다. 끄오끼 빼뜨로위티 김은 력사학자이자 교수로서 1976년 통신원사 칭호를 받았다. 그는 구쏘련과학원 동방학연구소 소장대리이며 《구쏘련대백과전서》(1980년 로어판)에 수록되였다.

통계에 따르면 연변조선족 가운데서 각종 전문가인재가 도합 5만 3,528명 되는데 그중 고급직함을 갖고있는 분만도 2,281명 된다. 어떤분들은 과학연구면에서 조예가 매우 깊어 국내외의 공인을 받고 있다.

길림성에는 박문일, 정판룡, 조봉빈 등 조선족박사생도사와 같은 저명한 전문가, 학자들이 나타났다. 목하 동북아 각국 조선족지간의 과학기술, 문화 교류의 발전은 구역경제협력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주었다.

중국조선족의 삶의 현상

연변사회과학원 최삼룡

중국의 조선족은 조선반도로부터 온 조선민족의 후예들이다. 한세기 반되는 세월에 중국의 조선민족은 반만년의 전통문화를 이어옴과 아울러 중국 동북의 자연조건과 인문환경에 적응하는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가운데서 마침내 중국의 대지에 자기의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1. 조선민족의 전통문화를 이어오고 지켜 온 력사

중국의 조선족이 이 땅에 뿌리내린 과정은 우선 자기의 전통문화를 이어오고 지켜온 력사였다.

파산된 농민을 주체로 하는 이민들은 이주초기부터 낯설고 바람세찬 동북의 대지에 피눈물의 수난의 락인을 찍어왔으며 민족생사존망의 위기를 겪어오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중에서도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가장 잔혹한 식민통치를 30여년이나 받아왔다. 일본놈들은 조선반도에서와 마친가지로 중국의 조선민족의 모든 권리와 자유를 빼앗고 조선력사를 배우지 못하게 하였으며 민족의 말과 글을 빼앗고 지어는 성과 이름까지도 일본식으로 고치게 하였다. 그러나 조선족은 그 어려운 시기에도 결코 조선사람이 되기를 그만둔 것이 아니라 민족의 얼과 문화, 민족의 생존과 발전을 꿋꿋이 지켜냈으며 특히 력사의 새로운 계기 즉 중국공산당의 령도밑에서 기세드높이 전개된 신민주주의 혁명중에서 력사에 빛나는 업적을 창조하였다.

1949년 10월1일 새중국의 창건은 중국의 조선민족에게 있어서 전통문화의 복원과 사회주의 신문화의 탄생의 징표로 된다. 중국의 조선민족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국적을 가지게 되었으며 조선족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민족구역자치권리를 향수할수 있게 되었다. 이는 조선민족이 동북의 대지를 개척하고 지켜오고 또 새중국의 창건을 위하여 거대한 민족적희생을 치른 결사의 필연적인 결과였다.

1952년 9월 3일에 《중화인민공화국 민족구역자치실시요강》에 근거하여 연변조선족자치구가 창립(1955년 12월에 자치주로 고침)되였고 동북3성에 여러개의 조선족자치현과 조선족자치향이 건립되였다.

이때로부터 중국조선족은 자기의 말과 글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자기의 풍속습관을 보존하고 자기의 민족문화를 마음대로 꽃펴나가기 시작하였다. 이 문화는 조선민족의 전통문화를 계승하였을뿐만 아니라 또 한세기 반되는 력사의 풍운속에서 형성되 중국조선족의 새로운 특색, 성격, 의식이 침투되였고 또 사회주의적 리념과 체제의 조명하에서 창조된 새로운 문화였으며 복합적문화 또는 이중적문화였다.

그런데 1966년 5월부터 10년간 지속된 《문화대혁명》기간에 중국의 조선족은 또 한차례의 생존위기를 겪지 않으면 안되였으며 민족문화가 유린당하고 민족의식이 말살당하는 력사의 비운을 겪지 않으면 안되였다.

2. 새로운 력사시기에 눈부신 빛을 뿌리는 조선족문화

1978년 12월의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 제11기 제3차전원회의는 우리에게 력사의 새 계기를 열어주었다. 이 회의후 중국공산당의 민족정책이 복원되고 문화예술정책이 조절되였다. 이에 따라 중국조선족문화가 크게 발전하고 민족의식이 크게 각성되고 앙양되였으며 발전의 길에서 새로운 비약을 시도하게 되었다.

연변에서는 헌법과 민족구역자치법에 근거하여 《연변조선족자치주자치조례》,《 조선언어문자사용조례》 등 일련의 민족사업조례들을 제정함으로써 민족사업을 법률적궤도에 올려놓았으며 조선언어문자가 자치기관에서 공무를 집행하는 통용문자로 되게 하였으며 정부에 조선민족언어문자사업회와 번역국을 설치하고 조선언어문자사용문제를 책임지게 하였다. 교육부분에서는 일찍 1960년대에 전국에서 제일 처음 초급중학을 일반화 했고 1992년의 통계에 의하면 지금 연변대학을 비롯한 보통대학 5개소(현재는 연변대학으로 이름하고 하나의 종합대학으로 합병이 도였음), 성인대학 7개소, 전문학교 9개소, 직업중학교 64개소, 조선민족소학교 452개소, 중학교112개소가 있다.

연변에는 예술단체가 10개소, 박물과 2개소, 신문 11종, 잡지 16종, 라지오방송국 6개소, 텔레비죤방송국 5개소, 의료위행보건기구 786개가 있다. 그리고 조선족의 력사, 언어 문학, 예술, 교육, 고적을 연구할수 있는 연구기구를 건립하고 수많은 사업을 전개하였다. 또한 연변지역에 있는 유형문화재발굴사업도 큰 성과를 올렸는바 조선민족의 력사와 밀착되 수많은 유적을 발굴하였다. 돈화시 륙정산 발해국 정혜공주묘와 거기서 발굴된 돌사자, 화룡시 팔가자 북대촌의 발해옛무덤떼에서 발굴된 보상문이 돋친 구리거울, 화룡시 룡수향의 발해국 정효공주묘와 거기서 발견한 발해벽화는 국가1급문화재로 보존받고 있다. 지금 연변박물관에는 약 5,400점의 고대문화재, 3,000여점의 반일 무장투쟁화재를 전시하고 있다. 이외에도 수천편으로 헤아리는 전설, 신화, 민담, 속담, 수수께끼가 채집, 정리되였으며 1,000여수의 민요, 판소리 다섯마당, 민속춤 30여편이 채집되고 《춘향전》, 《아리랑》 등 전통예술이 현대예술무대에서 빛을 뿌리고 있다. 연변이외에도 북경대학, 중앙민족대학의 조선언어문학부와 조선문화연구소, 북경의 민족출판사 조선문편집부, 료녕민족출판사, 《료녕신문》, 흑룡강성의 《흑룡강신문》과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그리고 수많은 조선민족예술단체의 거개가 새시기에 들어와서 창립되였는바 조선족의 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오늘날 조선족은 56개 민족에 13억 인구를 가진 중국이라는 대륙의 하나의 민족공동체로서 립체적자세를 건립하였으며 자기의 전통문화가 안받침되고 자기의 문화적 품위와 체질을 굳힌 가치관을 부상시켰으며 세인의 흠모를 자아내고 있다.

3. 개혁개방속에서의 곤혹과 반성

그러나 오늘날 중국의 개혁개방속에서 중국조선족의 삶의 현상을 조감해보면 위기감에 잠기게 되며 곤혹에 빠지기도 한다.

중국조선족은 개혁개방이래 전국인민과 함께 전통문화와 현대문화, 동방문화와 서방문화, 농경문화와 도시문화의 화합과 강등속에서 심각한 곤혹을 치르지 않을수 없었으며 그 소용돌이속에서 자체의 우점을 발양함과 아울러 자체의 렬근성을 폭로하지 않을수 없었다. 특히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건립중에서 필연적인 문화의 분류와 문화의 대 이동중에서 조선족의 거동은 사림들을 눈물겹도록 하는 일면과 온 나라가 주목하는 성과를 쌓아올린 반면에 또 사람을 근심하게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술 소모량이 전국의 제일, 카라오케, 나이트클럽, 술집 등 유흥업소가 중국의 제일, 택시도 전국의 제일이라고 한다. 그리고 농촌경제의 락후성과 거의 파산의 변두리에서 헤매는 교육현장, 완만한 경제증장속도에 비해 반비례로 팽창하는 소비관념... 이러한 현상들은 개혁개방이래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건립중에서 폭로된 중국조선족의 렬근성을 보아낼수 있다. 장원한 타산이 없는 단기행위, 쾌락주의경향, 과소비현상으로 개괄해 볼수 있다.

우의 현상들은 반도의 조선민족에 비해 중국의 조선족이 떠돌이 족속에 가깝다는 사정과도 크게 관계되며 반도보다 엄청나게 넓은 대지를 거의 자유롭게 이주하면서 농사를 지을수 있었다는 사정과도 크게 관계된다. 그리고 100여년래의 정치는 중국조선족의 문화심태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조선민족은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빛나는 영웅업적을 쌓아올린만큼 또 《좌》적 로선을 적극 집행하였다. 《문화대혁명》까지 하고보니 생명개체거나 민족공동체나 할것없이 반성해볼만한 것이 너무도 많았다. 또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건립중에서 생겨난 여러 가지 사회현상, 례를 들면 정치경시-경제중시, 사상경시-금전중시, 공성경시-개성중시 등과 통하면서 많은 소극적인 사회심태와 현상을 산생하게 하였다.

4. 심층적인 연구가 요청된다

대중문화적인 시점에서 보나 구처적인 문화형태에 대한 고찰에서 보나 중국 조선족문화에대한 연구는 아직 많은 과제를 남겨주고 있다. 지금처럼 계속 발굴한 문화재에 대한 연구, 채집한 전설, 민담, 민요에 대한 연구가 따라가지 못하고 민족예술, 민간신앙 등에 대한 연구가 따라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자기의 전통문화가운데서 귀중한 재부를 잃게 될것이며 민족정신이 계속 담백해질것이며 기회가 지나간 다음 잃은 것을 다시 찾으려고 하여도 그때는 후회막급으로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무너지는 교육 때문에 희망을 잃어가는 농촌의 어린이들을 보면은 몇십년후의 조선족운명에 대해 자신을 가질수가 없다. 우리의 희망은 아이들인데 말이다.

특히 요즘에 들어서 적지 않은 사람들 더욱이 젊은 세대들이 외래문화에 편승하면서 민족공동체의 일치감에 흥취가 없고 전통문화의 가치에 대하여 우습게 보는 현상이 보편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민족의 우월감에 들떠있는것도 바랄바가 못되지만 민족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은 더욱 위험하다.

오직 우리 민족의 지성인들이 일심으로 단합하여 우리 자신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를 성과적으로 해나갈 때만이 우리 민족의 문화선택이 굴곡적인 길을 적게 걸을것이며 또 자신의 생존과 발전을 도모하는 성스러운 사업에서 더욱 위대한 성과를 쌓아올릴 것이다 .

중국조선족의 전통문화와 삶의 현상>에서 발취

조선족의 이주사

동북아지역 조선족의 이동 분포와 특점 지은이: 길림성 민족연구소 차철구

동북아개발현장 조선민족은 동북아지역의 주요한 토착민의 하나로서 조선반도에서 발원했다. 19세기중엽부터 조선반도의 조선인들은 륙속 중국, 구쏘련, 일본 등 주변나라로 대량으로 이동하여 점차 온 동북아에 널린 위대한 민족으로 되였다. 초보적 집계에 따르면 목전 동북아지역에 있는 조선족은 약 6,780만인으로서 동북아 총인구의 24%좌우를 차지한다. 그중 조선인구가 2,250만이고 한국인구가 4,310만(조선과 한국은 모두 단일 민족국가이다)이고 중국조선족이 192만이며 일본경내의 조선족이 67만, 구쏘련의 조선족이 약 40만이다. 동북아정세가 완화되고 각 나라지간의 관계가 완벽화됨에 따라 동북아 조선족사이의 래왕이 날로 밀접해지고 있다.이는 동북아지역 경제협력발전에 추진역할을 놀고 있다.

본문은 조선족의 이동과정을 회고함으로써 동북아지역의 조선족의 분포 및 그특점을 중점적으로 탐구하려 한다.

1. 조선족의 이동

목전 동북아지역 조선족의 분포는 력사적으로 형성된것이며 19세기중엽부터 시작된 몇차례 조선족 대이동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러나 조선족이 언제부터 이동하기 시작했는가, 어떤 시대배경과 사회원인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깊이 연구하고 탐구할 가치가 있다. 동북아 조선족의 형성과 발전과정을 보면 조선족의 이동은 대체적으로 3개 단계를 거쳤다. 제1단계는 19세기중엽으로부터 1910년 《일한합병》까지로서 조선족은 주로 중국 동북으로 이사왔다. 제2단계는 《일한합병》으로부터 1931년의 《9.18》사변전야까지이고 제3단계는 《9.18》사변으로부터 1945년 제2차대전종말까지로서 동북아지역의 조선족분포가 거의 형성되였다.

제1단계 조선족의 이동과 우리나라 동북에 분포된 상황을 보면 1906년까지 조선족은 서쪽의 안동, 흥경(興京), 류하로부터 돈화 일선의 남부지역에 국한되여 있어 서북쪽으로는 휘발하(煇發河), 동쪽으로는 녕고탑(寧古塔)과 목릉하(穆稜河) 일선을 넘기지 않았다. 그러나 1907년에는 연변을 중심으로 하여 로야령(勞爺岺)을 넘어 목단강연안과 삼성(三姓)지방 즉 동북경내지로 점차 이주해들어갔다. 그리하여 동북에 이주해온 조선족인수가 부쩍 늘어났다. 1894년까지만 해도 도합 7만 8,000인이던 조선족인구가 1910년에는 10만 9,000인으로 늘어났다. 연변지역의 조선족은 1904년의 5만여으로부터 1909년의 18만 4,867인으로 늘어나 당지의 만족, 한족을 초과했다. 일본제국주의는 1905년에 조선정부를 강압하여 《한일보호협의》를 체결한 뒤를 이어 1910년에 또 조선매국노 리완용 등 사람과 결탁하여 비밀리에 《한일합병조약》을 맺어 조선을 완전히 먹어 버렸다.

망국노의 운명을 벗기 위해 대량의 조선인민들이 다투어 동북아 여러 나라로 이주해갔다. 이는 조선족이 동북아 여러나라로 이주해간 제2단계이다. 이시기는 주로 정치원인으로 하여 이주해갔다. 조선족은 그냥 우리나라 동북으로 이주해오는 동시에 다른 나라로 이주해가기 시작했다.

1910년부터 1912년까지 이태사이에 구쏘련 씨비리아지역으로 이주해간 조선족만도 6,354인 된다. 1910년부터 1920년까지 압록강북쪽에 이주해간 조선족이 9만 8,657인 된다. 도문강북쪽에 이주해간 9만 3,883인까지 합하면 도합 19만 2,540인이다. 특히는 1919년 《3.1》운동후 수많은 애국지사, 독립군과 반일군중들이 동북으로 흘러들었다

그리하여 중국 동북의 조선족인구는 1920년의 45만 9,400여인으로부터 1930년의 63만 982인으로 늘어났다. 그중 연변 4현(화룡, 연길, 왕청, 훈춘)에 약 40만 9,402인으로서 64.9%를 차지하고 안동과 통화 지역에 5만 545인으로서 8% 차지하고 봉천과 철령 지역에 9만 7,169인으로서 15.4% 차지하고 길림과 장춘지역에 2만 4,157인으로서 3.8% 차지하고 북만(흑룡강에 속함)에 4만 4,463인으로서 7% 차지하고 려순, 대련 지역에 1,747인으로서 0.27% 차지하고 기타 지역이 약 1,000인좌우였다. 우의 수자에서 볼수 있다싶이 길림성 연변지역은 이미 우리나라 조선족의 주요한 집거구로 되였으며 료녕성도 조선족인구가 비교적 집중되고 흑룡강은 장성세를 이루었다.

조선에서 공포한 자료에 따르면 일본이 조선을 합병한후 15년간(1910-1925) 조선측에서 해외로 이주해간 난민이 30만호를 초과했다. 1919년까지 약 10여만인이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가 토목건축과 석탄채굴 등 로동에 종사하였다. 일본식민당국이 공포한 자료에 따르면 1910년부터 1925년까지 만족, 몽골족 지역과 씨비리아지역으로 이주해간 조선족이 5만 6,000인이며 22만 5,000여인이 연변지역에 이주해갔고 1926녀부터 1930년 사이에 또 10여만인이 중국 동북으로 이주해갔다. 1922년 12월 구쏘련 극동지역의 외국무장간섭이 철저히 분쇄되고 쏘베트공화국이 창건됨에 따라 구쏘련에 이주해간 조선족인구도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구쏘련측에서 통계한데 따르면 1926년 구쏘련 씨비리아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족은 이미 8만 7,000여인에 달했다.

1931년 일본제국주의는 《9.18》사변을 발동, 동북은 점차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되였다. 일본제국주의는 동북을 침화전쟁의 공고한 후방과 식량기지로 만들기 위해 1936년 4월 20년사이 100만호 500만인 일본이민을 이민하려는 이민계획을 세우고 조선의 파산된 농민을 강압하여 동북으로 이주시켰다. 또 《만족조선족개척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조선이민사업을 관리, 사후 동북지역의 39개 현을 조선족의 《이민구》로 확정하고 1939년부터 매년 조선으로부터 1만호를 이주시키기로 계획하였다. 당시 인구가 희소한 흑룡강성북부는 일본이 강제이민을 실행한 주요지역의 하나이다. 1940년 한번에 눈강, 룡진 등지에 이주해간 조선족만도 2,810호나 된다. 1941년이후 일본식민당국은 강북지역의 신이민자들을 《이민개척단》으로 만들어 북만과 내몽골지역에로 내몰아 논을 풀게 하였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동북으로 강제이민은 조선의 가난한 농민이 3만 856호에 14만 7,744인 된다. 일본의 강제이민으로 하여 중국 동북의 조선족인구는 날로 늘어났다. 1945년에는 216만 3,015인으로 껑충 올라 1932년의 67만 2,649인에 비해 2.2배 늘어났다. 이 시기 일본의 강제이민 때문외에도 자발적으로 중국에 온 사람도 있다. 례를 들면 1937년 《7.7》사변전야에 우리나라 관내로 들어온 약 3만여명 조선족들은 다수가 반일장병들과 각종 혁명조직 혹은 군중단체의 책임자이다. 또 장사군도 있고 다은 원인으로 하여 들어온 사람도 있다. 그들은 화북, 화중, 화남 등 지역에 분포되여있었다. 몇년간 급격히 늘어나 1945년까지 우리나라 관내 조선족이 10여만인에 달하였는데 그중 화북지구에 좀 많았다. 재일 조선족은 대부분 제2차세계대전기간 일본에 《강제징용》되여간 로력자들이다. 일본식민당국이 공포한 수자에 따르면 침화전쟁발동이래 일본식민당국에 끌려 참군한 조선인은 36만 4,000여인으로서 그중 태평양전쟁시기(1941년 12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참군한 사람만 해도 11만 6,294인이다.또 600만 조선인이 로력자로 끌려갔는데 그중 많은 사람이 전쟁가운데서 목숨을 잃었거나 제명에 죽지 못했다. 적지 않은 《행운자》들은 또 일본으로 강압적으로 끌려갔다. 1945년 일본투항때 재일조선족은 약 200만인좌우였다. 구쏘련 인구통계에 따르면 1939년 구쏘련경내에 거주한 조선족인구는 18만 2,300여인으로서 1926년에 비해 1.1배 늘어났다. 《9.18》사변후 쏘련에 이주한 조선족들은 일본식민주의통치와 일본의 강제이민에 못이겨 구쏘련에 이주해간 사람들이 많다. 해당 서적, 기록에 따르면 1945년 8월 조선광복까지 세계 각국에로 이주해간 조선족은 무려 당시 조선반도 총인구의 15%좌우 차지하는 400만인이나 된다. 그중 중국동북에 정착한 사람이 대략 160만, 중국내지에 대략 10만, 구쏘련 씨비리아와 극동 지역에 대략 20만, 일본에 대략 210만, 기타 다른 나라와 지역에 대략 3만인 이주해갔다. 제2차 세계대전종말후 조선족의 대량적 이주는 거의 끝났다.

훈춘사건

琿春事件

일제가 마적단(馬賊團)을 매수해서 훈춘 일본영사관을 습격하게 한 뒤에 이를 계기로 만주의 한국인을 학살한 사건. '간도사건'이라고도 한다. 일제가 간도지역의 조선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으로 간도출병(間島出兵)의 구실이 되었다. 이후 간도지역의 독립운동이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당시 간도는 일제의 법이 직접 미치지 않는 곳으로 3·1운동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온 독립지사들의 주된 활동무대였다. 특히 간도지역의 독립운동은 강력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해서 무장투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이에 일제는 중국군을 동원한 조선독립군 토벌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했고, 그러자 일제가 중국영토인 간도에 직접 출병한다는 '대토벌'계획을 세웠다. 이 대토벌의 구실로 공작된 것이 '훈춘사건'이었다. 1920년 10월 2일 새벽 4시 일본군에게 매수된 장강호(長江好)를 두목으로 하는 마적단이 훈춘을 습격했다. 마적단은 상가를 약탈하고 훈춘의 일본영사관 분관에 방화한 뒤 오전 8시에 퇴각했다. 일본측의 피해는 사망 13명, 중상 11명, 경상 20여 명이었다. 일제는 이 사건을 불령선인(不逞鮮人)이 저질렀다고 주장하며 재만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즉각 군대와 경찰을 출동시켰다. 그해 10월부터 1921년 5월까지 계속되는 토벌로 수천 명의 조선인이 학살되고, 건물과 곡물 등에 커다란 피해가 발생하여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상실되는 등 간도지역의 조선인 독립운동이 크게 약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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