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전집4-태항산록-(수필)나의 무대생활

더좋은래일 | 2024.05.07 14:46:06 댓글: 0 조회: 102 추천: 1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66766

수필


나의 무대생활


소학교 초급학년때의 일이다. 과외활동으로 연극을 노는데 대가리 큰 아이들이 왕이니 대신이니 장군이니 전령병이니 하는따위의 좋은 역은 다 저희끼리 노나맡다나니 네게는 차례질 역이 없었다. 내가 대번에 눈방울을 굴리며

<<어째 나는 빼놓니?>>

하고 대드니까 그중 큰 녀석-우두머리격이 잠시 생각해보더니 가장 선심이라도 쓰듯이 기상천외의 엉뚱한 역 하나를 나에게 던져주는것이였다.

<<그럼 넌 대궐을 지키는 개역을 맡아라.>>

워낙 철이 없었던 까닭에 나는 그 잘난 배역을 아주 영예롭게 받아들여 지킴개노릇을 충실히 잘하였다. 책상밑에 엎드려있다가 누구나 들어오기만 하면 얼른 네발로 기여나가 <<왕왕!>> 짖었던것이다. 표준어로는 개짖는 소리가 <<멍멍>>이지만 나는 당시 표준어를 몰랐으므로 <<왕왕>> 짖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일본말로는 개짖는 소리가 <<왕왕>>이였다. 중국말로도 역시 <<왕왕>>이였다.

그 영예로운 지킴개역을 맡은 뒤로부터 내 별명은 <<왕왕>>으로 변하여 소문이 널리 퍼졌다. 학교밖에까지 펴져서 <<목동아이>>들까지 나를 보면 <<왕왕!>> 하고 놀려대였다. 당시 우리 고장에서는 집안형편이 구차하여 학교에 못 가는 아이들을 목동아이라고 불렀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성질이 데설궂었던 까닭에 누구나 <<왕왕!>>하고 놀리기만 하면 앞뒤를 재지 않고 불맞은 메돼지 모양 마구 덤벼들어 주먹놀음을 하였다. 하지만 그 결과는 대개-열에 아홉은-나의 패전으로 끝이 났다. 나의 그러한 감투(敢斗)정신은 전투기능으로 안받침되지를 못하였던것이다. 그러니까 울뚝밸만 쓸줄 알았지 쌈질하는 솜씨는 서툴었다는 말이 되는것이다.

중학교때도 학생극에 참네하여 하찮은 역을 더러 맡아보았는데 성공을 거둔적은 한번도 없었다. 한번은 철공장 로동자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여 공장주와 맞서서 파업투쟁을 벌리는 내용의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가 완고파 교장선생에게 흥이 깨지도록 흑평을 들은 일이 있었다.

<<...학생이면 학생답게 학원내의 사건을 취급할게 아니라... 뚱딴지같은 무슨 임금인상이니... 파업투쟁이니... 이게 그래 가당한가? 본 교장은 교내에 그런 불온한 좌익적풍조를 끌어들이는것을 절대루 허용하지 않는다!...>>

이튿날 학생들은 교장실에 돌입하여 교장을 끌어내다 학생들이 끌거니밀거니하는 인력거에 태워가지고 서울거리를 한바퀴 회술레시킨 다음 동대문밖 쓰레기처리장에 내다버렸다.

<<교장을 쓰레기취급.>>

<<학원소동 확대화?>>

<<학생극이 빚어낸 일장의 소요.>>

이런 표제로 각 신문에 보도기사들이 실리자 쓰레기취급을 당한 교장은 사람들 대할 면목이 없어서 당일로 사표를 내고 교육계를 아주 떠나버렸다.

군관학교시절에도 학생극에 참녜하여 웃음거리가 된 일이 있었다.

극중에 두 사람이 마주앉아 술을 마시는 장면이 있는데 원래는 한잔씩만 마시고 곧 다음동작으로 넘어가게 되여있었다. 술은-물론 맹물이다.

<<맹물을 마시니까 기분이 나지 않아 틀려먹었어.>>

<<진짜술을 마시게 하자구, 포도주따위.>>

<<그게 어디 될 소린가!>>

<<그럼 하다못해 설탕물이라두.>>

<<그거야 될수 있겠지.>>

<<설탕물? 예싱(也行)!>>

무대감독과 배우들 사이에 이런 대화가 있은 뒤부터 무대에서 술이라고 마시던 맹물은 달달한 설탕물로 승격을 하였다.

탈은 여기서 났다. 한잔씩 대작을 하고는 곧 일어나서 다른 동작을 해야 할 두 배우량반이 걸상에 엉뎅이를 척 붙이고 앉아서 한잔 또 한잔... 권커니작커니... 한병 <<술>>이 다 들나도록 마셔댄것이다. 바빠난것은 다른 등장인물들이였다. 주역 둘이 눌러붙어 있으니까 다른 사람은 이럴수도 없고 저럴수도 없는 궁지에 빠졌던것이다.

나도 그 사고를 저지른 장본인이 하나였으므로 나중에 비판을 받은것은 물론이다.

(술이 아닌 설탕물에 빠져도 제정신을 잃은 모양이지?)

이와 같이 나의 무대생활은 소학교, 중학교, 군관학교를 통하여 다 곡절이 많았다. 실패의 련속이라고 해도 좋을만하였다. 하지만 성공한 례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항일전쟁시기 나의 무대는 전선으로 옮겨졌다. 상거나 불과 사오백메터 밖에 안되는 일본군의 전호와 중국군의 전호 사이로 옮겨진것이다. 대치한 량국군대의 진지와 진지 사이로 옮겨졌단 말이다. 전방 150메터 거리에서는 일본침략군들이 총가목을 틀어쥐고 대기하고 그리고 후방 250메터 거리에서는 중국군대가 총칼을 거머쥐고 경계하는 가운데 우리의 레파토리는 예정대로 진행이 되였다. 캄캄한 밤인데도 조명은 없었다.

(일본놈들이 쏘아맞추기 좋으라구!)

무대장치도 없었다.

(무대란것이 도시 포탄구뎅이천지의 공지인데 무대장치가 왜 있을가!)

이런 류별난 무대에서 우리는 일본침략군을 상대로 공연을 하였다. 반전(反战)사상을 고취할 목적으로 심상찮은 공연을 하였다. 일본포로들을 시켜서 일본노래도 부르게 하고 또 재미있는 재담도 피로하게 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직접 <<함화(喊话)>>도 웨쳤다. 함화란 가까이 맞선 적군을 와해하기 위하여 큰소리로 들이대는 정치선동사업을 일컫는것이다. 그들의 립장과 행동이 그릇됨을 깨우쳐주고 옳은 길로 나가도록 적극 이끌어주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개막을 알리는 징소리 대신에 수류탄을 터뜨려서 적군의 주의를 끄는것도 <<적전(敌前)무대>>가 아니고서는 볼수 없는 기관(奇观)이였다.

<<일본병사형제들, 안녕히 주무십시오.>>

하고 인사할 대신에 어두운 밤하늘에다 대고 총 몇방을 쏘는것도 랑만적이였다. 좀 무시무시하긴 하지만 그래도 전장다운 랑만이 깃든 취침인사였다.

나의 무대생활은 이같이 다양하면서도 범상찮았다. 하지만 그 에필로그 즉 종막은 더욱 극적이였다.

10년 대동란시기에 나는 마지막 무대를 밟았다. 우리 시내에서는 가장 큰 건물의 하나인 문화궁전에서였다. 나의 최후의 무대는 목에다 무시무시한 죄명을 밝혀적은 판대기를 걸고 그리고 아갈잡이와 뒤결박을 당하고 천여명의 관중들이 웨치는

<<타도하라!>> 소리속에서 재판극을 노는것이였다.

나의 무대생활은 대궐을 지키는 지킴개역으로 시작되여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반혁명현행범>>으로 끝이 났다.

10살에서 60살에 이르는 50년-장장 반세기에 걸친 나의 무대생활은 제대로 엮는다면 그것 자체가 곧 훌륭한 연극이 될만한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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