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마음속에 내가 산다면 17~18

단차 | 2023.11.19 06:59:51 댓글: 0 조회: 267 추천: 1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518881
17. 일렁이는 무언가


경사진 골목길에 위치한 이탈리안 가게 앞에 세 사람이 다가서고 있다.

진한 월넛 색의 가게 간판에 흘려 쓴 글씨체의 영문 가게명이 보였다. 그들이 찾아온 가게는 2층에 있었다.

1층의 카페 옆으로 난 계단을 한칸 한칸 힘주어 오르며 하은이 중얼거렸다.

“우리 저녁 먹으러 오는 거 맞아? 등산 아니야?”
“하하, 그래도 먹고 나면 그런 생각 안들 걸? 나에게 고마워하게 될 거야.”

“그렇단 말이지? 어디 맛없기만 해봐.”

서연은 조용히 그들의 뒤를 따라 올라갔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풍경 소리와 함께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내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 벽에 붙은 선반에는 사진액자와 작고 예쁜 소품들이 놓여있었다. 좁고 긴 창문에는 시폰 소재의 흰색 커튼이 달려있어 바깥 시야를 적당히 차단해 주고 있었고 월넛색의 테이블과 의자들이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배치 되어있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은 세 사람은 메뉴판을 펼치고 같이 보기 시작했다. 

“여기는 오일 파스타가 맛있고, 스테이크도 괜찮아.”
“그럼 나는 스테이크에 자몽 에이드도 추가!”

하은이 빠르게 결정하자 재현이 서연을 쳐다보았다.

“누나는 뭐 먹을 거야? 음료수도 마실 거지?”
“응, 나는 크림 파스타랑 레모네이드로 할게.”

“크림 파스타? 다른 건 안 좋아해? 별건 아니고, 저번에도 같은 메뉴를 시켜서 물어본 거야.”
“아, 그냥 크림을 제일 좋아해서.”

재현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메뉴판을 닫았다.

“여긴 양이 적은 편이니까 샐러드도 하나 시킬까 하는데, 괜찮아?”

하은과 서연의 동의를 구한 재현이 그들이 있는 테이블을 주시하던 직원에게 눈을 맞추고는 손을 들었다.

주문을 마치고 직원이 돌아가자, 주변을 둘러보던 하은이 테이블 위에 걸린 샹들리에를 발견했다.

“오, 여기 분위기 좋은데? 재현이 너는 이런데 자주 와?”
“그건 아니고, 여기는 전에 한두번 온 게 다야.”

“누구와 같이 온 건데? 혹시 데이트?”
“데이트는 무슨, 그런 거 아니야.”

재현이 강하게 부정하자 하은이 코웃음 쳤다.

“응, 관심 없어. 그런데 지민 오빠는 왜 안 나온 거야?”
“그 형은 저녁에 하는 일이 있어서 못 왔어.”

“분명 저번에 회사 다닌다고 하지 않았어?”
“응, 더 궁금하면 밥 살래?”

“아니야, 각자 계산이 제일 편해.”

연이은 질문 세례에 재현이 웃으며 답하자 하은이 김샌 듯 뒤로 물러났다.

주문한 메뉴가 나오고 얼마 지나자, 가게가 조금씩 북적이기 시작했다.

“양이 적긴 하네. 이제부터는 샐러드를 격파해 주겠어!”

부지런히 식기를 놀리던 하은이 아쉬운 듯 식기를 내려놓고는 투명 유리 볼에 알록달록 예쁘게 담겨 나온 샐러드를 앞접시에 덜어갔다. 

뒤이어 서연도 샐러드를 맛보았다. 발사믹 소스의 새콤한 첫 느낌에 이어 샐러드의 쌉싸름한 뒷맛이 느껴졌다.

레모네이드를 마시는 서연을 보던 재현이 앞의 물잔을 들어서 조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누나는 이런 거 좋아해?”
“좋아해, 그런데 자주 먹진 않아.”

“아, 그렇구나. 그럼 다른 건 좋아하는 거 있어?”
“뭐 굳이 말하자면 떡볶이?”

별로 평소에 의식하지 않았던 질문에 서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역시 떡볶이가 진리야! 언니, 우리 다음엔 떡볶이 먹으러 갈래?”

재현이 미처 반응하기 전에 둘을 지켜보던 하은이 말을 이어받았다.

“아, 그런데 떡볶이는 무슨 맛에 먹는 거야?”
“저런, 아직 떡볶이라는 진리에 눈을 뜨지 못하다니.”

“하하, 그 정도라니 궁금하네. 그럼 다음에 둘이 갈 때 나도 데려가 줘.”
“좋아, 너를 진리의 길로 인도해 주겠어.”

식사가 끝나고 셋은 가게 문을 열고 나섰다. 선선한 바람이 그들을 스쳐 갔다. 어느새 켜진 가로등이 그들이 걸어 내려가는 작은 골목길을 비추고 있었다.

내려가던 길에 작은 놀이터가 보이자, 하은이 걸음을 멈추었다.

“야. 재현, 저기 잠깐 앉았다가 갈래?”
"그래, 좋아."

재현이 흔쾌히 답하자, 하은이 바로 놀이터 그네로 걸어가서 앉았다.

“뭐야. 너 이거 타려고 왔어?”
“아, 뭘, 놀이터 오면 필수코스라고! 언니는 그네 안타?”

서연은 괜찮다고 답하고는 놀이터 옆 벤치에 가서 앉았다. 그 옆으로 재현이 와서 앉았다.

“누나, 혹시 내일 시간 돼?”
“내일은 왜?”

“저번에 영화 보는 거 좋아한다고 했잖아.”
“아, 그랬었지. 왜? 영화 보게?”

“요즘 나온 신작이 재밌다고 하던데, 같이 보러 갈래?”
“뭐 보면 좋지. 그럼, 하은한테도 물어봐.”

“아, 하은이…….”

재현은 조금 말이 없었다가 말을 이었다.

“하은한테는 내가 이따가 물어볼게. 시간대는 언제가 좋아?”
“오후에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별 망설임 없이 답한 서연은 그 둘에게 걸어오는 하은을 쳐다보았다.

“야. 재현, 이거 좀 봐. 지민 오빠 여기 간 거 맞지? 여기서 멀어?”

재현은 하은이 내민 핸드폰 화면의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이걸 또 찾네. 여기서는 15분 정도 걸릴 걸?”

“진짜? 피드에 딱 뜨더라고. 이거 운명인가? 지금 가봐도 돼?”
“뭐 되긴 하는데, 너 안 피곤해?”

“응. 전혀, 아직 쌩쌩해. 언니도 괜찮지?”

눈을 찡긋하는 하은을 본 서연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재현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조용히 주문하고 앉은 셋의 시선이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누군가에게 모였다.

단발머리에 조금 허스키한 음성을 가진 여자가 현란한 제스처로 열정적으로 그루브를 타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녀는 감미롭게 살랑살랑 부르다가 클라이맥스에서는 감정적인 테크닉으로 바꿔서 부르며 화려한 조명이 교차하며 비치는 무대를 자유롭게 걸어 다녔다.

공연이 끝나고 여자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손뼉을 치는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경쾌한 걸음걸이로 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곧이어 들어가는 그녀와 인사를 주고받은 지민이 무대에 올랐다. 지민은 관객석을 살짝 둘러보더니 무대 한가운데 스탠딩 마이크를 세팅했다.

잔잔한 전주가 흐른 뒤 그는 관객석을 바라보며 노래를 시작했다.

조금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그를 오롯이 비추고 있는 핀 조명과 함께 그에게 집중되었다.

저번에 담담하게 부르던 것과는 달리 조금 더 짙어진 목소리로 그는 가사에 감정을 실으며 노래를 이어 나갔다. 쓸쓸한 분위기의 멜로디와는 다르게 영원을 약속하는 가사가 인상적이었다.

노래가 끝나고 나서 잠시 담담하게 무대에 서 있다가 내려가는 지민을 보고 있던 서연의 시선이 다시 테이블 위에 놓여 진 푸른 빛의 칵테일 잔으로 옮겨갔다. 

평소 건조하게 느껴지는 말투와는 다르게 그의 노래에는 미묘하게 빠져들게 하는 감성적인 힘이 있었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일렁거리기 시작한 서연은 칵테일 잔을 들어서 한 번에 털어 넘겼다.




18. 신경쓰여 자꾸


라이브 바 내부는 분위기 좋은 조명이 은은히 비추는 테이블에 앉아 이어지는 공연 음악을 즐기며 각자 주고받는 사람들의 대화들로 밤의 분위기가 더해가고 있었다.

“와, 같은 사람 맞아? 좀 다르게 보이는데? 그런데 더 안 해?”
“형은 좀 전에 한 게 마지막 곡일걸?”

“아, 뭐야. 조금만 더 일찍 말해주지.”

하은이 아쉬워하며 하이볼이 든 잔을 들어서 한 모금 마셨다. 재현이 말없이 싱긋 웃더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걸어오는 지민을 발견하고 손짓했다.
 
‘쓸데없이 멋있게 하고 다니네.’

자기도 모르게 테이블에 팔을 올려 살짝 턱을 괸 채 손가락 등으로 입술을 꾹꾹 누르며 생각하던 서연은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급히 생각을 갈무리했다.

깔끔하게 핏이 떨어지는 짙은 네이비 블루 셔츠와 그의 손목을 감싸고 있는 클래식한 느낌의 손목시계가 그의 전체적으로 우아하고 세련된 스타일을 완성해주고 있었다. 

낮에 보았던 편한 옷차림과는 확연히 대비되는 무드의 스타일이었다.


서연은 대각선에 있는 의자에 와서 앉는 그를 살짝 쳐다보았다. 

언뜻 그와 시선이 마주친 것처럼 느껴지자, 그녀는 시선을 자연스럽게 테이블로 떨구면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어깨너머로 쓸어 넘기고는 바로 앉았다.

테이블 밑으로 내린 손이 약간 떨리는 게 느껴진 서연은 주먹을 꽉 쥐었다가 풀었다. 배드민턴장에서 느꼈던 긴장감이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

그녀는 오늘따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정확히는 그를 마주쳤을 때만이었다.

흡사 커피를 처음 마셨을 때처럼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던 서연은 심호흡을 하고 물잔을 들어서 마시고 살며시 내려놓았다. 

하은이 장난스럽게 맞은 편에 앉은 지민에게 말을 거는 게 들리긴 했지만 무슨 내용인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모든 게 백색소음처럼 들리다가 어느 순간, 소리가 전부 멈춘 듯한 착각이 들었다. 

대신 그녀의 심장 소리가 선명하게 귓가를 울리기 시작했다. 이건, 어떤 신호였다.

불안? 긴장? 두려움? 그게 아니면 뭘까……. 서연의 머릿속에 무수한 물음표가 떠올랐다.

서연은 재현과 대화하고 있는 지민을 슬쩍 쳐다보았다.

그녀와 달리 동요 한 점 없어 보이는 그의 평온한 얼굴을 보자, 기분이 더욱 다운되는 걸 느꼈다.

잘못한 것도 없이 왜 불편한 마음이 계속 드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심지어 그전에 비하면 지민이 오늘 그녀에게 비친 태도는 많이 부드러워진 편이었다. 그런데도 어쩐지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다.

‘지서연, 너 대체 뭐 하자는 건데? 왜 또 신경 쓰는 거야.’

서연은 마음을 비우려고 노력했으나 별 효과가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녀의 갈 곳을 잃은 시선이 앞의 빈 칵테일 잔으로 향했다.

“누나, 다른 거 더 마실래?”
“응? 지금 무슨 말 했어?”

“뭐야, 무슨 생각해? 다른 거 더 마실 거냐고.”
“아, 별 생각 안 했어. 나도 저거 마셔봐야겠다.”

뜨끔한 서연이 시선을 돌리다가 하은 앞에 있는 하이볼 잔을 가리키며 답했다.

“응, 언니도 먹어봐. 이거 진짜 맛있어. 달고 상큼해.”
“누나, 이거 은근히 도수가 있는데 괜찮겠어?”

“응, 이 정도는 괜찮아.”

서연은 걱정스럽게 묻는 재현에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설마 나보다 더 잘 마시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아무튼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재현이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대신 누나가 나 걱정해 주면 안 돼? 나는 술 잘못하거든.”
“아, 그래? 그거 거짓말이지?”

“진짠데? 나는 거짓말이란 단어와 거리가 먼 사람이야.”
“그래, 네 거짓말 믿을게.”

“응? 뭔가 답이 이상한데?”

재현과 말을 주고받으며 저절로 긴장감이 풀린 서연이 자연스럽게 웃었다.


그런 둘을 보던 지민이 또 말을 걸어 온 하은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빠는 말 언제 편하게 할래요? 참고로 저는 이미 준비됐는데.”
“친해지면 편하게 할게요.”

“아, 네.”

하은이 빠른 포기를 하고는 더 말을 걸지 않았다.

지민은 재현을 가볍게 건드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먼저 들어가 볼게.”
“왜? 조금 더 있다 가지.”

“고양이 밥 줘야 해.”
“아,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잘 들어가.”

지민은 서연과 하은에게 눈인사만 하고 뒤돌아서 걸어갔다.

“와!”
그가 떠나가는 뒷모습을 보던 하은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재현아, 저 오빠는 대체 어떤 사람이야?”
“착하고 좋은 형이지. 왜?”

“착하고 좋은…. 아, 아니야.”

하은은 할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더 하지는 않았다. 

서연은 재현의 말에 동의가 되는 건 아니었지만, 그것보다는 머릿속에 새로 들어온 그가 고양이를 기른다는 사실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보았다. 

어쨌거나 그가 떠나가자, 마음이 좀 편해진 것 같았다.

재현이 갑자기 조용해진 둘을 조금 의아한 듯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갑자기 왜 말이 없어? 하은, 무슨 일 있었어?”

하은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무 일도 없었어.”
“아, 그래? 너 내일 영화 보러 나올래?”

“갑자기 영화를 본다고?”

재현이 서연을 한번 쳐다보더니 답했다.

“아까 누나한테는 물어봤거든. 내일 오후 2시쯤 만나서 보러 가면 될 것 같은데, 어떡할 거야?”

“좋아, 내일 일어나면 연락할게.”

하은이 더 묻지 않고 빠르게 수락했다.

그리고 이튿날 오후 2시. 전철역 출구에서 나온 서연이 역 근처에 있는 큰 건물을 한번 쳐다보고 잠깐 숨을 고르고 걸어갔다.

건물 입구 앞에 가니 먼저 도착한 재현이 그녀를 반겨주었다. 

인사를 나눈 서연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은이는 아직 안 왔어?”
“응, 아직. 뭐, 곧 오겠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 재현이 시선을 핸드폰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얼마 뒤, 하은의 문자를 확인한 서연이 재현을 돌아보았다.

“재현아, 하은이 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 온다는데?”
“아, 그럼 어쩔 수 없지. 누나, 여유 있게 보려면 지금 들어가야 할 것 같아.”

“그래, 들어가자.”

서연은 재현의 뒤를 따라 건물에 들어섰다. 

엘리베이터 앞에 걸어간 재현이 옆에 온 그녀를 돌아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몇 분 동안 둘은 아무 말도 없이 엘리베이터 상단의 디스플레이에 뜨는 숫자를 쳐다보았다. 

멍하니 바라보다가 딴생각에 빠져들던 서연이 엘리베이터 도착 알림음을 듣고 재현의 뒤를 따라 천천히 열린 문으로 들어섰다.


추천 (1) 선물 (0명)
IP: ♡.252.♡.103
22,943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보라
2006-08-09
33
63037
죽으나사나
2024-01-10
2
352
죽으나사나
2024-01-10
2
504
죽으나사나
2024-01-09
0
264
죽으나사나
2024-01-09
0
207
죽으나사나
2024-01-08
2
279
죽으나사나
2024-01-07
2
257
죽으나사나
2024-01-06
1
244
죽으나사나
2024-01-05
2
317
죽으나사나
2024-01-05
2
236
죽으나사나
2024-01-03
3
354
죽으나사나
2024-01-01
1
371
죽으나사나
2023-12-28
4
396
단밤이
2023-12-25
2
433
죽으나사나
2023-12-24
4
432
죽으나사나
2023-12-23
3
361
죽으나사나
2023-12-23
2
356
죽으나사나
2023-12-22
2
323
죽으나사나
2023-12-22
1
314
죽으나사나
2023-12-21
1
317
죽으나사나
2023-12-21
1
289
죽으나사나
2023-12-20
1
346
죽으나사나
2023-12-20
1
284
죽으나사나
2023-12-19
2
377
죽으나사나
2023-12-19
1
435
봄날의토끼님
2023-12-19
6
1194
원모얼
2023-12-19
5
1011
단차
2023-12-16
4
500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