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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년 된 연변사과배 선조나무 지킴이 되여

합마하물결 | 2017.07.02 16:39:07 댓글: 0 조회: 1469 추천: 0
분류고향풍경 https://life.moyiza.kr/crcnphoto/3407856

해마다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모아산기슭을 하얗게 덮는 만무과원의 사과배꽃은 연변의 산천을 붉게 물들이는 진달래와 함께 이 고장의 봄을 알리는 메시지다. 특히 사과배는 연변의 명물로, 연변 그리고 중국조선족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졌다.

2017년 6월24일,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룡정시 로투구진 소기촌에 수령이 96년 되는 연변사과배의 선조나무가 자라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갔다. 그 곳에서 기자는 연변대학에서 정년퇴직을 하고 고향에 돌아와 나무를 지키고 있는 77세 고령의 리태수선생을 만났으며 그를 통해 연변사과배의 시초에 대해, 90여년 전 이 땅에 처음으로 사과배나무를 심었던 최창호선생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사과배는 가접과수(嫁接果树)로 그 개척자는 최창호(1897-1967)이다.

흔히들 사과배는 ‘사과나무 접가지를 돌배나무에 가접하여 키운 것’으로 알고 있다. 실제로 여러 인터넷포털사이트나 일부 서적들에서는 이같이 설명하고 있으며 여러 문예작품들에서도 이 같은 묘사를 통해 디아스포라인 중국조선족의 민족특성을 비유한다.

“사과가 아니라 조선의 북청에서 가져온 배나무 접가지였습니다.”리태수선생은 이렇게 말하며 자신이 알고 있는 사과배나무의 시초에 관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최창호는 1909년에 조부를 따라 중국 료녕성 안도현 내두산에 이주했으며 1916년에 연길현 로투구진 소기촌에 정착했다. 당시 동생 최범두는 일본에 류학 중이였는데 ‘일본에서도 조선의 배나무가지를 당지 과일나무와 접목해 성공한 사례가 있으니 형님도 한번 해보라’고 제안했다. 1921년, 최범두는 조선 북청에서 우수한 품종의 참배나무가지를 6대 가져왔는데 최창호가 그 것을 김치움에 보관해두었다가 이듬해 4월에 꺼내여 집 뜨락의 돌배나무에 가접했다. 그중 살아남은 것은 세그루, 최창호는 알뜰히 보살펴 1927년에 처음으로 나무에 흰꽃을 피웠다. 달린 과일은 모양이 배 같기도 사과 같기도 했으며 새콤달콤하고 과즙이 풍부해 보통 배들과는 다른 뛰여난 맛이였다.

“그때의 그 세그루에 달린 과일이 바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연변사과배의 시초였습니다. 지금은 아쉽게도 한그루만 살아남았을 뿐입니다.”

말을 하며 리태수선생은 뜰 한켠에 서서 찬연한 해빛 속에 푸른 잎사귀를 펼친 고고한 자태의 배나무를 가리켰다.

“7년 전 제가 고향에 왔을 때 보니 남아있던 한그루마저도 거의 죽어가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꽃이 피지 않았고 싹이 돋아있는 가지가 몇대 없었습니다.”

문득 리태수선생은 이 나무를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하여 친구에게 부탁해 한국에서 생장소 10통을 사들여 부지런히 나무에 주면서 소진해가는 고목의 생명이 다시 푸르게 피여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푸른 산이 병풍처럼 둘러 선 산자락에 비스듬히 서있는 오래된 팔간초가집은 최창호선생의 옛집이다. 오래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찌그러졌고 흙벽이 부서지는 그 집에 머물면서 리태수선생은 3년을 하루와 같이 매일 선조사과배나무를 돌봤다.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아 지난 2013년부터는 드디여 고목에 다시 꽃이 피기 시작했으며 2015년부터는 과일이 달리기 시작했다. 지난해에는 사과배가 적잖게 열려 수확의 기쁨도 아주 컸다.

사실 배의 이름은 처음부터 ‘사과배’가 아니였다. 시원하고 맛도 좋으며 저장하기에도 까다롭지 않은 이 배를 사람들은 ‘참배’ 혹은 ‘큰배’라고 불렀다. 1952년에 국가에서 과수품종을 전면조사하면서 이 배는 새로운 품종으로 인정됐는데 모양새가 사과 같기도 배 같기도 하여 그 이름을 ‘사과배’라 했다.

지난 80여년 동안 사과배는 연변 각 지에 널리 퍼져 연변경제의 기둥산업의 하나로 되였고 중국 3대 배 가운데 하나로 꼽힐만큼 유명해져 국내외에 이름을 널리 알렸다.

여기에는 당연히 사과배의 창시자 최창호의 로고가 가장 크다. 그는 평생을 바쳐 사과배나무를 지켰으며 전지, 과원관리기술, 병충해예방퇴치, 과일의 한항성 등 연구들을 체계적으로 해나감으로써 소기촌에 완전한 규모를 갖춘 질좋은 사과배과수원을 꾸려갔다.

“그 분은 저의 이모부였습니다. 인품도 훌륭했고 또 학식도 대단했지요.” 최창호에 대해 리태수선생은 이렇게 회억했다.

과수원을 갖고 있었던 관계로 최창호는 ‘부농’으로 락인이 찍혀 ‘문화대혁명’기간에는 계급투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나 아낌없이 자신의 고간의 문을 열어 배 고픈 마을사람들에게 량곡을 나눠주고 또 적잖이 장악하고 있는 의술로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주었으며 사람들에게 글공부도 가르쳤는데 이처럼 후한 인품과 덕으로 마을사람들에게는 항상 존중을 받았고 ‘부농’임에도 불구하고 동란의 년대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큰아버지는 다리를 약간 절었고 그때 집에는 말을 못하는 남자가 머슴으로 있었습니다. 큰아버지는 머슴에게 한자(번체자)를 가르쳤지요. 말로 사람과 소통할 수 없으니 글로 소통하라는 뜻이였습니다.”

말을 하며 리태수선생은 후날 자신이 대학에 진학하려는 꿈을 굳히게 된 것도 이모부의 영향이 컸다고 얘기했다.

“큰아버지처럼 이 나무도 정말 파란만장한 세월을 다 겪었지요. 일반 나무가 아닙니다. 우리 민족의 상징이며 령혼 아니겠습니까! 이젠 제가 지켜나가겠습니다.”

앞으로는 자신의 여생을 다 바쳐 나무 지킴이가 되겠다며 리태수선생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글·사진 박진화 기자 /출처:연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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