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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인의 创基,大金帝国 의 시조와 국호来源

신재이 | 2017.07.01 09:01:45 댓글: 0 조회: 757 추천: 0
분류역사 http://bbs.moyiza.com/crcnhistory/3406888

거란을 뭉개버리고 북송을 밟아버린 금나라가 신라인이 세웠다면 아마도
미쳤다고 할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고 할때에는 또한 받아드릴줄도 알아야한다.

금나라 라고 함은 1115년에 일어나 1234년에 몽골에게 망해버린 동북에
존재했던 여진족의 국가였다.

금나라가 일어난후 먼저 강대햇던 거란족의 요나라를 뭉개버렸고 드디어
중원에 있는 북송마저도 밟아버렸다.

따라서 북송이 장강이남으로 물리워나서 남송이 된것이다.

남송은 황제국임에도 불구하고 금나라에게 공물과 여자를 바쳤고 황제
책봉까지 받았다.

그렇게 강대했던 금나라가 비록 몽골에게 망해버렸지만 그래도 망하기
전에 꽤나 잘 나갔다고 할만하다.

이제부터 금나라가 신라와 관계 있다는것을 고대 사료를 통해 살펴볼것이다.

<女眞即古肅愼國也,東漢謂之挹婁,元魏謂之勿吉,隋唐謂之
靺鞨。。。其屬分六部,有黑水部,即今之女眞。。。女眞酋
長乃新羅人,號完顏氏。(
송막기문)>

이 것은 중국 북송 사람이 쓴 사료이며 송막기문이다.

사료를 보면 여진족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여진족이 사는 지방은 곧 옛 날의 숙신국의 땅이고, 동한 시기에는 읍
루라 불리웠으며, 위나라에 와서는 물길이라 불리웠고, 수당시대에는 그
들을 말갈이라 불렀다…말갈이 원래 여섯개 부 로 이루어졌는데,그 중에
흑수부가 있었으니 곧 지금의 여진족이다…여진의 추장은 신라인이며
완안씨라 한다.>

보다싶이 여진족의 추장이 신라 인 이라고 했으니 금나라와 신라가 관계
가 없다고 할수 없다.

그것도 중국 송나라의 지식인이 쓴 것이기에 꽤 객관적이라고도 할수있
을것이다.

그렇다면 문제가 생긴다, 진짜 신라인이란 말이??

이제부터 정사에 속하는 금사를 살펴보겠다.

<金之先,出靺鞨氏。靺鞨本号勿吉。勿吉,古肃慎地也。元
魏时,勿吉有七部:曰粟末部、曰伯咄部、曰安车骨部、曰拂
涅部、曰号室部、曰黑水部、曰白山部。隋称靺鞨,而七部并
同。唐初,有黑水靺鞨、栗末靺鞨,其五部无闻。粟末靺鞨始
附高丽,姓大氏。李绩破高丽,粟末靺鞨保东牟山。后为渤海,
称王,传十余世。有文字、礼乐、官府、制度。有五京、十五
府、六十二州。黑水靺鞨居肃慎地,东濒海,南接高丽,亦附
于高丽。尝以兵十五万众助高丽拒唐太宗,败于安市。开元中,
来朝,置黑水府,以部长为都督、刺史,置长史监之。赐都督
姓李氏,名献诚,领黑水经略使。其后渤海盛强,黑水役属之,
朝贡遂绝。五代时,契丹尽取渤海地,而黑水靺鞨附属于契丹。
其在南者籍契丹,号熟女直;其在北者不在契丹籍,号生女直。
生女直地有混同江、长白山,混同江亦号黑龙江,所谓「白山
黑水」是也。(
금사)>

금사 라는것은 정사다.따라서 권위는 인정받아야한다.

금사의 우에 기록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금나라의 선조는 말갈(씨)국이다.말갈은 본래 물길이라 부른다.물길
이라는것은 옛날의 숙신의 땅에 있다.위나라때 물길은 일곱개 부 가 있
었는데 각각 …라 한다.수나라에 와서는 말갈이라 불리웠으며 그 일곱개
부가 여전히 같았다.당나라 초기에는 흑수말갈과 속말말갈만 전해지고
나머지 다섯개 부 는 소식이 없어졌다.흑수말갈은 처음에 고구려에 속해
있었는데 성이 대씨다.당나라의 이적장군이 고구려를 격파하자 속말말
갈은 동모산에서 방어하며 후에 발해로 되었다…흑수말갈은 계속 숙신의
땅에 살면서 동쪽은 바다에 닿았고 남쪽에는 고구려에 닿았으며 얘네들
도 고구려에 속해있었다.이전에 고구려를 도와 15만 민중으로 당태종과
싸우기도 했다,그래서 당태종이 안시성에서 패한것이다…후에 발해가
강성해지자 흑수말갈은 발해에게 속하게 되었으며 중국에 대한 조공이
끊겼다.오대시기에 와서 거란이 발해의 땅을 차지하자 흑수말갈은 거란
에게 복속하였다.흑수말갈 중에서 남쪽에 위차한 자들은 거란의 국적을
가졌는데 숙여진이라 하고 북쪽에 위치한 자들은 거란의 국적을 가지지
않았는데 생여진이라 한다.생여진의 땅에는 혼동강,장백산이 있고 혼동
강은 또 흑룡강이라고도 한다.소위 말하는 백산흑수 가 곧 그것을 가리
킨것이다>

보다싶이 송막기문처럼 금나라(여진족)을 소개하고 있다.

대개 송막기문이 소개한것과 별반 다름이 없다.

결론은 한가지다,여진족의 조상은 말갈족 들 중에 흑수말갈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다음의 금사 의 기록은 송막기문과 역시 비슷한 말을 하고 있다.

<金之始祖讳函普,初从高丽来,年已六十余矣。(금사)>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금나라의 시조는 함보 라고 하는데, 처음에 고려에서 왔으니 나이가
60여세다>

시조라 함은 일반적으로 나라를 세운 사람을 말하는데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부여에서 왔다.백제의 시조 온조는 고구려에서 왔다.보다싶이
시조라 함은 나라를 세운 사람을 많이 가리킨다.여기에서도 금나라를
세운 사람이 고려에서 왔다는 것이다.

송막기문이랑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는데 다른 점이라고 하면 송막기
문은 그것이 신라인이라 하였고 금사는 그것이 고려인이라 한점이다.

대개 이것은 후에 신라가 고려에게 나라를 바쳐 항복하여 고려의 일부
분으로 되었기에 금사에서는 아예 고려 라고 한것일것이다.굳이 결합
시킨다면 바로 고려에서 건너온 신라인이라고 할수 있겠다.

그렇다면 의문이 든다.금나라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했을가?필경 송막
기문은 중국사람이 썼고 금사는 몽골 사람이 썼다,물론 그들도 들리는
대로 받아 썼겟지만 금나라 사람들의 직접 언급한 내용을 보면 더 좋
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이 든다.

다행스럽게도 고려사에 그 내용이 몇개 적혀져 있다는 점이다.

<癸丑 金主阿骨打阿只等五人, 寄書曰, “兄大女眞金國皇帝,
致書于弟高麗國王. 自我祖考, 介在一方, 謂契丹爲大國, 高麗
爲父母之邦, 小心事之. 契丹無道, 陵轢我疆域, 奴隷我人民, 屢
加無名之師. 我不得已拒之, 蒙天之祐, 獲殄滅之. 惟王許我和
親, 結爲兄弟, 以成世世無窮之好.” 仍遺良馬一匹.(
고려사)>

고려사에 기재된 이 내용을 보면 금나라의 우두머리인 아골타가 아지
등 다섯명 사신을 고려에 보내 직접 편지를 전해줬는데 그 편지 내용
중에 고려를 부모의 나라 라고 한것이다.왜서일가? 송막기문과 금사를
보면 답이 나온다.바로 아골타의 선조가 고려에서 건너온 신라인이였
기때문이다.

또 다음의 기록을 보겠다.

<庚子 御宣政殿南門, 引見褭弗·史顯等六人, 宣問來由, 褭弗
等奏曰, “昔我太師盈歌嘗言, ‘我祖宗出自大邦, 至于子孫, 義合
歸附.’ 今
太師烏雅束亦以大邦爲父母之國. 在甲申年閒, 弓漢村
人不順太師指諭者, 擧兵懲之, 國朝以我爲犯境, 出兵征之, 復
許修好. 故我信之, 朝貢不絶, 不謂去年, 大擧而入, 殺我耄倪, 置
九城, 使流亡靡所止歸. 故太師使我來請舊地. 若還許九城, 使
安生業, 則我等告天爲誓, 至于世世子孫, 恪修世貢, 亦不敢以
瓦礫, 投於境上.” 王慰諭, 賜酒食.(
고려사)>

이 기록을 보면 금나라에서 “褭弗·史顯”등 여섯명이 고려로 왔는데
褭弗”이가 말하기를 옛날의 태사께서 우리 금나라의 조상은 고려에
서 나왔다고 한것이다.금사와 송막기문의 내용과 서로 부합하고 우에
서 아골타가 고려를 부모의 나라 라고 한것과 부합한다.또 말하길 지
금의 태사도 고려를 부모의 나라 라고 한다고 하였다.

결국 금나라 도 그 조상이 고려에서 나왔다는것에 대해 동의하고 자랑
스러워한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금사,송막기문,고려사 등을 통하여 금나라의 시조가 고
려에서 건너온 신라인 이라는점에 적지않은 확신을 가지게 된다.

금나라가 1234년에 멸망한후 그로부터 400여년이 자나 후금이 일어
났는데 바로 유명한 청왕조다.

청왕조 건륭황제 시기에는 “흠정만주원류고”라는 청나라의 정사를 편
찬했는데 그기에도 금나라의 시조 및 금나라의 국호에 관하여 많은 기
록을 남겼다.

그 기록들을 살펴보겠다.

<《金史·地理志》乃云以國有金水源爲名,史家附會之詞,
未足憑耳。(
만주원류고)>

<금사 지리지에 의하면 금나라의 국호는 나라안에 금수원 이라는
름이
있어 그기서 취한것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사가들의 억지이고
근거가 없는 망설이다.>

만주원류고는 금나라의 국호를 하하면서 먼저 금사 지리지에 인용
된 국호래원을 부정했다.

그리고는 또 다음과 같은 기록도 나온다.

<且《金本紀》載太祖建國之詔曰:「賓鐵雖堅,終亦變壞,
惟金不變。」於是國號大金(
만주원류고)>

<또 금사본기에 이르길 태조가 나라를 세우고 말했는데 세때는 딴딴
해도 결국 마사지는데 오로지 금은 변하지 않는다.그래서 국호를 대
금이라 했다>

이것도 금나라 국호 래원 중에 유명한 설이다.그러나 만주원류고는
이것을 지지하지도 않고 반대하지도 않았다.아마도 반대할 가치조
차 없었을것이다.왜냐하면 만주원류고의 결론은 아래와 같기 때문
이다.

<按:《通考》及《大金國志》皆云本自新羅來,姓完顔氏。
考新羅與高麗,舊地相錯,《遼、金史》中,往往二國互稱,
不爲分別,以史傳按之,新羅王金姓,相傳數十世,則金之
自新羅來無疑。建國之名,亦應取此。(
만주원류고)>

<살펴보건대 통고 대금국지 에서 금나라 시조는 신라에서 왔다고
하였고 성이 완안씨라 했다.또 신라와 고려의 옛 땅을 상고해보니
서로 교착되어있었다,따라서 요사와 금사에서는 두개의 나라를 별
로 분별하지도 않았다.사서에 전해지는 기록으로 살펴보면 신라왕은
김씨였고 수십세를 전해왔다,그렇다면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에서 왔다
는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그 나라이름도 결국 신라의 김씨에서 취한
것이다.>


[결론]

한때에 거란족을 뭉개버리고 북송을 밟아버린 금나라는 비록 여진족
이 주류로 이루어진 동북아의 강대한 국가였지만 알고보니 그 나라는
신라인이 가서 건국한것이였다.그러나 우리는 그렇다고하여 금나라가
한국사요 조선사요 할 필요는 없다.금나라는 여진족의 역사이지 우리
조선민족의 역사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기때문이다.그렇다고하여 우리
조선민족이랑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나라로 인식되어서도 아니될것이다,
필경 우리민족이 여진족의 땅에 들어가 건국한 나라가 아니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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