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탐내도 될까? (36회)

죽으나사나 | 2024.03.12 06:11:57 댓글: 45 조회: 635 추천: 1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553261
너를 탐내도 될까? (36회) 미안해. 은서야. 

“언제 오셨어요?”

나른한 눈꺼풀에 힘주어 깜빡이던 은서는 잠결에 느낀 제 손을 꽉 잡은 이가 기혁이란 걸 알아차리고는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근사하던 얼굴에 근심걱정이 가득찼다. 은서는 저한테로 기울어져 있는 기혁의 얼굴에 손을 얹어 감쌌다. 

”저 죽을 병 걸린 거 아니잖아요. 인상 펴요. “

볼에 닿은 은서의 손길이 너무 부드러워서 기혁은 그의 손등을 꼭 잡으며 제 볼에 더 밀착시켰다. 

”은서야. 미안해.“

내어주면 그냥 받기만 하면 될 것을,

맨날 뭐가 그리 미안하고 고마운지 그녀의 마음을 더 깊이 헤아리지 못했다. 

오늘은 두서없이 그 미안함을 표한 건 저 스스로였다. 

해주어야 할 말이 있는데 쉽게 꺼낼 수가 없었고 지금은 그냥 모든 걸 농축시키 듯 그 한마디를 반복했다. 

“뭐가 미안한데요?”

올라간 입매와 함께 의아한 눈빛을 주던 은서가 물어왔다. 

“그냥 다.”

이때, 드륵- 하는 병실 문이 열리더니 우희가 입원수속을 끝내고 들어왔다. 

“은서야!”

그녀는 깨어난 은서를 보고 거의 울먹거리 듯이 소리를 질렀다. 우희가 다가오자 은서의 손을 잡았던 기혁은 살포시 풀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쓰러진 은서를 직접 보고 정신이 없었을 우희한테  옆자리를 내어줄 참이었다. 

그리고 아까부터 주머니에서 연신 울려대는 휴대폰의 진동도 확인을 해봐야했다. 

병실 복도로 나온 기혁은 폰을 꺼내들었다. 

기혁이를 기다리다 못한 폰이 멈추었다. 

<이한>

병원에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왜 이리도 전화를 해대는지, 기혁이 미간이 좁혀졌다. 

그리고 이한에게서 온 문자 한통을 확인하고는 단단하던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대표님. 사모님께서 하정 씨를 댁으로 부르신 거 같습니다.>

젠장,

꾹 닫혔던 입술에서 나지막이 욕이 흘러나왔다. 

어머니가 쓸데없는 일을 벌이려고 한다. 

은서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리 조용하셨던 분이 왜 이 시점에서 갑자기 참견을 하시려는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이한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가 윤하정을 찾은 건 어떻게 알았는데.”

통화연결음이 들리자마자 급한 기혁이가 상대방을 기다릴 새도 없이 먼저 뱉어버렸다. 

“하정 씨가 저한테 전화가 왔었습니다. 집 앞에 처음 보는 세단이 와 있는데 사모님이 하정씨를 한번 보고 싶어한다고 해서 일단 준비를 해야 한다고는 저한테 전화를 했나봅니다.”

“그게 언제야.”

“한시간은 된 듯합니다.”

이한과의 통화는 급하게 끊고 은서와 우희한테 급한 일이 있어서 가봐야 겠다고 했다. 

“얼른 가요. 이모가 곁에 계시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실신까지 한 자신이 깨자마자 몇 마디도 못 한 채 간다는데 투정 한번 안 부리는 은서에 기혁이는 마음 한 켠이 아렸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었다. 

우희한테 은서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전하고 그는 그대로 병실에서 뛰쳐나갔다. 

“무슨 일로 갑자기 저리 당황을 하시지?”

우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기혁의 초조한 행동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회사에 뭔 일이 있으려나…”

혼자 중얼거리는 우희에 은서는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의 뒷모습을 찾아 꾹 닫힌 병실 문을 멍하니 쳐다만 보았다. 

***

얼마 전에 무작정 기혁을 쫓아 왔던 그 저택 앞에서 차가 멈추었다. 

중후한 인상의 기사님이 뒷좌석으로 뛰어 오려고 하자 눈치를 챈 하정이가 급히 차 문을 열고 나왔다. 

“아, 기다리시면 되는데…“

난감해하는 그 분에게 하정은 입매만 살짝 올리고 고맙다고 했다. 

큰 대문이 열리고 크나큰 정원에 들어섰다. 

오목조목 예쁜 꽃들과 여러 크게 쭉 뻗은 나무들, 잘 관리 된 초록 잔디 옆으로 뻗어있는 돌계단을 걸으며 하정은 생각했다. 

왜 나를 찾는 거지. 권대표 어머니가 왜??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렇게 부른 건지 감이 안 잡혔다. 

아무 사이도 아닌데, 

여느 드라마에서처럼 ‘너딴게 왜 우리 아들 옆에서 알짱거리냐‘ 고 따귀를 날리는 게 아닌가 싶으면서 괜스레 입안이 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마중하러 나온 고용인으로 보이는 여자의 뒤를 따라 걸으니 어느새 눈앞에는 진그레이색 현관문이 보였다. 
하정은 떨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극도의 어색함에 닭살까지 돋고 있는 그 장소로 발을 들이밀었다. 

“어서 와요.”

진보라색의 원피스를  곱게 차려 입은 연화가 친히 현관 앞까지 나왔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구에 들어서던 하정은 인자한 미소를 머금은 연화와 마주하자 바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우아함과 기풍을 고루 갖춘 그녀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는 것으로 자신이 초대한 사람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지켰다. 

60이 훨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소파로 먼저 향하는 연화의 발걸음은 가볍고 우아했다. 그런 그녀를 따라간 그 앞으로는 하정이가 소파의 끝자락에만 엉덩이를 살짝 얹고 있었다.
바짝 긴장해 있는 하정을 유심히 지켜보던 연화는 작게 웃었다.
"갑자기 보자고 해서 많이 놀랐죠? 니 깟게 왜 우리 아들을 만나냐면서 뺨을 때릴 생각은 없으니 안심해요."
와,
귀신이다. 
하정이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딸꾹,
정곡을 찔린 하정이는 어느새 딸꾹질을 하고 있었다. 조용한 집안에 그 소리만 들리는 듯해 무척이나 난감했다.
그때 마침,
고용인이 좋은 향을 풍기며 차를 들고 나타났다. 먼저 연화 앞에 올리려고 하자,
"손님부터 드리세요."
하정이 앞에 차가 먼저 놓였다.
딸꾹,
차라도 마셔서 이 놈의 딸꾹질을 멈춰야 했다.
"앗 따거!"
생각보다 많이 뜨거운 차 온도에 하정은 깜짝 놀라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우아하게 찻잔을 들었던 연화가 데인 혓바닥을 낼름 거리는 하정을 보더니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그에 고용인도 하정을 보며 풉 하고 웃다가 난감해하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시치미를 뚝 떼고는 바로 자리를 떠버렸다.
'재밌는 아가씨네.'
연화는  동요없던 제 아들이 왜 갑자기 나타난 이 여자에 관심이 생겼는지 왠지 알 거 같았다. 이제는 저마저도 부담스럽게 커버린 아들이라지만 열달을 고이 모셔서 품었던 제 자식이었다.
말은 안 해도 아들이 어떤 것에 동요하는 지는 잘 알고 있었다. 고집불통은 제 아비를 닮았고 태생적으로 유쾌하고 재밌는 거에 관심이 많던 둘째 아들은 순종적이었던 첫째와는 달리 호기심도 많고 저만의 '재미' 를 찾아 즐겼다.
하늘거리는 예쁜 호랑나비만 보아도 신기하다고 길을 잃을지 언정 끝까지 쫓아가던 아들이었다. 그런 둘째 아들이 걱정 되었던 남편은 10살도 안 되는 아이에게 무서운 사교 관리가 들어가면서 아들은 변했다. 평범한 집안 애들하고 더 이상 가까이 할 수가 없었다. 앞서 형이 제 아비의 말을 거역하는 걸 못 봐서 그런지 둘째는 생각 외로 반항 한번 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들의 여린 감성을 메마른 땅 가르듯 갈라놓은 제 아비와는 과묵해지고 아들은 더 이상 저만의 '재미'를 찾아 다니지 않았다.
그러나 원체 깊은 곳에서부터 자리를 잡고 있던 본성은 언젠가 용수철처럼 튀어나오기 마련이었다.
고리타분함을 싫어하는 건 아들이나 저나 똑같았다.
"이름이 하정이라고 했던가요?"
"네. 윤하정입니다."
연화는 혀를 데일 때 깜짝 놀라면서 멈춘 딸꾹질을 신기해 하며 가슴을 쓸어 내리는 하정을 보고 또 한 번 피식거렸다. 아들과의 사주까지 보고서는 천연덕스럽게 이름을 물었다. 일이 안 풀릴 때 찾아가는 무당이 있었다. 도연을 마지막으로 아들 배필 사주는 본 적이 없었다. 
[사모님, 제가 이런 말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왜요? 울 도연이가 왜요?]
[사모님 며느리는 단명 할 팔잡니다. 둘째 아드님한테는 또 다른 배필이 나타날 겁니다.]
며칠 전에 신당으로 다시 찾아갔다. 사진과 함께 이름, 나이만 알려줬다. 
긴 세월을 빗겨나가지 못한 무당이 주름으로 자글자글한 두 눈을 더 접으며 만족의 고개를 끄덕이었다.
아들의 천생배필이라고 했다.
이름 하나만 묻고 저를 보며 빙그르 미소만 가득 담고 있는 연화를 의아한 눈길로 보던 하정이가 참다 못해 입을 열었다.
"저를 찾으신 이유라도..."
"다름이 아니라 기혁이와는 얼마 동안 만나고 결혼할 생각인가요? 우리 기혁이가 이제 나이가 적지 않아서."
느긋하게 뱉는 그녀의 말에 하정은 제 귀를 의심했다.
결혼?
누구랑.
설마 나랑 권대표??
진짜 아들에게서 떨어지라고 혼쭐 내려던 게 아니었다고?
그것보다 지금 큰 오해를 하는 거 같았다.
"죄송하지만 저희는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커다랗게 떠 있는 두 눈으로 억울하다는 듯 뱉는 그 말에 마냥 미소를 보이던 연화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음..."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더니 이내 입술 끝을 말아올렸다.
"그럼 울 아들과는 요즘 젊은이들 말로 '원나잇' 같은 걸 했나봐요?"
"네에?"
처음 보는 어른한테서 들은 단어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저런 발언을...
혹시, 
그날 밤에 있었던 일을 알고 계시는 건가?
아까보다 더 커진 두 눈은 당장이라도 데굴데굴 굴러 떨어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자기들 일을 누구도 모를 거라 생각하고 있는 하정을 보며 콧웃음이 나갔다. 
외출을 자주 안 하는 요즘은 수행 비서가 따로 하는 일이 있었다.
스캔들 뉴스가  갑자기 터지고 아들 옆에 바짝 붙어 다니는 이한 비서 실장을 불렀다. 시원치 않게 답하는 그를 보니 몇 년 전 그 사건 이후로 아들은 그한테도 제대로 제 모습을 보여주지 않은 거 같았다.
그래서 아들 뒤에 붙여 놓았던 수행 비서한테서 얼마 전에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다. 
저녁 쯤 들어갔던 윤하정이 그날 밤에 아들의 오피스텔에서 안 나왔단다. 
강은서.
그 이름이 자연히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회사는 죽어도 안 들어간다고 제 의지를 굽히지 않던 둘째 아들을 남편 제 마음대로 종용할 수 있게 된 건 그 여자애 덕분이었다.
이제 자리를 잡은 아들 곁에서 처음에는 강은서를 떼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이게 웬걸,
연민이었었나.
아들 집을 가끔 들리기는 하지만 아주 잠깐씩 자리를 함께 하고 바로 가던 그녀였다.
자고로 남자는 지가 좋아하는 여자한테는 만지고 싶다던가. 갖고 싶다는 본능이라는 게 있다.
아들은 처음에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강은서한테 생각보다 그리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거 같지 않았다.
그래서 신경을 안 쓰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지금 이렇게 윤하정이란 여자가 아들 앞에 나타난 거다. 그것도 아들과는 천생 배필이란다.
대가 끊기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아들이 진짜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몇 번이나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꾹꾹 쑤셔 넣었다.
아들의 자존심까지는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
윤하정은 분명히 아들이랑 관계가 있었다. 아니면 깜짝 놀라기 직전에, 그리 얼굴을 붉힐 수가 없었겠지.
"쾅!"
고요한 분위기 속 현관문이 떨어져나가라 열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참지 못한 아들이 여기를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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