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탐내도 될까? (16회)

죽으나사나 | 2024.02.26 11:08:45 댓글: 0 조회: 260 추천: 2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549836
너를 탐내도 될까? (16회) 얘기 좀 하죠.

다음날,

“하아,”

하정은 긴 밤을 뜬 눈으로 지새웠다. 깊은 한숨과 함께 두통이 심해진 머리를 절로 마사지를 하듯 꾹꾹 누르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러다 밤에 꺼내놓기만 했던 약에 시선을 두었다. 의사가 처방해 준 약. 진통제와 함께 치매의 진행 속도를 늦추어준다는 그 약들. 

어제는 술을 마신 탓에 약을 먹는다고 한들 오히려 안 좋을 듯 싶어서 먹으려다 말았다. 

오늘이 행사 디데이인데 망칠 수는 없으니 컨디션을 최대한 회복해야 해서 약을 집어 들고 입안에 쏟아 넣었다. 

그렇게 침대에 앉아 얼마나 멍 때렸을까. 

단톡방에 불이 붙었는지 알림음이 정신없이 울리기 시작했다. 

***

“아까 그게 무슨 얘기예요? 모델이 쓰러졌다는 게?“

”하, 지들끼리 술 파티가 새벽까지 있었대요. 모델 두 명이 알콜 쇼크가 있었는지 쓰러졌고 지금 메디컬센터에서 수액을 맞고 있어요. 무대에 서지는 못할 듯해요.“

문자를 확인하고 하정이가  급하게 뛰어간 극장 안에는 장 실장과 이 팀장이 안절부절못하고 제자리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모델 지망생들을 데리고 온 게 문제일까요? 어떡하죠? 팀장님.”

“두 명이나 빠지면 무대가 너무 확 비어 보일 텐데, 하아.. 미치겠다.“

이 팀장의 얼굴이 점점 잿빛으로 변해갔다. 
이런저런 상황은 예측을 했어도 무대에 인원이 빌 거란 생각은 안 하고 있었다. 망망대해인 바다 중간에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를 데려올 수도 없는 상황이니…

이 팀장이 여기저기 눈을 굴리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 극장 스크린 앞에서 다른 스태프랑 같이 조명을 설치하고 있는 서울이한테로 시선이 멈추었다. 

처음부터 쇼에 필요한 스태프가 부족했었다. 권대표는 처음 받아들였던 예산과 인원에 커트를 쳤고 부족한 부분은 충당해 주지는 않았다. 패션쇼라는 게 꽤 많은 스태프들과 여러 명의 모델로 인해 인원이 상당히 필요한 행사인데 그걸 충당을 안 해주었으니 소수의 인원들만 부랴부랴 바쁘게 움직였었다. 

그러다 리더스 회사 측에서 인원 몇 명을 무대 설치 스태프로 보내고 싶어 했다. 본부장 허락을 받았고 온 직원 중 한 명이 박서울이었다. 

어제 수트를 차려입은 모습도 당연히 우월한 자태를 뽐냈지만 저렇게 내추럴한 캐주얼을 입은 모습도 눈에 확 띄는 서울이. 

일하느라 바쁘게  움직이는 서울을 한참이나 유심히 바라보던 이 팀장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네? 서울 씨를 무대에 서게 하겠다고요?”

긴급으로 할 얘기가 있다길래 무슨 내용인가 했더니 서울을 모델로 세우겠다는 이 팀장이 금방 내린 결론이었다. 

“네. 저기 봐요. 웬만한 모델 지망생보다 더 우월하지 않나요?”

이 팀장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긴 기럭지의 서울이가 무대 꾸미는 데에 집중을 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긴 한데… 그래도 VIP분들이 올 수도 있는 자리에서 완전 아마추어인 사람을 무대에 세운다는 건 …”

장 실장이 신뢰가 안 간다는 듯 뒷말을 흐렸다. 그러자 이 팀장이 빙글 웃어 보였다. 

“우리 이번 패션쇼 왠지 예감이 좋아요. 왜 그런지 알아요?“

이 팀장은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러는지 키득 웃으며 하정과 장 실장한테 앞으로 모으라는 시늉을 했다. 둘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이 팀장한테 얼굴을 바짝 붙였다. 

”아까 사실 서울 씨한테 상황 설명을 하고 무대에 설 수 있겠냐고 살짝 물어봤는데 무슨 대답을 들었게요?“

”무슨 답을 들었는데요?“

”학생 시절에 모델 알바를 많이 했었대요. 업계에서 캐스팅도 들어왔다는데 거절했었대요.“

“오오~ 진짜요?“

장 실장은 이 극한 상황에도 그새 보석을 찾은 이 팀장한테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감탄을 하였고 하정은 서울이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셋이서 수상하게 속닥거리며 자기 말을 하는 걸 느꼈는지 마침 이들 쪽을 쳐다보고 있던 서울이와 눈이 마주쳤다. 서울은 하정이를 보고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런 서울을 보며 굳어있던 하정이 입꼬리도 슬쩍 올라가며 저도 모르게 손을 흔들었다. 

왜인지 서울이가 하는 제스처를 저도 모르게 따라 하게 되는, 그한테는 그런 마법 같은 힘이 있는 듯했다. 

하정이네까지 합세를 해서 무대 준비는 어느 정도 다 끝났다. 모델들은 극장 좌석 중간중간 있는 통로들을 무대로 삼아 런웨이를 할 것이다. 

원래 예정되었던 인원이 바뀌는 바람에 런웨이 순서는  이 팀장에 의해 조금 바뀌었다. 

바로 리허설에 들어간다고 모델들과 이 팀장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하정은 2주간 쫓아다니면서 어깨너머로 본 건 있어도 자기 분야가 아니었던 일인지라 그들한테 필요한 일꾼이 되어주었다. 

“옷이 얘한테 너무 헐렁해. 좀 줄여야겠는데? 핀 어디 갔지? 하아…”

쇼 시작까지 얼마 안 남자 이 팀장이 조바심을 냈다. 

“여기요! 고정 핀 여기 있습니다!”

하정이가 어느새 고정 핀을 담은 박스를 들고 이 팀장 앞에 대령했다. 

“아, 고마워요!”

“여긴 왜 이렇게 미끄러워! 누가 바닥 다시 닦으면 안 돼? 잘못하다간 넘어지겠어!”

바닥의 물기 때문에 넘어질 뻔한 스태프 중 한 명이 짜증을 냈다. 

“제가 하겠습니다!”

하정이는 반사적으로 뛰어가 마른 걸레를 찾아 바닥을 열심히 닦아냈다. 

이 모든 모습을 무표정으로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대표님. 오전에 말씀드렸던 모델 말입니다. 영진 계열사 중 엠케이에서 진행 중인 오디션에 1차 합격을 한 상태더라고요. 대표님 지시대로 실력하고는 상관없이 최종에서 떨구라고 전달을 했습니다.“

이한의 보고를 들으면서도 기혁은 분주한 스태프들 속 유난히 더 바쁘게 떠돌아다니는 하정이한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바삐 움직이던 하정이가 긴장한 기색을 한 서울이 앞에 가더니 뭐라고 속닥속닥한다. 위로를 하는지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기도. 

일관되던 기혁의 눈빛이 서늘하게 식어갔다. 

“아까 이 팀장님한테서 들었는데 부족한 인원은 박서울 씨로 대체한답니다. 전에 모델 알바를 한 적이 있는 청년이랍니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던 이한이가 입을 떼었다. 아까부터 한 곳에만 멈춰 있는 그의 시선이 누구인지 처음에는 몰랐었다. 모델 두 명이나 빠진 패션쇼가 염려되어서 여기저기 유심히 살피는 줄 알았다. 

그러나 기혁이 움직이는 눈길을 따라가보니 그곳엔 항상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리더스 마케팅 윤하정 팀장. 

그러고 보면 권대표가 어제부터 이상하긴 했다. 

아침 일찍 저한테 연락 와서 강은서 라는 여자가 승선을 했는지 빨리 알아보라고 하였고 승선자 중에는 없다고 전하고 나서부턴 지금까지 왜인지 윤하정만 보면 저리 망부석이 되어버렸다. 

어제 하루 종일 권 대표를 따라다니면서 선 내 여러 시설들을 돌아보면서 점검에 들어갔다. 그때마다 윤하정이 눈에 띠였다. 

조식 먹으러 갔을 때, 카페에 갔을 때, 갑판 위 수영장 등 현장 답사 중일 때도 그랬다. 누군가를 찾고 다니는지 계속 두리번거리던 하정이었지만 많은 인파 속에서 이들을 보지 못했다. 

이한도 처음에는 몰랐다가 권대표의 시선을 따라보니 거기엔 윤하정이 있었다. 

그리고 오페라 공연을 갔을 때부터는 윤하정 옆에는 남자가 있었다. 하필이면 또 그들과 그리 멀지 않은 뒷좌석에 앉아서 그 둘이 뭐 하는지 눈에 잘 보였다. 권대표 때문에 이한도 의도적으로 그들을 주목하고 있었다.

오페라를 보면서 뭐가 좋은지 연극 초반에는 서로의 귀에 대고 속닥속닥했고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러다 연극이 고조로 들어가면서 무대에만 집중을 하길래 더는 보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남자는 리더스에서 보낸 직원 중 한 명이었다. 톡 배경에 자기 사진을 올렸던 사람이었는데… 
박서울이라고 했나. 

같은 회사라고 많이 친한가 보네. 

정찬 식당을 들어가려다가 그 둘을 또 보게 되었으니….

기혁이가 갑자기 다른 곳으로 가자고 해서 입구에서 도로 턴을 해버려서 그들이 우리를 발견하기 전이었다.
"저기, 대표님."
같은 곳에 머물렀던 시선을 먼저 거둔 이한이가 입을 열었다.
"쇼 금방 시작합니다. 저쪽 좌석에 가시죠."
***
"짠~~~"
"오늘의 패션쇼는 단언컨대 완벽한 무대였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호프 잔이 테이블 중간에서 크게 부딪히고는 너도 나도 벌컥벌컥 들이켰다. 초장엔 삐끗했던 오늘의 쇼가 완벽하게 마무리가 된 거에 만족하고 모두들 기분이 업 되어있었다.
"서울 씨, 회사원 말고 모델 쪽으로 일하는 게 어때요? 완전 대박."
호들갑 떨기 좋아하는 장 실장이 아닌 항상 시크해 보이던 이 팀장의 감탄사였다.  
"아니에요. 너무 오랜만에 무대에 서보는 거라 스텝도 꼬였는데요 뭘,"
서울이가 말도 안 된다며 손사래를 쳤다.
"나도 모델 런웨이 디테일은 잘 모르겠지만 엄청 멋있어 보였어요. 각이 딱 살아있던데요?"
장 실장도 황홀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들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하정이 역시 모델 워킹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무대 위에 올라섰던 서울이는 아마추어란 생각이 안 들 정도로 완벽한 런웨이를 했다. 처음엔 살짝 어색해 하더니 금방 절제된 무표정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틈틈이 관객들 반응을 보았는데 얼굴 표정들이 좋아 보였다. 

어찌 되었던 영진 그룹과의 계약은 유지되었고 그거에 상응한 쇼도 끝난 건 좋으나,  하정은 최근 2 주간 힘들었지만 나름 정들었던 이분들을 이제는 못 볼 걸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은 그리 즐겁지만은 않았다.
"하정 씨도 고생했어요. 이렇게 막 굴려 먹으려고 우리랑 같은 팀이 된 건 아닌데 오늘 너무 잡다한 일을 많이 했죠? 마무리도 스태프들이랑 같이 하고."
"제가 할 일이었는데요 뭘, 아님 저 할 게 없었어요. 명색에 <크루즈 패션쇼 프로젝트> 팀이었는데 뭐라도 해야죠."
"하핫, 그렇긴 하지만 참 이번 쇼는 시간은 가장 촉박했고  뭐나 부족했지만 좋은 사람들을 만난 덕에 시작에 비해 가장 완벽했던 쇼였어요."
"쇼도 끝났겠다 오늘은 열심히 달려 봅시다~"
"그래요!"
패션쇼 준비로 쌓인 스트레스를 이제야 날려버린 이 팀장과 장 실장이 찰떡 호흡 발언을 하며 잔을 부딪혔다.
"여기 호프 한 잔 더 주세요~"
너도 나도 한잔하면서 분위기는 최고조를 이어갔다.
"술 얼마 안 드시네요?"
마구 들이 퍼붓는 두 사람에 비해 거의 홀짝거리는 옆자리 하정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서울이가 물어왔다.
"아, 몸이 좀 안 좋아서요. 술을 좀 자제하려고요."
"어디요? 많이 아파요?"
아프다는 말에 바로 하정이 이마에 자기 손을 갖다 대려는 서울에 하정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뻘쭘해진 그의 손이 허공에 멈추다 스르륵 내려졌다. 앞에서 술을 마시던 둘은 쇼를 준비하면서 힘들었던 얘기들을 주고받느라 하정이네한테는 관심이 없었다.
"저 좀 화장실요."
하정이가 어색하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밖으로 나섰다. 화장실은 사실 어색한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맘에 던진 말이었고 긴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섰다. 혼자 밤바다 바람이나 느껴봐야겠다고 생각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문은 닫혔고 멍하니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리기를 기다렸다.
아까 쇼 진행 중 권 대표를 보았었다. 착각이었겠지만 눈이 마주치는 거 같더니 그 뒤로는 옆에 있던 쇼를 구경하러 온 여러 사람들과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는 생각해 보니 하정이가 다가가고 싶지만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곳에 있었다.
자조적인 웃음을 짓던 하정이가 누군가가 엘리베이터에 들어오자 고개를 구석으로 돌렸다.
얼마 안 가, 띵- 하는 엘리베이터 도착음 소리에 하정은 급하게 내렸다. 그러자 같이 탔던 사람도 내렸다.
어느새 눈가에 서린 이슬을 누구한테라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이건 절대 슬퍼서 맺힌 이슬이 아닌, 억울해서 나온 거니까.
​​
어?...
한 발짝 내밀었던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선상 위로 올라온 줄 알았던 그곳은 하정이가 와봤던 곳이었다. 돌아서서 확인해 보니 엘리베이터 문 위에는 '9' 라고 적혀 있었다.
아... 
그제야 자신은 버튼을 안 누르고 있었다는 걸 자각했다.
다시 올라가야겠네.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버튼을 누르려는데 어느새 저절로 열리는 엘리베이터의 문. 
푹 숙이고 들어가려던 하정이에게 그 밤에 느꼈던 묵직한 향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그 사람이다.
하필이면,
청순가련한 여자가 바람이라도 맞은 것처럼 눈물을 글썽이던 이때에.
어제부터 하루 종일 대화할 타이밍을 찾고 있었는데 대화는커녕, 어디에 있는지 얼굴도 안 보였는데...
그렇다고 문자로 연락을 하기에는 무서웠고...

만일 자신의 지금 얼굴을 보기라도 하면 얼마나 황당할까,

하정은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라도 할까 얼른 발을 떼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 문은 그대로 닫혔고 하정은 올라타지 못했다. 생각지 않게 그한테 꼭 잡힌 손목 때문에. 

“얘기 좀 하죠.”

풍기는 향수만큼 무거운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추천 (2) 선물 (0명)
IP: ♡.101.♡.169
22,943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보라
2006-08-09
33
63051
죽으나사나
2024-03-31
1
261
죽으나사나
2024-03-28
1
263
죽으나사나
2024-03-26
1
358
죽으나사나
2024-03-24
1
421
죽으나사나
2024-03-20
1
437
죽으나사나
2024-03-19
1
271
죽으나사나
2024-03-18
1
351
나단비
2024-03-17
3
344
죽으나사나
2024-03-17
1
236
죽으나사나
2024-03-16
1
274
죽으나사나
2024-03-15
1
259
죽으나사나
2024-03-14
1
272
나단비
2024-03-14
2
239
죽으나사나
2024-03-13
1
262
죽으나사나
2024-03-12
1
568
죽으나사나
2024-03-12
1
636
죽으나사나
2024-03-11
1
656
죽으나사나
2024-03-11
1
577
죽으나사나
2024-03-10
2
566
죽으나사나
2024-03-10
2
636
나단비
2024-03-09
2
552
죽으나사나
2024-03-09
2
539
죽으나사나
2024-03-08
2
559
죽으나사나
2024-03-07
2
514
죽으나사나
2024-03-06
2
536
죽으나사나
2024-03-05
1
258
나단비
2024-03-04
2
225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