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탐내도 될까? (20회)

죽으나사나 | 2024.02.29 12:01:24 댓글: 0 조회: 210 추천: 2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550632
너를 탐내도 될까? (20회)  기억이 안 나. 

“빨리 안 불어? 너 도대체 크루즈 선에서 무슨 짓을 벌인!!… 거야?“

정연이와 만난 장소는 저번에 시끄럽다는 민원이 들어와 쫓기다시피 나왔던 가게였다. 안주가 맛있어서, 아니면 자주 오던 가게라 편해서 둘이 만날 때면  자연스레 모이는 장소였다. 

 또 큰 소리를 내던 정연이가 주위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너 그 메일이 뭔 뜻이냐니까?“

먼저 와 있었던 하정은 아까부터 망부석마냥 자리에 얼어있었지만 정연은 여유부릴 틈을 안 주고 재촉했다. 

”너 자꾸 이러면 나 이 실장님한테 직접 묻는다?“

바로 전화를 걸겠다는 시늉을 하며 폰을 집어들자 그제야 하정이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말이 없이 머리만 절레절레 저으면서 풀린 동공은 영락없이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정연아.“

여전히 또렷하지 않는 눈매로 느긋하게 고개를 돌려 정연이를 마주한 하정이가 천천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어, 왜.“

거친 대답에도 동요가 없이 뭐에 홀린 듯 하정이가 입을 열었다. 

”나 기억이 안 나.“

”뭐가.“

꽤 짜증이 들어 간 어투였다. 

”너한테 그런 메일을 보낸 기억이 없다고! 어떡해? 오정연!“

이번에 소리를 지른 건 하정이었다. 주변을 신경 쓰며 여기저기 둘러보는 건 정연이었다. 

”목소리 낮춰. 이 지지배야. 뭘 잘했다고 네가 큰 소리야.“

정연은 몸을 하정이 앞으로 기울며 낮게 속삭였다. 

”말도 안돼…“

축 처진 어깨 위로 허공에 눈길을 돌린 하정은 현실 부정을 하며 머리를 좌우로 저어댔다. 

”왜, 그날 술 많이 마셨어? 메일을 쓴 기억이 없을 정도면.“

”아니! 딱 두잔 밖에 안 마셨어! 호프 500 두. 잔. 정확히 1000cc를 마신 거지!”

또, 또 목소리가 올라가는 하정이 때문에 정연이는 이를 꽉 깨물었다. 

“목소리 낮춰.”

“어? 어.”

그제야 정신이 조금 드는지 주위를 살피며 하정이도 머리를 끄덕이었다. 

“두 잔에 취했다고?”

“아니. 하나도 안 취했어. 그날은 패션쇼 행사 전 날이라 다들 몸 사렸거든. 진짜 조금만 마시고 다 방으로 들어갔어.”

하정이 꽤 심각한 표정으로 얘기하는 설명에도 정연은 의심의 눈초리를 풀지 않았다. 

”근데도 기억이 안 난다? 나 진짜 치매 맞나봐.“

”뭐?“

혼자 중얼거리는 하정의 치매라는 말에 정연이 한쪽 입꼬리가 삐쭉 올라가더니 너털 웃음을 지었다. 

”야. 윤하정. 너 새벽에 잠결에 나한테 그 메일 보내고 지금 후회 돼서 그러지? 기억이 안 난다는 둥 치매 같다는 둥 이상한 소리 집어 치우고 빨리 설명해. 우리 대표님이랑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네가 우리 대표님을 덮쳤다는 게 사실이냐고.“

병원에서 치매 판정을 받았을 때와 똑같은 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삐——

그래. 29일 밤 난 서울이와 패션쇼 프로젝트 팀원 분들이랑 간단하게 호프 두잔 씩 하고 객실로 돌아갔었다. 샤워를 마치고 잠이 안 와서 TV를 틀었었고 재밌는 게 없어서 끄고 난 뒤 눈을 감고 안 오는 잠을 청했다. 

와이파이만 되는 크루즈 전용 폰을 만졌던 기억도 있었다. 

근데 언제 정연이한테 메일까지 보낸 건지 기억이 안 난다. 새벽 1시에 뭐하러 그런 메일을 보내서는! 

나 혼자 잊으면 될 일을 굳이 이 절친한테 그 날 일을 곱씹으며 설명하게 생겼다. 

바보 같은 ….

하,

한숨이 나갔다. 

<정연아,

내 친구 정연아. 나한테 왜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해갖고 날 이리 비참하게 만드냐. 역시 내 친구 오정연!!

권기혁 대표가 나한테 관심이 있을 거란 너의 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믿고 싶었던 내가 미친 뇬이지. 

미안하다. 정연아. 

나 너네 대표 덮쳤다………..>

편지 내용은 수많은 점을 마지막으로 정연이한테 메일이 보내졌다. 

덮쳤다는 말로 딱 끊었으니 정연이가 미치고 팔짝 뛸 일은 맞았다. 

“잤니? 우리 대표님이랑??”

미간을 좁히며 초롱해진 눈으로 가깝게 다가온 정연이. 

“어, 잠은 잤지. 술 기운 때문인지 너무 졸렸 거든.”

“오호~ 술을 마셨다아? 대표님도 마셨어?”

“어, 마신 거 같았어.”

술 냄새가 났 거든. 

“네가 먼저 어떻게 덮쳤는데? 아니, 어떻게 너랑 애초에  같은 방에 있은 거야? 아니, 그 천년 묵은 얼음 왕이 네가 덮친다고 쉽게 녹여지던!??”

정연은 궁금한 게 많았다. 한번에 다 안 불면 죽이겠다는 심산이었다. 호기심 가득한 두 눈에서는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었다. 

제발,

정연아. 제발 묻지 말아다오….

내가 미안하다. 친구야. 

하정은 괴로움에 자신의 머리를 웅켜잡았다. 

애써 잊고 있었던 욕망에 들끓던 그의 눈빛을 또 한번 상기 해야 되다니…

“그게… 있잖아. 정연아.”

“어.”

어느새 팔짱을 끼고 앉아있던 정연이가 한 글자만 툭 뱉으며 답했다. 

“그냥 있잖아.”

“어.”

점점 구겨지는 정연이 얼굴을 보며 하정은 눈을 찔끈 감았다가 떴다. 피한다고 포기를 할 정연이가 아니었다. 

“그냥 키스만 하고 잤어. 됐냐?”

메일을 보냈단 기억조차 없는 걸 봐서는 이제는 술 같은 거 마시면 안 될 거 같다는 생각이었는데 습관적으로 호프 두 잔을 주문한 정연이 때문에 또 벌컥벌컥 호프를 들이켰다. 

“키스만? 근데 우리 대표님이랑 키스를 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도발 아니야? 네가 먼저 덮쳤다며?”

“어…. 내가 도발을 했네.”

근데 방으로 발을 밀어넣은 건 너네 대표였어. 
아, 맞다. 다른 사람으로 착각을 했다고 했지. 
나라는 걸 알았다면 안 들어왔겠지. 

하,

기분이 드럽게 나쁘네. 

하정은 잡치는 기분을 이루 말할 수 없어 연거푸 호프를 들이켰다. 

***

“실장님은 오늘 일찍 들어가 보겠다면서  가게를 맡기고 나가셨어요.”

“아까 통화하시는 걸 살짝 들었는데 얼마 전에 동창 한 분을 만나신 거 같더라고요. 자꾸 전화를 한다고 귀찮아하시더니 그래도 좋으신가봐요. 아마 그 분 만나러 가셨을 걸요?”

수미가 난감을 기색을 보이며 오늘도 연락 없이 갑자기 룸살롱으로 찾아 온 기혁이에게 은서가 없다고 알렸고, 이제 들어온지 얼마 안 되는 신입 웨이터가 옆에서 재잘재잘 댔다. 

기혁이 표정을 살피던  수미는 웨이터를 툭 치며 그만 말하라고 눈치를 줬다. 

기혁은 알겠다고 머리를 살짝 끄덕이고는 바로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미리 연락을 했어야 했나…

동창이라니, 은서의 입에서 동창얘기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어떤 동창이지…
다행이네. 그래도. 
밝았던 시절의 친구를 만나서 좋은 시간을 보내길 바래.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운전석에 앉았다. 시동은 바로 걸지 않고 잠시 사색에 잠긴 기혁이. 

3박 4일의 크루즈 선 시범 운항이 끝나고 나름 바빴다. 

승선했던 인원들 중에 대내외 큰 고객들도 있었던지라 여러 계약 제안이 오갔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성을 확고하느라 정신이 없는 몇일을 보냈다. 

뭐, 자신보다 더 열정인 본부장이 있어 자신은 결재에만 신중을 기울였지만. 

근데…

또 그런다. 

머릿속에서 도통 떠나지 않는,

그날 밤 이성을 놓았던  자신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나름 제어가 잘 되는 사람이라고 자부를 해왔다. 

 또 그래왔었으니까.

아니었으면 그 긴 세월동안 은서를 한번도 품에 안지 않았다는 건 말이 안 되긴 했다. 

아무리 마음에 상처가 많은 은서가 안타까워 그렇다고 한들 정상 남자라면 분명히 못 견뎠을 거였다. 

잘 견뎠는데,

그랬는데  이슬을 머금은 그 작은 입술을 내밀며 훅 다가오는데 참지 못했다. 

은서의 얼굴을 하고서는 은서라면 절대 할 리가 없는 서툴지만 적극적인 그 행동들. 

그 순간 만큼은 정신이 돌아버렸다. 

자신의 손을 잡으며 막지 않았다면 그날의 난 은서도 아닌 그녀의 동생이랑….

아찔한 생각에 기혁은 두 눈에 힘을 주다 감아버렸다. 

그러나 눈을 감으니 더 선명해진 그녀의 초롱한 모습이 떠 올라 마음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

“여긴….”

중요한 일이 있으니 꼭 나와달라고 하던 준우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 실장한테 오늘 필요한 예약들에 관해 인계를 하고 약속 장소인 식당으로 왔다. 

주차를 하고 입구에 다다르니 거의 도착한다는 연락을 받았던 준우가 벌써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가자.”

엄청 급해 보이더니 단순히 밥 먹으러 왔다고?

의문이 가득한 은서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으며 준우는 먼저 들어가라고 고개를 까딱했다. 

은서가 가게에 발을 조심히 들이자 어디선가 환호성이 들렸다. 

“와아~ 진짜 은서잖아??”

자연스레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들렸다. 

활짝 웃으며 두 손을 흔드는 여자. 낯익은 얼굴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함을 숨기지 못한 은서가 뒤에 서 있는 준우와 그 여자를 번갈아보았다. 

“너를 우연히 만났다고 하니까 그렇게 너를 보고 싶다고 해서…. 미리 말 못 해서 미안.”

준우의 머쓱한 사과에 당황하며 두 눈동자가 흔들리던 은서는 이내 옅은 미소를 띠며 여자한테로 다가갔다. 

창가 끝 쪽 테이블에 홀로 앉아 있던 여자는  은서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녀를 반겼다. 

은서가 천천히 걸어오자  은서 못지 않게 울컥함을 숨기지 못한 그녀가 은서한테 먼저 다가가 와락 끌어안았다. 

”지독한 강은서!! 여태 뭐하다 이제야 나타난 거야!“

어깨를 들썩이며 울먹이었다. 반가움과 미움이 섞여있었다. 

이 낯익은 얼굴은 은서의 단짝 친구였던 지영이었다. 

하루 아침에 대학생이 아닌, 그것도 남들한테 떳떳하게 말할 수가 없는 직업을 가져야 했던 은서는 모든 이들과 연락을 끊었었다. 번호도 바꾸고 자취를 감추었다. 

이들이 얼마나 당황스러웠고 자신을 궁금해 했을지 잘 알고 있었고, 은서 역시 이들과 어울리고 싶었던 게 한 두번이 아니었다. 

다만,

너무 다른 길을 걷게 될 이들 앞에 당당히 나설 수가 없었다는 게 한탄스러웠다. 

“하나도 안 변했어. 강은서!”

서로 마주 앉은 이들은 서로의 두 손을 꼭 잡았다. 

매일이고 붙어서 같이 공부하고 격려를 했었던 지영이. 

너도 하나도 안 변했어. 그때랑 똑같이 예뻐. 

“은서 네가 갑자기 그렇게 사라지고 나서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알아? 얘가 이럴 애가 아닌데 왜 아무 말도 없이 사라졌는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모르겠단 말이었지!”

지영은 울다가 웃다가 화를 냈다가를 반복하며 정신이 없었다. 어찌 되었던 그거 하나만은 알 수 있었다. 지영은 지금까지 은서를 한번도 잊은 적이 없다는 걸. 

저 자신만 힘들다고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은 게 상대방한테 이 정도의 상처가 되었을 줄 몰랐다. 

“그래서 은서 넌 요즘 뭐해?”

또 기다리지 않은 질문이 은서의 귓속으로 헤집어 들어왔다. 

“그게…. 술 파는 그런 곳…”

“응?”

지영이가 눈을 깜빡이더니 아, 하고 감탄을 했다. 

“호프집 사장이야 설마?“

”응?“

생각지 않은 지영의 추측이었다. 

”호프집이었어? 그런 걸 왜 그렇게 숨겼어. 나한테는?“

준우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사장이라니, 멋있다야. 난 집에서 아기나 키우고 있는 아줌마인데. 은서 너는 결혼 했어?“

호프집이 아닌데 뭐라 해명을 해야 하는데, 하고 머뭇거리고 있다가 지영의 말에 은서가 반색했다. 

“지영이 너 아기도 낳았어?”

“응. 이제 곧 돌 되는 여자아이야. 맨날 정신이 없어. 나만 쫓아다녀서. 내 아이라 이쁘고 귀여워 죽겠는데 너무 자유 시간이 없어. 그래서 은서 너처럼 나와서 일하는 여자들 보면 엄청 부러워.“

“대단하다…”

지영은 은서를 부러워했다. 그러나 지영을 바라보는 은서의 눈은 여느때보다 많이 빛나 보였다. 

“아기 사진 볼 수 있어?”

“당연하지!”

지영은 휴대폰 속 가득한 아기 사진을 보여주었다. 

“와아…”

은서의 입에서 옅은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지영의 폰 안에는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귀여운 아기의 사진이 수두룩 저장되어 있었다. 

은서는 마음 한 구석 어딘가 울컥했다. 

마냥 애 같았던 지영이가 이제 아기 엄마라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은서 넌 결혼했어?”

귀여운 아기 사진에 푹 빠져 있던 은서한테 물어온 건 준우였다. 

은서는 고개를 천천히 들어 준우와 시선을 마주했다. 

결혼….

나한테 결혼은 가당키나 할까?

은서가 쓰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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