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기원 2

xingyu | 2017.01.18 11:49:29 댓글: 2 조회: 1766 추천: 0
분류단편 https://life.moyiza.kr/mywriting/3254529


자정을 넘기자 짙은 안개가 도시의 거리거리마다 넘쳐흘러 변두리의 작은 골목들까지 스며들기 시작했다. 가로등불빛에 희미한 실루엣 하나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다 어느 으슥한 골목에서 멈춰섰다. 실루엣은 손으로 길바닥을 더듬거리다 맨홀뚜껑을 열고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발이 땅에 닿자 그는 다시 팔을 뻗어 맨홀뚜껑을 닫았다. 그 다음 아주 익숙한 걸음으로 미로같은 하수도를 따라 걸어갔다. 하수도는 이미 제 기능을 잃은지 오래전이였다. 바닥은 뽀송하다 못해 먼지가 날릴 정도였으며 이상한 악취는 오래전 일이였다. 이십여분 걸어들어가자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계단이 나타났다. 그는 계단을 오르지 않고 허리를 바짝 숙여 계단 밑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 자그마한 문이 교묘하게 숨겨져 있었다. 은신처로는 제격이였다. 미리 약속된 날짜와 시간이였기에 문은 열려져 있었다.

작은 출입문과 달리 안은 꽤 넓다. 온갖 물건들이 쌓여 있었다. 나름 정리해놓은 것들이였다. 그것들은 용도나 기능보다는 불리는 명칭의 알파벳순으로 걸어놓거나 늘여놓아 난잡하게 보였다.

< 잘 지내셨어요? N박사님.. >

< 네. 백작님. >

물건더미속에서 흰 가발을 쓴 얼굴 하나가 나타났다. N박사는 백작이 타이위그를 쓰는 이유가 이제 듬성듬성 빠지기 시작하는 그의 머리카락때문일거라고 추측했다. 피부조직을 제때 교체못해서 모낭피부가 늘어졌을것이다. 백작은 전에 시티타워에서 도서관 사서를 담당했었다. 타워에서 백작은 N16이라고 불렸었다. N16은 꽤 오랫동안 아주 훌륭한 사서였다. 그러다 어느순간 그의 몸에서 일어나는 여러 징후들이 관리자의 눈에 포착이 되었다. 책들의 배열순서가 바뀌었다던가 아님 낡은 책표지를 바꾸는 일을 깜빡한다던가 등등이였다. 어느날 백작이 아주 중대한 규칙을 위반한 사실이 드러났다. 몰래 인간들의 책을 읽었던 것이였다. 타워에서 아주 금기시된 사항이였다. 시티타워관리위원회에서는 긴급회의를 열고 N16의 폐기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그 임무를 N박사가 맡게 되었는데 박사는 N16의 흥미진진한 오류를 충분한 연구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박사는 구시가지에 있는 이 비밀 아지트를 찾아내어 N16을 몰래 숨겨두었던 것이였다.

< 오일은 여기 있습니다. 정확히 1리터입니다. >

N박사는 오일을 담은 유리병을 둥그런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 제가 볼 때 박사님은 너무 타이트한 것이 문제인 것 같아요. >

백작은 자연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 타이트요? >

< 네. 타이트요. 물론 장사로 먹고 사는 저한테는 더할나위없이 좋지만 말이죠. 이 곳에 오신지 반년 넘으셨지요? 요즘 여긴 타이트가 유행이얘요. 어느 영화에서 나온 대사거든요. 시간이 타이트하다, 성격이 타이트하다, 일정이 타이트하다등등. 아, 옷도 타이트한 것들이 유행이지요. >

과연 백작도 몸에 딱 붙는 흰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위에는 찰랑거리는 빨간 실크셔츠를 입었으며 종아리까지 오는 부츠를 신고 있었다. 박사는 백작의 옷차림보다는 장사로 먹고 산다는 그의 인간스러운 언어적 표현에 더 감명을 받았다. 시티타워에서 N박사는 가장 해박하고 가장 많은 데이터를 보유함으로 글리머들의 인정을 받고 있었지만 백작과 만나면 그는 언제나 바보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이질감의 근원은 자신의 기계스러움이라는 점을 박사는 인지하고 있었다. 백작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대화패턴보다는 훨씬 자연스러운 어휘를 구사할 수 있었으며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화제가 어디로 튈지 종잡을 수 없어 N박사는 늘 조마조마했다. 화제가 바뀔 때 그에 알맞는 데이터를 찾느라 잠깐 멍해지는 시간이 있는데 그 3초의 시간동안 박사는 자신이 가장 멍청하게 보일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 바보스러움을 피하고자 박사는 먼저 화제를 바뀌는 요령을 터득하기도 했다.

< 요즘 가장 잘 나가는 물품이 뭔지요? >

< 가장 잘 팔리는 물품이라면 바로 이 프라이팬이지요. >

백작은 벽에 걸려 있는 프라이팬을 손에 잡고 흔들어보였다.

< 보통은 벽에 걸어두지요. 장식용으로 인기가 좋아요. 그러나 드물게 요리를 하는 경우도 있지요. 모험심이 강한 자들은 먹어보기도 하겠지만 우리한테 그런 음식들은 무리지요. 그보다는.. >

< 지금 가장 핫한 물품이 뭔지 아세요? 물품이라고 하긴 좀 그렇긴 하네요. >

백작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묘한 아우라를 풍겼다. 박사는 몰래 그것을 흔들리는 눈동자라고 부르곤 했다.

< 바로 인간아이. >

< 네?!! > 박사는 너무도 큰 충격으로 한동안 말을 꺼내지 못했다.

< 설..설마 당신이? >

< 아닙니다. 소문으로 들었어요. 듣자하니 고위관리층이라고 하던데요.. 인간아이 키우는데 보통 손이 많이 가야지요. 오일도 많이 들구요. 인간물품은 전부다 암시장에서 거래되니깐요. 분유 한 통 가격이 오일 1,5리터라고 하더군요. >

< 그런 물품을 취급하는 라인은 따로 있어요. 그 브로커랑 새벽 2시에 만나기로 했어요. >

자정을 넘어 시침은 12시를 조금 벗어나 있었다.

< 좀 전에 밖에 나가보았는데 여전히 안개가 자욱하더군요... >

N박사는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재깍거리는 시계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시간은 더디게만 흘러갔다.


추천 (0) 선물 (0명)
나는 죽을 때까지 흔들리는 어른아이다......
IP: ♡.159.♡.232
비오는날찻집 (♡.166.♡.64) - 2017/01/19 10:18:19

어려운 주제를 선택하셨네요. 뒤가 어떻게 전개될까 기대하게 됩니다. 님 특유의 표현이 참 좋습니다.
이번글은 기존에 썼던 글과 달리 약간의 모험이 들어가있는거 같네요. 다음편 기다리겠습니다.

xingyu (♡.159.♡.232) - 2017/02/05 01:40:38

네. 어렵네요~ SF ㅋㅋ

22,915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보라
2006-08-09
33
62078
xingyu
2017-02-10
1
1288
꿈과미래812
2017-02-10
1
4187
꿈과미래812
2017-02-08
4
5654
꿈과미래812
2017-02-07
4
4909
꿈과미래812
2017-02-06
7
5720
xingyu
2017-02-05
2
1316
yinzhengyi
2017-01-26
0
1792
김유미
2017-01-23
6
1942
sqsqhsq
2017-01-20
1
2545
맑은날sun
2017-01-18
0
1790
xingyu
2017-01-18
0
1766
에덴818
2017-01-17
1
2067
작은도둑
2017-01-13
6
3697
xingyu
2017-01-11
2
2101
작은도둑
2017-01-09
6
3531
작은도둑
2017-01-05
8
3567
신세기천사
2017-01-05
2
2333
행복플라스
2017-01-05
0
2554
qxt5118
2017-01-01
4
4211
스마일87
2016-12-29
3
1978
씹어논만티
2016-12-27
4
4081
qxt5118
2016-12-25
1
3408
qxt5118
2016-12-23
3
3808
qxt5118
2016-12-22
3
3644
qxt5118
2016-12-21
5
4100
닉네임고민
2016-12-21
4
2172
검은장미
2016-12-20
7
3172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