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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高麗)와 수(隋)의 전쟁

HD캡짱 | 2016.06.02 23:43:41 댓글: 0 조회: 3097 추천: 0
분류역사 http://bbs.moyiza.com/crcnhistory/3099413
1,수나라의 등장과 고구려의 대책
수나라(隋)는 581년에 건국되어 장강이남의 진나라(陳)를 멸망시켜(589년) 중국을 통일하였다.
한편 고구려는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전부터 각종 방식으로 수나라의 등장에 대처하였다.
먼저 한편으로 고구려는 581년부터 584년까지 수나라에게 꾸준히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침으로
써 수나라의 태도를 살폈다.
[1]고구려본기:(581년 12월)<十二月 遣使入隋朝貢>
[2]고구려본기:(582년 1월)<春正月 遣使入隋朝貢>
[3]고구려본기:(582년 11월)<冬十一月 遣使入隋朝貢>
[4]고구려본기:(583년 1월)<春正月 遣使入隋朝貢>
[5]고구려본기:(583년 4월)<夏四月 遣使入隋朝貢>
[6]고구려본기:(583년 겨울)<冬 遣使入隋朝貢>
[7]고구려본기:(584년 봄)<二十六年春 遣使入隋朝貢>
보다싶이 고구려는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전에 4년동안 7차례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머지않아 가능하게 있을 수나라의 침략에 아래와 같은 대비책도 마련했다.
[1]고구려본기:(586년)<移都長安城>
[2]고구려본기:(590년)<三十二年 王聞陳亡 大懼 治兵積穀 爲拒守之策>
몇번의 수나라에 대한 조공의 결과가 맞갖지않았는지 고구려는 수나라에 대한 조공을 끊고 수
나라의 침략에 대비하여 먼저 [1]수도를 장안성으로 옮겼고 [2]진나라의 멸망소식을 듣고 무서
워서 군사를 훈련하고 곡식을 저장하였다.

2,수나라의 고구려에대한 전쟁위협
중국을 통일한뒤 수나라는 이제 화살을 고구려에 돌렸다.수나라는 고구려가 성의와 예절을 다
하지않는다며 고구려에게 전쟁위협을 하였다.
고구려본기:(590년)<王謂遼水之廣 何如長江 高句麗之人 多少陳國 朕若不存含育 責王前愆 命
一將軍 何待多力 殷勤曉示 許王自新耳>,이것은 수나라의 고조(高祖,수문제)가 고구려에 조서
를 내려 위협한 내용중의 일부분인데 위협내용을 아래와 같이 배렬할수있다.
[1]고구려본기:王謂遼水之廣 何如長江
[2]고구려본기:高句麗之人 多少陳國
[3]고구려본기:命一將軍 何待多力
[4]고구려본기:殷勤曉示 許王自新耳
먼저 수문제는 [1]고구려왕은 요수의 넓이가 장강과 비할수있다고 생각하는가며 위협했다.이
것은 수나라가 장강이남의 진나라를 멸망시킨걸로 고구려를 멸망시키겠다고 위협한것이다.그
리고 [2]고구려의 인구가 진나라와 비하면 어떠한가라고 하여 역시나 고구려는 진나라에 비해
멸망시키기 간단하다고 위협한것이다.또 [3]한 장군을보내 별로 힘을 쓰지도 않고 멸망시킬수
있다며 고구려를 위협했다.마지막에 [4]고구려왕이 자기절로 잘못을 뉘우치고 고치길 바란다
며 고구려의 철저한 복속을 요구했다.수문제의 이 전쟁위협의 목적은 고구려가 철저하게 수나
라에 복속하여 똘마니질 하기를 바라는것이고,만약에 그러지않을경우 고구려를 멸망시키겠다
고 한것이다.수나라의 전쟁위협을 받은 고구려 평원왕은 수나라의 침략이 두려워 편지를 써서
사과하려고 하였지만 겨울10월에 돌아가시는 바람에 실행하지 못했다.

3,고구려의 선제공격
수나라가 고구려에 전쟁위협을 한후에 한동안 두나라의 평화상태가 유지되었다.
[1]고구려본기:(591년 1월)二年 春正月 遣使入隋 奉表謝恩進奉 因請封王 帝許之
[2]고구려본기:(591년 3월)三月 策封爲高句麗王
[3]고구려본기:(591년 5월)夏五月 遣使謝恩
[4]고구려본기:(592년 1월)三年 春正月 遣使入隋朝貢
[5]고구려본기:(597년 5월)八年 夏五月 遣使入隋朝貢
고구려 평원왕이 돌아가신후 영양왕이 왕위에 올랐고 영양왕이 오른뒤 8년동안 수나라와 평화
로운 관계가 지속되였다.고구려는 8년동안 수나라에 3차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고 수나라
도 고구려를 고구려왕으로 책봉하는등 평화로운 외교관계가 지속되였다.조공이나 책봉은 모두
외교형식이였고 한편으로 고구려는 수나라와의 전쟁을 슬그머니 준비하였다.
수서 동이열전 고구려:(597년)<上賜湯璽書曰:朕受天命,愛育率土...王每遣使人,歲常朝貢,雖稱
藩附,誠節未盡...而乃驅逼靺鞨,固禁契丹... 太府工人,其數不少,王必須之,自可聞奏.昔年潛行財
貨,利動小人,私將弩手逃竄下國.豈非修理兵器,意欲不臧,恐有外聞,故爲盜竊?...時命使者,撫慰王
藩,本欲問彼人情,敎彼政術.王乃坐之空館,嚴加防守,使其閉目塞耳,永無聞見.有何陰惡,弗欲人知,
禁制官司,畏其訪察?又數遣馬騎,殺害邊人,屢騁姦謀,動作邪說,心在不賓...>
이것은 수문제가 또다시 고구려에게 협박조서를 보낸것인데,상대적으로 처음의 협박내용보다
많이 온화해진 내용들이다.대부분 고구려를 질책하는것이며 먼저 [1]王每遣使人,歲常朝貢,雖
稱藩附,誠節未盡라고 하여 비록 고구려가 해마다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하지만 여전히 수나라에
완전히 복속하지않았다고 질책하였다.또 [2]驅逼靺鞨,固禁契丹이라 하여 고구려가 말갈족과 거
란족을 괴롭힌다며 질책했다(글쓴이 해석:말갈족과 거란족은 고구려에 정복되어 고구려에 속
해있었다).또 [3]利動小人,私將弩手逃竄下國,豈非修理兵器...라고 하여 고구려가 사람을 시켜
수나라의 활쏘는 사람(弩手)을 훔쳐갔다며 질책했다.또 [4]王乃坐之空館,嚴加防守,使其閉目塞
耳,永無聞見.라고 하여 고구려가 수나라의 사신을 빈칸에 가두어놓고 눈과 귀를 막아놓았다고
질책했다.어쨋든 수나라의 고구려에 대한 위협공갈행위에서 우리는 고구려가 비록 수나라와
표면적으로 평화롭게 지냈지만 사실 슬그머니 수나라와의 전쟁준비를 하고있었음을 알게된다.
드디어 598년,고구려는 말갈족의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수나라의 영토인 요서지역을 침략하
였다.이로써 수나라와 고구려의 전쟁이 정식으로 시작된것이다.그러나 수나라 영주총관인 위
충(韋冲)이 고구려의 군사를 모두 물리치는 바람에 고구려의 선제공격이 성공을 거두지 못하
였다.그러나 수나라는 이로써 적지않은 손실을 보았을것이다.
참고내용:고구려본기(598년)<九年 王率靺鞨之衆萬餘 侵遼西 營州摠管韋冲擊退之>

4,수문제의 제1차 고구려에 대한 전면침략전쟁
고구려의 요서침공 소식을 접한 수문제는 화가 치밀어 올랐고 양량(諒)과 왕세적(王世積)에
게 명하여 수군(水军,오늘날의 해군과 같다)과 육군(陆军) 총 30만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참고내용:고구려본기(598년)<隋文帝聞而大怒 命漢王諒王世積並爲元帥 將水陸三十萬來伐>
양량이 거느리는 침략군대(육군)가 유관(渝關)에 도착하였을때 침략군에게 시련이 닥치게 되였다.
[1]고구려본기:<漢王諒軍出臨渝關 値水潦 餽轉不繼 軍中乏食>
[2]고구려본기:<復遇疾疫>
장마때문에 양량의 침략군에게 수송되는 [1]군량미가 끊겼고 그기다가 [2]전염병까지 돌기
시작했다.큰 시련이 닥친것이다.그리고 주나후(周羅睺)가 거느리는 수군(해군)도 동래(東萊,
지금의 산동성동부)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가다가 시련이 닥쳤는데 본기에<亦遭風 舡多漂
沒>라고 하여 그의 선박(지금의 군함)이 거의 모두 유실되거나 바다속에 침몰되였다.드디어
가을 9월에 이들 침략군은 각종 시련이 닥치는 바람에 모두 돌아갔지만 침략군 30만중에 대부
분은 모두 죽었다.수문제의 제1차 고구려에 대한 전면침략이 자연계의 원인으로 실패한것이다.
(글쓴이 생각:이것은 중국이 부끄러워 전쟁에서 실패한 원인을 자연계에 돌렸는지 모르겠다.)
어쨋든 수문제의 고구려 침략은 실패고 끝났고 고구려왕은 수나라의 침략을 받은후 수나라가
또 다시 침략해들어올가봐 두려워서 표문을 올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구려본기:<上表稱遼東糞土臣某>,요동의 똥무지같은 땅의 신 아무개...

5,잠시동안의 평화시기
전쟁에서 실패한 수나라는 잠시동안 고구려를 치지않았다.또한 고구려가 마지막에 사과한것
도 수나라에게 고구려를 침공하지않을 명분을 가져다준것이다.고구려의 이런 나약한 행위는
잠시동안의 평화를 가져왔다.
[1]고구려본기:(600년 1월)<十一年 春正月 遣使入隋朝貢>
[2]고구려본기:(600년 ?월)<詔 太學博士李文眞 約古史爲新集五卷 國初始用文字時 有人記
事一百卷 名曰留記 至是刪修>
[3]고구려본기:(603년)<十四年 王遣將軍高勝 攻新羅北漢山城>
고구려는 600년에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1]조공을 바쳤고,같은 해에 고구려의 역사를 기록
한 [2]유기(留記)를 정리하여 신집(新集)으로 만들었다.또 [3]603년에는 신라를 공격하였다.
어쨋든 보귀한 3,4년의 평화시기가 찾아온것이다.

6,수양제의 고구려에대한 전쟁위협
이때 수문제는 죽었고 수양제가 그 뒤를 이었다.607년에 수양제가 돌궐족의 우두머리인 계
민(啓民)의 막부에 행차하였을때,마침 고구려가 돌궐에 보낸 사신이 계민과 함께 있었다.
계민이는 고구려사신을 감출수없고하여 같이 수양제를 만났다.이때 수양제의 똘마니인 배
구(裴矩)가 수양제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구려본기:<高句麗本箕子所封之地 漢晋皆爲郡縣 今乃不臣 別爲異域 先帝欲征之久矣 但
楊諒不肖 師出無功 當陛下之時 安可不取 使冠帶之境 遂爲蠻貊之鄕乎 今其使者 親見啓民
擧國從化 可因其恐懼 脅使入朝>
배구는 수양제에게 고구려에 대하여 전쟁을 하라고 자극한것이다.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은 몇가지로 구분할수있다.
[1]高句麗本箕子所封之地 漢晋皆爲郡縣 今乃不臣 別爲異域
[2]當陛下之時 安可不取
[3]今其使者 親見啓民擧國從化 可因其恐懼 脅使入朝
배구는 수양제에게 말하길 [1]고구려땅은 본래 기자가 봉함을 받은지역이라고 하고,한나라
(汉朝)부터 진나라(晋朝)때까지 중국의 영토라고 하였다.그리고 지금은 남의땅(異域)으로 되
였다고 했다.그리고 수문제가 고구려를 친 원인을 그것과 연결시킨것이다.이로써 고구려에
대한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려고 하였다.총적으로 여기서 고구려가 원래 중국의 군현이였던
지역을 빼앗아 차지했으므로 되찾아와야 된다고 수양제에게 자극한것이다.그리고 [2]지금
은 딱 고구려를 칠 시대라고 하였고 [3]고구려 사신이 있는 기회를 잡아 그에게 위협하여 고
구려가 수나라에 조공하도록 하는게 옳다고 하였다.결국 고구려가 수나라에 계속 복종하지
않으면 전쟁으로 쳐야한다는뜻이다.
배구의 말을 듣고 수양제는 전쟁의 구실을 찾은듯하여 고구려에 강도높은 전쟁위협발언을
하였다.고구려본기:<朕以啓民誠心奉國 故親至其帳 明年當往涿郡 爾還日語爾王 宜早來朝
勿自疑懼 存育之禮 當如啓民 苟或不朝 將帥啓民 往巡彼土>
그 위협내용을 자세히 갈라놓고 본다면 아래와 같다.
[1]朕以啓民誠心奉國 故親至其帳 明年當往涿
[2]爾還日語爾王 宜早來朝 勿自疑懼
[3]苟或不朝 將帥啓民 往巡彼土
먼저 수양제는 [1]돌궐의 우두머리인 계민이 중국을 성심으로 받들기때문에 그 막부에 행
차하였다고 하였다.그리고 [2]고구려 사신더러 조국에 돌아간 그날에 즉시 고구려왕에게
당장 수나라에 와서 황제를 알현하라고 위협공갈하였고 [3]만약에 오지않을경우 계민을
거느리고(그러니깐 돌궐군대를 거느리고) 고구려의 땅을 밟아버릴것이다 라고 하였다.이것
은 전쟁위협이였다.수문제가 예전에 전쟁위협을 하였고 수양제도 그 아비를 따라배워 고구
려에게 전쟁위협을 한것이다.

7,수나라의 전쟁위협에대한 고구려의 무덤덤한 태도
수문제때와 마찬가지로 수양제도 고구려에게 강도높은 전쟁위협을 했다.그런데 본기의 기
록을 보니 고구려는 별로 무덤덤한 태도인것같다.
[1]고구려본기:(607년 5월)<夏五月 遣師攻百濟松山城 不下 移襲石頭城 虜男女三千而還>
[2]고구려본기:(608년 2월)<十九年 春二月 命將襲新羅北境 虜獲八千人>
[3]고구려본기:(608년 4월)<夏四月 拔新羅牛鳴山城>
보다싶이 수나라가 전쟁위협을 하였는데도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를 치면서 수나라의 전쟁
위협에 별로라는 태도를 보인것같다.

8,수양제 백만대군의 고구려 전면침략
고구려의 태도에 분노를 느꼈을법도한 수양제는 611년 2월에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공격
하게 하였다.그리고 4월에 침략군을 모집하여 모두 탁군(涿郡)에 모이게 하였다.그리고
1년동안 준비끝에 다음해 마침내 선전포고를 하였다.
고구려본기:(612년)<二十三年 春正月壬午 帝下詔曰 高句麗小醜 迷昏不恭 崇聚渤碣之間
荐食遼濊之境 雖復漢魏誅戮 巢穴暫傾 亂離多阻 種落還集 萃川藪於往代 播寔繁以汔今 睠
彼華壤 翦爲夷類 歷年永久 惡稔旣盈 天道禍淫 亡徵已兆 亂常敗德 非可勝圖 掩慝懷姦 唯
日不足 移告之嚴 未嘗面受 朝覲之禮 莫肯躬親 誘納亡叛 不知紀極 充斥邊垂 亟勞烽候 關
柝以之不靜 生人爲之廢業 在昔薄伐 已漏天網 旣緩前禽之戮 未卽後服之誅 曾不懷恩 翻爲
長惡 乃兼契丹之黨 處劉海戍 習靺鞨之服 侵軼遼西 又靑丘之表 咸修職貢 碧海之濱 同稟正
朔 遂復敓攘琛賮 遏絶往來 虐及弗辜 誠而遇禍 輶車奉使 爰曁海東 旌節所次 途經藩境 而
擁塞道路 拒絶王人 無事君之心 豈爲臣之禮 此而可忍 孰不可容 且法令苛酷 賦斂煩重 强
臣豪族 咸執國鈞 朋黨比周 以之成俗 賄貨如市 寃枉莫申 重以仍歲災凶 比屋饑饉 兵戈不息
徭役無期 力竭轉輸 身塡溝壑 百姓愁苦 爰誰適從 境內哀惶 不勝其弊 廻首面內 各懷性命之
圖 黃髮稚齒 咸興酷毒之歎 省俗觀風 爰届幽朔 弔人問罪 無俟再駕 於是 親摠六師 用申九
伐 拯厥阽危 協從天意 殄玆逋穢 剋嗣先謨 今宜授律啓行 分麾届路 掩渤海而雷震 歷扶餘
以電掃 比戈按甲誓旅而後行 三先五申必勝而後戰 左十二軍 出等道 右十二軍 出黏蟬含資
渾彌臨屯候城提奚踏頓肅愼碣石東暆帶方襄平等道 絡繹引途 摠集平壤...>
이 길고도 긴 선전포고중에 몇가지 고구려를 쳐야할 이유를 골라서 본다면...
[1]...播寔繁以汔今...,이것은 고구려의 종족수가 점점 번성했다는것이다.
[2]...未嘗面受 朝覲之禮 莫肯躬親...라고 하여 고구려 임금이 직접 중국에 와서 황제를 알
현하지 않는다고 비난하였다.
[3]...乃兼契丹之黨 處劉海戍 習靺鞨之服 侵軼遼西...라고 하여 고구려가 거란을 거느리고
중국을 쳤으며 말갈을 따라배워 요서를 쳤다고 하였다.
[4]...遂復敓攘琛賮 遏絶往來...라고 하였는데,이것은 다른 나라가 수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걸 고구려가 길을 막고 못 가게 하였다는것이다.
[5]...拒絶王人 無事君之心...,이것은 수나라 황제가 보낸 사절단도 고구려가 변경에서 막아
버리고 못들어오게 하므로 수나라 황제를 섬길마음이 없다고 하였다.
[6]...且法令苛酷 賦斂煩重...라고 하여 고구려는 법령이 가혹하고 세금을 많이 낸다며 고구
려인민을 수나라가 구해줘야한다는식으로 말하고있다.
뭐 이 몇개로 끝낼수는 없겠지만,어쨋든 선전포고를 한것은 사실이고 선전포고중에 고구려
를 치는 원인을 몇가지 적어놓았는데 사실 모두 침략행위를 정당화하려는 수작에 불과하다.
수나라 침략군은 左十二軍 右十二軍으로 하여 총 24개 군이 출동하였고 최종적으로 평양에
서 집합하려고 했다(평양까지 쳐들어가 고구려의 수도를 포위하는것이 이번전쟁의 목적이
다).군사의 총수는 1133800명이였고 대외에 200만이라고 외쳤다.그리고 군량을 수송하는
자들은 1133800보다 한배가 더 많았다고 하니,본기에 <近古出師之盛 未之有也>라고 하여
이렇게 많은 군사를 출동시킨적은 역사적으로 없었다고 했다.지난날 수문제는 30만으로 고
구려를 쳤지만 자연의 저항으로 대부분이 죽어버렸고,이번에 수양제는 그때보다 3,4배가
더 많은 군사로 고구려를 치기 시작했다.그리고 수나라는 이번에도 수문제때랑 마찬가지고
육로와 해로를 통하여 고구려를 쳤는데 육로는 요하쪽으로 갔고 해로는 역시 바다를 건너
평양에로 직진했다.

9,수양제의 미기한 전략
수양제의 손아래에 비록 200만이라는 대부대가 있었지만,수양제는 미기한 전략을 택했다.
고구려본기:<帝戒之曰 凡軍事進止 皆須奏聞待報 無得專擅>
수양제는 모든 군사행동은 반드시 자기의 허락을 거쳐야한다고 하여 무식한 군사지휘관의
지능을 돗보였다.진정한 군사지휘가라면 이렇게 무식할리가 없다.여기서 우리가 볼수있는
것은 수양제는 싸울줄 모르는 미기한 황제다.물론 가능하게 수양제는 이 전쟁을 공제하려
는 의도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하지만 전쟁은 전쟁인것만큼 수양제의 이러한 전략은 결국
군대의 작전 효률이 떨어지게 하였으니 미기하지않다고 할수없겠다.

10,수양제의 1차 고구려에 대한 침략전쟁의 과정(1) - 요하 전투
612년 2월,침략군은 요수(지금의 요하,고구려와 중국의 분계선)에 도착하였다.그리고 군사
를 모아놓고 강앞에서 진을 치고 침략준비를 다그쳤다.고구려의 군대들은 물을 사이에 두고
방어를 하였기때문에 수나라의 병사들이 아무리 진공해도 쉽게 요수를 건느지 못했다.이에
바빠난 수양제가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했다.
고구려본기:<帝命工部尙書宇文愷 造浮橋三道於遼水西岸>
고구려의 방어력이 강하여 요수를 건느지못한 수양제는 우문개(宇文愷)에게 명하여 요수의
서쪽에다가 부교를 세개 짓게 하였다.그냥 건느지 못하니 다리를 만들어 건느려고한것이다.
하지만 만들어 놓은 다리가 1장(丈)정도가 짧아서 저쪽의 언덕까지 닿지 못했다.이 기회를
틈타서 고구려군사들이 다리우에서 작업을 하던 수나라 병사들에게 공격을 하였으며,결국
수나라 병사들은 끝내 언덕에 오르지 못하고 전사자가 아주 많았다.
이에 화가 치밀어 올라 바빠난 수양제는 하조(何稠)에게 명하여 부교를 더 늘이도록 했다.
그리고 이틀만에 완성되자,수나라 군사와 고구려 군사는 또다시 격렬한 전투를 하게되었고
고구려 군사가 1만여명이 사망하여 고구려의 첫번째 방어선이 침략군에의해 격파되었다.이
에 수나라 침략군들은 승세를 타고 진격하여 고구려의 요동성(지금의 요양시 부근)을 포위
하였다.(글쓴이 해석:만약에 요하방어선이 제1방어선이라고 한다면 요동성을 중심으로 여
러개 성들은 제2방어선을 이루었다).

11,수양제의 1차 고구려에 대한 침략전쟁의 과정(2) - 요동성 전투,평양성 전투
요동성은 고구려의 서쪽지대의 중요전략기점이다.그러므로 요동성이 뚤린다면 고구려의
압록강이서지역은 아주 위험하게 된다.그리고 이때 바로 9번째 내용을 참고하면 되는데,
수양제가 미기한 전략을 선포한것이다.총명한 고구려인민들은 미기한 수양제의 전략에
다음과 같이 대응했다.
고구려본기:<...遼東數出戰不利 乃嬰城固守...遼東城將陷 城中人輒言請降 諸將奉旨 不敢
赴機 先令馳奏 比報至 城中守禦亦備 隨出拒戰...>
고구려 요동성안의 군사들은 성을 굳게 지키고 있었고,만약에 성이 함락될것같으면 수나
라에게 투항하였고 수나라 군사지휘관들은 수양제의 명령대로 수나라 황제에게 보고를
하여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런 사이에 요동성은 또 재정비하여 수나라 황제의 대답이
온후에 또다시 불복하여 수나라군대와 맞서싸웠다.이렇게 몇번이나 반복했지만 본기에
<帝終不悟>라고하여 수양제는 끝내 자기의 잘못된 전략을 뉘우치지 못했음을 알게한다.
장기간 요동성을 포위하고도 함락시키지못하자 수양제는 바빠났고 6월달에 여러장수들
을 불러모아놓고 한번에 꾸짖었다.
고구려본기:<詰責之曰 公等自以官高 又恃家世 欲以暗懦待我邪 在都之日 公等皆不願我
來 恐見病敗耳 我今來此 正欲觀公等所爲 斬公輩爾 公今畏死 莫肯盡力 謂我不能殺公邪>
수양제의 꾸짖음을 들은 여러 장수들은 낯색이 어두워졌고 수양제에게 죽임을 당할가봐
두려워 벌벌 떨었다.그리고 요동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수양제는 육합성(六合城)을 어
찔꾸내했지만 우리 고구려 군사들이 굳게 지키고 있었기때문에 수양제도 감히 치지 못했
다.
한편,해로를 통하여 평양으로 직진한 수군은 순리롭게 패수(대동강)에 들어가서 평양과
60리 떨어진곳에 진을 치고 싸울준비를 했다.내호아(來護兒)가 이끄는 수군은 고구려 병
사와 드디어 붙었고 순리롭게 그들을 이겼다.이에 내호아는 승세를 몰아타고 평양성으로
쳐들어가려고 하였다.그러나 이때 부총관인 주법상(周法尙)이 그를 만류하여 여러군사들
이 오기를 기다려 함께 진격하자고 하였다.내호아는 육군을 기다려 그들이 도착한후 같이
진격하자는 주법상의 의견을 무시하고 수만명의 정예병을 거느리고 평양성의 아래까지
진격했다.고구려 군사는 거짓으로 패하는척하면서 침략군을 성안에까지 유인해 들여왔다.
이때 침략자들의 본질으 드러났고 그들은 군사들을 풀어 백성들을 사로잡고 재물을 약탈
하였으니,그 대오가 흩어져 산만해졌다.이 기회를 타서 숨어있던 고구려군사들이 모두 나
와서 그들을 쳐부쉬니 그들중 겨우 수천명이 달아났으므로 고구려가 대승을 거두었다.내
호아는 이번 전투에서 지게되었고 바다의 무인도에 들어가서 주둔하여,다른 군대와 호응
하고 접촉할수없었다.고립된것이다.
참고:고구려본기<副摠管周法尙止之 請俟諸軍至俱進 護兒不聽 簡精甲數萬 直造城下 我將
伏兵於羅郭內空寺中 出兵與護兒戰 而僞敗 護兒逐之入城 縱兵俘掠 無復部伍 伏兵發 護兒
大敗 僅而獲免 士卒還者 不過數千人 我軍追至舡所 周法尙整陣待之 我軍乃退 護兒引兵還
屯海浦 不敢復留應接諸軍>

12,수양제의 1차 고구려에 대한 침략전쟁의 과정(3) - 고구려의 살수대첩,반침략전쟁의 승리
한편,요동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육군들은 이대로의 상황이 계속되면 불리하므로 우문술
(宇文述)등의 10만 특별부대가 고구려의 성들을 피하고 에돌아가면서 압록강서쪽에 집결
했다.아예 평양을 쳐서 고구려 수도를 짓부수려는 무리수를 둔것이다.그들 침략군들에게
는 100일분의 식량이 주어졌고,매개 병사마다 3섬이상의 짐을 지게 되어 그 무게를 당해
낼수없었다.우문술은 병사들이 짐이 무겁다고 짐을 버릴가봐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본기
:<遺棄米粟者斬>,즉 도중에서 곡식을 버리는 자들은 목을 벤다고 했다.침략군대들은 모
두 땅을 파고 군량을 땅안에다가 묻혀두었다.그래서 중간쯤 행군하였을때 이미 군량은
거의 떨어졌다.이때 고구려는 을지문덕장군을 수나라 침략군의 군영으로 보내어 거짓항
복하게 하였고,이것은 수나라의 특별부대의 전투력을 살펴보려는 계획이였다.이에 앞서
우문술은 수양제에게서 다음과 같은 지시를 받았었다.<若遇王及文德來者 必擒之>,즉 수
양제는 이미 우문술에게 만약에 고구려왕이나 을지문덕이 와서 투항하면 반드시 잡아라고
명령을 내렸던것이다.그래서 을지문덕이 거짓항복을 하자 우문술은 그를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때 유사룡(劉士龍)이 우문술을 말렸고 결국 을지문덕을 풀어주었다.한참후 이를
후회한 우문술이 사람을 보내서 을지문덕에게 하고싶은말이 있으면 지금 돌아와도 된다고
하였지만 적의 속임수를 눈치챈 을지문덕은 그대로 압록강을 건너서 평양에 돌아갔다.
이때 우중문은 우문술에게 지금 당장 을지문덕을 추격해서 치자고 하였지만 우문술은 돌
아가려고 했다.이에 우문중이 화나서 말하길 <將軍仗十萬之衆 不能破小賊 何顔以見帝 且
仲文此行 固知無功 何則 古之良將 能成功者 軍中之事 決在一人 今人各有心 何以勝敵>라
고 하였다.우문술보고 말하길,장군이 만약 10만의 대군으로 저 을지문덕을 추격하지 못하
면 무슨 낯으로 황제를 뵙겠는가..라고 했다.이에 우문술은 하는수없이 우문중의 말을 따
랐고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을지문덕을 추격하였다.을지문덕은 우문술의
군사가 굶주린 기색이 있는것을 알기때문에 싸울때마다 거짓으로 패했다.
이에 우문술은 하루에 일곱번을 싸워서 모두 이기자 자신감을 갖게 되였고 살수(청천강)를
건넜다.드디어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진 곳까지 추격해왔고 산에 의지해 진을 쳤다.을지문
덕은 또다시 사람을 보내어 거짓으로 항복을 하는척하면서 우문술에게 청하였다.<若旋師
者 當奉王 朝行在所>라고 하여 만약에 우문술이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간다면 우리 고구려
왕을 모시고 황제를 뵈러 가겠다 라고 했다.
우문술은 아래와 같은 두가지 이유때문에 을지문덕의 말대로 회군하려고 하였다.
[1]고구려본기:<士卒疲弊>
[2]고구려본기:<平壤城險固 度難猝拔>
즉 사졸들이 피곤해하여 더이상 싸울수없었고,평양성이 험고하여 쉽게 함락될수가 없었
다고 생각되어 우문술은 고구려의 거짓 항복에서 명분을 얻고 돌아가려고 했다.이때 우
리 고구려의 군사가 그들을 사면팔방에서 진공하여 못살게 굴었다.우문술의 10만 특별
부대는 할수없이 한편으로 싸우며 한편으로 회군했다.상당히 힘들게 7월달에 드디어 살
수까지 도착해서 절반쯤 건넜을때 우리 고구려 군사가 아직 건느지 못한 그들의 후방부
대를 미친듯이 공격하여 적의 장수 신세웅을 죽였다.그리고 침략군들은 바빠나서 미친
듯이 도망쳤는데 24시간동안 450리를 달여 겨우 압록강까지 달아났다.평양성전투에서
실패한 내호아의 부대는 우문술부대의 실패소식을 듣고 곧바로 달아났다.

13,전쟁의 결과
수나라는 113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를 압박하였고 그중에 30만5천을 꺼내서 고
구려를 대거 침략하였다.그러나 결과는 2천7백명만이 살아서 조국에 돌아갔으니 고구
려가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것이다.
<初 九軍度遼 凡三十萬五千 及還至遼東城 唯二千七百人>
그리고 수나라는 이번전쟁에서 단지 요수 서쪽의 원래 고구려의 무려라였던 지역을 빼
앗아 그기에 요동군과 통정진을 설치하였을뿐이다.수나라는 이번전쟁을 통하여 확실
한 댓가를 치루게 되였으며 정신을 차려야할것이다.또한 고구려는 반침략전쟁을 통하
여 국가적 위상이 올라갔으며,민족의 자존심을 수호하였으니 이번 전쟁의 승리는 우리
민족의 자랑중에 하나다.

14,정신을 못차린 수양제 - 두번째로 고구려 침략을 선포하다.
613년 1월,수양제는 조서를 내렸다.
<徵天下兵 集涿郡 募民爲驍果 修遼東古城 以貯軍糧>
전국 군사들이 탁군에 모이고,백성들을 모집하여 효과(군직명)로 삼아 요동의 옛 성
을 수리하고 군량을 저장하라.그리고 2월에 신하들에게 말하길,<高句麗小虜 侮慢上
國 今 拔海移山 猶望克果 况此虜乎>라고 하였으니 고구려와 같은 하찮은것들이 상
국을 무례하게 대하고,오늘날 우리 중국의 국력에게 저따위 적이야 무엇이 문제겠는
가 라고 했다.또다시 고구려를 치려는것이다.지난번의 실패에서 교훈을 찾지않고 머
리가 돌아버린것이다.
그러자 곽영(郭榮)이 목숨걸고 간언하여 말하길:<戎狄失禮 臣下之事 千鈞之弩 不爲
鼷鼠發機 奈何親辱萬乘 以敵小寇乎>라고 하였으나 수양제는 듣지 않았다.
4월에 수양제는 군사를 거느리고 요서를 건넜다.두번째 수양제의 고구려침략전쟁이
시작된것이다.
수양제는 우문술과 양의신에게 평양으로 직접 진격하게 하고,왕인공에게는 신성으로
진격하게 했다.비록 수만명의 우리 고구려 군사들이 이들에게 대항해서 싸웠지만 왕
인공의 강한 기병 1천여명에게 패하였다.그래서 고구려 군사는 성을 굳게 지키는 전
술을 펼쳤다.수양제는 모든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요동성을 치게 하였고,지난번의 미
기한 전략을 드디어 깨우치고 그들에게 명령을 기다리지말고 각자 알아서 적절하게
조치하라고 하였다.이제야 정신차린것이다.그들은 비루동(飛樓橦), 운제(雲梯), 지
도(地道)등 각종 선진적인 군사무기로 밤낮으로 요동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20여일을 끊임없이 밤낮으로 공격해댔지만 끝내 성을 빼앗지 못했다.이 과정
에서 쌍방의 전사자가 매우 많았다.그러나 이때 마침 양현감(楊玄感)이 수나라 수도
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수양제는 두려워서 침략군을 거느리고 철
수했다.이렇게 두번째 고구려 침략도 수나라 내부사정으로 인해 고구려의 승리로 끝
났다.

15,수양제의 세번째 고구려 침략
614년 2월,수양제가 백관들 앞에서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공격하는 문제를 의논하게
하였지만,여러날동안 누구도 감히 말하는자가 없었다.이것은 수나라 관리들에게 이젠
고구려는 공포의 대상으로 된것이다.그런데 수양제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결국 또 조
서를 내려 전국병사를 소집하여 여러방면으로 일시에 진군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수나라는 이미 나라 전체가 혼란에 빠졌고 병사들은 기일을 어기고 오지
도 않았다.이젠 남의 땅에가서 죽기싫은것이다.결국 고구려도 피곤하여 사신을 수나라
에 보내어 항복을 요청하였고,그제야 수양제는 침략전쟁을 멈췄다.사실 수문제나 수양
제나 바랬던것이 바로 고구려의 항복이였다.그리고 고구려가 왕을 보내서 황제를 알현
하여 철저한 중국의 속국이 되기를 바랬던것이다.지금까지 전쟁은 모두 그것을 목표로
한것이다.이제 몇차례의 침략을 거쳐 피곤해 지친 고구려가 항복하였으니 수나라는 고
구려의 왕이 황제앞에와서 머리를 조아리는것만 보면 될것이다.

16,수나라의 뒤통수를 친 고구려
고구려가 하도 피곤하여 항복하였고,수나라는 고구려 왕이 직접 오라고 했지만 고구
려왕은 끝내 오지않았다.이에 수양제는 화가 치밀어 올라서 또다시 장수들에게 엄밀
하게 대비하고 고구려를 다시 공격할것을 기도하였으나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참고:冬十月 帝還西京 以我使者及斛斯政 告大廟 仍徵王入朝 王竟不從 勑將帥嚴裝
更圖後擧 竟不果行

17,당나라 사관의 평가
수나라의 고구려에 대한 4차례 침략을 보면 사실 수나라가 바라는것은 오직 딱 하나 -
고구려의 철저한 복종이였다.그런데 고구려는 비록 겉으로 수나라에게 복종하는것처
럼 하였지만 죽어도 왕은 수나라에 와서 황제앞에서 머리를 조아리지않았다.때문에 수나
라는 고구려가 성실하지않다고 여겨 4차례 침략전쟁을 하였지만 결과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다.변한게 있다면 수나라는 멸망하였고 고구려는 국력이 엄청 약화되였다.여기
까지는 글쓴이인 나의 평가다.
아래에 수서(隋书)를 편찬한 당나라(唐朝,수나라가 멸망한후 당나라가 중원의 새로운
주인이 되였다) 사관의 평가를 한번 들어볼것이다.
수서 동이열전 사관평:
<自高祖撫有周餘,惠此中國,開皇之末,方事遼左,天時不利,師遂無功.二代承基,志包宇宙,
頻踐三韓之域,屢發千鈞之弩.小國懼亡,敢同困獸,兵連不戢,四海騷然,遂以土崩,喪身滅國.
兵志有之曰:「務廣德者昌,務廣地者亡.」然遼東之地,不列於郡縣久矣.諸國朝正奉貢,無
闕於歲時,二代震而矜之,以爲人莫若己,不能懷以文德,遽動干戈.內恃富强,外思廣地,以驕
取怨,以怒興師.若此而不亡,自古未之聞也.然則四夷之戒,安可不深念哉!>
여기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주목된다.
內恃富强,外思廣地,以驕取怨,以怒興師.若此而不亡,自古未之聞也
안으로는 부강함을 믿고,밖으로는 땅을 넓힐 생각만하고,교오자만으로 원한을 삿고,분
노로 군사를 일으켰다.이렇게 하고서도 망하지않았다는것은,자고로 들어본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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