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여자친구가 살해되었다 (37회)

죽으나사나 | 2024.01.29 04:55:37 댓글: 0 조회: 181 추천: 1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543836
내 여자친구가 살해되었다. (37회) 연기가 아닌 진짜.


“대답해 주시죠? 남주혁 씨.“

하르가  눈썹만  씰룩거리고 있는 주혁을 다그쳤다.

”한 번도 김기석 감독님 작품에 들어가신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 계약을 하신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그게 그분 따님이랑 연관이 있는 건지 궁금합니다. 시청자 여러분들도 물론 많이 궁금해하실 거 같아요!“

혼자 신이 났네. 났어.

주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천천히 떴다.

”뭔가 오해가 있었던 거 같네요.“

“그러면 감독님 따님이랑 무슨 사이신가요?”

하르가 마이크를 주혁이 앞에 더 갖다 붙였다.

“동생이죠.”

덤덤하면서 잔잔한 호수 같은 간결한 대답.

뻔했다. 주혁이가  어떤 말을 할지는.

그래도 조금이라도 기대를 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어딘가 씁쓸해진 미나의 가슴이 출렁이었다.

”아, 네. 그럼 헛소문에 불과했네요. 죄송합니다. 남주혁 씨.“

카메라 옆 감독의 화난 사인을 확인한 하르는 이내 꼬리를 내리고는 미리 준비했었던 질문들을 하기 시작했다.


“아까 당황했죠? 그 리포터가 좀 이상하네. 어디에서 말도 안 되는 말을 듣고서는 제멋대로…”

인터뷰가 끝나고 대기실에 돌아와 앉은 주혁의 옆을 맴돌며  재잘재잘하는 미나.

“괜찮아. 소문일 뿐이니까.“

꾹 닫혔던 입에서 또 당연한 말이 쏟아져 나왔다.

주혁이의 그 말에 미나도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한참을 눈치를 보던 미나가 갑자기 생각난 게 있는지 아 하는 감탄사와 함께 입을 열었다.

“오빠. 아까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는데 어제 촬영을 끝낸 영화 있잖아요.”

“어.”

뭔 얘기를 하려는지 미나는 좀 난감해하는 표정이었다.

“감독님이 장면 하나만 추가하자고 그러면서 연락이 왔었는데 아주 짧은 장면이라면서 부탁을 하시는데…  인터뷰가 끝나면 연락드린다고 했거든요.”

“그래? 그럼 스케줄 잡아.“

그 감독님 요청은 거절을 할 수가 없지. 이미 여러 번의 작품을 같이 한 적 있는 나한테 좋은 파트너였으니.

”네. 그럼 바로 전화드릴게요.“

다음날,

<오빠. 저 주차장에 들어왔어요. 시간은 아직 많으니까 천천히 준비하고 와요.>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니 미나한테서 문자가 왔다.

촬영 현장까지 4시에 도착하면 되는 건데 역시 열정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하면서 주혁은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느긋하게 있으려고 해도 이미 왔다는데 어쩔 수 없었다. 샤워를 끝내고 바로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오빠~ 안녕~“

오늘따라 더 밝아 보이는 미나다.

”왜 이렇게 빨리 나왔어요? 아직 시간이 많은데.“

그걸 생각하는 사람이면 문자를 하지 말았어야지.

“너도 이미 왔고 어떤 신을 추가했는지 들어도 볼 겸 현장에 일찍 가지 뭐.”

“오케이~”

미나가 당찬 소리를 내면서 시동을 걸었다.

“근데, 오빠.”

“응?”

신호등에 걸려 멈춰 선 바깥에 시선을 고정한 주혁이가 응대를 했다.

“왜 윤월 작가님 작품 거절했어요?“

차량 내 앞 미러를 통해 미나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냥…. 좀 쉬고 싶어서.”

미나는 신호등이 끝나자  엑셀을 꾹 밟았다.

“쉬어야 되는 이유는요?”

아래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는 던진 질문이었다.

난 이제 시작인데, 오빠는 쉬고 싶다고요? 그렇게 열정 넘치게 달리기만 하던 오빠가?

“그리고 제가 알기로는 오빠가 살고 있는 집은 강남인 걸로 알고 있었는데 여긴 누구 집이에요?”

주소가 강남이 아닌 강북이길래 의아했었다.

“여자친구 집.“

운전하랴 미러를 통해 주혁이의 반응을 보랴 바쁘던 미나한테 주혁이의 시선이 꽂혔다.

”… 그럴 거 같긴 했어요.“

참다 참다 오늘에야 물어보긴 했지만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근데 여자친구랑 있었으면 기분이 좋아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생각했던 패기 넘치던 오빠가 아니다.
몇 년을 외국에 나가 있으면서 오빠를 직접 보지 못한 이유일까. 아니면 조명이 꺼진 뒤의 오빠의 모습이 원래 이런 걸까. 너무도 저기압인 주혁 오빠. 다시 만난 첫날부터 지금까지 쭉 그렇다. 이제 1주일도 지났는데 좋아질 기미가 없다.

”혹시 여자친구랑 요새 사이가 안 좋아요?“

“아니.”

주혁은 더 이상 말을 하기 귀찮다는 듯 몸을 뒤로 기대고 눈을 감아버렸다.

그런 주혁을 보면서 미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엑셀을 밟았다.

<영화 촬영 현장>

“어, 주혁 씨, 일찍 왔네.”

“네. 그냥 한 신만 추가되었다고 하길래 어떤 건지 궁금하기도 해서요.”

촬영장에 들어서자마자 바쁘게 움직이던 감독이 주혁을 보고 급하게 다가왔다.

“근데 어떤 내용을 추가하셨죠?”

정확히 들은 바는 없어서…

“아, 옛날 여자친구가 이미 죽은 걸로 나왔잖아. 슬퍼하는 장면들은 많은데 뭔가 좀 아쉬워. 그래서 죽은 여자친구를 직접 발견하고 오열하는  내용을 하나 추가하려고. 그래야 새로운 인연이 어렵게 찾아왔을 때 감정이 더 극대화되겠더라고.”

눈에 확신이 차서 얘기하는 감독의 말을 들으면서 주혁은 어딘가 모르게 마음속 깊이 불안감이 차올랐다.

죽은 여자친구를 발견하고 오열하는 장면?

시나리로는 그랬었다. 남주가 여주랑 인연이 닿게 되는데 분명히 여주를 좋아하면서 마음을 쉽게 열지 못한다. 이유는 꽤 오래전에 만났던  여자친구를 먼저 하늘나라에 보내고 나서 생긴 두려움 같은 거였다.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마지막에 여주랑 잘 되는 내용이다.

“촬영 준비하려면 한 30분은 걸릴 거야. 조금만 쉬고 있어.”

현장 준비는 빨랐다. 여러 스태프들이 소품을 준비하고 상대 여자 배우는 얼굴에 핏기를 없애려고 화장을 하고 있었다.

“주혁 씨도 화장 한번 고칠게요. 슬퍼하는 연기라 얼굴이 좀 상해 보여야 하니.”

주혁 담당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브러시를  들고 앞에 나섰다.

“주혁 씨. 눈을 감아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준비 중인 현장을 바라보던 주혁이가 그제야 긴 속눈썹을 아래로 반쯤 드리웠다.

그러면서도 눈길은 아직도 현장에 있는 걸 발견한 아티스트는 그런 주혁의 눈가에 음영을 넣으면서 입을 열었다.

“이미 끝난 마당에 신 하나 추가한다는 게 좀 그렇죠? 그것도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할 오열 장면이라니….”

아티스트는 주혁이가 감정이입이 안 되어서 그러는 줄 알고 위로를 해보았다.

“준비 다 되었습니다. 남주혁 씨. 이제 들어가시면 됩니다.”

한참을 바쁘게 준비하던 스태프 중 한 명이 뛰어와서 주혁이한테 촬영 시작을 알렸다.

주혁은 많은 스태프들 사이를 지나 현장으로 천천히 발을 들였다.

욕실 살인 사건. 하얀 욕실 바닥엔 무섭게도 빨간 물감이 흥건했고 욕조 안에는 긴 머리를 늘어뜨리운 여배우의 쓰러져있는 모습을 표현했다.

머리가 새하얘졌다. 진짜 죽은 듯 연기하는 여배우의 모습이 블랙홀처럼 주혁이의 시선을 끌었다.

“자. 시작합니다. 레디— 고!“

이때 촬영 시작을 알리는 감독의 말이 울려 퍼졌다.

돌덩어리처럼 굳어버린 주혁은 좀처럼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를 않았다.

짙은 두 눈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고 죽은 연기를 하는 여배우한테서 넋이 나간 듯 시선을 떼지 못했다.

- 어… 이제 다가가야 하는데,

- 남주혁 왜 저러지?

- 감정이입이 안 되나?

스태프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쉿-“

감독이 카메라 화면을 살피며 주변을 조용히 시켰다.

오열하는 장면을 생각한 건 맞는데 지금 이 장면도 그리 나쁜 건 같지 않으니 일단 지켜보는 게 맞는 거 같았다.

주혁이의 눈에서 굵은 이슬이 투둑 떨어졌다. 그 감정이 점점 격해지더니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마는 주혁이.

주변은 정적이 감돌았다.

“컷!!”

감독의 촬영 끝이라는 사인이 떨어졌다.

미리 예상했던 시나리오는 아니지만 이 정도로 충분했다. 감정을 절제하는 이 연기로도 충분했다.

감독의 사인에 쓰러져 있는 연기를 하던 여배우가 천천히 눈을 뜨고 일어났다. 스태프들 도움으로 욕조에서 나오고 밝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했다.

눈물이 차오른 주혁은  다가오는 여배우를 올려다보았다.

“수고하셨어요. 선배. 일어나요. 이제.”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주혁은 손을 잡지 않았다. 점점 더 감정이 격해지는 주혁을 보면서 그녀도 놀라서 자리에 굳어버렸다. 뻗은 손은 잊은 채.

그 고운 눈에서 눈물은 미치게 흘러나왔다.

선…배?

그녀는 이러는 주혁을 이해할 리가 없었다.

죽지 않았어. 죽지 않았다는 걸 아는데…

가슴이 미어지게 아파진다.

애써 괜찮은 척 지켜오던 모든 게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영화 관계자들을 만나 미팅을 하고 촬영을 하였으며, 친구를 만나 밥도 먹고 술도 마셨다.

예전과는 다르게 마음이 많이 무거워졌지만 그냥 한층 성장하는  단계라고 생각했다.

혜주는 어차피 조금만 기다리면 올 거니까 얌전히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을 했다.

괜찮았다. 혜주가 잠깐 없는 이 순간들을 적응도 해 보면서 나름 새로운 경험이라 여겼다.

그런데,

욕조에 빠져 죽은 연기를 하는 그 여배우를  보는 순간,

이참았던 모든 게 터져버리는 느낌이었다.

혜주의 죽음을 보는 거 같았다.

화장로에 혜주의 시신이 들어가고  유골을 바다 중간에 뿌리기까지…

다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그게 다 진짜가 아니라고 부정하고 부정을 해도 그때  절망적이었던 마음은 사그라들지가 않았다.

죽었었던 나의 혜주,
그리고 지금은 사라져버린 혜주.

여전히 내가 닿지 않는 곳에 있는 그녀를 생각하면 도대체 어떤 것이 진짜이고 어떤 것이 가짜인지 구분이 안 간다.

혜주 넌 진짜 살아있기나 한 걸까…

결말이 진짜 바뀐 게 맞기나 한 걸까…

더는 못 참을 거 같은데,

너 없으면 못 살 거 같은데 넌 진짜 내 앞에 다시 나타나기나 하는 거니.

혜주야. 보고 싶다…


“오빠… 괜찮아요?”

한참을 지나 주혁은 진정이 되었고 그의 말대로 강남에 있는 오피스텔로 왔다.

미나는 무척이나 걱정되는 표정을 지으며 주혁을 살폈다.

“어,”

하나도 괜찮아 보이지가 않는데요?

왜 그 정도로 감정 컨트롤이 안되었는지 물으면 말해줄 건가요? 말 안 줄 게 뻔하지만 너무 궁금하네요.

미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 일찍 쉬어요. 저 그럼 이만 갈게요.”

궁금한 게 많았지만 미나는 조용히 그 집에서 나왔다.

마음이 무거웠다. 자신은 갑자기 주혁이의 앞에 나타난 게 아니었다.

5년 전 자신한테 무척이나 잘해주던 그 남자는 그 나이의 미나한테는 전부였었다. 그러다 그 남자가 유명한 감독인 아빠를 둔 덕에 자신을 갖고 놀았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 악마 같은 남자한테서 자신을 구해준 건 주혁이었다. 그 나이에 걸맞게 언제 남자한테 데었었는지도 모르게 또 주혁이한테 빠진 건 사실이었다.

잘해보고 싶어서 신인 배우인 주혁을 아빠한테 소개해 주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여자친구가 있다는 그 말에 대노한 아빠 때문에 저하고도 아빠하고도 돌릴 수가 없는 관계가 되어버렸지만 조금 더 크고 나서 더 성숙된 여자로 주혁을 만나고 싶어서 외국행을 결정했다.

여자친구랑 그냥 만나고 있을 거란 것도 어느 정도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근데 그 이유 하나만으로 포기하기엔 저 혼자의 마음이 너무 깊어버린 걸 느꼈다.

공허한 마음을 학업으로 미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남은 시간은 틈만 나면 검색을 해서 주혁을 찾았다.

뭐 검색을 안 해도 국내 포털사이트에선 자주 메인으로 뜨는 주혁이라 그를 접하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지만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따로 정보를 많이도 수집을 했다. 거의 집착광처럼. 무서울 정도로.

그러다 5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이제는 돌아와야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더 늦으면 아예 기회가 없을 거 같았다.

그래서 최대한 옆에 있으려고 전공도 아닌 매니저란 직업에 이력서를 넣게 되었고 또 운이 좋게 바로 채용되었다.

열심히 해도 안되는 게 많았을 텐데 한국을 뜨기 전에는 감독인 아빠를 따라 수도 없이 촬영 현장을 오가서 그런가, 어깨너머로 본 게 많아서 그런지 미나한테는 너무 어려운 일들이 아니었다.

다 괜찮았다. 그냥 주혁이의 마음만 조금씩 돌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설령 여자친구가  있다고 해도 두렵지 않았다.

근데,

오늘의 주혁은 항상 자신감이 넘치던 미나로 하여금 도저히 갈피를 못 잡게 하였다.

여자친구 때문일까, 싸워서 이러는 걸까,
단순히 싸워서 이런다기에는 너무 절절하고 가슴 아파 보이는데,

연기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진짜인 거 같은데.

과연 자신이 주혁의 마음을 잡을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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