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우 - 모두가 죽이고싶었던 여자 1

3학년2반 | 2022.02.01 08:36:06 댓글: 0 조회: 728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6185
모두가 죽이고 싶던 여 자

저자: 이상우



차 례
1. 프롤로그 연인과 동지
2. 저주받은 칼
3. 미운 오리새끼의 비극
4. 멀어진 마음 차가운 육체
5. 침실의 신경전
6. 시다의 노래를 부르며
7. 비극의 연인들
8. 미궁의 수수께끼
9. 달라진 세상
10. 탈선 디스코
11. 뫼비우스의 띠
12. 절망의 나날
13. 투사와 사모님
14. 로얄 스트레이트 플러쉬
15. 젊은 아내의 비밀
16. 가진자의 세계
17. 풀리는 수수께끼
18. 뜻밖의 자백
19. 절망의 선택




1. 프롤로그 연인과 동지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찬 소
주를 붓는다 아, 이러다가 오래 못 가지'
노동의 새벽이라는 노래가 청승스럽게 남녀 합창으로 울려
퍼졌다.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투쟁'이라는 리본을 단 한 떼의
노조원들이 쇠못 박힌 공장 대문 앞 길거리에서 노래를 부
르고 있었다.
그 앞에서 구호를 선창한 뒤 격려의 말을 토하던 오민수가
재빨리 길 모퉁이를 빠져나갔다.
오민수가 빠져나간 길가 농성장은 금방 아수라장이 되었
다.
최루탄이 펑펑 터졌다.
길목 지하 다방 입구에 서 있던 설희주는 재빨리 오민수를
발견하고 시장 골목으로 끌고 들어갔다.
함성과 땀내가 섞여 북적거리는 적나라한 삶의 현장. 질퍽
한바닥을 건너 두 사람은 조그만 수제비집으로 들어갔다.
"오랫만이야. 어떻게 됐어?"
오민수가 수제비 두 그릇을 시키며 설희주를 찬찬히 살폈
다.
헐렁한 점퍼에 청바지 차림, 화장기 없는 피곤한 얼굴이
그녀의 고뇌를 피부로 느끼게 했다.
"형은 어떻게 지냈어? 같은 과 형들이 오형 체포됐다고 헛
소문 냈었어?"
"그거야 헛소문 아니라도 좋은데, 희주에 대한 소문은 진
짜 헛소문이지?"
오민수가 다그치듯 물었다. 그러나 설희주는 고개를 숙이
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야? 이야기해 봐. 우리 곁을 떠나는 것은 아
니겠지? 헛소문이지?"
설희주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오민수는 더욱 초조해졌
다.
그답지 않았다.
신라대학교 복학생. 같은 과 학생들보다는 훨씬 나이가 많
아 그가 지도자로 뽑혔는지도 모른다. 학총련 전국 부위원
장이고 신라대학교 회장. 여러 차례 경찰에 연행되었다 풀
려난 역전의 투사.
그가 설희주 때문에 초조해졌다. 학총련 여학생 회장인 설
희주가 요즘 생각을 바꾸었다는 것을 도피 중인 오민수도
들었다.
"말해 봐!"
오민수가 목소리를 높였다. 수제비집 아주머니가 놀라 흘
금 쳐다보았다.
"미안해, 민수형!"
설희주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으나 그 말이 오민수
에게는 청천벽력보다 더 놀라왔다.
"뭐라고? 그럼 소문이 정말이야?
설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오민수는 자기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쥐고 신음을 토했다.
충격을 견디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무거운
침묵이 흘렀을까? 오민수가 평정을 되찾고 조금 전과는 너
무도 다른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희수가 한번 결심하면 바꾸지 않는다는 것은 나도 잘 알
아. 하지만 이유나 들어보자."
오민수는 앞에 놓인 수제비 사발은 본 체도 않고 담배를
피워물었다. 쫓겨다니느라고 수염도 제대로 깎지 않아 서
른도 넘은 아저씨처럼 보였다.
"우리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었어. 형이 벌써 석 달이나
쫓겨다니며 한 일이 뭐야? 우리 청춘 같은 것은 몇 억번을
바쳐도 이 세상이 달라지지 않는단 말야. 나는 지쳤어. 이
젠 방법을 바꿀 거야. 내 방식대로 해볼 거야."
설희주가 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나가자!"
오민수는 설희주의 팔을 잡고 간이 음식점을 나섰다. 그들
은 시장 바닥을 걸으며 말했다.
"우리는 이데올로기 이전에 합친 사람들이야. 네 마음과
내마음을 합쳤고, 네 육체와 내 육체를 합쳤어. 똑똑히 들
어. 우리는 동지이기 이전에 가족이야."
"가족? 연인? 그딴 게 무슨 의미가 있어. 남녀가 몸을 섞
었다고 해서 그것이 일생을 묶는 고리가 될 수는 없단 말
야. 형, 우리 유치한 이야기 그만 하고."
"뭐야?"
오민수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하여튼 희주가 딴 사람의 아내가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도 없는 일이야. 더구나 우리와 다른 세계에 있고 우리의
타기트가 되어 있는 재벌 집의 며느리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어.
그건 모독이야. 우리들의 순수한 사랑에 대한 모독이고,
우리들 수십만 동지에 대한 모독이야. 부르조아 사회는 희
주 같은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그쪽 사람들은 모
두가 희주를 죽이고 싶어할 거야."
오민수는 돌아서서 희주의 양 어깨를 두 손으로 감싸안았
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의 입술과 자기 입술을 포갰다.
"희주, 제발 생각을 바꿔 줘. 너는 나를 배신할 수 없어."
오민수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주룩 쏟아졌다. 그러나
설희주는 오민수의 얼굴을 밀어내고 고개를 돌렸다.
"이대로는 안 돼. 돌멩이와 최루탄의 싸움으로 세상이 바
뀌지는 않아. 내가 할 거야. 내가 바꾸고 말 거야. 형은
내 처녀를 가졌다고 감상에 젖는 따위의 유치한 생각 버려
야 해!"
돌아서서 걸어가는 설희주도 한참만에 눈물을 흘렸다.
"내가 죽더라도 복수하지 말아요."


2. 저주받은 칼
그렇게 무덥던 여름도 이제 풀이 죽었다.
강형사도 작년 가을에 보던 허름하고 때가 절은 듯한 회색
빛 점퍼를 다시 꺼내 입고 나왔다. 어쩐지 모습이 을씨년
스러웠다.
저러니까 아직 장가도 못 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그
를 바라보던 추경감이 히죽 웃었다.
"예, 경찰입니다."
강형사는 누구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요란하게 목쉰
소리를 내는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그의 첫마디는 언제나
'경찰'이었다. 집에서 친척들이 전화를 해도 '예, 경찰입
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예? 뭐라구요? 아니 지금 정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장난
을 하고 있는 거예요?"
강형사가 갑자기 흥분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강형사, 좀 침착하게 얘기해. 도대체 방정맞기는. 쯧
쯧쯧."
그러나 강형사는 추경감의 핀잔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요? 그래 여자가 죽어 있는 것올 보고 그냥 나왔단
말이요? 당신은 누구요? 도선생이라구요? 성이 도씨면 이
름이 뭡니까? 예? 도둑씨라고? 예끼 나쁜 사람 같으니
."
강형사가 수화기를 쾅 소리가 나도록 놓았다. 상기된 얼굴
은 분을 이기지 못한 모습 그대로다.
"어떻게 된 거야?"
추경감은 대강 사태를 짐작하면서도 조용히 물었다. 흔히
있는 장난질 전화임이 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원 재수가 없으려니까 글쎄 도둑놈이 다 나를 놀리지
않나. 아, 글쎄 봤다는 거에요. 지가 틀림없이 두 눈
으로 봤다는 겁니다."
"뭘 봐?"
"여자가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는 겁니다. 칼에 찔려서 안
방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말입니다."
"뭐야, 어느 집이래?"
추경감이 약간은 놀라는 듯했다.
"글세 도둑질하러 삼청동 어느 부잣집에 들어갔다가 기겁
을 하고 나와서 전화를 거는 거랍니다."
"하필이면 왜 여기로 전화를 걸어? 그 흔한 112 같은 곳으
로걸지."
추경감도 그 장난 전화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모양이었
다.
그때였다. 다시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이번에는 추경
감이 수화기를 집있다
"에, 시경입니다."
"보이소. 조금 전에 전화받은 사람 누군교? 사람 말이 말
같잖나."
진한 경상도 사투리가 귀를 쨍쨍 울렸다.
"댁은 누구신데 어디로 전화를 하셨나요?"
추경감은 침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건 알 거 없어요. 거기 시경 강력계 아잉기요? 거서 살
인사건 조사한다카데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근데 조금 전에 전화받은 형사 누군기요? 시민이 살인 사
건신고하는데 그래도 되는기요? 요새 민주화된 거 모르는
기요?"
"미, 미안합니다 그런데 차근차근 다시 한번 말씀해 보십
시오. 나는 추경감이란 사람입니다."
추경감이 메모할 준비를 하며 말했다. 강형사는 미친 녀석
의 장난 전화에 그렇게 성의를 보이는 추경감이 바보스럽
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나는 똑똑한 직업이 없이 잘 사는 놈들 부정해서 번 돈
쬐끔씩 가져다 묵고 사는 사람인데요, 세상 사람들은 내보
고 도둑놈이라고 하지만 알고 보면 담장에 철조망 치고 대
문에 텔레비, 전화 달아 놓고 들앉았는 놈들이 사실은 도
둑놈이라요."
"여보세요, 간단히 이야기합시다."
느긋한 추경감도 짜증이 났다.
"알겠심더. 그래서 조금 전에 청운동 청운 빌딩 옆골목 으
리으리한 집에 슬쩍 들어간기라예. 현관문이 잠겨 있어 모
퉁이로 돌아가 창문을 열고 들어갈라고 방문을 들다 보이
말입니더.
아이고 사람 죽네. 아니, 사람이 죽어 자빠진기라예. 여자
가 가슴에 칼을 맞고. 방안은 온통 피"
"여보세요, 좀더 그 집 위치를 자세히 말씀해 보세요. 청
운빌딩 옆골목으로 들어가서."
추경감은 바싹 긴장했다. 어느 새 수화기를 쥔 손에는 땀
이났다.
"그 집 문패가 고봉식이라고 돼 있었십니더."
경상도 사나이는 그 말을 남기고 전화를 딸각 끊어버렸다.
"이봐, 강형사, 빨리 확인 좀 해야겠어. 헛소리치고는 너
무 분명해. 지금 빨리 가 보고 와."
"아니 경감님, 그 미친 녀석 말을 곧이듣는단 말입니까?"
강형사가 어이없다는 듯 점퍼 소매를 걷어붙이며 열을 올
렸다. 강형사의 괄괄한 성격 앞에는 가끔 상관도 보이지
않을 때가있었다.
추경감은 아무 말도 않고 돌아서 버렸다. 곤란한 일이 생
길때는 그 자리를 슬그머니 떠나 버리는 것이 그의 버릇이
었다.
강형사는 하는 수 없는 듯 점퍼를 벗어 아무렇게나 구겨
쥐고 밖으로 나갔다.
그로부터 채 30분도 안 돼 강형사가 씩씩거리며 들어왔다.
구겨 들고다니던 점퍼를 책상 위에 동댕이치며 추경감 들
으라는듯 큰 소리로 떠들었다.
"별 거지 발싸개 같은 놈이 전화를 해 가지고 지랄이야.
멀쩡한 사람을 죽었다고? 내 이 녀석 잡기만 하면 작살을
내버리고말걸."
추경감은 강형사의 모습을 보며 몹시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강형사, 그게 허위 신고였나?"
추경감이 미안해 어쩔 줄 몰라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형사질한 것이 하루 이틀입니까? 우리 강력계에서
그런 허튼 전화 받아 본 것이 한두 번입니까?"
강형사는 좀체 분이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집에 가보긴 가본 거야?"
추경감은 그렇게 말해 놓고는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손으로 얼른 자기 입을 막았다.
추경감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고 있던 강형사가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예, 명령대로 가보았습니다. 그 녀석이 그집 위치만은 분
명하게 말했더군요. 그 집은 저 유명한 재벌인 명왕성 그
룹 고회장 집이더군요. 문패의 고봉식은 고회장의 맏아들
이구요."
"만났어?"
"물론이죠. 그 집 며느리를."
강형사가 수첩을 꺼내 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 집 며느리 설희주씨를 만났지요. 이 집에 살인 사건
없냐고 물었더니 완전히 나를 미친 놈 취급 하더군요. 하
긴 내가 미친 놈 아닙니까? 멀쩡한 집에 찾아가 누가 찔려
죽지 않았냐고 하니까."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어떻게는 뭐가 어떻게입니까? 백배 사죄하고 도망쳐 왔지
요."
그때였다.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고 전화를
받던 강형사의 표정이 갑자기 이상해졌다.
"예, 정말입니까?"
"무슨 일이야?"
강형사가 경비 전화를 든 채 놀라고 있는 모습을 본 추경
감이 대답을 재촉했다.
"경감님, 정말입니다."
"뭐가 정말이야?"
강형사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묘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계속했다.
"방금 상황실 연락인데요, 그 살인 사건이 사실이랍니다.
고회장 집에서 여자 피살체가 발견된 신고가 들어왔답니
다."
"뭐야?"
추경감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참 환장할 노릇이야. 도대체."
그때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이소, 사람 죽었다는데 와 신고받고도 묵살하는기
요?"
시체를 목격했다는 그 경상도 목소리가 다시 전화를 걸었
다.
추경감은 송화기를 손으로 막고 이 전화 거는 곳을 추적하
라는 신호를 했다. 강형사가 재빨리 경비 전화로 추적을
의뢰했다.
"당신 말이 맞았어요. 신고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당신 이름을 좀 가르쳐 줄 수 없나요?"
추경감은 될 수 있는 대로 상대방에게 말을 시키며 전화를
끊지 않으려 노력했다.
"내 말 곧이들었으면 된깁니더."
그러나 그는 금방 전화를 끊고 말았다.
그 경상도 사투리의 두번째 전화는 사실이었다.
추경감과 강형사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종로 경찰
서 형사들이 와 있었다.
피살자는 고회장의 맏며느리이며 명왕성 자동차 사장인 고
봉식의 아내 설희주였다. 그녀는 자기의 침실에서 가슴에
칼을 맞은 채 죽어 있었다.
참으로 괴이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강형사가 처음 신고를
받고 그곳에 갔을 때 그가 만난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아
니, 그 사람은 설희주임에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그 경상도 사투리가 살인을 예고했단 말인가? 무
엇때문에 그런 전화를 했을까? 그 경상도 사투리가 경찰에
살인 사건을 예고한 뒤 강형사가 다녀간 것을 보고 이번에
는 살인을 한 뒤 다시 전화를 했다고 쉽게 추리할 수 있
다.
"그 경상도 사투리가 전화한 위치는 확인했나?"
사건 현장을 돌아보고 있던 추경감이 강형사에게 물었다.
"전기통신공사와 협의 중입니다만 워낙 빨리 전화를 끊었
기 때문에 좀."
"그 녀석이 사건의 단서를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추경감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단서가 아니라 그놈이 범인 아닙니까?"
강형사가 갑자기 큰 소리로 말하는 바람에 감식에 열중했
던 경찰관들이 돌아보았다.
"그건 나중에 알아보기로 하고 지금 상황부터 정리를 해
보지."
추경감이 거실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4, 50평은 충분히 될 것 같은 넓은 거실에다 우람한 장식
이 재벌가의 풍모를 잘 말해 주고 있었다.
남쪽으로는 젖혀진 커튼 사이로 열대림이 우거진 듯한 온
실이 연결돼 있었다. 높이가 3미터는 됨직한 통짜 유리로
된 창문이 벽 하나를 다 차지하고 있있다. 거실 가운데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완만하게 용트림을 한 듯한 모습
으로 놓여 있었다. 계단 바닥에는 베이지색 카피트가 깔려
있고 난간 손잡이는 은색 금속으로 되어 있있다. 정교하면
서도 우람한 모습을 풍겼다.
추경감은 벽에 걸린 고희동 화백의 유화를 보면서 50호는
충분히 될 것이란 생각을 해 보았다. 거실 계단 옆으로 들
어가면 문제의 침실이 있고 거기서 며느리 설희주가 피살
되었다.
설희주는 홈웨어 스타일에 모로 쓰러져 있었으나 얼굴은
의외로 잠든 듯 편안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방안 여기저기에 핏자국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반항
한것 같았다.
하얀 시트가 덮인 침상에도 피묻은 손자국이 있었다. 옅은
연두색의 원피스형 홈웨어의 앞가슴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고 두 손도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걷혀 올라간 원피
스 치맛자락 밑으로 희게 반짝이는 두 다리가 가련한 모습
을 하고 있었다.
자그맣고 에쁜 발가락들에도 핏자국이 약간 묻어 있었다.
"무엇에 찔린 거야?"
추경감이 감식하는 형사들을 보고 물었다.
"칼에 가슴을 여러 번 찔린 것 같은데 흉기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수염을 깎지 않아 턱이 지저분하게 보이는 형사가 쳐다보
지도않고 말했다.
"범인과 한참 다툰 흔적이 곳곳에 있습니다. 범인의 도주
로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만, 방문에서 현관으로 나
가는 길 외에는 딴 길이 없는 것 같습니다."
강형사가 친절하게 일러 주었다.
"강형사가 왔을 때는 분명히 저 여자가 살아 있었단 말이
지?"
추경감이 설희주를 턱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몇번 말씀드렸습니까? 물론입니다. 저기 현관에서 나하고
이야기를 했으니까요. 그러니까 그 이후에 저 여자가 죽은
것은 명백한 진실입니다."
강형사가 열을 올렸다.
"그때가?"
"오후 2시30분께입니다. 그리고 삼청 파출소에서 신고를
받은것이 3시40분께이니까 그 사이, 즉 1시간 10분 사이에
피살된것입니다."
"삼청 파출소에는 누가 신고했나?"
추경감이 담배를 입에 뮬고 켜지지도 않는 고물 지포 라이
터를 철거덕거리며 물었다.
"제가 신고했습니다. 뭐 잘못되었나요?"
그때 추경감 뒤에서 한 사나이가 불쑥 나타나며 불쾌한 어
조로 말했다.
추경감이 돌아서서 사나이를 잠시 훑어보았다. 지나치게
헐렁한 스웨터와 청바지 차림에 키가 1미터80은 휠씬 넘게
보이는 20대의 깡마른 사나이가 입가에 약간의 비웃음 같
은 것을 흘리며 추경감을 내려다보았다.
"당신은 누구요?"
강형사가 촉바르게 나섰다.
"고봉길. 이 재벌가의 막내지요. 하지만 나는 빈털터리랍
니다."
그는 두 손을 벌려 서양 사람 같은 제스처를 해 보였다.
어딘가 비꼬인 듯한 젊은이였다.
"내가 신고를 했습니다. 신고한 사람이 가장 유력한 용의
자라는 말이 추리 영화에 흔히 나오더군요. 저도 그렇게
보입니까?"
고봉길이 추경감 앞에 턱을 바싹 들이밀며 말했다.
"처음 시체를 발견했을 때의 상황을 자세히 좀 말해 주
게."
추경감은 고봉길의 태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했다.
"이야기 못할 것도 없지요. 불쌍한 우리 형수의 마지막 비
명을 들은 것은 저뿐이니까요."
고봉길은 담배를 꺼내 손톱에 탁탁 치면서 소파 손잡이에
엉거주춤 앉았다.
"사건이 난 순간 이 집에 있었던 사람은 피살자 설희주씨
와 고봉길씨, 욕실에서 세탁기를 돌리고 있던 가정부 수원
댁, 그리고 2층에 큰딸 정혜가 있었습니다."
종로서에서 나온 형사가 설명했다.
"이 집 식구 모두였나요?"
"아닙니다. 고명성 회장님 내외는 외출 중이었지요. 그리
고 둘째딸 영혜씨, 비서실장 겸 사위 정정필씨, 그리고 운
전기사 두 사람 등이 이 집에 기거하고 있습니다만."
"도대체 이 집이 얼마나 크길래 그 많은 식구가."
강형사가 중간에 말을 끊었다.
"예, 모두 백40평쯤 됩니다. 건평 말입니다. 대지는 한 5
백평되지요. 왜 탐나시유?"
고봉길이 강형사를 쳐다보며 빈정댔다.
"뭐야? 이 새끼가!"
강형사가 발끈해서 주먹으로 그를 때릴 태세를 취하다가
입술을 깨물고 참았다.
"그래 다른 사람은 모두 외출 중이었단 말이죠?"
추경감이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그랬다니까요. 내가 2층에서 기타 연습을 하고 있는데 갑
자기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렸어요. 가슴을 찢는 듯한 처
절하고 날카로운 소리였어요. 나는 아이쿠, 우리 형수가
죽는가부다고 생각하고 아래층으로 뛰어내려와 형수 방으
로 가 보았지요.
그랬더니 글세 형수는 이미."
"가만, 두 가지만 물어보겠네."
추경감이 손가락 둘을 펴 보이머 고봉길을 쳐다보았다.
"첫째, 비명을 듣는 순간 형수가 죽는가부다고 생각했다는
데, 왜 그런 생각을 했나?"
"그야 이 집에서 죽을 사람이 있다면 형수밖에 더 있겠어
요? 형수는 늘 그런 위험한 방사능 앞에 노출돼 있었거든
요."
"위험한 방사능?"
"그게 꼭 방사능 같은 거죠. 우리 식구 모두가 형수를 미
워하는 눈길을 쏘았으니까요."
"더 자세히 얘기할 수 없나?"
"차차 알게 될 겁니다. 수사해 보시면."
"좋아. 그럼 두번째, 형수가 칼에 찔려 쓰러져 있는데 왜
병원으로 옮기지 않고 경찰에 신고했나?"
"병원요? 병원에선 죽은 사람도 살립니까? 그래 내가 죽은
사람 산 사람도 구분 못하는 바보로 아십니까? 후후후."
고봉길은 기가 막힌 듯이 웃었다.
"전에 죽은 사람을 본 일이 있소?"
강형사가 물었다.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그때였다. 초동 수사를 하고 있던 형사 한 사람이 거실로
뛰어나왔다.
"찾았습니다. 이겁니다."
형사는 칼 한 가루를 수건에 싸들고 있었다. 피가 묻어 있
는 그 칼은 보통 여염집에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박물관에서나 봄직한 골동품 칼이었다. 사극 영화에 소품
으로 나오는 고대 서양 병사들의 칼 같았다. 30센티 남짓
한 단도인데 칼날이 고딕식으로 곧게 뻗었고 손잡이에는
고풍스러운 서양식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아주 정교한 예
술품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칼 본 적 있나?"
추경감이 고봉길을 쏘아보며 물었다.
"그 칼 제가 알아요."
그때 2흥 계단을 내려오던 여자가 끼어들었다.
"이 집 큰딸 정혜씨입니다."
강형사가 추경감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부스스한 얼굴을
긴 머리카락이 감싸고 있있다. 첫눈에도 오만한 모습이 배
어 넘쳤다. 손목에는 철렁거리는 보석 팔찌를 끼고 있었
다. 추경감은 그것이 꼭 수갑처럼 보여 혼자 히죽 웃었다.
오만해 보이는 얼굴이지만 꽤 미인축에 들었다.
"그 칼은 우리 아버지 거예요. 위대한 고명성 회장님 말입
니다. 몇년 전 로마에서 수백만 원을 주고 구해 왔답니다.
고대 로마 전사들이 쓰던 칼이래요. 저걸로 몇 사람이나
더 죽여야 할는지. 그건 옛날부터 재앙의 칼이라고 불
렀대요."
정혜는 거침없는 말투로 칼을 저주스럽게 바라보며 말했
다.
"재앙의 칼이라구요?"
칼을 쥐고 있던 형사가 갑자기 겁이 난 것처럼 보였다.
"이태리 경매장에서 그렇게 불렀대요."
"이 칼이 어디에 있었나요?"
추경감은 볼수록 오묘하게 생긴 피묻은 골동품을 흥미롭게
살펴보며 질문했다.
"우리 회장님 박물관에 있었지요."
정혜가 소파에 털석 주저앉아 다리를 꼬았다. 늘씬한 각선
미가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매혹적이었다.
"아버님은 저쪽 방 한 칸을 애장품 보관실로 정해 두었습
니다. 그곳에는 여러 가지 골동품이 소장돼 있습니다. 허
지만 아무도 거긴 얼씬하지 못하는 곳입니다. 늘 잠겨 있
거든요."
고봉길이 설명했다.
"저주의 칼은 혼자 다니며 사람을 죽인대요."
정혜가 칼로 사람을 찌르는 시늉을 하면서 말했다.
"좀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추경감이 정중하게 물었다.
"난 잘 몰라요. 고회장님 오시거든 물어보시지요."
"알겠습니다. 그럼 아가씨에게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나 아가씨 아니예요. 옛날엔 아가씨였지만 지금은 아줌마
예요."
"시, 실례했습니다. 아주머니, 저어, 설희주씨, 즉 올케가
피살될 때 아주머니는 2층 방에 계셨댔죠?"
"그래요. 그럼 안 되나요?"
"아니, 그게 아니라, 무슨 비명 같은 소리 못 들었어요?"
"아뇨."
"그때 무얼 하고 있었어요?"
"헤드폰 끼고 마이클 잭슨을 듣고 있었어요. 요즘 애들은
한물 갔다고 하지만 난 마이클 잭슨이 좋거든요."
욕실에서 세탁기를 돌리고 있던 가정부 수원댁도 비명 소
리를듣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경감님,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강형사는 현장에서 수거한 여러 가지 증거품을 뒤적이다가
피묻은 와이셔츠 하나를 들추어내며 말했다.
그러나 추경감은 대수롭지 않은 듯 대꾸도 하지 않았다.


3. 미운 오리새끼의 비극
재벌가 맏며느리 피살 사건은 세상에 대단한 화제가 되었
다.
여자들 두셋만 모여도 어떻게 죽었느니, 누가 죽였느니 하
면서 모두가 입방아 찧기에 바빴다.
상황이 중대한 만큼 종로 경찰서 안에 수사 본부가 설치되
고 사건은 시경의 추경감이 직접 맡게 되었다.
추경감은 우선 명왕성 그룹의 가족 상황부터 조사를 해 보
았다.
625때 고철 수집상을 하던 고명성 회장은 그것을 리어카
공장으로 키워 나갔다. 조그만 자전거 공장을 세워 손으로
드럼통을 두들겨 자전거를 만드는 일을 했었다. 그 규모가
좀 커지자 이번에는 월남 붐을 타고 일어섰다.
60년대 말 월남에 고철 수집 회사를 세우고 거의 멀쩡한
지프차의 엔진 같은 것을 고철로 수입해다가 개조하기도
하고 모터보트를 만들기도 했다.
한국의 많은 재벌들이 그렇게 했듯이, 월남 경기는 벼락
부자를 많이 만들었다.
그것을 바탕으로 조선 회사를 일으키고 자동차 생산 공장
도 만들었다.
작달막한 키에 코가 납작하고 못생긴 축인 그는 늘 신체에
대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이마에 있는
주름살이 임금 왕(王)자처럼 생겼다고 늘 그것을 자랑해
왔다.
"백년 전에만 태어났더라도 나는 왕이 되었을 거야."
자기의 볼품 없는 용모를 늘 이렇게 자위하고 있었다.
고회장은 마침내 그룹의 총수가 되고 그 이름을 자기 이름
자 가운데 이마의 왕주름을 넣어서 명왕성 그룹이라고 했
다.
함께 고생하던 조강지처는 7, 8년 전에 비행기 추락 사고
로 죽었다.
그 뒤 나이가 서른여덟 살이나 아래인 명문대 출신 최화정
과 재혼을 했다.
먼저 죽은 친구의 딸이기도 한 최화정을 돈으로 사오다시
피 해서 결혼을 했다.
그녀는 장남인 고봉식보다 7살이나 아래로 올해 갓 서른
살이었다.
장녀인 고정혜보다는 4살 아래, 둘째딸 고영혜보다 두 살
위이고, 막내 고봉길보다는 네 살 위였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어머니지만 너무나 자연스럽지 못한 어
머니가 된 셈이다.
최화정은 목이 길고 얼굴이 작아 미인형에 들지만 썩 아름
다운 인물은 아니었다. 귀엽게 생겨 남성들의 사랑을 듬뽁
받을 수있는 애교 넘친 여자였다.
임기응변이 빠르고 나이 많은 고회장을 잘 다루었다.
아들 딸이 되는 장녀 정혜, 장남 봉식, 둘째딸 영혜, 막내
봉길, 그리고 정혜의 남편인 사위 정정필과도 잘 어울렸
다.
올해 서른아홉이나 된 정정필은 젊을 때부터 고회장의 비
서로 일해 왔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고학으로 대학을 마치고 명왕성
그룹에 들어와 필사적인 방법으로 고회장에게 접근했다.
그는 마침내 고회장의 딸을 아내로 삼는 데 성공하고 지금
은 회장 비서실장으로, 늘 고회장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
다.
어머니 최화정은 모든 식구와 그럭저럭 어울려 지냈으나
며느리 설희주와는 언제나 기름과 물이었다.
"설희주를 미워하지 않은 식구는 누구야?"
그 집 가족들의 신상에 대해 내강 이야기를 들은 추경감이
강형사에게 물었다.
"글세요. 고회장과 고봉길을 빼놓고는 모두가 설희주를 눈
의 가시처럼 여겼던 것 같습니다."
"왜 그랬을까?"
"가난한 집에서 자란 여자가 연애라는 특별한 줄을 타고
고봉식을 함락시킨 뒤 명왕성가의 안방 후계자가 된 것이
모두 싫었던 모양입니다."
"고봉식은 직책이 뭐야?"
"명왕성 그룹의 한 계열인 명왕성 자동차 사장입니다."
"설희주의 친정은 어떤가?"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어머니와 오빠가 있었는데 결혼
하기 몇달 전 죽었다고 합니다. 거의 고아나 다름 없습니
다. 시집간 언니가 하나 있긴 있다고 합니다만."
추경감은 한참 동안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미운 오리새끼가 백조의 집에 뛰어들었군. 자라온 환경이
다른 사람은 어울리기 어려운 법이야. 민물고기를 갑자기
바다에 가져다 놓으면 어떻게 되겠나?"
"예?"
강형사는 추경감의 그답지 않은 센티멘탈리즘에 어리둥절
해졌다.
"참 기묘한 가정이야. 그 남편이라는 고봉식이 말야, 어딘
가 좀 멍청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 자기 실속은 다
챙기는것 같기도 하고."
"그 사람이야말로 전형적인 재벌가의 멍청이 장남 스타일
입니다. 그런 사람은 마누라 죽일 용기도 없어요."
강형사가 떠들었다.
"사인은 정확하게 나왔나?"
추경감이 갑자기 생각난 듯이 말했다.
"예, 가슴을 찌른 칼의 상처입니다. 네 군데를 찔렀는데
세군데는 깊이 12센티로 치명상이 아니었고 한 군데가
심장의동맥을 건드렸습니다."
"약물 중독이나."
"아뇨."
강형사가 추경감의 말을 중간에서 잘랐다.
"그 외 이상은 없었나?"
"전혀. 아참 정교의 흔적은 있었습니다. 근데 질 속에서
발견된 체액으로 보아 최소 1주일 이전에 정교를 했던 흔
적만이 남아있습니다."
"혈액형은?"
"남편의 혈액형인 O형과 같은 정자가 발견되었습니다."
"세상에 O형 혈액을 가진 사람이 고봉식뿐이야?"
그 대목에서 추경감은 갑자기 신경질적이 되었다. 추경감
은 한참 동안 다시 창밖을 보고 있다가 벌떡 일어섰다.
"다시 가 보자. 외부인의 짓일 수도 있어."
"예?"
"빨리 따라와."
그들은 청운동 고회장의 집 앞에 닿았다. 먼저 강형사가
초인종을 눌렀다.
"아! 강형사시군요."
어디에선가 젊은 남자의 목리가 튀어나왔다.
"어찌 된 거야?"
추경감이 어리둥절해졌다. 강형사가 대문 처마에 붙은 물
건을 가리켰다. 스피커처럼 구멍이 송송 뚫린 물건이 보였
다. 그 위에는 카메라 렌즈 같은 것도 있었다.
"저게 텔레비젼 초인종이란 겁니다. 여기 누가 서 있는지
집안에서 다 볼 수 있습니다."
강형사 말을 들으며 추경감은 어린아이처럼 호기심어린 눈
으로 그것을 쳐다보았다.
조금 있다가 둔중한 금속성을 내면서 대문이 열렸다.
그들이 거실까지 가는 데는 상당한 감시망이 있었다.
"자외선 경보 장치, 전자 감응식 철조망 등이 이 집에 장
치돼 있습니다."
강형사가 나직하게 말했다.
거실에는 마침 여러 식구가 모여 있었다.
"형사 나으리들이 또 오셨군요. 이 분이 대명왕성 그룹 고
회장님이십니다. 회장님 뵈오러 오셨죠?"
고봉길이 여전히 비웃는 듯한 미소를 흘리며 거실 소파 중
앙에 앉아 있는 볼품 없는 중늙은이를 소개했다.
"어서들 오시오. 좀 앉으시지요."
고회장은 일어선 것도 아니고 앉은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자세를 잠깐 보이고는 도로 앉았다. 볼품 없는 외모였다.
그러나 날카로운 눈과 일자로 꽉 다문 입이 보통 사람으로
는 보이지 않았다. 대그룹의 총수다운 분위기가 풍겼다.
"이거 처음 뵙습니다. 텔러비젼이나 신문에서 보던 얼굴과
꼭 같군요."
추경감이 인사로 한다는 말이 좀 이상해졌다.
"그래 범인의 윤곽은 잡았소?"
고회장은 추경감의 말은 들은 척도 않고 자기 질문만 했
다.
"그게 아직."
"오늘 나한데 온 용건은 뭐요?"
"특별한 용건은 없고 그냥 몇 마디."
추경감이 우물쭈물하자,
"싱거운 사람들이구먼. 당신들 월급 주는 사람이 누군지
모르지만 한심하구려."
고회장은 이 말을 남기고 벌떡 일어서서 안으로 들어가 버
렸다.
"미안합니다. 회장님은 원래 성격이 깔끔하셔서."
그때 커크 더글러스의 턱을 닮은 사나이가 몇번씩이나 절
을하며 말했다.
"저는 고회장님 비서실장인 정정필이라고 합니다."
사나이는 연신 절을 하며 말했다.
"동시에 우리 큰누나의 남편이구요."
고봉길이 비꼬아 주었다.
"이 분은 우리 큰형님, 명왕성 자동차 사장이죠."
추경감은 키가 크고 점잖게 보이는 고봉식에게 목례를 보
냈다.
"회장님 사모님을 잠깐 뵈었으면 하는데요."
추경감의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옆방에서 젊은 여자 두
명이 나왔다.
"내가 이 집 어머니예요."
"예?"
젊은 여자의 자기 소개에 추경감은 잠깐 어리둥절해졌다.
"최화정이라고 해요. 얘는 우리집 둘째 영혜구요."
그녀는 같이 나온 여자를 소개했다. 맏딸 정혜와 많이 닮
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화정을 늙은 고회장의 부인이라고 생각하는 데는 상당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추경감은 생각했다. 너무 젊고 발랄하
게 보여서 둘째딸 정도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사모님께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평소에 며느님인 설희주
씨가 특별히 미워한 사람이 있습니까?"
추경감이 물었다.
"그 반대는 있어요. 올케를 미워한 사람이 많아요."
영혜가 촉바르게 나섰다.
"영혜씨는 올케와 다툰 적이 있나요?"
이번에는 강형사가 물었다.
"한두번 다투지 않은 시누 올케 사이 보았나요?"
영혜는 소파에 앉은 채 포개 얹은 왼발을 달랑거리며 말했
다.
"그러면 다시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이 칼이 있던 방 열
쇠는 주로 누가 사용했나요?"
추경감은 포케트에서 사진 한 장을 내보이며 말했다. 살인
흉기로 쓰였던 문제의 로마 단도 사진이었다.
"그 칼은 항상 회장님의 골동품 진열장에 있었지요. 물론
열쇠는 늘 채워두고요."
최화정 여사가 침착하게 설명했다.
"진열장이나 그 방 열쇠는 항상 회장님이 지니고 다니셨겠
죠?"
"지니고 다니시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무데나 내굴리지
도 않았지요."
"그러니까 이 칼을 사용한 범인은 진열장과 방 열쇠가 어
디 있는지 아는 사람이겠군요?"
강형사가 나서자 최화정 여사가 발끈했다.
"이 분 무슨 이런 이상한 말을 해! 그 열쇠 회장님 아니면
내가 만지는데 그럼 우리 둘 중에 하나가 칼을 꺼내다 새
아기를 찔렀단 말예요?"
최화정이 설희주를 새아기라고 부른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고 추경감은 생각했다.
서른 살 남짓한 여자가 같은 또래의 며느리를 아기라고 하
는게 어쩐지 어색했다.
"아,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강형사가 당황해 손을 내저었다.
"제 말은 상식선에서 추론하자면."
"꼭 사람을 죽일 생각이면 멀리서 총 같은 걸로 쏘지, 뭣
때문에 손에 피묻혀 가면서 칼로 찌릅니까? 아이 끔찍해."
그녀는 자기 손에 피라도 물은 듯 손을 흔들어 털면서 말
했다.
"저는 다만 이 칼이 이 집안에 있었다는 것만 확인하면 그
만입니다."
강형사가 풀이 죽어서 말했다.
"그 말투는 그 칼뿐 아니고 그 칼을 사용해서 사람을 죽인
사람도 이 집안에 있다는 투군요."
최화정이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아, 아닙니다 그렇게 단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외부에서 누가 들어와 우리 집안 사람을 찔렀다고
는 얼른 납득이 가지 않을 것입니다."
고봉식이 말을 계속했다.
"이 집은 평범한 주택이 아닙니다. 자외선 경보 장치까지
설치돼 있기 때문에 불시에 누가 들어와서 그런 일을 저지
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들어오실 때 보셔서
아시겠지만 마당에는 맹견 두 마리까지 있지 않습니까. 하
여간 밖에서 누가 침입했다면 비명 소리보다 경보 사이렌
소리가 훨씬 더 요란스러웠을 테니까요. 그뿐입니까? 개
두 마리가 악을 써보세요. 파출소까지 들렸을 겁니다."
고봉식이 목소리를 점점 높이며 이 집의 완벽한 방범 체제
를 신나게 설명했다.
"오빠는 지금 이 집 울타리 안에 살인자가 있다는 것을 웅
변하는 거예요? 나 원 기가 막혀서!"
정혜가 고봉식을 비난했다.
"너무 열올릴 건 없다. 아무려면 한 가족이 가족을 죽였다
고 형사님들이 생각하겠어?"
최화정이 어른스럽게 말했다.
"나두 새엄마 말에 전적으로 동감이야. 범인은 외부인일
거예요. 어떻게 우리 식구를 그런 무시무시한 리스트에 올
리는 어처구니없는 상상을 할 수 있어요?"
둘째 영혜가 몸서리가 쳐진다는듯 팔짱을 끼고 목을 움츠
리며말했다.
"전 아직도 여러분들을 그런 리스트에 올리지는 않았습니
다. 예를 들어 월부 장수나 배달원 등 이 집에 정기적으로
또는 수시로 드나드는 안면 있는 사람이 우발적으로 범행
을 저지를수도 있으니까요."
추경감이 흥분한 가족들을 가라앉힐 속셈으로 의견을 말했
다.
"추리소설을 보면 범인은 언제나 엉뚱한 사람이더군요. 이
번 사건도."
"그만둬요, 새어머니. 수사반장은 새어머니가 아니고 이
분이에요."
영혜가 최화정의 말을 중간에서 잘라 버렸다. 그러나 최화
정은 그만 두지 않았다.
"윈래 바둑이나 카드는 게임 당사자보다 옆에서 훈수하는
사람이 더 잘한다고 했어. 반장님, 포커 좋아하세요?"
최화정은 안 해도 될 질문까지 했다.
"하여간 우리 가족 중에서 뭔가 얻으려고 하는 것은 어불
성설이에요. 범인은 안이 아니고 밖이라니까요."
정혜가 결론을 짓듯 말했다.
"꼭 그렇게만 우기지 말아요. 우리 식구 중에 형수를 미워
하지 않은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라고 해! 미움, 증오, 그
것이 극에 달하면 극단적인 상황이 오는 거라고."
잠자코 있던 고봉길이 비분강개한 듯한 목소리로 떠들었
다.
"안이고 밖이고 하여간 범인은 잡을 수 있는 거겠죠?"
비서실장 정정필이 사무적인 투로 다그쳤다.
"우리는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강형사가 대답을 가로 맡았다.
"최선 다 안해도 좋으니 되도록 빨리 매듭을 짓는 게 좋겠
어요. 못 잡으면 못 잡겠다고 손 들면 그만 아닙니까. 이
제부터 신문 방송이 더 떠들어댈 테니. 집안도 집안이
지만 각 계열 회사, 그리고 거래선, 외국 바이어들까
지."
정정필이 사정하듯 말했다.
"매형은 어째 그래요? 사람이 죽었는데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습니까? 범인은 못 잡아도 좋다구요?"
고봉길이 발끈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솔직이 말해 요즘 같은 불경기에 이제 무슨 날벼락입니
까?"
"벼락맞은 사람은 형수예요. 근데 회사가 어쩌구 불경기가
어쨌단 말입니까?"
고봉길이 다시 악을 썼다.
"얘, 매형 말이 맞지 뭘 그러니?"
정혜가 고봉길을 나무랬다.
"누나!"
고봉길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정혜를 노려보았다. 두 눈
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그만들 둬."
장남 고봉식이 봉길의 허리춤을 잡아당겨 자리에 앉혔다.
"이 사람이 왜 좋은 인상 다 구기구 그래? 아, 누구는 칼
에 찔려 죽은 사람 두고 노래 부르고 싶은 심정인 줄 알
아? 이거 왜 이래, 정말."
정정필이 펄펄 뛰었다.
"제발, 형수님을 애도하는 마음이 손톱만큼이라도 있으면
이런 자리에서 사업 얘기는 말아 주세요, 제발. 대재벌 그
룹 만든 고회장님이 또 무슨 돈을 더 벌 욕심이 있다고 그
러세요? 하기야 우리 아버지는 돈 위에 돈 있다고 늘 말씀
하셨지만."
고봉길의 독백 같은 말은 점점 냉소적으로 바뀌었다.
"애도? 돈? 돈보다는 지금 애도를 해야지. 암!"
이번에는 정혜도 다른 방향으로 냉소적이었다.
"팔자 좋은 소리들 하고 있네요. 우리 명왕성 그룹에 목줄
을 걸고 있는 사람이 십만 명도 넘어요. 우리 그룹이 삐거덕
하면 굶어 죽을 사람이 줄줄이 나온단 말이요. 처남댁이 죽
었다는 뉴스 나간 뒤 공장 기계가 멈출 정도로 술렁술렁
난리 났어요, 난리!"
"너무 걱정 마십시오, 매형. 그룹 회장 며느리 칼 맞아 죽
었다고 자동차 살 사람 안사지 않아요. 빌딩 짓던 사람
안 짓지 않아요. 팔릴 물건이 안 팔릴 리도 없구요."
고봉길은 여전히 비웃음으로 차 있었다.
"넌 가서 노래나 블러라. 백날 불러도 차트에 한번 오르지
못하는 그 오지 그릇 깨지는 소리나 내!"
듣고 있던 영혜가 더 못 참겠다는 듯이 신경질적으로 말했
다.
"쬐그만 게 혼자 휴머니스트인 척 표정 꾸미고 그러지 좀
마! 어른들 앞에서."
정혜도 거들었다.
"손님들 앞에서 무슨 쓸데없는 싸움질이냐? 그만들 두자."
최화정이 딴에는 어른스러운 말을 했다.
"우리는 상관 마시고 하실 말씀 다 하십시오.
골동품 보관한 방을 살피고 온 강형사는 거실의 이곳저곳
을 계속 돌아다니며 말을 던졌다.
"저어, 실장님 누가 좀 뵙자는데유."
그때 거실로 들어선 점퍼 차림의 사나이가 쭈볏쭈볏한 모
습으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추경감은 그가 회장 차의 운전
사 편기사라는 것을 금방 알았다.
"누구래?"
"저어 기자분들이라 하는데요. 네 분입니다."
그 말에 정정필은 표정이 굳어졌다.
"장모님, 그리고 처남 처제들, 그 자들이 오거든 무조건
아는것 없다고 입 다물어야 합니다."
"입 다물고 어떻게 아는 것 없다고 말합니까?"
봉길이 또 빈정댔다.
"봉길이 처남도 당분간 밤무대 같은 데 아르바이트 나가지
말라구."
"아이 속상해. 이럴 게 아니라 우리 단체루 발리섬 같은
데나 나가 있다가 좀 잠잠해지면 들어오는 게."
영혜의 말에 정혜가 맞장구를 쳤다.
"그래요. 오빠, 발리보다는 뉴질랜드가 어때요?"
듣고 있던 추경감이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안 됩니다."
너무도 한심한 집안이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 같아서는 한
바탕 훈계라도 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그는 말을 계속했
다.
"살인범의 조속한 검거를 원하신다면 여러분들은 제가 원
하는 곳에 남아 있어야만 합니다. 며느리, 아내, 올케가
죽음을 당했는데, 그 원수가 잡히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겠지요?"
추경감의 제법 엄숙한 말투에 모두 조용히 있었다.
추경감과 강형사는 대단히 씁쓸한 기분으로 그 집을 나왔
다.
우선 범행에 대한 아무런 단서를 얻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집 식구들의 어처구니없는 모습에 화까지 치밀었던 것
이다.
"돈 가진 사람들은 머리가 비는가 보죠. 하긴 주머니가 가
득 차면 비는 곳이 있긴 있어야지."
강형사가 입맛만 다시고 있는 추경감의 기분을 위로라도
해줄듯이 말했다.
"내가 보기엔 말야, 그 고봉길인가 뭔가 하는 시동생 걔만
그 집 식구 중 좀 어긋난 사람 같아."
"그래요, 맞아요. 뭐가 답답해서 기타 들고 술집 무대에
서서 노래 부르며 돈을 번답니까? 또라이지, 또라이."
"또라이라도 그 중 나은 사람 같더구먼."
"고봉길은 평소에 설희주와는 사이가 괜찮았던 것 같기도
하고."
"그 문제의 로마 칼을 어떻게 그 진열장에서 꺼냈느냐 하
는게 우선 촛점인 것 같습니다."
강형사가 화제를 돌렸다.
"범행 당시 진열장이 있는 방문은 열려 있었나?"
"잠겨 있었습니다."
"열쇠는 어디에 있었는데."
"열쇠가 두 개 있었는데 두 개 모두 한 꾸러미로 되어 있
었습니다. 열쇠 뭉치는 회장의 서재 책상에 들어 있었습니
다."
"열쇠가 거기 있다는 것을 누구누구 알고 있었나?"
"그야 고회장과 최화정씨죠. 그 외 식구들은 잘 모르겠습
니다."
"범행 당시 그 방이 잠겨 있었다면 열쇠로 열고 들어가 로
마칼만 꺼내고 문을 다시 잠근 뒤 범행 후 열쇠를 그 방에
가져다 놓을 수도 있고, 방이 열려 있는 틈을 타서 칼을
훔쳐다 놓았다가 범행을 할 수도 있고, 범인이 들어왔을
때 그 방이열려 있어서 들어가 칼만 꺼내고 문을 잠근 뒤
범행했을 수도 있구먼."
추경감은 고물 지포를 꺼내 철거덕거리며 혼잣말처럼 중얼
거렸다.


4. 멀어진 마음 차가운 육체
아직도 범인 윤곽 못 잡아, 명왕성 그룹 며느리 피살 사
건 신문 사회면 제목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강형사는 신문을
구겨 팽개쳐 버렸다.
"옘병할, 그저 경찰만 동네북이라니까."
"무슨 얘기야?"
열심히 수첩을 뒤적이고 있던 추경감이 강형사를 돌아보지
도 않고 물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났으니 빨리 와보라. 그래서 내가 뛰어
갔지. 그랬더니 멀쩡해. 다시 살인 사건 났으니 와보라!
가보니 정말로 사람이 죽었어. 그럼 신고한 놈은 오대산
도사야 정도령이야?"
강형사는 여전히 혼잣말처럼 떠들었다.
"무슨 얘기야?"
"그렇잖습니까? 이건 예고 살인 아닙니까? 그 신고자를 찾
아내야 하는데."
"전기통신공사 의견은 뭐야?"
"아, 그 녀석이 전화 건 곳을 알아냈습니다. 중앙청 옆에
있는 다방에서 걸었답니다."
"용케 알아냈구먼. 그곳이면 살인 현장에서 과히 멀리 있
는곳도 아니구먼. 그날 그 시간의 목격자를 좀 찾아보지
그래."
"지금 탐문 중입니다."
"범인의 음성 감정 결과는?"
경찰국강력반 신고 전화에는 녹음 장치가 되어 있었기 때
문에 범인의 음성이 녹취되어 과학수사연구소에 의뢰되어
있었다.
"30대 초반 남자의 음성이라고 합니다. 억양은 경상도 서
헤안지역 하류 가정 출신 같더군요."
"충분히 범인일 수 있구먼. 설희주의 고향은 어디야?"
"고향은 서울입니다. 외가가 충남 서천군이군요."
"외가가 서천? 경상도와는 관계가 없군."
추경감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것 같았다.
"아냐. 그건 불가능해. 살인을 예고해 놓고 죽이고 도망가
고. 첫째, 예고를 하고 죽이는 그런 바보 같은 짓을 무엇
때문에 한단 말인가? 그리고 그 집은 완벽한 철옹성이라서
몰래 들어가 죽이고 도망갈 수가 없어."
추경감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면식범이란 게 있습니다. 아는 사람이라면."
"그러나 폐쇄회로 감시 TV에 아무도 다녀간 혼적이 없어."
"이상한 점이 더 있습니다. 따지자면 설희주는 심장에
두세번 칼을 맞았습니다. 칼에 맞은 뒤 방안 이곳 저곳을
돌아다닌 혼적이 있습니다. 구석구석에 핏자국이 있었으니
까요. 그러면서 비명은 왜 단 한 마디밖에 지르지 않았을
까요?"
"그야 처음 몇번 찔린 것은 치명상이 아니니까 그냥 참고
있다가 마지막에 외마디 비명을 지를 수도 있는 일이지.
그건 이상할 것이 없어."
"가수라는 고봉길이 들었다는 비명 소리가 거짓말 아닐까
요? 더구나 다른 식구는 듣지 못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방과 가장 가까이 있었다는 가정부도 못 들었다고 하지 않
았습니까?"
"세탁기 소리 때문에 듣지 못했다고 하지 않았나."
추경감과 강형사가 입씨름을 하고 있을 때 이것 보라는 듯
이 과학수사연구소의 2차 감정 결과가 왔다.
여러 가지 잡다한 감정 결과 속에 주목할 만한 것은 와이
셔츠와 거기에 묻은 피였다.
감식과의 형사가 설희주의 일기장, 녹음기, 카세트 테이
프, 핸드백, 화장품 비밀백 등이 든 보따리와 감정서를 가
지고왔다.
"반장님, 이것 좀 보십시오."
강형사가 그 중에서 피묻은 와이셔츠를 끄집어냈다.
"이 셔츠의 혈액이 설희주와 같은 형입니다."
"아니, 그럼 시동생 고봉길이."
"아닙니다. 이 셔츠는 남편 고봉식의 것입니다."
"현장 어디에 있던 것인가?"
"침대 밑에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감추어져 있었다? 그거 참 이상한 일이군. 우연히 침실에
벗어둔 와이셔츠에 묻은 것이 아니란 뜻 아닌가?"
추경감의 얼굴이 약간 심각해졌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겼을 때 짓는 표정이었다.
"그 시간에 고봉식은 어디에 있었다고 했지?"
"분명히 집에 있지는 않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범인이 뒤집어 씌우려고 그렇게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 아닌가?"
두 사람은 한참 얼굴을 마주 보고 있었다. 의견이 일치되
었을 때 하는 버릇이었다.
두 사람은 고봉식의 사무실로 갔다. 마침 고봉식은 점심을
먹고 들어와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한잠 자고 있었다.
"이거 웬일들이십니가?"
그는 눈을 비비며 아주 귀찮다는 듯이 두 사람을 맞았다.
재벌 그룹 사람이라면 흔히 상상할수 있는 미련스러운 체
구와 기름이 흐르는 살찐 목덜미를 그는 가지고 있지 않았
다. 비교적 야윈 체격에 순하게 보이는 꺼벙한 얼굴을 하
고 있었다. 특히 그의 커다란 눈은 착한 농부처럼 보였다.
"고봉식 사장님, 이거 쉬시는데 미안합니다. 그냥 지나가
다가 들렀습니다."
추경감이 권하는 자리에 엉거주춤 앉으며 말했다.
"그래 범인의 꼬리는 찾았나요?"
"꼬리는커녕 아직 그림자도 못 보았습니다. 그래서 몇 마
디 도움을 청하러 왔습니다. 실은."
강형사의 말올 듣자 그는 얼굴색이 약간 달라졌다.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니까 지나가다가 그냥 들른 것이 아니군요."
"뭐 꼭 그렇지 않다고는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간단한 참
고사항 한두 가지만."
추경감이 겸연쩍어 머리를 슬슬 긁으며 말했다.
"그래 뭔지 빨리 끝냅시다. 말해 보세요. 난 희주 일만 생
각하면 열불 나는 사람이오."
그는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빨면서 말했다.
"저어 고사장의 와이셔츠에 설희주씨의 혈액이 묻어 있었
는데요."
강형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희주와 나는 부부요. 침실에 내 와이셔츠가 있었다는 것
이 이상합니까? 그리고 칼에 찔린 사람 피가 방안 어디엔
들 튀지않았겠습니까?"
고사장은 퍽 신경질적으로 되물었다.
"그게 아니고 피묻은 셔츠가 침대 밑에 깊숙이 감추어져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추경감이 느릿한 목소리로 물었다.
"침대 밑에 감추어져 있다구요? 그럼 내가 그랬다는 얘깁
니까?"
고봉식 사장이 더 못 참겠다는 듯이 벌떡 일어섰다.
"아, 아닙니다. 그냥 그렇다는 이야깁니다."
추경감이 그를 끌어앉혔다.
"그건 그렇고. 사건 당일날 그 시간에 사장님은 대관령에
계셨다고 했던가요?"
강형사가 고사장의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몇번 대답해야 합니까? 그건 확인해 보셨잖습니까?"
"대관령에서는 왜 부인과 다투셨나요?"
"부부 싸움 안 하는 가정 있습니까?"
"재벌집 아드님도 불만 있습니까?"
"뭐요?"
그것은 확실히 강형사의 실수였다. 갑자기 그런 엉뚱한 질
문을 한 것은 그가 평소 가지고 있던 재벌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 같은 것이 작용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설희주씨 일기장을 보면 늘 남편인 고사장에 대한 불만으
로 차 있던데."
"그 여자는 나뿐 아니라 우리집 식구 모두에 대해 불만이
가득 찬 여자요. 아니, 우리집 식구뿐 아니라 이 세상에
대해 불만이 가득 찬 여자랍니다. 그런데 남의 여편네 일
기장은 왜 들추고 치사하게 이러시요?"
고사장은 갑자기 부아가 치민 모양이다.
"거 유치하게 남의 여편네 일기장이나 들추어보며 떠들고
다니지 마시오."
고봉식은 강형사에게 삿대질까지 하며 화를 냈다.
"그 여자 말이요, 그게 일기장이 아니고 낙서장이요 낙서
장. 뜻도 의미도 없이 세상 원망이나 하는 그런 낙서를 하
는 게 그 여자 취미란 말입니다."
고봉식은 일기장에 대해 뜻밖에도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대관령에서 다투고 따로따로 집으로 오셨다고
하셨지요?"
추경감이 질문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래요."
"대관령에는 왜 갔습니까? 뭐 꼭 대답을 하지 않으셔도 됩
니다만."
"얘기하지요. 다 얘기해도 오해를 하고 난린데 얘기 안 할
게 뭐 있습니까?"
고봉식 사장은 식은 커피를 꿀꺽꿀꺽 마신 뒤 이야기를 시
작했다.
"그러니까 뒤에 정혜한테 들은 얘기지만 걔 때문에 시작된
겁니다."
특히 사이가 나빴던 설희주와 정혜는 사사건건 충돌을 했
다.
그날도 정혜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집에 뛰어 들어왔
다.
"이 여자 이거 어디 갔어?"
정혜는 분에 못 이겨 핸드백을 거실 바닥에 팽개치면서 떠
들었다.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어디 있어?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가 있어? 한두번도 아니고."
설희주가 홈웨어 차림으로 2층 계단을 내려오다 말고 흥분
해서 날뛰는 시누이를 멀거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참 보고 있던 설희주는 한두번 당하는 일이 아니라 태연
하게 말했다.
"뭐가 잘못 되었나요? 큰 아가씨."
"뭐야? 잘못 되지 않았다구! 왜 우리 정필씨 따돌렸어? 나
까무란지 종까무란지 하는 쪽바리 회장 만나는 자리 왜 우
리 그이는 따돌렸어? 우리 정필씨가 이사대우 비서실장이
라는 것 몰라? 그뿐이야. 대명왕성 그룹 맏사위라는 것 까
먹었어? 대학 다닐 때 아바 학점 받았다며? 데모하느라 다
까먹었어?"
"아가씨, 너무 해요. 내 대학 때 얘기는 정말 참을 수 없
어요. 그리고 내가 비록 나이는 작지만 올케예요. 아가씨
의 언니란 말이에요. 언니보고 그렇게 말을 탕탕 놓아가며
야단 쳐도 되는 거예요?"
설희주가 더 참지 못하고 계단을 내려와 정혜 앞에 마주섰
다.
희주는 분에 못이겨 가슴이 가쁘게 움직였다.
"어쭈! 웃기는 말씀 하시네. 그걸로 우리 비서실장 따돌린
이율 슬쩍 감추려 하지 마. 도대체 뭐야? 외국 최대 바이
어 만나는 자리에 정필씨 못 가게 하고 오빠 혼자 가도록
전해준 게 무슨 꿍꿍이야?"
"난 무슨 일로 그 사람들이 만나는지도 몰라요. 그냥 나까
무라 회장이 그이와 개인적으로 술 한잔 했으면 좋겠다고
하기에 전해 주었을 뿐이에요. 제가 전화받은 게 죕니까?
아가씨, 너무 그러지 말아요."
설희주는 더 상대할 수 없다는 듯이 돌아서고 말았다.
"너! 끝까지 그런 식으로 나갈래?"
정혜가 설희주의 뒤꼭지에 대고 악을 쓰자 그녀도 더 참을
수 없다는 듯 돌아섰다.
"솔직이 나까무라씨도 정실장 만나기 싫어했을 걸. 일본
말도 못하시고."
"뭐야? 느네 남편은 얼마나 잘하니? 난 다 알아, 정필씨
몰래 오빠가 무슨 흥정 하고 다니는지."
"억측은 그만 둡시다."
설희주는 끝까지 말끝을 흩트러뜨리지 않으려 애썼다. 그
녀는 입술을 꼭 깨물고 참았다.
"나까무라씨와는 개인적인 술자리일 뿐이에요."
"큰오빠와 올케가 우리 정필씨를 경계한다는 것은 곧 무엇
을 뜻하는 것이겠어?"
"큰아가씨, 제발 그 심술 좀 버리세요. 난 그이가 무얼 하
고 다니는지도 몰라요. 나와 그이를 마치 공모자처럼 몰아
세우지 말아요. 정말 참기 힘들어요."
"흥! 연극 같은 소리 적당히 해둬. 우리 정필씨를 따돌리
는 것은 곧 그룹 회장한테 뭔가 숨겨야 할 사안이 있다는
것 아니겠어?"
"제발 아가씨!"
설희주는 이제 좀 살려달라는 표정이었다. 모든 것이 귀찮
아 죽겠는데 왜 너까지 그러느냐는 투였다.
"괜히 애처로운 얼굴 하지 마! 속에 시퍼런 칼을 품고 다
니는 여자가."
"큰아가씨."
설희주는 곧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설희주, 똑똑히 들어. 운동권 애들과 함께 철없는 짓 하
던 네가 무슨 흑심을 품고 이 집에 기어 들어와 머리를 굴
리는지는 모르지만 날 그렇게 우습게 보지 마! 네가 원수
처럼 여기던 부르조아 집안에 들어왔을 때에야 무슨 꿍꿍
이가 있었는지 그런 것쯤 나도 다 알아. 그리고 우리 정필
씨 어리숙해 보인다구 그렇게 쉽게 생각하지마! 용돈 얼마
마련하겠다고 철강 몇백 톤 몰래 삼키다가 그게 목에 걸려
결국 우리 정필씨에게 떨어질 명왕성 자동차 대표이사 자
리가 느네 남편한테로 굴러갔지만 진짜 승부는 이제부터
야. 세 끼 밥도 제대로 못 먹던 가난뱅이 집 출신이 이 집
에 들어와 보니 모두가 네 것처럼 보여? 너무 분수 넘친
짓 좀 하지 마!"
설희주는 분을 참느라 한동안 숨을 죽이고 있었다. 얼마
뒤 그녀는 씩씩거리는 정혜 옆에 조용히 앉았다. 그리고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했다.
"큰아가씨! 왜 말을 그런 식으로 하세요? 나는 이 집에 시
집왔으니 좋든 싫든 이 집 식구예요. 아가씨가 미워한다고
해서 내가 이 집을 떠나 주지는 않아요. 그리고 회사 일에
대해서도 그래요. 아가씨나 내가 명왕성 그룹의 뭐예요?
나는 명왕성 그룹 계열회사인 명왕성 자동차 대표이사 아
내예요. 아가씨는 명왕성 그룹 회장 비서실장의 아내예요.
우리는 명왕성 그룹의 직원도 임원도 아녜요. 그리고 기업
이란 기업의 것이지 개인의 것이 아니랍니다. 아버님이 그
룹의 회장이라고 해서 그것이 그 며느리나 딸의 회사가 아
니예요. 우리는 다만."
더 못 참겠다는 듯이 정혜가 고함을 질렀다.
"이게 웃기고 있네. 말끝마다 우리우리 하는데 너 건방지
게 우리 속에 끼어들지 마! 천박한 가정의 빗나간 딸로 자
라 사회의 천덕꾸러기가 되었던 네가, 남자 하나 잘 꼬셨
다고 갑자기 신분이 달라지는 줄 알아? 이거 왜 이래? 얻
다 대고 우리우리하고 염불하는 거야!"
정혜는 삿대질까지 해대며 떠들었다.
"큰아가씨!"
그러나 분해서 자지러질 줄 알았던 설희주가 이번엔 뜻밖
에도 정혜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는 어
리석은 어린 동물을 바라보듯 했다.
"오빠랑 결혼해서 한 이불 속에서 배때기 비벼댄다고 너라
는 존재가 약물처럼 우리 속으로 스며든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네 사타구니나 비집고 비벼대니까 네 남편이 네
것인 줄 알지만 천만에! 오빠는 우리 가족이야. 우린 말
배우기 전부터 한 식구야. 넌 무슨 소릴 해도 이방인이
야!"
차마 듣고 있을 수 없는 저질스러운 인신 공격을 거침없이
했지만, 설희주의 태도는 결심을 한 듯 흔들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정혜와 싸움을 하려고 들었으나 그러기보다는 체
념을 하는 것이 속편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설희주! 너에게는 무지개빛 미래가 열리는 희망찬 결혼식
이었는지 몰라도,그날부터 우리에겐 지옥같기만한 일상이
시작되었어. 하마터면 순한 우리 오빠가 우리의 적이 될
뻔했단 말야."
"큰아가씨! 목마르실 텐데 쥬스라도 한잔 가져올까요?"
"설희주, 넌 과연 듣던 그대로 영리한 머리와 불의를 꼬집
어내는 선한 가슴을 가졌어. 아마 내가 오빠였더라도 넘어
갔을거야. 하지만 세상은 하나가 아닌 여러 입장들의 각축
장이란 걸 넌 아직 몰라. 이 집안이 네 눈에는 개선해야
하고 개혁해야 하고 거듭 나야 할 모순으로 가득 차 있을
지 모르지만 우리에겐 안락하고 평화로운 안식처야. 넌 광
풍을 몰고 온 야차에 불과하단 말야."
설희주는 그 동안 조용히 냉장고에서 쥬스 두 잔을 들고
와 한 잔을 정혜 앞에 놓았다.
분노로 끓는 가슴을 지그시 누르고 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녀의 가슴과 그녀의 머리는 너무나 다른 일을 하고 있었
다.
"큰아가씨! 들면서 얘기해요."
"네가 들어온 뒤부터 우리 가족은 모두가 밤잠을 설치며
전전긍긍하고 있었어. 피가 끓다 못해 당장 정수리로 터져
나와 분수를 이룰 것만 같았단 말이야. 넌 이 집이 밉디
미운 오리야, 오리!"
마침내 설희주는 얼굴을 감싸고 울음을 터뜨렸다.
"느이 남편이 비행기 특등석에 누워 오대양 육대주 누비고
다니며 백말도 타보고 흑말도 타보면서, 세계 곳곳 기집년
아랫도리에 태극기 꽂느라고 바쁠 때, 우리 정필씨는 노조
대표라는 것들하고 입술이 부르터가며, 멱살 잡이 해가며,
얻어터져 가며 싸우고 이 재산 지킨 거야. 승부란 마라톤
이지. 지금부터야. 지금부터 느이 남편과 정정필의 싸움은
시작이란 말야!"
설희주가 눈물을 보이자 정혜는 더욱 기세가 등등해지고
입이 거칠어졌다. 약세를 보았을 때 완전히 끝장을 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내가 모를 줄 알아? 우리 정필씨를 차차 무능력자로 만들
어 결국은 나까지 도매금으로 묶어서 이 그룹에서 쫓아내
려는음모! 그 계략을 내가 모를 줄 알아?"
한참동안 어깨를 들먹이며 울던 설희주가 눈물을 닦고 고
개를 들었다.
"큰아가씨, 정 그러시면 우리가 나갈께요. 그 알량한 사장
자리 그이 보고 내놓으라고 하겠어요."
그러나 그 소리를 듣자 정혜는 더욱 펄쩍 뛰었다.
"뮈야? 이거 왜 이래? 이 여자 이제 보니까 점점 더 하는
군. 그 핑계로 명왕성 그룹 조각을 내겠다는 말이지? 알맹
이만 쏙 뽑아 가지고 독립하겠단 말이지? 웃기지 말아! 우
리 아버지도 산전수전 다 겪은 노친네야. 허튼 수작 부리
지 말아!"
정혜의 얼굴이 더욱 험악해졌다.
"그럼 도대체 절더러 어쩌라는 거예요? 제가 나이는 적어
도 올케예요, 큰아가씨! 손위 올케 보고 그럴 수 있어요?"
설희주는 악에 바친 듯했다.
"올케? 흥! 그래 올케로 인정받고 싶거든 행동을 똑똑히
해!
당장 전화 걸어 오빠 집에 들어오라고 하든가, 우리 정필
씨 그 일본놈 자리에 합석시키든가 하란 말야!"
"그건 어려워요."
"뭐야? 그럼 그 장소가 어딘지 대봐. 내가 당장 쫓아갈 거
야."
"몰라요."
"뭐야?"
그때였다. 두 여자의 싸움 소리를 듣고 있던 봉길이 문을
열고 나왔다.
"이제 그만해 둬요, 큰누나!"
그러나 정혜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저리 가!"
"누나 제발 좀 그만둬요. 뭐하는 짓이에요, 이게 다 돈,
사장자리 그게 다 뭐하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그리 바둥
바둥해야 돼요?"
"얘가?"
정혜는 너무나 어이 없어하며 고봉길을 바라보았다. 측은
하다는 눈빛이었다.
그때 고회장 부부가 들어왔다.
"아빠 나 분해서 못 살겠어요."
그때까지 서슬이 시퍼렇던 정혜가 갑자기 고회장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얘가 왜 이래?"
고회장은 며느리와 봉길, 그리고 아내 최화정 여사의 얼굴
을 번갈아보며 어리둥절해졌다.
"아빠, 내 신세가 왜 이렇게 되었어요? 내가 왜 저런 여자
한테 괄시를 받아야 해요? 내가 누구 딸인데요."
고회장은 사태를 짐작한 듯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루가 빠끔한 날이 없다 없어! 또 뭘 갖구 쌈질이냐!"
"그만해요, 방으로 가."
최화정이 정혜의 팔올 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참으로 살 수 없는 사람은 저예요, 아버지."
봉길이 푸념을 시작했다.
"아버지, 우리 집안이 왜 이런지 아세요? 이게 모두 그놈
의 돈 때문이에요, 돈! 돈이 없었다면, 아버지가 재산을
모아두지 않았다면 우리 집안이 이 꼴이 되진 않았을 거예
요. 이게 다돈 때문이라구요. 그 놈의 돈 때문에 우리는
어느 땐가 모두 미쳐 버리고 말 겁니다."
고회장은 아무 말도 않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고봉식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강형사는 입맛을 쩍쩍 다셨
다.
"그래서 아드님과 며느님을 대관령으로 보내 쉬게 하면서
달아오른 집안 분위기를 식히려 한 것이란 말이죠?"
"꼭 아버님이 그렇게 하셨다기보다는 우리가 떠난 거죠."
"그런데 대관령에는 동생 부부와 함께 간 이유가 뭡니까?"
추경감이 수사 수첩을 뒤져보머 물었다.
"싸운 사람들이 화해하라는 뜻으로 아버님이 뒤에 동생 부
부를 보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대관령에는 별장이 있습니까?"
강형사가 불쑥 물었다.
"회사서 공용으로 쓰는 전용 콘도가 있긴 합니다만."
"대관령에서 동생 내외와 무슨 일을 했나요?"
추경감이 지포 라이터를 꺼냈다.


5. 침실의 신경전
"우린 출발부터 따로따로였지만, 솔직이 말해 걔들 거기
온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고봉식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렇다면 설희주씨와 둘만의 호젓한 여행이었는데.
재미 깨나 보았겠구먼."
"여보슈."
강형사의 빈정거림에 고사장은 불쑥 화를 냈다.
"그런데 왜 부인과 따로따로 돌아왔습니까?"
추경감의 질문이었다. 고사장의 얼굴이 약간 일그러졌다.
"싸웠습니다. 만나면 싸우게 되었으니까요."
"그럼 새벽에 부인이 먼저 출발하고, 고사장은 언제 떠났
나요?"
추경감이 지포를 철거덕거렸다. 좀체 불이 켜지지 않았
다.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우리는 서로 마주 보기도 싫어
나는 땅바닥에서 자고 희주는 침대 아닌 딴 곳에서 잤는데
눈을떠보니까 그 원수는 없더군요."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시계를 보니까 7시도 안 되었더군요. 나는 침대에 올라
가서 잠을 더 자다가 식당으로 내려가 더덕구이로 아침을
먹었죠. 그리고는 자동차에 기름을 가득 넣은 뒤 출발했
죠, 이거 다 확인해 본 것 아니오?"
"그때가 몇시쯤이었나요?"
"10시반? 11시? 잘 모르겠는데요."
"아무튼 부인은 그 길로 서울에 돌아온 뒤 몇 시간만에
피살되었습니다. 누가 뒤쫓아와서 죽였는지도 모르죠."
강형사가 다시 고사장의 약을 올렸다.
"이거 보십시오, 형사 나리들. 직업상으로 남을 의심하는
버릇이 몸에 배었는지는 모르시만 분명히 당신들은 헛짚은
거요. 분명히 말해 두지만 난 아닙니다. 아까 나보고 뒤쫓
아와 죽이지 않았느냐고 아이큐 한 자리수 같은 말씀 하셨
는데, 그래 가지고 범인 잡겠수? 여보슈, 나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이 마누라와 좀 다퉜다고 칼로 사람을 찔러 죽일
것 같습니까? 내가 그렇게 멍청한 놈으로 보입니까? 자,
나 일 좀 보게 이만 끝낼까요? 그 와이셔츠는 내 것이 분
명하지만 난 아녜요! 아시겠어요들."
"한 가지만 더 묻고 끝내겠습니다."
추경감이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대관령에서 왜 다투었습니까?"
"그야."
고사장은 말을 하려다가 잠시 머뭇거렸다.
"말 못할 사정이라도 있나요?"
강형사가 다시 빈정거렸다.
"치사하게 남의 침실 이야기까지 듣겠다 이거죠. 뭐 이야
기하라면 못한 것도 없어요. 그 여자는."
고봉식 사장은 이 지경까지 와서 못할 이야기가 뭐 있느
냐는 듯 말을 계속했다.
"그 여자는 고집이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렇지 않았습
니다. 그 알량한 자존심은 남편과 함께 이불 속에 들어가
서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날 대관령에 도착한 날 밤
."
설희주와 고사장은 별로 다정한 사이가 아니었지만 그래
도 함께 여행을 나서 휴양지에 왔다는 기분으로 다소 마음
이 풀려있었다.
호텔 라운지에서 포도주와 함께 저녁을 먹은 두 사람은
적당히 피곤한 기분으로 호텔 침실로 들어갔다.
"먼저 샤워하세요."
설희주가 고봉식의 점퍼를 받아 걸면서 말했다.
"아냐, 희주가 먼저 해. 난 한잔 더 마실 거야."
고봉식은 들고 온 가방에서 작은 양주병을 꺼내더니 옆방
에 있는 간이 바아로 갔다. 호텔의 스위트 룸이나 딜럭스
룸 스타일로 된 이곳에는 부속실이나 바아 응접실 같은 것
도 붙어 있었다.
고봉식이 양주를 스트레이트로 너댓 잔 마신 뒤에 설희주
가 욕실에서 나왔다.
욕실에서 갓나오는 여자는 언제나 그렇듯이 상기된 뺨과
신선한 피부가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다.
타올만 걸치고 나온 설희주가 대형 거울 앞에서 하늘하늘
한 잠옷으로 갈아입고 있는 모습을 고봉식은 옆방에서 열
린 문으로 곁눈질하고 있었다.
허리에 감고 있던 대형 타올을 스르르 발목으로 풀어 내
리자 눈부신 그녀의 나신이 전개되었다. 고봉식은 숨을 멈
추고 그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국 여자들의
단점인 짧은 다리와 처진 히프란 설희주의 나신에서는 흔
적을 볼 수 없었다.
가늘고 나긋한 목과 작은 어깨, 약간 굽은 듯한 등의 곡
선이 허리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는가 하면 육중한 히프가
흐르는 선을 받치고 있었다.
뒷모습을 보이며 옷을 갈아입고 있는 설희주가 처음 보는
매혹의 여자 같다고 고봉식은 느끼고 있있다.
얇은 잠옷으로 갈아입은 설희주가 뒤로 돌아섰다.
뒷모습 못지않게 잠옷 모습의 설희주는 매력적이었다. 물
에 젖은 채 풀어 늘어뜨린 긴 머리칼이 관능적이었다. 풍
부한 앞가슴이 걸을 때마다 얇은 잠옷 섶을 헤치고 나올
듯이 출렁거렸다.
고봉식은 먹던 잔을 내려놓고 침실로 들어섰다. 눈이 게
슴치레하게 풀렸다. 탐욕의 시선을 설희주의 전신에 뜨겁
게 퍼부었다.
고봉식이 슬그머니 다가가 희주의 허리를 껴안았다.
"갑자기 왜 이래요. 아유, 술 냄새. 샤워 좀 해요."
설희주는 감겨오는 고봉식의 팔을 풀어내며 얼굴을 찡그
렸다.
"알았어. 샤워하고 올 테니까."
고봉식은 어린아이처럼 말을 잘 들었다. 그는 달아오른
몸을 식히기라도 하듯 욕실로 들어가 옷을 훌훌 벗어던진
뒤 폭포같은 물줄기를 머리에 퍼부었다.
전신에 물벼락을 맞듯 하고는 타올로 대강 전신을 훔치고
침실로 급히 나왔다.
그 동안에 설희주는 트윈 침대의 한 곳에 얌전히 누워 눈
을 감고 있었다.
고봉식은 더 참을 수 없다는 듯 벌거벗은 채 뜨거운 몸으
로 설희주의 침대로 뛰어들었다.
그는 시트를 걷어내고 우악스럽게 설희주의 잠옷을 벗겨
냈다
"이거 왜 이래요?"
그러나 고봉식의 서두는 몸짓에 비해 설희주는 너무나 싸
늘했다. 그녀는 몸을 움츠린 채 고봉식을 받아들일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사실 그들은 몇 달 동안 같이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 신
혼 1년을 어영부영 보낸 뒤에 그들의 마음은 멀어지고 따
라서 육체도 멀어지고 있었다.
매일처럼 대화를 나누던 육체는 1주일에 한번으로 뜸해지
다가 다음엔 한 달에 한번, 그 다음엔 거의 끊어지고 말았
다. 그들의 육체는 그들의 마음처럼 차차 무관심과 때로는
증오로까지 변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밤 참지 못한 고봉식이 이성을 잃고 덤벼들
었던 것이다.
그러나 싸늘하게 얼어붙은 설희주의 육체는 좀체 고봉식
의 뜨거운 몸을 받아들일 태세를 갖추지 않았다.
고봉식은 일방적으로 설희주의 잠옷을 뜯어내다시피 벗기
고는 그녀 위에 올라갔다.
"설희주, 넌 아직도 내 아내야. 아내는 남편의 몸을 받아
들일 의무가 있어!"
고봉식이 식어 있는 설희주의 몸을 깔아뭉개며 말했다.
"이거."
꼭 붙이고 있는 설희주의 허벅지를 억지로 헤집으며 고봉
식이 신음처럼 말했다.
설희주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 가만히 있었다. 그가 하는
대로 몸을 맡겨 두었다. 고봉식은 열심히 그녀의 몸 위에
서 땀을 흘렸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일방적인 싸움이었다. 무기력한 상
대를 공격하는 배고픈 사자에 불과했다. 아무런 감흥도 느
낄 수 없는, 생명 없는 물체와 사랑을 하는것 같았다.
"더럽고 비겁한 남자."
고봉식이 절정에 이르는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몸을 팽
개쳐두었던 설희주가 냉소와 함께 던진 말이었다.
"뭐야?"
설희주는 고봉식의 밑에 깔린 채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
다.
동물적인 포만감으로 차 있는 그의 얼굴이 너무나 역겹고
치사해보였다. 욕설을 뱉은 설희주는 그것만으로는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느글느글하고 더러운 사나이의 얼굴을 그냥 둘 수
없었다. 여자의 감정은 손톱만치도 생각치 않고 남편이라
는 이름으로 제멋대로 동물적 욕심을 채우고 만족해 하는
모습을 도저히 참을 길이 없었다. 처음부터 고봉식을 사랑
하거나 존경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
다. 설희주는 고봉식에게 접근해 그의 관심을 끌어들이고
사랑 놀음을 하고 결혼에까지 이른 것이 완전한 자의적인
일로만 생각지는 않았다. 목적이 있는 사랑, 목적을 달성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사랑이 아니냐고 오민수가 타이를
때, 그녀는 그렇지 않다고 강력하게 부인하지 못했다.
결혼한 뒤 그녀는 한번도 고봉식을 인격적인 파트너로 생
각한 적이 없었다. 그와 섹스를 하면서도 더러운 일을 참
는다는 기분만 가지고 있있다.
그러한 감정이 마침내 폭발점에 이른 것이다.
"퉤!"
설희주는 아직 덮쳐 누르고 있는 고봉식의 얼굴에 침을
뱉고는 얼굴을 돌려 버렸다.
"이년이 미쳤구나!"
갑자기 최대의 모욕을 당한 고봉식은 금방 얼굴에 핏줄이
섰다. 눈이 사납게 치껴 떠지면서 손으로 설희주의 뺨을
때렸다.
"이게 남편 얼굴에 침을 뱉어? 하늘 같은 남편을 뭘로 생
각하는 거야? 운동권 출신 계집년들이 독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너 같은 년 첨 보겠다. 이년이 내가 더러우면 아
예 벌리고 드러눕지를 말지! 더러운 년! 퉤퉤!"
고봉식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닥치는 대로 욕을 퍼붓고
얼굴을 때리며 날뛰었다.
수십 차례 따귀를 얻어맞은 설희주는 벌떡 일어나 벗은
채로 옆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문을 잠근 뒤 혼자 거울
앞에 섰다 얼굴과 목에 매서운 고봉식의 손자국이 남아 있
었다.
이제 갓 서른. 발랄한 육체와 꽃 같은 나이가 서러웠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기의 나신을 바라보며 울음을 터뜨
렸다. 그녀는 한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그
자리에 털석 주저앉았다. 그녀는 그날 밤을 뜬눈으로 새우
다시피 하고 날이 밝자마자 혼자 서울로 돌아와 버렸던 것
이다.
고사장의 그날 밤 이야기는 거의 틀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곳을 출발한 시간도 강형사가 조사한 것과 일치되었다.
"하지만 이 피묻은 와이셔츠의 수수께끼는 아직 풀린 것
이 아닙니다."
강형사가 다시 못을 박아두려는 듯이 말했다
"도대체 그 와이셔츠가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고봉식이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피살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곳 침대 밑에 말입니다."
추경감이 느릿하게 대답해 주었다.
"좀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와이셔츠 바람으로 희주를 찔
러 죽인 뒤 피묻은 그 옷을 벗어 침대 밑에 넣어두는 멍청
한 짓을 할 것 같습니까? 당신들이 정말 형사는 형사요?"
고봉식의 말이 그럴 듯하게 들렸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누군가가 고봉식 사장이 범인이라고
꾸민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죠. 그러면 자신은 혐의권에
서 벗어나니까요."
"뮈요?"
강형사의 억측에 그는 정말 화를 벌컥 냈다. 그러나 강형
사의 말이 꼭 억측이라고만 볼 수 없다고 추경감은 생각했
다.
사람을 죽인 뒤 피묻은 자기 옷을 현장에 감추는 바보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했다면 강형사 말처럼 자기를 범인으
로 몰려는 진짜 범인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방법일
수 있다.
추경감과 강형사는 별수 없이 고봉식의 사무실을 나오고
말았다.
추경감은 시경으로 돌아가고 강형사는 그냥 돌아갈 수 없
다고 고집하며 혼자 고봉식의 막내동생인 고봉길을 찾아나
섰다.
고봉길은 밤에만 여는 영동 서초동의 어느 살롱에서 찾아
냈다. 침침하고 텅빈 좁은 무대 위에서 기타 연습을 하고
있었다.
밤이면 휘황한 각종 조명이 날뛰고 술 냄새, 담배 냄새,
여자의 화장품 냄새와 육욕이 얼룩져 광란의 무대가 되던
살롱 안도 대낮에는 박쥐가 나올 듯 음산하고 침침했다.
"이거 강형사가 여기를 다 찾아오고. 역시 형사는 형사시
군요."
고봉길이 강형사에게 딱딱한 연주용 의자를 권하며 인사
말을 이렇게 했다.
"재벌가의 막내 도련님이 왜 이렇게 구차한 아르바이트를
하는 거죠?"
강형사가 담배를 꺼내 물고 권하는 의자에 앉았다.
"흥! 재벌가라구요? 하하하, 그래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
입니까? 어디에서 태어났다면 그것으로 그 사람의 운명이
정해지는 그런 게 난 제일 싫습니다. 아니, 그보다 명왕성
그룹인가 뭔가 하는 그 거추장스런 형용사가 나한테는 안
맞는단 말입니다. 형수, 불쌍한 우리 형수 설희주씨도 안
맞는 집안에 들어왔기 때문에 비극이 일어난 겁니다. 근데
범인은 어떻게 되었나요? 잡았나요? 아니지. 대한민국 형
사들이 범인 잡는 것 못봤으니까. 누가 제보나 해준다
면 모를까."
강형사는 고봉길이 대낮에 취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면 환각제 같은 것을 먹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의 말꼬리를 문제삼지 않았다.
"한 가지만 물어보겠어요. 사건 당시 혹시 비명 소리 들
은 시간을 착각한 것 아닐까요?"
"누가 말입니까?"
"당신 말이요."
"천만에요. 틀림없이 그 시간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설희주씨는 당신이 발견한 그 순간, 즉 비명을
듣고 2층서 뛰어내려온 그 시간보다 두 시간 전에 죽은 걸
로 판명이 되었거든."
"내가 착오가 있어도 2, 3분이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뭘 잘못 알고 계시군요. 2시간 전에 죽었느니 어쩌느니,
시체의 경직도로 봐서 어쩌구 저쩌구 하는 소리 너무 들어
귀가 따가워요. 당신네들 그 과학수사라는 것 믿을 수 있
는 거요?"
고봉길이 다시 빗나가기 시작했다.
"고봉길씨는 비명을 들은 시간에 대해 틀림없다고 확신하
는 근거가 있나요?"
"노래 연습 하다가 방송국 쇼프로 피디한데 전화 걸기로
되어있었거든요. 솔직이 피디한데 아쉬운 부탁 하는 무명
가수가 시간 약속을 어떻게 어기겠습니가? 노래 연습을 하
면서도 나의 모든 신경은 전화기와 시계에 가 있있거든
요."
그럴 때는 고봉길의 말에 조리가 있어 보였다.
"그래서 그날 방송국 피디한데 전화했나요?"
강형사가 물었다.
"전화요? 웃기는 소리 하지 마슈. 집안에 피투성이가 되
어 죽어 쓰러진 사람이 있는데 전화할 경황이 어디 있어
요. 아니, 전화를 하기는 했지. 경찰서에 말이요. 당신 혹
시 아이큐 두 자리 수 아니오?"
고봉길이 손가락으로 강형사의 얼굴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의 웃음 띤 얼굴은 바보스러웠고 눈은 촛점을 잃고 있었
다.
"아마도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러는데 모르는 것 한
가지만 더 물어보겠습니다."
강형사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말해 봐요."
고봉길은 기타의 둔탁한 음을 크게 한번 퉁기면서 대답했
다.
"설희주씨가 죽음으로써 명왕성 그룹 안에서 가장 득을
보는사람은 누굽니까? 뭐 꼭 대답 안 해도 됩니다."
"하하하, 득을 볼 사람? 하하하, 많지요, 많아."
고봉길은 갑자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득을 볼 사람이라기보다는 좋아할 사람이란 말이 옳아
요. 좋아할 사람, 그렇지 그렇고말고."
고봉길은 아주 그럴 듯하다는 듯이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몇번이나 감탄스러워했다.
"그래 좋아할 사람이라도 좋아요. 그게 누굽니까?" 강형
사가 긴장하며 물었다.
"우선 우리 형이 좋아하겠지요. 그 지긋지긋한 마누라가
없어질 뿐만 아니라, 오매불망하는 애인 경숙이와 결혼할
수도있고."
"경숙이 누구요?"
"명왕성 자동차 사장 비서지요. 꼭 걔가 아니더라도 몸매
잘 생기고 잘 길들인 치와와 같은 여자를 아내로 맞아 즐
길 수도 있겠지요. 그 다음 틈만 나면 응얼거리는 우리 큰
누나. 눈에 가시 같은 올케가 없어지면 얼마나 속 시원하
겠소. 다음 우리 알량한 매형 정정필 비서실장님. 또 늘
껄끄럽게 생각하는 젊은 시어머니 최화정 여사, 며느리라
기보다는 같은 또래의 여자로서, 명왕성가에 들어온 여자
로서 라이벌이 하나 없어지는 셈이니까. 또, 또 있지요.
명왕성 그룹의 총수 우리 아버님. 툭하면 재벌 그룹의 정
의를 내세우는 설익은 며느리의 충고를 듣지 않아도 되니
까요. 그뿐 아닙니다. 촌스럽고 천한 행동으로 상류 집안
의 체신을 망가뜨린다고 늘 걱정을 하는우리 둘째 누나 영
혜. 그 촌닭이 없어지면 집안 망신시킬 일 없으니 마음 편
하겠지요."
"고봉길씨는 어떻소?"
듣고 있던 강형사가 불쑥 질문을 했다.
"나요? 하하하."
그는 기타를 퉁겨 요란한 웃음 소리 같은 걸 냈다.
"내 마음은 강형사님이 알아맞혀 보기로 하지요."
"그러고 보면 온 식구가 설희주를 좋아하지 않았군요."
"그 외에도 또 있을 겁니다. 하지만 슬퍼할 사람도 있을
걸요."
"그게 누구요? 고봉길씨?"
"오민수!"
고봉길은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민수? 그가 누구요?"
"오민수만은 슬퍼할 겁니다. 이 집에 시집 온 것부터 인
정 않으려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그 사람은 어디 있습니까?"
"한번 찾아보시지요. 그도 명왕성 그룹의 당당한 식구니
까요. 자, 그럼 자리 좀 비켜 줄까요? 나도 이제 밥벌이
연습 좀 해야겠으니까."
고봉길은 강형사의 존재를 그때부터 무시하고 노래 연습
을시작했다. 강형사는 하는 수 없이 그 침침하고 기분나쁜
살롱을 나오고 말았다.


6. 시다의 노래를 부르며
강형사는 오민수가 명왕성 그룹 하청 회사였던 명왕성 기
계 주식회사의 생산부 직원이라는 것을 알았다. 명왕성 기
계는 원래 조양 기계라는 자동차 부품 하청회사였는데 부
도가 나는 바람에 명왕성 그룹에 흡수되고 이름도 명왕성
기계로 바꾸었다. 종업원들도 거의 함께 인수되어 오민수
도 명왕성 기계 사원이 되었다.
오민수는 설희주와 대학 시절에 함께 뛰던 동료요 연인이
었다.
강형사는 명왕성 기계의 지하 식당 모퉁이에서 오민수와
마주 앉았다.
강형사는 다시 한번 메모해 둔 수사 수첩을 꺼내 보았다.
오민수.
1958년 충남 공주생.
신라대학 재학 시절 운동권 핵심 간부로 다섯 차례 연행
된 적 있음.
과격 학생 단체인 학총련에 가입했다가 뒤에 노동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노학총련 간부로 활약.
현재 명왕성 기계 노조 쟁의부장.
공주에서 노점상을 하는 홀어머니가 있고, 아버지는 택시
기사였으나 교통 사고로 사망.
주소는 명왕성 기계 기숙사로 되어 있으며, 조양 기계회
사에는 공채로 들어가 스스로 생산부에 배치되어 그곳의
노무 관리를 했음.
성격 온순하고 원만하나 한번 시작한 일은 끝장을 내는
외유내강형의 표본. 지도력이 강하고 따르는 동료가 많음.
기성 세대에 대해서는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으며 사회
개혁으로 노동자 해방을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을 학생 때
부터 해옴.
강형사의 수첩에는 대강 이런 것들이 메모되어 있었다.
그것은 학생 운동 문제를 담당했던 부서에서 얻어낸 당시
의 기록과 최근 주변 사람들로부터 취재한 내용들이었다.
"바쁜 시간에 불러내서 미안합니다."
강형사가 담배를 권하며 물었다.
170센티는 됨직한 중키에 알맞은 체격이 작업복과 잘 어
울렸다. 반듯한 이마와 진한 눈썹, 오똑한 코 등 이목이
선명했다.
얼굴의 인상은 온화하게 보였으나 한일자로 다문 얇은 입
술이 범상하지 않은 의지를 나타내는 것 같았다.
"피우지 않습니다."
오민수는 약간 미소를 띠며 담배를 사양했다.
"설희주씨가 죽은 건 아시죠?"
강형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예,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신문을 자주 보시나요?"
"자주는 보지 않습니다만, 민족신보만은 가끔 봅니다."
"설희주씨와는 어떤 관계였습니까?"
"관계라뇨?"
오민수가 약간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 어떤 사이였나 하는 그런
일반적인 뜻입니다."
"말씀드릴 게 별로 없습니다."
오민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랑하는 사이였나요?"
그러나 오민수는 묵묵부답인 채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
고있었다.
"최근에 만난 적 있어요?"
그러나 역시 대답이 없었다.
"말을 해요. 최근에 만난 적 있어요, 없어요?"
강형사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한참 시선을 떨어뜨리
고있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언제야?"
강형사 입에서 금방 반말이 튀어나왔다.
"대답해! 솔직이 말하자면 이 사건의 유력한 용의선상에
오른 사람이 오민수 당신이야! 젊은 날을 깡그리 바쳐 임
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부르며 데모 대열에 섰던 설희주와
오민수! 그러던 설희주가 어느 날 돌연 변절하여 당신 곁
을 떠났어! 명왕성 그룹 고회장의 장남한테로 시집 갔어.
졸지에 오리알 신세가 된 당신!"
"야비한 말 삼가합시다."
오민수는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그러나 자제하는 모
습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당신은 결코 설희주를 잊을 수 없었어. 달아난
말을 죽이고 싶었겠지. 운명의 신은 묘한 장난올 했지. 당
신을 명왕성 그룹의 계열 회사로 끌어다 놓았어. 사랑하던
옛 애인이요 이념의 동지가 사장 부인으로 있는 그 회사의
사원으로 말이야."
"노동자는 노동 현장이라면 어디든지 갑니다."
"이 소설 같은 슬픈 러브 스토리를 어떻게 설명하지?"
강형사가 훙분해서 삿대질까지 하며 말을 계속했다.
"사랑은 마침내 증오로 변하고, 도저히 더 참을 수 없던
오민수는 마침내 저주스런 로마의 칼, 복수의 칼을 들
고."
"오래 되었습니다."
강형사의 억양높은 억측을 잠재우려는듯 오민수가 차분하
게 그의 말을 끊었다.
"뭐가 오래야?"
"희주를 잊은 지 오래 됩니다."
"거짓말 말아. 당신이 명왕성 그룹 안에 있는 한 잊을 수
가없어. 사랑하는 옛 애인이 노동자의 적인 착취자의 어부
인이 되어 고급 승용차의 쿠션에 묻혀 백화점으로 쇼핑
갈 때, 발리행 비행기를 타러 갈 때, 솔아 솔아 푸른 솔아
거센 바람이 불어와서를 부르던 당신의 기분이 어떻겠어.
난 다 알아."
강형사는 담배 연기를 허공으로 훅 뿜어냈다. 왜 내가 이
렇게 흥분했냐고 후회하는 것 같았다.
"전 희주를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민수는 여전히 차분한 목리로 말했다.
"처절한 미련 부스러기를 부여 안고 소주잔 기울이며 울
지는 않았겠지. 때로는 분을 삭이는 노래도 불렀겠지. 사
랑도 미련도 이름도 남김 없이 한핑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
세."
강형사는 갑자기 운동권 노대를 외우며 오민수를 건너다
보았다.
"전 희주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거짓말 말아요. 당신은 스스로 자청한 참혹한 자학을 음
미하며 증오를 매일매일 키웠던 거야. 그것은 마침내
."
"그렇지 않아요."
오민수가 더 참을 수 없었는지 목소리를 높였다.
"거짓말! 당신의 가슴은 중오로 불탔어. 단결투쟁가를 부
르며 복수의 칼을 갈았어."
"너무하지 않습니까?"
"당신은 오랜 시간 연구했어, 가장 혹독한 복수의 방법
을. 그리고 마침내 그 집에 있는 저주의 칼을 설희주, 아
니 부르조아의 노리개 가슴에 꽂았던 거야. 꽂았지, 그렇
지? 당신이죽인 거지?"
강형사는 이성을 잃고 오민수의 멱살을 잡아 흔들었다.
식당에서 간식을 하고 있던 사원들이 이쪽으로 슬슬 다가
왔다.
강형사는 주위의 시선을 느끼며 슬그머니 멱살을 놓고 그
자리에 앉았다.
"어때? 당신이 죽인 거지?"
그러나 오민수는 이제 빙그레 비웃음 같은 것을 얼굴에
띠며더 대답하지 않았다.
"설희주씨를 최근에 만난 것이 언제였죠?"
강형사는 다시 평온한 감정으로 되돌아가 조용히 질문했
다.
"희주가 죽기 1주일쯤 전인 것 같습니다. 확실한 날짜는
기억하지 못하겠구요."
오민수도 차분하게 대답했다.
"더 자세하게 이야기해 봐요."
강형사가 다시 담배를 권하자 이번에는 오민수가 받아들
었다. 강형사가 라이터를 켜대자 그는 불을 붙여 깊이 한
모금 빨아들였다.
"전화를 했더군요. 노조 사무실로."
오민수가 무겁에 입을 열었다.
"그래서?"
"영등포 지하철역 입구의 어느 다방에서 만났지요. 그리
긴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상당히 핼쓱해진 얼굴이 그
렇게 행복해 보이지 않더군요."
그는 연민의 정을 느끼는 듯 다시 눈을 밀으로 내리감았
다.
"자기를 용서할 수 있겠느냐고 그러더군요. 난 그냥 담배
만 피우고 있었어요. 별로 할 말도 없고. 그뿐이었어
요."
"용서? 용서해 달라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오민수는 묵묵부답이었다.
"당신이 혐의권에서 벗어나자면 낱낱이 이야기를 해야 돼
요. 당신이 이야기 안 하더라도 우리는 다 알게 된단 말입
니다."
강형사가 다시 흥분한 목소리로 떠들었다.
"못할 것도 없지요."
오민수는 결심한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시각에서 말
하는 그들의 관계는 비교적 진실에 가깝다고 강형사는 느
꼈다.
그들은 그날 영등포역 입구의 허름한 지하 다방에서 만났
다.
그들이 노동운동을 할 때 몇번 만난 적이 있는 곳이었다.
퀴퀴한 소독 냄새가 코를 찌르는, 그리 기분좋지 않은 다
방이었다. 야한 옷을 입고 야한 화장을 한 레지가 껌을 딱
딱 씹고 히프를 유난히 흔들며 차 주문을 다니는 그런 곳
이었다.
마주앉은 두 사람은 한때 아무 말도 없었다.
수수한 원피스 차림에 구찌 가죽 백을 든 설희주는 퍽 핼
쓱해보였다. 머리를 짧게 깎은 오민수는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이었다. 그가 1년에 한두 번 하는 차림이었다.
"어떻게 지내요?"
설희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나 오민수는 그냥 약간
웃어보일 뿐이었다.
"월급은 괜찮게 주나요?"
오민수는 마지못해 고개만 끄덕였다.
"결혼 안 하세요?"
"결혼은 혼자 하는 게 아니잖아요?"
한참만에 오민수가 입을 열었다.
"제가 뭐 도와줄 게 없나요?"
그러나 그 말이 오민수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 같았다.
"사모님 도움을 안 받아도 저 혼자 잘 살아갑니다."
"제발 민수씨."
"그래 사모님 생활이 얼마나 행복한가요? 꿈이 잘 익어가
나요?"
오민수의 눈은 갑자기 불타기 시작했다.
"아직도 나를 원망하고 있군요. 용서를 빌지는 않겠어요.
나는 내가 택한 일이 결코 잘 되었다고는 생각치 않아요.
하지만 그때는 그렇게 밖에 할 수가 없었어요."
설희주의 눈에는 이슬이 맺혔다. 그녀는 그녀가 일생 일
대의 결단을 내리고 고봉식의 아내가 되던 순간을 생각했
다.
오민수도 설희주를 측은하게 생각하며 4년 전 그녀가 자
기곁을 떠나던 때를 생각했다.
그들은 공윈 벤치에서 어둑어둑해질 무렵 마지막 만났었
다.
"그래 잘 생각했는지 몰라. 아니, 아주 잘 생각했어. 나
라는 인간은, 오민수라는 이 인간은 희주한테 처음부터 역
시 어울리지 않는 놈이야."
어둠을 뚫고 오민수의 눈은 불타고 있었다.
"미안해요, 민수씨. 하지만 이건 또 하나의 투쟁 방법일
뿐이야."
"또 하나의 투쟁 방법? 하하하. 정말 그럴까? 그건 도피
일지도 몰라. 도피도 때로는 필요하지. 하지만 이 말 한
마디는 꼭 마지막으로 해주고 싶어. 사람이 산다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해? 진실을 외면한 삶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것이 파멸된 인생에서 무슨 가치를 찾아내겠
어?"
"나두 그런 전 모르는 건 아녜요. 우리가 함께 진실과 민
주의 탑을 쌓던 많은 날들을 내가 왜 가치 없이 생각하겠
어요? 노동 현장에서 목숨을 바치며 투쟁하고 있는 동지들
로부터 왜 돌아서겠어요? 하지만 그게 왜 우리 사이를 가
로 막는 장애물이 되어야 하죠? 우리는 왜 결혼하면 안 되
죠? 투쟁과 해방은 정의고 남녀의 사랑은 불의인가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오민수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물었다.
"몰라요.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우리는 지금 무슨 일을
하고있는지 모르겠어요. 이런다고 뭐가 이루어지나요? 나
는 무슨 짓인가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요."
설희주는 어깨를 들먹이며 울기 시작했다. 동료들 앞에서
머리띠를 두르고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우리 승리하리라'
를 선창하던 투사 설희주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
없었다.
"희주,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나를 지금까지 잘 따라
주었잖아! 솔직하게 이야기해 봐? 이제는 가난이 지긋지긋
하게 싫다든가, 안정되게 살고 싶다든가."
그러나 설희주는 더욱 어깨를 들먹이며 울기만 했다.
"난 누구보다 희주 마음을 잘 알아. 나 역시 우리 둘만의
보금자리를 구축해서 남들처럼 아기를 가지고 나른한 일상
의 행복을 누리고 싶어. 하지만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에 아직 그렇게 안주해서는 안 되는 거야! 우리들 귀
에는 아직도 쟁쟁하지 않아? 저들의 신음 소리가 들리지
않아? 십만원도 안되는 임금을 받으며 밤을 새워 일하는
어린 동생들의 눈망울이 보이지 않아? 가난해서 못 배운
설움만도 뼈 아픈데 걸핏하면 교양 없다 무식하다 쥐어박
고, 부모님이 나에게 지어 주신이름 있건만 공돌이 공순이
개 부르듯 불러대네."
오민수는 투쟁할 때 부르던 노래 귀절을 외쳐댔다.
"그만."
"그 애들의 한숨 소리가 들리지 않아?
긴 공장의 밤
시린 어깨 위로
피로가 한파처럼."
오민수는 혼자 나직하게 '시다의 꿈'을 불렀다. 그의 눈
에도어느덧 이슬이 맺혔다.
설희주도 울음 섞인 목소리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것
은 과거 학창 시절 그들이 좌절할 때 힘을 주던 곡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것이 이별가처럼 슬펐다.
"알아요. 나도 알아요. 하지만 돌멩이를 던지고 구호를
외치고 공장에 뛰어든다고 현실적으로 그들에게 무슨 도움
이 돼요? 난 다른 방법을 택하기로 했어요. 우리가 결혼해
서 함께 할 수 없는 일이에요."
설희주는 노래를 그치고 단호하게 선언했다.
"그래 재벌 2세의 어부인이 되면 여러 가지 방법이 생기
겠지. 하하하, 고급승용차를 타고 골프장을 드나들면서 재
봉틀 앞에서 고사리 손으로 졸음 오는 눈을 비비는 어린
노동자를 생각한다? 그거 아주 기가 막히는군! 아주 기막
힌 드라마야!"
오민수가 평소의 그답지 않게 흥분해서 큰 소리로 말했
다.
그러나 설희주는 냉정을 되찾은 듯 조용히 마지막 인사를
했다.
"용서하세요."
추경감에게 강형사는 그가 조사해 온 내용을 샅샅이 보고
했다. 주로 오민수라는 용의자에 관한 내용이었다.
"오민수, 그 녀석은 대학 다닐 때부터 이름난 꾼입니다.
구제불능이죠. 그 녀석이 처음 대학 들어갔을 때는 무림파
의 영향을."
"가만 있어, 무림파가 뭐야?"
강형사의 말을 듣는둥 마는둥 하던 추경감이 갑자기 질문
을했다.
"학생 운동의 한 계파라고 할 수 있지요. 70년대 초의 학
생운동은 적극적인 사회 참여도와 학업이 끝난 뒤 사회 참
여를 해야 한다는 측, 또 조직 같은 것은 만들지 말고 하
자는 둥 갖가지로 갈라져 있었죠. 그 중 두 가지 큰 세력
이 있었는데 그 첫째가 학림파(學林派)이고 둘째가 무림파
(霧林派)라는 거였죠. 학림파는 조직을 피하지 않았지만,
무림파는 말 그대로 안개 속에 묻혀 운동을 했기 때문에
정체를 파악하기 어려웠죠. 그 중 노동 운동에 더 관심을
가진 것이 무림파였지요.
그들은 위장하여 노동 현장에 뛰어들어 잠든 노동자를 깨
어나게 하는 일을 했지요. 뒤에 공단마다 문제가 된 도산
같은 것도 그 유형입니다."
"자네는 언제 그런 걸 그렇게 알았나?"
추경감이 마냥 훙미가 있다는 듯이 되물었다.
"오민수 때문에 좀 알아보았지요. 무림파는 뒤에 PD파의
뿌리가 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만 정설은 아닙니다."
"PD파?"
"예, 방송국의 피디라는 PD가 아니구요, 피플스 데모크라
시라는 약자입니다. 즉 민중 해방, 혹은 민중 민주주의라
고 할까요. 그와 대칭되는 운동권으로는 NL이라는 것이 있
지요. 내셔널 리볼루션이란 말의 약자인데, 민족 해방 혹
은 민족주의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최근의 학생 운
동은 대체로 이 두 파가 주도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럼 말이야."
추경감은 담배를 꺼내 물고 고물 지포 라이터를 철거덕거
리며 질문했다.
"주사파라는 것은 어디 속하는 거야?"
"어디 속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체로 NL파에 많이 있다
고 보아야 하겠지요. NL의 슬로건은 민족통일, 민족해방에
있으니까요. 대체로 학생 운동의 기저에는 우리 사회를 반
봉건 식민지 사회로 보는 경향이 뚜렷합니다. 따라서 독재
니, 군사 정부니 하는 것은 반봉건의 규범 속에 있는 것이
고, 식민 사회는 미국이나 여타 강국의 종속을 뜻하는 것
이지요. 따라서 다른 표현으로는 반파쇼, 해방을 주장하게
되지요. NL파가 요줌학생 운동의 주류이고, PD는 그보다
약세라고 보여집니다.
노동 운동을 주도하는 운동권은 주로 PD 쪽에 많습니다.
따라서 오민수는 무림파와 PD에 뿌리를 둔 운동권 출신으
로 분류됩니다."
"흠!"
추경감은 몹시 흥미있는 듯 무림, PD라는 말을 여러 번
되뇌었다.
"하긴 45년 해방을 전후해서 우리 선배들이 뭔가 잘못 이
끌어간 점이 많긴 많아. 그 결과가 오늘날 운동권을 잉태
하게 했지. 그래 오민수는 요즘도 그 일을 하고 있는 거
야?"
"물론입니다. 입장은 좀 달라졌지만 노동자가 주인되는
사회를 위한 투쟁은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설희주는 함께 그 길로 달리다가 방향을 바꾼 셈이군."
"두 사람은 동지이면서 연인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다
가 행동이 달라진 것이지요."
"설희주가 왜 생각을 바꾸어 재벌 2세와 결혼을 하게 되
었을까? 말하자면 오민수에게는 배신자가 된 셈이지. 오민
수를 배신한 것은, 즉 운동권을 배신한 것 아니겠는가?"
추경감이 강형사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런 각도로 볼 수도 있지요. 설희주는 원래 가정에서부
터 한이 서린 여자였습니다."
강형사가 알아낸 설희주의 가정은 흔히 볼 수 없는 비극
의 집안이었다.
아버지가 철도청 선로원으로 다닐 때는 비록 가난하게 셋
방살이를 했지만 단란하게 자랐다. 아버지, 어머니와 공부
잘 하는오빠, 언니, 그리고 설희주 등 다섯 식구가 오손도
손 살면서 희망 어린 장래를 점치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뜻밖의 사고로 죽으면서부터 불행의 태
풍은 이 집에 휘몰아쳤다. 그때만 해도 시원찮게 주는 보
상금 문제때문에 철도청 높은 사람들과 싸움이 시작되었
다.
그러나 본인 잘못이 더 컸기 때문에 규정상 어쩔 수 없다
는 냉정한 주장 때문에 돈이라고 할 수 없는 형식적인 보
상만을 받았다.
사람의 목숨값이 이렇게 허무할 수 있는가 하고 설희주는
분노의 눈물을 흘린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세 남매가
어머니를 끌어안고 통곡을 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대학에 다니던 오빠는 더 이상 학비를 댈 수 없어 휴학하
고 군에 입대했다. 언니 설명주는 구로동 공단의 어느 봉
제 공장에 들어가 고달픈 시다 생활을 시작했다.
어머니는 봉천동 시장에서 과일 노점상올 벌여 놓고 단속
원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설희주도 학교를 집어치우고 집안 살림에 보탬을 주려고
했으나 어머니와 언니가 극구 반대했다.
"희주 넌 머리가 아까와. 나야 아무리 공부해도 두각 나
타내기가 어렵지만, 너는 반에서 수석을 하는 머리가 아깝
지 않니. 내가 힘껏 벌어 뒷바라지해 줄 테니 넌 끝까지
공부를 해야돼. 대학까지 가서 우리 집안의 한을 풀어야
해."
언니 명주는 이렇게 희주를 격려했다.
"네 언니 말이 맞다. 넌 아무 걱정 말고 공부나 계속해
라."
어머니도 이렇게 말했다. 하루 종일 시장 경비원에게 쫓
겨다니며 숨바꼭질하느라 정갱이에 시퍼렇게 멍이 든 어머
니는 고단한 줄도 아픈 줄도 몰랐다.
그러나 그녀의 가정은 이 정도에서 일어날 수는 없었다.
그녀의 언니는 고달픈 시다 생활을 견디다 못해 자포자기
해 버렸다. 희주가 대학 2학년이 되자마자 언니는 공단 주
변의 한 건달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쥐꼬리만한 월급과
밤을 낮처럼 새우는 공순이 생활을 더 이상 참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은 그뿐이 아니었다. 행상을 하던 어머니는
과일 바구니를 머리에 인 채 이곳 저곳으로 쫓겨다니다가
도시락 배달하는 오토바이에 치어 뇌진탕으로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홀어머니와 함께 시장 주변에서 도시락을 만들어 팔아 입
에 풀칠을 하는 소년은 무면허 오토바이 운전사였다.
물론 한푼의 보상도 받지 못했다. 어머니의 한 서린 시신
을 화장터로 싣고 가면서 군에서 갓 제대한 오빠와 희주는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모른다.
"희주야, 용기를 내라. 이 불행은 우리만 겪는 것이 아니
다. 이 나라에 태어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금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알아? 그래도 고문 당해 사지를 찢기거나
죽어 나오는 것보다는 얼마나 나으냐?"
오빠는 이렇제 말하며 희주를 달랬다.
그러나 그 오빠가 먼저 허물어지고 말았다.
제대한 뒤 이곳 저곳을 뛰어다니며 일거리를 찾으려고 했
다.
그러나 고등학교 중퇴의 실력 가지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침내 공사판 여기 저기를 찾아다니며 막일을 하기 시작
했다.
그러나 그렇게 이를 악물고 견딘 것도 몇 달뿐이었다.
어느 날 다시는 오빠를 찾지 말라는 편지 한 통을 남기고
그는 사라져 버렸다.
희주는 울부짖으며 오빠를 찾으러 온갖 노력을 했으나,
한강에 투신자살했을 것이란 확실치 않은 소식만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것은 그가 대학 졸업을 앞둔 어느 겨울의 일이었다.
희주는 학총련의 여학생 부장으로 노동 운동을 하고 있었
다.
회장인 오민수와 함께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암울한 겨울
의 일이었다.
"설희주는 절망의 끝에 서 있었던 겁니다. 자기 자신을
묶어놓은 현실의 매듭을 풀 재주도 기력도 없었다고 보아
야죠. 그 극한적인 상황에서 그녀가 무슨 행동을 취했다고
한들 이땅의 누가 그녀를 나무라겠습니까? 재벌의 며느리
가 아니라 독재자의 첩이 된들 누가 이의를 달겠습니까?"
이것은 오민수가 강형사에게 한 항변이었다.
"거참, 드라마 같은 비극이군, 쯧쯧."
추경감은 혀를 차면서 강형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시대에 그 여자 같은 비극을 혼자만 겪는 것은 아
니란 말야. 625 전쟁통에는 그보다 더한 비극이 얼마든
지 있었단말야!"
추경감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경감님, 설희주가 학총련에 가담하여 돌멩이를
들고 최루탄과 맞선다든가, 공순이로 위장해서 배부른 사
장님과 말다툼을 한 동기를 이해해야 합니다."
강형사가 항변처럼 말했다.
"그러나 그런 방법 말고도 사회를 바꾸는 노력은 얼마든
지 할 수 있어. 그것은 파괴적인 방법일 뿐이야."
추경감은 강형사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런 철석 같은 이념으로 뭉친 설희주가 왜 오민수를 차
버리고 그들의 적인 재벌 집안으로 뛰어들었을까?"
추경감이 다시 담배를 물었다. 그러나 불을 붙이지는 않
고 필터를 이로 잘근잘근 씹었다.
"재벌이 무조건 운동권의 적은 아닙니다."
강형사가 다시 이의를 제기했다.
"이 사람 운동권 공부를 좀 하더니 이상해진 것 아냐?"
추경감이 강형사를 보고 화난 표정을 지었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다만 너무 안타까울 뿐입니다. 하
지만 전 설희주의 엉뚱한 행동에 이해되는 구석이 있기도
합니다."
"오민수가 설희주를 어떨게 생각하고 있느냐도 문제일 수
있어."
"말은 설희주를 이해한다고 했지만 속으로야 배신자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이중의 배신자인 셈이지요. 이념의
배신자, 사랑의 배신자."
"오민수와 설희주가 애인 사이였음은 틀림없는 거야?"
"글쎄 그렇다니까요."
"괜한 사람들 그렇게 모함하지 말고 다시 잘 알아봐. 만
약 그것이 확실하다면 오민수가 설희주를 죽일 동기가 성
립되는거야."
"동기는 성립되지만 실현한 흔적은 아직 아무것도 없습니
다."
7. 비극의 연인들
강형사는 설희주의 과거에 정정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을
더 캐기 시작했다. 오민수가 설희주를 죽인 범인일 것이라
는 수사관의 시각이라기보다는 이 시대의 불행한 젊은이들
의 고뇌와 갈등이 그를 움직인 것이다. 그는 아무래도 자
기는 추경감의 세대보다는 오민수의 세대에 가깝지 않느냐
고 반성해 보기도 했다.
불행하면서도 주위로부터 모든 증오를 한 몸에 지니고 있
던 설희주는 점점 불가사의한 여자로 강형사에게 부각되어
왔다.
그는 설희주의 학교 시절 친구들로부터 그녀가 고영혜와
가까운 사이였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뿐 아니라 재벌 그룹
의 둘째딸인 고영혜가 운동권에 가담하고 있었으며 선배인
오민수를 흠모하고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도 알아냈다.
"그러고 보면 뒤에 시누 올케 사이가 된 고영혜와 설희주
는 오민수를 사이에 둔 3각의 라이벌이 아닌가?"
강형사의 설명을 들은 추경감이 상황을 정리해서 말했다.
"그뿐 아니라 고봉식, 즉 오빠를 소개해서 설희주와 알게
한 것도 고영혜였답니다."
강형사는 고영혜를 만나 그때의 상황을 다시 확인했다.
"새 언니, 설희주 선배는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혔지요,
물론. 그러나 인간이 궁극에 달하면 가장 이기적인 돌파구
를 찾는다는 것을 잘 보여준 여자지요."
고영혜는 설희주를 나쁜 여자로 치부하는 발언을 서슴없
이 했다.
고영혜와 설희주가 학교 앞 카페에서 싸우던 이야기를 그
녀의 옛날 친구가 강형사에게 들려주었다.
그날은 설희주가 고봉식과 걸혼식을 올리기 전날 밤이었
다.
오민수와 설희주가 마지막 작별의 말을 나누던 자리였다.
"극적인 자리군요. 내가 우연히 목격을 해서 미안해요."
고영혜가 가시돋친 말을 앞세우고 두 사람 테이블 앞에
다가섰다. 고영혜로서는 이 장면에 착잡한 심경을 느껴야
만 했다. 라이벌인 한 여자가 딴 곳으로 떠나 안도했지만
그 라이벌이 자기 집안으로 들어온다니 심사가 편할 리 없
었다.
두 사람은 뜻밖의 목격자 앞에 말을 잃었다.
"설희주씨, 아니 이제 새언니, 결혼식 전날 밤 옛 애인과
의 마지막 밀회! 어때요? 그런데 뭐가 그렇게 슬퍼 그런
표정을하고 있어요?"
"웬일이야? 영혜가 여기에."
설희주는 겨우 입을 열었다.
"내가 못 올 데를 왔나요? 여학생 회장님! 그 고고하고
총명하신 모습은 어디 가고 이렇게 나약해지셨나요?"
"영혜!"
설희주가 나직하지만 위엄 있는 목청으로 불렀다.
"위선자! 뭐? 노동자 착취하는 악덕 재벌 자폭하라? 노동
자 농민이 주인 되는 민주화 이룩하자? 내 사랑 내 젊음
노동의 전사되어 장엄한 역사의 불꽃으로 타오르다? 살아
춤추는조국, 노동자 해방 위해?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
김 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그래서 재벌 그룹
의 며느님되셔?"
고영혜는 흥분한 목소리로 설희주에게 피부었다. 그녀가
인용한 말은 데모 현장에서 피맺히게 절규하던 노동가의
노래 가사였다.
"영혜! 그만, 제발 그만!"
설희주는 거의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민주 사회의 젊은이는 피를 먹으며 성장하는 것이라고
우리를 일깨운 게 엇그제 같은데, 이제 동지는 간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군요. 무엇이 우리
의 투사 설희주씨를 이렇게 놀랍게 변화시켰는지 참으로
궁금해요."
고영혜의 흥분은 조금 가라앉았다.
"하지만 불안해할 건 없어요. 당신과 오민수씨와의 관계,
오빠나 집 식구들에겐 비밀로 해 드리겠어요. 노동 투사
후배의 의리예요. 나는 단지 당신의 카멜레온 같은 그 변
신을 조용히 지켜보겠어요. 시누이와 올케라는 이름의 돌
계단 위에 앉아서."
"영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오민수가 큰 소리로 불렀다. 그러나
고영혜는 들은 척도 않고 돌아서서 카페를 나가 버렸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강형사는 참으로 묘한 심경에 빠졌
다.
어쩌면 소설과도 같은 얼키고 설킨 일들이 현실로 나타났
단 말인가? 세상에는 이와 같은 일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
다. 그러나 이번처럼 살인 사건 같은 것이 나지 않으면 걸
코 세상에 노출되지 않고 묻힐 것이 아닌가?
설희주의 행동이 1백80도 회전한 것같이 보이지만 실은
자기대로 좌절을 헤치는 방법의 하나로 고봉식을 택했는지
모른다는생각이 강형사에게 들었다.
"그렇다고 희주가 가난이나 좌절감 그 자체 때문에 애정
없는 결혼을 했다고 보진 않습니다. 그녀가 젊은날의 이데
올로기는 포기했더라도 재벌 2세와의 걸혼으로 그 차선책
을 나름대로 모색했을 것입니다. 설희주는 적어도 그런 여
자였습니다. 결국 모든 것이 허망의 파도 저편으로 스러져
갔지만요."
강형사가 오민수를 다시 만났을 때 그가 고개를 떨구며
비탄의 목소리로 들려준 말이었다.
강형사는 오민수가 설희주를 마지막 만났을 때 그녀의 심
경이나 주변의 일을 들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설희주씨가 죽기 1주일 전에 만나고는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 사실이오?"
강형사가 수십번도 더 들은 질문을 또 했다.
오민수는 더 이상 대답하기도 싫다는 듯 고개만 끄덕였
다.
"설희주를 아직도 증오하고 있소?"
"전 다만."
오민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만 뭡니까?"
"왜 그날 좀 편한 마음을 갖도록 해서 그녀를 보내 주지
못했나 하는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땐 의지 약한 여
자는 할수 없다는 생각과 배신이라는 원망도 했습니다
만."
오민수는 식은 커피를 단숨에 들이키고는 이야기를 계속
했다.
"희주는 불행한 여자였습니다. 저는 그녀의 가정의 피눈
물나는 비극을 그녀가 고사장에게 시집간 뒤에야 알았던
것입니다."
오민수는 이렇게 말하고는 괴로운 듯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우리는 왜 이런 시대에 이 나라에 태어나야만 했습니
까?"
그러나 그 대답은 강형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편 추경감은 가장 용의점이 많다고 생각되는 고봉식의
사생활을 깊이 캐들어가고 있었다.
고봉식은 부잣집 맏아들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약
간 모자라는데다 낙천주의자이고 낭비벽과 바람끼 등 모든
것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그와 가까운 여자는 그의 성적
노리개가 된 비서 양경숙이었다.
그들의 동물적인 사랑 유희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았
다. 처음에는 정혜의 친구라고 하던 양경숙이 어느 새 그
모양으로 변해 있었다. 아니, 변했다기보다는 처음부터 그
랬는지도 모른다.
"왜 그래요? 여기서 뭐 한두 번이었나요?"
고봉식 사장의 집무실. 푹신한 소파 위에 비스듬히 누워
소커트를 걷어붙이고 육중하게 실려오는 고사장의 체중을
즐겁게 받치고 있던 양경숙이 주춤해진 고사장을 올려다보
며 말했다.
"도무지 정신 집중이 안 돼서 말이야."
고봉식은 갑자기 하던 짓을 멈추고 벌떡 일어났다. 닫긴
했으나 커튼 사이로 들어온 강열한 햇살이 허옇게 드러난
양경숙의 아랫배와 허벅지를 비추었다. 중심부 비너스의
숲이 더욱 까만 윤기를 내었다.
그러나 고봉식은 이미 경숙에게 흥미를 잃은 것 같았다.
"일어나. 도무지 집중이 안 돼."
"집중? 이제 마누라 생각할 것두 없어졌는데 왜 이래요?"
"목소리 죽여!"
양경숙의 앙칼진 앙탈에 고봉식이 주의를 주었다. 그는
바지춤을 올리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사장님!"
그러나 양경숙은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하반신
을 소파 위에 허옇게 다 드러내놓은 채 꼼짝도 않고 더욱
앙칼지게 불렀다. 여자는 잠자리에서 버림받았을때 가장
비참해지는 것이다.
그녀는 휴지처럼 버려진 자기의 육체를 수습할 생각은 전
혀 않고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돌아서서 담배 연기를
뿜고있는 고봉식의 뒷등을 그녀는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쏘아보았다.
"이렇게 해도 되는 거예요?"
고봉식이 돌아서서 천한 자세로 다리를 벌리고 있는 양경
숙을 흘깃 보았다.
쇼커트 자락은 가슴께로 말려 올라가 있고 유난히 깊게
파인 배꼽 밑으로 꽤 탄력 있어 보이는 조그만 아랫배가
희게 빛났다. 왼쪽 다리는 소파에 약간 구부린 채 얹혀 있
고, 오른쪽 다리는 정갱이부터 소파에서 느러뜨려져 바닥
에 발바닥이 닿고 있었다. 그 발목에는 손바닥만한 흰 팬
티가 벗겨지다 말고 걸려 있었다. 짙은 비너스의 숲과 자
색 소파의 색깔, 거기에 흰 그녀의 넓적다리는 대단히 육
감적이었다.
그러나 고사장의 눈에는 권태롭고 추잡한 여자의 하반신
으로만 보였다.
"빨리 일어나지 못해."
고사장은 조금 미안했던지 양경숙의 팔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사장님, 또 경찰서 불려 갔댔어요?"
양경숙은 생각난 듯 부시시 일어나 앉아 팬티에 왼발을
끼어넣으며 말했다.
그러나 고봉식은 묵묵부답인 채 벽에 걸린 아버지 고회장
의 초상화를 뭍끄러미 들여다 보고 있었다.
"지금 혐의자가 식구 중에도 있어요?"
양경숙은 분이 풀어진 듯 옷매무새를 고치며 조금은 걱정
스럽게 물었다.
"우리 식구 몽땅."
고봉식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나두?"
그러나 고봉식은 그 말에 대답을 않고 책상 서랍을 열면
서물었다.
"적금이 얼마라구? 그 구멍 맨날 쑤셔 넣어도 끝이 없
어."
"백80만원이던가."
고봉식은 책상 서랍에서 수표 한 장을 꺼내 집어 던지다
시피 양겅숙에게 주었다.
"3백이야."
"어머! 고마와요. 근데 따져두고 넘어갈 게 있어요. 그
구멍 끝이 없다는 야비한 말 취소하세요."
고봉식이 양경숙을 흘깃 보았다. 농담으로 한 이야기가
아니란 것을 알자 얼른 대답했다.
"그래, 취소다. 취소."
"그리고, 또 한 가지 따져둘 게 있어요."
양경숙은 내친 김이라는 듯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또 뭐야?"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사모님도 없어졌으니까 이
제 사장님도 핑계댈 게 없어졌잖아요? 예식장 날 안 받아
요?"
"뭐? 예식장은 왜?"
"왜라뇨? 나 면사포 안 씌우고 이대로 둘 거예요? 난 싫
단 말예요. 밤낮 사장님 소파에서 스커트나 걷어올리고 누
가 들어올까봐 도둑질하듯 끝내는 그런 사랑 이젠 싫어
요."
"왜 우리가 이 방 소파에서만."
고사장은 무어라고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스스로 생
각해도 치사한 변명 같았던 모양이다.
"그래요. 대관령 콘도 별장, 제주도 호텔, 그런 데도 몇
번 갔지요. 하지만 그건 우리 가정이 아니란 말이에요. 나
도 가정을 갖고 싶어요. 이렇게 숨어서 도둑 사랑을 하는
게 벌써 2년도 넘었어요. 나도 화장대 앞에서 입술 그리
며, 화려한 잠옷 입고 당신을 기다리는 생활을 하고 싶어
요. 부엌에서 맛있는 찌게 끓이며."
"당신?"
양경숙의 입에서 무심코 나온 말에 고봉식은 섬한 거부
감을 느꼈다. 그녀가 고사장을 당신이라고 부른 것은 처음
이었다.
양경숙은 설희주가 죽고 나자 부쩍 고사장을 조르기 시작
했다. 이제 거리낄 것 없다는 듯이 때로 자기 서방 다루듯
하는 태도가 점점 노골적으로 되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고봉식은 꽁무니를 뺐다. 마침내는 그녀
와 사랑 놀음도 제대로 끝낼 수 없는 처지에까지 오고 말
았다.
"언제까지 이러구 기다려야 해요?"
양경숙은 당신이라고 의식적으로 써 보았는데 그 반응이
의외로 나쁘다고 생각했는지 톤을 조금 낮추었다.
"지금 희주 죽은 지 며칠 되었어? 사람이 왜 그렇게 성미
가 급해? 지금도 우리 식구들은 수사 대상이 되어 있단 말
이야.
그런데 뭐 걸혼식 날짜를 잡자고? 우리가 지금 얼씨구나
하고 덜컥 걸혼을 해봐.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 또 형사
나부랭이들은 어떻게 보겠어? 옳다구나, 너희들이 설희주
를 죽였구나. 그리고 죽이자마자 결혼을 해? 이렇게 밖에
더 생각하겠어?"
고봉식이 자기딴에는 차근차근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그럼 우리 멀리 날랐다가 와요."
양경숙은 자기가 경솔했다고 생각한 듯 엉뚱한 말을 했
다.
"날라?"
"우리 프랑크푸르트 가기로 했잖아요. 사장님이 먼저 떠
나고 나는 휴가 얻어서 뒤따라 가기로."
그랬었다 몇달 전에 세운 고봉식의 계획이었다. 고사장
출장을 이용해 양경숙과 해외에서 만나 한 2주일쯤 보내고
그녀가 먼저 귀국한 뒤 고봉식은 일본을 거쳐 천천히 들어
올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거 당분간 중지야."
"예? 여권까지 다 내놓았는데."
양경숙은 크게 실망했다. 그녀는 소파에 털석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나중에. 봄쯤에나 가자구."
"왜요?"
"수사 끌날 때까지 금족령이야. 우리 식구 모두 꼼짝 말
래."
"무엇이라구요? 누가 그래요? 명왕성 그룹이 어떤 재벌인
데 형사 새끼들이 그 따위 소릴 해요?"
"이놈의 사건 빨리 끝나야 할 텐데."
고봉식은 주먹을 불끈 쥐어 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들의 대낮 정사가 이렇게 비참하게 끝나기는 처음이었
다.
설희주가 없어져 주면 얼마나 홀가분하고 재미있겠느냐고
생각해 온 두 사람의 모습은 정반대로 나타났다.
양경숙이 혹시 용의자가 아닐까고 그녀의 뒤를 추적하던
추경감은 그녀의 부도덕한 여러 면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예쁘고 젊고 학식 높은 여자가 도덕적으로 이렇
게 타락할 수 있는가 싶었다.
나이 스물네 살. 일류 대학 연극영화과를 나왔고 학교 다
닐때는 미스 유니버시티라고 불릴 정도로 미인이었다. 성
격이 대담쾌활하고 집안도 꽤 유복한 편이었다.
그런데 양경숙은 대학 다닐 때부터 두세 명의 보이프랜드
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대학 3학년 때 학교 근방에 살
아야 된다는 핑계로 아파트를 얻어 혼자 나와 살았다. 그
때부터 생활이 불규칙해졌고 두세 명의 남학생과 번갈아
동거를 하다시피 했다.
양경숙은 능란한 말솜씨와 뛰어난 미모로 고봉식을 사로
잡는 일쯤은 식은죽 먹기였다.
고봉식은 쉽게 그녀에게 포로가 되었다. 양경숙은 돈도
뜯어내고 인사에도 관여해 자기 단짝 친구인 희정의 남편
을 계속 승진시켜 명왕성 자동차의 기획실장에까지 오르게
했다.
그러나 그녀는 괴로운 일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질 나쁜
건달들이 그녀와 고사장의 관계를 알고 계속 용돈을 뜯어
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타가는 곗돈이라는 것은 거의
그런 건달들 호주머니에 들어가고는 했다.
양경숙의 유일한 희망은 고봉식과 결혼을 하는 것처럼 보
이지만, 그녀의 속셈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고봉식의
재취로 들어간다고 하면 집에서도 맹렬히 반대할 뿐 아니
라 그녀의 자존심도 용납하지 않는 일이었다.
그녀는 고봉식으로부터 결혼하겠다는 결심을 받아낸 뒤
그에 상당하는 재산을 울궈내고 물러설 생각 같았다.
막대한 재산을 손에 넣기만 하면 자기 또래의 멋진 남자
를 골라 결혼하겠다고 그녀의 단짝 친구들에게 말한 일이
있었다.
8. 미궁의 수수께끼
"반장님, 이것 좀 보세요."
강형사가 이마의 땀을 찌든 손수건으로 훔치며 봉투에 든
것을 내놓았다.
"이 사람아, 무엇을 하고 다녔기에 한여름도 아닌데 땀을
그렇게 흘려."
추경감은 강형사가 내놓은 봉투를 집어들었다.
"몸이 허해서 그렇습니다. 밤낮 그놈의 고물차 타고 이곳
저곳 헤매다가 밥도 제대로 못 먹고 하니까 그렇잖습니
까?"
"왜 밥을 제대로 못 먹나?"
"경감님도 참, 제 봉급이 얼만지나 아십니까? 호텔 같은
데가서 밥 한 끼 먹자면 6만원 한답니다."
"쯧쯧."
추경감은 더 상대 않고 봉투에서 열쇠 하나를 털어냈다.
"아니, 이게 뭐야?"
"그게 보시다시피 열쇱니다."
"근데 왜 이렇게 조잡해. 가짜 열쇠 같은데?"
"헤헤헤, 열쇠가 가짜 진짜가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반
장님 말씀이 틀린 건 아닙니다. 그 열쇠는 본을 떠서 만든
모조품입니다."
강형사가 열쇠를 집어 모서리의 거친 부분 등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은 고회장집에서 나왔습니다. 그 골동품 로마 병정
칼이 있던 방의 열쇱니다."
"뭐야? 그게 어디 있다가 이제 나왔단 말이야?"
추경감이 다시 열쇠를 뺏다시피 쥐고는 살펴보았다.
"그것은 회장과 최화정 여사가 쓰고 있는 것을 그대로 본
떠 만든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미테이션이라는 거죠. 누군
가가 필요할 때 그 골동품 보관소로 들어가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지요. 그 열식를 만든 사람이 로마 병정 칼을 홈
쳐낸 사람이라고 볼 수 있죠."
강형사는 왼팔을 허리에 짚고 서서 아주 자신 있는 말투
로 설명했다.
"그래 이게 어디 있었단 말인가?"
"그게 어디 있었느냐 하면 놀라지 마십시오. 고정혜
와 정정필의 방에서 나왔습니다. 아무래도 미심쩍은 데가
있어서 그 집을 다시 찾아가 그들이 거처하는 방에 들어가
보았지요. 이것이 그들의 침실에 있는 스탠드 밑에 있었습
니다. 감쪽같이 숨겨두었다고 생각했겠죠."
"뭐야? 아니, 그럼 강형사가 영장도 없이 그 집 침실을
뒤졌단말야?"
"예."
"이거 큰일 났군. 또 국장님에게 야단맞게 생겼네. 어쩌
자고 그래 쯧쯧. 또 인권 침해니 어쩌니, 이게 몽둥이
경찰이냐 민주 경찰이냐 하고 시끄럽게 생겼어. 아니 강
군, 그 집이 뉘집인가?"
"뉘 집은요, 돈으로 도배를 한 명왕성 그룹 회장님 댁이
지요."
강형사가 능글능글하게 대답했다.
"지금 농담하는 것 아니야!"
"반장님, 염려 마십시오. 국장님 전화는 안 올 겁니다.
내가 고정혜 여사, 즉 방주인한테 양해를 얻고 수색을 한
것이니까요."
"정말이야?"
그제야 추경감도 얼굴을 펴면서 누그러졌다.
"그래, 이게 그 침실 스탠드 밑에서 나왔단 말이지?"
"내 처음부터 그 부부가 수상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들이
골동품방 열쇠 모조품을 만들어 놓고 기회를 본 거죠. 마
침내 D데이. 집으로 돌아온 정혜, 아니면 정정필이 골동품
방에서 로마 칼을 꺼내다 설희주를 살해하고, 마치 자기
오빠가 한 것처럼 하기 위해 와이셔츠에 피를 묻혀 침대
밑에 처박아두었지요."
"근데 왜 하필 로마 칼을 꺼내다 그랬을까?"
추경감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강형사의 말을 액면 그
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때 하는 버릇이었다.
"그야 뻔하지 않습니까? 골동품방 열쇠를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사람은 고회장과 최화정 여사 밖에 더 있습니까? 아
버지를 범인으로 만들 생각은 없었을 것이고, 최화정이 범
인인 것처럼 하기 위한 수작 아니겠습니까?"
"그럴까?"
추경감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똑 떨어진 장이야 아닙니까? 고정혜와 정정필은 그게 외
통수라고 생각했겠죠."
"그렇다면 그 열쇠는 다시는 못 찾는 곳에 버리지 왜 자
기방 스탠드 밑에 감추어 두었을까? 강형사가 찾아내라고
그런거야?"
추경감이 아픈 곳을 찔렀다.
"반장님, 그야 그럴 수 있지요. 늘 그곳에 숨겨 두었으니
까 사람을 죽인 뒤도 당황해서 원래 있던 곳에 가져다 두
게 되죠. 습관적으로 말입니다."
"습관치고는 고약하군. 후후후."
추경감은 혼자 웃었다. 그러나 강형사는 사뭇 진지한 얼
굴이었다.
"아무튼 그 열쇠를 찾아낸 것은 중요한 일이야. 강형사
말이 맞는지 어썬지 좀 조사를 해 보자구."
추경감은 열쇠를 다시 비밀 봉투에 넣은 뒤 그것을 호주
머니에 넣고 밖으로 나갔다. 강형사도 뒤따라 나갔다.
그들은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고정혜와 정정필이 63빌딩
스카이 라운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갔다.
고정혜와 정정필은 양주 칵테일을 한 잔씩 놓고 창가에
앉아있었다. 부부가 나란히 앉아 술을 마시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없는 정경이지만 그리 보기 싫지는 않았다. 무슨 이
야기인지 고정혜가 열심히 말을 하고 있고, 정정필은 몸을
느긋하게 뒤로 젖힌 채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가
끔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하기도 했다.
"이거 오붓하게 한잔 기울이는데 미안합니다. 방해꾼이
나타나서."
추경감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며 그들 옆의 빈 자
리에 앉았다. 강형사도 꾸벅 인사를 한 뒤 엉거주춤 따라
앉았다. 뜻밖의 두 기습자를 본 두 사람은 놀라는 것 같았
다. 그러나 곧 표정을 감추고 아주 불쾌하게 고정혜가 쏘
아붙였다.
"왜들 이러는 거예요? 무엇 때문에 선량한 사람을 괴롭히
는 거에요?"
"이거 미안합니다."
추경감이 다시 일어나 고개를 숙여 보이며 사과를 하고
앉았다.
"당신들 이거 못쓰겠구먼. 우리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어요? 오라, 우리를 미행하고 다녔군. 여보슈,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수?"
정정필이 칵테일잔을 든 손으로 삿대질을 했기 때문에 술
이 찔끔찔금 흘렀다.
"아,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냥 여기 들
렀다가 마침 두 분이 계시기에 인사나 하고 가려고."
추경감이 변명했다.
"그건 오햅니다. 우리는 정실장님을 미행한 것이 아닙니
다."
강형사도 거들었다. 그들이 미행하지 않았다고 딱 잡아떼
자 고정혜와 정정필의 얼굴이 약간 풀어졌다.
"그러시다면 뭐 한잔 하시지요."
정정필의 태도가 변했다. 추경감은 진토닉을, 강형사는
싱가폴슬링을 각각 주문했다.
"범인은 잡았어요?"
고정혜가 물었다.
"아직. 좀 도와주십시오."
추경감이 재빨리 말꼬리를 잡았다.
"우리가 뭘 도와줍니까?"
고정혜의 말을 강형사가 되받았다.
"그 열쇠 말입니다. 골동품방을 열 수 있는."
"이봐요, 그건 몇번이나 말해야 곧이 들어요. 그게 우리
방에서 나온 건 인정해요. 하지만 우린 그것과 아무 상관
이 없다고 그랬잖아요. 우린 아녜요."
갑자기 그녀가 신경질을 냈다.
"이 사람들 고약하군. 선량한 사람들이 한잔 즐기는데 나
타나 협박하는 거야 뭐야!"
정정필도 다시 펄쩍 뛰었다.
"아아, 흥분 가라앉히세요, 우린 다만."
"다만 뭡니까? 우리는 그런 열쇠가 있는지조차 몰랐어
요."
"그래요! 누군지 우리에게 혐의를 씌우려고 함정을 판 거
예요. 전혀 당치도 않아요!"
부부는 번갈아 펄펄 뛰었다.
"이 열쇠에 대해 모르신다니 더 묻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한가지만 더 물어봅시다. 그날, 사건이 있던 날 두 분은
대관령 호텔에 있었다고 하셨죠?"
추경감이 딴 문제를 꺼냈다. 그들이 너무나 펄쩍 뛰면서
떠들었기 때문에 방향을 바꾸려고 한 것이었다.
"그래요. 거기 있었어요. 그것은 조사해 보세요. 우린 대
관령 콘도에 가라고 아버지가 말씀했지만 설희주 보기 싫
어 호텔에 있었어요. 설희주는 뒤늦게 우리가 그곳에 간
것도 몰랐을 거예요. 거짓말인지 조사해 보세요. 대관령
호텔에 하루 종일 있은 사람이 서울 와 있는 설희주를 어
떻게 찔렀는지."
고정혜는 입을 삐죽거리며 이야기했다.
"이미 조사해 보았습니다. 당신 부부는 그날 새벽에 그곳
을 나왔더군요. 그것도 프런트에 열쇠를 맡기지 않고 말입
니다. 뒷문은 널찍하던가요?"
강형사가 비꼬아 주었다.
"프런트 직원이 졸고 있어서 깨우지 않았을 뿐입니다. 우
리가 현금 계산 하면서 그런 곳에 드나들지 않는다는 것은
아시겠죠?"
고정혜의 말이었다. 고회장네 가족쯤 되면 그들이 드나드
는 곳에서는 월말 단위로 청구서가 가지 일일이 지불을 요
구하지는 않았다. 로열 패밀리에 대한 예우였다.
"그리고 어디로 가셨습니까, 곧장 서울로 오시지 않았다
면?"
"아, 뭐 이왕 놀러 간 것 이곳저곳 좀 돌아다니며 놀았지
요."
정정필이 머리 뒤통수를 슬슬 긁으며 말했다. 말을 마치
자 입을 꽉 다물어 보였다. 두툼한 턱 한가운데 깊은 보조
개가 패였다.
추경감은 그의 턱이 유명한 미국 배우 커크 더글러스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알리바이 만들려고 그렇게 하신 건 아니겠지만, 송어횟
집, 오골계탕집 등을 들르셨더군요."
강형사가 두 사람의 표정을 날가롭게 관찰하며 말했다.
"보신탕, 아니 사철탕 잘 하는 집도 있었는데 이 사람이
싫다고 해서 그만두었지요."
정정필은 강형사의 시선을 피하면서 말했다.
"하지만 가는 곳마다 급히 나갔더군요. 송어횟집에선 회
만 먹고 매운탕을 끓이는 시간에 계산을 치르고 나갔더군
요. 맞습니까?"
"이 양반 별 시비를 다 거네. 남이야 매운탕을 먹건 말건
그게 무슨 문젭니까? 솔직이 송어 뼈다귀 매운탕 그거 뭐
맛이 있습니까?"
"비린내나는 기름이나 둥둥 뜨고."
고정혜도 콧잔등을 찡그려 보였다.
"하기야 출출할 때는 한번쯤 먹을 만하기도 하지요."
정정필은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앞이야기를 뒤집는 말을
계속 했다.
"먹을 만은 한데. 아, 매운탕이야 소주가 있어야 하
는것 아닙니까? 그런데 소주 대작할 상대가 있어야 말이
죠."
"왜, 부인께선 술을 못 하시나요?"
추경감이 물었다.
"마누라랑 무슨 재미로 대작을 합니까? 대낮부터."
정정필이 추경감을 향해 귀엣말처럼 했다.
"이 이가."
그러나 귀밝은 고정혜가 가만 있지 않고 핸드백으로 정정
필의 등을 툭 건드렸다.
"우리집 사람은 실은 양주 체질이 되어서 소주는 잘 못
마십니다."
"횟집에 양주는 없었나요?"
추경감이 부부를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 술 논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소
주면 어떻고 양주면 어떻단 말입니까."
강형사가 불평했다. 그 불평은 두 부부가 노닥거리고 있
는데 추경감이 왜 거들고 있느냐는 항의의 뜻이 담겨 있었
다.
"사실은 집사람이 가끔 운전을 하거든요. 요즘 음주 운전
했다간 큰일 나지 않습니까? 저는 10년 전에 운전면허를
땄습니다만 지갑에는 주민등록증밖에 없습니다. 집사람한
테 압수당했거든요."
"운전수는 어떻게 되었나요?"
"요즘 부부끼리 놀러 가는 데까지 기사 달고 갔다간 노조
한테 얻어맞기 꼭 알맞죠. 운전은 집사람이 했다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무슨 자동찹니까?"
"그랜졉니다."
"노클러치입니까?"
추경감이 입을 헤 벌리고 물었다. 선망의 눈을 가늘게 뜨
고 있었다.
"반장님, 이제 또 자동차 논쟁 하시려는 겁니까? 그런 건
우리 수사하고 아무 상관 없는 일입니다."
강형사가 울화통을 터뜨리며 정면으로 추경감을 비난했
다.
"노클러치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노클러치차는 운전할 때
손이 심심해서 재미 없다고."
정정필이 강형사의 핀잔은 아랑곳하지 않고 추경감을 바
라보며 이야기했다. 그러나 중간에 고정혜가 그 이야기의
허리를 끊어버렸다.
"모르는 소리 마세요. 노클러치가 얼마나 편한지 아세
요?"
"나 참!"
강형사가 더 못 참겠다는 듯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그는
추경감을 흘깃 보고는 도로 앉았다.
"나도 빨리 운전을 배워야겠는데."
추경감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래 당신들은 그 횟집을 나와서 그 담에 어딜 갔어요?"
강형사가 나서서 다그치기 시작했다.
"다 조사했다면 말해 보세요. 틀리면 고쳐 드릴께요."
"좋아요. 내가말하죠. 당신들은 그 길로 고속도로로 나와
서울에."
"틀렸어요."
정정필이 말을 받았다.
"거기서 고속도로로 곧장 가지는 않았어요. 집사람이 요
전번에 우리가 사다 드린 무공해 조선 상추를 회장님이 잘
드신다고해서 우리는 용계리로 갔지요. 거긴 비닐 하우스
재배 단지가 있거든요."
"상춘지 뭔지는 모르지만, 당신들은 하여간 서울로 온 뒤
에 우선 설희주가 집에 와 있는지를 전화로 확인한 후 곧
장 집으로 갔지요. 식구들마다 가지고 있는 비상 키로 대
문을 열고 들어갔지. 현관 문은 버튼식 키니까 문제 없이
암호 숫자를 눌러 들어갈 수 있어요. 가수는 노래하느라
바쁘고, 가는 귀 먹은 가정부 수원댁은 세탁기 돌리느라
바빴고 말이죠."
"말도 안 돼요!"
"개도 밤낮 드나드는 식구니까 짖을 턱이 없고, 전자 감
응장치도 가족에겐 삑삑거리지 않지요. 두 사람은 간단히
설희주의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갔지요. 아니, 침실로 가서
스탠드 밑에있는 로마 병정 칼을 가지고."
"재미있군요. 강형사님, 혹시 학생 시절에 연극반 하시거
나 소설 공부 안 하셨어요?"
고정혜가 조금도 질리는 기색 없이 말했다.
"그냥 해본 이야깁니다. 설마 그렇게야 했겠습니까?"
강형사가 슬그머니 발뺌을 했다. 자기도 너무 심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더 계속해 봐요. 그래 가지고 우리가 이 사람 올케, 아
니 처남댁을 찔렀다 이겁니까? 각본은."
"아니지요. 내가 그 연극 대본을 쓴다면 대뜸 찌르게 하
지는 않죠. 그러면 비명 소리가 나고 식구들이 달려오면
곤란해진다는 것을 누군들 모르겠습니까. 일단 설희주에게
적의를 감추고 무언가 부드러운 구실을 붙여 안심시킨 뒤
에 수건같은 것으로 한 사람이 입을 틀어막고 또 한 사람
이 가슴을 찔렀지요. 칼잡이 출신이 아니니까 몇번 연거푸
찌르는 중에 어느 한번이 치명상을 입힌 겁니다. 그리고
큰처남 고봉식의 와이셔츠에 피를 묻혀 침대 밑에 넣은 뒤
로마 병정 칼의 지문을 닦아내고."
"호호호, 재미있군요."
고정혜가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약간 공포에 질린 듯
했다.
"그런데 작은 처남이 들었다는 비명은 무슨 비명입니까?
그리고 그 비명 소리를 듣고 뛰어 내려왔다는데 우리는 그
때 아라딘의 램프로라도 들어갔단 말입니까?"
정정필이 의문을 제기했다.
"도망갈 수도 있지요."
강형사가 자신 없이 말했다.
"여보슈, 소설 쓰시려면 좀 똑똑하게 쓰시요. 방금 와이
셔츠에 피를 묻히고 어쩌구 했지 않습니까? 처남댁이 비명
을 지른 것은 죽기 전일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 뒤에 피
를 묻히고어쩌구 할 텐데 언제 도망을 갑니까? 봉길이가 2
층에서 뛰어 내려오는 데 몇분이나 걸렸답디까?"
"그 비명이 문제입니다. 설희주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는
지도모릅니다. 아니면 범인들이 고봉길씨와 짜고 한 일이
거나?"
강형사는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정실장님 부부가 의심스럽다는 것은 아닙니다. 강형사가
답답하니까 한번 헤본 소리에 불과한 겁니다. 뭐 오해하지
는 마십시오."
추경감이 수습을 하느라 온갖 말을 다 했다.
"조용히 즐기시려는 데 죄송합니다. 자, 강형사, 우리는
그만가지."
추경감이 강형사의 등을 떠밀다시피 하고 다른 좌석으로
옮겨갔다.
"왜 자신도 없는 말을 함부로 하는 거야?"
정정필 부부와 멀리 떨어진 좌석에 자리를 잡은 추경감이
은근히 나무랐다.
"틀림없어요. 저 남녀가 죽인 것이 틀림없단 말입니다.
아니,그 열쇠가 확증 아닙니까? 다만 비명 소리가 좀
."
"확증은 무슨 확증이야. 사람 찔러 죽이는 데 쓴 열쇠를
자기 방에 가져다 감추어 둔단 말인가?"
"얼마는지 그럴 수 있지요."
그때였다. 웨이터가 다가와 주문을 요청했다.
"여기 뭘 팔지요?"
추경감이 미소진 얼굴로 웨이터를 쳐다보았다. 웨이터는
별 촌스런 사람도 다 보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뭐든지 있습니다. 위스키, 스카치, 꼬냑."
"칵테일 있나요?"
강형사가 물었다.
"얘, 거기 메뉴를 보시죠."
웨이터는 테이블 위에 있는 두툼한 메뉴 책을 가리켰다.
"난 레이디 핑크!"
강형사가 자신 있게 말했다.
"예?"
웨이터는 다소 의외란 듯이 쳐다보았다.
"난 진토닉 한 잔 주게."
추경감이 점잖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안주는 말야, 비프 스테이크를 잘게 썬 것 있지?
아니, 그것 말고 야채 사라다 한 접시."
"알겠습니다."
웨이터는 더 상대를 않고 가버렸다.
"이봐 강형사, 핑크 뭔가 하는 것은 여자가 마시는 술이
야."
추경감이 나직하게 말했다.
"뭐, 칵테일 이름이라고는 그것밖에 모르는데 그럼 어쩝
니까?"
"그 어려운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
추경감이 다시 속삭이듯 말했다.
작년 반포 사건 수사할 때 그 집 사모님과 스카이 라운지
로갔죠. 수사하려고요. 근데 맥주 한 병을 청했더니 그녀
는 못마땅한 얼굴로 레이디 핑크 하지 않겠어요."
"후후후."
추경감이 목소리를 죽이고 웃었다.
"경감님, 웃지 마세요. 지금 우리가 시킨 술값이 얼마나
비싼지나 아세요?"
강형사가 추경감의 기를 죽일 셈으로 술값을 꺼냈다.
"걱정 마. 나 어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 냈단 말
야."
"아이구, 그까짓 보통 카드요? 골드 아니면 여기선 챙피
당하기십상이죠."
"골드야 골드. 걱정 마!"
"아니, 경감님 봉급이 얼마라고 걔들이 골드를 준단 말입
니까? 허허, 그것 참. 나나 경감님이나 쥐꼬리는 마찬가진
데. 나만 골드 안 준 건가."
강형사의 말 끝은 불평으로 흐려졌다.
추경감은 진전 없는 수사를 계속하는 동안 고봉길이 들었
다는 그 비명이 아무래도 걸린다고 생각했다. 고봉길이 거
짓말을 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이리저리 맞추어 보
았으나 영 알 길이 없었다.
고심하던 추경감은 수사의 교훈을 다시 되뇌어 보았다.
막힐 때는 '현장으로 돌아가라.' 그러나 지금은 현장이 보
존되어 있지도 않을 뿐 아니라 남의 집 안방을 함부로 드
나들 수도 없었다.
추경감은 몇번 벼르다가 마침내 고봉식의 허가를 얻고 그
침실을 다시 방문했다. 뾰족한 수가 없을 것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방안은 그때와 별다른 것이 없었다. 화려한 조각 장식이
달린 더블 베드, 추상화가 그려진 나지막한 고급 전기 스
탠드, 나무무늬가 제대로 살아 있어서 우아하게 보이는 화
장대, 그리고 그 화장대 위에 얹힌 수많은 크고 작은 화장
품들은 그대로였다.
침대 위 벽에는 르노와르의 무희 그림이 걸려 있었다.
"저건 진짭니까?"
추경감이 물끄러미 마주앉아 있는 고봉식을 보고 물었다.
"잘 모르겠는데요. 옛날부터 집에 있던 그림인데."
고봉식은 정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저 오디오 세트는 비싼 겁니까?"
침대 발치께에 있는 검은색 스피커와 턴 테이블 등을 보
고 물었다. 앰프와 녹음 테이프, 플레이어 등이 연결되어
있었다.
"아마 싸구려일 겁니다. 마란츤가 뭔가라고 하던데."
고봉식은 그것도 별로 흥미 없어하는 표정이었다.
"스피커는 제이 비 엘이군요."
추경감이 유심히 살폈다.
"그게 좋은 겁니까?"
"그날, 사건이 나던 날말입니다, 여기서 노래가 나오고
있었던가요?"
추경감이 눈을 반짝였다.
"글쎄요. 그날 이후로 나는 이 방에 한번도 들어와 보지
않았어요. 어쩐지 그 여자 혼이 아직 여기 남아 있는 것
같은 섬찝한 생각이 들어서."
고봉식은 정말 겁이 난 듯 몸을 약간 움츠려 보였다.
추경감은 오디오 세트에서 녹음 테이프 하나를 꺼냈다.
다 돌아간 뒤 자동으로 작동이 중지되어 있는 것 같았다.
초동수사를 할 때 누군가한테서 오디오가 켜져 있었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렇지. 가야금 소리가 들렸다고 했지."
추경감이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얘? 가야금이라구요? 그래요. 그놈의 청승맞은 가야금이
뭐 좋은지 맨날 그걸 틀었거든요."
고봉식이 신물난다는 듯이 말했다. 테이프에는 '황병기
제 3 작품집, 가야금 황병기, 목소리 홍신자. 미궁'이라고
쓰여져있었다.
"이것 좀 빌려가도 되겠습니까? 아니, 여기서 틀어봐도
되겠습니까?"
추경감이 그렇게 말하며 다시 테이프를 집어넣었다.
"이것 어떻게 작동합니까?"
추경감이 이것저것 단추를 눌러 보다가 잘 안 되니까 고
봉식을 쳐다보았다.
"글쎄요. 나도 잘 모르는데."
고봉식이 마지못해 다가와 파워 스위치를 넣었다. 그러나
빨간불만 켜졌다 꺼질 뿐이었다.
"걔를 불러야지."
고봉식이 문밖을 향해 소리쳤다.
"봉길아. 일루 와봐."
조금 있다가 고봉길이 들어왔다. 진달래빛 티셔츠에 청바
지를 입고 있었다.
티셔츠에는 검은 글씨로 '민주전공'이라고 쓰여 있었다.
진달래빛은 북쪽의 나라 색깔이라 하여 운동권 학생 중에
통일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이 더러 입던 옷이었다는 것을
추경감은 알고 있었다.
"아, 경감님, 안녕하세요?"
고봉길이 꾸벅 절을 했다.
"그 티이 봉길씨 거요?"
추경감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요. 학교 다닐 때 입딘 꽈티이예요."
"꽈티이?"
추경감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학과에서 공통으로 입는."
"음, 알겠어. 그러니까 그 '민주전공'이라는 것은 '민주
전자공학과'란 뜻이겠구먼."
추경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얘, 이 오디오 좀 틀어봐라."
고봉식이 얼른 일을 끝내고 이 귀찮은 불청객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인 모양이었다.
"이거 테이프가 다 돌아갔잖아."
고봉길이 테이프를 다시 되감은 뒤 오디오를 작동시켰다.
생음악 같은 생생한 가야금 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그건 황병기씨가 75년에 처음 발표해 우리 음악계에 큰
충격을 준 작품 '미궁(迷宮)'이란 겁니다. 가야금의 최저
현을 활로 때려서 진동하는 신비로운 소리를 내지요. 그뿐
아니라 그 신의 목소리는 무용가 홍신자의 목소리와 잘 어
울려요. 여기선 가장 인간다운 인간 한 여류 무용가와 신
이 대화하는 듯한 그런 착각을 일으키게 하지요."
고봉길의 해설을 듣고 있는 동안 가야금 소리는 점점 숨
이 가빠지다가 마침내 빠른 걸음으로 절정의 음계를 치닫
고 있었다. 처음부터 들리던 웃는 소리 같은 것은 마침내
우는 소리로 바뀌고 있었다.
"으악!"
바로 그때였다. 문득 여인의 비명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아니, 바로 저 소리다!"
고봉길이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비명은 곧 그치고 가
야금의 정적인 톤이 흘러나왔다.
여인의 비명은 연주의 톤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이고 고음
이었다. 누군가가 노래 속에 비명을 녹음해 넣어둔 것이
분명했다.
"저거에요. 저건 형수의 비명입니다. 내가 그날 들은 것
이 저 비명입니다."
고봉길이 미친 듯이 소리쳤다.
"아니 정말입니까?"
추경감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틀림없어요. 저 처절하고 가슴을 찢는 듯한 목소리 저겁
니다! 형수의 비명이 저기 녹음된 거예요."
고봉길이 미친 듯이 떠들었다.
"플레이 중에 어떻게 녹음이 됩니까?"
추경감이 고개를 저었다.
"하여튼 저 가슴을 찢는 소리."
고봉길은 양 귀를 움켜싸고 나가 버렸다.
"저 테이프를 내가 좀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추경감이 고봉식에게 청했다.
"뭐가 뭔지 모르지만 필요하시면 가지고 가십시오. 아니,
다시는 듣기 싫으니 경감님이 가지시죠."
추경감은 그것을 가지고 시경으로 돌아와 이 궁리 저 궁
리를 하기 시작했다.
"반장님, 다시 한번 틀어봅시다."
강형사가 포터블 카세트 플레이어를 가지고 왔다.
"아무리 틀어봐야 그게 그걸세."
"그러나 혹시 압니까?"
강형사는 부득부득 카세트 테이프를 집어넣고 스위치를
눌렀다.
귀에 익은 가야금 소리, 홍신자의 육성, 그리고 문제의
비명소리.
"아, 꼭 6분 걸리는군요."
"뭐가 6분이야?"
"이 테이프가 스타트한 지 6분만에 비명이 나옵니다. 그
렇다면 죽이고 나서 이 스위치를 넣고 도망갈 시간이 충분
히 있지요. 6분이면 달아나고도 남고 말고요."
강형사는 위대한 것을 발견한 듯 오른손을 허공에 대고
흔들며 떠들었다.
"살인은 이 테이프에서 비명이 나오기 훨씬 전에 이루어
졌다고 봐야 돼. 6분은 아무 의미가 없단 말야. 법의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6분의 오차는 가려낼 수 없는 거야."
"그거 영 안 풀리네요. 2시간 전에 죽었는데, 발견되기 6
분전 카세트가 작동하고, 6분 뒤 비명이 들리고."
"그보다 누가 그런 장치를 해두었느냐 하는 것이 문제
야."
"그거야 범인이 한 거죠. 그걸 알면 벌써 범인 잡았게
요."
"그 테이프 지문부터 조사해 보라고 해. 지문 채취 끝나
면 과학수사연구로에 보내 음성 등을 분석해 보라고 해."
"이 노래 끝나면 하죠."
"어때, 출출한데 쐬주 한잔."
추경감이 빙그레 웃으며 오른손으로 술잔 기울이는 시늉
을 했다.
"좋죠. 저 길모퉁이에 포장마차 근사한 것 생겼습니다."
"포장마차는 지난 주에 다 철거하지 않았나?"
"헤헤헤, 실내 포장마차라는 것도 있습니다."
그들은 퇴근길의 한잔을 위해 가벼운 발걸음으로 시경을
나섰다.
9. 달라진 세상
며칠 동안 두 사람은 그 '미궁' 테이프에 매달려 있다가
마침내 몇 가지 결론을 얻어냈다.
첫째, 그 테이프는 원래 공테이프였는데 레코드판의 '미
궁' 곡을 녹음한 것이다. 라벨 자리에는 손으로 '황병기의
미궁'이라고 써 넣었는데 그것은 고봉길의 글씨였다.
둘째, 비명의 목리는 성문(聲紋)으로 보아 설희주의 것에
가깝다. 그러나 100프로 설희주의 목소리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세째, 카세트 테이프에서는 여러 명의 지문이 나타났다.
설희주, 고봉길, 고봉식, 정혜와 영혜, 그리고 추경감과
강형사, 그중 추경감과 강형사의 것은 뒤에 만진 것이지
만, 고봉식은 사건 전에 만졌는지, 추경감이 그 집에 다시
가서 그 테이프를 가져올 때 만졌는지 분간하기 어렵다.
네째, 그 테이프에 최초의 녹음, 즉 '미궁'을 녹음한 것
은 고봉길이었고, 설희주가 특히 그 곡을 좋아해서 주었다
는 것을 알아냈다. 따라서 비명은 원래 곡을 녹음할 때 들
어 있는 것이 아니고 뒤에 삽입한 것이 분명했다.
"반장님, 나는 처음부터 고정혜와 정정필 부부가 수상하
다고 보았는데, 이 테이프에까지 고정혜의 지문이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그 로마 칼, 지문, 살인 동기 등 그
여자가 가장유력한 용의자 아닙니까? 어때요, 다시 한번
연행해 올까요?"
강형사의 눈이 반짝였다. 그가 곧 사건이 끝날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고 추경감은 생각했다.
"그것 가지고는 약해. 강형사가 정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들 부부에 대한 방증을 더 조사해 봐."
강형사는 추경감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고 다시 그들 부부
의 그날 행적을 더 세밀하게 더듬기 시작했다.
"그게 아니요, 젊은이. 걔들은 그럴 위인, 아니지 악인이
못돼요. 미운 사람을 죽이고자 할 때는."
고회장은 큰 기침을 두어번 해서 목에 걸린 가래를 뱉어
낸뒤 말을 계속했다.
"강형사라고 했나?"
"예."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자 할 때는 그만한 용기와 결단력
이 있어야 하는 걸세. 정혜와 정필이? 허허허, 걔들은 내
가 잘 알아요. 비겁하고 교양 없고, 결단력 없고 소견머리
없는 애들이요. 누굴 죽일 만한 위인들이 못 돼요."
고회장의 이상한 논리가 그럴 듯하다고 강형사는 생각했
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살인범들을 보아 왔는데,그들은 그
들대로 범인으로서의 특징이 있었다고 생각되었다. 그게
지금 고회장이 말하는 결단력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
각이 들었다.
"회장님 말씀에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건 그렇고,
설희주가 살해되는 바로 그 시각, 즉 그날 오후 4시경 정
혜씨와 정실장은 회장님과 같이 있었다고 주장을 하는데
맞습니까?"
강형사가 벼르고 벼르던 질문을 했다. 추경감이 절대로
그런 직설적인 질문은 하지 말고 방증을 수집하라고 했지
만 이게 더빠른 길이라고 생각했다.
"인정머리없는 애들이에요. 남들은 딸자식이 더 자상하다
고 하던데, 우리 딸년들은 애비가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도 자주 들여다 보지도 않는단 말야."
고회장은 강형사 질문에 답변은 않고 엉뚱한 불평을 했
다.
호텔 브이아이피 룸에 거처를 마련하고, 침실, 거실, 부
엌에 비서방까지 딸린 곳에서 호화 생활을 하면서 '이 고
생'이라고 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한 끼에 수만원씩
하는 식사를 하면서 임시로 가설한 직통 전화 두 대로 업
무 지시를 하고 있었다.
"왜 이 호텔에 계십니까? 저택이 더 편하실 텐데. 살
인사건이 났기 때문입니까?"
강형사가 내친 김에 더 물었다.
"말도 마쇼. 미친 놈들이 일은 안 하고 모두 서울로 기어
올라와 본사 건물을 애워싸고 지랄을 하고 있으니 사무실
에 갈수도 없고."
"댁은."
"사무실에 오는 놈들이 집엔 안 옵니까?"
"왜 그렇습니까?"
"이런 답답한. 당신도 공무원이요? 지금 빨갱이 비스
무리한 놈들이 사방서 설치는 것 모르시오? 물론 우리 회
사 노조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믿지만. 애들이 뭐 철
이 있어야지. 꼭 떠드는 소리가 625 때 완장 찬 놈들 하
는 소리 같아."
"요구 조건이 무엇입니까?"
"늘 하는 얘기지 뭐. 임금을 두 자리 숫자로 올려라, 족
벌 경영 그만두라, 식당 메뉴 개선하라, 뭐 그런 건 다 좋
아요. 아, 이익 나는데 두 자리 아니라 세 가리 숫잔들 왜
못 올리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꼭 그런 건 아니지.
우선 대기업하는 사람들이 물가 걱정해야 하고 나라 경제
걱정해야 하는 것 아니유? 대기업에서 돈 좀 번다고 임금
을 펑펑 올리면 경제가 어떻게 될 거요? 그러니까 적당한
선에서 해결해야지. 가령 노총에서 말하는 도시민 최저 생
계비에 근거한다든가, 금년도 소매 물가상승률을 참고한다
든가 하는, 어떤 사회적 공적 책임 하에 임금이 이룩되어
야 하거든. 받는 사람이야 많이 받을수록 좋다고 하지만
길게 보면 결국 자기 꼬리 잘라 먹는 결과가 되지. 또 족
벌 경영 그만 두라 아우성이지만 그건 자본주의 사회의 특
징 아닌가. 솔직이 말해 자기 자식이 다 똑똑해서 사장감
되는건 아니야. 하지만 나도 아들딸 넷에 사위, 동생, 처
남 등 수십 명의 친척이 있지만 회사일에 관여하는 건 큰
놈과 사위뿐이야. 큰놈은 내 가업을 이어야 하니까 장차
대주주가 될 것이고, 사위야 내가 비서로 데리고 있는데
뭐가 족벌 기업이야? 솔직이 말해 이 그룹 종업원 모두 합
치면 8만명은 될 거야.
그런데 아들하나 사위 하나 관여한다고 그게 족벌 기업이
야? 친척 중 똑똑하고 적성 맞는 사람 있으면 데려다 써야
지 어떻게 할 거야? 식당 개선하라? 우리 식당에서 밥 먹
어 보았소? 원가가 점심 한 끼에 1천2백30원 들어요. 장삿
속으로 하는 무교동 식당 가면 3천5백원짜리요. 그런데 반
찬 나쁘다 밥맛 없다 트집이거든. 나도 2주에 한번씩은 계
열회사 돌아다니며 밥 먹어 본다구. 그런데 이게 뭐 하는
짓들이야? 자기 여편네까지 부사장으로 나오고 사돈의 팔
촌까지 친척이면 모두 한자리씩 하는 우리나라 다른 재벌
에 비하면 뭐가 그리 나쁜가 나쁘길! 솔직이 말해 젊은 시
절부터 허리끈 졸라매고 피땀 흘리며 이룩한 회사야, 이
게. 근데 자기네 회사처럼 어제 그저게 들어온 놈들이 설
쳐대? 덮어 놓고 파업이다, 작업 거부다, 회장은 나와서
해명하라, 이거 뭐하는 짓들인지 모르겠어. 솔직이."
회장은 계속 솔직이란 말을 넣어가며 기염을 토했다. 자
기 말대로라면 노조가 떠들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노조 농성이 겁나 사무실에도 못 가고 호화판 호텔 룸에
숨어 있는 것은 어쩐지 그의 말과 괴리된 무엇이 있는 것
처럼 느껴졌다.
"요즘 젊은이의 사고방식은 회장님 같은 분과 다른 게 많
지요."
강형사는 동조도 거부도 아닌 말을 했다.
"다르면, 사원이 하루 아침에 사장 되고 사장이 죄인 되
는 세상인가!"
"그런 말씀이 아니고. 하여튼 그건 그렇고, 제가 질
문한 것은."
"알고 있어. 며늘아이가 죽는 시간에 딸년과 사위가 나하
고같이 있었다는데 그게 맞느냐는, 말하자면 알리바이를
확인하려는 거지!"
"그렇습니다."
강형사가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정확하게 며늘아이 당한 시간이 그날 몇시인가?"
"오후 5시께입니다."
"정확한가?"
"검시 의사들의 견해입니다. 그러나 다소 오차는 있을 것
입니다만."
고회장은 한참 동안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다가 입
을 열었다.
"그것들이 어처구니없는 짓들을 해가지고 나한테 달려와
보라고 아우성이었어요. 그날 5시반부터 사장단 회의가 있
었는데 그때가 바로 그 시간이었거든."
"댁에서 여기까진 얼마나 걸립니까?"
"아마 4, 50분 걸리지."
"예, 알겠습니다. 그래서요?"
"그게 뭔고 하니 비디오 테이프였지. 자기들이 찍은
."
"무엇을 찍었습니까?"
"괘씸한 것들 같으니라고."
고회장은 얼굴을 찌푸리며 주먹으로 탁자를 쳤다.
"이왕 집안 망신한 거 다 얘기하지. 이것들보다 더 한심
한 건 오래비 고봉식 사장이란 놈이요. 죽은 제 마누라 화
해하라고 보냈더니, 화해는 커녕 밤새도록 쌈박질하고 새
벽에 며늘아기 서울로 쫓다시피 보낸 뒤 뭐 한 줄 아시오?
건너편 호텔에 서울에서 미리 와 있는 비서년하고."
"양경숙씨 말입니까?"
"경숙인지 앙숙인진 몰라도 그년을 불러다 놓고, 나 이거
야 원 낯이 뜨거워서. 제 마누라는 칼에 찔려 죽는 시
간에 그년하고 둘이서. 그 짓 한다고 옷이 나와 밥이
나와? 그건 또 약과요. 딸년 내외도 올케 내외와 화해 좀
하라고 뒤딸려 보내 놨더니 이 물건들은 거기서 뭐한 줄
아시오? 무비 카메라 메구 제 오라비 비서년하고 놀아나는
것 졸졸 졸졸 따라다니며 몰래 비디오 촬영하느라 바빴어
요."
강형사는 입을 딱 벌렸다.
"그것도 한두 장면이 아니고 두 연놈이 오골곈지 지랄인
지 먹는것부터 밥 떠먹여 주는 거 하며, 껴안다시피 해서
자동차 모는 장면 하며, 하여간 찍은 테이프가 몇 통인지
몰라요. 더 낯 뜨거운 장면이 얼마든지 있어요. 무슨 포르
노 영화를 만들기로 작정했는지 그렇게 많이 찍어댔더군.
하여간 인간 말짜들아니오? 내 자식 딸 사위지만 이렇게
더러운 인간 쓰레기들이오. 그것도 남도 아닌 제 오라비며
처남 일을 그렇게 한단 말이오!"
고회장은 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강형사를
한참 쳐다보고 있더니 냉수를 한 컵 따라 꿀꺽꿀꺽 마셨
다.
"근데 그걸 왜 회장님께 가지고 왔나요?"
"글쎄 그것들이 그런 쓰레기들이라니까. 이때까지 뭘 들
었소? 오래비 고봉식이 이렇게 계집질이나 하고 다니는 형
편 없는 사람이니 삭탈관직하고 쫓아내라는 거지. 그리고
이 명왕성 그룹 후계자는 인품 좋고 똑똑한 정정필이 돼야
한다는 거야. 암, 인품 훌륭하고말고. 도둑 촬영이나 고양
이처럼 하고 다녀서 그렇지!"
고회장은 아무래도 화가 나서 못 견디겠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 벽 쪽으로 갔다. 골프 퍼터를 쥐고 공을 굴려 구멍
에 넣는 연습을 했다. 실내용 퍼터 연습기였다.
"따귀부터 한 대 올려 붙이려다가 마침 사람들이 들어와
참았지만, 나이 들고서 처음으로 비통한 기분을 느꼈소.
어쩌면 형제자매간인데 그럴 수가 있단 말이오?"
강형사는 고회장의 말에 거짓은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
다.
"그래 놓고 사위녀석 하는 말이, 저희는 어디까지나 처남
을 깨우쳐서 진보토록 하기 위한 충정에서였다나요. 이놈
들 너희나 진보 많이 하라고 소리를 질러 주었지. 아마 이
러다가 내가 눈이라도 감게 되면 시신에 흙 덮기도 전에
저희끼리 재산 차지하겠다고 개처럼 물고 뜯고 싸움질할
거요. 그런 걸 유식한 말로 골육상쟁이라고 하던가. 그런
걸 생각하면 회사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싶어요. 저
못난 놈들 모두 실업자 만들어 쫄쫄 굶게 하고, 회사 재산
은 모두 장학 재단 같은 데다 내놓아 버리고 말이야."
그 말도 거짓으로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강형사는 호텔을 나오며 몇 가지 정리를 했다.
고회장이라는 사람은 사회에 대한 인식, 노사관 등에 자
기 나름대로의 철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재벌의 총
수라고 해서 무조건 욕심장이 부도덕한 인생관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란 것을 느꼈다.
둘째는 고정혜와 정정필이 그 시간에 거기 갔다면 알리바
이가 성립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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