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탐내도 될까? (25회)

죽으나사나 | 2024.03.03 10:31:00 댓글: 2 조회: 228 추천: 1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551295
너를 탐내도 될까? (25회)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아는데요?

“그날은 죄송했어요. 그날 제가 그렇게 무작정 찾아가지만 않았더라면 그런 사진도 안 찍혔을 텐데 정말 죄송합니다.“

매도 먼저 맞는 사람이 낫다고 일단 사과를 해야 했다. 

머리를 숙여 사죄를 하고 조용한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다 한숨을 쉬는 그의 모습이 눈에 담겼다. 

그래, 

나라도 난처할 거 같아. 진짜로 만나는 사람도 아닌 데다가 괜히 이상한 소문만 듣게 하고. 

”제가 어떻게 할까요? 그 기자분 만나서 사실대로 말할까요? 사실은 대표님 여자가 아니라 그냥 하청업체 직원이라고요.“

각오 넘치는 기세로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해명이 필요하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근데 무표정이던 기혁이 눈썹이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오지랖을 떨지 말고 조용히 있어요.“

”아니, 저는 도와드리려고…“

”윤하정 씨, 당신은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쓸데없이 나서서 뭐라도 할 거 같아서 이렇게 보자고 한 겁니다.“

뭐… 쓸데없이?

이 사람이 지금…

미안해서라도 도울 수 있는 게 있으면 돕겠단 말이었는데 이렇게까지 매몰차다니…

”어찌 되었던 제 잘못도 있으니까 이러는 거예요. 뭐라도 해명을 해야 하잖아요.”

마음이 급한 건 나 혼자인가 보다. 앞에 있는 저 남자는 왜 말을 하다 말고 저렇게 조용히 쳐다만 보는 건지. 

그래서 더 조여드는 느낌에 숨이 막혔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 네?”

느릿하게 뗀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윤하정 씨가 나서면 나설수록 그 사람한테는 그리 좋은 일이 아닙니다.“

[소문으로는 권대표님 사모님이 살아계실 때부터 따로 만나는 여자가 있었대. 그래서 이제 그 내연녀를 들이려는 게 아닌가 하는 얘기도 있어.]

정연이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아아,

이제 보니 그 여자랑 나를 착각했나 본데.

맞물린 입술을 꾹 다문 채 그를 쳐다보았다. 

”제대로 해명을 하는 게 서로를 생각하면 깔끔한 편이 아닐까요?“

그 여자를 안 주인으로 들이려면 해명이 더 필요하지 않나요?

이 여자 저 여자로 오해하게 냅두지 말고요. 

”그 사람은 윤하정 씨 해명이 따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네에~ 그러시겠죠. 오래 만나신 사이 같은데 그 정도야 믿어 주겠죠.”

말끝마다 내연녀를 위하는 그를 비꼬았다. 

“그렇게 그 사람만 생각하시는 분인데 크루즈 선에서는 하필이면 저와 헷갈리셨나 봐요. 두 눈 펀히 뜨시고서 어떻게 저랑 헷갈릴 수가 있는지 참, 이해가 안 가네요.”

또박또박 이를 갈았다. 

이런 말을 하려고 여기에 온 게 아닌데,

또 날 선 소리만 나간다. 

“겉은 많이 닮았거든요.”

속은 아니지만,

거의 물 흘러나오듯 바로 튀어나온 기혁이 말이었다. 

”얼마나요?“

”많이.“

“아,”

“불쌍한 사람이에요. 윤하정 씨와는 다르게 힘든 날들을 많이 견뎌냈죠.”

뭐지,

지금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지?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안다고 저런 말을. 

“그래서 사모님 계실 때도 연민으로 만나신 거예요? 불쌍해서?”

뱉고 바로 후회했다. 그러나 부어버린 물은 다시 담을 수가 없었다. 

기혁이 얼굴이 보기 좋게 굳어버렸다. 

“하정 씨한테서 그런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던 기혁이한테서 하정으로 하여금 홱 돌아버릴 결정타가 날아왔다. 

하…

미치겠네. 진짜. 

”저기요, 권대표님. 대표님한테 엄청 소중한 사람인 거 같긴 한데요. 그분이 저 누구냐고 안 묻던가요? 뭐라고 설명을 해드렸어요? 크루즈 선에 있었던 그 일도 알고 있나요?“

기혁이 차가운 얼굴에서 옅은 숨이 흐트러져 나오는 듯했다. 

그래, 

이런 반응을 원했던 거지. 

”대표님 사람 참 기분 나쁘게 하는 재주가 있는 거 아세요?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고 자신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러는 게 얼마나 사람을 당황하게 만드는지 모르죠? 그 사람한테는 안 그러나 보죠? 저만 만만해서 이러는 거 같아서 기분이 엄청 더러워요.“

아무 말 못 하고 있는 기혁을 보고 있으니 고소했다. 

”저번에도 제가 그랬죠. 대표님은 실수 일지 몰라도 난 아니었다고. 지금 여기서 저에게 그 여자랑 비교하면서  뭐라 하는 건 아니지 않나요? 적어도, 적어도…“

내 마음이 어떤지 조금만 눈을 돌려봤더라면. 

”미안해요. 비교하려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거짓말. 

분명히 비교를 했으면서. 

나랑 다르게 힘든 날을 많이 견뎌왔다 그랬으면서. 

이게 비교하는 게 아니면 뭐야…

꼭 어그러진 주먹에 힘이 부쩍 들어갔다. 

”술을 마셔서 실수를 했다는 게 핑계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제 자신이 우습네요. 제가 주제가 넘었어요. 스캔들에 관해서는 입도 뻥긋 안 할 테니 걱정 마시고요. 그럼 이만.“

차갑게 식어가는 차는 입에 대지도 않았다. 

하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또 눈치 없이 눈물이 날 거 같으니 빨리 움직여야 했다. 

말끝마다 그 사람, 그 사람…

그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부러웠다. 

자존심도 없이….

“달칵.”

그 집에서 나오고 문이 닫혔다. 가든지 말든지 관심이 없는지 기혁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 이래야 내가 당신한테 미련을 끊어내지. 이래야…

고개를 누러뜨리니 오늘 곱게 챙겨 입은 블라우스가 눈에 들어왔다. 

예쁘게 보이고 싶었던 마음으로 고르고 또 고르던 옷이었다. 

“지이이이이잉…”

가방 속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발신자는 태국에 있는 엄마였다. 

허, 하고 헛웃음이 나갔다. 

이제야 전화를 하시는구나. 

생일날에도 소식이 없더니….


하정이가 갑자기 제 말만 하고 급히 자리를 떴지만 망부석이 되어버린 기혁은 좀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눈물을 겨우 삼키며 돌아서는 하정을 못 본 건 아니었다. 

그 역시도 알고 있지만 아는 체를 할 수가 없는 건,

이 여자가 은서도 아닌, 은서의 동생이라는 점이었다. 

십여 년 전에 고등학생인 은서를 만나 벌써 32살이 되어버린 그녀. 그녀의 자유를 찾아주기 위해 원치 않은 결혼과 아버지 사업을 이어 받았다. 

그만큼 은서에 대한 자기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알 수가 있었다. 은서는 기혁이한테 여태 변함없는 안식처였다. 

너무 오래 시간을 끌었나…

은서와의 이 흐지부지한 관계를. 

그래서 자신이 잠깐 흔들리고 있는 거라고  여겨졌다. 

“후두두둑…”

거센 소나기가 예고 없이 쏟아부으면서 큰 창문 유리를 세차게 두들겨댔다. 

멍하니 창문에 시선을 두던 기혁은 아까 통화 중 이한이가 하던 말이 떠올라서 신경이 쓰였다. 

[오피스텔 지하주차장에 주차를 하라고 했는데 남들이 알아본다고 근처 공영주차장에 차를 두고 왔답니다. 대표님보다 이번 스캔들에 더 신경 쓰는 거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변장을 한 그녀가 현관에 들어왔을 때 흠칫 놀랐지. 꾹 눌러쓴 모자와 마스크에 비해 화려한 상의는 대칭이 안 되었지만 참 가늠을 할 수 없는 여자인 건 맞았다. 

공영주차장이라 하면…

꽤 걸어야 할 텐데. 

갑자기 내린 비에 그 작은 몸을 피할 우산은 없어 보였다. 

여기까지 생각이 들자 기혁은 현관에 꽂혀있던 우산을 들고 문을 나섰다. 

엘리베이터 앞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엄마 아빠 나한테 너무 한 거 아니야?”

엘리베이터 금방 옆에 있는 비상구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빼꼼 열려 있는 문은 들여다보지 않아도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수가 있었다. 

“내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엄마 아빠의 아들 기일이라고 그 먼 태국에서 또 울고 그랬을 거 아니야.  내 생일을 아들 죽은 날로 했으면 적어도 기억은 해야 되는 거 아냐? 난 엄마가 배 아파서 난 딸이 아니라 그래? 이럴 거면 나를 왜 입양해서 키웠어! 아들의 대체제였어. 나는?!”

꾹꾹 눌러 담아버렸던 모든 걸 쏟아내는 듯했다. 기혁은 비상구 문 옆벽에 기대서 조용히 서있었다. 

그녀가 흐느끼며 울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를 악물고 할 말을 다 하며 마지막 발악을 하는 듯했다. 

“너무해. 나도 엄마 아빠 딸이라고. 흐윽…. 스무 살  되자마자 날 버리고 갔을 때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인정하기 싫었어. 내 기억 속에 있는 가족은 당신들뿐이니까. 근데… 근데 당신들은 날 나만큼 가족으로 안 본다는 게 나한테는 너무 괴로운 일이었어. 이제 나한테 전화도 하지 마요.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하지 말고요. 그래도 성인 될 때까지 기다려줘서 고마워요.”

통화를 끝냈는지 더 이상 말은 없었고 그녀의 흐느끼는 소리가 더 커져갔다. 

한 손에 우산을 들고 있던 기혁은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교육자 집안에 입양을 해서 잘 살고 있었다며,

처음 듣는 말들이었다. 

은서한테서 들었었다. 은서도 그리 알고 그렇게 말했겠지. 

무슨 영문인지 생각을 하며, 한참을 하정의 흐느낌을 들으며 그렇게 서있다가 비상구에서 움직임이 느껴진 기혁은 급히 비상구 반대편으로 갔다. 모퉁이라 숨으면 안 보일 공간이었다. 

기를 쓰고 눈물을 흘리느라 힘도 없는지 터벅터벅 옮기는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좀 있다가 엘리베이터 도착음과 함께 하정은 사라졌다. 

“아, 우산.”

그제야 우산을 못 건네줬다는 걸 깨달았지만 늦어버렸다. 그리고 그리 울던 하정에게 직접 얼굴을 보며 건네줄 수 없을 거 같았다. 

그녀에 대해 뭔가를 놓친 게 있는 게 분명했다. 

이리 영문도 모르고 신경을 쓰고 있을 바엔 정확히 알아야 했다. 이한에게 바로 전화를 걸어서 윤하정과 입양한 부모 사이에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알 수 있을 만큼 최대한 알아오라고 했다. 이한은 왜 그러는지 묻지 않았고 바로 알겠다고 했다. 

***

K 룸살롱.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은서가 곱게 웃으며 룸 안으로 들어온다. 단아한 반올림 머리에 새하얀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꼭 마치 하늘에서 내려주신 천사 같았다. 

“오 이사님. 오랜만이에요.”

오랫동안 봐온 잘 아는 손님이라 진심으로 반가워하는 표정으로 홀로 앉아있는 그 남자한테 다가갔다. 

“오랜만이네요. 6개월 만이죠?”

조용히 앉아 있던 남자는 반가워하는 은서 못지않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은서가 맞은편까지 다가오자 그가 먼저 앉았고 은서도 살포시 소파에 엉덩이를 걸쳤다. 

”스페인 여행은 어땠어요? 좋다는 얘기만 듣고 한 번도 못 가봐서 너무 궁금해요.“

”좋죠. 환상적이었어요. 회사만 아니었다면 거기서 눌러 살았을 거예요.“

남자는 말하면서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황홀했던 스페인의 곳곳을 기억에 떠올리다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너무 부러운걸요. 저도 나중에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에요.“

은서가 부러워하는 눈길을 쏟았다. 

은서 앞에 앉은 이 남자는 J 기업의 임원이다. 
한 5년 전쯤인가, 

이 텐프로에서 거래처와의 술자리가 있었는데 그때 은서와는 처음으로 알 게 되었다. 

여느 남자랑 달리 옆에 말없이 앉아 있는 은서와 눈도 안 섞고 말도 안 했던 남자였다. 조선시대라면 고리타분한 선비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그날은 조용히 술만 따라주다가 오 이사네 일행은 조용히 가버렸다. 

근데 며칠이 지났나, 오 이사 혼자 이 텐프로에 나타났다. 예약은 했다만 1인이라길래 실장 언니가 잘못 체크한 줄로만 알았다. 

그날 은서를 찾았다. 

[그날 제 옆에서 많이 불편했을 거 같아서 신경이 쓰였습니다.]

그날 처음으로 입을 뗀 오 이사의 말을 듣고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리도 순진한 사람이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 후로 오 이사는 시간 날 때면 은서를 종종 찾았다. 

일행은 가끔 한 명 더 있을 때도 있었고 거의 혼자 와서 은서랑 얘기만 조용히 하다 갔다. 

무겁고 쳇바퀴처럼 똑같이 돌아가는 일상의 자그마한 일탈이라 했다. 

“꼭 가보세요. 은서 씨도 반할 곳이 많아요.”

오 이사는 은서가 방금 술을 따라준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시선은 은서한테 잠깐 머물더니 잔을 내려놓으며 이내 궁금한 한마디를 꺼냈다. 

”요즘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봐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은서의 눈이 살짝 커져가는 게 보였다. 

”제가 누굽니까. 하늘로 간 우리 와이프 다음으로 마주 앉은 횟수가 많은 게 은서 씹니다.“

꽤 자신만만한 얼굴을 한 오 이사가 양쪽 팔을 X자로 걸치며 몸을 뒤로 젖혔다. 

그 말에 은서는 또 한 번 픽 하고 웃었다. 

”오 이사님은 진짜 못 말린다니까.“

”그래 요즘 고민이 뭡니까? 이제 은서 씨의 고민거리를 들어봅시다.“

열심히 들어주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몸을 한층 앞으로 기울이는 남자,

오 이사였다.

추천 (1) 선물 (0명)
IP: ♡.214.♡.18
나단비 (♡.252.♡.103) - 2024/03/03 10:39:26

은서와 하정이 둘 다 행복하지 못했던게 안타깝네요.

죽으나사나 (♡.101.♡.242) - 2024/03/03 18:34:39

참 글을 쓰면서 이상한 일들이 많습니다. 분명 처음 시작은 이게 아니었는데 쓰면서 캐릭터들이 변해가고 있다는 게 저로썬 이상할 때가 많습니다. 분명 이 손가락에 의해 만들어진 인물인데,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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