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TCH PAY (5)

작은도둑 | 2017.01.05 18:42:11 댓글: 10 조회: 3569 추천: 8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3244793


밤새 작성했던 기획안은 보기좋게 까였다
. 장팀장은 두세페이지 넘기더니 그대로 덮어버렸다.





이유가 뭔가요
?






그 이유조차도 너 스스로 알아내라는 무언의 거절같은거 였다
. 모든 업계에는 나름의 룰이라는게 있고 선후관계가 있고 그가운데 쌓여진 노하우라는게 있다. 말 몇마디로 알게 되는 터득도 상대방이 베푸는 호의이고 그걸 스스로 알아내려면 당연하지만 꽤 긴 과정과 시행착오을 거쳐야 한다. 그 과정을 거친 다음에야만 나는 왜 내 기획서가 저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수 있다. 어느정도 예상했던 거지만 막상 너무 허무하게 까이고 나니까 밤새 마신 커피가 발효되여 속이 쓰렸다.





[됐고. 이 커플 조율 좀 해봐. ]





장팀장은 내게 서류 하나를 넘겨주었다. 첫페이지를 펼쳤더니 커플의 사진 한장이 끼워져있었다. 20대후반 30대 초반쯤 되는 별로 특기사항이 없는 무난한 커플이였다.





[남자는 3대독자 외동아들이야. 결혼식을 거창하게 하고싶어 해. 신부는 좀 다르고. 남자쪽에서 먼저 연락이 왔었는데 서로 의기투합이 안돼서 줄곧 보류된 건. 시간 잡고 만나서 각자 생각 알아보고 정리해서 메일로 보내줘. 그리고 오늘은 왈츠신부 웨딩화보나 파티장소 섭외하고. 촬영팀에 이미 얘기해놨어. 같이 이동하고.]





전달사항을 마친 장팀장을 기획서를 넘겨주면서 가보라고 했다. 자리로 돌아와 서류를 책상위에 올려놓았다. 머리를 식힐겸. 동전 몇개를 찾아들고 자판기 커피한잔을 뽑아가지고 돌아와보니 누군가가 내 자리 옆에 기대서서 뭘 읽고 있었다. 익숙한 파일인데..…. 제목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얼른 서류를 나꿔챘다.




[머하는거얘요?]

[까일만했네.]





머리결이 이마를 덮은 한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무심한듯 하면서도 냉소적인 말투가 거슬리게 들렸다. 봤던 얼굴인데 이름이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리 내가 스스로 괜찮다고 해도 다른 누군가에게서 저런 얘기 듣는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미처 밝힐 사이도 없이 내 커피를 가져가 한모금 마시더니 다시 내게 눈길을 돌렸다.





[언제 출발해요?]

[머가?]

[장소 섭외하려 가야 한다면서요. ]

[그쪽이 누군데요?]

[한팀. 좀 있다가 정문에서 봅시다.]





남자는 당연한듯 내 커피를 삥 뜯고 가버렸다. 한모금 마신건데괜찮을려나책상위를 정리하고 향초에 눈길이 머물렀을 때, 나는 그제야 그의 이름이 생각이 났다. 서류를 챙겨서 내려갔더니 판양이 빌딩문앞에서 시동을 걸고 기다리고 있었다. 차문을 열고 얼른 뒤쪽 좌석에 앉았다.





[앞에 앉아요.]

[괜찮아요.]

[내가 안괜찮아요. ]

[앞에 짐이…]





판양은 조수석에 있는 물건을 뒷자리에 옮겨놓더니 다시 재촉해왔다. 어쩔수없이 다시 조수석으로 이동을 해야 했다. 자리에 앉아서야 판양의 시선이 내 미니스커트를 훑고 지나갔고 내가 사양한 이유를 안것 같았다 민망할 정도까진 아닌데 나는 괜히 뻘쭘해져 애매한 치마자락을 잡아당겼다. 팔양은 잠깐 생각하더니 바로 뒤에 옮겨놓았던 옷을 건네주었다.





[안봐요. 그니까 신경쓰지 마요. 나 이상한 놈 만들지 말고.]





앞쪽에 시선을 고정한체 퉁명스레 내뱉았다.




[내가 남자로 보여요?]

[아니요.]

[나도 당신이 여자로 안보여요. 그러니까 쓸데없는 오해에 시간낭비 말고 편하게 일합시다.]






얼굴은 나만 붉어진거 같았다. 불편한 얘기를 자연스럽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차가 미끄러지듯 출발을 했고 나는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았다. 남편의 조수석이 자꾸 생각이 났다.




[도착했어요. 내려요.]




판양의 무뚝뚝한 목소리에 나는 잠에서 깨여났다. 밤을 샌 덕분에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편하게 지내자고 한다고 바로 잠든 나도 그다지 판양에게 정상적으로 비춰지지는 않을듯 싶다. 판양이 뒷좌석에서 카메라를 꺼내들고 초점을 맞추었다. 배경컷 몇장 찍고 담당자를 만나서 견적과 스케줄을 확인하고.. 디테일적인 부분과 필요한 장비는 메일로 통보받기로 했다. 구인생의 최고의 추억이 될 순간을 만드는 그 뒤에는 많은 사람들의 로고가 있다. 노맨틱을 만드는 일은 사실 그다지 노맨틱하지 않다.





몇군데 사전 답사를 마치고 마지막 장소에 도착했을때는 비가 점점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나올때 미처 대비를 하지 못해서 우산을 갖고 나오지 않았다. 차안에서 반시간째 우리는 나갈수가 없었다. 때마춰 배속에서는 연신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초조하고 기다림에 짜증이 나는 상황속에서도 배는 어김없이 고프다.






[거의 끝나가는것 같으니까 마감하고 밥먹으러 가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였다. 마지막 장소파악을 하고났을 때에는 저녁 여섯시가 넘었다. 하이힐을 신고 하루종일 돌아가셔서 발은 아프고 배는 고팠다. 쌀쌀한 날씨에 약간의 한기도 느껴졌다. 따뜻한 국물이 한없이 그리워졌다. 판양은 자그마한 우동가게앞에서 멈춰섰다.





주문을 마치고 기다리는데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 강현수였다.





[어디야?]

[외근중인데.. 지금 막 일끝나고 밥먹으려구요]

[미안한데 부탁하자 .. 어제 집에 계약서 하나를 두고왔어. 공항에 좀 갔다줘..]

[계약서요? 어떤 계약서? 어디에 있는데?]

[서재에일단집에 도착해서 전화줘. ]





핸드폰을 끄고 판양을 쳐다보았다.





[미안해요. 우동 두그릇 드셔야겠어요. 나 먼저 갈게요.]

[]




우동값을 지불하고 사과하고 우동가게를 나섰다. 비는 계속 쭈룩쭈룩 내리고 있었다. 판양보다 두고나온 우동한테 더 미안했다. 핸드폰으로 주변의 택시를 검색하고 있는데 뒤로부터 문이 열리더니 판양이 따라나왔다.






[다양한 모습 보여주네요. 여기 차 안잡혀요 갑시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얼른 집주소를 알려주었고 30분뒤 차는 아빠트에 들어섰다. 아빠트 입구에 경비가 차렷자세로 안전검사를 하고 있었다. 아빠트 단지로 들어오면서 판양이 입을 열었다





[직원들이 수근대는게 사실인가보네.]

[머가요?]

[당신 부잣집 사모님이라는거. 취미로 회사 다닌다고..]



눈을 흘겼더니 시무룩히 웃는다. 대꾸할 시간도 없이 급히 키를 열고 들어가 남편의 서재에서 서류를 뒤적이였다. 영문으로 된 서류들이 여러장 나왔다. 핸드폰으로 찍으려다보니까 낮에 다니면서 물이 들어간건지 켜지지가 않았다. 액정이 먹통이 되였다. 판양 핸드폰을 빌려 확인하고 바로 서류를 들고 공항으로 향했다. 낮에 많이 걸어다녀서 발목 뒷쪽이 물집이 생겨 쓰리고 아팠다.




아슬아슬하게 탑승수속을 하기전에 도착을 했다. 남편의 옆에는 지난번 그 여직원이 함께 있었다. 누군가와 계속 통화를 하고 있었고 나를 발견하더니 고개만 살짝 숙여 아는체를 했다.얼른 서류를 건네주었다. 남편 먼저 그 여직원이 가져가더니 봉투를 열어 서류를 확인했다.




[이거 아니얘요.] 내게 하는 말이 아닌 남편에게 하는 말이였다.

남편이 다시 가져가 확인을 하더니 내게 고개를 돌렸다. 양미간이 찌프려졌다.




[서류가 바뀌였어. 이게 아니야.]

[표지에 적혀져 있었는데영어 몰라요? 이제 어떡할거얘요?]




불쾌한 정서가 적나라하게 전달되였다.머리가 하얗게 비는거 같았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여직원은 여기저기 전화하더니 내일 빠른 비행기로 누군가 갖고 들어와야 할거 같다고 했다. 남편의 얼굴에서 살오라기같은 안도감을 읽었다.






[내일 계약 두시간뒤로 미루기로 했습니다. 큰 무리없이 진행될거 같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남편이 내게 다가와 가볍게 끌어안았다. 놀란 나머지 경직돼서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하루종일 비를 맞고 고객비위 맞추고 발이 까이고 위가 쓰린거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기분이 바닥을 치고 있었다. 대놓고 화를 내기보다 더 비참했다. 재빠르게 상황 판단하고 사태를 수습하는 저 여자와 가게 유리창안의 인형마냥 아무것도 할수 없는 나흔한 계약서 심부름 하나 제대로 못해서 발목잡는 나.. 나는 처음으로 우리의 차이를 느꼈다.





이 포옹은 뭐지?
나는 남편 품에서 벗어나 그 여직원앞에 다가가 마주섰다.






[너 이름이 뭐야?]

[권지안입니다.]

[고마워. 우리 남편 많이 도와줘서.나중에 기회되면 밥한번 먹어요. 출장중에 남편 잘 부탁하고.]





탑승마감 방송이 한창 울리고 있었다. 남편에게 다가가 나도 가볍게 끌어안았다.






[미안해. 여보. 당신일을 잘 몰라서. 다음엔 더 주의할께.. 잘 다녀와요. 몸 조심하고.]

발꿈치를 들고 가볍게 남편의 입에 입을 맞추었다. 남편의 얼굴에서는 여전히 표정을 읽을수가 없었다.
한층 밝게 웃어보였다.





안전검사를 마치고 남편일행은 떠나갔고 나는 입구쪽에 멍하니 한동안 서있었다. 발이 아파서 도저히 견딜수가 없었다. 시간은 어느덧 여덟시가 넘었다. 나는 하이힐을 벗고 맨발로 바닥을 밟았다. 차가운 느낌이 온몸에 전해지는것 같았다. 배는 고프다못해 감을 잃었다. 뒤늦게 나는 힐을 쥐고 뒤돌아섰다.





먼발치에서 판양이 팔짱을 끼고 지켜보고 있었다.




[가요. 부잣집 사모님. 비싼 밥 살께요.]




추천 (8) 선물 (0명)
IP: ♡.166.♡.110
i0003 (♡.43.♡.173) - 2017/01/05 19:06:37

잘 읽었습니다.
판양.
담집 기대합니다

한자연 (♡.48.♡.91) - 2017/01/05 20:30:55

점점 잼잇어지네요! 다음회도 빠른시간에 올려주면...추천!

보라빛추억 (♡.140.♡.93) - 2017/01/06 10:53:15

저도 여주랑 비슷한 경험을 한적이 있어요. 남친이 영문서류를 가져달라 했는데 많은 서류중 찾다가 그만 비슷한 제목의 서류를 잘못 가져다 주었네요. 그때 실망스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다보던 남친, 그리고 내가 느꼈던 무력함. 그 눈길땜에 영어학원에 등록했는데 얼렁뚱땅 다니다보니 아직도 영어 별로네요. ㅎㅎ
이걸 계기로 여주가 더 분발하겠죠? 판양과는 앞으로 뭔가 있을것 같네요. 남편 절친 윤태오와도 뭔가 있을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는데 나만의 착각이였나? 재밌는 글 잘 보고갑니다.

보라빛추억 (♡.140.♡.93) - 2017/01/06 10:53:53

댓글을 길게 달다보니 그만 추천을 잊었네요. 추천하고 갑니다.

토토로11 (♡.102.♡.109) - 2017/01/06 11:09:58

스토리가 참 매끄럽고 잼있어요.
근데 여주 주위에 남자들 많이 나나타네요..
웬지 다 여주를 좋아할듯한 예감이네요. ㅎㅎ
이번회도 잘 보고갑니다.

백썰공쮸 (♡.36.♡.15) - 2017/01/06 17:16:29

추천 누르고 갑니다~

꽃대지0606 (♡.108.♡.34) - 2017/01/09 13:36:33

오래만에 님 글 보니 너무 좋네요 .
스토리 역시 맘에 쏙 듭니다. ㅋㅋ
남주와 여주의 시나리오가 어찌 풀릴지...
담집도 기다립니다.

작은도둑 (♡.166.♡.1) - 2017/01/09 14:46:50

i0003님: 판양?! 주어만 있고 술어가 없어서 어떤 인상인지 감이 안잡히네요.

한자연님: 재미있다니 다행이네요. 자작글 모음이 너무 조용해서 스피드 올릴려고 하니 이상하게 외롭네요.

보라빛추억님: 겪어본자만이 느낄수 있는 자괴감 비슷한거였을겁니다. 저 하나만으로 뭔가를 결정할수는 없지만 저도 모르게 찾아오는 밀리는 느낌요. 그리고 그로부터 오는 낯설음과 어색함같은거. 생활에는 가끔 저런 자극이 필요하지만 말이얘요. 항상 고맙습니다. 님 댓글은 힘이 되네요.

작은도둑 (♡.166.♡.1) - 2017/01/09 15:01:19

토토로11 님: 여주 주위에는 여자도 많아요. 20대의 사랑만큼 달달하지는 않지만 30대는 분명 매력적인 단계인거 같애요. 좀 더 어른스럽고 현실적이고 독립적이고 그런 인간관계에서 사랑하고 어울리고 헤쳐가는 글로 봐주셨음 좋겠습니다.

백썰공쮸 님: 추천 고맙습니다.

꽃대지0606 님: 스토리가 맘에 든다니 다행이네요. 오래간만이라는 말도 좋구요. 저런 삶을 사는 부부가 꽤 많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형태이든간에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생활방식을 그려보고싶었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스텐레스 (♡.4.♡.131) - 2017/01/10 12:17:00

어제 읽고 바빠서 댓글 못달아서 오늘 달라 들어왔는데 6이 올랐네요~~
우와~~~ 넘 좋아용~~
갈수록 더 재밋어 짐다~
주인공이랑 남편분이 잘풀었음 좋겠는데~~~

22,915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보라
2006-08-09
33
62098
xingyu
2017-02-10
1
1289
꿈과미래812
2017-02-10
1
4187
꿈과미래812
2017-02-08
4
5654
꿈과미래812
2017-02-07
4
4910
꿈과미래812
2017-02-06
7
5721
xingyu
2017-02-05
2
1316
yinzhengyi
2017-01-26
0
1793
김유미
2017-01-23
6
1942
sqsqhsq
2017-01-20
1
2546
맑은날sun
2017-01-18
0
1793
xingyu
2017-01-18
0
1766
에덴818
2017-01-17
1
2067
작은도둑
2017-01-13
6
3697
xingyu
2017-01-11
2
2101
작은도둑
2017-01-09
6
3531
작은도둑
2017-01-05
8
3569
신세기천사
2017-01-05
2
2334
행복플라스
2017-01-05
0
2554
qxt5118
2017-01-01
4
4213
스마일87
2016-12-29
3
1979
씹어논만티
2016-12-27
4
4082
qxt5118
2016-12-25
1
3409
qxt5118
2016-12-23
3
3808
qxt5118
2016-12-22
3
3645
qxt5118
2016-12-21
5
4100
닉네임고민
2016-12-21
4
2174
검은장미
2016-12-20
7
3172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