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마음속에 내가 산다면 15~16

단차 | 2023.11.18 08:40:44 댓글: 0 조회: 253 추천: 1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518568
15. 시작인 듯 아닌 듯


아직 푸르스름한 하늘 아래 큰 벚나무 한 그루가 언덕 위에 외롭게 서 있었다.

그 아래 펼쳐진 언덕길에는 붉은색과 자주색의 양귀비꽃과 파란색과 하얀색의 안개꽃들이 풀숲 사이에서 아침이슬에 젖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한 언덕을 내려다보고 있던 서연은 언덕으로 올라오는 한 남자를 보았다. 

안개를 헤치고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그 남자의 손에는 안개꽃 다발이 들려져 있었다.

그 남자는 서연에게 조용히 다가오더니 이슬을 머금은 꽃다발을 건네주었다. 채 다듬어지지 않은 잎사귀들이 손바닥에 느껴졌다. 

미소 지으며 꽃다발을 받아 든 서연이 남자를 바라보았다. 안개처럼 흐릿한 인상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때, 서연의 시야에 서서히 붉은 오렌지빛과 연한 핑크빛이 어우러지며 물들어 가는 동쪽 하늘이 들어왔다. 

서연은 그녀의 옆에 말없이 서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흐릿한 얼굴이 점점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 본 것 같은 얼굴에서 어딘가 익숙한 느낌의 얼굴도 언뜻 겹쳐 보였다. 

‘대체 누구지?’

고민하던 서연의 귀에 익숙한 알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눈을 뜨고 일어난 서연은 자기 손을 들어서 손바닥을 번갈아 보았다.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꽃다발의 촉감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서연은 꽃다발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싫어했다. 처음 사귄 남자친구가 그녀에게 꽃다발을 주려 한 적이 있었지만 단호히 거절했었다. 

꽃을 싫어해서라기보다는 금방 시들어 버릴 게 뻔히 보여서 갖고 싶지 않았다. 생기를 잃어가는 꽃을 보는 게 썩 유쾌할 것 같지도 않았다.

서연은 인터넷 검색창을 켜고 안개꽃을 검색해 보았다.

꽃말까지 읽어보고 난 서연은 사진을 더 찾아보다가 문득 시간을 지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느닷없이 꿈에 나타나서 꽃다발을 건넨 의문의 남자는 양치할 때까지는 머릿속에서 맴돌다가 현관문을 나서면서 머릿속에서 잊혔다.


조금 이른 시간임에도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보였다. 도로 위에는 자동차와 버스가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부지런히 걷던 서연은 시간을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라면서 전철역으로 뛰어갔다. 이번 전철을 놓치면 20분은 더 기다려야 할 것이었다. 

전철역에 들어서자, 앞만 주시하면서 걷거나 뛰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서연은 전철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다행히 그녀가 탈 전철은 무리 없이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연은 숨을 몰아쉬고 나서, 침착하게 카드를 찍고 개찰구를 통과했다.

그녀의 일상은 늘 그러듯이 출퇴근이 반복되며 별다른 일이 없이 흘러갔다. 분명히 그랬다. 주말에 그와 다시 마주하기 전까지는.

오전 10시 반이 지날 무렵. 
서연과 하은이 공원 뒤에 자리 잡은 배드민턴장으로 들어섰다.

역에서 많이 걸어와야 했지만 그만큼 도시의 소음과 멀어져 있어 그런지 한적하여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조금씩 가을을 맞이하며 물들어 가기 시작한 나무들이 몇몇 보였다. 코트도 여기저기 많이 흩어져 있어서 쾌적하게 치기 좋아 보였다. 

먼저 코트에 달려간 하은이 네트 망을 만지다가 가까이 다가온 서연을 바라보며 웃었다.

“음, 딱 배드민턴 치기 좋은 날씨야.”
“그러네? 바람도 안 불고.”

기대감에 들뜬 하은이 팔을 움직이며 준비운동을 시작했다. 서연도 살짝 뒤로 물러나서 가볍게 준비운동을 했다.

“언니, 이거 해본 적 있다고 했지?”
“응, 전에 쳐본 적 있어.”

서연은 그게 7, 8년 전이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둘은 라켓을 들고 네트를 사이에 두고 섰다. 하은이 싱긋 웃더니 셔틀콕을 던져 올리더니 라켓을 가볍게 휘둘렀다. 

서연은 날아오는 셔틀콕 방향으로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튕겨 나간 셔틀콕이 네트 망에 부딪혀서 바닥에 떨어졌다.

서연이 조금 실망하며 셔틀콕을 줍자, 하은이 괜찮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언니, 날아갈 위치를 신경 쓰면서 하면 더 잘될 거야.”

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셔틀콕을 들고 자리에 돌아왔다.
셔틀콕이 다시 날아올랐다. 이번에는 제대로 넘어갔다.

집중하며 한참 치다 보니 조금씩 감이 잡혀가는 것 같았다. 움직이며 연속 날아오는 셔틀콕을 쳐내고 있던 그녀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셔틀콕이 떨어지면 서로 마주 보며 즐겁게 웃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서연의 힘없는 스윙에 맞은 셔틀콕이 네트 밑으로 들어갔다.

“우리 좀 쉬면 안 돼? 나 더 이상 못하겠어.”
“좋아. 충전 좀 하지 뭐.”

지친 서연과 달리 아직은 힘든 기색이 보이지 않는 하은이 코트 옆의 벤치에 따라와서 앉았다. 

“나 왜 이렇게 힘들지?”
“언니 평소에 운동 하나도 안 하지?”

허를 찌르는 하은의 물음에 서연이 슬며시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오늘 운동 제대로 해보니까 어때? 좋지 않아?”
“좋긴 한데, 더는 무리야. 너는 더 칠 수 있어?”

“물론이지, 아직 얼마 안 쳤잖아.”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하은을 본 서연이 고민했다.

“언니, 걱정하지 마. 내가 이럴 줄 알고 지원군을 불렀어.”
“혹시 재현이? 야, 너 또 말도 없이.”

“다 친구야, 친구. 부담은 노 노해. 오, 뭐야! 말하니 바로 오네.”

하은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서 스포츠 가방을 어깨에 메고 배드민턴장으로 걸어오는 재현이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세트처럼 지민이 같이 걸어오고 있었다.

둘 다 그전에 본 것과는 다르게 편하고 스포티한 차림이었다. 

밝은 컬러감 있는 티셔츠를 입은 재현과는 대비되는 검은 색의 깔끔한 디자인의 운동복 티셔츠를 입은 지민을 보던 하은이 입을 열였다.

“와, 언니! 움직이는 화보야 화보, 물론 지민이 오빠 말한 거야.”
“화보? 그 정도는 아니지 않아?”

먼저 일어나서 그들에게 걸어가는 하은을 보던 서연의 눈에 지민이 담겼다. 

조금 흘러내리던 그의 앞머리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평소에 운동을 좀 하는지 그의 체형은 슬림하면서도 탄탄했다. 

먼저 인사를 나누고 있는 그들 옆에 다가선 서연이 그녀에게 반갑게 먼저 인사를 건네오는 재현에게 살짝 웃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곧이어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 오는 지민의 깊은 갈색 눈동자가 햇살을 반사하며 부드럽게 빛났다. 그전의 만남보다는 묘하게 풀어진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이 착각이었던 양, 다시 무심한 얼굴로 돌아간 그를 본 서연은 왠지 모를 실망감을 느꼈다.



16. 알다가도 모르겠는


두 남자가 코트에서 가볍게 몸을 움직이며 배드민턴을 치고 있었다.
민첩하게 움직이는 라켓에 맞은 셔틀콕이 연신 빠르게 오가며 제법 경기의 구색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다 셔틀콕이 상대방의 바닥 라인 안에 꽂히며 접전이 잠시 멈추기도 했지만, 그 둘은 쉬지 않고 계속 경기를 이어 나갔다.

조금 전에 하은과 하던 것과 같은 운동이 맞나 싶게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서연은 셔틀콕에 배신감마저 느껴졌다. 저렇게 잘 날아갈 수 있는 거였다니.

두 사람의 플레이를 말없이 지켜보던 하은이 감탄하며 입을 열었다.

“저 두 사람, 연습 좀 오래 한 것 같지 않아?”
“응, 잘하는데?”

“그러니까, 점수 내기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팀을 짜서 내기하면 재밌을 것 같은데.”

하은의 말에 서연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피했다.

“하하. 그런데 나는 아직 충전이 안 된 것 같아.”
“그래? 그럼, 구경이라도 하지 뭐. 두구두구~ 두 사람 중 누가 이길 것인가.”

조금은 시무룩한 듯 답한 하은이 다시 눈을 빛내며 둘의 경기를 이어 관람했다.

잠시 후, 두 남자가 서로를 향해 무언의 사인을 주고받더니 벤치로 걸어왔다. 가까이 다가오면서 서연 일행과 눈이 마주친 재현이 손을 들어 보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오래 쳤음에도 지친 기색이 없어 보이는 게 신기했다. 진짜 안 힘든 건지, 아니면 힘든 데도 티를 안 내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벤치에 놓고 간 가방에서 물병을 꺼내서 마시며 잠시 숨을 골랐다.

그 둘을 지켜보던 하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현, 지금 경기 가능해?”
“지금? 좀 불공평한 거 아니야?”

하은이 고개를 저었다.

“응, 아니야. 체급 차이가 있는데 무슨? 지금이야말로 딱 균형이 맞는 거지. 너 혹시 질 것 같아서 그래?”

“그럴 리가? 아직은 어림도 없지. 당장 가자.”

살짝 의욕이 없어 보이던 재현이 하은의 장난스러운 도발에 바로 일어났다.

하은과 걸어가던 재현이 문득 서연이 있는 방향을 힐긋 보고는 다시 코트로 걸어갔다.

조금 전과는 다르게 셔틀콕이 자꾸 방향을 잃고 고꾸라지는가 싶더니 이내 페이스를 찾고 오갔다. 

신나게 라켓을 흔들며 코트에서 뛰어다니는 하은과 그에 적당히 맞춰주는 재현을 바라보던 서연은 자연스럽게 옆 벤치에 앉아있는 지민을 쳐다보았다. 

고개를 돌린 그와 시선이 마주친 서연이 다급히 시선을 돌려 앞을 바라보았으나 풍경이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왜 이래, 나 왜 또 쳐다본 거야.’

친근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왜 자꾸 신경이 쓰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어색한 분위기를 참지 못하는 성격 탓인가 싶어서 조금 무심해져야겠다고 다짐하며 흐린 눈으로 어딘지 모를 곳을 응시했다.

서연은 문득 가까이 다가와 있는 그림자를 보고 고개를 돌렸다.

‘뭐야, 왜 온 거지?’

지민은 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뒤에야 말을 건넸다.

“서연 씨, 같이 배드민턴 칠래요?”
“네? 저는 배드민턴 잘 못 쳐요.”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던 서연이 돌려 거절했지만, 그는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자리만 지키다 가긴 아쉽지 않아요? 오래 할 필요는 없어요.”
“아, 네…….”

갑자기 다가온 지민 때문에 놀란 마음 반, 어색한 마음 반으로 잠시 고민하던 서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따라오는지 확인이라도 하듯 돌아보던 지민과 눈이 마주친 서연은 운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심장이 두근두근 빨리 뛰는 걸 느꼈다. 

서연은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척 그의 시선을 피했다. 어쩐지 손이 차가워지는 걸 느낀 서연이 주먹을 살짝 쥐었다가 펴자, 손이 바르르 떨렸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지민이 가볍게 네트 위로 셔틀콕을 날려서 건네주었다.

“서연 씨가 먼저 보내봐요.”

짧게 심호흡하며 마음을 다잡은 서연이 셔틀콕을 위로 띄웠다.

걱정은 기우인가 싶게 플레이는 무난하게 이어졌다. 그녀를 배려해서 페이스 조절을 해주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빠르게 날아오는 셔틀콕을 미처 받아내지 못한 서연이 뒤로 미끄러져 넘어졌다. 

“아야!”

지민이 일어서지 못하는 서연을 보더니 라켓을 내려놓고 가까이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잡을까 말까 갈등하던 서연이 그의 손을 잡았다. 힘주어 잡는 손이 델 듯이 뜨겁게 느껴졌다.

일어나려던 서연이 너무 갑자기 확 끌어당긴 지민의 힘에 휘청이며 그에게 몸이 기울었다. 하마터면 그에게 안길뻔한 서연이 놀라운 반사신경으로 그의 팔을 꽉 잡고 바로 섰다. 

지민과 시선이 마주친 서연이 너무 가까운 거리에 놀라며 그에게서 손을 와락 떼며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병원 안 가봐도 돼요?”

“네. 괜찮을 것 같아요.”
“진짜 괜찮은 거에요 아니면 그런 것 같은 느낌이에요?”

집요하게 말꼬리를 잡고 물어오는 지민에게 서연은 급히 답했다.

“진짜 괜찮아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지민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가죠. 안 그래도 그만하고 쉬려던 참이었어요.”
“아, 네.”

서연은 저벅저벅 앞서가는 지민의 뒷모습을 보며 따라 걸었다.

“대체 잘해주는 거야, 마는 거야.”

서연이 무심코 혼잣말하다가, 입 밖으로 튀어나온 생각에 놀라며 입을 닫았다.

오늘의 그는 어딘가 달랐다. 거리를 두는 듯하다가도 다가오고, 다가온 것 같다가도 저렇게 혼자 쌩 가버리는 걸 보면 아닌것 같기도 하고. 

원래도 의도가 잘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같이 시간을 보내고 난 뒤에도 더 알기는 커녕 어쩐지 혼란만 더 가중되었다. 

‘아무리 봐도 이상한 사람이야. 아니야, 더 생각하지마.’

서연은 더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꼬리를 무는 생각에 한탄했다.

얼마 안되어 이번에는 조금 지친 얼굴이 된 재현과 하은이 돌아왔다.

“점심이라도 먹을래?”
“아니, 나 지금 뭐 먹으면 되레 토할 것 같아.”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답한 하은이 잠깐 고민하다가 제안했다.

“대신 저녁에 조금 일찍 만날래?”

재현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옆에 있는 서연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 다들 이따가 또 봐.”

얼떨결에 또 저녁 약속까지 생겨버리자, 서연이 눈을 크게 떴다가 끄덕였다. 다시 나와야 한다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혼자 집에서 쓸쓸히 밥을 먹기는 더 싫었다.

그녀는 일단 얼른 집에 가서 씻고 뒹굴뒹굴하고 싶다고 생각하며 전철역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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