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봄날이 올까(26회)

죽으나사나 | 2024.01.09 11:11:25 댓글: 0 조회: 208 추천: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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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스한 봄날이 올까 (26회) 우리의 마지막.

의식이 돌아오면서 안정세를 보인 엄마는 일반실로 옮겨졌다. 유나는 지금은 약 기운에 잠이 든 엄마 옆에 앉아 한창 어릴 때 추억에 빠져 있다가 창밖에 소리를 듣고 정신이 돌아왔다.

“후두두 두둑….”

밖에서는 갑자기 큰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점점 거세게 내리는 비를 멍하니 보던 유나는 머릿속에 갑자기 또 떠오르는 게 있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장님이 혹시 거기에…

도진이가 어디에 있을지 알 거 같았다.

그러나 시선이 다시 엄마한테로 가고 유나는 조용히 다시 의자에 앉았다.

“엄마…”

나지막하게 엄마를 불렀다. 엄마는 깊은 잠이 들었는지 답이 없었다.


“나… 사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엄마 딸이 좋아하는 남자가 얼마나 멋있는 남자인지 알아?“

아무 반응이 없는 엄마를 보며 유나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처음에 혁이를 내 남자친구로 알았나 봐. 걔가 나한테 상처를 줄 가봐 막 태클 걸고 그랬었다? 엄마 딸이 이래봐도 밖에선 꽤 괜찮은 여자인가 봐. 우리 엄마를 닮아서. “

유나는 나오려고 하는 눈물을 겨우겨우 삼켰다.

”예쁜 우리 엄마… 벌써 이렇게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해졌네?  처음 만났던 엄마는 진짜 예뻤는데, 엄만 몰랐지? 지은 아줌마보다 얼굴은 엄마가 훨씬 이쁘다는 거. 몸매는 뭐… 지은 아줌마한테 하나는  양보해 주자.”

유나는 엄마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이렇게 예쁜 엄마를 꼭 내 옆에 모시고 오래오래 못살게 굴 꺼야. 그러니까 내가 말했던 그 남자는 포기하려고 해. 엄마. 나 잘하고 있다고 칭찬을 해줘…”

유나의 얼굴에는 더 이상 참지 못한 눈물이  주르륵 턱까지  흘러내렸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유나는 조용히 그 방에서 나왔다.

“누나. 왜 그래? 무슨 일이 있어?“

엄마 간병 때문에 교대로 밥 먹으러 갔던 혁이가 눈물범벅인 유나를 발견하고 놀라서 다그쳤다.

”아니야. 아무것도. 그냥 엄마를 보니 눈물이 나서 그래.“

유나는 별게 아니라는 표정과 함께 눈물을 슥슥 닦아냈다.

”혁아 미안한데 누나가 몇 시간 외출해도 될까?“

“난 괜찮은데 누나 어디 가게?”

“응… 엄마 수술 결정을 앞두고  따로 마무리할 데가 있어서.”

“어… 그래. 알았어. 조심히 다니고. 일 끝나면 여기 오지 말고 차라리 집에 가서 쉬어. 누나 얼굴이 지금 상태가 말이
아니야.”

“… 그래.”

밖의 인기척을 느끼면서  병실에 누워있던 희애가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유나가 말하는 말이 사실 똑똑히 들렸었다. 처음에는 꿈 속인가 생각했다가 그 말이 점점 또렷하게 들리자 꿈이 아니라 유나가 옆에서 말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슬피 우는 유나 앞에서 차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유나가 나간 걸 확인하고 눈을 천천히 뜬 희애는 처음 보육원에서 만났던 그때가 새록새록 떠올라서 옅은 미소를 지었다.

[희애야. 너 솔직히 말해봐. 저 아이 둘 중 더 마음에 가는 애가 있어? 아까 원장님이 물어보실 때 뭔가 말하려다가 안 했잖아.]

보육원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은이가 집요하게 물어본다. 보육원을 다시 돌아보던 희애는 지은이한테 시선을 돌리며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난 처음부터 그 아이였어.]

[누구?]

[머리 짧은 아이.]

[왜? 난 솔직히 꼭 누구다 하는 게 없이 다 예쁘더라.]

[그렇지. 예쁜 건 당연히 다 예뻐. 근데 그 아이는 뭐랄까… 내가 이 아이가 아니면 안 될 거 같다는 느낌이 들어. 그냥…평생을 옆에 끼고 이뻐해 주고 사랑해 주고 싶어!”

그냥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아이로 키우고 싶어.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게. …

그랬었는데… 그랬었는데…

***

유나는 병원 밖으로 나와  바로 택시 한 대를 잡았다.

“기사님, 가평인데요. 주소는 여기 이쪽으로 가주세요.”

기사한테 휴대폰으로 금방 검색한 주소를 보여드렸다.

하늘은  뚫린 건지 비는 가평으로 가는 내내 많이도 내렸다.

“다 왔습니다. 손님.”

유나는 갖고 있던 우산을 탁 펼쳤다. 이제 거센 비는 지나가고 잔잔한 비만 내리고 있었다.

사실 저번에 도진이랑 갔던 곳은 밤이었고 거의 도진이한테 의지해서 간 거라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 그날 기억들을 되새기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  집에서 나오고 서로 어색해져 말이 없이 걸었지만 도진이랑 같이 있는 내내 그렇게 주변의 공기가 햇살같이 따사로웠다. 그냥 그날은 모든 것이 좋았다.

젖은 바닥을 저벅저벅 소리 내며 걷다 보니 어느새 그때의 그 파란 대문이 보였다.

유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다가 후-하고 크게 뱉었다.

용기가 필요했다.

“딩동-”

한참을 서 있어도 조용하다.

한 번 더 누르려고 벨 가까이 손을 내미는데  덜컹- 하고 자동식 문이 열렸다.

“드르륵-”

문을 열고 조심스레 들어가니 그 보고 싶던 얼굴이 보였다.

생기가 하나도 없이 초점을 잃은 눈동자와 얼마나 울었는지 퉁퉁 부은 빨간 눈… 거칠해진 얼굴, 하얗게 부르튼 입술… 며칠 전에 본 모습이랑 너무 대조되는 그의 상태다.

지금의 심정이 어떤지 알 수 있는 모습…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유나는 애써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최대한 밝은 목소리를 냈다.

“엄청 찾았잖아요! 너무 이기적이야.”

대답 한번 없이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한 도진을 뒤로 한 채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온 유나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사장님. 목말라. 물 주세요.”

도진은 여길 어떻게 왔냐는 표정만 지으면서 그 자리에서 유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에휴… 알았어요. 저 절로 마실게요.”

유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절레 절레 저으며 혼자 주방으로 가서 컵을 들었다.

저런 모습의 도진이를 보니 눈물이 왈칵 쏟아질 거 같았지만 꾹꾹 참았다. 지금은 울면 안 되니.

“여긴… 어떻게 왔어?”

도진이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어떻게 오긴요. 택시 타고 왔죠. 엄청 비싸던데요??”

유나는 대답하면서도  도진이의 얼굴을 더 빤히 쳐다보았다.

“유나야.”

도진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유나는 그의 말이 듣고 싶지 않았다.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제가 사장님한테 까인 거죠? 그날 그렇게 사라진 것도 그렇고. 까여도 보통은 왜 그러는지 말은 해주는데 사장님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실망이에요.”

당돌한 유나의 말에 도진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떨구었다.

“… 미안해.”

“그래서 하는 말인데요. 끝내더라도 마무리는 깔끔하게 하죠. 저는 흐지부지 끝나는 게 딱 질색이라서요. ”

도진은 무슨 뜻인지 몰라 유나를 바라보았다.

“저번에 보려고 했던 공포영화. 그거 인기가 없었는지 벌써 tv에 유료 결제로 나왔더라고요. 보려고 했다가 그날 사라지는 바람에 못 본 거니,  사장님이 결제해 줘요. 저는 꼭 사장님이랑 봐야겠어요.”

유나의 막무가내에 도진은 눈에 하나도  안 들어오는 공포영화를 같이 보게 되었다.

무서운 소리로 쾅쾅 거리는 TV 사운드에 비해 둘은 너무 고요했다.

“완전 웃겨. 저게 뭐야. 하하…”

유나가 갑자기 배를 끌어안고 웃기 시작했다.

“왜 인기가 없었는지 알 거 같네. 뭔 귀신이 저러냐. 하나도 안 무섭고 코믹 같아. 안 그래요?”

유나는 일부러 큰 소리로 말하며 옆에 있는 도진한테 고개를 돌렸다.

도진은 아까부터 한참이나 유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나는 서글픈 그의 눈에서 작은 물방울이 맺히는 걸 발견하였다. 그러나 모른 척 고개를 다시 돌리고는

“아, 재미없어서 못 보겠네. 그날 안 보기를 잘한 거 같아요. 이유가 어쨌든. ”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화장실 다녀올게요.”

그런 얼굴을 하지 마요, 사장님.

그런 얼굴을 하고 있으면 내가 동생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잖아요.
그런데 내가 말하게 되면 우린 여기서 헤어지지를 못하겠죠?

나중에는 동생이 아니란 걸 알게 될 테니…
오늘  조금 슬퍼하고 끝내요.

그땐 제가 옆에 없어도 나아질 거예요…
그럴 거라 믿어요.

화장실 문을 급히 닫고 난 유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참고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몇 분이  지났는지 눈물은 말라서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유나는 거울을 보며 앞머리로 빨개진 눈을 조금이라도 가리려고 애썼다.

화장실 밖에 나와보니 도진은 아직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TV를 마주한 채.

유나는 소파에 놓여있던 가방을 잡고는 도진의 등을 보면서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잘 있어요. 사장님. ”

유나는 짤막한 한마디만 하고 그 집에서 유유히 나와버렸다. 유나의 시선이 그의 몸에서 멀어질 때까지 도진은 등을 돌린 채 그냥 같은 자세였다.

차마 머리를 돌릴 수는 없었겠지. 눈물을 흘리고 있을 테니…

짤막했던 나의 사랑, 잘 있어요.

아픔은 생각보다 짧을 거예요.

사장님. 좋아했어요. 제가 많이…

그렇게 유나는 짤막한 인사와 함께  가버렸고 도진은 그녀가 다 가고 나서 그 현관문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잘 가라는 인사라도 해줄걸. 왜 병신같이 눈물만 쏟아져 내려서는…

오늘이 작별 인사라는 걸 처음에는 몰랐다. 유나의 평소랑 다른 어색한 말투, 행동으로 알았다. 그녀도 알고 있구나… 그래서 끝내려고 온 거구나.

몇 날 며칠을 낮인지 밤인지도  모르게 어두운 방안에 틀어박혀있었다.

우리는 다시 만난다면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마음으로 서로를 대해야 할까, 미칠 지경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유나가 동생이라 했을 때  벌을 받은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벌을 받아야만 했다. 어릴 적 동생을 잃어버린 죗값…

근데 이렇게 가슴이 저리고 아픈 벌인 줄 몰랐을 뿐.

유나가 가고 나서 미친놈처럼 그러고 있은지 며칠이 지났을까,

다미가 이 집으로 찾아왔다. 유나가 떠나면서 알려준 곳이라 했다.

그러면서 이 힘들었던 시간을 종지부를 지을 말을 들었다.

유나가 동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왜 이제야 말해주냐고 다미를 다그쳤었다. 생각해 보면 나랑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휴대폰을 꺼버리고 누구도 모르는 이곳으로 와버렸으니.

폰을 켜니 정 실장과 연락이 다시 닿았었다. 보육원 원장 가족이 연락이 다시 왔었단다. 유품을 정리하면서 그때 누락되었던 서류들을 더 보여줬었는데 거기에 또 다른  이지아라는 이름을 보고 나서 나한테 미안하다고 했다.

괜찮았다. 유나 네가 내 동생이 아니라서 난 다 괜찮았다.

그리고 내 동생 지아가 자신을 잃어버린 오빠한테 준 작은 벌이였다고만 생각했다. 그 슬픔이 아주 잠깐만이라서 다행이었다.

다미는 나한테 곰돌이 목걸이를 주면서 너를 찾지 말라고 했다. 너는 처음부터 내 동생이 아닌 줄 알면서도 떠난 거라고. 잊으라고 했다.

그 말을 한참이나 생각했다.

왜 꼭 그래야만 하는지…
너를 이해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그렇게 그 해 무더운 여름이 지나가고 뼈가 시리는 겨울도 끝나가니 꽃들이 만개하는 봄이 성큼 다가왔다.

벌써 유나가 떠나간 후 두 번째 봄인가…

유나야,

잘 지내지?

내 주위는 그때랑 거의 다를 게 없어. 나는 매일 레스토랑과 집을 오가고 있고 가끔 상준이를 만나기도 해.

그놈 요새 만나는 여자가 있어서 거의 안 만나주려고 하지만 뭐 괜찮아. 상준이도 오랜만에 찾아온 사랑이라 내가 그 정도는 이해해 줄 수 있지.

다미도 여전히 봄만 되면 레스토랑으로 찾아오곤 해. 이제 습관이 되었다나 뭐라나. 근데 그때랑 다른 점은 이제는 그냥 동생으로, 가끔은 친구랑 같이 손님으로 와.  이제 나한테 질렸단다.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부터 날 보는 게 많이 편해졌다고 하더라.

네가 곁에 있다면 같이 벚꽃 구경도 가고 싶은데…
보고 싶다. 유나야.

“사장님, 오늘 저 앞 골목에서 벚꽃축제에 연예인 한 명 온다는데 가서 구경 안 해요?”

화영이가 신나서 레스토랑 밖을 내다보면서 도진한테 묻는다.

“저는 동네 산책이나 가려고요. 지금 쉬는 타임인데 가서 구경해요.”

“네~”

도진은 오늘도 홀로 벚꽃이 만개한 동네를 산책하며 매일 오던 그곳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여기 살던 사람은 이사 갔나요?]

[아니요. 이사는 안 갔는데 언제부턴가 보이지는 않더라고요. 얼마 안 하지만 관리비를 안 밀리고 그냥 내고 있는 걸 봐서는 언젠가는 돌아오겠죠.]

처음에 혹시나 해서 정 실장이 알려주었던 집 주소로 와 보았었다. 이사는 안 갔다고 하니 언젠 가는 돌아오겠지 하면서 도진이가  거의 매일  눈도장을 찍는 곳이다.

도진은 오늘도 와 보았으니 돌아가야지 하고 돌아서려는데 뒤 켠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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