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하)

파란리본 | 2016.10.31 15:53:59 댓글: 4 조회: 2929 추천: 2
분류단편 https://life.moyiza.kr/mywriting/3194685

시끄럽던 윗층은 한참 후에 조용해졌다. 식탁위에 식어버린 물컵이 아니었으면 엄마가 다녀간 흔적은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엄마는 한잔 마시지 않은채 바람처럼 왔다가 가버렸다.

20년전 엄마가 떠난 적어도 세명의 여자가 은호의 엄마가 되고싶어했다. 그녀들은 은호에게 다가와 환심을 사려고 했고 집에 올때마다 은호에게 선물을 줬다. 다정한 말투로 그녀를 대했고 맛있는 음식을 해줌으로써 아버지의 호감을 사려고 했다. 그녀들은 서로 성격이 달랐지만 모두 정부기관이나 학교같은 곳에서 근무했으며 엄마처럼 대학을 나왔고 현명했으며 엄마보다 상냥했다. 그중에 여자는 엄마보다 이뻤다.

후에 아버지는 재혼을 했고 재혼대상은 공장에 출근하는 평범한 여자였다.

그날 저녁, 잔업을 마친 지훈이가 돌아온것은 은호가 이미 저녁상을 차려놓은 후였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까지 마친 지훈이가 거실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고 있을 은호는 임신테스트기를 그의 눈앞으로 들이밀었다. 지훈이는 처음에 놀라더니 바로 희색이 만연하여 드라마속 수많은 남자들이 그러했듯 은호를 와락 끌어안았다.

<내가 잘할께>

어쩜 대사마저 똑같았다.

사실 은호는 지훈이가 다른 반응을 보이길 바랬었다. 조금은 객관적이고 진지하게 지금 상황에 대해서 고민해보기를 바랬지만 남자는 각박한 현실에 대해서 생각이 없었다.

<아이를 낳으면 자기어머니가 분명히 봐준다고 할꺼고, 그럼 지금 집은 작잖아.>

<괜찮아.>

< 근처 학교들도 별로고 나중에 애가 학교가는 문제는 어떻게 ?>

<그때가면 방법이 생길꺼야.>

< 동네사람들이 싫어.>

< 괜찮은데..>

<어떡해?>

< 방법이 있을꺼야.>

지훈이는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다.

이상 화제는 계속할수 없었고 은호는 낮에 엄마가 돈꾸러 왔던걸 얘기했다.

< 이혼소송은 확실히 이길수 있는거야?>

지훈의 첫반응은 이러했다.

<당연하지! >

은호는 웬지 모르게 거슬려서 볼멘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너가 빌려주고 싶으면 빌려줘 ..그래도 엄마잖아.>

지훈이는 한번 엄마한테 유치한 호감이 있었으며 웃기게도 그녀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은호는 더욱 화가 났다.

<만약 엄마가 안갚으면 어떡해? 우리한테 돈이 얼마나 있다구..>

<내가 노력할께.>

지훈이가 태평스럽게 말했다.

다음날, 은호는 한가지 방법을 생각해냈고 바로 지훈에게 얘기했다.

<엄마가 다시 빌려라 그러면 우리 돈없어서 남한테 꿔야 한다고 하자. 그러니깐 엄마가 차용증을 써줘야 한다고 하는거야. 어때? 방법이 괜찮지 않아?>

그후로 3일후 엄마가 문자를 보냈다. 문자는 간단했다.

-은호야..이건 은행구좌다. 사랑해.

뒤에 세글자를 뚫어지게 노려보던 은호의 머리속은 뒤죽박죽이 되어 불신과 계산으로 가득한 준비됐던 말들을 차마 쉽게 내뱉을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성은 감정을 이겨냈고 그녀는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 차용증얘기를 하고 말았다. 엄마는 별다른 감정기복이 느껴지지 않는 말투로 답했다

<그래..그렇게 하자. >

그리고 이틀후 그녀는 엄마가 택배로 보내온 차용증을 받았다. 차용증 아랫부분에는 엄마의 싸인과 더불어 붉은 손도장까지 찍혀져있었다. 택배속에는 차용증뿐만 아니라 엽산종합비타민이 함께 들어있었다.

임신은 예상보다 힘든 일이었다. 입덧이 시작된 은호는 아무것도 먹을수 없었고 구토가 갈수록 심해졌다. 몸이 힘든것보다 괴로운건 끝나지 않는 망설임이었다. 그녀는 결정이 옳은건지 하루에도 수없이 생각했고 고민했다. 필경 임신은 그녀의 인생계획을 파괴하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두달전, 중요한 프로젝트를 완성시킨 그녀에게 회사는 내년 해외근무를 약속했었고, 얼마전 공교롭게도 B시의 헤드헌터로부터 업계 유망한 회사로의 스카아웃제의를 받았다. 그동안 성실하게 묵묵히 달려온 그녀에게 32살이 되던 해에 마침내 눈에 띄이는 과실이 나타나고 있던 차에 임신은 모든것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드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임신은 은호로 하여금 엄마를 자주 떠올리게 했다. 필경 엄마는 수많은 불편함을 감수하고 열달동안 수고스레 잉태하여 그녀를 낳았다. 가장 중요한건 엄마가 은호의 손을 잡고 <낳고 싶지 않으면 낳지 않아도 .>라는 말을 해준것이었다. 오로지 엄마만이 이런 말을 딸에게 자격이 있었고 그건 여자가 다른 여자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연민이라고 은호는 생각했다. 장면은 반복적으로 은호의 머리속에 떠올려졌다. 엄마는 자기 딸이 자신과 같이 냉정하고 무정한 여자가 되어 자신의 인생을 즐기 바랬던걸까?

임신3개월이 지나자 지훈이는 차를 사야겠다고 했다. 임산부 정기검진을 위해서 주기적으로 병원에 다녀야 했고 차가 없으니 확실히 불편했다. 엄마가 돈을 꿔간지 한달이 지났고 한달사이 엄마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지훈이는 은호에게 엄마한테 연락해서 언제쯤 돈을 돌려줄수 있는지 물어보라고 넌짓이 말했다. 그래야 자신이 몇달을 할부해서 차를 살지 결정할수 있잖냐고 하면서.

<그래서..자긴 아직도 엄마를 믿을수 없는거네.>

<적어도 소송이 어떻게 되는지는 물어볼수 있잖아.>

<그때 자기어머니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우린 차를 사고도 남았어.>

은호가 모질게 말을 내뱉었다.

<어떤 보면 엄마가 없는게 훨씬 나아.>

얼굴색이 바뀐 지훈이가 몸을 돌려 침실을 나갔다. 그리고 그날밤 지훈이는 거실의 소파에서 잠을 잤다.

그날밤. 은호는 실면했다. 지훈이와 연애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은호는 그에게 엄마에 관해 얘기해줬다. 화목한 부모 슬하에서 자란 지훈이는 그후 은호를 무슨 깨지기 쉬운 도자기쯤으로 여겼고 그래서 그녀가 특별해 보였고 그녀를 각별한 사랑이 필요한 여자로 대했다.

결혼 은호는 지훈이가 시시때때로 보여주는 < 아내 엄마도 없는 불쌍한 사람이야>라는 태도때문에 화가 났다. 예를 들어 어느날 그녀가 부주의로 니트를 세탁기에 돌려서 니트가 줄어버리자 지훈이는 은호의 어깨를 다독이며 <괜찮아. 아무도 너한테 이걸 가르쳐주지 않았기에 그럴수 있어.> 라고 위로랍시고 말했다.

그녀가 무지해서가 아니고 그냥 부주위로 인한 실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훈이는 은호가 엄마가 없어서 모르는거라고 제멋대로 판단했다. 작년에 시어머니가병으로 몇달간 입원하여 지훈이도 은호도 지쳐갈무렵 , 은호는 입밖으로 나올려는 말을 계속 꾹꾹 속으로 삼켰었다.

-엄마가 없는것도 나쁜 일은 아니잖아.

라는 그말을

다음날, 은호는 아파트 엘레베이터에서 윗집 사람들을 만났다. 할머니가 예닐곱살짜리 남자아이의 손목을 잡고 있었으며 사람 모두 표정이 구겨져있었다. 남자아이는 처음에 7 스위치를 누르더니 연이어 그 윗층 스위치들 전부 눌러버렸다.

은호가 6층을 누르자 노인은 의미심장하게 그녀를 쳐다보더니 입을 삐죽했다.

<임신이 별거라구.. 사람들 그렇게 사는거구만, 집안에서 소리가 날수도 있지. 자네도 아이가 있으면 알게 될꺼요.>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노인이 자신을 들으라고 하는 같아서 은호는 되물었다.

<자네 엄마가 그날 올라와서 난리친거 모르나? 우리 초인종이 아주 부셔져라 누르더니 문앞에서 욕도 하고 갔구만.>

6층에 도착하여 은호는 엘레베이터에서 내렸다. 아직 문이 닫기지 않은 틈을 이용해 그녀는 남자아이를 향해 말했다.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애들이 제일 싫어>

바로 그날, 은호는 엄마의 문자를 받았다.

-너의 은행구좌를 보내줘. 주말에 돈을 돌려줄께 시간 있으면 보러 가마.

문자 맨마지막에 엄마..라는 두글자가 적혀져 있었다.

지훈이가 더이상 화를 내지 않았지만 은호는 그에게 사과했다.

<어머님 이제 괜찮아졌잖아 모든게 좋아질꺼야. 엄마가 돈을 돌려주면 우리 사러 가자.>

둘은 언제 싸웠냐싶게 머리를 맞대고 무슨 차를 살것인가 열렬히 토론했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크고 널직한 모델로 사기로 약속했다. 지훈의 장농면허가 쓸모가 있어질것 같았다.

은호는 이제 옆으로 누워서 자기 시작했다. 아직 초반이어서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그녀는 배속의 생명의 존재를 느낄수 있었다. 크게 티가 나지 않았지만 이제 배가 나와서 청바지를 입을수 없었고 그녀는 허리가 넉넉한 배바지를 입고 임산부처럼 걸어다녔다. 임신 호르몬의 변화로 피부가 나빠졌고 잇몸에서는 피가 났다.

약간의 자신감도 붙었다. 어쩜 자신을 용서했을지도 모른다. 엄마가 자격도 자신도 없어서 수없이 망설였던것을, 자신도 엄마처럼 자기중심적었던것을, 심지어 유산에 관해서 검색을 해본것에 대해서도..그녀는 그런 자신을 용서하고 용기를 내기로 했다. 신기하게 용기의 원천은 엄마였다. 엄마처럼 이기적인 사람도 그녀에게 엄마로서의 존재의 가치와 모성을 보여주고 있고 무료할지라도 세상을 보고 경험하게 해주지 않았던가.

주말, 지훈의 배동하에 은호는 병원에 가서 임산부 검진을 받았다. 길고 번거로운 각종 검사를 하고 결과를 기다렸다. 혈압을 재던 핸드폰에 문자가 들어왔고 은호는 흘낏 한번 보고 가방에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의사는 이제 태심을 들을수 있다고 하면서 그녀를 침대에 똑바로 누우라고 하였다. 은호의 위로 차갑고 끈적한 젤를 바른 초음파 기계를 이리저리 조절했다. 상대적으로 시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그녀가 조바심이 무렵, 갑자기 소리가 들렸다.

<!!!>

선명한 소리가 점점 빨라졌고 뭔가 재촉하는듯한 소리는 심장뛰는 소리라기보담 자신의 존재를 선언하는 움직임같았다.

<태아의 심장박동소리는 원래 빨라요.>

의사가 말했다.

<자기야..!>

은호는 저도모르게 소리로 지훈이를 불렀고 밖에 있던 지훈이가 뛰여들어왔다.

검사가 끝난 , 지훈이와 함께 병원앞에 공원으로 갔다. 맑고 따뜻한 봄날이었다.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잔디 위를 걷고 있었다. 젋은 부부도 있고, 아이를 데리고 나온 부모도 있고, 휠체어를 노인도 보였다. 은호는 그들을 뚫어져라 보면서 그들에겐 어떤 많은 사연들이 있었고 그들은 얼마나 피곤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천천히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서 좀전에 들어온 문자를 다시 보았다. 엄마가 보낸것이었다.

<일단 10만원을 보냈어. 이자는 니가 먼저 친구에게 갚아줘.>

별다른 해석은 없었다. 아마 엄마는 처음부터 돈이 은호자신의것임을 알았을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건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은호의 의식 깊숙히 박혀있던 두려움이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지훈의 손을 잡고 다시 한번 감정을 확인했다. 뭔가 저주가 풀린 같은 기분이었다. 지난 20년간 엄마에 대한, 엄마의 사랑에 대한 갈구가 순간 마침내 사라져버렸다. 사랑을 받지 않아도 줄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이제 그녀는 누구의 딸이 아니라 생명을 책임질 엄마가 된것이다.

추천 (2) 선물 (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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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판도라I (♡.130.♡.16) - 2016/11/02 13:34:45

전 윗층에 올라가 야단쳤다는 얘기에 괜스레 울컥했네요.엄마 말을 그대로 윗층 사람들한테 하는 딸은 그 순간 엄마 방식의 모정을 이해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부부가 싸우는 과정과 싸우고나서 차 사는데 대해 열렬히 토론했다는 구절이 너무 재미 있었어요.전 자식에 대해 올인하고 내가 널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데 하면서 생색을 내는 부모보다 글에 나오는 엄마가 더 마음에 들어요.얄밉지만 진솔해요.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좋은 글이었습니다.오랜만에 마음이 움직이네요.^^

작은도둑 (♡.166.♡.67) - 2016/11/03 09:49:04

저두요. 윗층에 올라가 야단쳤다는 얘기가 인상적이였습니다. 엄마방식의 모성애구나 싶었습니다.

상편의 은호는 위태로와 보였어요. 엄마의 배신과 사랑에 대한 갈구가 대립된 구조로 은호를 모순되게 하는것 같았고.
그래서 어쩔수없이 엄마의 의지대로 휘둘릴거 같은 느낌이였는데..하편을 읽고나니까 훨씬 안심이 되는것 같습니다.

은호는 자기가 뭘 원하는지 잘 알고 있으며, 감성보다는 이성적이고 독립적이며 자기주견이 확실하네요.
그래서 살면서 그게 연민이든, 사랑이였든간에 판단이 흐려지는 일은 없을거 같네요.

자유로운 영혼이였던 엄마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게 은호가 전달하려는 주제였던것 같에요.
자기를 너무 사랑했던 엄마도 모든 불편함을 감수하고 은호를 낳고 자기만의 모성애를 보여주는데..
은호는 분명 앞으로 더 좋은 엄마가 될수 있을거 같애요.

썅썅 (♡.47.♡.33) - 2016/11/03 10:35:35

자식을 사랑하는 세상엄마들의 방식은 각이각색이지만 사랑한다는 마믐만은 분명하다는걸 느끼게 하는 참 좋은 글입니다.

yinzhengyi (♡.151.♡.48) - 2016/11/19 01:30:13

어쩜 은호 엄마는 겉은 냉정하지만 맘속 한구석은 딸에 대한 따뜻한 모성애가 믾이 남아있는거 같군요....
일반인보다 자기한테 필요한게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고 자기가 행복해야 자식도 행복하다는 그런 마인드의 소유자 같아 보이는 군요.
윗층에 올라가 난리 했다는 대목에서 코가 시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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