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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장하는 글 -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

영영8공공 | 2017.02.17 20:22:02 댓글: 1 조회: 3399 추천: 0
http://bbs.moyiza.com/crcndebate/3282342

이글은 시민운동가로서의 이재명의 삶을 자필로 적은 글로서 일독을 권장하는 바이다.


1).나의 고향 안동 - 동년시절

나는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도촌동이라는 깡촌 산골짜기, 그 중에서도 지통마을이라는 곳에서 농사를 짓던 부모에게서 5남 2녀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음력으로 "1963. 10. 23. 오후 저녁 준비를 할 즈음"이 어머님께서 주장하시는 나의 공식적인 출생일시인데 어머님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나는 오래토록 내 생일날을 믿을 수 없었다. 어머님의 기억으로 농사일을 하시면서 9남매를 낳았고,

나는 7번째로 어머니 뱃속을 빠져 나왔으며 위로 두명이 어릴 때 병으로 죽고 5남 2녀가 살아있는데 애를 하도 많이 낳아 헷갈려서 그런지, 아니면 어머님표현대로 고생에 뼛골이 빠지다 보니 정신이 없어져서 그런지 어머니는 유독 다섯째인 나의 생일이 22일인지, 23일인지 기억하지 못하시어, 내가 어릴 적에 ‘점밭이’(점쟁이)에게 며칠인지를 물어 보았다고 알려주었다. 그때 ‘점밭이’가 내 생일이 23일이라고 말해 주었다는데 그때부터 내 생일은 23일로 굳어졌고 지금도 음력 23일에 대단하지는 않지만 꼬박 꼬박 생일을 찾아먹고 있다.

그때 내가 ‘점밭이’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채 말을 하는 이상한 밭도 있구나, 말을 하는 밭은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해 했던 기억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때가 3-4살 정도 되었던 모양이다. 어머니가 내 생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어린 마음에 무척이나 속상했던지 나는 어머니가 어떤 밭에 가서 손바닥을 비비며 우리 아들 생일이 몇일인지를 묻는 상상을 끔찍하게도 자주 했다. 요사이 가끔씩은 그런 상상을 하면 나 자신이 너무 어이가 없어 피식 웃고 말지만, 여전히 나는 내 생일날이 의문스럽다. 나는 조금 나이가 들면서 더욱더 점쟁이의 말을 믿지 않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23일은 양수이고, 22일은 음수이니 점쟁이가 당연히 양수를 선택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런데 생일을 잘 모르는 것이 좋을 때도 있었다. 어쩌다 사주를 따지다가 별로 좋지 않은 결론이 나오면 내심, 다른 날로 따지면 다른 결과가 나올 것이라며 위안 받을 수 도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때문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당시로서는 고학력이라고 할 수 있는 대구 청구대학을 중퇴한 분인데, 순경, 교사, 탄광관리자를 전전하다가 결국 깊은 산골로 들어와 손에 익지 않은 농사일을 하면서 허구헌날 밭에 돌만 집어내며 세월을 보내셨다. 물론 우리 형제들도 식전 식후, 그리고 하교후에는 영낙없이 아버지를 따라 돌투성이 밭을 따라다니며 돌 집어내는 일에 강제동원되었다. 출생, 혼인, 사망신고 등 행정업무와 심부름을 도맡아하면서도 지나칠 정도로 가족에게는 냉담했던 분이었다. 도촌동은 당시에는 차가 들어가지 않았고, 70년대 후반에 겨우 전기가 들어왔다. 요사이도 저녁에 버스가 들어왔다가 아침에 나가는 것이 전부이고 그나마 지통마을은 현재도 버스가 들어가지 않고 버스종점까지 5리 정도를 걸어나와야 하는 보기드문 <원시마을>이다.

나는 1976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성남으로 이사 오기 전까지 그곳에 살았는데, 이곳은 육지의 섬으로 불리는 봉화군, 안동군, 영양군 등 3개 군의 접경지역 산골마을로 소나무가 많아 송이가 많이 난다. 송이가 나는 소나무 숲을 <송이밭>이라고 불렀는데, 여름송이가 나는 철이 되면 동네사람들이 애 어른 가리지 않고 수시로 산에 들어가 송이를 캤다. 어차피 다음에 누가 캘지, 또한 다시 올지도 몰라 송이를 발견하면 애기송이까지도 다 따려고 근처 땅을 몽땅 파헤치기 때문에 한번 소문이 나면 동네사람들이 접근하기 좋은 송이밭은 황폐화되어버린다. 나도 예외가 아니어서 하교길에 선후배들과 함께 산능선을 따라 송이밭을 헤매이면서 송이를 한번 따보려고 했지만 불행히도 나는 한번도 땅에 박힌 송이를 본적이 없다. 그래도 끊임없이 송이철이 되면 송이를 딴답시고 산에 올라 험한 수풀을 헤치고, 쐐기에 쏘여가며 산속을 헤집고 다녔었다...

지통마을에서 초등학교까지 거리가 산길로 20리에 가깝기 때문에 우리는 아침 7시 15분에 일어나 밥먹고 1시간 남짓이 걸어 학교를 다녔다. 여름에는 그런대로 견딜만한데 겨울이되면 아침 등교길은 고통 그 자체였다. 어머니가 미리 데워둔 따뜻한 세숫물에 세수를 하고 쇠로 된 돌쩌귀를 잡으면 손이 돌쩌귀에 얼어붙어 잘 떨어지지가 않는다. 겨울에는 먼저 간 학동들이 심술로 징검다리에 물을 뿌려놓기 때문에 돌맹이가 얼어 고무신이 미끄러지면서 발이 얼음물에 빠져 얼어터진다. 또 여름에는 큰 물이 지면 돌다리가 홍수에 덮여 건너지 못하기 때문에 학교에 가지 않았다. 가끔씩 학교에 갈 수 있을 정도인때도 있었지만 학생들이<작당모의>해 홍수를 핑계로 집단 결석을 하기도 했다. 우리 집도 할아버지대에는 그런대로 땅뙤기를 가지고 농사지으면서 꽤 먹고 살만했던 모양이다. 작은 마누라 얻어 살림을 차릴 정도였으니...

그러나 아버지는 별다른 농토가 없었고, 그나마 당시 유행대로 돈이 생길 때마다 밤에 몰래 모여 화투장을 쪼이고, 결국 도박습벽이 들어 집문서, 땅문서까지 잡히다 보니 결국 없는 재산이나마 거덜이 나고 말았던 것이다. 어머님 말씀이 봄에 밭을 갈려고 나갔더니 다른 사람이 쟁기질을 하고 있길래 "왜 남의 땅에 쟁기를 대느냐"고 물으니 이제는 자기 땅이라고 하더라나?. 겨우내 화투장 쪼우다가 결국 한뙤기 남은 땅마저 남의 손에 넘어가 버린 것을 어머니는 농사철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던 것이었다...

아버지는 결국 내가 초등학교 3학년때 나도 모르게 어느날 고향을 떠나셨다. 어머님은 어린 형제들을 데리고 남의 땅을 빌리고, 깊은 산속 밭을 일구며, 도저히 어려울 때는 이웃들에게 보리 한 되, 좁쌀 한 되 이런 식의 적선을 받으며 생계를 꾸려 나가셨다. 힘겨운 농사일에 예외는 없었다. 형님들과 초등학생인 나와 어린 동생들도 감자 밭에 나가 풀을 뽑고 감자를 져 날랐다. 가까운 산에 올라 갈비(소나무낙엽)를 긁어 모으거나 어떤 때는 몸짓만큼 큰 지게를 지고 땔나뭇짐을 지기도 했다. 들기조차 어려운 큰 도끼로 어머니가 불을 때기 쉽게 땔나무를 자르거나, 근 40리길을 걸어 구호식품으로 나온 밀가루를 얻어 오는 것은 내 몫이었다...

쪼들린 살림에 기름진 음식을 못먹다나니 수시로 힘겹고 배가 고팠다. 보리밥에 감자로 아침을 먹고 20리 길을 걸어 학교에 가면 그때부터 벌써 배가 고팠다. 쉬는 시간에 짬짬이 고추장에 버무린 달래나 짠지를 반찬으로 도시락을 조금씩 까먹다 보면 점심때는 어느새 빈 도시락이었다. 20개씩 나눠주는 구호건빵을 줄반장에게 아부하며 한두개 더 얻어 먹어봐도 여전히 배고픔은 달래지 못 하였다. 돌뿌리를 걷어차며 다시 20리 길을 걸어 집으로 오면 온몸은 거의 녹초가 된다. 그래도 봄, 여름, 가을은 나은 편이다. 산과 들에서 나는 ‘먹어서 죽지 않는’ 것들로나마 주린 창자를 달랠수 있었으니 말이다. 봄에는 참꽃을 따먹고 찔레나무 순을 한아름씩 꺾어 안고 다녔다...

예쁘게 자라는 소나무의 순(송구)을 댕겅 꺾어 속껍질은 씹어먹고 속살은 이빨로 갉아 먹었다. 숲에는 미안한 말이지만 영양상태가 나쁘고 모양이 사나운 송구는 맛이 없어 주로 잘 자라는 양질의 소나무가 우리들의 표적이 되었고 송구를 채취 당한 소나무는 가지가 뒤틀리거나 잔가지가 많이 나 제대로 자라려면 몇 년은 고생을 해야 한다. 초여름부터 가을이 오기 전까지는 보리서리와 밀서리를 하고 설익은 개복숭아와 어린 목화다래를 따먹었다. 가을이면 머루, 다래, 으름, 산밤, 보리둑, 밭가의 잘자란 무우 등 먹을 것이 지천이었다. 수확한 고구마밭이나 땅콩밭은 계속 파헤치다 보면 꽤나 많은 수확물을 확보할 수도 있었다. 책과 달그락거리는 도시락을 책보에 싸 둘러 메고 원시적인 채집활동을 위해 도랑으로 산으로,정처없이 돌아다니다 보면, 도시락속의 숟가락과 반찬통이 박자를 맞춰 덜그럭거린다. 먹을게 많아서였던지 나는 유독 가을에 대한 이미지가 좋았다, 그래서 은근히 가을을 기다리기도 하였다...

여느 시골학교와 마찬가지로 내가 다니던 학교도 정기적으로 변소를 치웠는데, 이 학교의 변소치우기는 내가 단연 단골이었다. 추수철이 되면 학교에서는 어김없이 학생들에게 보리 한되, 벼 한되 등 곡물을 요구했다. 명목상으로는 추수한 밭에 가 이삭줍기를 하라며 목표량으로 정해 준 것이지만, 그 많은 학생들이 그 좁은 농토에서 알곡으로 한되씩 이삭을 줍지 못한다는 것은 학교도 , 선생님도, 우리도, 그리고 부모님들도 다 안다. 그래서 학생들은 의당 집의 곡식을 학교에 퍼다 줬다. 힘겨운 농사로도 먹고 살기 힘들어 동네 남정네들에게 막걸리 데우고 라면 끓여 팔며, 약까지 팔아 힘겨운 삶의 무게를 술과 담배의 힘으로 견뎌가던 어머니에게 나는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었고, 결국은 누구도 싫어하는 똥푸기로 벌을 대신 했다...

가난은 나의 초등학교 생활에서 미술도구란 거의 가져본 일이 없었고, 돈이 드는 학용품 조차도 최소한의 것 외에는 가져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런 것들도 곧바로 벌로 이어져 다른 아이들의 특별활동 시간은 나의 특별활동 - 똥푸는 시간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똥을 푸면서 몇가지를 알게 되었다. 처음에 똥냄새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고약하지만 한참이 지나면 그것도 삶은 계란노른자 냄새 비슷한 것으로 착각되며 별로 나쁘지만은 않다는 사실이었다. 또 옷이나 손에 불가피하게 그것이 묻어도 씻으면 그만이었다...

우리 동네는 자동차를 구경하기 힘들었고, 인간의 걸음 이외에 이동 수단은 소나무를 베어 만든 구르마, 눈내린 언덕길의 비료포대, 얼음판에 쓰는 썰매가 고작이었다. 그 외딴 시골에 나타난 차량은 의례 호기심과 탐구의 대상이 되었고, 가을철이 되어 고추라도 실으러 들어와 자는 화물차는 헤드라이트의 전구가 모두 사라지기가 일쑤 였다...

2).성남으로 오다 - 잊을수 없는 소년공시절


1976년2월, 초등졸업과 동시에 둘째형님과 아버님이 살고 있는 성남으로 이사를 왔다. 중앙선 완행열차를 타고 청량리역에서 내려 239번 버스를 타고 새벽에 구종점에 내린 다음 상대원 1동까지 걸어갔는데 당시 집이라고는 큰길가에 몇채만 있고 뒤는 전부 진창이었다. 그해 3월, 그러니까 이사

와서 한달도 채 못되어 나는 나의 생에서 가장 힘겹던 소년공 삶 을 시작하였다. 상대원 1동의 목걸이 만드는 가내공장(속칭 마찌꼬바)에 시다(초보)로 취업해서 납땜 일을 하였는데 월급은 6,000원(일당 200원) 이었다.납땜일에 숙련되어 그해 8월 경 수정구 창곡동으로 통근하며 목걸이 가내공장에 월급 9,000원씩을 받기로 하고 취업했다가 사장이 야반도주하는 바람에 3달치 월급을 받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아침에 도시락을 싸들고 약 1시간을 걸어 8시 30까지 출근한 후 대개 밤늦게까지 일하고 퇴근길에 창곡동 길에서 엠비씨 뉴스가 끝난 후에 하는 “내마음은 호수요 어쩌고”를 시그널 음악으로 하는 성악을 들었으니 퇴근시간은 9시 30분경이었을 것이다...그해 겨울 상대원 1동 현 파출소자리 뒤에 있는 ‘동마고무’라는 회사에 ‘이승원’이라는 앞집 사는 학생 이름으로 위장(?)취업(나이 부족 때문에)을 하였다. 10시까지의 야근, 새벽 2시까지의 철야작업을 수시로 하였는데, 야근이나 철야를 할 경우에는 저녁으로 생라면을 한개씩 주었다. 새벽2시까지 철야를 하면 4시 통금이 해제되기 까지 작업대 위에서 잠을 잤는데, 이런 시간에 당시 유행하던 ‘밤에 떠난 여인’이라는 노래를 한살 어린 친구에게서 배웠다. 그 당시 함께 일하던 사람중 기억나는 사람으로 강원도 출신의 ‘김이보’라는 사람이 있는데. 나에게 아직까지 사진도 남아 있다...

이 회사에서 일하던 중 모터벨트에 왼손이 감기는 산재사고를 당해 왼쪽 중지에 장애가 남았다. 그래서 아직도 손톱아래에는 검은색 고무가루가 남아 있다. 가난에 찌들었던 나는 집에서 쉬어도 당연히 주어야 할(당시로서는 알지 못한) 휴업수당을 주지 않고 결근처리하기 때문에 치료기간에도 계속 회사에 나가 한손으로 일을 하고 악착같이 일당을 받았다.. 처음으로 한 취직이었는데, 고참들에게 “형”이라는 말이 안나와 계속 이름을 불렀다가 정말 죽도록 맞은 기억도 있다. 엄청나게 맞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던지 “형”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고향에서는 친척외에는 어떤 경우에도 형이라는 말을 하지 않고, 누구의 형이라는 식으로 불렀음) 인간이란 환경에 얽매이기 마련인것이다...

1977년초, 상대원 1동의 제 2공단에 있던 상업용냉장고를 만들던 아주냉동(현 삼영전자 옆)에 취업하게 되었다. 산소용접을 배워보려고 하였으나 회사가 거부해서 함석 절단일을 하였는데 함석판에 손등이 찢어져 뼈가 드러나는 사고를 2회 당했다. 사고가 빈번해서인지 절단기(샤링기)에 잘려 꿈틀대는 손가락을 집어 들고 희죽거리며 웃다가 봉지에 넣어들고 봉합수술을 하려고 병원으로 가는 절단공을 보면서 극도의 공포감을 느꼈다. 어느날은 고참들이 출근시간에 상대원 파출소 옆 숲속에 모이라고 하여 모였다가(그것이 일종의 불법파업인 것은 나중에 알았음) 군복입은 군바리 출신 관리자에게 전부 끌려가 엎드려 뻗쳐를 한 상태에서 각목으로 엉덩이를 수십대씩 맞았다.. 그후로는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게 되었다...

당시 동료중에 혼자 살면서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의 것까지 싸 가지고 가서 공장마당에 앉아 함께 앞산에 만개한 진달래를 보며 먹었는데 식어 빠진 밥과 굳어버린 오뎅조림 반찬이 너무나 먹기 힘겨웠다. 그 곳은 관리자들과 일부 고참들은 빼고 나머지 노동자들은 퇴근시까지 공장밖으로 나가는 것이 금지되어 철문을 잠그고 있었는데 굳게 닫힌 공장울안에 갇혀 온산을 뒤덮은 앞산의 진달래를 쳐다보며 공돌이 생활을 하기 싫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마침 공장동료중에 미인가 중학교(광성 중학교?. 효관스님이 이곳 출신이라고 함)를 다니던 사람이 입은 교복이 너무 멋있고 부러워 같이 다니려고 하였으나 가족들이 정식학교가 아니라며 반대하는 바람에 포기하였다...

그해 가을 아주냉동이 망한 후 야구장갑과 스키장갑을 만드는 대양실업(제 2공단의 에프코아코리아 바로 밑)에 취업해 재단사로 근무하였는데 월급여 15,000-18,000원 정도로 일당500-600원인데 당시 브라보콘 가격이 130원인가 하였으니 얼마나 적은 금액이었는지 알수 있다. 두들겨 패는 것만으로 <재미>를 못느낀 고참들이 어딘가에서 권투장갑을 가져와 신참들에게 시합(?)을 빙자한 싸움을 시켜 실컷 구경한 후 진 사람에게 강제로 브라보콘을 사게 하였는데, 주로 내가 져서 고참과 상대편에게 브라보콘 사주느라 일당을 날리는 일이 꽤 많았다...

이 당시 프레스공으로 일하다가 프레스에 끼여 좌측손목이 골절되는 산재사고를 입게 되었다. (이후 성장판 손상사실을 모르고 그냥 넘어갔다가 나중에 한쪽 뼈가 자라지 않으면서 팔이 비틀어지는 장애가 발생함) 이때 처음으로 김경숙이라는 누님노동자에게 연정을 느꼈다. 나보다 한살 어린 꼬맹이 여자애가 나이를 두 살이나 속여 나로 하여금 ‘누나’라고 부르게 하여 머리끄뎅이를 잡아 버르장머리를 가르쳐 주고,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건방지게 놀던 힘 약해 보이는 동료에게 식판을 집어 던지는 만행(?)을 저지름으로써 공장내에서 어느정도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공돌이 근성을 배운 것인가?...

나는 과일을 무척이나 좋아하지만 과일값이 비싼탓에 먹고싶어도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회사내에서 식권 1장과 배 한개를 바꿔 주었으므로 배를 먹고 점심을 굶는 일이 많았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며 일하던 중 공장관리자인 대리가 어느 고등학교 출신인 것을 알았는데, 그가 특별한 케이스로 대리가 된 것도 모르고 철없이 "고등학교를 마치면 관리자가 될 수 있다“는 망상(?)을 한 끝에 검정고시를 보기로 결정 하였다...지금도 가끔씩 생각하는데 어쩌면 그것이 나의 인생을 바꾸는 결정적인"오해"이고"망상"이었다는점이다. 세상사란 이렇듯 요상한것임을 개탄하지 않을 수가없다...

1978. 4. 29. 전반기 검정고시가 끝난 후 제일학원 고입검정고시 야간반에 등록하였다. 8월 시험을 목표로 하는 반이었는데 이미 1개월 가까이 진도가 나간 후여서 다른 과목은 그런대로 따라갈 수 있었지만 영어는 알파벳도 모르는 상태라 영어과목은 포기하게 되었다.. 검정고시는 8과목응시, 과목당 40점 이상 평균 60평 이상이면 전체합격, 과락이 있는경우에는 60점 이상인 과목은 과목별로 합격시키므로 영어를 뺀 나머지 과목만 합격을 목표로 하였다. 1978. 8. 5. 경기도 수원에서 검정고시 시험을 보았다. 영어는 (다)번이 답이 많다고 하여(다)번을 70% 이상 써 보았는데 신통하게 42.5점을 얻고, 전체 평균이 60점을 넘어 운 좋게도 전체합격을 하게되었다. (이무렵 급작스레 신장이 자라면서 산재사고로 성장판이 손상된 왼쪽 팔의 뼈 1개가 자라지 않으면서 뒤틀어져 장애인이 되었다.)

3).두 번에 걸친 자살시도
(생존의 무게와 암담한 미래, 팔을 내 보일수도 없는 장애인으로서의 고통, 사춘기, 이해못해주는 가족들에 대한 설움이 겁쳐 자살시도를 함.)


1979년 봄, 대양실업이 부도로 퇴사 - 당시 우리 가족은 상대원 시장이 생활터전이었는데, 사춘기의 여동생과 어머니는 시장 2층의 화장실을 관리하며 화장실 사용료를 받았고, 아버지는 상대원시장 청소부 일을 하였으며, 나머지 형제들도 모두 공장생활을 하였다. 상대원 시장 근처 셋방에서 부모님과 6남매가 함께 살았는데, 가족들이 잠든 밤에 혼자 공부를 하다보니 잠자리에 든 가족들이 방해받지 않게 하려고 등을 켜지 못하고 탁상 조명을 사용하곤 하였다. 너무 눈이 부셔 흰종이를 붙여 빛을 차단하였는데, 어느날 아버지가 불필요하게 전기를 낭비한다면서 면박을 주셔 화장실에 사용하는 5와트의 백열전구(그것도 사용하다 버린 붉은 색의)를 끼워 공부를 하였다. 그바람에 책을 보기가 어려웠고, 너무 야속하다 생각 했다...

당시 다니던 직장이 망해 쉬던 중이어서 아버지와 같이 시장 청소일을 하는 것이 너무 더럽고 힘이 들었다. 특히 사춘기 시절인데 아침 일찍 등교하는 교복입은 동네 여자아이들을 만날때면 창피함과 수치심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고 살고픈 마음마저 없어지곤 하였다, 그래서 어느날부터 죽기로 마음먹고 죽을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어떻게 하면 고통을 안 느끼고 죽을수 있겠는가를 연구한것이었다. 우스운것은 이렇게 죽으려 결심한 인간도 고통만은 싫었던가 본다.그래서 연구한 첫방법은 가스질식으로 죽는것이었다. 대낮에 다락방에 연탄불을 피워놓고 잠이 들었다. 한참 자다 깨어보니 연탄불 바닥이 공기가 통하지 않아 불이 꺼져 있고 골치만 지끈 거렸다. (이렇게 첫번째 자살기도는 실패로 끝났다.) 처음 방법이 실패로 끝나자 나는 좀 어렵고 돈이 들기도 하지만 꼭 성공할수 있다고 생각되는 두번째 방법을 선택하였다. 먼저 이 약국 저 약국에서 수면제를 하나씩 사 모은 다음, 다락방에 다시 연탄불을 피우고 연탄 바닥에 공기가 통할 수 있도록 장치를 단단히 한 뒤 수면제를 먹고 잠이 들려고 하는 찰나 이상한 낌새를 느낀 자형에게 발각이 되어 또다시 실패하였다.(운이 좋다고 해야할지.. 나쁘다 해야할지..)

결기에 집을 빠져 나와 고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시도하지 못했던 목매기 방법으로 자살을 해 보려고, 사기막골과 보통골을 헤맸지만 결국 뒤를 쫒는 자형과 고통에 대한 두려움, 엉성하지만 두 번의 시도조차 실패한 것이 하늘의 뜻인지도 모른다는 위로를 스스로에게 하면서 자살할 정신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하면 무슨 일인 들 못하겠느냐는 마음을 먹고 자살시도를 포기하기로 하였다. 약사들의 빠른 눈치 덕에 당시 내가 먹은 대부분의 수면제는 소화제였던지, 실제로 30개에 가까운 수면제(?)를 먹었음에도 별로 졸리지 않았다. 이일로 하여 운명이라는것을 별로 믿지 않는 나였지만 때로는 인간의 생사만은 결코 자신의 의지에 좌우지되지 못함을 멍하니 생각할때도 드문 있다...

4).자비심의 한계는 죽음뿐이 아니다 - 공돌이의 대학도전


1979년 여름경 오리엔트주식회사에 입사하여 시계 문자판을 만드는 공정에서 저석공, 스프레이공으로 일하였는데 나이가 부족해 고향 동창의 주민등록등본을 몰래 떼어 고향 동창의 이름으로 취

업. 1년후 내이름으로 재입사 하였다. 1980. 4월. 대입자격(고졸) 검정고시 합격. 1980. 봄 광주의 폭도들에 대한 언론보도를 보고 그대로 믿음. 5. 18. 쿠데타세력에 의해 대입본고사가 폐지되고 학력고사성적만으로 학생을 선발하게 되자 우수학생을 유치하기 위해 학력고가 일정점수 이상인 학생에게 장학금 뿐 아니라 생활보조비 형태로 월급의 몇배나 되는 돈을 대주는 대학들이 생겨났다. 이에 희망을 가지고 대학입시 공부를 시작였다.

1981. 3월부터 서울 신답동에 있는 삼영학원 야간 입시반에 등록. 상대원 고개의 인현독서실에 등록, 8시 30분 출근, 6시 퇴근, 7시 학원수업시작, 11시 학원수업종료,12시 독서실, 새벽 4시 통금해제시 귀가, 지금 생각하면 초인적인 생활을 시작 하였다. 1981. 5월 경에는 서울까지 오가며 소비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학원을 그만두고 독서실에서 독학을 하기 시작하였다. 1981. 7. 30. 공부에 전념하기 위해 오리엔트 퇴사후, 다시 삼영학원 주간반에 등록. 아침에 학원을 갔다가 저녁에 독서실로 와 새벽 4시 통금해제와 동시에 귀가하는 생활 시작 하였다. 독서실 책상에서 업드려 잠들지 않기 위해 책상 바닥에 팔을 따라 압핀을 거꾸로 붙이고, 책상앞에도 가슴 쪽을 향해 압핀을 박아 책상에 엎드리거나 자세가 흐트러지만 곧바로 압핀에 찔리게 장치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부족한 잠은 압핀에 찔린 상태로 잠을 잘 수 있는 초인간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였고, 책상에서 한참을 자고 난 후에는 잠하나 제대로 이기지 못하는 자신의 약한 의지력이 원망스러워 근처의 산을 올라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작대기로 자신의 온몸을 매질하며 의지를 키우기도 하였다. 그때 당시 함께 공부한 친구들 중 하나인 심정운이라는 친구는 공장에 다니면서 학원도 한번 다니지 않고, 대학에 입학해 졸업을 하고 현재 한국전력에서 근무하며, 또다른 한 친구인 김재구 역시 대학을 어렵게 마치고 한국토지공사에서 일하고 있다...

오로지 공부에 집중하려고 공장에서 하는 회식에서는 고참들의 강압적 요구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술을 입에 대지 않았고,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틈만 나면 책을 보는, 어쩌면 가장 불성실한 노동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핍박과 학대였고, 쉬는 시간에는 샌드백이 되어 놀이기구를 대신하기도 했는데, 결국 갈비뼈에 금이가는 일이 벌어지면서 그 이후로 구타는 크게 당하지 않았던 것 같다. 특히 내가 밀폐된 공간에서 하는 스프레이(손목시계의 문자판에 라카를 뿌리는 작업)작업을 전담하게 되면서 해야될 일 외에는 기계뒤에 숨어 책을 보았는데, 당시 함께 일하던 직장동료와 상사들도 내가 할 일을 다 제대로 한 때문인지, 불쌍해서인지 묵인을 해 주었다...

그런데 여기는 한가지 이유가 더 있었던 것 같다. 스프레이 일은 밀폐된 공간에서 해야 하는데 흩날리는 신나와 휘발하는 아세톤으로 하는 일이라 냄새가 지독해서 누구도 맡으려 하지 않았으며, 나름대로 정밀한 일처리를 필요로 하였는데 내가 그 일을 선뜻 맡았고, 나름대로 일을 깔끔하게 잘 했던 것이다. 그리고 스프레이실은 먼지가 나면 안되기 때문에 나 이외에는 관리직조차도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되는 비밀스런 공간인지라 내가 안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대부분 알 수조차 없었던 점도 있다. 당시 공기정화를 위해 설치한 유리섬유창에서 유리섬유가 발바닥과 손에 보이지도 않게 무수히 박혀 화농이 생기기도 했지만 이는 사실 큰 문제는 아니었고, 화공약픔 때문에 비중격(콧속에서 콧구멍을 분리하는 막)이 비틀어지고 후각을 거의 상실하는 장애를 입었다...

무리한 공부일정과 신체를 학대한 탓에 건강이 극도로 쇄약해져 20점 만점인 체력장테스트에서 누구나 원서만 내면 주는 취하점수인 16점을 받았고, 턱걸이와 100미터, 윗몸일으키기가 끝나자 감독관중 1명이 안쓰러웠던지 “더 해봐야 16점 이상 받기 어려우니 일찌감치 포기해라”고 해서 도중에 체력장 검사를 그만두고 독서실로 돌아왔다. 그때 이미 팔의 장애상태로인해 턱걸이는 하나도 못했고, 윗몸일으키기는 30번을 채 넘기지 못했다. 100미터를 뛸 때 학생들은 감독을 하는 선생님의 눈치를 보며 요령껏 미리 앞에서 출발을 했지만, 아무 연고도 없는 검정고시출신은 제자리에서 엄격하게 측정했더니 죽을힘을 다해 뛰어도 17초인가가 나왔던 것 같다.

그러나 체력장을 빼면 매달 한번씩 치루는 전국 평가대회에서 60만 응시생중 추정 석차가 처음에 18만등이었다가 매달 급속히 올라 마지막 달에는 1800위 정도까지 갈 정도로 그야말로 각고의 노력의 결과는 너무나 고무적이었고, 희망이 구체적으로 보였다. 1981. 11. 에 치러진 학력고사를 마치고 나니 체력장을 합해도 서울대학교 1-2개과를 제외하고는 어느 대학 어느 학과에도 합격이 가능하고, 특히 중위권 대학은 등록금 면제외에 수십만원씩의 월 생활보조금을 받을 수 있는 성적을 얻을 수 있었다. 몇 개 대학 특히 한양대와 중앙대를 저울질한 끝에 학점과 상관없이 3학년까지 등록금 면제외에 월 20만원의 생활비를 지원하는 중앙대학교에 입학원서를 제출하였고, 학과는 가장 커트라인이 높은 법학과를 선택했다. 법학과를 선택한 이유는 그야말로 그 대학에서 가장 합격선이 높다는 단 한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법학과를 졸업해서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보다 오로지 최소한 3년간은 큰 걱정없이 생활할 수 있고, 이제부터는 성적신경쓰지 않고 좀 놀아봐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1982. 1월17일, 대학입문을 앞두고 자전거를 타고 검단초등학교앞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택시에 치어 몇시간 동안 의식을 잃는 대형 교통사고를 당하기는 하였지만 거기서 주는 8만원인가의 보상금도 너무나 고마웠고, 이 돈과 오리엔트퇴직금을 합한 돈으로 입학준비를 무리없이 할 수 있어서 교통사고가 나를 도와주는구나 하는 어이없는 생각도 들었다. 대학에서 받는 월 생계비보조금 20만원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어서(내가 받던 월급의 몇배가 되는 돈이었음), 이 돈으로 집에 생활비도 일부 보태고 내가 공부를 하는데 쓴 외에 당시 공장생활을 하시던 셋째 형님의 학원비를 조금씩 보태 드리기도하였다. 당시 형님은 정수직업훈련원을 마치고 한라건설의 중장비 정비사로 일하면서 고학으로 고등학교 졸업자격 검정고시를 합격한 상태였는데 내가 형님에게 ‘학원비를 보태 드릴테니 직장을 그만두고 1년간만 입시학원에 다녀 대학에 가라’고 권유하였는데, 가족들도 이에 반대는 하지 않았다...

그렇게 1년간 대성학원을 다닌 결과 형님은 우수한 성적을 얻어 건국대학교 회계학과에 4년 생활보조금을 지급받는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대학 2학년때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한 후 현재는 성남에서 공인회계사로 개업중이다. 이후 내가 대학 4학년때 사법시험에 떨어지고 재수를 할 때는 형님이 경제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시기도하였다.형님이 학력고사를 마친후 성적표를 들고 서울대학교에 가겠다고 하였는데, 내가 극력 반대해 생활보조금을 지급하는 학교에 갈 것을 요구하며 심하게 형님과 다툰 것이 지금도 생각하면 못내 가슴 아프다...

4). 나의 대학생활과 사법고시
1982년 소위 82학번의 법학도로서 새롭게 시작된 내 대학생활은 광주사태, 5.18, 군사정권, 제 3세계, 학원민주화, 반독재 등등의 온갖 단어들과 함께 혼란속으로 빠져들었다. 특히 민중과 노동, 노

동계급을 이야기하며 추상적인 단어들로 내가 직접 겪었던 일상들에 대해 생경한 언어로 포장을 하고 마음대로 의미를 부여하며 해석하는 주변은 현실과 이상의 무한한 괴리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한편 그들이 생각하는 ‘역사의 주체’로서의 강한 자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고, 나 스스로 ‘학교에 파견된 노동자’로서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곳이 노동의 현장임을 알게 하는 계기도 되었다.

학교에 입학한 후 법학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 특히 사법시험이라는 제도를 통해 변호사, 판사, 검사라는 사회의 한 주류계층으로 상승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대학 4학년에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후배들에게 강의를 하는 선배를 보며, 사법시험을 통해 또 한번의 ‘신분상승’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대학을 다니면서 두가지를 추구하기로 했다. 소심하고, 소극적이며, 낯을 가리는 나약한 성격을 바꾸려고 하였다. 방법으로 선택된 것은 거친 외양과 행동이었고, 이는 타고난 반항아기질과 어울려 망나니 짓으로 귀결되었다. 혼자서 자전거로 전국을 일주하고, 도보로 경기도 일원을 여행하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한편 개인적 미래를 위해 사법시험을 공부하며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들의 의무, 사회현실에 인식을 확대하고 직접행동에 참가할 의무를 회피함에 따른 심적 갈등은 집회현장에서의 거친 참여활동으로 연결되었지만 결코 운동의 핵심으로의 참여로 귀결되지는 않았다. 한번은 중앙대학교 교정에서 정문진출을 시도하며 투석전을 벌이다 최루탄이 머리 바로위에서 터지며 두피에 손상을 입어 수년간 두피가 허물 벗듯이 계속 벗어지기도 했다. 이후 이한렬 열사가 맞아 사망한 최루탄이 동일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고 끔찍한 상상에 몸서리를 치기도 했지만...

사춘기에 겪은 냉혹한 삶의 현장, 공장노동자로 결코 돌아가지 않으려는 욕구와 장애인으로서 정상적인 회사취업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미래의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그와 관계없이 일할 수 있는 사법시험의 합격만이 유일한 목표로 이미 선정된 후였으며 이러한 개인적 목표설정에 어떤 것도 방해될 수가 없었다. 지금도 함께 일하고 있는 같은 학과였던 친구가 대학 2학년때인가 ‘의식화학습’에 유용한 자료를 주면서 함께 할 것을 권했었다. 그러나 나는 "모든 자원이 대학시절에 소진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 나 개인적으로는 좀더 역량을 키운 후에 참여하겠다." " 지금은 네가 참여하고 나중에 내가 사회운동에 참여하게 될 때 함께 하자"는 비굴한 논법으로 거절했다. 이후 그 친구는 4학년 때 대학졸업이라는 기득권을 가지지 않기 위해 구속과 제적이 분명한 ‘미상공회의소 점거’에 나섰고, 결국 제적되고 구속되어 근 1년간 영어의 생활과 속칭 위장취업을 한 다음 현재는 나와 함께 사무실에서는 사무장으로, 지역 시민운동에서는 동료로 언제나 함께 하고 있다...

1983년 2학년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사법시험공부를 시작. 그해 겨울 구례 화엄사 금정암으로 속칭 ‘절간공부’를 하러 갔다. 이때 또다시 인간의 능력이란 무한정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된다. 그때 단 2개월간 암자에서 친구 2명과 함께 공부를 했는데 2개월간의 독서량이 근 1년간 학교에서 한 공부량과 거의 맞먹었다. 그때 암자에서는 나무를 때 난방을 했는데 옺나무를 때는 바람에 온몸에 옻이 올라 심하게 고생을 했던 기억이 있다. 또 백일기도를 온 할머니 한분이 나무가 없어 근처 야산에서 생솔가지를 꺾어 잘 타지도 않는 불을 때느라 눈물 콧물을 흘리는 것이 보기 안쓰러워 뒷산에 나무를 하러 간 일이 있었다. 아마 충분히 시주를 못해서 연료를 자신이 직접 해결해야 하는 입장이었던 모양인데 어릴적 실력을 발휘한답시고 눈발이 제법 휘날리는 어느날 절에 있던 지게를 지고 암자 뒷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

어깨를 으쓱이며 산아래로 하거 나무를 한짐 해 지게에 올린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지게가 예상과는 달리 좌우 균형이 잡히지 않아 자꾸만 뒤뚱거리는 것이었다. 지게작대기로 겨우 균형을 잡으면서 가파른 산길을 내려오다 결국 중심을 잃고 넘어지는 바람에 상당한 거리를 다리품 한번 팔지 않고 내려오긴 했는데, 문제는 온몸에 타박상을 입었다는 사실이었다. 앉은뱅이 책상에 가만히 앉아 공부 하는데에는 큰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며칠간은 꽤나 고생을 했다, 허나 내 손을 잡고 고마워서 눈물까지 글썽이며 대견하게 생각해 주시던 할머니 행자님의 눈빛을 보면서 그 정도의 고생은 사실 아픔이라하기 보다도 자랑으로 느껴질때가 더 많아서 기분만은 나쁘지 않았다.

1984. 3학년때 사법시험 1차에 합격한 후 1985. 7월 2차시험을 치렀는데, 종합성적은 중상위권이었는데 상법 점수가 39.66으로 과락을 맞아 낙방하고 말았다. 원래 시험문제는 칠판에 붙인 후 10분인가가 지나면 철거하므로 답안지에 옮겨 적어 놔야 하는데 보통은 시험이 끝날 때까지 칠판에 그대로 걸어두기 때문에 3일째 되면서 답안지에 미리 적어놓지를 않았다. 그런데 시험 감독관이 시간이 지났다는 이유로 3문제중 마지막 문제를 보여주지 않자 사정을 해서 끝까지 부탁을 했으면 보여 주었을 것인데, 경솔하게 기억난 대로 답안을 쓰다보니 비슷하지만 다른 문제(수표보증과 수표지급보증)를 쓰고 말았다. 시험이 끝난 후 긴가민가하며 불안해 하고 있는데, 결국 엉뚱한 문제를 쓴 것이고, 채점과 3명중 1명이 과락점수로 1점이 부족한 39점을 주어 결국 39.66으로 상법과락으로 낙방하고 말았다. 앞으로 1년간 공부하는데 쓸 돈도 없고, 누가 도와줄 사람도 없는데다가 경솔함으로 인해 충분히 합격할 수 있는 것을 떨어지고 나니, 스스로가 한심스러워 또다시 벽을 주먹으로 마구 내리치는 자학행위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역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더니 입영신체검사를 받았는데, 좌측팔의 장애, 코의 손상등 산재의 후유증으로 인한 장애 때문에 제 2국민역으로 편입되어 군입대를 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당시 신체검사를 담당하던 군의관이 한 말 ‘이거 완전히 개판이군’이라는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나의 왼쪽팔 엑스레이와 코의 검사결과를 보고 한 말인데 겉은 멀쩡한 젊은 놈이 완전히 속은 골병이 들었다는 말로 들렸다. 군대에 가지 않고 고시를 보기 위해 돈을 들여 억지로 대학원에 진학하는 비용을 아끼게 되었다. 그리고 아버님의 도움과 셋째형님의 도움으로 1986년 1차와 2차를 동시에 합격하게 되었다.

장애와 관련해서 나는 산재사고로 입은 왼쪽팔과 코의 장애 때문에 결국 입영을 면제받았다. 사춘기때 비틀어진 좌측팔을 숨기기 위해 한여름에도 긴 남방을 입고, 팔을 살짝 비틀어 휘지 않은 것으로 보이게 하려는 숨은 그러나 치열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열등감으로 여자친구를 사귄다는 생각은 해 보지도 못했을 정도였지만 그 장애는 결국 나의 인생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군대를 면제받음으로써 우리나라 젊은 남자들이 모두 바치는 2년 이상의 청춘시절을 더 사적으로 가질 수 있었고, 대학 졸업후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고도 적은 돈으로 고시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나는 원래 장애자로서 교련이나 문무대, 전방입소를 면제받을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라도 군대라는 것을 조금은 이해할 필요를 느껴 교련을 모두 이수했다. 누구나 고등학교에서 제식훈련을 받았으므로 대학 교련시간에 제식훈련이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지만 나는 처음해보는 훈련인데다가 좌측팔의 장애로 도저히 물리적으로 ‘절도있는’ 자세가 나오지 않았다. 교련시간에 강사는 나를 혼자 불러내 총검술을 시켜보고는 혀를 끌끌 차며 ‘춤을 추고 있네’라며 빈정거렸지만, 어차피 한번은 겪고 싶었던 일이라 꾹 참았다. 남들이 교련(문무대와 전방입소)를 거부하며 목숨까지도 던지는 세태에 나는 피할 수 있는 교련을 일부로 수강했고, 전방입소와 문무대입소를 기꺼이 참여했다...

1986. 3월, 고시공부를 하던 중 아버님의 위암이 재발했다. 거의 사망이 확실시되는 위암재발사실을 전해 듣고 원자력병원에서 아버님을 뵌 후 고시공부를 한다며 다시 신림동으로 돌아가 그날밤 실림동 4거리가 떠나가도록 통곡을 하고 돌아다녔다.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의 위로 덕이었는지, 아니면 인간의 한계인지 몇시간 울고나니 더 이상 눈물도 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당시 어려운 시기에 대학까지 다니고(결국 중퇴하셨지만) 학식도 높았지만 결국 상대원시장의 청소부로 일생을 마치게 된 분이어서 그런지, 나의 공부에 대해서도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았으며, 나아가서는 나의 공부가 집안살림절약에 도움이 안되고 낭비적 요인이 있다는 이유로 어쩌면 방해까지 했던 분이었다.

공장을 잠시 쉬고 있을 때는 밤에 불러내 새벽까지 청소일을 돕도록 요구했고, 전기불이 아깝다는 이유로 공부가 불가능할 정도로 조명을 낮추기도 했다. 고입검정고시를 볼 때는 교통편이 나빠 학원측의 주선으로 수원에서 잔 후 아침에 시험을 치렀는데 아버지는 숙박비를 아껴야 한다며 나를 혼자 시험당일 새벽에 수원가는 버스를 타고 시험을 치도록 강요했다. 숙박비조차도 내가 공장생활을 하며 번 돈으로 내가 내는 것이었음에도 그러한 요구를 하는 아버지가 야속하고 미워 가방을 바닥에 떨어뜨리며 반항을 했지만 시골에서의 어릴 때처럼 때리지는 않았다. 학력고사를 마치고 수원교육청에서 학력고사 성적표를 교부하던 날도 아버님은 자신이 수원출장을 가는 길에 찾아올테니 차비 버리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지만, 이미 문제집을 구입해 가채점을 해 보고 대학들의 입학요강상 돈을 받으며 대학을 다닐 수 있을 정도의 점수대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나는 차비 몇백원 때문에 그 확인을 늦출 수가 없었다. 그때까지도 아버지는 물론 다른 가족 모두가 나의 성적이 어느정도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직접 성적표를 찾으러 수원까지 간 것을 안 아버지는 대노했다. 예상한 대로의 고득점을 얻은 시험성적통지서를 들고 인생의 전환점에 들어선 기쁨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니 노한 아버지는 나의 앨범에서 내 피와 땀의 결과를 상징하는 고입검정고시합격증과 대입검정고시 합격증,그리고 내가 공부하던 책들 중 일부를 갈기갈기 찢어두고 나가신 후였다. 이후부터 나는 아버지와 나의 인생에 대해, 나의 진로에 대해, 나의 진학과 학과선택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상의하지 않았다. 예상컨대 아버지는 기대하기조차 어려웠던 나의 성취에 대해 사실은 매우 놀라셨을 것은 분명하였을것이다. 이 때문인지 그후로 아버지는 나의 모든 것에 대해 일체 관여하지 않으셨고 못된 생각을 하고 있던 나 역시 이러한 아버지의 소외를 즐겼던 것 같다...

그렇게 내가 대학에 다니던 시기, 어느날 우연히 그런 입장에 있던 아버지가 누군가 손님과 나누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아마도 내가 사법시험 1차를 통과한 후였을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때 아버지는 그 손님에게 자랑스런 목소리로 ‘내가 법대를 가라고 권했다’고 말씀하시고 계셨다. 이때는 내가 어느정도 아버지에 대한 미움을 거두고 있을 때였는데, 그때도 아버지는 자랑스러웠을 것이 분명한, 그리고 주위로부터 칭찬을 듣는 자식과 한마디 대화조차 제대로 나누지 못하면서도 그나마 남들앞에선 그런 사실을 숨기며 애써 자부심을 드러내려고 하시는것을 보면서 나는 순간 마음 한곳에 말못할 얽히고 서려진 그런 감정으로 저려오기도 하였다. 그렇게 나를 어렵게 만들었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장벽은 쉽사리 무너지진 않았지만 처음으로 아버지가 측은하게 느껴져 왔던것이다. 훗날 아버지가 돌아가신후 나에겐 이일이 두고두고 가슴을 파고 드는 끝없는 한스러움과 비탄으로 남게 되었다...

4학년때 장학금조차 끊어진 상태에서 끝날 시기를 알 수 없는 고시공부를 다시 시작할 때 아버지는 고된 청소부일을 하시면서 사용하다 버린 생리대가 뒤섞인 쓰레기더미에서 주워모은 종이와 고철 등 잡동사니를 팔아 비밀이 모아둔 돈을 털어 고시원 하숙비를 내 주셨고, 그나마 많은 장학금을 받아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던 셋째 형님에게도 나를 도와주도록 어려운 부탁을 하심으로써 비로소 나에게 아버지로서의 권위를 어느정도 회복하고 있던 중이었다. 원자력 병원에서 돌아올 때가 버드나무 가지가 움을 틔우고 있을 때였다. 봄이 깊어지고 버드나무 가지가 피어나는 것처럼 아버지의 병세가 회복되기를 바랬다. 예수님인지, 부처님인지 조상인지도 모를 존재에게 아버님의 쾌유를 빌고 또 빌었다. 의사들의 책임회피를 위한 무리한 예후진단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나와 가족들의 바램과 기도때문인지 3개월밖에 못산다던 아버지는 정말 나뭇잎이 피어나는 것과 함께 어느정도 기력을 차리기 시작했고, 셋째형님은 병중의 아버지를 모시고 여행을 시켜드리는 나는 결코 하지 못할 효도를 다 했다...

병세가 의사들의 예상보다 빨리 진행되지 않으면서 아버님이 지켜보시는 가운데 나는 1차와 2차시험을 무난히 통과했다. 크게 표현하시지는 못했지만 아버님의 기쁨은 얼마나 크셨을까. 사망선고를 받고 병중에서 이를 악물며 의식을 지키려는 아버님을 보며, 아버님이 나의 합격을 지켜보기 위해 꺼져가는 생명을 악착같이 유지하고 계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2차 발표가 나고 가을이 다가오면서 시드는 나뭇잎처럼 아버지의 의식은 점차 사라져 갔고, 몰핀으로 고통을 억누르는 일도 일상사가 되더니 아버지는 나의 생일에 내가 지켜보는 와중에 거의 나의 출생시간에 한많은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 확인된 직후 학력고사를 보기 위해 독서실에서 잠을 자다 생긴 증상, 배의 근육이 마비되며 뭉치는 현상이 다시 발생해 나도 오랫동안 꼼짝을 할 수 없었다...

아버지에 대한 죄스러움, 안타까움은 언제라도 해소될 것 같지않다. 하필이면 내 생일날 전날이 아버님 제삿날이라니....

5).민주주의에 눈을 뜨다


나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다. 고입검정고시는 영어 알파벳도 모르는 상태에서 과락을 면하고 합격했고, 대입검정고시때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음악과 미술같은 과목이 선택과목이 됐으며, 군사쿠데

타로 인한 본고사폐지는 내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공돌이 월급 몇배의 돈을 받으며” 대학을 다닐수 있게 해 주었고, 내가 대학에 입학 즈음에 사법시험 정원이 300명으로 세배 가까이 늘면서 나같은 둔재도 합격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었다. 대학 4학년에 어이없는 실수로 실패하기 하였지만 그 1년의 재수기간은 나의 인생에서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해 주었다.

그 1년에 나는 많은 사상적 변화를 겪었고, 오히려 그 기간에 내가 당면했던 사춘기시절의 고통이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이자 사회적 문제임을 알게 되었으며, 나에게 지워진 역사적 책임을 통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4학년때 합격했으면 나는 분명 현직 판사나 검사를 선택했을 것이고, 그 선택에 또다른 핑계를 만들어 변명하여 그 선택을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1년의 고시 재수기간에 합격후 변호사로서 사회운동에 참여하려는 생각을 거의 굳히게 되었고, 또 한편으로 하나님에게 선량한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 기회를 달라고 서투른 기도를 하기도 했다. 나의 주변상황에서 매월 수십만원의 돈을 써가면 1년 이상 고시공부를 더 지속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1987. 2년간의 사법연수원과정에 들어가면서 나의 인생은 좀더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되었다. 1987. 1988년은 우리사회의 대 변혁기였다. 거의 혁명에 가까운 사회적 분위기는 나를 포함한 사법연수생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고, 사법연수원내에서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좋은 동료와 선후배를 만나면서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미래의 희망을 함께 나누었다. 연수원수업이 끝나면 뜻이맞는 동료들과 함께 서울시내에서 열리는 가두집회에 참여하고, 미도앞에서 경찰병력이 무장해제당하는 현장에 함께 하기도 했으며, 6.29. 며칠전에 열린 성남시내 집회때는 종합시장을 넘어 오면서 차도와 인도에 사람들이 넘치고 모든 사람들의 발걸음이 오로지 한방향 시청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피부로 느꼈다.

시청앞에서 시위대와 경찰이 접촉하려는 순간 공무원을 상징하는 노란색 신분증을 휘두르며 지휘관을 찾아 무력진압을 자제하라고 하고, 정신없는 경찰지휘관이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무슨 대단한 사람인 줄 알고 잠시 대화를 하는 도중 시위대와 경찰이 붙어버려 집안이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잠시후 시위대측에서 뭔가가 날아가고 동시에 최루탄이 터지면서 시위대가 흩어졌지만 경찰뒤쪽에 서 있던 나는 시위대를 따라 피할 수가 없었다. 잠시후 정신이 든 경찰은 내가 단순한 시위대중 1명에 불과한 것을 깨달았는지 나를 군화발고 걷어차더니 곤봉을 휘둘러 댔다. 나는 군화에 채여 아픈 몸을 끌고 꽁지빠진 개처럼 골목길로 도주해야 했다.

사법연수원에 사상 최초로 대학의 동아리에 가까운 노동법학회등 각종 학회가 구성되고, 대학생들의 농활을 본 따 ‘무변촌 법률봉사활동’을 기획하다가 연수생 전원이 한명씩 불려가 ‘너희들은 대학생이 아니라 공무원’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야 했다. 결국 사법연수원에서 제적될 수도 있는 대형사건을 치고 말았다. 대법원장임명 문제를 둘러싼 논란의 와중에 열린우리당의 문병호 의원등과 몇 명이 신림동의 여관방에 모여 사법연수생 집단서명을 모의했다. 신림동의 여관방에서 밤을 세워 집단모의를 한 후 민태식변호사와 함께 성남의 우리집으로 와 4벌식 수동 타자기로 사법개혁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작성했다. 다시 모인 우리는 실무수습을 나간 연수생들을 법원과 검찰을 찾아다니며 서명참여를 설득했고, 종로의 어느 음식점에 모여 서명을 취합한 후 이를 언론에 공표하는 무모한 일을 감행했다.

아무리 세상이 폭발적으로 변하는 시기라고는 하지만 공무원의 신분으로 집단행동과 정치개입이 금지되어 있었고, 더구나 수습시기에 있는 학생의 신분이었으므로 문제를 삼으면 제적은 물론 집단행동으로 형사처벌도 감수해야 했다. 대중의 생명을 건 투쟁으로 온 사회가 커다란 역사의 변곡점을 넘어가는 힘겨운 시기에 나의 미래와 안위를 위해 외면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정부는 사회의 노도와 같은 요구를 점진적으으로 수용할 태세였으므로 연수생들이 요구도 대부분 받아들이게 되어 누구도 징계외 제재를 당하지는 않았다. 이 역시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미 내친 걸음에 한걸음 더 나갔다.

우리는 연수원측의 제지로 ‘무변촌 봉사활동’을 포기하는 대신 각종 운동단체에 지원을 나가기로 결정했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나는 처음에 성남 YMCA의 시민중계실에 상담원으로 지원을 나오면서 당시 빈민운동가 이상락, 건설노동자 이태영,이용원 총장등을 만났다. 다음으로 서울 종로구에 있던 ‘석탑’이라는 노동운동단체에 노동법상담역으로 자원봉사를 나갔다가 결국 이들중 일부가 성남에 일터라는 노동운동지원조직을 만들 때 변호사개업을 준비하며 이들과 함께 참여했다. 존경하는 조영래 변호사 사무실에 자원봉사를 나가면서 박석운소장과 박주현변호사, 김선수 변호사를 만났고, 이분들로부터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6).인권변호사의 길을 걷다


연수원에 입소한 후 바른 의식을 가진 동료들과 비밀스런 모임을 가지며, 나는 역동성이 있는 변호사의 길을 가기로 마음먹었고, 앞으로 지역운동이 운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을 100% 받아들여 성남에서 개업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나이도 어리며, 중고등학교조차 나오지 못했을 뿐 아니라, 경력이라고는 남의 이름으로 공장노동자 생활을 한 것이 전부인 내가 과연 변호사로서 생존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것이 문제였다. ‘공부못해서 변호사 개업했다’는 말 듣지 않으려고, 자존심을 유지하기 위해사라도연수원의 시험공부도 열심히 했고 현직임용이 가능한 나름대로 괜찮은 성적을 얻었다.

안동에서 검찰시보생활을 하면서 마 약사범과 퇴폐사범을 단속하고, 허용범위내의 수사를 진행하며 검사직에 많은 매력을 느꼈고 변호사 개업을 하겠다는 마음이 일시적으로 흔들릴 때도 있었다. 그러나 4개월의 검사시보생활을 마치고 상경할 때쯤 안동에서 처음 시보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어떤 사람으로부터 ‘처음에 볼 때하고 달리 사람을 노려보고 추궁하는 듯이 보여 섬뜩할 때가 있다’는 말을 듣고 검사지원을 영원히 마음속에서 지워버렸고, 안동지청의 시보를 마치고 책보따리를 싸들고 나오며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정적인 판사생활은 체질에 맞지 않았고, 결국 개업을 하기로 확정하였는데 문제는 예상되는 가족들의 반대와 과연 변호사로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연수원시절 ‘기모임’에서 변호사개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위해 변호사에 대한 일반시민들의 의식을 조사한 것이 있었는데, 지금은 정확히 기억나니 않지만 시민들을 변호사에 대한 이미지로 첫 번째가 돈이많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사기꾼이다 라는 것이었으며, 인권옹호에 도움을 준다는 항목은 네 번째 였으며, 첫 번째와 두 번째가 무려 70%를 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황인철 교수는 최고의 고객층은 한번 상담을 하거나 소송을 의뢰해서 좋은 결과를 얻은 사람들이라는 말을 듣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사기꾼이 되지 않고, 돈만 밝히지 않으며, 성실하게 상담을 해 주고, 질 사건을 수임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말씀들은 하지 않지만 집안에 ‘판검사’ 한번 나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을 가족들, 특히 어머니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였다. 사회운동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은 어머니, 그리고 가족들을 위해 평생 헌신해 온 어머니에게 차마 ‘성적은 되지만 판검사 임용을 포기하고 사회운동을 하기 위해, 내가 겪은 험한 현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변호사 개업을 하겠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결국 가장 나쁜 방법을 선택하고 말았다. 어느날 나는 어머니에게 “성적이 부족해 판검사 임용이 불가능하다”는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지금은 어느정도 눈치를 채고 계시지만 언제 날을 잡아 어머니께 거짓말을 한 것을 사죄드려야겠다고 마음먹으면서도 아직도 하지 못하고 있다. “굶어죽는 변호사 못봤다”는 말에 기대를 가지고 무모함을 발동해 1989. 3. 연수원동기와 성남시청앞에서 공동으로 개업을 했다. 은행과 신용금고를 찾아다니며 대출을 받으려고 하였지만 나이 27살(호적으로는 15살)의 미혼 청년에게 돈을 빌려 주려는 곳은 없었다. 마이너스 대출 500만원과 돌아가신 조영래 변호사님의 소개로 국민은행에서 빌린 500만원으로 어찌어찌 개업은 했지만 앞길은 암담했다. 그러던 중에 첫 번째 사건을 맡게 됐다. 형사사건이었는데 그 내용이 참 기가막힌 것이었다, 어떤 종교단체에 가입한 아들이 종교단체의 의식을 집전하는데 필요한 돈 3,000만원을 마련하기 위해 친구인 동료신도와 함께 짜고 자기가 납치당한 것처럼 위장하여 아버지를 위협해 몸값으로 돈을 받은 사건이었는데, 자식은 아들이라는 이유로 방면되고 친구가 구속되게 되자 아들이 시청앞에 있는 내 사무실로 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하는 말이 자기들은 지금은 돈이 없고, 우선 구속영장을 기각해주면 150만원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형사사건 수임료가 얼마쯤인지도 몰랐는데 그가 제시하는 금액은 매우 큰 금액이었다. 형사사건은 수임료를 미리 받지 않으면 나중에 받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 길이 없던 나는 그의 말을 믿고 나름대로 성심성의를 다해 변론을 하여 구속영장이 기각되었는데, 그들은 그 이후로 종무소식이었고, 이후 이들의 행방은 지금도 알지 못하고 있다. 지금 생각하면 그들은 일부러 초짜인 나를 찾아와 사기를 친 것으로 보이는데, 27살의 갓개업한 무경력의 애송이 변호사를 찜쪄먹은 그들과 그에 대한 어린 나의 모습이 우습게 회상된다.

1989년 개업해부터 그 다음해까지 수입은 없었지만 하여튼 일거리는 무지하게 많았다. 지역운동을 하겠다고 성남에 개업을 했으니 지역의 현안을 내몰라라 할 수 없었고, 사람들은 변호사도 변호사 나름이고 빛좋은 개살구라는 사실은 모른채 요구사항은 엄청나게 많았다. 사무실 1층에 있던 생맥주집의 10-20만원의 외상갚도 제대로 갚지 못하면서 좌우간 하는(?) 일, 아니 쫒아다니는 일은 무지하게 많았다. 집회현장의 집회와 시위에 참여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어떤 경우에도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될 것 같은 이상한(?) 목사님들과 어울려 화염병을 싣고 날랐고, 가끔씩 시우가 격화되면 한두개씩 투척하는 행위도 마다하지 않았다. 나는 시위할 때는 시위대였고, 시위가 끝난 후 또는 시위대가 체포된 때는 노상변호사였다. 화염병투척혐의자가 체포되면 파출소에 쳐들어가 증거제시를 요구하고 형사소송법, 불법체포를 운운하면 당시 경찰은 대부분 시위대를 놓아 주었다. 당시는 변호사가 아주 귀해서 보통은 검사, 판사급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는지, 파출소의 순진한 경찰관들은 아마도 처음으로 파출소에 찾아온 변호사의 존재를 대단한 것으로 착각하였을 것이다...

1989년 말경으로 기억된다. 미상공회의소를 점거하고 제과 구속을 당한 후 구로등지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친구와 함께 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이 문제를 포함해 동료변호사와 약간의 이견이 있어 동업관계를 청산하고, 용감하게도 법원앞에 단독 사무실을 개업했다. 약 1년의 시간이 지나며 작은 사건이지만 수임사건이 있었고, 미래에 대한 불안함도 어느정도 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독자적인 활동과 판단이 필요하기도 했으며, 함께할 친구의 자리도 필요했다. 혼자 사무실을 얻은 후부터 본격적으로 노동현장 지원활동에 나섰다. 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위해 밤에 비밀리에 만나는 모임에 참여하기 위해 자정이 넘은 시간에 3공단의 공장담을 넘었고, 최루탄연기 가득한 길에서 노동자 시민들과 함께 했다.

수십명에 이르는 구속시민과 노동자들에 대한 무료변론활동에도 많은 시간을 투여했지만 노동자들의 억눌렸던 욕구가 분출하던 시기에 좀더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지원을 위해 1991년경 안양로 선배 등과 함께 이천상담소를 개소하고 매주 월요일에 노동상담을 위해 이천에 출장을 다니기도 했다. 광주노동상담소의 개설과 운영에도 참여하였고, 분신노동자의 시신을 지키며 병원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밤을 세웠다. 노동상담역으로 함께 일하게 된 친구외에 세상의 거친 풍랑을 피해온 연성만 선배 2인이 노동상담역을 담당하면서 사무실이 의뢰인이 아닌 노동자들로 북적이기도 했다. 노동자의 단결과 최소한의 기본권 확보가 어느정도 이루어지면서 노동조합결성 지원, 노동문제 상담은 노동단체와 노동조합이 어느정도 자체적으로 소화할 수 있게 되면서 나의 역할에 어떤 변화가 필요함을 느끼게 되었다...

7).성남시민모임의 활동


<성남시민모임 발족>
당시 성남에는 연대회의라는 공식적 조직외에 목회자와 사회운동단체 대표들이 매주 금요일에 모여 지역 현안을 논의하는 금요회라는 조직이 있었는데, 여기에 천용욱 성공회신부, 이용원 와이엠

씨에이 총장, 이상락의원, 신상진원장, 전현철 선생, 김광수목사, 김해성 목사, 연성만, 내가 참여했다. 서로 다른 장에서 활동을 하고 있지만 사회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같은 것이었기에 매주 금요일에 만나도 할말이 많았다. 제도적인 민주주의가 어느정도 정착하면서 민주주의를 정착 실현시키기 위한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었는데다가 계급운동이 모든 영역을 포괄하지 못하게 되면서 그로부터 아탈될 수 밖에 없는 자원들을 몪어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었다. 이전에는 연대회의라는 하나의 틀에 담겨져 별다른 잡음없이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운동의 일선에서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사회적 환경의 변화와 함께 각자의 위치에 맞는 구체적인 역할을 찾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여기에 연대회의의 운영이 원활하지 못하고, 일부 인사들이 직접적 정치참여를 선언하게 되면서 그로부터 소외된 부분의 역할로서 그리고 새로운 영역의 역할로서 시민운동조직의 필요가 자연스럽게 제기되었다. 특히 지방자치의 본격적인 실시는 주민자치라는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주민자치를 통해 민주적 과제를 해결하자는 움직임을 더욱 바쁘게 하였다. 1994년 초부터 금요회 구성원을 중심으로 시민단체를 구성하자는 논의가 시작되고 발기인대회를 거쳐 1995. 3. 30. 400여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성남시민모임’이라는 시민단체가 발족되었다.

처음 개업하며 성남에 발을 내 디딜때 성남의 모든 것을 이해하기까지는 말을 하지 않고 의문의 여지없이 명백히 요구되는 역할만을 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나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 정도로 성남과 성남의 사람들을 이해하기까지는 5년 이상이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고, 당시에도 여전히 이해가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역할은 직위가 아니라 실천과 행동에서 결정되는 것이며,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남에게 맡기고 남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중요직책을 맡지 않고 사무국 차장을 맡았다. 그리고 이후에도 그 원칙은 계속 지켜졌으며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999. 3. 에 고사에도 불구하고 강권에 의해 성남시민모임 집행위원장을 맡기까지 그 원칙은 그대로 지켜졌다.

시민단체의 역할은 단순만 문제제기가 아니라 뚜렷한 감시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고, 시민단체는 권력과 기득권세력으로부터 두려운 존재로 인식되어 존재 자체만으로도 견제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고, 이 점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민선 1기 오성수 시장과의 대립과 갈등>
오성수 시장은 관선시장시절부토 장학금과 임대아파트 건축, 노련한 언론플에이, 노태우정권과의 관계등을 매개로 정당의 공천없이 무소속으로 1995년 6월 민선시장에 당선되었다. 신생시민단체로서 감시와 견제활동을 하기 전에 존재를 인정받는 것이 급선무였다. 마치 노동조합이 결성되면 회사측으로부터 상대방으로서의 존재를 인정받는 것이 처음의 일인 것처럼. 그런데 오성수 시장은 수십년간의 관료생활을 거친 사람으로서 시민단체라는 용어나 존재자체를 들어보지 않았을 가능성이 큰 사람이어서 당연히 신생 시민단체에 대해 극도로 권위주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성남시민모임이 시정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표명하자 ‘시정에 대해 왈가왈부하려면 시장이나 시의원에 출마해 당선된 후에 하라’고 공언했다. 그의 권위주의적인 태도는 시민사회의 존재나 지방자치의 의미를 전면 부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연스레 그와 시민모임은 대립적인 상태로 들어갔다.

<서울남부저유소(대한 송유관공사) 건립저지운동>
1996년 봄경 분당의 코앞 석운동의 산위에 지상시설물로 200만 베럴 규모의 정제유 저장탱크를 만드는 사업이 시작되었다. 마침 이집트의 아시우트라는 지역에서 저유시설의 파괴로 홍수와 함께 저장된 정제유가 불에 붙은 상태로 하류의 마을을 덥치는 사태가 보도되었다. 더구나 민간자본의 요구에 따라 대규모 녹지를 훼손하며 안전에 대한 고려없이 지상시설로 초대규모의 저유시설을 건립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었다. 더구나 정유회사들이 연합해 주식회사를 자신들의 기업이익을 위해 회사를 설립하며 국책사업을 빙자해 “공사”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정부출자까지 얻어내는 부도덕함이 숨어 있었다.

나의 직접행동이 필요한 때라고 판단했다. 즉시 환경단체와 지역주민조직을 묶어 ‘서울남부저유소저지공대위’를 구성하고 분당주민들을 직접적으로 설득하는 작업에 나섰다. 분당의 모든 단지의 부녀회장과 총무, 관리소장을 한사람씩 만나 설득해 나가는 한편 모든 단지에 홍보 전단을 직접 투입하고, 아파트 단지별로 내가 직접 마이크를 잡거나 해당 단지의 부녀회장이나 관리소로 하여금 구내방송을 실시하게 했다. 비오는 날에도 근 1,000명의 시위대가 자발적으로 중앙공원에 참여할 정도로 주민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노인들을 중심으로 한 현지 주민들의 눈물겨운 투쟁도 있었다. 공사차량의 불법진입을 막기 위해 할머니들이 나체로 시위를 벌이는 민망한 장면도 연출되었다.

확대된 주민여론을 바탕으로 건축허가권을 가진 오성수 시장을 압박했다. 저유소시설의 건축허가를 내주지 말라는 요구를 전면에 내세웠다. 주민들의 요구와 정부 및 정유재벌들의 압력사이에서 고민하던 오시장은 처음에는 대책위와 주민들의 접촉을 막는 한편 선전전을 통해 대책위의 주장을 반박하다가 결국은 타협을 통해 1997. 5월의 어느 월요일 “안전시설, 환경문제, 교통문제에 대해 3개월간 정밀조사를 거쳐 그에 따라 건축허가여부를 결정한다”는 합의를 이끌어 냈다. 주민들의 승리가 눈앞에 있었다. 그런데 그 합의가 나간 이틀후부터 성남에 경찰청 특수수사대를 자칭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오성수 시장의 비리를 조사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수사를 빌미로 오성수 시장에 대한 대대적인 압박이 진행되었고, 결국 오성수 시장은 합의 5일만에 약속을 뒤집고 그 주 토요일에 전격적으로 건축허가를 내 주고 말았다. 다음주 월요일 아침에 허가소식을 듣고 시청으로 가 항의방문온 현지 주민들을 만났는데, 나는 이때 일부 주민들로부터 멱살을 잡히고 말았다. 내가 뇌물을 받았고 오성수 시장이 나의 동의하에 건축허가를 내 주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는 것이었다. 오성수 시장에 대한 배신감과 허탈함, 그리고 무고함을 증명해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 시장실 앞 농성을 시작했다. 시청 2층 복도에서 짜장면을 시켜먹으며 오성수 시장의 면담을 요구하고, 어린 마음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입에 담기 어려운 육두문자를 내뱉고 말았다. 욕설을 하니 조금은 시원했지만 해서는 안될 행동이었다. 시민운동과 동네싸움을 구별하지 못한 치기였다.

민선 2기에도 결국 반복된 일이었지만 이때 처음으로 시청 직원들에 의해 멱살을 잡혀 청사 밖으로 끌려 나왔다. 6시가 되자 퇴근시간이 되었다는 이유로 시청 직원들이 강제로 끌어냈고, 그 와중에 양복이 찢어지는 수모를 당했다. 건축허가가 나자 이를 직접 막는 것은 불법이었고, 변호사로서 주민들에게 구속과 처벌이 수반되는 불법행동을 요구할 수는 없었다. 결국 저유소는 건축되었고 남는 일은 민의를 배반하고 정유재벌의 이익을 도모한 오성수 시장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었다. 어떤 경우에도 민의를 배반한 민선시장을 응징해야 했지만, 주민소환제도가 도입되지 않아 민선시장은 형사처벌이 확정되는 외에는 그 직위를 박탈하거나 제재를 가할 방법이 없었다. 형사처벌역시도 처벌자체가 워난 힘든 일인데다가 가사 성공해도 재판과 확정에 수년간이 걸려 결국은 임기를 채울 수 있었다. 남은 한가지 방법은 재선을 막는 것이었다.

오성수 시장의 잘못된 행정을 찾아내고 조사해 언론사와의 협조를 받아 이를 폭로해 나갔다. ‘부패자료집’을 발간하고, 감사원에 감사를 요구하고, 측근을 위해 불필요한 토지를 매입한 것에 대해 시장을 배임죄로 검찰에 고소하고 그의 실정과 반민주적인 행위를 시민들에게 알릴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이 일에는 지역의 모든 민주세력의 이해관계가 일치했으므로 이 일을 두고 분열은 있을 수 없었다. 지역 모든 운동세력은 오성수 시장과의 대립전선에서 동지적 입장을 유지했고, 노동, 빈민운동, 시민운동 어느 영역도 예외가 없었다. 오성수 시장은 송림고등학교 이전과 관련해 또 한번의 악수를 두었다. 그는 송림고등학교를 맹산으로 이전하고, 고등학교 자리에 다세대 주택 건축허가를 낼 수 있도록 용도변경을 해 주는 일을 추진했는데, 분당환경시민모임 등은 이 일을 적극 저지하고 나섰다. 오성수 시장은 이를 밀어붙였고 나는 이를 저지하는 일선에 섰다.

1998. 초 지방선거가 다가왔다. 지역 운동세력의 일부는 김병량후보와 연대했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던가. 1998. 6월의 제 2기 민선시장선거에서는 언론과 성남의 시민사회로부터 융단폭격을 받아 ‘잠롱’에서 ‘잡X'로 격하된 오성수 시장은 분당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낙선했고 결국 뇌물수수혐의로 구속되었다. 시민단체와 구 정치세력간의 한판 싸움이 한차례 시민사회의 승리로 끝나는 순간이었다. 2기 민선시대에서 민선시장 선거에서 상대의 적인 김병량 시장이 당선되자 나를 포함한 성남시민모임의 집행부 일부는 일시적으로 혼돈상태에 접어 들었다. 감시 견제해야될 대상이 사라지고 우호적인(?, 이후 착각으로 밝혀졌지만) 시권력이 들어서자 정체성에 혼돈을 느끼기 시작했다. 시집행부측 인사들과 시민단체의 구성원이 겹치게 되고, 시에서 시민단체를 껴안기 위해 각종 위원회등에 참여를 권유했고, 또 민관협력이라는 명분아닌 명분을 내세워 시민단체의 정체성에 손상을 입힌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지 못한 채 그에 참여했다.

시민모임의 주요 간부 상당수가 시정개혁위원회에 참여했고, 나는 재단법인 성남시 장학회의 감사로 참여했다. 시 행정부와의 협조를 중시하다 보니 푸른학교문제등을 둘러싼 분쟁에서 객관성을 유지한다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시민단체로서의 정체성의 의문이 가는 판단을 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남시민모임의 달라진 위상을 실감하며, 한편으로는 장학회의 감사로서 제대로된 행정을 펼치기 위해 노력했다. 장학생 선발에서 심사를 거의 다시 하다시피 하며 억울해 할 대상자를 구제하고, 조직의 안정을 위해 정관을 개정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런데 점점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그 회의를 확인시키는 단초가 벌어졌던것이다. 성남시장이 장학회 사무국장을 공채하지 않고 퇴직 공무원으로 임명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나름대로 민주적 마인드를 가진 관료출신의 민선시장이었지만 그 한계는 어쩔 수 없었다. 물론 만류하면 들을 입장이었지만 나는 과감하게 결단했다. 1999. 5월경 장학회의 감사직 사표를 내고 반려된 사표를 내용증명으로 우송함으로써 시 집행부와의 공식적 관계를 해소했다. 그리고 성남시 집행부와 시민단체간의 감시와 견제역할에 복귀했다. 이미 상당정도 손상된 성남시민모임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일이 급한 일이었지만 마땅치가 않았다.

<백궁정자용도변경(파크뷰 특혜분양)사건의 시작과 끝>
장학회감사를 사퇴한 후 1999. 4-5월경 어떤 사람으로부터 재미있는 제안을 받았다. 제안의 요지는 “분당에서 땅을 사 건축사업을 하려고 하는데 최소한 투자금의 30배가 남는 일이니 함께 투자하자”는 것이었다. 30배라는 어처구니 없는 숫자도 그러했지만 뭔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 단호

하게 거절했다. 당시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백궁정자 지구의 용도변경이라는 거대한 비리가 시작되는 것이었고, 거기에 나를 참여시키려는 작전이었음을 나중에 알게 된다. 1999. 9. 경 신문보도와 풍문을 통해 백궁정자지구 13만평 가량을 아파트 부지로 바꾸려는 거대한 시도를 일부나마 간파하게 되었다. 백궁정자지구는 성남시가 자생력을 가지는 도시로 발돋움하기 위해 업무 상업시설로 쓰여져야 하는 땅이었는데 이를 아파트 부지로 바꾸면 거대한 특혜가 발생함은 물론 도시의 100년 대계를 망치는 일로 판단했다. 아울러 주민들이 원하는 바도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기초적인 조사에 착수하고, 성남시와의 공식적인 토론회를 통해 잘못된 정책임을 확신하고 저지작업에 착수했다. 즉시 서울남부저유소 저지운동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주민 조직에 착수했다. 용도변경과 아파트 건설로 인해 직접적인 피해를 입게 될 상록마을, 느티마을 주민에 대한 설득과 조직작업을 시작하고, 분당 전역의 아파트입주자대표회의 회장단을 전화로 일일이 접촉했다. 단 1주일만에 분당의 140여개 단지중 120여개의 입주자대표회장, 십수개의 시민사회단체들이 참여한 대책기구로 ‘분당백궁역일대 용도변경저지공대위’가 구성되었고, 나는 저지운동의 중심인 공동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이 때는 아직 2기 민선시장체제에 대한 신뢰가 남아 있었다. 시장개인의 독단적인 결정에 의해 하는 일이 아니라 뭔가 배후의 거대한 압력으로 이 일이 진행된다는 판단을 하였으므로 강력한 주민조직을 통해 시민들의 반대의견이 명확히 정해지면 시장의 결정을 뒤집을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 공대위가 구성되어 주민들의 반대의견을 명백히 조직한 후 시장에게 정책철회를 요청했다. 그에 따라 시장은 ‘최종적으로 시민들의 의사에 따라 추진여부를 결정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며칠 후 성남시는 분당지역 용도변경의 시범지역이라고 하는 ‘로얄팰리스’부지에 용도변경에 따른 아파트 건축허가를 내 줌으로서 백궁정자지구에 대한 용도변경추진의사를 분명하게 밝혔다. 제 용도변경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실력행사에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언론사와 정치권으로부터의 도움을 받아 자료 소집과 사건실체의 조사에 나섰고, 사건의 거대한 실체를 짐작할 수 있는 핵심자료를 공개하였으며, 시위와 집회를 조직했다. 버스 28대를 동원해 1,000여명의 주민들이 민주당사를 찾아가 철회를 요구했으며, 성남시청의 집회에서 1,000여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집회, 수백대의 차량이 참여하는 차량시위 등이 벌어졌다. 그러나 2000. 5. 16. 용도변경은 확정되고 말았고 곧이어 아파트 건축이 시작됐다. 주민들은 지쳐 나가 떨어졌고 싸움은 패배로 끝난 듯 했지만 대상면적과 용적율이 대폭 감소하는 큰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후 이 사건은 국회의원 선거, 보궐선거에서 커다란 쟁점이 되어 전국적인 이슈가 되었다가 지방선거를 얼마 앞둔 2002. 5. 구속된 국정원차장이 재판부에 낸 탄원서에서 파크뷰 특혜분양을 폭로하면서 또다시 세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 사건이 대서특필되자 이 사건과 이 사건을 추적해온 나에 대한 취재가 집중되었으며, 2002. 5. 내가 처음으로 구속되는 사건의 단초가 발생한다. 모 방송국의 피디는 이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나의 사무실에 오던 중 검찰을 사칭해 취재를 하려고 김병량 시장과 통화를 시도하다가 연결이 되지 않아 연락처를 남겼다가 나의 사무실에 도착한 후에 그로부터 연락이 와 통화를 하게 되었다. 당시 그는 검사라며 김병량시장에게 여러 가지를 물었는데 그 통화에서 김병량 시장과 사업주와의 관계, 검찰 간부들과 사업주 및 김시장과의 관계 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방송사에서 이를 인용보도했지만 별로 반응이 시원치 않아 나는 기자회견을 통해 이를 폭로하기로 마음먹고 그로부터 테이프의 사본은 건네받아 이를 녹취한 후 기자회견에서 그 내용을 그대로 틀었다. 기자들의 이목이 나에게 집중되어 있던 시기이고, 이 사건이 세인의 주목을 받고 있던 터라 기지회견내용은 모든 언론에 대서특필되었고, 당시 시장출마를 준비하고 있던 김병량시장에게 치명적인 정치적 타격을 입히게 되었다.

만회를 위해 김병량 시장은 나를 선거법위반, 공무원자격사칭의 공범이라며 고소했고, 나를 구속하기 위한 음모가 진행중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도피했다. 내가 구속되면 고소인인 김병량에게 아무 잘못이 없는 것으로 비쳐져 지방선거에서 그가 당선될 우려가 있었다. 검찰은 나를 체포하기 위해 합동단속반을 꾸려 집과 사무실, 성남시민모임의 사무실을 압수 수색하고, 내가 도피하면서 고의적으로 휴대전화를 사용한 장평휴게소 인근은 물론 용평등지의 모든 숙박업소를 뒤지는 등 총력을 다해 나를 체포하려 했지만 나는 원주, 설악산과 강릉, 서울 등지를 돌아다니며 2차례 검거위기를 피하고, 결국 지방선거가 끝난 후 성남검찰에 자진출두해 구속됐다. 1달여간의 도피수배생활, 11일간의 짧은 구속수감생활은 참으로 많은 것을 깨우치고 얻는 계기가 됐다. 결국 이 사건은 1심에서 정의감이 투철한 재판부에 의해 선거법위반부분에 대한 무죄판결과 벌금 250만원을 선고받아 항소한 후 벌금 150만원이 선고되어 현재 대법원에 벌금형 부분의 무죄를 주장하며 상고중이다.

여러 가지 이유들이 경합되었겠지만 결국 김병량 시장은 낙선하였고, 그 역시 수배되어 1년 수개월의 도피생활끝에 구속되어 1개월여를 수감된 후 징역형을 선고받고 현재 무죄를 주장하며 대법원에 상고중이다. 백궁정자지구 관련 투쟁을 전개하면서 몇가지 특이한 경험을 했다. 지방단위의 부정부패 감시운동은 지역토호들의 이권추구와 직접적으로 상충되기 때문에 충돌이 매우 직접적이고 격렬하다는 것이다. 백궁정자지구의 용도변경과 아파트 건설에 따른 이권규모는 수천억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사업을 무리하게 추진하는 주체들은 이에 대한 반대세력을 무마하거나 무력화 시킬 필요를 느꼈던 것 같다. 그들은 처음에는 나를 동업자로 포섭해 근본적인 재갈을 물리려고 시도했다. 서울 남부저유소 반대운동을 경험한 탓인지 그들은 나에게 주목하며 나를 그들의 동업자로 끌어들여 반대운동의 대립적인 선상이 아닌 동일한 이익을 추구하는 동업자로 끌어들일 생각을 하였던것이다.

1999. 5. 이 토지를 용도변경을 전제로 사들이던 세력은 나에게 “분당에 투자금 대비 30배가 남는 건축사업이 있는데 투자하라”고 유인했다. 1억을 투자하면 30억을 만들 수 있다는 엄청난 제안이었지만 내가 그 말을 듣자마자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바람에 더 이상의 대화는 진전되지 않았다. 나중에야 나는 그것이 용도변경의 대상인 백궁정자지역의 토지를 계약금을 주고 구입한 후 사업체를 선정해 아파트를 짓은 사업이라는 사실과 함께 그들의 말대로 투자금(토지 계약금)대비 30배가 아닌 그 이상의 수익이 가능한 황금알은 낳는 사업임을 알 수 있었다. 만약 그때 그들의 말대로 투자(?)를 했다면 첫째로는 양심 때문에, 둘째는 구조적인 문제로 반대운동은커녕 오히려 반대운동을 막는 입장에 설 수밖에 업었을 것이다.

다음에 그들은 또 다른 방법으로 나에 대한 매수를 시도했다. 당시 나는 시정에 대한 감시견제기구로서 시민단체의 조직과 활동이 어느정도 정상괘도에 오르게 되었다고 판단하면서 지역내 소통구조(지역언론)를 확보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몇몇 동지들과 함께 신문창간을 위한 기획과 모금작업을 시도중이었다. 1999. 10. 경 저지운동을 위한 조직을 갖추고 기초적인 조사와 운동논리의 개발에 한창일 때 그들은 10-20억원을 들여 안정된 지역신문을 만들어 주겠으니 다른 것은 바라지 않고, 나만 이 운동에서 빠져 달라고 했다. 물론 당연히 거절했지만 그들의 시도는 집요했다. 다음에 그들이 시도한 방법은 협박이었다. 2000. 1월이 되어 성남시가 용도변경절차에 착수하고 반대운동이 격화되자 갑자기 집과 사무실로 협박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가족들과 본인의 신체에 위해를 가하겠다는 특히 나이어린 아이들을 조심시키라는 위협은 참기 어려웠다.

신체검사를 거쳐 총기소지허가를 받고 다연발 개스총을 구입해 양복바지 뒷주머니에 차고 다니기 시작했다. 협박전화는 밤이고 새벽이고 계속되었고 결국 협박전화를 받던 중 경찰에 신고하여 출동한 경찰에게 전화를 바꿔주며 발신지 추적과 처벌을 요구했지만 경찰간부가 이 사건에 깊이 연루되 있던 그들은 이를 그대로 묵살했다. 무거운 개스총을 휴대하고 다니던 일도 새로운 형태의 탄압에 직면하면서 그만둘 수 있었다. 협박도 통하지 않자 그들은 나를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려는 시도를 했다. 2000. 1월말부터 2월 사이에 일단의 사람들이 ‘정치꾼, 부모 버린 패륜아, 배판만 하면 지는 돈만 아는 변호사’등 온갖 음해성 구호와 선전물을 뿌리며 사무실 앞에서 집회를 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유인물을 그대로 베껴 쓴 지방일간지의 사회면 톱기사가 나가고, 다시 이 기사를 복사한 우편물 수천통이 성남의 주요인사와 단체에 발송되었다. 그뿐 아니라 조선,중앙,동아 등 주요 일간지에 사비로 나에 대해 갖가지 허위사실을 날조한 유인물 20만장이 각 가정과 직장에 배달되었다. 거의 3가구중 2가구에 비난 유인물이 배포되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협박행위는 중단되었다.

이 매장시도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사건수임은 거의 끊어졌고, 사람들은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다. 괴로움의 시작이었다. 이들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지만 경찰은 형식적인 조사를 거쳐 무혐의처리하였고 검찰은 시간을 질질 끌다가 몇 달 후 새로운 검사가 온 후에야 불구속 고시했다. 결국 이 사건에 대해 법원이 관련자에게 징역 1년 6개월의 중형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함으로써 종결되었지만 그로 인해 입은 피해는 여전히 회복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아니땐 굴뚝에 연기나랴는 사람들의 의심을 지우기에는 20만장의 유인물과 집회, 수천통의 우편물, 지방일간지 2개의 보도는 너무나 많았다. 이 사건을 두고 시민모임을 포함한 시만단체 진영에서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악용되고 있고, 전국적으로는 보수세력에게 반사적 이익을 주므로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차원에서 반대운동을 자제하자는 것이었다.

이 점에 대해 나는 성남에 변호사 개업을 하면서 정한 원칙이 있었고 이 원칙 때문에 그와같은 타협을 할 수는 없었다. 내가 성남에 개업을 하게 된 연유는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정도의 작은 영역에서 내가 가진 이상을 실현함으로써 크게는 사회전체에 대한 나의 희망과 기대를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나의 의무는 법률가로서 이 사회에 민주주의적 과제를 실현하는 것이고, 그 기초위에서 새로운 질서를 창설하는 변혁운동이 벗어나갈 기초를 다지는 일이다. 부패구조를 극복하고 노력만큼의 성과가 보장되는 정상적인 사회, 주권자의 진정한 의사가 최대한 관철되는 민주적인 사회가 내가 원하는 바이며, 조그만 지역사회인 성남에서 어린 나이에 판검사 임용의 유혹을 물리치고 무모하게 변호사개업을 한 것도 이를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전국적인 판세에 반사적 영향을 준다는 이유로 지역의 온당한 운동을 접어야 한다면 이는 진정한 의미의 지역운동이 아니라 중앙집권적 전국운동의 한 부분일 뿐이다. 지역적 요구와 운동적 지향이 전국적 운동의 지향과 요구와 부합할 때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뿌리가 있는 민주주의가 확립될 수 있다. 잘못된 정책에 대한 지역사회에서의 비판과 견제할동은 그것이 객관적으로 옳은 것이라면 반드시 유지되고 관철되어야 한다. 이 때문에 나는 일정부분 이 일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측면이 있다고 해도 백궁정자지구용도변경과 파크뷰특혜분양사건을 외면할 수 없었다. 민선 2기는 김병량 시장의 용도변경 강행으로 성남시민모임을 위시한 시민사회운동 진영과 극단적인 대립양상을 띠게 되었다. 시장측은 반대운동을 하는 중심적인 단체들을 다른 시민사회단체들로부터, 중심적인 인물들을 다른 인물들로부터 고립시키려는 작전을 폈고, 시민사회단체의 지원을 받고 당선되어 사회운동진영과 어느 정도 관계를 맺고 있던 그들로서는 상당정도 실현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반대운동진영도 시민사회단체조직 내부를 추스리고 시민사회단체들을 연대의 틀에 강고하게 묶어 전선을 형성해 나가야 했다. 이는 결국 시장측은 권력의 재생산여부를 걸었고, 반대하는 측은 성남 시민사회운동의 존속여부를 책임져야 하는 진검승부로 귀결되었기 때문에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것이었다. 이 싸움이 진 후의 상황을 상상해보라 과연 어떤 결과가 초래되었을까. 음해사건 공대위, 시장소환운동본부, 용도변경저지공대위를 중심축으로 하여 반시민적 행위를 하는 시장에게 정치적 책임을 묻기 위한 치열한 투쟁이 전개되었다. 결국 시민사회진영이 승리했지만 그 과정에서 그리고 그후 치러야 할 대가는 너무나 크고 아팠다.

<2006년 3월 2일 ---- 이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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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명 (♡.251.♡.2) - 2017/02/24 20:43:18

잘 썻어요.천천히 음미해서 보면 평생 써먹을 훌륭한 교과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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