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탐내도 될까? (19회)

죽으나사나 | 2024.02.28 13:19:31 댓글: 0 조회: 249 추천: 2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550413
너를 탐내도 될까? (19회) 버킷 리스트.

“뭐라고? 또 그 소리야?”

김 부장이 아침부터 언짢음 가득한 한마디를 뱉는 이유는 다름 아닌 회사로 복귀하자마자 또 사직서를 내민 윤하정 때문이었다. 

“좀만 더 기다리고 있어. 응? 지금은 그만 둘 시기가 아니야.“

”죄송합니다. 사직서 수리해 주세요. 부장님.“

“조금만 더 있으면 회사 시스템도 확 바뀔 거고...”

“네?”

헛것을 말한 듯 부장은 급히 입을 닫아버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또 그리 알고 싶지도 않은 하정이가 다시 단호한 눈빛과 함께 테이블에 사직서를 내려놓고 허리 굽혀 인사하고는 뒤돌아섰다. 

“휴가 줄게. 쉬고 와.”

등 뒤에서 사직서를 수리 안 할 거란 의지가 담긴 김 부장의 한마디와 한숨이 들렸다. 

조용히 부장실에서 나왔다. 

아침부터 바삐 움직이는 마케팅 사무실 안을 쭉 훑어보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여기에 쭉 있었으니 몇 년 차지? 손가락으로 세어보니 햇수로 7년 차다. 눈에 띄지 않는 제일 구석진 자리에서 어느새 햇볕이 제일 잘 드는 중앙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노력을 했던지…

마음이 그리 가볍지는 않았다. 

짐을 대충 싸고 사무실에서 나왔다. 갑자기 왜 그러냐는 동료들과는 길게 인사를 안 했다. 쉬고 싶다고 했다. 

웃기는 건 짐을 싸는데도 다들 잘 쉬다 돌아오라고 한다. 

이번 김포공장 사태로 혼자 많이 힘들었을 거 안다고 했다. 

그만둔다는 말이 이들한테는 장난으로만 들렸다. 

그도 그럴 것이 대표 친척이라도 되는 것마냥 회사에 올인하던 사람이 갑자기 쉬고 싶다는 이유로 그만둔다고 하니 쉽게 믿을 사람은 없어 보였다. 

뭐, 시간이 지나면 어쩔 수없이 수리하겠지. 

무겁던 발걸음이 회사 로비에서 밖에까지 다다르니 점점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하정은 이 생을 바로 마감하진 않을 거다. 

다만 인생 계획 중 첫 번째는 사직서를 내는 거였다. 

일단 첫 번째 클리어. 

하정이 얼굴에는 어느새 옅은 미소가 번졌다. 

***

[저녁에 시간 돼? 만나자.]

[안 될 거 같은데.]

[몇 시에 퇴근해? 내가 데리러 갈게.]

요즘 은서는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 병원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친 고등학교 동창인 준우 때문이다. 
어떻게 지냈었는지, 어디에 사는지, 어디에서 출근하는지 궁금한 게 많은 것도 피곤하고 은서 번호까지 집요하게 물어 매일같이 문자나 전화가 왔다. 

시간이 없다고 하는데도 통하지가 않았다. 무조건 기다리겠다고 하는 바람에 마음 약한 은서가 약속 시간이 꽤 지난 늦은 밤에 약속 장소인 커피숍 앞에서 기웃거렸다. 

갔겠지? 시간이 이리도 많이 지났는데 기다리면 멍청한 거지. 

”왔어?“

“핫!“

커피숍 안을 염탐하고 있는데 귓가에 갑자기 따뜻한 바람이 일렁였다. 고개를 돌리니 화사한 봄같이 미소를 흘리고 있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준우였다. 

”전화를 받고 후딱 다시 오기 잘했네. 오늘 또 널 놓칠 뻔했잖아.“

다행이라는 표정과 함께 가슴을 쓸어내린 준우가 자리에 굳어있는 은서의 등을 커피숍 안으로 살짝 밀었다. 

갔을 거라 생각을 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만 하고 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준우랑 마주 앉아 있다는 게 은서는 꽤 많이 어색했다. 

”이제 퇴근한 거야? 그날은 네가 바빠 보여서 오래 잡아두긴 그랬거든. 너한테 궁금한 게 많아. 은서야.“

찐한 화장과 굴곡적인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검은색 원피스를 입은 은서를 무심코 쳐다보던 준우가 뭔가 생각이 난 듯 눈빛까지 반짝이었다. 

”너 혹시…“

“혹시 뭐?”

은서가 움찔했다. 병원에서 봤던 그날이랑 확연히 다른 모습일 테니. 가게에 있다가 나온 터라 이 야밤에 은서의 모양새는 꽤 눈에 띠였을 거라서 이상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너 피팅 모델 쪽으로 일해? 출퇴근이 일정하지 않은 거 같기도 하고. 지금 보니까 화장이나 차려입은 옷을 보니…“

”아니야.“

단박에 끊어버렸다. 

은서는 준우가 그냥 술집에서 일하냐고 묻는 것보다 더 마음은 안 좋았다. 아니라는 단호박에 준우가 아~, 아니구나.  하면서 조용히 머리를 끄덕이었다.

넌 지금도 참 맑아 보이는구나. 신준우. 

[좋아해. 강은서.]

수능이 끝난 그날 밤. 

친구들과 파티가 있었다. 그중에 준우도 당연히 있었다. 

이제 그들 3학년 내내  괴롭히던 수능이 끝났으니 다들 해탈한 지경까지 이렀다. 누구의 방해도 없는 파티룸을 잡았고 술은 못 마시니 콜라나 주스로 마지막 10대 청춘을 흠뻑 즐겼다. 

그러던 와중에 준우는 모두가 있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앞에 내내 앉아 있던 은서한테 가슴이 철렁이는 말을 꺼냈다. 

[3년 내내 좋아했어. 강은서 너를.]

우우~~. 원래도 활기찼던 룸 안은 금세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찼고 친구들은 둘을 놀리는 감탄사를 한껏 뱉으며 스테인리스 젓가락으로 테이블을  마구 두들겨댔다. 

평소 장난기가 많던 준우의 얼굴은 웃음기 하나 없이 꽤 진중했다. 

은서는 아무 말을 못 한 채 입만 달싹이었고 한참이나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준우의 시선을 마주해야 했다. 

준우가 자신을 좋아할 거라는 건 눈치가 빠른 은서가 모를 리는 없었다. 단지 이렇게 사람들 많은 데서 쑥스럽게 고백을 해 올 줄은 몰랐던 거지. 

그리고 자신 역시 준우를 꽤 오래전부터 좋아하고 있었다. 

[받아줘~. 받아줘~]

친구들이 놀리기 시작했다. 

[하지 마. 얘들아. 나 오늘은 고백만 한 거고 은서 답은 안 들을 거야.]

어느새 입꼬리가 올라간 준우가 자기 귀를 막으며 들뜬 친구들을 진정시켰다. 

[에이~. 10대의 3분의 1이란 긴 세월을 좋아했다는데 은서도 고백에 따른 답을 줘야지. 안 그래? 얘들아.]

친구 중 한 명이 실실 웃으면서 눈치 없이 다른 친구들까지 부추겼다. 그 덕분에 다들 동의한다는 듯 머리를 끄덕이었고,

은서만 난처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은서한테로 향했다. 

답을 듣고 싶지 않다던 준우도 어느새 무척이나 기대를 하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뭐라도 말을 해야만 이 정적 흐르는 분위기가 끝날 거 같았다. 

[몰라. 나보고 어쩌라고~]

얼굴이 확 붉어진 은서가 볼멘소리를 냈다. 친구들은 재미가 없는 은서한테 야유를 보냈고 이내 또 떠들썩한 분위기는 이어갔다. 

둘이 서로 좋아하는 건 친구들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다만 서로 입 밖에 꺼내지 않는 둘한테 뭐 신선감은 없었다. 놀랄 일도 아니고. 둘이 언제 연애를 시작했다고 해도 그리 놀라워할 사람이 없었으니. 

확 달아오른 얼굴의 온도를 식히려면 냉수가 필요했다. 텅 빈 물병을 들어보던 은서가 일어나려고 하자 준우가 그녀의 어깨를 눌러 다시 앉혔다. 

[앉아있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두리뭉실한 답을 한 자신이 원망스럽지도 않은 지 싱긋 웃어 보이며 물병을 들고나가는 준우를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보던 은서의 입가에도 어느새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그때의 그 해맑던 준우를 10년이나 훨씬 지나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은서는 신준우라는 친구를 잊고 살았다. 

생각할 겨를이 없는 하루하루를 보냈었으니 당연했다. 

“넌 어떻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냐? 아니지. 더 성숙하고 예뻐졌다고 해야 하나?”

따뜻함 가득한 눈빛을 한껏 쏘며 준우가 입을 연다. 

은서는 투명한 공기처럼 맑은 준우를 쳐다보다가 이내 작게 웃었다. 

“그대로긴. 나도 늙어. 서른이 넘으니 주름도 생기더라.”

그러는 넌 진짜 그때 그대로인 거 같다. 준우야. 

***

며칠 후,

“대표님. 패션쇼 반응이 뜨겁습니다. Vip분들과 바이어들이 궁금해하고 있어요. 계약을 하고 싶다는 분들이 늘고 있고요. 이대로라면 콜라보 사업은 꽤 성공적입니다.“

기혁이에게 계약 보고서를 내미는 이한의 손짓이 가벼웠다. 말없이 그가 내민 서류를 살피는 기혁이 표정을 살피고는 하려던 말을 더 이어갔다. 

”임원들 기대감이 큽니다. 슬슬 인수합병에 무게를 실어야 할 거 같습니다.“

긍정의 끄덕임인지 모르겠으나 기혁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럼 예정대로 진행하겠습니다.“

”그래.“

짧은 대답과 함께 시계를 들여다보던 기혁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대표님,“

직접 운전하려는지 차 키를 챙기는 모습을 본 이한이가 그를 불렀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혹시 리더스 윤 팀장이랑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무슨 소리를 하고 싶냐는 듯 인상을 살짝 구긴 기혁이가 이한을 힐끔 쳐다보았다. 

기분이 상당히 안 좋을 때 나오는 기혁의 습관 같은 표정이었다. 그 모습에 살짝 기가 죽은 이한은 이미 뱉은 말을 끊을 수는 없는지라 다시 조심히 입을 열었다. 

“그게… 크루즈선에서 대표님의 시선이 쭉 윤 팀장한테 가 있었습니다. 혹시 윤 팀장한테 뭔가를 잘못하신 건 아닌지 해서요. 꽤 이상했거든요. 대표님 행동들이.“

기혁이 눈썹이 씰룩거렸다. 

”이 실장이 잘못 본 거야.“

”아닌데,“

짓눌린 부정에도 이한은 다 들리는 혼잣말로 구시렁댔다. 

이내 서늘한 기혁이 눈길과 마주치고  깨갱 하고 말았지만. 

”인수 합병 뉴스 띄우고 구조조정 인원들 명단 뽑아.“

머릿속 생각은 끝난 건지 이 말을 툭  던진 기혁은 뒤도 안 돌아보고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뭔가가 있는데…”

포기를 모르는 이한이가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금방 내린 지시가 생각나 바로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는 언론사 번호를 눌렀다. 

***

“야! 윤하정! 넌 대체 뭐하다 전화를 그렇게 안 받는 거야! 휴대폰은 장식이야? 왜 꺼놓고 지랄이야!”

휴대폰 가게에서 금방 새 폰으로 바꾸고 원래 번호로 개통되자마자 정연이한테서 부리나케 전화가 걸려왔다. 

받자마자 저리 거친 욕부터 하는 정연이 때문에 민망해 죽을 지경이다. 조용하다 못해 숨 쉬는 소리까지 들리는 휴대폰 가게 안에 있었으니. 하정은 어색한 웃음과 함께 대충 인사를 하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휴대폰 바다에 빠트렸었어. 왜, 나한테 왜 그렇게 연락을 했는데?”

평소 그리 급한 성격이 아닌 정연인데도 전화기 너머에선 씩씩 거리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너 나한테 그따위 메일만 달랑 보내고 연락이 안 되었으니까 그러지!”

”메일? 무슨 메일?“

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하, 이러시겠다? 내가 지금 하나하나 읊어주리?? 우리 만나. 너네 집 근처 그 가게에서 딱 기다려. 나 지금 그쪽으로 갈 거니까.“

통화는 정연에 의해 일방적으로 끊겼다. 

메일이라니? 뭔 메일을 말하는 거지?

하정이 궁금함에 자신이 자주 쓰는 메일함으로 들어갔다. 

수신함은 어느새 또 회사일에 관한 메일이 여러 개 와 있었고 다른 수상한 건 안 보인다. 그럼 발신함에 뭐가 있단 소린가.

정연이한테 메일을 보냈다고? 내가?

가벼운 클릭 하나로 바로 발신함으로 이동되었다. 제목은 ’정연아‘ 로만 끝난, 진짜 정연이 말대로 내가 보낸 메일이 한통 있었다. 

궁금하기도 했지만 이 불길한 예감은 뭘까 싶었다. 

메일을 보낸 시간과 날짜가 왠지 께림찍 했다. 

<6월 30일 오전 1시.>

크루즈 안에 있을 때 보낸 거다. 그것도 나의 기억에도 없는 메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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