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종 - 불타는 여인 1-3

3학년2반 | 2022.02.03 07:57:21 댓글: 0 조회: 1178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6394


8. 異國의 연인들

같은 날 도쿄 나리타 공한 오후 7시
25분.
잿빛의 로얄살롱 한 대가 빗물에 젖은
공항 주차장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가더니
이윽고 운전석 옆자리의 문이 열리면서 한
조그만 사나이가 밖으로 내려섰다. 그의
한쪽 손에는 묵직한 가방이 한개 들려
있었다.
차의 엔진이 꺼지더니 이번에는
운전석쪽에서 한 젊은 여인이 나타났다.
사나이가 재빨리 우산을 펴들자 여인이
그쪽으로 다가와 붙어섰다. 여자쪽이
남자보다 키가 조금 더 큰 것 같았다.
이윽고 그들은 공항 건물쪽으로 걸어갔다.
어깨가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것 같았다.
여자처럼 가냘프고 파리한 얼굴에 검은
색의 굵은테 안경만이 두드러져 보이는
사나이였다. 옷은 베이지색 싱글차림이었고
저고리 안에는 흰 와이셔츠에 푸른 줄이 간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나이는 마흔
안팎으로 보였는데 그에 비해 여자는
스물서넛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긴
머리에 감싸인 얼굴은 유난히도 희고
갸름해 보였다. 사슴처럼 긴 목이
인상적이었고 눈빛은 신선했다. 거기에다
눈처럼 흰 원피스 차림이었기 때문에 공항
터미널을 오가는 많은 여자들 가운데서도
그 미모가 남자들의 시선을 끌만큼 아주
뛰어나 보였다.
공항 건물 안으로 들어선 그들은
미리 사가지고 온 항공권을 카운터 위에
내밀었다. 카운터의 여직원은 그것을
들여다보고 나서 탑승권을 꺼내 거기에다
좌석번호를 기입한 다음 그것을 배창기에게
내주었다.
"시간이 없으니까 빨리 탑승하십시오."
유난히 화장을 진하게 한 여직원이
일본말로 말하면서 호기심어린 눈으로 두
남녀를 바라본다.
미치코는 창기와 함께 카운터 앞을
물러나면서 스스럼없이 남자의 팔짱을
낀다. 카운터의 여직원이 비웃는 듯한
눈초리로 두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본다.
두 사람은 출국장 입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미치코의 눈시울이 어느새
촉촉히 젖어 있다. 그녀를 바라보는 창기의
"무슨 일이 있나요?"
미치코가 비로소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그녀와 함께 비오는 도쿄의 호텔 방에서
뒹굴던 그가 서울에서 걸려온 국제전화를
받더니 갑자기 침통한 표정으로 귀국을
서두르는 것을 그녀는 공항에 오기까지
잠자코 지켜보기만 했었다. 그가 그녀에게
한 말은 집에 일이 생겨서 빨리
가봐야겠다는 것 뿐이었다. 그녀는
남자쪽에서 자진해서 말해 주지 않으면
절대 먼저 묻지 않는다. 묻고 싶어도
참으며 남자가 말해 주기를 다소곳이
기다린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에는 예외였다.
남자가 갑자기 슬픈 표정으로 귀국하게 된
이유를 끝까지 말해 주지 않고 떠나버릴
기다리지 못하고 마침내 입을 열었던
것이다.
"아내가 죽었어."
그는 잠깐 여자를 쳐다보고 나선 딴데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일본말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남자쪽의 일본어
실력은 좀 서투른편이었다.
"아니, 왜요? 왜 갑자기?"
미치코의 두 눈이 커지면서 그렇지
않아도 흰 얼굴이 더욱 하얘지고 있었다.
남자의 시선이 다시 그녀의 얼굴 위에
머물렀다. 그의 두 눈에는 어느새 물기가
번져 있었다. 그것을 보이지 않으려는 듯
그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이유를 모르겠어. 아주 건강한
여자였는데......."
알려주고 나서 그 이유도 말하지 않은 채
울면서 전화를 끊었을 때 그는 미치코와
함께 침대 속에 누워 있었다. 그는 즉시
집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미화는 집에
없었다.
그의 어머니도 밀라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미치코의 벌어진 입에서는 더 이상 아무
질문도 나오지 않았다. 창기는 그녀의 손을
잡고 나직히 말했다.
"잘 있어요. 정리되는 대로 다시
오겠어."
여자의 손은 뜨거웠다. 침대 속에서의
열정만큼이나.
그녀가 가만히 머리를 흔들었다.
"당분간 못 오시겠지요?"
그의 손에서 여자의 손이 힘없이 떨어져
나왔다. 그녀는 두번 다시 남자를 못 볼 것
같은 절박한 눈길로 그를 쳐다본다.
"잘 있어요."
창기는 일본인 애인한테 마지막으로 깊은
눈길을 주고 나서 출국장 안으로 급히
걸어갔다.
문이 닫히는 사이로 얼른 뒤돌아보니
미치코가 한쪽 손을 반쯤 쳐든 채 흔들고
있었다. 창기도 거기에 맞춰 손을
쳐들었는데 그때 출입문이 닫혔다.
도쿄의 나리타 공항에도 서울처럼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창기가 출국수속을 마치고 보세구역을
지나 지정된 탑승구쪽으로 걸어가자 그
앞에 서 있던 KAL 직원이 막 문을
"하마터면 못 타실 뻔했습니다."하고
직원이 말했다.
창기는 탑승권을 확인시킨 다음 서둘러
로딩브리지를 걸어갔다.
8시 5분.
KAL707기는 나리타 공항을 이륙했다.
빗방울이 창문을 후려치고 있었고 검은
구름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창기는 잔기침이 나오자 손수건으로 입을
막았다. 요즘 들어 기침이 잦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병원에도 약국에도
가려하지 않았다.
미치코는 대학생이었다. 그녀가 대학
1학년이었을 때 알게 됐으니까, 그녀와
관계를 맺은 지도 3년이 된 셈이다. 기침이
멎자 그는 머리를 뒤에 기대고 두 눈을
자신이 그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악착스럽게 건강을 회복하려고 하거나
하지도 않고 있었다.
미치코와는 다시 만나게될지 자신할 수
없었다. 미치코 자신도 그것을 느낀 것
같았다. 아내의 갑작스런 죽음은 그를
변화시킬것이 틀림없었다.
사업관계로 일본 출장이 잦아지면서 그는
일본어를 알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렇다고 어학 연수학원에
정기적으로 출석한다거나 하는 것은 싫었고
개인교수를 초빙해서 배운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친교가 있는 어떤 업체의
사장이 현장에 가서 직접 일본인을 사귀는
것이 일본말을 익히는 데는 제일 빠른
방법이라고 하면서 자기는 일본에 갈
체류하는 동안은 그 아가씨와 데이트를
즐기면서 말을 배웠다고 자랑삼아 말한
적이 있는데 창기의 생각에도 그 방법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마음뿐 그럴
수 있는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사람들을 사귀는데 있어서, 특히 여자를
사귀는데 있어서 여간 까다롭지가 않은
그로서는 아무 일본 여자한테서나 일본어를
배울 수는 없었던 것이다.
미치코를 알게된 것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어느
햄버거집에서였다. 그녀는 그때 대학 1학년
학생으로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영어도 배울
겸해서 미국으로 건너와 친구와 함께
햄버거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신선한 미모와 아름다움에
조심스럽게 자신의 뜻을 비춰보았다.
아르바이트 용건이라는 것이 가끔씩 그가
그가 일본에 올때마다 시간을 내어
자유스럽게 일본말을 가르쳐주는 것이고
거기에 대한 보수란 것이 학생
신분으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많다는 것을 알게된 그녀는 꽤 구미가
당기는 눈치를 보였다. 그렇지만 그가
한국인이고 아직 정확한 신분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확실한 대답은 뒤로 미루고
생각해 본 다음에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그렇게 많은 돈은
필요없다는 것이었다. 창기는 자기 회사의
도쿄 지사 전화번호를 일러준 다음
귀국했다. 그로부터 두 달쯤 지난 초가을에
창기는 도쿄에서 미치코를 만날 수가
보았을 때와는 또다른 건강하고 싱그러운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는
말하기를 부모님은 그런 아르바이트를
한사코 반대했지만 자기는 부모 몰래 그
일을 하고 싶어서 나왔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관계는 만나는
횟수가 잦아지면서 깊은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고 지금은 일본말을 가르치고 배우기
위해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어서
만나는 관계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그는 미치코에게 너무 과중할만큼 많은 것,
이를테면 자동차며 아파트, 보석 같은 것을
사주었지만 그런 것은 하나도 아까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미치코와 유밀라를 비교해 보면 확실히
두 여자는 아름다운 미모를 지닌
있어서는 미치코쪽이 밀라에게 뒤진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치코한테는 밀라가
가지고 있지 않은 부드러움이 있었다.
밀라가 타는 듯이 열정적이고 힘찬데 반해
미치코는 한없이 부드럽고 순종적이었다.
그리고 그녀한테는 신선미가 있었다.
밀라한테는 화려한 아름다움은 있었지만
신선미가 결여되어 있었다. 결혼했기
때문이라고 하겠지만 결혼한 당시만해도
신선미 같은 것은 없었다. 다만 화려한
미모에 가려 그런 결점이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미치코를 알게된 것은 밀라와 결혼한 지
1년쯤 지나서였다.
그가 밀라를 아내로 선택한 것은 순전히
그녀의 미모에 반했기 때문이었다.
결혼하게 된 이유가 그의 재력 때문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유야 어떻든
그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재력을
이용하여 그녀를 아내로 맞이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결혼생활
4년만에 밀라의 죽음으로 끝나고 말았다.
창 밖으로 얼굴을 돌리는 그의 두 눈에
물기가 번지고 있었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스튜어디스가 조금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면서
지나쳐갔다.
눈부시게 화려한 미모의 여인과
결혼했으니 그야말로 행복할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결과는 기대했던 것만큼
그렇게 되지가 않았다. 결혼생활이 1년쯤
지났을 때 그는 아내한테 완전히 주눅이
밀라는 밤마다 관계를 가질 것을
요구했고 그녀의 불타는 열정을
잠재우기에는 그는 너무 왜소하고
허약했다. 도대체가 그녀는 그 짓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여자 같았다. 요광로처럼
끊임없이 분출하는 그 욕망을 감당해
내기에 지친 그는 밤마다 잠자리에 드는
것이 두려워지기 시작했고 그렇지 않아도
팔등신인 아내의 육체가 더욱 크고
위압적으로만 보이는 것이었다. 유난히도
요란스럽게 내지르는 신음소리와 미친 듯
흔들어대는 육체 앞에 그는 상대적으로
위축되기만 했고, 결국 그녀를
만족시켜주지 못하고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기라도 하면 열한 살 아래의 아내는
"에이, 남자가 왜 그 모양이에요. 사람
빈정거리는 것이었다. 어떤 때 먼저 잠이
들었다 깨어보면 옆에 누워 있는 아내가
자위행위로 신음소리를 내면서 몸을 뒤트는
것을 보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런 때는
잠든 체 숨을 죽이는 것이었다. 그녀와의
잠자리를 피하기 위해 그는 밤늦게 집에
돌아오는 때가 점점 많아졌고 그런 그를
아내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맞이하곤
했다.
위압적인 모습으로 변해버린 아내 앞에서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버린 그는 도저히
재기한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았고
그때부터 자신의 결혼생활이 불행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런 이유로
해서 아내한테 이혼하자는 말을 꺼낸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어주는 자식이 결혼 2년만에 태어났던
것이다. 아들이 태어나자 밀라는 더욱
위압적으로 되었고 창기를 자기 마음대로
요리해 나갔다.
아내 앞에서 더욱 왜소해지고 위축감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는 미치코쪽에 마음이
쏠리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비록
국적이 다른 여자이긴 하지만 그녀와 함께
있을 때면 그는 따뜻하고 풍만한 가슴속에
안온하게 안겨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것이었다.
미치코를 만난 것은 밀라와의
결혼생활에서 앞으로 결코 행복감을 느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가슴속에 뚜렷이
자리잡기 시작했을 때쯤이었다.
가슴속의 빈 터가 점점 허전한 느낌으로
화려한 미모의 육감적인 밀라와는 전혀
다른 느낌과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였다.
밀라만큼 화려한 미모는 아니었지만
그녀한테는 신선한 아름다움과 함께 주위를
따뜻하게 감싸주는 것 같은 부드러움이
있었다. 그 부드러움에 친숙해지기
시작했을 때 그는 그 부드러움 속에 가려져
있는 달콤함을 찾아내어 어느새 그것을
즐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똑같은 여자이면서 어쩌면 그렇게도
느낌이 다를 수가 있을까--이것은 밀라와
미치코를 비교할 때마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점이었다.
미치코의 육체도 갸름해 보이는 얼굴
모습과는 달리 늘씬하고 육감적이기는
밀라한테 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녀가 처음
그 풍만하고 매력적인 육체에 내심
소스라치게 놀랐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밀라의 폭력적인 섹스에
압도당해 완전히 주눅이 들어버린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고 미치코와의 관계에서도 또
그와 같은 재판이 일어나면 어쩌나하고
적지 않게 걱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미치코는 나이가 적은 탓도 있겠지만
밀라처럼 용솟음치는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
미친 듯 날뛰거나 하지도 않았고 자신을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그의 왜소함을
비아냥거리거나 하지도 않았다. 밀라는
자신보다 더 강한 남자와 상대할 때만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여자였고 그렇지 못한
남자는 남자축에도 끼이지 못한다고
있었다.
반면 미치코는 상대에 따라서 자신을
부드럽게 다룰 줄 아는 여자였다.
이를테면 소년하고 관계할 때는 거기에
맞게, 늙은이하고 상대할 때는 또 거기에
자신을 적응시킬 줄 아는 신축성이 풍부한
여자라고 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그녀는
상대방을 만족시켜 주면서 누구하고도
즐거운 마음으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그런
여자였던 것이다.
미치코와 회를 거듭할수록 창기는
어루만지듯 따뜻하게 감싸며 조여오는
그녀의 농밀한 압박에 더할 수 없는 환희를
느꼈고, 그녀의 몸 전체에서 항상 감지되는
가느다란 떨림에서 새로운 충격을 맛보곤
했다. 미치코와 상대하면서 그가 새롭게
발견한 것은 자신의 성능력도 개발여하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발전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밀라와의 관계에서는
위축되기만 하고 그래서 스스로 자신을
모멸하기만 하던 그가 상대가 바뀌면서
위축되기만 하던 자세에서 벗어나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이 순전히
미치코의 덕분임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거기에 대한 보상으로 그는 그녀에게 많은
돈을 뿌렸지만 하나도 아까운 생각이 들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미치코는 그가 굉장한 부자라는 것을 안
뒤에도 그전과 다름없이 그를 대했다. 여느
여자들 같으면 그에게 더욱 잘 보임으로써
한푼이라도 더 우려내려고 할 텐데 그녀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그 점이 또한
창기의 마음에 들었고 그래서 그는 더욱
곧 김포 공항에 도착한다는 스튜어디스의
아나운스먼트가 들려왔다. 창기는 창 밖을
내려다보았다. 비행기는 비바람치는 어둠
속을 날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빗방울이 계속 창문에
부딪치면서 산산이 흩어지고 있는 것이
서울에도 비가 오고 있는 모양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엉덩이가 커보이는 스튜어디스가
지나가면서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울고 있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 자신의 두눈에서는 더 이상 눈물이
흘러나오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그녀는 죽었다...... 나는 왜
이렇게 불행한 남자가 되었을까...... 내
아들은 어떠헤 될까...... 나는 앞으로 두
결코...... 혼자 살리라.......
비행기 바퀴가 활주로에 부딪치면서
일어나는 진동에 그는 생각에서 깨어나
밖을 내다보았다. 비행기는 어느새 활주로
위를 굴러가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 수속을 마치고
출구를 빠져나가자 그의 비서가 달려와
정중히 허리를 굽힌 다음 그의 가방을
받아들었다.
"우리 집사람이 죽었다던에 소식
들었나요?"
창기의 느닷없는 물음에 비서는 미처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은 것 같았다.
"네?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우리 집사람이 죽었다던에 소식 못
들었어요?"
않고 존대어를 사용한다. 젊은 비서
안춘수(安春洙)는 몹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사모님 말씀입니까? 소식 못
들었습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돌아가셨다면 회사에 연락이 있었을
텐데......."
그때 두 명의 사내가 그들에게 접근했다.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냉정한 분위기를
띠고 있는 사내들이었다.
"배창기 씨 되십니까?"
"아니 왜 그러십니까?"
안비서가 그들을 막아서며 되물었다.
"경찰입니다. 배사장님한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젊은 사내가 신분증을 꺼내 보이는데
ꠑ ꠑ煥릿?"형사"라는 붉은 굵은 글씨가 눈에
띄었다.
"제가 배창기입니다."
형사들을 바라보는 창기의 두 눈은 슬픈
빛을 띠고 있었다.
"실례입니다만...... 사모님에 대한 소식
들으셨겠죠?"
"네, 동생한테서 전화연락을
받았습니다."
"배미화 씨는 저희와 함께 있습니다.
여동생을 먼저 만나보시겠습니까, 아니면
사모님을 먼저......?"
"집사람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창기의 두 눈을 가리고 있는 안경이
갑자기 안개가 서리는 듯 뿌옇게 흐려진다.
"경찰병원 영안실에 있습니다."
"좀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네, 저희들 차로 모셔드리겠습니다."
창기는 비서를 돌아보았다.
"돌아가세요. 난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으니까."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안비서가 사뭇 어쩔줄 모르며 따라오려는
것을 창기는 그 특유의 나직한 소리로
제지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돌아가세요. 그리고
우리 집사람이 죽었다는 말은 당분간
비밀로 해둬요.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는......."
"네, 알겠습니다."
형사들을 따라 걸어가는 창기의 뒷모습을
안비서가 멀거니 쳐다본다.


9. 美國人

집에 도착한 배미화는 유밀라의 유품들
가운데서 그녀의 글씨가 씌어져 있는
것들만 골라내 형사들에게 보여주었다.
유밀라는 일기도 쓰지 않았고 가계부
같은 것도 적지 않았다. 때문에 그녀의
글씨가 적혀 있는 유품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배미화가 골라낸 것들은 유밀라가
남편의 생일때 그에게 써준 것으로 보이는
생일축하카드 그리고 아들에게 써준
생일축하카드와 크리스마스카드 따위가
전부였다.
그런데 그런 것들에 씌어 있는 유밀라의
글씨체와 유춘지가 김영대한테 보낸 편지의
글씨체가 비슷한 데라고는 조금도 없이
그것을 보고 당황했다.
"이건 ...... 아주 다른데요."
남형사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마형사는 적이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춘지와 유밀라가 동일인물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기대가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되면
유밀라를 살해한 범인의 정체는 모호해질
수밖에 없게 된다. 다시 말해 김영대가
범인일 가능성은 아주 희박해지는 것이다.
유밀라가 유춘지라는 가명으로 김영대한테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면 유춘지는 실재하는
다른 인물이라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유밀라의 백속에 왜 유춘지가 보낸 우편물
수령증이 들어 있었을까? 유춘지의 부탁을
받고 대신 편지를 부쳐준 다음 그 수령증을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를테면 유밀라가 유춘지라는 가명으로
김영대한테 편지를 보내되 직접 편지를
쓰지 않고 다른 사람한테 대필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경우도 가정해 볼
수 있다. 살인범이 유밀라의 신원을 숨기고
그녀를 유춘지라는 가공인물로 꾸미기 위해
백 속에다 그 특수우편물 수령증을
넣어두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결과적으로
김영대한테 살인혐의가 돌아가게 되어
있다. 김영대는 억울하게 살인범으로
몰리는 것이다.
마형사는 깊이 숨을 들여마신 다음
대학노트를 집어들었다. 조금 낡아보이는
그 노트는 장식장 서랍 속에서 찾아낸
대학노트는 두툼했다. 펴보니 갈피마다
단풍나뭇잎이며 들꽃 같은 것들이 제모습을
갖춘 채 들어 있었다.
그것들은 그렇게 잘려서 노트 갈피 속에
들어간 지 아주 오래 된 듯 바짝 말라
있었기 때문에 조금만 만져도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처럼 보였다. 그 노트는 거의가
그런 것들로 채워져 있었고, 마지막 서너
장만 볼펜으로 갈겨쓴 글씨들로 메워져
있었다. 그 글씨들은 카드에서 본 유밀라의
글씨와 비슷해 보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카드에 쓴 것처럼 또박또박 쓴 게 아니라
아무렇게나 갈겨 쓴 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1. Apartment(아파트) : 108,048,800
3. Blcony windows/12mm Color(발코니
새시, 유리) : 1,600,000
4. Upstairs/Twin glass 24mm(층계 새시,
유리) : 2,500,000
5. Build in furniture/3Cabinets
(붙박이옷장, 장식장) : 2,650,000
6. Carpet(카피트) : 965,500
7. Curtains(커튼) : 910,000
8. Monoleum(모노륨) : 352,000
9. Lamps, 8 deskLamps(전등, 스탠드) :
550,000
10. Lock(보조키) : 95,000
11. Clothes line(빨랫줄) : 20,000
12. Mirror/Bedrooms 2, Livingroom
(거울) : 360,000
13. 2 Showers(샤워기) : 414,000
ꠑ ꠑ? 14. Toilet paperhanger(휴지걸이) :
20,000
15. Bathroom shelf 2(화장실 선반) :
25,000
16. Bathroom Curtain 2(화장실 커튼) :
20,000
17. 4 Telephon/1 wireless(전화기) :
240,000
18. Color TV/26"remote Control
(텔레비전) : 750,000
19. Color TV/16"remote Control
(텔레비전) : 420,000
20. Color TV/146"remote
Control(텔레비전) : 340,000
21. Video/remote Control(비디오) :
675,000
22. Video Cleaning Tape(비디오
23. Video Tapes 3(비디오 테이프) :
15,000
24. Video Box(비디오 박스) : 50,000
25. Music Box(뮤직 오디오) : 857,000
26. Vaccum Cleaner(진공청소기) :
85,500
27. Washing Machine(세탁기) : 400,000
28. Refrigerator/290l(냉장고) :
465,000
29. Refrigerator/60l(냉장고) : 120,000
30. Micro Oven & Range(오븐 겸
전자레인지) : 398,000
31. Gas Cooker(가스레인지) : 155,800
32. Slow Cooker(슬로쿠커) : 38,000
33. Electric Rice Pot(전기밥솥) :
45,000
: 30,000
35. Coffee Machine(커피머신) : 30,000
36. 2 Radios(라디오) : 40,000
37. 2 Electric Pans : 60,000
38. Iron(아이론) : 20,000
39. Humidity Adjust(가습기) : 50,000
40. Personal Scale(체중기) : 40,000
41. Watch/Seiko(세이코시계) : 20,000
42. Alarm Clock(자명시계) : 30,000
43. Bed/double 160X200, 2 Side
Tables(침대) : 685,000
44. Bed/double 140X200, Side
Tables(침대) : 340,000
45. Bedsheet & quilt for 2
Beds(침대커버, 이불) : 393,000
46. 2 Fur Pillows(털베개) : 150,000
: 150,000
48. Leaher Sitting/1+2+3 Sitter, 1
table with glass(가죽소파세트) :
2,482,000
49. 2 Side Tables(보조탁자) : 150,000
50. 2 Writing Tables with glass,
Cabinet, 1 Leather Chair, 4 Chairs
(책상, 책장, 의자) : 1.584,000
51. Dining Table with glass, 6 Leather
Chairs(식탁, 가죽의자) : 958,000
52. Balcony Table with glass, 5
Chairs, Shelf((베란다 탁자. 의자,
흔들의자) : 700,000
53. Carpets/3 Pieces(카피트) :
1,200,000
54. 12 Pictures in Glassframe
(액자그림) : 500,000
55. 5 Handicraft Articles(수예품) :
500,000
56. Pearl Vase(자개화병) : 20,000
57. 12 Ceramic Vases(도자기) : 250,000
58. 6 Folding Screen(병풍) : 200,000
59. Decorations/4 gourds, 3 masks(탈
등 장식품) : 150,000
60. 3 Antiques/ small(고가구) :
120,000
61. Encyclopedia/30 books(백과사전) :
600,000
62. Law of Korea/3 books(대법전)
:120,000
63. Kitchen Material, Tableware,
Pot(부엌식기류) : 250,000
64. Coffee Set, Ice Cream Set
(커피세트 등) : 150,000
65. Crystal Glasses(크리스탈컵) :
200,000
66. Ceramic Beer Mag(도기맥주잔) :
30,000
67. Plants/big pot 10(화분) :200,000
68. Plants/small pot 10(화분) : 30,000
69. Candle holder(촛대) :40,000
70. Umbrella holder(우산꽂이) : 20,000

Total 146,485,100
Glory Heights 301Ho, Charles Mogendo
Apr 15, 1983

마형사는 그것을 끝까지 찬찬히 훑어보고
나서 배미화에게 물었다.
"이게 뭐죠?"
마형사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당황해
하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이게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살림살이 같은데요."
"살림살이치고는 너무 호화판인데요."
남형사가 말했다. 그것은 맞는 말이었다.
함계금액이 1억4천6백여만 원이나 되는
살림살이라면 엄청난 액수임에 틀림없다.
부자라면 또 몰라도 가난뱅이 형사들이 볼
때는 입이 딱 벌어지는 액수라고 할 수
있었다.
"여기 보니까 글로리 하이츠 301호에
사는 찰스 모겐도라는 외국인이 작성한 것
같은데요."
남형사가 마지막 부분을 짚어보이며
말했다.
영어로 적혀 있는 각 항목 옆 괄호 안에
씌어 있는 한글 글씨를 카드 글씨와 대조해
보면서 마형사가 말했다.
"그렇다면 찰스 모겐도라는 외국인이
작성해 주거나 불러준 것을 유밀라 씨가
정리한 것인가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찰스 모겐도--이 외국인이 유밀라와
관계가 있을까? 관계가 있었다면 어느
정도의 관계였을까?
"유밀라 씨가 미화씨 오빠와 결혼한 것은
정확히 언제였습니까?"
"4년째 됐으니까...... 85년
4월이었어요."
"그렇다면 이건 유밀라 씨가 결혼하기
훨씬 전에 작성한 거군요? 83년 4월
그 말에 배미화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배미화가 전화를
받은 다음 수화기를 남형사한테
건네주었다. 그것은 수사본부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전화를 끊고 난 남형사가
마형사한테 말했다.
"미화씨 오빠가 귀국했답니다. 지금
병원으로 갔답니다."
"병원에는 왜 갔죠?"
미화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부인의 시신을 먼저 봐야할 게
아니겠습니다."
마형사는 노트 갈피에서 말라붙어
납작하게 되어 있는 들꽃 하나를
집어들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그 들꽃은
주어도 바스라질 것처럼 보였다. 그 화려한
미모의 여인한테도 이런 가냘픈 들꽃을
꺾어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었던 감정이
있었을까? 그녀는 그런 감정을 내보이기
싫어 숨기고 있었던 게 아닐까? 아니, 그런
감정을 잃고 싶지 않아 이 노트 속에
꽃이며 낙엽들을 숨겨두고 있었던 게
아닐까?
"이걸 좀 뜯어가도 되겠습니까?"
마형사는 대학노트 마지막 부분 세 장을
집어보이며 미화에게 물었다. 노트를
통째로 들고가서 수사자료로 참고하다가는
가냘픈 들꽃이며 낙엽들을 모두 흐트러뜨릴
것만 같았기 때문에 마지막 세 장만
뜯어가려고 생각한 것이다.
미화는 노트를 받아 마지막 부분 세 장을
마형사에게 내주었다.
"찰스 모겐도라는 외국인 혹시
모르십니까?"
모른다는 대답이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마형사는 물었다.
"모르겠어요."
마형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화씨는 댁에 계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미화씨에 대한 조사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니까 집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언제라도 우리가 연락할 수 있게 댁에
계셔야 합니다. 약속하신다면 지금 우리와
함께 가지 않아도 좋습니다."
"약속하겠어요."
"장례 준비를 하려면 바쁘시겠습니다."
남형사가 깍듯이 말했다.
시동만 걸어둔 채 담배만 피워댔다. 그
곁에서 남형사가 찢어 가지고온 노트를
들여다보며 지껄여대기 시작했다.
"제1항목을 보면 1억8백만 원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것은 아파트 전세금이거나
구입비 같은데요. 끝에 4만8천8백 원이
덧붙어져 있는 걸 보면 복덕방비 아니면
세금 같은 게 가산된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무튼 그 아파트를
수리하는데 드는 비용이 1천만 원입니다.
그뿐만이 아니고 발코니에 12mm유리를 끼운
새시를 하는데 1백 60만 원이나 듭니다.
층계에 새시를 설치하는데는 그보다 많은
2백50만 원이나 됩니다. 빨래줄,
휴지걸이까지 계산해 놓은 걸 보면
철저하다 못해 지독하다는 생각까지
16인치, 14인지 등 3대나 적어놓았습니다.
여기에 적어놓은 항목대로 모두 구입했다면
정말 엄청난 돈이 들었을 겁니다."
"난 그걸 보고 모욕을 당한 기분이
들었어. 그건 필요해서 구입한다기보다는
일종의 낭비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자기
돈이라면 그렇게 흥청망청 쓸 수 있겠어?"
"그럼 남의 돈으로 이렇게 구입했다는
겁니까?"
"그런 생각이 들어. 모겐도라는 한
외국인이 빈 몸으로 한국에 들어와 한 살림
차리는데 누군가가 돈을 대준 것 같단
말이야. 돈을 대줄 사람이 있으니까
마구잡이로 써서 신청한 것 같아."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이해가 되는군요."
"십중팔구...... 아마 그랬을 거야."
"외국인들의 절약정신은 지독하기로
유명하잖아. 특히 한국 같은데 나와 있는
외국인들은 알뜰하다 못해 구두쇠로 소문이
나 있단 말이야. 쇠고기도 우리처럼
한꺼번에 몇 근씩 사가는 게 아니고 기껏
몇 g 몇백 원어치씩 사가니까 정육점
주인들이 혀를 내두르더라구. 그런 그들이
언제 귀국할지도 모르는 판에 제 돈 주고
집에다 텔레비전을 석 대씩이나
들여놓겠어? 그 목록을 보면 마구잡이로
사들이려고 한 의도가 역력히 나타나 있어.
집을 꾸미는데 자그마치 1억4천6백여만
원이나 든다는 계산인데 외국인이 제 돈
주고 그 짓을 하겠어? 재벌이 아닌 바에야
그런 미친 짓을 할 외국인이 어디 있겠어."
마형사는 차도로 들어서자 차의 속도를
ꠑ ꠑ譯「?杉?
"이건 유밀라가 결혼 전에 작성한
건데...... 그렇다면 모겐도라는 외국인과
유밀라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었다는 말이
아닐까요?"
"그렇다는 이야기이겠지. 글로리
하이츠가 어디 있는 거지?"
"잘 모르겠는데요."
"아마 호화 아파트나 빌라일 거야. 한번
찾아가 보라구. 가능하면 모겐도라는
외국인을 만나보는 것도 좋겠지."
남형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또 애먹겠는데요."
"굽실거릴 필요 없어."
마형사는 차도 오른쪽에다 차를
갖다댔다.
"알겠습니다. 찾아보겠습니다."
차를 출발시켰다.
남형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애를 먹겠다고
한 말뜻을 그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수사상 외국인을 상대하게 될 때
치러야하는 곤욕 때문에 남형사는 미간을
찌푸렸던 것이다.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들, 특히 미국인들은 수사에
협조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들은
도대체 한국의 수사관들을 상대해 주려고도
하지 않고 상대한다 해도 너무
오만불손하게 나오기 때문에 수사관들은
너나할 것 없이 곤욕을 치르게 마련이다.
그들의 그 오만불손한 태도 속에는 일등
국민으로서의 자만심과 한국인에 대한
멸시가 뿌리깊게 내포되어 있는 것이
뚜렷이 보인다. 그래서 한국의 수사관들은
것이다.

S호텔 스카이라운지에 근무하는 웨이터
안기홍은 마형사르 보고도 그냥
지나쳐갔다. 그래서 마형사가 그를
불러세웠지만 그래도 그는 마형사를
알아보지 못하고 처음 대하는 손님처럼
그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안군, 나 모르나?"
"글쎄요."
안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마형사를 쳐다보았다.
스카이라운지에서 안을 처음 만나본 것이
하루 전이었고 그와 김영대를 대질시켜
결정적인 증언을 들은 것이 바로 오늘
아침이었는데 그는 전혀 이쪽을 알아보지
가늘게 뜨는 것을 보고 마형사는 "아하, 이
친구가 시력이 굉장히 나쁘구나!"하고
생각했다.
"살인사건 때문에 우리가 만난 거 기억
안 나나?"
자리에 앉아 그렇게 말하자 그제서야
안은 마형사를 알아보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자넨 눈이 몹시 나쁜 모양이지?"
"네, 그래서 실수할 때가 많습니다."
"안경을 끼지 그래."
"콘택트렌즈를 끼었는데...... 하나를
잃어버렸습니다. 새로
맞춰야겠는데......."
"오늘 아침 자네와 대질시킨 그 범인
말이야. 그 사람이 정말 그 죽은 여자와
"네, 틀림없습니다."
말소리는 분명했지만 표정이 흔들리는
것을 마형사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그런데 말이야. 그자가 절대 아니라는
거야. 자기는 그 여자를 여기서 만난 적이
없다는 거야. 자네를 본 적도 없다는
거야."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제가 분명히
보았습니다."
"자네 증언이 매우 중요하단 말이야.
그러니까 그 사람을 다시 한번
만나줘야겠어. 다시 한번 만나서 좀 더
자세히 봐줘야겠어. 자네 지금 바쁘나?"
"네, 바쁩니다."
"그 사람 지금 경찰서 유치장에
있는데...... 그럼 어떡할까? 자네가
바쁘다는데 억지로 데리고 갈 수도
없고......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 그럴
필요없이 사진이나 좀 봐줘. 나중에 시간이
날 때 다시 만나보기로 하고...... 사진만
보고도 알 수 있지?"
"네, 알아볼 수 있습니다."
안은 마형사가 내놓은 한 남자의 명함판
컬러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숨을 죽인 채
그것을 들여다보고 나서 그는
"이 남자가 틀림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정말 틀림없나?"
"네, 틀림없습니다."
"오늘 아침 대질해서 보았던 그 남자가
틀림없단 말이지?"
"네, 그, 그렇습니다."
마형사는 당황해 하는 안의 표정을
차갑게 쏘아보았다.
"그럼 이 사진도 좀 봐주겠나?"
마형사가 또 하나의 사진을 꺼내
보여주자 안은 완전히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이, 이 사람은 아닙니다!"
안은 당황해서 머리를 흔들었다.
마형사는 사람들의 증언이라는 것이 얼마나
엉터리일 수가 있는가 하는 것을 새삼
확인하고는 적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머리를 흔들면서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이봐, 자네 증언은 완전히 엉터리야.
알겠어?"
안의 두 눈이 더욱 흐려지는 것 같았다.
그는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마형사를
바라보았다.
바꿀 수가 있으면 바꾸라고 권하고 싶어."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안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마형사는
첫번째로 보여줬던 사진을 가리켰다.
"이 사진은 오늘 아침 자네와 대질시켰던
그 사람 사진이 아니야. 알겠어? 황개라는
사람의 사진인데 그 사람은 그저께 이 호텔
지하 주차장에서 불에 타 죽었어. 이건
바로 그 사람 사진이란 말이야. 이제
알겠어?"
"그, 그럴 리가......."
안의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안간힘을 써보려는 그의 표정을 보면서
마형사는 두번째로 보여줬던 사진을
집어들고 흔들었다.
"이게 바로 오늘 아침 자네와 대질했던
사람의 사진인데 자네는 이 사람이
아니라고 했어. 자네 증언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지?"
안의 이마에 땀이 번지고 있었다.
"자네는 거짓말을 하고 있든가 아니면
확실하지도 않은 것을 사실처럼 단정해서
말하고 있는 거야. 어느 쪽이 맞나?"
안은 변명할 말을 찾고 있느 것 같았지만
그의 입에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자네 말 한 마디로 한 사람의 목숨이
왔다갔다 한다는 것을 모르나? 어떻게 그런
엉터리 증언을 할 수가 있지?"
마침내 안의 머리가 밑으로 떨어졌다.
"죄송합니다. 눈이 너무 나빠서......
잘못 본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눈
ꠑ ꠑ錚㏏??......"
안은 안절부절 못하면서 마형사를 마주
바라보지 못한 채 시선을 밑으로 떨구었다.
마형사는 그 앞에다 두 장의 사진을 나란히
놓았다.
"다시 한번 묻겠어. 이 사진들을 잘 보고
대답해 줘. 이중에 그저께 그 피살된
여자와 여기서 만난 남자가 누구야? 어느
쪽이 그 남자야?"
안은 대답을 못한 채 더욱 아래로 머리를
숙였다.
"대답 못하겠어? 이젠 자신이 서지
않나?"
마형사의 추궁은 더욱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잘...... 잘 모르겠습니다."
마침내 안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노려보다가 마지막으로 다시 물었다.
"정말 모르겠나?"
"네...... 모르겠습니다."
"진작 그럴 것이지. 괜히 헛수고했잖아.
생사람 하나 잡을 뻔했고 말이야."
"죄, 죄송합니다."
"자넨 엉터리야. 무책임하고 말이야."
마형사는 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벌떡 일어나 스카이라운지를 빠져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려다 말고 창가에 다가서서
초조한 모습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창문에 웨이터 안의
모습이 보였다.
"저기...... 그 사진 한번 다시
보여주시겠습니까?"
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마형사는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안은 아무 말 못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가 물러갈 기미를 보이지
않자 마형사는 두 장의 사진을 꺼내들고
돌아섰다.
"감사합니다."
안은 사진 두 장을 받아들고 한참 동안
그것들을 눈앞에 가까이 대고 들여다보더니
황개의 사진을 가리켰다.
"이 사람 같습니다. 확실히 말할 수는
없지만 이 남자가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마형사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 두 장을 비교해 볼 때 이쪽이 더
비슷하게 생겼다는 건가?"
"네......."
혼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
마형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유밀라와 황개...... 그 관계는 생각할
수도 없는 관계였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죄를 짓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슷하게 생겼다고? 흥, 웃기는
자식이군.
유밀라와 배미화는 올케와 시누이
사이다. 배미화의 약혼자인 황개와
배미화의 올케이자 유부녀인 유밀라 사이에
과연 모종의 관계가 있을 수 있을까?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마형사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머리를 흔들며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왔다.
그는 호텔 밖으로 나가려다 말고
커피숍으로 가서 창가에 자리를 잡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받쳐들고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같이 범죄자로
보인다. 사람들을 그런 눈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잘못된 생각일지도 모른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특히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상상을
뛰어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다.
누구보다도 그런 경우를 많이 보아온 내가
그것을 굳이 부인하려드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않은가.
웨이터 안기홍의 말이 믿을 게 못 된다고
치자, 그렇다해도 그의 말은 수사의 범위를
새로 확대시켜 주었다는 점에서 그런대로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관계란 생각해 보지도 못했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듣고난 지금은 그런 관계가 있을
수도 있다는 쪽으로 생각이 확대되고 있다.
새로운 발견인 셈이다. 처음에는 그 말을
듣고 코웃음이 나왔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물론 유밀라와 황개의 관계는
도덕적으로는 있을 수가 없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남녀의 관계란 것이 어디
도덕적으로만 성립되는 것인가. 그의
경험으로는 남녀관계란 것이 정상적으로
맺어지기보다는 부도덕하게 맺어지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를테면 형부와 처제
사이의 관계 같은 것 말이다. 형부와 처제
사이의 부도덕한 관계란 그야말로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관계가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을 그는
유밀라와 황개의 관계는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다.
마형사는 잔에 남아 있는 커피를 마저
마시고 나서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웬놈의 비가 이렇게 내리고
있을까. 이젠 그칠 때도 됐는데.......
유밀라와 황개가 불륜의 관계를
맺어왔다고 치자. 그 두 사람이 연달아
피살되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불륜의 관계를 맺어오던 두 사람이
함께 살해되었다는 것은 어쩐지
부자연스럽게 생각되지가 않는다. 그러기는
커녕 오히려 당연한 귀결로 생각된다.

글로리 하이츠를 찾는 데는 별로
어려움이 없었다. 시 건축과에 알아보니
고급 맨션아파트로 남산 순환도로변에
자리잡고 있었다.
플레이보이처럼 생긴 남달호는 택시를
타고 곧장 글로리 하이츠를 찾아갔다.
글로리 하이츠는 외국인 집단 거주지역
내에 세워져 있었다. 단지 주위는
철조망으로 막혀 있었고 입구에는
경비초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초소를
지키는 경비원들은 한국인들이 거주하는
일반 아파트 경비원들보다는 복장 같은
것이 한결 세련되고 거만스러워 보였다.
글로리 하이츠는 높은 지대에 자리잡고
있는데다 고층 아파트이기 때문에 전망이
걸리는 것 하나 없이 시원스럽게 열려
있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머리에 쓴 젊은 경비원이 초소 안으로
들어서는 남형사를 아래위로 훑으면서
물었다. 남형사가 신분을 밝히자 그는 금방
부드러운 표정을 짓는다. 초소 안에는
중년의 경비원이 또 한 명 앉아 있었다.
"혹시 여기에 찰스 모겐도라는 외국인이
살고 있습니까?"
"모겐도씨요?"
젊은 경비원이 아는 체를 하며 되물었고
중년의 경비원이 몸을 움직였다.
"네, 찰스 모겐도 씨 말입니다."
"모겐도라는 미국인이 살고 있긴
합니다만 지금은 없습니다."
"외출했습니까?"
"외출한 게 아니고 미국에 돌아갔습니다.
곧 돌아올 거라고 하는데...... 아직은
"몇 호실에 살고 있습니까?"
"301호실입니다."
글로리 하이츠는 동수가 한개뿐이었다.
"가족이 있습니까?"
"네, 정식 가족이라기보다는 한국
여자하고 동거생활을 하고 있죠."
"쓸데없는 말 함부로 지껄이지 마."
중년의 경비원이 눈을 흘기며 주의를
주자 젊은 경비원의 표정이 굳어졌다.
플레이보이의 눈빛이 중년 사내쪽을 향해
날카롭게 빛났다.
"난 수사경찰입니다. 수사상 필요해서
여기까지 찾아온 거니까 뭘 숨기거나 하지
말고 사실대로 말해 줘요.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당신을 여기서 데리고 나가 다른 데
가서 물어볼 수도 있어요."
쏘아붙이자 중년의 경비원은 멋적은 표정을
지으면서 자세를 바로했다.
"아시다시피 여긴 미국인
거주지역이고...... 외국인들이 특히
사생활을 침해당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조심하라는 뜻으로......."
중년의 경비원이 뭐라고 변명을 늘어놓는
것을 남형사가 말 허리를 잘랐다.
"외국인 거주지역이고 뭐고간에 나는
수사를 하고 있는 중이란 말입니다.
외국인의 사생활이 침해당하는 건 그쪽
사정이고 나는 그런 것까지 봐줄 수는
없습니다. 조씨는 언제부터 여기서
근무하셨죠?"
중년 경비원의 명찰에 영문으로 적혀
있는 이름을 바라보면서 남형사는 차갑게
"지난 82년부터 그누했습니다."
경비원이 딱딱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그 모겐도라는 외국인에
대해서 잘 알겠군요."
"잘은 모르지만...... 대강은 알고
있습니다."
그가 그 외국인 거주지역에 근무한 지
1년쯤 지나 빈 터에 글로리 하이츠가
들어서고 곧이어 찰스 모겐도라는 젊은
미국인이 301호에 입주했다고 했다.
처음에는 딱딱하게 구는 것이 묻는 말
이외에 입을 잘 열지 않을 것 같던 조씨는
일단 이야기를 시작하자 의외로 이것저것
잘 털어놓았다.
"모겐도씨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몇
평이나 됩니까?"
"그 넓은 아파트에 혼자 입주했나요?
아니면 가족과 함께 입주했나요?"
"처음에는 혼자 입주했는데...... 나중에
한국 아가씨가 하나 들어왔습니다. 한국
아가씨하고 결혼한 건 아니고 동거생활을
했습니다."
"그 집에 들어와 살다 간 여자들은 모두
미녀들이었습니다."
젊은 경비원이 곁에서 묻지도 않은 말을
덧붙여 말했다. 그 말에 남형사는 귀가
번쩍 뜨였다.
"그 미국인...... 여자를 자주 바꾸는
모양이지요?"
조씨는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는
젊은 경비원을 곁눈질로 흘기고 나서
마지못한 듯 입을 열었다.
사람 어디 있습니까. 경찰에 계시니까 하는
말인데...... 그게 어디 외국인들만
나무랄일입니까. 첫째 잘못은 한국
계집애들한테 있지요. 시집도 안 간 새파란
것들이 외국 남자들하고 얼굴 하나 붉히지
않고 버젓이 동거생활을 하고 있으니 정말
한심한 것들은 그것들이란 말입니다. 나도
딸을 두고 있는 입장에서 그애들 하는
짓거리를 보느라면 정말 속에서 불덩이가
치미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중년의 경비원은 얼굴에 노기까지 띠고
말했다. 그의 말은 정말 맞는 말이라고
남형사는 생각했다.
요즘 들어 부쩍 외국 남자들과
동거생활을 하는 한국 여자들이 많이 눈에
띈다. 일본 남자들과 현지처 계약을 맺고
노리고 몸을 팔기로 작정한 여자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그렇다치고, 그렇지
않은 여자들, 그러니까 높은 교육까지 받은
양가집 출신의 아가씨들이 부모 몰래
버젓이 백인들과 동거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스스럼없이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아가씨들이 유난히 백인 남자들을
좋아하니까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외국인들은 굴러들어오는 떡을 마다할 리
없겠고......."
남형사가 맞장구를 치자 조씨는 더욱
기세를 올려가며 말을 이었다.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에요. 올데갈데가
없어서 여기서 이러고 있지만 정말 눈꼴
사나울 때가 많습니다.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나라의 아가씨들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듭니다. 이건 숫제 외국인이라고 하면 신주
떠받들 듯하더라구요. 자기 부모들한테도
그렇게 하지는 못할 겁니다."
"외국인하고 실컷 즐기다가 나중에
외국인하고 헤어지고 나면 숫처녀
행세하면서 한국 총각하고 결혼할 거
아닙니까?"
"물론이지요. 그것도 좋은 집안 자식하고
결혼하겠지요."
"그런 아가씨와 멋모르고 결혼한 총각은
정말 억울하겠는데요."
남형사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하자
조씨는 미간을 잔뜩 찌푸려보였다.
"모르면 몰라도 알고 나면 억울해서 함께
데리고 살겠습니까. 억울하다기보다는
배신감을 느끼겠지요."
이쁜이 수술로 감쪽같이 처녀막을
재생한다니까 웬만해서는 모르겠지요."
젊은 경비원이 옆에서 거들고 나섰다.
그의 말은 정말 그럴듯하게 들렸다.
"한국 여자들이 정조가 강하고 어쩌고
하는 말은 다 옛날 말 같아요. 여기서
외국인들하고 동거생활하고 있는 한국
여자들도 그렇고 여기에 들락거리는
여자들을 보면 정조 같은 것은 처음부터
아예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아요."
"동거생활하는 여자들 말고 매일
들락거리는 여자들도 많은가 보지요?"
"아이구, 말도 마십시오."
조씨는 손을 내흔들었다.
"매일 여기에 들락거리는 아가씨들이
부지기수라구요. 안에 들어가서 뭘하는지는
애들을 외국인들이 가만두겠어요. 여기에는
한국 아가씨들하고 동거생활하지 않고 혼자
살고 있는 외국인들도 상당수 있는데......
그런 외국인들은 거의 매일이다시피
상대하는 아가씨가 바뀌지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아가씨를 바꿀 수가
있으니까 동거생활하는 것보다는 혼자 사는
게 훨씬 재미가 좋겠지요."
"모겐도라는 사람...... 상당한 미남인가
보지요? 동거하는 여자들이 자주 바뀌는 걸
보면......?"
"네, 키도 크고 아주 잘생겼습니다."
"지금 동거하고 있는 한국 아가씨는
몇번째 여자인가요?"
"글쎄요. 확실히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열번째는 더 되지 않나 생각됩니다."
6년 동안에 10여 명과 동거했다면 거의
반년에 한 명꼴로 여자를 바꾸었다는
이야기이다. 아무리 여자들이 꼬리를 친다
해도 무슨 재주를 가졌기에 동거녀를
그렇게 수시로 바꿔칠 수가 있을까.
남형사는 모겐도라는 미국인에 대해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평균잡아 거의 6개월마다 한 명꼴로
여자를 바꿔 들였군요."
"그런 셈이지요. 길게 가는 여자는 1년
넘게까지도 함께 사는데 어떤 애들은 한
달도 못 가 쫓겨나는 수도 있습니다. 대개
반년 정도 살다가 헤어지곤 합니다. 새
여자가 들어올 때마다 저것이 과연 몇 달쯤
살 수 있을까 생각하곤 합니다. 우리
딸들이다 싶으면 속에서 부글부글 화가
조씨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마침 경비실
앞을 지나가는 외국 남자와 한국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남형사도 그쪽을 쳐다보았는데
남자쪽이 머리가 희끗희끗한 초로인데 반해
여자는 아직도 앳된 기가 가시지 않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었다.
그런데도 한국 아가씨는 거리낌없이 그
외국인의 팔짱을 낀 채 뭐가 우스운지
깔깔대며 걸어가고 있었다.
"저건 정말 못 봐주겠는데요."
남형사의 말에 젊은 경비원이
끼어들었다.
"저런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요 앞에서
키스도 버젓이 하는데요 뭐."
"그래요? 한국 아가씨들은 변신의
천재들이군요."
슬그머니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혹시, 이 여자 모르십니까?"
사진을 들여다보던 조씨의 두 눈이
반짝하고 빛나는 것 같았다.
"이 여자...... 안면이 많은데요."
그 사진은 유밀라의 집에 있는 앨범에서
떼어가지고 온 것이었다. 손바닥만한
것으로 촛불 옆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유밀라의 얼굴을 중심으로 찍은 것이었다.
"어디서 봤습니까?"
"몇년 전 여기서 외국인하고 살던 여자
같은데요."
남형사는 긴장한 눈빛으로 조씨를
쏘아보았다. 혹시나 해서 사진을 보인
것인데 그것이 적중한 것을 보고는 그는
적이 놀라고 있었다.
않았습니까?"
조씨는 눈을 한번 굴리더니 손바닥으로
책상을 가볍게 쳤다.
"맞습니다! 이제 생각이 납니다! 그
미국인하고 동거생활하던 아가씨가
틀림없습니다. 기억이 납니다. 아마
모겐도씨가 첫번째로 동거생활한 여자일
겁니다."
남형사는 뛰는 가슴을 진정하느라고 조금
뜸을 들이고 나서 다시 물었다.
"그 미국인하고는 얼마나 살았나요?"
"한 1년 가까이 살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 여자가 제일 오래 살았을 걸요."
젊은 경비원이 덧붙여 말했다.
"당신도 이 여자를 기억하나요?"
조금 있으니까 모겐도씨가 이 여자하고
동거생활에 들어갔지요. 제가 짐까지
날라다준걸요."
"이 여자 이름을 아십니까?"
"이름까지는 모릅니다. 동거생활을 하는
여자들은 자기 본명을 한사코 숨기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럴만하다고 생각하면서 남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에 자식은 없었나요?"
"자식은 없었습니다. 외국인들은
동거하는 여자하고 사이에 절대 아기는
두지 않습니다. 골치 아픈 짓은 안하는
사람들이니까요."
남형사는 이번에는 모겐도의 이름으로
작성된 살림살이 리스트를 꺼내놓았다.
여자가 적어놓은 것 같은데 혹시 본 적
있습니까?"
경비원들은 호기심어린 눈으로 그것을
들여다보고 나서 고개를 흔들었다.
"본 적 없습니다. 하지만 이건 외국인이
새로 입주하면서 집안에 필요한 것들을
적어놓은 것 같은데요. 여기 연도와 날짜를
보니까 모겐도씨가 입주할 때와 시기적으로
일치하는데요."
젊은 경비원이 아는 체했다.
"이렇게 짐을 많이 들여놓는가요? 이
목록대로라면 굉장히 호화판일 텐데?"
"그건 보통이에요. 새로 입주할 때 보면
일류로만 싹 골라서 넣는다구요. 우리 같은
사람은 꿈도 못 꿀 것들이 많죠. 싫증이
나면 즉시 새것으로 바꾸기도 하구요.
전부 팔아치웁니다. 새 외국인이 들어오면
새것으로 전부 들여놓습니다. 이만저만
낭비가 아니죠."
그런 낭비는 물론 본인이 자기
호주머니에서 비용을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외국인들은
거의가 합작회사 또는 한국 회사에
주재사원 혹은 기술고문 등으로 초빙되어온
사람들인데 그들은 한국에 오기 전에
한국측에 치밀하게 요구사항을 제시한다.
이를테면 40평 이상의 아파트, 아파트에
필요한 고급가구 일체, 고급 승용차에
운전사, 가정부 등 본국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호화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조건을
요구한다. 한국측에서는 그것이 일방적인
횡포임을 알면서도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자기 돈 쓰는 것도 아니니까 별로
필요없는 것도 마구 사들이죠. 그리고 한
사람이 본국으로 돌아가고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새로 부임하면 가구를 또 새로
장만하는 거예요. 멀쩡한 것을 헐값에
팔아치우고 더 호화판 가구들을 들여놓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자기들 호주머니에서
나가는 돈은 얼마나 짜게 군다구요. 그래도
한국 사람들이 사는 일반 아파트에서는
명절때가 되면 돈들을 모아서 기만
원씩이라도 경비원들한테 줍니다. 여기서는
그런 거 일절 없어요. 크리스마스때 과자
한 봉지 정도가 고작이에요. 특별히
개인적으로 도와주면 팁이라고 500원
내놓습니다. 그런 건 받은 나도 얼굴이
화끈거리죠. 안 받으면 기분 나쁘게
그 사람들 그 깍쟁이 근성은 철저하다 못해
무서울 정도입니다. 우리가 배울 것도 있고
우리하고는 도저히 통할 수 없는 면도 있는
것 같아요. 절약정신은 본받을 만하지만 그
이기적인 사고는 정말 정나미가
떨어집니다."
조씨는 정말 정나미가 떨어진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도대체 그 모겐도라는 미국인의 직업은
뭡니까?"
"S자동차에 나가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기술고문이라고 하던데요."하고 젊은
경비원이 아는 체를 했다.
"아까 그 미국인 미국에 돌아갔는데 곧
ꠑ ꠑ促뭬틸?거라고 하셨죠?"
"네, 곧 돌아올 거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301호에 한번 들어가봐야겠군."
남형사가 몸을 일으키자 경비원들의
안색이 변했다.
"301호에 가시려구요?"
"네, 가면 안 됩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젊은 경비원이 말끝을 흐리면서 조씨의
눈치를 살폈다.
"미국인이 없더라도 동거하는 여자라도
만나봐야겠습니다. 집안도 한번
살펴봐야겠고......."
"저기...... 웬만하면 집안에까지
들어가서 조사하는 것만은 삼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만일
알기라도 하는 날에는 저희는......."
중년의 경비원이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말하는 것을 보고 남형사는
난감한 생각이 들었다.
"그 미국인이 알게되면 해고라도 시킨단
말입니까? 그런 수도 있나요? 난 장사꾼도
아니고 경찰 수사관인데 말입니다. 만일
그런 일이 발생하면 저한테 연락해
주십시오. 가만 있지 않을테니까. 난 지금
살인사건을 수사하고 있단 말입니다."
남형사의 화난 투의 말을 듣고
경비원들은 깜짝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아시겠습니까? 어떤 이유로든 수사를
포기하고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 그럼 모겐도씨가 살인혐의를 받고
있습니까? 그 사람을 체포하러 오셨나요?"
물었다.
"체포하러 온 건 아니고...... 뭐좀
알아보려고 왔죠. 확실한 건 우리도 아직
몰라요. 조사하다 보니까 여기까지 오게 된
겁니다."
"그렇다면 301호에 사람이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경찰이 방문할 거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이유 같은 건 말씀하시지 말고요."
"네, 알겠습니다."
살인사건 수사라는 한 마디에 경비원들의
태도는 금방 고분고분해졌다. 조씨가
인터폰으로 301호를 불렀다. 조금 있자
인터폰을 통해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조씨는 비굴할 정도로
굽신거리며 말했다.
찾아왔습니다...... 지금 301호를
방문하겠다고 하는데......."
"아니, 왜요? 무슨 일 때문에 그러나요?"
잔뜩 경계시에 차 있는 목소리는 맑고
싱그러웠다.
"글쎄,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젊은 형사분이 꼭 방문하게다기에
연락드리는 겁니다. 별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아무래도......."
"난 지금 샤워중이에요. 한 시간 후에
오라고 하세요."
인터폰은 일방적으로 끊어졌다.
"한 시간 후에 오시라는데요. 지금
샤워중이라서......."
조씨가 난처한 얼굴로 남형사를
쳐다보았다.
남형사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면서 경비실
밖으로 나가 글로리 하이츠 건물쪽으로
걸어가자 경비원들이 당황해서 쫓아나왔다.
"저기, 여보세요! 형사 양반!"
다급하게 소리쳐 불러도 남형사가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걸어가자
경비원들은 더 이상 어쩌지 못한 채 발만
동동 굴렀다.
아파트 건물 안으로 들어선 남형사는
계단을 통해 3층으로 올라갔다.
이윽고 301호 앞에 이른 그는 철제문
위에 부착되어 있는 플래스틱 명패를
확인했다. 거기에는 "Charles Mogendo"라는
영문 이름이 적혀 있었다. 찰스
모겐도...... 혹시 네가 살인범일지도
모른다는 생가깅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쳐갔다. 남형사는 차임벨의 버튼을
눌렀다.
안에서는 한참을 눌러도 응답이 없었다.
약이 오른 남형사는 계속 버튼을 눌러댔다.
네가 얼마나 도도한 계집인지 어디 보자.
외국놈하고 붙어사는 계집애가 왜 이렇게
건방지게 구는 거야. 마침내 안에서
인기척이 났다.
"누구세요?"
인터폰으 통해 들었던 목소리가 문
사이로 흘러나왔다.
"경찰입니다."
"아이, 한 시간 후에 오라고 했잖아요."
신경질적인 반응에 남형사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건 그쪽 사정이고 난 지금 좀
만나야겠습니다. 아주 급한 일이니까요."
건방지기 짝이 없다. 남형사는
모욕감으로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용건을 이야기할 테니까 문을 좀
열어봐요."
마침내 문이 열렸다. 그러나 완전히 열린
것은 아니고 얼굴만 조금 볼 수 있을
정도로 열렸고, 문 안쪽으로는 쇠줄이 걸려
있었다. 문 사이로 젊은 여자의 얼굴이
보였는데 머리칼은 물에 젖어 있었고
가슴으로부터 허벅지까지는 흰 타월로
감싸여 있었다. 욕실에서 바로 나온 것
같았다.
"신분증 좀 보여주실래요?"
두 개의 까만 눈이 아래위로 남자를
살펴본다. 남형사는 어금니를 깨물면서
신분증을 꺼내 문틈으로 디밀었다. 그녀는
"형사세요?"하고 물었다.
"보면 알 거 아니오."
자기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쏘아붙이자
그녀는 뒤로 물러섰다가 이윽고 쇠고리를
벗겼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그녀는 얼른
몸을 돌려 방쪽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는
뒷모습이 자그마하면서도 통통한 것이
볼륨이 있어 보였다. 물에 젖은 머리칼은
어깨 위로 흘러내려 있었고 타월 위로
드러난 어깨는 포동포동 살이 올라 있었다.
타월에 가려진 엉덩이가 유난히도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에 남형사는 거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통통한 몸매에 비해 타월
밑으로 뻗어내린 두 다리는 쪽 곧아
생각하면서 남형사는 현관을 지나 거실로
올라섰다.
거실은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다. 두터운 카피트의 감촉을
발밑에 느끼면서 그는 잿빛 가죽 소파에
조심스럽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거실 안을 정신없이 살펴보던 그의
시선이 장식장 옆 기둥에 가서 멎었다.
거기에는 신문지 반절 정도 크기의
컬러사진이 값비싸 보이는 액자 속에
끼워져 걸려 있었는데 사진의 주인공은
금발의 외국 남자였다. 남형사는
직감적으로 바로 저자가 찰스 모겐도구나
하고 생각했다.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는 그 외국
남자는 40대 중년으로 보였는데 미국 배우
미남이었다. 얼굴에는 자신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장식장 위에도 액자가 하나 세워져
있었는데 그 안에는 방금 본 아가씨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비키니 차림의
전신 컬러사진이었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모래밭 위에 서서 웃고 있는
모습을 찍은 것이었는데 파란 색 비키니
수영복에 아슬아슬하게 가려진 몸매가
바다빛과 어울려 싱싱하고 탐스러워
보였다. 저렇게 예쁜 아가씨가 미국인의
노리개가 되다니. 그는 은근히 화도 나고
안타까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윽고 방안으로 들어갔던 아가씨가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는 짧은 핫팬츠에
어깨걸이 끈만 달린 노란 색의 셔츠
한손으로 계속 머리를 털면서 그녀는
남형사와 엇비슷하게 보이는 자리에 털썩
몸을 던졌다. 조금도 방문객을 경계하거나
두려워하는 빛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어떻게 보면 바보스러울 정도로 천지스러워
보이는 그런 표정으로 남형사를 쳐다본다.
몸을 많이 노출시킨 그녀의 대담한
차림에 남형사는 잠시 눈이 부셨다. 그녀의
허연 허벅지와 포동포동 살이 올라 있는
어깨,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은 탓으로
셔츠 위로 도드라져 보이는 젖꼭지, 머리를
만지기 위해 팔을 움직일 때마다 살짝살짝
보이는 겨드랑이 밑의 검의 털들이 시야를
어지럽히는 바람에 그는 잠시 멍청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까만 눈을 반짝이며 쳐다보는 모습에서
남형사는 얼핏 백치미 같은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얼굴은 예쁜데 머리 속은 텅 빈
아가씨구나. 그러니까 중년의 미구
남자하고 동거생활하고 있겠지. 제대로
머리가 박혔으면 이런 생활을 할 리가
있겠어.
"저 사람이 찰스 모겐도 씨입니까?"
남형사는 턱으로 기둥에 걸려 있는
사진을 가리켰다.
"네, 그래요."
"그 사람하고는 어떤 사이입니까?"
"애인 사이에요."
거침없는 대답에 남형사는 기가 질리는
것을 느꼈다.
"그 사람은 몇 살이고 아가씨는 몇
"미스터 모겐도는 마흔여덟...... 나는
...... 몇 살로 보여요?"
장난기어린 눈으로 형사를 바라본다.
짝짝 씹어ㅐ는 껌소리가 여간 귀에
거슬리지가 않는다.
"스물서너 살......?"
"어머, 그렇게 많아 보여요?"
어깨를 으쓱하면서 두손을 벌리는 것이
영락없이 미국인 흉내이다.
그러고보니 그녀는 한국말을 하는데도
말투까지 혀꼬부라진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럼 그렇게도 안 됐나요?"
"스물한 살이에요."
그녀는 당당히 말했다.
"그럼 아버지뻘이나 되는 사람하고
동거생활하고 있단 말입니까? 더구나
남형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상대방의
치부를 건드리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그녀는 얼굴 하나 붉히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형사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아버지뻘 되는 사람하고 살면 뭐 안
되나요?"
하도 뻔뻔스럽게 나오는 바람에 당황한
쪽은 오히려 남형사였다.
"뭐 안 된다는 건 아니지만......."
"그건 개인 사생활이잖아요. 서로
사랑하면 나이차 같은 게 무슨 문제예요.
사랑에는 나이도 국경도 없잖아요."
남형사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녀를
멀거니 쳐다보기만 했다. 이렇게 단순한
생각을 가지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이런 아가씨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인가
보지요?"
"네, 죽도록 사랑하는 사이에요.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떨어져 살기가 싫어서
합친 거예요."
당돌하고 맹랑한 아가씨이다. 이런 것은
바보이기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닐까.
"사랑이라는 게 그토록 대단한 겁니까?"
"그럼요. 대단하죠. 사실 사랑을 빼고
나면 뭐가 또 있겠어요."
"단순명쾌하군요. 사람들은 지금까지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많은 잘못을
저질러왔지요. 이를테면 남의 남편을
빼앗아가면서 사랑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말이지요. 아무리 악이라도
사랑이면 다 통한다는 식의 생각은 너무
"미스터 모겐도는 독신이에요."
그녀가 딱잘라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아가씨
직업은 뭡니까?"
그는 유리 탁자를 내려다보았다. 탁자
밑에는 "고급 일본어"라는 교재 한 권이
놓여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들었다.
겉장을 넘기자 "E여자전문대학 일어과
2학년 박명희"라고 적혀 있었다.
"학생이에요."하고 그녀가 말했다.
"E여전에 다닙니까?"
"네, 일어과에 다니고 있어요."
별로 숨기려고 하는 구석도 보이지
않는다.
"부모님도 이런 생활을 하고 있다는 걸
"아뇨. 몰라요. 알릴 필요 없잖아요."
그녀의 부모는 멀리 떨어진 지방 도시에
살고 있다고 했다. 아버지가 공무원인데다
정미소까지 하고 있어서 생활은 비교적
윤택한 편인 것 같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서울에 올라와 언니 집에 얹혀 살면서
학교에 다닌 그녀는 잔소리가 심한 언니와
자주 다투다가 어느 날 아르바이트를
한답시고 집을 뛰쳐나와서는 미국인과
동거생활에 들어갔다고 했다.
"모겐도씨하고는 어떻게 알게 됐나요?"
"친구 소개로 알게 됐는데...... 미스터
모겐도가 친구보다 나를 더 좋아했어요."
"알게된 건 언제이고 동거생활에 들어간
건 언제였나요?"
"지난 4월에 처음 알았고, 동거생활한
남형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여대생이 부모 뜻을 거역하고 이렇게
외국인과 동거생활해도 되는 건가요?
부모님이 피땀 흘려 번 돈으로 서울까지
유학을 보냈는데 공부는 하지 않고 이런
생활을 하다니 이게 과연 옳다고
생각하나요? 제정신을 가지고 있다면 학생
한번 잘 생각해봐요."
갑자기 공격적으로 변한 말투에 그녀는
비로소 조금 당황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못마땅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졸업하면 우린 결혼해서 미국으로 갈
거예요. 아저씨가 간섭할 일이
아니잖아요."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말에 남형사는
상대하자니 가슴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 말마따나 남의
사생활은 간섭할 것이 못 된다. 그녀가
누구와 무슨 생활을 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래요. 내가 간섭할 일은 아니에요.
하지만 아가씨가 한심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녀는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제가 보기엔 아저씨가 더 한심한걸요."
"내가 왜 한심하죠?"
"아저씨 같은 미남이 형사 같은 걸
하니까 그렇죠."
남형사는 따귀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미남이라고 불러주니 듣기에
안 좋은 것은 아니지만.
"형사가 어째서요?"
잡으러 다니는 게 좋으세요?"
그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녀의
단순하고 거침없는 말을 꺾을 수 있는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내가 졌소. 아가씨 말마따나 형사라는
직업은 그야말로 한심하고 따분하기 짝이
없지. 하지만 누군가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알아야 해요."
그녀가 샐쭉 웃었다.
"다른 직업도 많잖아요. 왜 아저씨 같은
미남이 하필이면 형사 같은 걸 해요?"
"그렇다면 왜 아가씨 같은 미인이
하필이면 마흔여덟 살이나 먹은 외국
남자하고 동거생활을 하는 거지요?"
"아까 말했잖아요. 사랑하기
때문이라고요."
건가요?"
"전 그렇다고 생각해요. 전 사랑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우리는
결혼할 거예요."
"그 사람이 결혼해 주겠다고 했나?"
"네, 학교 졸업하면 결혼식을 올리자고
했어요."
여기서 그녀의 목소리는 잔뜩 들뜨는
것처럼 들려왔다. 그녀는 미스터 모겐도가
굉장히 부자라는 등 그에 대한 칭찬을 잊지
않았다. 돈이 많은 미국 남자의 아내가
되어 미국에서 행복한 결혼생활을 꿈꾸고
있는 스물한 살 난 여대생의 철딱서니없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남형사는 더없이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한심한
계집애가 또 어디 있을까. 그는 따귀라도
"기분 나쁘게 들릴지 모르지만......
모겐도씨의 여자 관계가 복잡하다는 걸
모르나요? 지난 6년 동안에 여기서 살다
나간 한국 여자가 10여 명이나 된다고
하던데...... 그래도 그의 결혼 약속을
믿을 수 있나요?"
"많은 여자들이 거쳐간 거 다 알고
있어요. 그거야 뭐 미스터 모겐도가
여자들한테 인기가 있으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요? 전 그런 거 상관하지 않아요.
현재가 더 중요하니까요. 미스터 모겐도가
결혼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그거야 뭐 할
수 없죠. 하지만 나도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죠."
아랫입술을 꼭 깨문다.
"당하지 않으면 어떡 하겠다는 거죠?"
구김살이 없다기보다 거침이 없다.
될대로 돼먹은 20대 한국 아가씨의 전형을
보는 것만 같아 그는 땡감을 씹은 것처럼
입안이 떫었다.
"그런데 아저씨, 그런 거 물으려고
오셨어요?"
"그런 것 저런 것 좀 알아보려고
왔어요."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데요?"
그녀가 다리를 포개는 바람에 하체의
볼륨이 풍선처럼 부풀어오르는 것 같았다.
어깨끈이 느슨해지면서 금방이라도
젖가슴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살인사건 때문에 왔어요."
"네? 살인사건이라고요?"
그녀의 두눈이 휘둥그래졌다. 남형사는
"수년 전 여기서 모겐도씨하고
동거생활하던 여자가 살해됐어요.
유밀라라는 여자인데...... 이 여자 혹시
모르나요?"
남형사가 불쑥 유밀라의 사진을 내밀자
박명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머리를
흔들었다.
"몰라요. 처음 보는 여자예요. 그런데
어떻게 죽었나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는 듯했다. 그녀가
포갰던 다리를 내렸다. 그녀가 위축되는
것을 보고 남형사는 기분이 좋아졌다.
"호텔 방에서 목졸려 죽었어요. 물이
가득 채워져 있는 욕조 속에서 시체로
발견됐어요."
그는 그녀를 놀라게 하기 위해 되도록
박명희는 더 이상 막돼먹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온몸을 움츠리면서 두려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이 여자 여기에 오지 않았어요? 경비원
말로는 놀러오는 것을 봤다고 하는데?"
남형사는 그녀의 눈앞에다 유밀라의
사진을 흔들어보였다.
"아아뇨, 전 보지 못했어요. 처음 보는
여자예요. 미, 미스터 모겐도가 그 여자를
죽였나요?"
"아직 몰라요. 범인이 누군지는 곧
밝혀질 거요. 모겐도씨는 언제
출국했나요?"
그녀는 벽에 걸려 있는 달력을 쳐다보고
나서 대답했다.
"지난 7월 19일에 출국했어요."
19일이면 유밀라가 피살된 날이다.
남형사의 사나워진 눈초리에 박명희의 몸이
더욱 움추러드는 것 같았다.
"19일 몇 시에 출국했나요?"
"밤에 떠났어요. 9시 30분
비행기였어요."
"어떻게 그렇게 정확히 알고 있죠?"
"제가 공항까지 따라갔기 때문에 알고
있어요."
유밀라가 피살된 시간은 넉넉잡고 7월
19일 오후 5시에서 7시 사이로 밝혀졌다.
피살된 시간을 오후 7시로 잡더라도 9시
30분까지는 2시간 30분의 여유가 있다.
모겐도가 범인이라면 그는 유밀라를 살해한
후 여유있게 출국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가 범인일까? 왜 하필 그 날 그 시간에
날짜와 시간이 들어맞는다. 그가 만일
범인이라면 체포하기는 이미 글렀다.
"왜 미국에 갔나요?"
"갑자기 볼 일이 생겼다고 하면서
갔어요. 곧 돌아올 거예요."
"언제 돌아온다고 했나요?"
"확실한 날짜는 말하지 않았어요. 일이
끝나는 대로 곧 돌아올거라고만 말했어요.
그를 범인으로 생각하세요?"
공포로 그녀의 두눈은 크게 확대되어
있었다. 남형사는 괜히 살인사건을
이야기해 주었다고 생각했다. 만일 그녀가
모겐도에게 국제전화라도 걸어 경찰이
찾아왔었다고 말을 해주면 그는 한국에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지는 않아요. 하지만 아직
모겐도씨의 미국 연락처를 알고 있나요?
전화번호같은 거......?"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몰라요."
남형사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한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맨살에 손이 닿자 그녀는 흠칫하고 놀랐다.
그러나 피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남형사는 살이 포동포동 오른 그녀의
어깨를 사랑스러운 듯이 어루만지다가
갑자기 꽉 움켜쥐었다.
"박양, 거짓말하면 안 돼. 만일 모겐도가
살인범이라면 어떻게 해야지? 말해봐. 그를
보호하는 게 옳을까 아니면 법의 심판대에
세우는 게 옳은 일일까?"
손바닥에 전혀져 왔다. 그녀는 이제 완전히
위축되고 있었고 반면 남형사는 위압적인
존재로 변해 있었다.
"말해 봐. 어떻게 해야지?"
그는 매끄러운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법의 심판대에 세우는 게 옳다고
생각해요."
그녀가 눈을 밑으로 내려깐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손의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상대방의 두눈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경찰 수사에 협조해야 하지
않을까? 그게 옳은 일 아닐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협조하지 않으면...... 나는
학교에 그리고 집에다 알릴 수밖에 없어.
말이야."
"제발 그건 안 돼요. 시키는 대로 협조할
테니까 그것만은 제발......."
"알겠어. 모겐도라는 자는 한국 아가씨와
결혼할 사람이 아니야. 여기서 살던
아가씨들이 모두 모겐도와 결혼할 것이라는
환상 속에서 동거생활을 했지만 아무도
결혼까지 가지 못하고 모두 쫓겨났어. 단지
외국 남자의 노리개로서 몸만 망치고
말이야. 학생도 결국 그렇게 끝나고 말
거야. 박양이 내 동생이라면 난 지금
죽도록 때려줬을 거야. 그리고 당장 끌고
갔을 거야."
박명희의 고개가 밑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빨갛게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톱을
잡아뜯고 있었다.
환상에서 빨리 깨어나는 게 좋아. 그건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내 말 알아듣겠어?"
그녀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형사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
앞에다 메모지를 꺼내놓았다.
"여기다 모겐도의 미국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줘요."
그녀는 소리없이 일어나 방안으로
들어가더니 수첩을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수첩에 적힌 것을 보면서 메모지에다
모겐도의 미국 주소와 전화번호를 옮겨
적었다. 그것은 모겐도가 거주하고 있는
집의 주소와 전화번호였다. 그의 주소지는
뉴욕에 있었다.
"그 사람이 근무하고 있는 미국 회사
이름은 뭐지?"
그 회사의 미국 현지 연락처는 알지
못한다고 그녀는 말했다.
"한국에서는 무슨 일을 하고 있지?"
"S자동차회사에 기술고문으로 나가고
있다고 들었어요."
그것은 경비원들의 말과 일치했다.
"지금 모겐도한테 전화걸어봐요."
"미국으로 말인가요?"
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미국으로 말이야. 거기는 지금
이른 아침일 테니까 집에 있을 거야.
눈치채지 못하게 보고 싶어서 전화걸었다고
말하란 말이야. 그리고 언제 한국에
돌아오는지 물어봐. 보고 싶으니까 빨리
와달라고 말해."
그는 그녀에게 보다 구체적으로 통화해야
든 그녀는 그가 시키는 대로 뉴욕의
모겐도에게 전화를 걸었다.
같은 회선에 연결되어 있는 전화기는 두
대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무선전화기였다.
박명희가 유선전화기로 전화를 걸고 있는
동안 남형사는 무선전화기의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신호가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스위치를 올린 다음 그것을 귀에다
갖다댔다.
"헬로! 헬로! 여보세요! 미스터 모겐도?"
"음...... 누구지?"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대방은
의외로 한국말을 좀 할 줄 아는 것 같았다.
"저예요! 미스 박이에요!"
"아, 미스 박 갑자기 웬일이지?"
"보고 싶어서 전화걸었어요. 나 보고
?몇명
옷 벗기는 것쯤은 손가락 ꠑ ꠓ싶지 않으세요?"
"아니야. 보고 싶어."
"언제 돌아오세요?"
"일 주일쯤 후에나 가게 될 거야."
"싫어요!"
그녀가 갑자기 흐느끼기 시작했다.
거짓으로 그러는 줄 알고 쳐다보니 그녀는
정말로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남형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나 다른 남자하고 결혼할 거예요."
"그게 정말이야?"
"빨리 돌아오지 않으면 결혼해 버릴
거예요.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게 됐어요.
부모님이 정해 줬는데 아주 매력적인
남자예요. 미스터 모겐도보다는
못하지만....... 난 미스터 모겐도하고
헤어지는 거 싫단 말이에요."
그녀의 우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남형사는
그녀의 기막힌 연기에 속으로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다른 남자하고 결혼해도 좋아요?"
"안 돼! 기다려. 곧 갈 테니까 기다려!"
"언제 오실 거예요? 빨리 오시지 않으면
가버릴 거예요."
"이삼 일만 기다려! 늦어도 24일까지
가겠어!"
"24일까지는 오셔야 해요! 사랑해요!"
"오, 미스 박 사랑해! 가면 안 돼요!
24일까지 갈 테니까 기다려줘요."
"사랑해요!"
그녀는 수화기를 동댕이치듯 내려놓고
나서 반짝이는 눈으로 남형사를
쳐다보았다.
ꠑ ? "아, 정말 잘했어요. 아주 멋지게
해냈어."
남형사의 말에 그녀는 눈물을 훔치면서
백치 같은 미소를 지었다.


10. 女人의 과거

마인이 배창기를 처음 보았을 때 느낀
것은 그가 몹시 조그만 사내라는 점이었다.
그는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는 훨씬 작아
보였다. 배미화와 같은 피를 나눈 오누이
관계인 것을 생각하면 그녀에 비해 그는
너무도 왜소해 보였다. 과연 두 사람이
오누이 사이일까 하고 의심이 들 정도로.
그는 아내의 시신 앞에서 울음을 삼키며
오열했다. 보는 사람들한테 가여운 생각이
들 정도로 어깨를 떨면서 흐느꼈다. 그의
비통해 하는 모습을 차마 끝까지 볼 수가
없어 마형사는 먼저 시체실을 빠져나와
밖에서 그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배창기는 벌겋게 충혈된
훔치고 나서 안경을 도로 끼었다.
그가 갑자기 쓰러질 듯 비틀거렸기
때문에 마형사는 그의 팔을 잡아주었다.
손에 와 잡힌 그의 팔뚝은 여자처럼 가냘픈
느낌이었다. 마형사는 자신의 차에 그를
태웠다. 그에게 위로가 될만한 말을 한
마디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형식적인
말밖에는 생각나지 않아 그대로 잠자코
있었다.
마형사의 낡은 차는 시체실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한 대 피우시겠습니까?"
무거운 침묵을 깨고 마형사가 배창기에게
담배를 권했다. 배창기는 조그만 손을
내밀어 담배 한 개비를 뽑았다. 마형사가
라이터불을 켜주자 그는 거기에다 담배를
가라앉지 않았는지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마형사도 담배에 불을 붙였다.
"범인은 누굽니까?"
배창기가 조그만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 모릅니다. 수사본부에 함께 좀
가서 말씀을 나누는 게 좋겠습니다."
마형사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
"제 사무실로 가는 게 어떨까요?"
"사무실이 어디 있습니까?"
"강남에 있는 호텔 안에 있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 호텔 말입니까?"
"네, 거기에 있습니다."
"수사본부보다는 거기가 좋겠군요.
구경도 할겸......."
마형사는 그것도 괜찮은 일이라 싶어
창기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차도로 들어서자 마형사는 적극적으로
창기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저한테 무슨 하실 말씀은 없습니까?
수사에 도움이 될만한......."
"글쎄요.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차 속은 금방 담배연기로 가득 찼다.
마형사는 차창을 조금 밑으로 내렸다.
"유밀라 씨가 살해될만한 무슨 이유 같은
것 말입니다. 누구한테 원한을 샀다던가
아니면 실례되는 말씀입니다만 다른 남자
관계 같은 것이 있었다던가...... 아무튼
의심이 가는 것이 있으면 아무거라도
좋습니다."
창기가 창문을 더 밑으로 내렸다. 차들이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가듯 달려가고
"아내가 살해될만한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 사람은 착하고 명랑했기
때문에 누구한테나 호감을 샀습니다."
"두분 사이는 어땠습니까?"
창기는 한참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다가 대답했다.
"우리는 부부 이상이었습니다."
"그건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는 여느 부부와는 좀 달랐습니다.
단지 부부 사이라기보다는 연인 관계 같은
감정을 서로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여느 부부들보다는 더 깊이
사랑했다는 말씀인가요?"
"네, 그런 셈이지요."
횡단보도 앞에는 차들이 많이 밀려
있었다.
내용을 알고 계십니까?"
"대강 들었습니다."
"그 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발 이놈의 비 좀 그쳤으면 좋겠다고
마형사는 생각했다.
창기는 그의 물음에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그 물음에 대답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마형사는 다시 입을
열었다.
"두분은 몹시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여느 부부들 이상으로 금실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배사장님께서 외국으로 출장간
사이에 부인께서는 호텔 방에서 어떤
남자한테 살해당했습니다. 그것은 즉
부인께서는 남편이 모르는 남자 관계가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거
배창기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머리가
얹혀져 있는 목은 더욱 연약해 보였다.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너무 예쁘다
보니까 어떤 못된 놈한테 강제로 끌려가서
그렇게 당했을 겁니다. 외간 남자와 그런
짓을 할 여자가 아닙니까."
"대낮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강제로
호텔 방에 끌려갈 수 있을까요?"
마형사는 시원스럽게 말을 꺼낼 수가
없어 답답했다. 상대는 자기 아내의 불륜을
믿으려 들지 않고 있었다. 그는 유밀라에
비해 너무 순진한 것 같았다.
"강제가 아니면 유인되어 들어갔겠지요.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어떤 이유 말입니까?"
창기는 천천히 머리를 흔들었다.
다른 남자와 그럴 여자가 아닙니다. 절대
그럴 여자가 아닙니다."
그의 말투는 자연스럽지가 못하고
억지같이 느껴졌다. 아내의 불륜을 믿고
싶지 않으니 그렇게 억지를 쓸만도 할
것이라고 마형사는 생각했다.
몰려 있던 차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탁이 있습니다."
"네, 말씀하십시오."하고 창기가 말했다.
"범인을 제 손으로 잡게 해주십시오."
힘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연약한
목소리에 마형사는 쓴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나약한 사내가 어떻게 살인범을
잡는단 말인가.
"그거야 얼마든지 좋습니다. 하지만
범인을 어떻게 잡는다는 겁니까? 잡을 수
"어떻게든 잡아내고야 말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더욱 작게 들렸다.
그런데도 묘하게도 거기에서는 강한 의지가
느껴지고 있었다.
"직접 범인을 잡아서 복수하시겠다는
겁니까?"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마형사는 그 조그만 사내가
복수심에 불타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앞이 트이자 그는 차의 속도를 빨리 했다.
"그건 안 됩니다. 복수는 안 됩니다.
그건 또 하나의 비극을 자초하는 것에
불과하니까요."
창기는 계속해서 침묵했다.
"배미화 씨의 말을 들으면...... 고인에
대해 이런 말을 해서 안 됐지만......
유밀라 씨는 배사장께서 출장간 사이에
외박이 잦았다고 하던데 알고 계셨습니까?"
"몰랐습니다."
창기는 조용히 대꾸했다.
"부인의 남자 관계가 복잡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러 군데서 발견하고
있습니다."
"내 아내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십시오."
창기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마형사는 잔인하게 그를 몰아붙여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인정할 것은 인전하고 들어가야 합니다.
감정으로 사건이 해결 되는 건
아니니까요."
창기는 감정을 삭이려는 듯 가만히
한숨을 내쉬고 나서 말했다.
"장례나 치르고 나서 아내 문제를
이야기했으면 합니다."
"우리는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습니다.
한시가 급하니까요."
차가 신호에 걸려 멈춰섰을 때 마형사는
김영대의 사진을 꺼내 배사장에게
보여주었다.
"이 사람 혹시 아는 사람 아닙니까?"
"모르는 사람입니다."
"유밀라 씨를 살해한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혐의점이 벗겨지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붙들고 있을 수가 없게 됐습니다.
우리가 잘못 짚은 것 같습니다."
마형사는 또 하나의 사진을 배사장에게
건네주었다.
"이 사람은 어떻습니까? 아는
"네, 여동생의 약혼자입니다. 황개라는
자이죠."
자동차의 물결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약혼을 한사코 반대하셨다고
하던데 정말입니까?"
"네, 반대했습니다."
"왜 반대했습니까?"
"뒷조사를 해보니까 질이 좋지 않은
자였습니다. 전과가 서너건이나 되고 하는
일도 신통치가 않았습니다. 인상도 좋지
않았습니다. 여동생한테는 돈을 노리고
접근하는 자들이 많지요. 이 자는 그런
자들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배사장은 황개의 사진을 흔들어보였다.
"그런데 결국 두 사람의 약혼식을 막지는
못했군요?"
"네,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내 누이가
고집이 하도 세서......."
"이제 안심하셔도 되겠습니다. 두 사람은
결혼할 수 없게 됐으니까요. 알고 계시죠?"
"무슨 말씀인지......?"
창기가 의아한 표정으로 마형사를
돌아보았다.
"모르십니까? 황개 씨가 죽은 것
말입니다."
"금시초문입니다."
"아, 아직 모르고 계셨군요. 배미화 씨가
말씀 안 드렸던가요?"
"아뇨, 그 사람이 죽었습니까?"
"네, 누군가가 불에 태워 죽였습니다.
아주 끔찍한 사건이었죠."
"그래요?"
움직였다.
저만치 호텔 로미오와 줄리엣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부인께서 피살된 것은 지난 19일 저녁
6시 전후...... 그러니까 5시에서 7시
사이였습니다. 황개 씨도 그 비슷한 시간에
살해되었지요. 장소는 같은 S호텔인데, 한
사람은 방안에서 다른 한 사람은 지하
주차장에서 살해되었습니다."
마형사의 이야기가 계속되는 동안 창기는
얼어붙은 듯 가만히 앉아 있었다. 차가
호텔 정문 앞에 도착했을 때에도 그는 내릴
생각을 하지 않고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를 알아본 도어맨이 달려와
문을 열어주자 그제서야 그는 잠에서
깨어난 표정으로 차에서 내렸다.
지니고 있었다. 갈색 대리석으로 포장된 그
건물은 15층 높이에 200여개의 객실을
갖추고 있는 특급 호텔이었다. 호텔 정문
위 높은 곳에는 "Romeo & Juliet"이라는
흰색의 영문 글자가 높이 걸려 있었다.
겉보기에는 왜소하고 병약해 보이는
배창기가 일단 호텔 안으로 들어서자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와 마주친 호텔
직원들은 하나같이 정중히 허리를 굽혀
인사했고 그가 걸어가는데 걸리는 것이
없도록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주었다.
총지배인과 그밖의 간부 몇 명이 연락을
받고 달려나와 그의 뒤를 따랐다. 그의
위세가 그토록 대단한 것을 보고 마형사는
그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더 이상 조그맣지도 병약해 보이지도
쥐고 있는 무서운 호텔 주인이었다.
"사모님꼐서 그런 변을 당하시다니 정말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10층에 자리잡고 있는 집무실에 일행이
들어서자 총지배인이 머리를 조아리며
배사장에게 말했다.
"안비서한테 소문을 내지 말라고
했는데...... 듣지 못했나요?"
배창기가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자
총지배인은 어쩔줄 몰라했다.
"비밀로 하세요."
"알겠습니다."
배창기가 손을 들어 나가라는 표시를
해보이자 따라들어 왔던 간부직원들이 그
손짓에 아무 말 못하고 뒷걸음질로 밖으로
사라졌다.
엉거주춤 서 있는 마형사에게 배사장이
자리를 권했다. 마형사가 자리에 앉자 그는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홈바쪽으로
걸어갔다.
"한잔 하시겠습니까?"
"네, 시원한 맥주를 한잔 부탁합니다."
잠시 후 창기는 마형사에게는 맥주를
따라주고 나서 자신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칵테일을 마셨다.
카피트가 깔린 그의 집무실은 드넓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았다. 그만큼 그의
집무실은 넓어 보였다. 탁구대를 놓고
탁구를 쳐도 빈 자리가 많이 남겠다고
마형사는 생각했다. 그리고 사무용품이며
집기들이 하나같이 고급스러워 보였다.
배창기는 저고리를 벗어 소파에
풀어헤쳤다. 넥타이를 잡아뽑아 역시
아무렇게나 던져놓는다. 아까 아내의 시신
앞에서 몸을 떨면서 흐느끼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의 그의 모습은 언제
그랬느냐 싶게 많이 침착해져 있었다.
"내 동생도 황개가 죽은 걸 알고
있습니까?"
"물론 알고 있습니다."
"충격이 크겠군요."
그는 중얼거리고 나서 칵테일을 마셨다.
"그렇지 않습니다. 황개 씨한테는
동거녀가 있었습니다. 그걸 알고 배미화
씨는 오히려 황개 씨를 저주하는 것
같았습니다."
"결혼했더라면 큰일 날 뻔했군요."
"죽은 사람한테는 안됐지만 배미화
당연하다는 듯 배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동생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아마 댁에 있을 겁니다. 수사가 끝날
때까지는 집에서 떠나지 말라고 했습니다."
"내 동생이 혐의를 받고 있습니까?"
"약혼자가 살해되었기 때문에 경찰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누구보다도 먼저 그
약혼녀를 주목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배창기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내 동생한테 혐의가 있습니까?"
그는 똑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혐의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배미화 씨의
약점은 알리바이가 약하다는 점입니다."
"내 동생은 파리새끼 한 마리 죽이지
남자를 어떻게 죽입니까?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물론 그렇겠지요."
마형사는 상대방이 흥분하는 것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내 동생을 괴롭히지 마십시오. 그애는
조그만 충격에도 쓰러질 정도로 몸이
약합니다."
"그럴 정도로 약해 보이지는 않던데요."
약해 보이는 것은 오히려 당신 배창기
씨라고 마형사는 말하고 싶었다.
"보기보다는 몸이 허약합니다."
"잘 알겠습니다. 혐의도 없는 사람한테
억지로 혐의를 씌운다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냉정하게
일을 처리할 겁니다."
그때 배창기가 몸을 일으키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이윽고 그가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왔다.
"미화니?...... 나 지금 호텔에 와
있어...... 아니야. 경찰하고 함께
있어...... 울지 마...... 그런 말하지
마...... 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이왕 죽은 사람 운다고 살아나니? 그만
울어...... 어머니한테 잘 말씀드려......
할 수없지 뭐...... 동재는 뭐하고
있니?...... 음, 이제부터는 네가 잘
데리고 놀아...... 모르겠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황개 이야기는
들었어...... 아무튼 안 됐다...... 그
이야기는 하지 말자...... 이야기할 것도
뭔지 모르겠어...... 음, 알았어......
회사 사람들한테 처리하도록
시켜야겠어...... 그래 그래,
알았어......"
그가 전화를 걸고 있는 동안 마형사는
실내를 꼼꼼히 둘러보고 있었다.
실내 여기저기에는 외제품으로 보이는
고급 집기들이 놓여 있었다. 실내 분위기가
너무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구경하고 있는 동안 그의
입에서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범인을
ㅉ아다니느라고 청춘을 다 보낸 그가 현재
쉴 곳이라고는 17평짜리 조그마한 아파트
하나뿐이었다. 거기서 그는 노모와
동생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가난에 너무 익숙해져 그것을 별로
배창기의 집무실을 둘ㄹ보는 동안 새삼
자신이 얼마나 가난에 찌든 생활을 하고
있는가를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정신없이 실내를 둘러보던 그의 시선이
이윽고 벽에 걸려 있는 사진 액자에 가서
머물렀다. 그것은 창기의 아들인 동재의
사진이었다. 병약해 보이는 그 아이는 자기
아버지를 그대로 쏙빼 닮은 모습이었다. 왜
아내의 사진은 걸려 있지 않을까 하고
마형사는 생각했다.
창기가 쿨럭쿨럭 기침을 하면서
다가왔다. 자리에 앉아서도 그는 한참 동안
잔기침을 했다. 실내에는 한기를 느낄
정도로 냉각된 공기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는 웬지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기침까지
하는 것을 보면 몸이 몹시 좋지 않은 것
"어디 아프십니까?"
"감기 기운이 좀 있나 봅니다."
배창기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나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마형사는 그의 시간을 많이 빼앗고 싶지
않아 더 이상 그의 눈치를 보지 않기로
하고 입을 열었다.
"부인에 대해서 상세한 것을 알고
싶습니다. 수사를 하려면 무엇보다도
피해자에 대해서, 그리고 그 주변에 대해서
상세한 것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능한 한 알고 있는 것을
숨김없이 상세히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거야 얼마든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알고 싶은 게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우선 두분이 어떻게 해서 결혼하게
되셨는지 그것부터 말씀해 주십시오."
배창기는 기침을 하면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것을 몇 모금 말없이 빨고 나서
과거를 회상하는 듯 초점없는 눈길을
허공에 던진 채 입을 열었다.
"그 사람하고 저는 나이 차이가 많지요.
저는 지금 서른여덟이고 그 사람은
스물일곱이니까...... 우리는 열한 살
차이가 납니다. 아내는 아주 아름다운
여자였습니다......."
기침 때문에 그의 말이 도중에 끊어졌다.
그는 인터폰으로 비서실장을 불렀다.
그리고 작은 소리로 무엇인가를 지시했다.
비서실장이 나가고 나자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가 유밀라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그녀가
대학 3학년 때였다. 그 때 그녀의 나이는
스물둘이었고 그는 서른세 살이었다.
알게된 경위는 그녀가 타고 있던 차가 그의
차를 들이받으면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한파가 몰아친 12월 하순 어느 날
오후였는데 차도가 얼어붙어 길이 미끄러운
바람에 뒤따라오던 차가 브레이크를
밟았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차를 심하게
들이받았던 것이다. 그의 차를 뒤에서 받은
그 차는 소형 승용차였고 그 안에는 두
명의 젊은 아가씨들이 앉아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유밀라였는데...... 운전대를 잡은
것은 그녀가 아닌 그녀의 친구였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녀는 운전면허를 딴 친구가
시내 주행을 하겠다기에 운전에 능숙한
사고를 냈다고 했다.
유밀라가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데 반해
사고를 낸 김수지라고 하는 그녀의 친구는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아가씨였다. 차는
김수지의 것이었다.
그때 사고를 당한 창기의 차는 스웨덴제
볼보였다. 1억 가까운 돈을 주고 구입한 그
차는 산 지 한 달 남짓밖에 안 됐기 때문에
창기는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차가 워낙
튼튼하기 때문에 볼보는 조금밖에
찌그러지지 않았지만 손을 보지 않고는
타고 다닐 수 없게 보기 흉한 모습이었다.
반면 아가씨들이 탄 차는 앞이 움푹
들어갈 정도로 찌그러지고 앞창 유리도
모두 깨어져 있었다.
창기의 차를 운전하던 운전사는
운전도 못하는 계집애들이 얼어붙은 거리에
왜 차는 몰고 나와 사고를 일으키느냐,
당장 볼보를 원상태대로 만들어놓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 그가 워낙 펄펄 뛰는
바람에 그녀들은 울상이 되어 어찌할 줄을
몰라했다.
운전대를 잡았던 김수지는 얼굴이
찢어지고 갈비뼈가 부러지는 등 한 달
동안의 치료를 요하는 부상을 입었지만
희한하게도 유밀라는 작은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사람들이 몰려들고 교통경찰까지
나타나자 창기는 귀찮고 창피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운전사에게 알아서
처리하라고 이르고는 먼저 택시를 타고
사고 현장을 떠났다.
그 다음날인가 유밀라로부터 창기한테
그의 신분을 알아낸 모양이었다. 친구는
지금 병원에 누워 있어서 자신이 대신 사과
인사를 드리러 왔다. 지금 호텔 커피숍에
와 있는데 잠깐 만나뵐 수 없느냐.
아름다운 아가씨의 목소리에 창기는 거절할
마음이 일지 않았다.
잠시 후 그녀가 그의 집무실에
나타났는데 어제 사고 현장에서 잠깐
보았을 때보다도 훨씬 아름다워 보였다. 그
눈부신 아름다움에 그는 취할 것만 같았다.
그녀는 Y여자대학 영문학과에
재학중이었다. 입원중인 그녀의 친구 역시
같은 과에 재학중이라고 했다.
그녀는 먼저 그에게 정중히 사과한 다음
태도를 바꿔 우는 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김수지가 운전하던 사고차는
사이에 그녀가 시내 운전을 배우기 위해
끌고 나왔다가 사고를 낸 것인데 그녀는
물론 그녀 오빠의 형편상 볼보의 수리비를
일시에 내기는 도저히 불가능하니 사정을
봐줄 수 없느냐. 대개 이런 내용이었다.
도대체 수리비가 얼마냐고 물어 그녀가
견적서를 내보이는 데 보니 2백만 원
가까운 금액이 적혀 있었다. 그건 좀 많은
액수라고 생각하면서 어떻게 편리를 봐주면
되겠느냐고 하자 그녀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저희들은 학생이에요. 학생이 무슨 돈이
있겠어요. 친구가 사고를 냈으니까 전 모른
체하면 그만이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어요. 그렇다고 친구 오빠한테 전부
부담시킬 수도 없잖아요. 수지 오빠가
받아서 처자식 먹여살리고 있는 형편이기
때문에 아주 형편이 곤란해요.
형편이 곤란하다고 해서 차 수리비를 안
갚겠가는 게 아니에요. 갚긴 갚겠지만 시간
여유를 주세요. 한목에 갚기는 도저히
불가능하니까 매달 조금씩 갚을 수 있게
해주세요. 사장님 회사에서 저희들이
아르바이트를 할 수 없을까요. 수리비에
해당되는 만큼 1년이고 2년이고 좋으니까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생각다
못해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그렇다고
수리비를 떼어먹을 수는 없잖아요. 제발
부탁이에요. 돈은 없고 차 수리비는
내야겠고 학생 처지에 별수 없잖아요. 이런
말씀드려 정말 죄송해요."
창기는 어이가 없었다. 배짱좋게 그런
했다. 수리비 따위에 신경을 쓸 그가
아니었게 때문에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수리비는 나중에 학교를 졸업한 다음 돈을
벌어 갚아도 좋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그녀는 감격해서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그에게 수없이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 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부터 그들은 순전히
데이트를 목적으로 은밀히 만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여자쪽에서 먼저
감사의 표시로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
또는 지나는 길에 들렀다는 식으로 그에게
접근을 시도했고 그다음부터는 남자쪽에서
적극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별로 마음에
드는 여자가 없어 그때까지 결혼을
미루어온 그는 마침내 그녀를 인생의
반려자로 선택하기에 이르렀고 그녀 역시
그의 프로포즈에 기다렸다는 듯이
응해왔다. 결혼식은 그녀가 학교를 졸업한
후에 올리기로 했지만 그 안에 혹시 그녀가
날아가버릴까 보아 이듬해 여름 두 사람은
약혼식을 치렀다. 그리고 그 다음해 봄에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려 부부가 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여유있고 행복한 가정 출신이
아니었다. 그런 것과는 정반대의 가난하고
불행한 집안 출신의 아가씨였다. 집안이야
어떻든 사람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그녀의 집안에 대해서는 별로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던 그는 결혼 후에야 그녀의 집안
사정을 알고는 내심 적지않게 놀랐다.
그녀의 아버지는 어느 운수회사의 트럭
운전사로 일하던중 사람을 치어 죽이고는
그때 그는 술에 만취되어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그 일로 해서 그는 중형을
선고받고 현재 교도소에서 복역하고
있었다.
가장이 교도소에 가는 바람에 집안은
그야말로 쑥밭이 되고 말았다. 밀라의
형제는 다섯이나 되었다. 그녀는 5남매
가운데 둘째로 위로 언니가 있었고 밑으로
여동생 하나와 남동생 둘이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만 내리 셋을 낳더니 막판에
가서 연달아 아들 둘을 낳았던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남긴 것은
20평짜리 집 한 채 뿐이었다. 거기에다
많은 빚까지 있었다. 그 빚의 대부분은
교통사고 피해자측에 위자료로 지불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다.
빚을 갚은 다음 단칸 셋방을 얻어
이사했다. 그리고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파출부로 나섰다. 다행히 밀라보다 한
살이 더 많은 그녀의 손 위 언니가 직장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럭저럭 먹고 살
수는 있었다. 그러나 자식들의 학비
조달에는 여간 어려움이 많지 않았다.
밀라의 언니는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진학을 포기한 채 바로 직장에 들어갔지만
밀라는 성격이 뛰어난데다 집념이 강하고
욕심이 많아 집안의 어려움을 무릅쓰고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입학금만 대주면
그 다음부터는 자신이 벌어서 학교에
다니겠다고 큰소리치며 대학에 들어갔는데
과연 그녀는 자신의 말대로 스스로 학비를
벌어서 학교에 다녔다. 그녀가 어떻게
영리한데다 눈부신 미모를 지닌 그녀가
혼자 힘으로도 대학에 다닐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이미 충분히 예견되어 왔던
일이었다. 그녀는 동생들의 학비며
용돈까지 틈틈이 대주기까지 하는 여유를
보였다.
창기는 아내의 집안 사정을 자세히 알고
나서부터는 그녀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집안이 쑥밭이 되면 거의가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고 비뚤어진 방향으로 나가게
마련인데 그녀만은 흔들리지 않고 계속
혼자 힘으로 학업을 계속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아주 대견스럽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밀라가 창기와 결혼하게 되면서부터
그녀의 친정 집안도 가난에서 벗어나
돕는 데에는 그녀보다도 창기쪽이 더
적극적이었다. 얼마 후 그녀의 아버지도
교도소에서 돌아왔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집안에는 걱정거리가 없게 되었다. 그것을
보고 주위에서는 딸을 잘두었기 때문에
형편이 피게 되었다고 부러워들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따지고보면 형편이
좋아졌다고 볼 수만도 없게 되었다. 형편이
핀 대신 밀라의 친정쪽은 딸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유밀라 씨는 불행한
결혼을 했다고 볼 수 있겠군요."
마형사의 말에 배창기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 눈은 왜 그렇게
보느냐고 묻고 있었다.
배사장과 결혼해서 한동안 경제적으로
풍족한 생활을 누렸을지 모르지만 결국
빨리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 않습니까."
그것은 결국 그녀가 배창기와 결혼했기
때문에 그렇게 빨리 죽게 되지 않았느냐는
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창백한 창기의
표정이 더욱 하얘기는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을지도 모르죠. 다른 남자와
결혼했더라면 그런 불행을 당하지 않고
아주 오래 살게 되었을지도 모르죠. 제
책임이 크다는 것...... 통감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런 식으로 나오는 바람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마형사쪽이었다.
"배사장쪽에 책이이 있다는 뜻으로
운명을 말씀드리고 싶어서 그런 이야기를
한 겁니다. 유밀라 씨는 배사장과 결혼하게
되어 있었고...... 그리고 죽게 되어
있었습니다. 운명이 그렇게 지어져
있었지요. 그 운명이 조금만 방향을
바꾸었더라면...... 이를테면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되었더라면 혹시 그 같은 참변은
면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해서 말씀드려본
겁니다."
그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지껄여댔다.
그는 운명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아무튼 그 사람의 죽음에는 제 책임이
큽니다. 제가 외국에만 나가지
않았더라도......."
배사장은 몹시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국내에만 계셨더라도 유밀라 씨의 죽음은
방지되었을지도 모르죠. 배사장께서 안
계셨기 때문에 부인께서는 밖으로 외출했던
것이고 결국 그런 참변을 당하신 거
아닙니까."
마형사는 일어섰다. 그는 창가로 다가가
비오는 밤거리를 내다보다가 돌아섰다.
그리고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유밀라 씨는 피살되기 바로 전에 S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황개씨를 만났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같은 호텔 1924호실에서
다음날 시체로 발견됐습니다."
배창기는 얼어붙은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두꺼운 안경 때문에 그의 얼굴에
나타난 미묘한 변화는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가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것으로
같았다.
"그,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들릴듯 말듯한 목소리로 창기가 물었다.
충격을 받으면 그의 목소리는 더욱
작아지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이 유력한 용의자라는
뜻입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건 잘못 보신 겁니다."
창기는 머리를 흔들면서 일어섰다. 그는
홈바쪽으로 다가가더니 다시 칵테일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가 충격을 억제하려고
그러는 것일 거라고 마형사는 생각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하고 창기가 다시
"네,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죠. 하지만
두 사람이 만난 것을 목격한 증인이
있습니다."
"그 증인이 누굽니까?"
창기는 마형사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얼음 조각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카이라운지에서 근무하는
웨이터입니다. 그 웨이터 말에 따르면 두
사람은 거기서 자주 만났다고 합니다. 자주
만났다는 것은 두 사람 관계가 보통 관계가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창기가 돌아섰다. 그의 손에는 술잔이
들려 있지 않았다. 그는 아까처럼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더 이상
"두 사람은 지난 7월 19일 오후 3시경에
S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만났습니다.
거기서 30분쯤 앉아 있다가 밖으로
나갔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호텔 방에
들어간 것을 목격한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하지만 검시에 따르면 유밀라 씨의
사망시간은 같은 날 오후 5시에서 7시
사이로 밝혀졌습니다. 그러니까 그날 황개
씨와 함께 스카이라운지에서 나간 후 두
시간쯤 지나서 호텔 방에서 살해된 거지요.
그것은 그녀가 호텔 방안으로 들어가서
정사를 가진 다음 살해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입니다. 유밀라 씨가 황개 씨와 헤어져
다른 남자를 만났을 수도 있지요. 그러나
그것은 가능성치고는 아주 희박한
가능성입니다. 그런 가능성을 나는 믿고
창기의 기침 소리 때문에 마형사의 말은
도중에 중단되었다. 그는 아까보다는 훨씬
심하게 기침을 토했다.
"내...... 내 동생도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아직 모릅니다."
"제발 내 동생한테는 그 사실을 비밀로
해주십시오. 내 동생이 알게 되면......."
배창기는 괴로운지 말끝을 잇지 못하면서
얼굴빛이 흐려진다.
"알겠습니다. 되도록 비밀로
하겠습니다...... 어차피 알게될 겁니다."
"그애가 알면 안 됩니다."
창기는 머리를 흔들면서 두 손을
쳐들었다가 힘없이 도로 떨어뜨렸다.
"난 도무지...... 뭐가 뭔지
일어날 수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갑니다."
그는 만들어놓은 칵테일잔을 집어들더니
물마시듯 그것을 들이켰다.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들이란
일반적인 상식의 선을 초월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해가 안 되는 수가 종종
있지요."
배창기는 아까보다 더 거세게 머리를
흔들었다.
"황개 그놈이 질이 좋지 않은 놈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내 처까지
건드릴 줄은 몰랐습니다. 내 동생하고
약혼까지 한 놈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습니까. 죽일놈 같으니......."
잔을 들고 있는 파리한 손이 분노로
가만히 지켜보았다.
"하긴 내 처한테도 책임이 있겠지요. 내
처한테 더 책임이 크겠지요. 나쁜 여자
같으니...... 어떻게 그럴 수가......."
배창기는 마형사쪽으로 가만히 다가왔다.
그의 두눈에는 어느새 물기가 번져 있었다.
그것은 비통함 때문이 아니라 분노 때문에
솟아나는 눈물 같았다.
"그런데 말입니다. 내 처를 죽인 그놈이
죽었다니 어떡하죠? 그놈은 처발도 받지
않고 그렇게 가버려도 되는 겁니까?"
"그는 유력한 용의자이지 아직 범인으로
단정된 건 아닙니다."
"그 말이 그 말 아닙니까?"
"아니죠. 엄청난 차이가 있죠. 하지만 그
사람을 범인으로 봐도 별 무리는 없을
심정입니다."
"그놈이 설사 범인이 아니더라도 내 처와
불륜의 관계를 맺은 게 사실 아닙니까?"
"그것도 가능성일 뿐이죠. 불륜 현장을
목격하지는 못했으니까."
"꼭 목격해야만 사실 확인이 되는
겁니까?"
"그렇지는 않죠."
마형사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경찰은 뭐든지 단정을 내리는 것을
피하는군요. 궁지에 몰렸을 때 빠져나갈 수
있게 말입니다."
"우리 수사경찰은 그것이 장점이자
단점입니다. 실수하지 않게 항상 여지를
남겨두지요. 하지만 영리한 범인들은
우리들의 그런 점을 이용해서 그 틈으로
이유야 어떻든 우리의 목적은 살인범을
붙잡는 겁니다. 불륜의 관계 같은 것이
흥미가 없습니다."
"황개 그놈이 내 처를 죽인 게
사실이라면 그놈을 처벌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겠군요."
"그 사람은 법적인 처벌을 받는 것
이상의 처벌을 받았습니다. 차 속에 갇혀서
참혹하게 불에 타죽었으니까요. 우리는
이제 그를 죽인 범인을 찾아야 합니다."
"살인범의 살인범을 찾는 격이군요."
"그런 셈이지요. 하지만 동일범의
소행일지도 모르지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흐린 안경 때문에 그의 얼굴은 무표정해
보였다.
동일인물일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때 마형사가 지니고 있는 무전기의
신호음이 삐삐하고 울렸다. 마형사는
배사장한테 양해를 구한 다음 그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전화기로 수사본부에
전화를 걸었다. 남형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를 받았다.
"글로리 하이츠에 다녀왔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잔뜩 들떠 있었다.
"찰스 모겐도는 현재 거기에 살고 있는
미국인이 틀림없습니다. 지금 미국에 가
있는데 다시 돌아올 모양입니다. 유밀라는
결혼하기 전에 모겐도와 1년쯤 동거생활을
했습니다."
"뭐야?"
"사실입니다. 그 미국인과 동거생활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경비원들에게 유밀라의
사진을 보였더니 알아보았습니다."
"빌어먹을! 이야기가 또 묘하게
돌아가는군."
"모겐도는 유밀라가 살해된 19일 밤 9시
30분 비행기로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시간상으로 유밀라를 살해하고 도망갈
여유가 충분합니다."
"그가 범인이라는 건가?"
"자세한 것은 만나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마형사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창기를
바라보았다. 그는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수사본부.
마형사가 본부 안으로 들어섰을 때
남형사는 자못 흥분한 표정으로 서성거리고
"말해 봐. 자세히 말해 봐."
마형사는 점퍼를 벗어부치면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남형사는 글로리 하이츠에 갔다온 결과를
신이 나서 지껄여대기 시작했다. 그동안
마형사는 눈을 가늘게 치뜬 채 줄담배를
피워대고 있었다.
"......그러니까 유밀라는 모겐도가
데리고 놀았던 한국 아가씨들 가운데
하나였다고 볼 수 있죠. 그리고 두 사람의
관계는 결혼 후에도 계속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것이 결국 살인으로까지
가게 되고 모겐도는 미국으로 도망친
겁니다."
"기가 막힌 이야기로군. 그런 줄도
모르고 배창기는 유밀라한테 반해서 결혼한
"그랬을 겁니다. 외국인하고
동거생활했다는 걸 알면 어느 남자가 그
여자하고 결혼하겠습니까."
"유밀라는 그 사실을 숨기고
결혼했겠지?"
"물론이죠. 어느 바보가 결호날 남자한테
자기는 외국인하고 동거생활했다고
고백하겠습니까."
"사기결혼이군."
배창기가 유밀라를 처음 알게되었을 때
그녀는 Y여대 3학년에 재학중이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녀는 그때 이미 그
미국인하고 동거생활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마형사는 생각했다. 그녀는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어가면서 학교에
다닌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외국인과
가능성이 크다. 그 미모라면 섹스를 파는
대가로 학비와 용돈 정도 버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니, 돈을
버는 방법으로서는 그것이 제일 손쉬운
길이었을 것이다.
"유밀라의 차가 발견됐답니다!"
형사 한 명이 마형사쪽을 향해 소리쳤다.
"어디야?"
"잠실쪽이랍니다."
마형사와 남형사는 밖으로 나와 차를
타고 잠실쪽으로 향했다. 이미 자정이 지나
7월 22일로 접어들어 있었고,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유밀라의 녹색 승용차는 어느 여관의
지하 주차장에 세워져 있었다. 거기서
자동차로 40분쯤 걸리는 거리였다.
그 차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신고한 것은
여관측이었다. 며칠째 지하 주차장에
방치되어 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여관측이 관할 파출소에 그것을 신고했던
것이고 파출소에서는 그것이 수배차량인
것을 알고는 즉시 수사본부에 알려왔던
것이다.
"이 차가 언제부터 여기에 주차해
있었지요?"
마형사는 녹색 차의 번호판을
들여다보면서 여관 주인에게 물었다.
그 차는 녹색의 쟈가 서울2다
543X번--유밀라의 차가 틀림없었다.
지하 주차장에는 여관 주인이라는 중년의
뚱뚱한 여인과 스무살쯤 되어보이는 보이가
모르겠다는 듯이 보이를 쳐다보자 그가
그녀를 대신해서 입을 열었다.
"정확한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여기에
주차한 지 한 3~4일 된 것 같습니다."
"여기에 투숙했던 손님이 주차해둔
건가?"
"잘 모르겠습니다. 커피숍에 오는
손님들도 여기다 차를 세워두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
지은 지 얼마 안 된 장급의 그 여관
1층에는 커피숍이 자리잡고 있었다. 여관
보이의 말에 의하면 주인의 차를 매일
자신이 주차장에서 꺼내주기도 하고
닦아주기도 하기 때문에 3,4일 전부터 그
녹색 차가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했다.
손님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투숙한 손님의
차는 아닌 것 같습니다."
혹시나 해서 보이나 여관 주인에게
유밀라와 황개, 그리고 김영대의 사진을
보였으나 그들은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녹색 차는 안으로 굳게 잠겨 있었다. 차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열쇠는 보이지
않았다. 여관 주인과 보이를 올려보내고
나서 두 형사는 차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유밀라가 차를 몰고 집을 나선 것은 7월
19일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그 여자가 차를 몰고 먼저 이
여관에 와서 여기다 차를 주차시킨 다음
다른 차편을 이용해서 40분 거리에 있는
S호텔로 갔을 거라는 점입니다."
마형사는 차 속을 열심히 살피고 있었다.
"왜 굳이 여기다 차를 주차시켜
놓았을까? S호텔에서 40분이나 걸리는
여기에다 말이야? 그 이유가 뭐지?"
"글쎄, 그게 의문입니다. 또 한 가지는
유밀라가 이 차를 몰고 S호텔로 갔을
거라는 점입니다. 거기서 그녀는 범인을
만나 정사를 나눈 다음 살해됩니다. 범인은
그녀에 대한 수사를 방해하기 위해 그녀
대신 이 차를 몰고 여기까지 와서 차를
버리는 겁니다."
마형사가 고개를 쳐들었다.
"나는 그 두번째 의견이 마음에
드는데......."
마형사는 차문을 힘껏 잡아당겼다. 문은
끄덕도 하지 않는다.
이 차는 범인이 끌어다놓은 게
틀림없습니다."
남형사는 주먹으로 차 지붕을
두드려댔다.
"이 문을 좀 열어봐야겠어. 안에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전문가를 불러올까요?"
마형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형사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범인이 이 차를 여기다 끌어다 놓았다면
차 열쇠는 범인한테 있을 것이다. 범인은
이미 그 열쇠를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가지고 있어봤자 자기한테 득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을 테니까. 어ㅣ다 그것을
버렸을까. 마형사는 혹시나해서 차 밑과 그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열쇠 같은 것은
돌아왔다.
"이리로 한 명 보내라고 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한 명이란 자동차를
전문으로 훔치는 전과자를 말하는
것이었다.
"올라가서 플래쉬를 좀 달라고 해."
지하 주차장이기 때문에 차 안은 꽤
어두워보였다.
남형사가 다시 위로 올라가더니 잠시 후
플래쉬를 빌려가지고 내려왔다. 마형사는
플래쉬로 차 안을 비쳐보았다.
차 안은 여자가 운전하던 차답게
깨끗하고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의자에는
베이지색 바탕에 자주색 물방울 무늬가
있는 시트커버가 씌워져 있었고, 앞유리창
앞에는 동전통, 수첩, 명함 같은 것들이
뒷자리에는 곰인형과 휴지통, 향수병,
그리고 미국판 라이프지와 일본판 여성지가
놓여 있었다. 운전석 옆 의자 위에도 책이
한 권 놓여져 있었는데 취학 전의
어린이들을 상대로 만든 잡지였다. 아마
아들한테 주기 위해 사놓았던 것 같았다.
"지문을 채취해야 하니까 감식반을
보내라고 해."
마형사의 지시에 남형사는 군소리없이
다시 지하실을 빠져나갔다.
한 시간쯤 지나 형사 한 명이 전과자 한
명을 데리고 왔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 남자는 자동차 절도 전문으로 그 때문에
형을 두번이나 살고 나온 전과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멋적게 웃고나더니
주머니에서 길쭉한 쇠꼬챙이를 꺼냈다.
그는 자랑삼아 말하면서 문틈으로
쇠꼬챙이를 밀어넣더니 과연 1분도 못돼
차문을 열어보였다.
마형사는 운전석으로 들어가고 남형사는
뒷자리로 들어가 앉았다. 차 속의 불들을
모두 켜놓고 그들은 내부를 살피기
시작했다.
차 속에는 단서가 될만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끈질기게 늘어붙어 무엇인가를 찾아내려고
애를 썼다.
"뭐 있어?"
"없는데요."
남형사가 실망한 어조로 대답했다.
플래쉬로 바닥을 비춰보던 마형사는 의자
밑에서 무엇인가를 집어냈다. 그것은 껌을
껌을 빼내고 난 다음 구겨서 버린 것
같았다. 껌 이름은 "아카시아"였다. 그것은
불고기 사건 현장인 S호텔 지하 주차장에서
범인이 범행에 이용하고 나서 버렸던
베이지색의 소형 승용차 안에서 발견했던
껌포장지와 같은 것이었다.
"이거 보라구? 범인은 이 껌을 좋아하는
모양이야."
"베이지색 차에서 발견했던 포장지하고
같은 거군요."
남형사도 금방 그것을 알아보았다.
형사들의 표정은 한결 밝아져 있었다.
마형사는 재떨이를 빼내보았다. 그
안에는 담배꽁초가 잔뜩 들어 있었다.
그는 재떨이를 들고 밖으로 나와 주차장
바닥에다 그것을 모두 쏟아부었다.
가지로 분류될 수 있었다.
한 가지는 양담배 말보로였고, 다른 한
가지는 국산담배로 여자들이 즐겨 피우는
장미였다. 두 가지 꽁초에는 모두 루즈가
묻어 있었고 그것들은 하나같이 바짝 말라
있었다. 말보로 꽁초는 8개였고 장미
꽁초는 4개였다. 남형사도 차에서 내려와
흥미있는 눈으로 그것들을 들여다보았다.
"이 꽁초도 그 소형차에서 발견했던
것하고 같은 것 아닙니까?"
남형사가 장미 꽁초 하나를 집어들면서
물었다.
"그래. 그 차 속에 들어 있던 꽁초하고
같은 종류야. 꽁초를 질근질근 씹어댄 것도
비슷하고 말이야. 말보로 꽁초는 씹은
자국이 없잖아. 서로 다른 두 여자가 피운
아니야."
같은 종류의 껌포장지와 담배꽁초가 양쪽
차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범인이 두 차를
이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다시
말해 유밀라와 황개를 살해한 범인이 같은
인물이라는 뜻이다.
"유밀라를 살해한 범인이 황개까지
살해한 걸까요?"
"이런 걸로 봐서는 동일범의 소행이
분명한 것 같은데......."
"말보로는 유밀라가 피운 것이겠죠?"
그것은 S호텔 1924호실에서도
발견되었었다. 그 말보로에는 루즈가 묻어
있었다.
"그럴테지. 하지만 일단 확인해볼 필요는
있어."
굳어져가고 있었다. 그것도 여자 혼자서
젊은 여자와 건장한 남자를 해치운 것이다.
도대체 어떤 여자일까? 그리고 왜 그들을
죽였을까? 한 여자가 연달아 두 남녀를
살해했다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두 사건이 연결되어 있는
고리를 찾아내야 한다. 그것을 찾아내면
사건은 의외로 쉽게 풀릴지도 모른다.
"여자 혼자서 그렇게 두 사람이나
연속적으로 살해할 수가 있을까요?"
"황개 같은 건장한 놈도 태워죽였는데
유밀라쯤이야 별로 힘들이지 않고 처리하지
않았겠어?"
"아무리 그렇다고는 하지만......."
남형사는 그래도 의혹을 떨쳐버릴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모양이지?"
마형사는 거의 비어 있는 자신의 담뱃갑
속에 꽁초를 하나하나 주워담기 시작했다.
"저는 그 미국인이 아무래도 의심이
갑니다."
마형사는 불룩해진 담뱃갑을 접어서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그 자가 유밀라를 살해했다면 황개는
누가 살해했지? 그자가 황개까지 살해하고
미국으로 떠났을까?"
"황개는 목격자들의 말대로 여자가
살해했겠죠."
"그렇다면 동일범의 소행이 아니고
범인이 서로 다르단 말인가?"
마형사는 의자에 놓여 있는 어린이용
잡지를 집어들었다. 그 잡지의 이름은
잡지였다.
"동일범의 소행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아직 속단일 것 같습니다. 양쪽 차 속에서
아무리 같은 증거물들이 발견되었다 해도
말입니다."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겠지. 그리고
그것들을 모두 조사하고 확인해야 하겠지.
하지만 나는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고 싶어.
그 미국인은 19일 밤 9시 30분 비행기로
틀림없이 출국했나? 확인해 봤어?"
"네, 전화로 출입국관리소에 확인해
봤습니다. 출국한 게 틀림없습니다."
그때 감식반원들이 도착했다. 그들은 두
명이었다. 마형사는 미국판 라이프지와
일본판 여성지, 어린이용 잡지, 그리고
수첩과 명함들을 꺼내들고 차에서
두 형사는 위로 올라가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그 커피숍은 밤에는 카페처럼
술도 파는지 새벽 2시가 지난 시간인데도
여기저기 술마시는 손님들이 꽤 보였다.
창문을 통해 보이는 거리는 비가 내리고
있는데다 불빛도 거의 사라져 더없이
음산해 보였다. 그들은 칵테일을 한잔씩
시킨 다음 유밀라의 유품들로 보이는
것들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마형사는
잡지들을 훑어보기 시작했고 남형사는
수첩을 뒤적거렸다.
갑자기 수첩을 뒤적거리던 남형사가
킬킬거리기 시작했다. 어깨를 들썩거리며
킬킬거리는 그를 보고 마형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가 그렇게 우스워?"
디밀었다. 그것은 손바닥 크기의
수첩이었다. 남형사가 펴보이는 페이지
위에는 음화가 하나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놀라울 정도로 아주 섬세하게 그린
음화였다. 연필로 그린 그것은 유난히
거대하게 발기한 남근을 여자가 한손으로
움켜쥔 채 그 끝을 입 속에 집어넣고 있는
그림이었다. 남형사는 계속 킬킬거리면서
"유밀라의 그림 솜씨가 탁월한가
보지요?"하고 말했다. 마형사도 속으로는
적잖게 감탄하고 있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포르노 사진을 보고 그린 것 같은데요.
하지만 기막힌 솜씨 아닙니까."
마침 여자 종업원이 술잔을 내려놓다
말고 음화에 눈이 팔리는 바람에 술이
엎질러졌다.
"어머나, 죄송해요."
"미안한 건 우리쪽이오. 놀라게해서
미안해요."
남형사는 재미있어 죽겠단ㄴ 표정이었다.
"그거 누가 그리신 거예요? 아주 잘
그리셨는데요."
그녀가 행주를 가져와 탁자를 훔치면서
말했다.
"내가 그린 거요."
남형사가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는 것을 보면서 마형사가 눈을
흘기자 레지는 얼굴을 붉히면서 자리를
피한다.
"실없는 소리좀 작작하라구."
"이런 재미라도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남형사는 다시 수첩을 뒤적거리기
것들을 적어놓은 게 아닌 자동차에
관계되는 것들, 이를테면 정비업소
전화번호, 수리비, 기름값 같은 것들을
기록해 놓은 수첩이었다. 날짜의 간격이
일정하게 적혀 있다가 어떤 것은 한두 달
건너뛰어 적혀 있는 것을 보면 꼬박꼬박
성실하게 기록해 놓은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마형사는 일본판 여성잡지를 대충
넘겨보았다. 그것은 패션전문지인
"논노"였다. 7월호였고 손때 하나 묻지
않은 것으로 보아 구입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구입해 놓고 미처 보기도 전에
피살된 게 아닐까 하고 마형사는 생각했다.
뒷표지 안쪽에는 그 책을 판매한 서점의
딱지가 붙어 있었다. 그 딱지에는 책이름과
아래쪽에는 서점 이름과 주소, 그리고
전화번호 등이 인쇄되어 있었다. 서점
이름은 백가서림(百家書林)이라고 했고
소재지는 명동에 있었다. 두 잡지의
구입일자는 똑같이 7월 19일로 되어
있었다. 그것은 중요한 발견이었다. 그때
남형사가 다시 킬킬거렸다.
"뭐가 그렇게 우스워?"
"이걸 보십시오."
남형사가 다시 수첩을 마형사의 코밑에
디밀었다. 수첩 한 페이지에는 볼펜 글씨로
"개새끼 542-769X"라고 휘갈겨져 있었다.
"이 개새끼가 누구이겠습니까?"
"황개 아닌가?"
"맞습니다. 이 전화번호는 황개의 사무실
전화번호입니다."
황개의 사무실 전화번호를 확인하면서
말했다.
"유밀라가 여기다 왜 황개의 사무실
전화번호를 적어놓았겠습니까? 이건 두
사람 관계가 보통 사이가 아니었다는 또
하나의 증거가 아닐까요?"
이미 마형사로부터 유밀라와 황개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대강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는 남형사는 신이 나서 지껄였다.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생전에 두 사람 사이에 불륜관계가
있었다는 게 점점 명확해지는 데요."
"그런데 유밀라는 왜 황개를 개새끼라고
적어놓았을까? 두 사람이 불륜관계였다
해도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면 상대방을
개새끼라고 적어놓을 수 있을까?"
"상대방을 증오하지 않고는 이렇게 적을
수가 없어."
"그럼 유밀라가 황개를 증오했다는
겁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적을 수가
없어. 황개는 질이 나쁜 작자였어. 내
생각에는 유밀라를 농락하면서 계속 그
여자를 괴롭히지 않았나 생각돼. 유밀라와
황개 사이의 관계를 자세히 알아봐야겠어."
"두 사람이 모두 죽어버렸는데 어떻게
알아보죠?"
"귀신을 만나서라도 알아봐. 이 책들은
7월 19일에 구입한 것들이야."
마형사는 라이프지와 논노를 남형사에게
넘겨주었다.
"뒷표지에 있는 딱지를 보라구."
"누가 구입한 걸까요?"
"범인이 구입했다면 뒷자리에 놓아뒀을
리가 없겠지."
마형사는 어린이용 잡지 "천사들의 집"을
펴보았다. 그것은 8월호였다. 거기에는
다른 잡지들처럼 구입처가 적힌 표지가
붙어 있지 않았다.
"여기에는 구입처 표시가 없군."
"같은 데서 구입한 거겠죠 뭐."
"글쎄......."
명함들은 의상실, 카페, 자동차 정비소
등에서 발행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백가서림은 명동 뒷골목 사람들의 눈에
별로 띄지 않는 곳에 자리잡고 있는 조그만
책방이었다. 그러나 단골들이 주로
수의 손님들이 책들을 뒤적이고 있었다.
손님들이 거의 빠져나갔을 때 책방 주인
오미애는 여느 손님들과는 좀 달라보이는
남자 두 명이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았다. 플레이보이처럼 생긴 젊은 남자의
손에는 책이 들려 있었다.
그 남자는 곧장 카운터로 다가왔고 함께
온 뚱보는 책방 안을 휘둘러보고 있었다.
그들이 책을 구입하러 온 사람들이 아님을
그녀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녀는 단발머리에 검은 테의 동그란
안경을 끼고 있는 인상이 차가운 여자였다.
나이는 채 서른이 안 돼 보였다. 책방
안에는 주로 외국 서적들, 그중에서도 일본
서적들이 서가를 채우고 있었다.
"이 책 여기서 판매한 겁니까?"
라이프지와 논노를 카운터 위에 내려놓으며
다짜고짜 물어왔다. 미애는 그 남자한테서
냉기를 느끼면서 그 잡지들의 뒷표지를
들춰보았다. 뚱보는 플레이보이지를
들춰보고 있었다.
"네, 여기서 판매한 겁니다."
그녀 앞에 형사 신분증이 디밀어졌다.
그녀는 꼬고 있던 다리를 풀었다.
"이 책들 누구한테 판매한 겁니까?"
그것은 아주 막연하고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그녀는 뒷표지 안쪽에 부착되어 있는
딱지를 들여다보고 나서 말했다.
"그건 알 수 없는데요. 사간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이 적어놓지는 않으니까요."
남형사는 조금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ꠑ ꠑ? "단골이 사갔다면 알 수 있을 거
아닙니까?"
"단골이 어디 한두 명이어야죠."
"혹시 유밀라라는 여자가 사가지
않았습니까?"
그녀는 조금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나서 두눈을 깜박거렸다.
"네, 그 여자도 단골은 단골이에요. 며칠
전에 와서 라이프지하고 논노를 사갔어요."
플레이보이지를 뒤적이던 뚱보가
다가오더니 이번에는 어린이용 잡지를
디밀었다.
"이것도 여기서 판매한 겁니까?"
"아뇨, 우리 책방에서는 그런 책은
판매하지 않아요."
"유밀라 씨는 언제부터 여기
단골이었습니까?"
유밀라가 백가서림의 단골이 된 것은
오미애가 책방을 맡고 나서부터였다.
그녀가 책방 일을 보게 된 것은 어느 날
갑작스럽게 그렇게 된것이었다. 그 책방은
그녀의 아버지가 20년 넘게 꾸려온
가게였다. 겉보기에는 조그만 책방에
불과했지만 아주 오랫동안 터를 다져온
탓으로 단골을 많이 확보할 수 있었고
알만한 사람들한테는 많이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소문나지 않게 장사가 잘돼 왔었다.
그것으로 그녀의 아버지는 자식들을
교육시키고 부동산에도 적지 않게 투자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갑자기
고혈압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가게일을 볼
사람이 없게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이
벌써 수년 전의 일이었고 그는 아직까지도
터였다. 슬하에 그는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맏아들은 미국에 유학중이었고
막내아들은 군복무중이었다. 결국 혼자
남은 미애가 가게 일을 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막막했지만 몇년 동안
가게 일을 보다보니 이제는 아버지 못지
않게 수완을 잘 발휘하여 아버지 때보다도
가게가 더 번창하고 있었다.
"몇년 됐다면 그 여자에 ㄷ서 잘
알겠군요?"
"네, 좀 아는 편이에요."
"그 여자가 죽은 거 알고 있습니까?"
"아니, 뭐라구요?! 그애가 죽었다구요?!"
소스라치게 놀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친한 친구한테나 붙일 수 있는 그애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S호텔 여인살인사건의
피살자가 유밀라로 밝혀진 사실이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으니 그녀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지난 19일...... 그러니까 잡지들을
사간 날 죽었습니다."
"어쩌면 그럴 수가......."
자지러지게 놀라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꽤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왜 죽었나요?"
"누군가가 죽였습니다. 호텔에서
살해당했습니다. 유밀라 씨하고는 친구
사이였나요?"
이제 밀라와의 관계를 숨겨서도 안 되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대학 동기예요."
"아, 그렇습니까. 진작 그렇게 말씀하실
것이지."
알고 있겠군요?"
비극적일 정도로 못생긴 얼굴을 가진
뚱보 형사가 점 같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네, 알만큼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애가
그렇게 갑자기 죽을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그 여자의 사생활...... 이를테면
남편이 아닌 남자들과의 관계 같은 것은
모르시나요? 남자 관계가 복잡했던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런 건 모르겠어요. 그럴 리가 없어요.
그애는 남편밖에 모르는 애였어요. 남편이
외국에 갔다고 하던데 돌아왔나요?"
"어젯밤에 돌아왔습니다."
"유밀라 씨는 19일 몇시 쯤에 여기에
남형사가 물었다.
오미애는 핼쓱한 표정으로 잠깐 생각해
보고 나서 대답했다.
"아마 그때가 12시 전후였을 거예요."
"혼자 왔던가요?"
"네, 차를 몰로 혼자 왔었어요."
"그때의 상황을 좀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유밀라는 백가서림에 심심하면 오다가다
들르곤 했다. 그녀와 오미애는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였다. 그 날도 1시 전후해서
백가서림에 나타난 그녀는 새로 나온
라이프지와 논노를 구입했다. 그녀는 수년
전부터 그것들을 정기적으로 구입해 오고
있었다.
라이프지를 사본 것은 거기에 실리는
유난히 신경을 쓰기 때문에 구입해본
것이었다. 그녀는 논노ㅔ 나오는 의상실을
그대로 단골 의상실에 주문해서 맞춰 입곤
했다.
돈이 많다보니 한 달에 여러 벌씩 맞춰
입는 것은 보통이었다. 한 달에 의상비만도
수백만 원에서 천만 원대까지 오르내릴
정도였다.
"만두를 먹고 싶다고 하기에 그애하고
함께 만두집에 가서 점심을 먹었어요.
그리고 찻집에 가서 커피 한 잔씩을 마시고
나서 헤어졌어요. 그 뒤로는 만나지
못했어요."
마형사는 "천사들의 집"을 집어들었다.
"유밀라 씨는 아들을 위해 이 잡지도
어디선가 구입한 것 같은데...... 여기에
이거 이디서 구입했는지 모르십니까? 아마
같은 날 구입한 것 같은데......."
그녀는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고 나서
고개를 내저었다.
"모르겠어요."
"이것도 아들을 위해서 정기적으로
구입했나 보지요?"
"모르겠어요. 사가지고 다니는 거 보지
못했어요."
그곳에서 S호텔까지는 가까운 거리였다.
차로 막힘없이 달린다면 5분 내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오미애의 말대로라면
유밀라는 그날 12시 전후해서 백가서림에
나타나 외국 잡지 두권을 구입한 것 다음
오미애와 함께 만두집에 가서 만두로
점심을 때웠다. 그 다음 찻집에 가서
것이다. 그때까지 걸린 시간은 한 시간쯤
될까. 오미애와 헤어진 그녀는 여유있게
S호텔로 향했을 것이다. 그녀가 피살되기
직전에 만난 사람은 이제 두 사람이
되었다. 황개보다 오미애가 먼저 유밀라와
만났다가 헤어졌다고는 하지만 과연 그녀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오미애를
수사권 밖에 두어도 괜찮을까?
"유밀라 씨가 어떤 문제로 고민하는 것을
본 적은 없습니까?"
"그런 건 보지 못했어요. 그애는 고민
같은 거 없었어요. 풍족하게 사는데 뭐가
고민이겠어요."
"결혼하기 전의 남자 관계 같은 거......
정말 모르십니까? 밀라 씨가 살아 있다면
숨겨줄 수도 있겠지만 이미 죽은 사람
체포할 수 있게 협조해 주십시오."
남형사는 찰스 모겐도의 아파트에서
가지고온 그의 사진을 꺼내놓았다.
오미애는 숨을 죽이고 그것을 응시했다.
"이 미국인 모르십니까? 유밀라 씨가
결혼하기 전에 사귀던 미국인인데......."
그녀의 얼굴에 당황해 하는 표정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숨기지 말고 말씀해 주십시오. 친구를
죽인 범인을 잡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때 손님들이 서너 명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젊은 아가씨들이었다.
"자리를 옮기죠."
오미애는 가게를 남자 종업원에게 맡긴
다음 가까운 다방으로 형사들을 안내했다.
"어떻게 그 미국인을 찾아내셨어요?"
"그거야 뭐...... 사람 찾는 게 우리
직업 아닙니까."
남형사가 자신만만한 어조로 말했다.
"그애가 죽었다니까 이제 말씀드려도
괜찮겠죠."
"걱정 말고 말씀하십시오. 비밀을
지켜드릴 테니까요."
"그 남자는 밀라가 사귀던 미국인
맞아요. 찰스 뭐라고 하는 사람인데......
대학다닐 때 밀라가 그 사람하고
데이트하는 걸 몇번 본 적이 있어요."
"함께 만난 적은 없습니까?"
"커피 한잔 얻어 마신 적은 있어요.
그애가 하도 그 미국인을 감싸고 도는
바람에 커피 한잔밖에 얻어마실 수가
없었어요."
"글쎄요. 자세히 말해 주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꽤 가까운 사이였던 것
같아요."
"가까운 사이라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겁니까? 애인 사이입니까 아니면 친구
사이입니까?"
"글쎄요. 남녀 사이는 미묘해서요.
친구였다가 애인도 될 수 있고......
반대로 애인이었다가 친구로 될 수도
있으니까요."
"아, 그래요. 남녀 사이는 참 묘하군요."
남형사가 차가운 미소를 흘리면서
말했다. 마형사는 오미애의 말하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나는 아까 여기 오기 전에 글로리
하이츠에 가서 모겐도씨를 만나 보았지요.
씨가 한 말하고는 상당히 거리가 있군요."
순간 오미애의 안색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다르다니요? 그럴 리가 없는데요."
"그 미국인 말에 의하면 유밀라 씨는 그
미국인 집에서 한 1년간 함께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결혼만 안했지
동거생활을 한 거죠."
"전 처음 듣는 이야기에요. 그애가 그
사람하고 동거생활까지 한 줄은 몰랐어요."
오미애는 사뭇 당황해 하면서 말했다.
마형사는 남형사가 어떻게 그녀를
굴복시키는가를 흥미있게 지켜보고 있었다.
수사관들은 사실을 밝혀내기 위해 거짓말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수가 종종 있다. 지금
남형사가 바로 그런 거짓말로 그녀의
먹혀들어갈 경우 의외의 소득을 얻을 수도
있다.
"모겐도씨 말이 오미애 씨도 그 집에
놀러온 적이 있다고 하던데요? 모겐도씨와
유밀라 씨가 동거생활하고 있을 때
말입니다. 그 사라은 우물쭈물하지 않고
사실대로 말하더군요."
"전...... 전 그 집에 놀러간 기억이
없는데요."
"기억이 안 나면 모겐도씨를 만나게
해드릴까요? 저하고 함께 지금 모겐도씨
집에 가서 그 사람 이야기를 들어보면
기억이 날 겁니다. 그 사람이 거짓말했을
리가 없잖습니까? 모겐도씨 집에서는
파티를 자주 열었다고 하더군요."
완전히 당혹해 하는 표정이 그녀의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건가요?"
"우리는 모든 것을 자세히 알아야
하니까요. 모든 것을 자세히 알아야 범인을
잡을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전 밀라으 죽음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어요. 그애가 죽은 줄도 몰랐어요. 조금
전에 말씀을 듣고야 알았어요."
"우리도 오미애 씨가 관계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 점은 걱정하지 말고
사실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모겐도씨와
직접 만나 이야기한다는 건 사실 좀
난처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상관없습니다만......."
"그 사람도 밀라의 죽음을 알고 있나요?"
"모르고 있더군요. 그래서 이야기해
줬지요."
"외국인들은 확실히 냉정한 데가
있더군요. 약간 놀라는 표정이더니
자기로서는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만
갸우뚱하고 말더군요."
"그 미국인...... 질이 좋지 않은
사람이에요. 밀라도 결국 농락당한
셈이에요. 다행히 돈많은 사람하고
결혼해서 별 탈은 없었지만......."
오미애의 표정이 냉랭해지고 있었다.
"그자가 한국 아가씨들을 수시로
갈아치운다는 건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분통터지는 일이지만...... 잘못은 한국
아가씨들한테도 있지요."
"그 집에 몇번이나 놀러갔나요?"
마형사가 물었다. 오미애는 그
형사한테서 두려움을 느꼈다.
매끄럽고 부드러운 느낌이 드는데 눈이
너무 작아 거의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
뚱보한테서는 속을 알 수 없는 두려움만이
느껴지고 있었다.
"두어 번 놀러갔어요."
그녀는 사실에 접근해서 말하려고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뚱보 형사는
불만스러운 듯 그녀를 응시했다.
"왜 아까는 그 집에 간 적이 없다고
거짓말을 했지요?"
"밀라의 과거를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어요. 외국인하고 동거생활했다는
거...... 떳떳한 일은 아니잖아요."
그녀는 모겐도와 밀라, 그리고 자신과의
삼각 관계는 차마 말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경찰이 그것을 알아내 가지고
있겠지만 자신이 먼저 자진해서 그것을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밀라으 친구 가운데 모겐도씨의 집에
드나든 사람은 몇 명이나 되나요?"
"제가 알기로는 없었어요."
"그러니까 오미애 씨만 유일하게 그 집에
드나들었군요?"
"드나들었다고까지는 할 수 없고......
두어 번 놀러간 적은 있었어요."
"밀라씨가 학생 신분으로서 외국인과
동거생활한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결혼을 전제로 한 동거생활이라면
괜찮다고 생각해요. 밀라도 처음에는
결혼하게 될 줄 알고 그 사람하고
동거생활에 들어갔는데...... 나중에
뜻대로 되지 않고 말았어요. 결국
"그 사람하고 동거생활하고 있던 중에
밀라씨는 지금의 남편을 만난 건가요?"
"아마 그랬을 거예요."
그녀는 조마조마해지는 마음을 달래려고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결국 배창기 씨하고 결혼하게 되니까
밀라씨는 모겐도와의 동거생활을
청산했군요?"
"아마 그랬을 거예요."
그녀는 손끝이 떨리는 것 같아 얼른
찻잔을 도로 내려놓았다.
"결혼 후에는 어땠나요? 밀라씨는 결혼
후에도 모겐도를 만났나요?"
"아뇨, 제가 알기로는 만나지 않았어요."
"외국인과의 동거생활을 숨겨야 했으니까
만나지 않았겠죠."하고 남형사가 거들었다.
알라질까봐 몹시 신경을 썼어요."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미애
씨뿐이지 않습니까?"
"글쎄요. 다른 사람이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어쩐지는 모르겠어요."
"배미화 씨라고 아십니까? 유밀라 씨
시누이되는 여자인데......."
"네 알고 있어요. 밀라네 집에 놀라가서
소개받은 적 있어요."
"유밀라 씨와 배미화 씨 사이는
어땠나요?"
"올케 시누이 사이치고는 사이가 좋은
편이었어요."
남형사는 사진을 꺼내 보였다.
"이 남자를 아십니까?"
그녀는 그것을 흘낏 보고 나서 머리를
흔들었다.
"모르는 남자예요."
"배미화 씨의 약혼자인 황개라는
남자인데 모르십니까?"
"모르겠어요."
"얼마 전에 차 속에서 불에 타죽었지요."
"아, 바로 그 남자인가요?"
그녀는 신문에서 차 속에 있는 사람을
태워죽인 기사를 보았다고 말했다.
"그 사람이 바로 배미화 씨
약혼자인가요?"
"그렇습니다."
"어쩌면......."
"범인은 여자입니다."
마형사의 점 같은 두눈이 날카롭게
그녀를 응시하자 그녀는 당황해서 시선을
피했다.
날카로운 물음에 그녀는 얼른 생각이 안
나는 듯 잠시 생각해보다가 말했다.
"7시까지 가게에 있다가 영화보러
갔어요."
"혼자 갔나요. 아니면......?"
"어떤 사람하고 같이 갔어요."
그 어떤 사람에 대해서 그녀는 밝히기를
주저했다. 알리바이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자 그녀는 하는
수 없이 한 남자의 이름을 일러주었다.
이름이 최형모(崔亨模)라고 하는 그
남자는 중년의 유부남으로 그녀가 최근에
사귄 사람이었다. 어느 큰 기업의
중견간부인 그 남자와 그녀는 19일 저녁
7시 30분에 만나 저녁 식사를 한 다음 외국
영화를 보러갔다고 했다. 마지막 프로였기
때문에 영화가 끝난 시간은 10시
반쯤이었고 영화관에서 나온 그들은 어느
카페에 가서 가볍게 술 한잔씩을 마신 다음
집으로 갔다고 했다.
"그분이 집에까지 차로 태워다 줬어요.
그때가 아마 자정 가까이 됐을 거예요."
"미안합니다. 범인을 잡을 때까지는
피살자와 관계가 있는 사람들은 일단 모두
조사해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최형모
씨 전화번호를 좀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11. 제3의 女人

1. 사체의 위에서 알코올과 함께 청산염
0.9PPM발견. 피살자의 사인은
청산염에 의한 것임.(질식사가 아님)
2. 사체의 질속에는 남자 정액이 없었음.
채취 불능.
3. S호텔 1924호실에서 황개의 지문 여러
개 발견.
4. 황개의 혈액형은 O형.
5. S호텔 1924호실에서 김영대의 지문은
발견되지 않음.
6. 김영대의 혈액형은 O형.
7. S호텔 1924호실의 욕조와 침대에서
채취한 두 종류의 체모 중 한 가지는
황개의 것으로 밝혀짐. 나머지 한
여인의 것으로 판명됨.
8. S호텔 1924호실에서 발견된 캡슐
조각에서 극소량의 청산염 검출됨.
맥주병 속에서도 극소량의 청산염
검출됨.
9. S호텔 1924호실에서 채취한 수개의
지문 가운데 황개의 지문을
제외하고는 피살자와 관계있는
사람들의 지문은 발견되지 않음.
10. S호텔 1924호실에서 발견된 담배꽁초
가운데 던힐 꽁초에서 채취한 타액의
혈액형은 O형이고 말보로를 피운 자의
혈액형은 B형임.
11. 피살자의 혈액형은 B형임.
12. 854X호 베이지색 소형 승용차 차주
김동우의 혈액형은 AB형임.
꽁초의 타액은 혈액형 AB형의 타액임.
14. 543X호 녹색 승용차에서 발견된 두
가지 담배꽁초 가운데 말보로 꽁초에
남아 있는 타액의 혈액형은 B형임.
장미 꽁초에서 채취한 타액의
혈액형은 AB형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통보해온 검시
결과를 정리한 보고서를 들여다보면서
마형사는 하품을 길게 했다.
창 밖에는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오랜 장마 끝에 쏟아지는 햇빛이기
때문에 더욱 눈이 부신 것 같았다.
그는 거듭 하품을 하면서 충혈된 눈으로
다시 그 보고서를 읽어보았다.
유밀라의 사체에서 청산염이 검출된 것은
속에 처박힌 것 같았다. 그가 방안에서
발견했던 그 캡슐 조각 속에 청산염이 들어
있었던 것 같았다. 유밀라는 청산염을 탄
맥주를 마시고 나서 죽은 것 같았다.
보고서는 그녀가 물 속에서 질식사한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런데 보고서의 2항과 7항이 마형사의
신경을 곤두서게 하고 있었다. 2항의, 죽은
유밀라의 질 속에서 남자의 정액이
검출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녀가 그
방안에서 황개와 정사를 갖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그곳에서 황개와 무슨 짓을 했다는 말인가?
거기에 대한 해답은 제7항에 있을지도
모른다. 제7항은 유밀라 외에 제3의 여인이
범행 현장에 있었음을 지적해 주고 있었다.
가운데서 유밀라의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 대신 두 가지 중 한가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니까
황개는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제3의 여인과
정사를 가졌었다는 말이 된다.
H생명보험회사 직원들의 증언이 보다
확실한 사실로 드러난 셈이다. 그들은
1924호실에서 여자가 두 명 있는 것을
보았었다고 말했었다. 그 날 창가에
벌거벗은 채 서 있었던 여인은 유밀라가
아닌 제3의 여인이 아니었을까? 도ㄷ 그
방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유밀라가 보는 앞에서 황개는 제3의 여인과
정사를 가졌던 것일까? 그럴 리가 없다.
아니면 황개가 제3의 여인과 정사를 벌이고
있는데 유밀라가 불쑥 침입한 것일까? 그날
만난 뒤 호텔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와
헤어졌는지도 모른다. 일단 헤어져 밖으로
나온 그녀는 어떻게 해서 황개가 투숙한
방을 알아낸 다음 1924호실을 불쑥
방문했다. 그리고 거기서 황개와 제3의
여인의 정사 장면을 목격하고.......
그러고 나서 그녀는 살해된다. 누가
살해했는지는 모르지만, 황개가 범인일
수도 있고 제3의 여인이 그녀를 죽였을
수도 있다. 아니면 두 사람이 함께 그녀를
살해했는지도 모른다. 제기랄.
누가 유밀라를 살해했을까? 황개가
살해했을까? 황개가 범인이라면 그 사건은
더 이상 수사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범인이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범인을 살해한 범인, 즉 불고기 사건의
그러나 황개가 유밀라를 죽인 범인이
아닐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제3의
여인이 존재하는 한 말이다. 그런 가능성이
있는 한 편리하게 수사를 종결지을 수는
없다. 황개가 유밀라를 죽인 범인이 아닐
경우 범인은 당연히 제3의 여인이 될
수밖에 없다. 유밀라의 차를 잠실에 있는
여관 주차장에다 갖다버린 것도 바로
그녀일 것이다. 그녀는 그 차 속에
이빨자국이 있는 장미 담배꽁초를 남겼다.
그것은 불고기 사건 현장에서 범행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베이지색
승용차에서도 꼭같이 발견되었다.
황개의 혈액형은 O형인데 장미 꽁초의
타액에서 채취한 혈액형은 똑같이
AB형이다. 밀라의 차 속에서 발견된 또
유밀라가 피운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꽁초의 타액에서 채취한
혈액형은 밀라의 혈액형과 동일한
B형이니까. S호텔 1924호실에서 발견된
말보로 담배꽁초도 혈액형만 가지고
따진다면 유밀라가 피운 것이다.
자, 이렇게 정리하면 범인은 여자들이
즐겨 피우는 장미담배를 피우는 혈액형
AB형의 인물이다. 그리고 장미 꽁초에
루즈가 묻어 있는 것으로 보아 범인은
여자일 가능성이 크다. 불고기
사건현장에서 용의자를 목격했던 증권회사
직원들의 증언에서도 용의자는 여자였다고
했다.
그렇다면 황개를 일단 젖혀놓는다면
밀라를 죽인 범인은 장미담배를 피우는
밀라도 살해했고 황개도 불살라 죽였다는
말인가? 사실이라면 정말 놀랍고 무서운
솜씨를 가진 대담한 여자이다.
그렇지만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AB형의
여인이 범인이라면 어떻게 해서 세 사람이
1924호실에 있게 되었고, 왜 유밀라만
살해됐을까?
그 여인이 유밀라를 살해할 때 황개는
옆에서 그것을 구경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그것은 두 사람이 공범관계였을 경우에나
가능한 일이다. 두 사람이 공범관계였다면
그들이 힘을 합해 여자 하나쯤 죽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황개는 왜 피살되었을까? 그
여인이 황개의 입을 봉하기 살해한 것이
아닐까?
있다. 그것은 그 여인과 황개가 공범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한 가정이다.
공범관계에 의한 것이 아닌 단독범행일
경우 여자 혼자서 남녀가 함께 있는 방안에
침투해서 살인을 자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경우 첫번째로 가정해 볼 수 있는
것은 범인이 그들과 잘 아는 사이로
공개적으로 방안에 들어갔을 것이라는
점이다. 불륜의 현장을 발견한 사람한테
그들은 꼼짝못하고 문을 열어주었을 것이고
범인이 시키는 대로 했을 것이다. 제3의
여인이 나타났을 때 황개와 유밀라는 미처
관계를 갖지 못한 상태였을 것이다. 제3의
여인은 유밀라를 괴롭히기 위해, 또는
질투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녀가 보는
황개를 먼저 내보낸다. 그 다음 속임수를
썼든 강제로 했든간에 밀라에게 청산염을
탄 맥주를 마시게 했을 것이다.
두번째 가정은 황개가 방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기다렸다가 범인 혼자서 방안으로
침투하는 것이다. 이 경우 황개가 왜
밀라를 혼자 남겨두고 밖으로 나갔는지는
알 수 없다. 잠시 볼 일이 있어 방을
나갔을 수도 있고 아니면 범인이 그를
유인해 냈을 수도 있다.
아무튼 지금으로서는 유밀라가 공범에
의해 살해되었는지 아니면 제3의 여인으로
생각되는 단독범에 의해 죽임을 당했는지
단정을 내릴 수는 없다. 공범이 있든 없든
장미담배를 피우는 AB형의 그 여인이
범인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마형사는 등장인물의 혈액형을 정리해
보았다.

1. 유밀라 : B
2. 배미화 : B
3. 황개 : O
4. 김영대 : O
5. 김동우 : AB
6. 범인 : AB

김영대는 더 이상 용의자일 수 없다.
그의 혈액형은 황개와 같은 O형이지만
사건이 발생한 날 유밀라와 만난 사람은
그가 아니라 황개로 밝혀졌다. 웨이터
안군의 증언과 침대에서 발견된 체모등이
그것을 충분히 입증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김동우는?
가지고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여자가 아니고 남자이다. 그는 단지 자기
차를 도난당했을 뿐이다.
배미화--그녀는 그녀의 어머니에 의해
알리바이가 입증되었고, 혈액형도 피살자와
같은 B형이다. 제기랄.
마형사는 수사본부를 나와 낡은 차를
몰고 본서로 향했다. 거리는 벌써 찌는
듯이 무더웠다.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은 후텁지근할 뿐이었다.
뚱뚱한 그는 땀을 많이 흘리고 있었다.
그가 본서에 도착했을 때 김영대는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그를 보자 김영대는
사납게 눈을 흘기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식투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대고 귀띔했다. 마형사는 김영대를 불러내
취조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왜 단식을 하고 있지요?"
지난번과는 달리 깍듯이 예의를 지키는
말투에 김영대는 조금 긴장하는 표정을
지었다.
"억울하니까요. 사람을 죽이지도
않았는데 잡아 가둬놓고 있으니까 밥이
목구멍에 넘어가야지요."
그동안 미안했어요. 당신의 살인혐의는
90프로 정도는 풀렸어요."
영대는 분노에 찬 눈으로 마형사를
노려보았다.
"석방되는 겁니까?"
"그래요. 이제 가도 좋아요. 당신은
경찰한테 칼을 휘두르며 대항했기 때문에
그냥 덮어두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알고
돌아가도 좋아요. 그동안 괴롭힌 것 정말
미안해요. 수사과정에서 빚어진 것이니까
이해해 줘요."
패배의 순간이었다. 마형사는 연행해온
용의자를 사과의 말과 함께 풀어줄 때가
제일 싫었다.
"흥, 간단하군요. 경찰은 생사람을
잡아다놓고 고생시키다가 혐의가 없으면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하고 풀어주면
되겠지만 억울하게 붙잡혀서 고생한 사람
마음은 어떤지 압니까? 할 수만 있다면
죽이고 싶어요. 생사람 잡은 경찰을
때려죽이고 싶어요."
"알아요.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해요.
하지만 이건 알아야 해요. 당신에 대한
김영대는 코웃음쳤다.
"흥, 알겠습니다. 10프로 정도 가지고 뭘
어쩌겠다는 겁니까? 제발 그만하고 그렇게
할 일이 없으면 낮잠이나 주무십시오."
김영대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는
기세등등해져 있었다.
"아, 배가 고파 죽겠네."
김영대의 중얼거리는 말을 들으며
마형사는 다시 한번 심한 패배감을 느꼈다.
그는 안간힘을 다해 말했다.
"하지만 단 1프로의 혐의가 있어도
우리는 수사를 포기하지 않아요. 혐의가
100프로 벗겨질 때까지......."
"마음대로 해보십시오."
영대는 거들먹거리며 문쪽으로 걸어갔다.
"당신은 아직 알리바이가 없어요. 그리고
있어요."
마형사는 영대의 등에다 대고
쏘아붙였다. 영대의 뒤에서 문이 쾅하고
닫혔다. 마형사는 입술을 깨물면서 밖으로
나왔다.

나흘만에 경찰에서 풀려난 김영대는 제일
먼저 식당부터 찾아가 냉면 두 그릇을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그 다음에 그는
S호텔로 갔다. 호텔에 도착해서 곧장
스카이라운지로 올라간 그는 자리를 잡고
앉자 웨이터 안기홍을 불렀다.
스카이라운지는 마침 점심 때가 막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시력이 나쁜 안기홍은 미처
김영대르 ㄹ알아보지 못한 채 그가 앉아
얼굴을 마주친 순간 그는 비로소 손님을
알아보고 안색이 굳어졌다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안기홍을 노려보고 있던 김영대는
"이봐, 내가 누군 줄 알겠어?"하고
물었다.
"아, 네......."
웨이터 안이 당황한 나머지 어쩔줄
몰라하자 그는 갑자기 뛰쳐일어나 주먹으로
안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이 개새끼!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힘없이 나동그라진 웨이터를 그는
사정없이 구둣발로 짓밟았다.
스카이라운지 안에 앉아 있던 손님들은
좋은 구경거리라도 생겼다는 듯 우르르
일어나 몰려왔다. 다른 종업원들이 달려와
살기등등하게 날뛰는 바람에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말리는 놈은 죽여버리겠어! 경찰을
부를테면 불러! 내가 지금 어디서 나온 줄
알아? 유치장에서 나오는 길이야! 이
개새끼가 나를 경찰에 찌르는 바람에
살인범으로 몰려 하마터면 사형당할 뻔했단
말이야! 내가 당한 만큼 네놈도 한번
당해봐라!"
그는 닥치는 대로 웨이터 안을 때리고
짓밟아댔다. 처음에는 안맞으려고 손으로
주먹과 발길질을 막던 안은 이제는 죽은
듯이 축늘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김영대는 가까운 테이블
위에서 맥주와 케첩, 소스 등을 가지고
왔다. 안기홍은 축 늘어진 채 꼼짝도 하지
"이 새끼 증언을 하려면 똑똑히 해. 그런
거짓말을 해서 생사람을 잡게 하면 되느냐
말이야. 만일 내가 억울하게 사형이라도
당했으면 어떡 할 뻔했어?"
김영대는 엎어져 있는 안기홍을 깔고
앉더니 그의 머리에다 맥주를 부었다.
차가운 것이 머리를 적시자 안이 정신이
드는지 몸을 움직였다.
"그대로 잠자코 있어, 이 새끼야!"
김영대는 안의 머리에다 케첩과 소스를
골고루 뿌렸다. 그런 다음에야 직성이
풀리는지 몸을 일으켰다. 결국 자기를 잘못
붙잡아간 경찰한테는 손을 못 대고 힘없는
안기홍한테만 분풀이를 한 셈이었다.
"여기 올 때 기분 같아서는 죽여버리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해두는 것만도
김영대는 손을 털고 나서 유유히
스카이라운지를 빠져나갔다. 그때까지
얼빠진 모습으로 그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그가 사라지고 난 뒤에야
혀를 내두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던 김영대는
도중에 내려 사우나실로 들어갔다. 며칠
동안 갇혀 있는 바람에 몸은 땀에 절어
있었다.
옷을 벗고 따뜻한 탕 속에 들어가 때를
불린 다음 그는 때밀이 청년한테 몸을
맡겼다.
그가 어떤 문제에 대해 생각을 더듬기
시작한 것은 사우나를 끝내고 가운
차림으로 휴게실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다. 억울하게 경찰에 연행되어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뒤늦게야
그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게된 것이다.
그를 풀어줄 때 그 돼지같이 생긴
마형사는 그의 등 뒤에다 대고
"당신은 아직 알리바이가 없어요. 그리고
유춘지의 편지에 대해서 해명을 못하고
있어요."라고 말했었다.
그것이 그에 대한 10프로의
혐의점이라고도 했었다. 그 돼지는 단
1퍼센트의 혐의가 있어도 수사를 포기하지
않는다고 겁을 주기까지 했었다. 그렇다면
언제 다시 또 붙들려가 곤욕을 치를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천장을 향해 담배연기를 내뿜고
있다가 갑자기 의문에 싸이기 시작했다. 왜
나한테는 알리바이가 없는 것일까? 왜 나는
편지는 또 무엇인가? 곤욕을 치르게된
직접적인 동기는 그 여자의 편지들
때문이었다. 그 정체불명의 여인이 보내온
편지들이 이렇게 말썽을 부리게될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었다.
정체불명의 그 이상한 편지들과 지난
7월19일 오후의 알리바이가 없다는 사실이
결정적으로 자신을 불리하게 만들었으며,
그때문에 하마터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살인범으로 인생을 망칠 뻔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그는 소름이 끼쳐왔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살인 혐의를 받을만
했다. 형사들이 그를 연행해서 며칠 동안
괴롭힌 것은 하등 이상할 게 없었다. 왜
나는 그런 불리한 입장에 빠지게 되었을까?
혹시 함정이 아닐까? 그런 의문이 든 것은
자신이 정말 함정에 빠졌던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사건과
아무 관계도 없는 자신이 그렇게 불리한
입장에 빠졌을 리가 없지 않은가. 자신을
불리하게 만들었던 그것들은 마치 체격에
맞게 재단해서 만들어놓은 양복 같았다.
일부러 맞추지 않고서야 그렇게 딱 맞아
떨어지게 만든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그것이 함정이라면 누가 그것을
만들었을까? 그는 멈칫했다. 바로 범인의
짓이야! 범인이 수사의 초점을 나에게
돌리게 함으로써 나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나쁜 놈 같으니! 그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그대로 편안하게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벌떡 상체를 일으켜 다시 담배 한
앞에 있는 텔리비전 수상기에서는 비디오
영화가 돌아가고 있었다. 그가 좋아하는
폭력영화였는데 지금의 그의 눈에는 그런
것은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는 이윽고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하고 지난날의
자신의 행적을 곰곰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그 이상한 편지들을 보내왔던 유춘지라는
여인은 정말 기억에 없는 이름이었다. 워낙
무수한 여인들을 농락했기 때문에 그
이름들을 일일이 기억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유춘지라는 이름이 기억에
없다 해도 그녀와 가졌던 행위만은 생각이
나는 법이다. 그러나 그녀가 편지에 밝힌
내용들은 전혀 기억에 없는 것들이었다.
그는 그런 짓을 한 적이 없었다. 물론
여자들을 농락하고 금품을 우려낸 적은
그토록 집요하게 괴롭히면서 금품을 갈취한
적은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다. 아니, 딱
한번 있기는 있었다. 그것은 제비족으로
처음 입문했을 때였다. 그때는 솜씨가
서툴렀기 때문에 한 여자를 붙들고 늘어져
돈을 우려냈었다. 그러나 그 여자의 이름은
유춘지가 아니다. 그녀는 남편과 이혼한 뒤
미국에 건너가 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왜 그런 편지가 나에게 날아왔을까? 왜
그 편지에는 과장된 내용들이 그렇게
적나라하게 적혀 있었을까? 잘못 배달된
것도 아니다. 봉투에는 정확히 그의 주소와
이름이 명기되어 있었다. 그것을 보면
누군가가 분명히 계획적으로 나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그 편지들을 보냈음이
범인은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자이다.
그러니까 그런 편지를 정확히 나한테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편지들을 없애지 않고 왜 바보같이
보관하고 있었을까?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처음 그런 편지들을 받았을 때는 어이가
없어 웃기만 했었다. 편지는 그의 손에
닿기 전에 먼저 개봉된 흔적이 있었다.
그의 아내 하종미가 먼저 뜯어봤음이
틀림없었다. 그는 모른 척하고 그 편지를
아내에게 보여주면서 이건 생사람 잡는
편지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그의 말을 믿는
것 같지 않았다. 그가 찢어서 내버리라고
하자 종미는 버리는 것은 아무 때라도 늦지
않으니까 둬두고 보자고 했다.
편지는 계속 날아왔다. 그때마다 그는
말없이 그 편지들을 보관해 두었다. 그가
워낙 진지하게 변명하는 바람에 그녀도
나중에는 판단에 혼란을 느끼는 것 같았다.
정 그렇다면 어떤 정신병자의 협박
편지일지도 모르니까 버릴 게 아니라
모아두었다가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길 경우
거기에 대비해서 그것들을 증거물로 확보해
두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그녀의 말에 그는
그렇 듯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것들을
낡은 금고 속에 넣어두었었던 것이다.
편지는 그렇다하고 나는 왜 7월19일의
알리바이를 입증할 수 없게 되었을까?
7월19일 오후의 알리바이를 입증할 수만
있다면 경찰의 나에 대한10%의 혐의는 즉시
풀릴 수가 있다. 염병할, 그게 곤란하단
말이야.
마형사는 땀을 흘리며 안으로 들어서는
남형사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을 보고 그가 뭔가를
얻어가지고 돌아왔음을 그는 알 수가
있었다.
"만나고 왔습니다. 그 친구......
어떴게나 떨어대던지 오히려 제가 민망해서
혼났습니다."
그가 만나고 왔다는 사람은 백가서림
주인 오미애의 애인인 최형모라는 중년의
사내였다.
"오미애의 알리바이는 맞습니다. 그
아가씨 말대로 두 사람은 19일 저녁
7시30분에 만나 자정쯤에 헤어졌습니다."
남형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한번
씨익 웃고 나서 말을 이었다. 그녀가 그날
확인된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7시에
책방을 나와 30분 후인 7시30분에 최형모를
만나 시간을 보낸 것이다.
"그런데 오미애의 진술하고 달랐습니다.
함께 시간을 보내긴 보냈는데 극장에 간 게
아니고 호텔 방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친구가 하도 겁을 집어먹고 떨어대기에
추궁했더니 솔직히 털어놓더군요. 오미애의
연락을 받고 서로 말을 맞추어놓은 것
같았는데 제가 추궁하니까 하는 수 없이
불더군요. 그러면서 잘봐달라고 하면서
돈봉투를 주더라구요. 만져보니까 꽤
두툼하던데요. 받을까 하다가 도로
돌려줬죠."
"그 아가씨 꽤 맹랑하군 그래."
오미애를 가리키며 마형사가 중얼거린
말이었다.
"유부남하고 호텔 방에서 뒹굴고
있었다는 말을 어떻게 털어놓겠습니까.
이해를 하셔야죠."
"김동우를 다시 한번 만나봐야겠어."
"이발소 주인 말입니까?"
남형사는 지친 듯한 눈으로 마형사를
쳐다보았다.

백가서림의 전화벨이 울렸다. 오미애는
재빨리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그녀가 요즘
한참 빠져 있는 유부남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
"형사가 다녀갔어."
남자의 목소리는 잔뜩 주눅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뭐라고 하셨어요? 제 말대로
그녀는 미리 그에게 전화를 걸어 만일
형사가 찾아올 경우 자기가 진술한 대로
말해야 한다고 그에게 단단히 다짐해
두었었다.
"그렇게 말했더니 형사가 믿지를 않았어.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우리 관계를
공개해 버리겠다고 협박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사실대로 말해 버렸어."
"아니, 뭐라구요? 우리가 거기에 간
것까지 말했어요?"
"음, 할 수 없었어."
"아이, 몰라요! 바보같이 그런 걸 말하면
어떡 해요! 제가 그렇게 신신당부했는데
어쩌면 그렇게......."
상대는 무른데가 있는 남자였다. 그것을
그는 신사다운 품위로 믿고 있었다. 바보
"하지만 별일 없을 거야. 목적은 그게
아니니까. 살인사건 때문에 그러는 거니까
걱정할 것은 없어."
"아이, 몰라요!"
"돈을 줬더니 받지를 않았어."
"돈은 함부로 받나요."
그녀가 사납게 쏘아대자 남자는
멈칫했다가 조심스럽게 이렇게 말했다.
"당분간 만나지 않는 게 좋겠어.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는......."
"알았어요."
그녀는 거칠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바보 같으니!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점원에게 가게를 맡기고 그녀는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자주 가는 카페로 갔다.
그 카페는 냉방이 잘 되어 있었다.
담배부터 피워 물었다. 잠시 후 웨이터가
커피를 가져왔따. 그녀는 거리에
넘쳐흐르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커피를
마셨다.
흥, 결국 죽었구나. 잘 죽었지 뭐.
그녀는 밀라의 죽음이 조금치도 슬프지가
않았다. 슬프기는 커녕 오히려 잘 죽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밀라가 생전에 왜 책방에 자주 찾아와
그녀에게 다정하게 굴었는지 그 이유를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입을 막기 위해
가게에 와서 정기적으로 책을 사기도 하고
점심을 내기도 하고 과분할 정도의
선물까지 주기도 했었다.
밀라의 심중을 꿰뚫어 본 그녀는 한번
있었다. 가게 장사가 잘 안 돼 외국에 신간
서적을 주문하지 못하고 있다, 한 천만
원만 어디서 융통해야겠는데 빌리기가 어디
쉬워야지.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밀라는
자기가 빌려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날
백만 원짜리 수표 열 장을 가지고 왔다.
그것을 그녀에게 주면서 아무 때나 갚아도
좋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쓰라고했다.
그리고 돈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또
말하라고 했다. 그래서 오미애가
밀라로부터 지금까지 빌린 돈은 자그마치
4천만 원이나 됐다. 밀라가 죽었으니 그
돈은 이제 공중에 뜬 셈이다. 애당초 갚을
마음이 없었지만 당사자가 죽고보니 짐을
벗은 듯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동거생활을 알고 있는 미애가 그 사실을
배창기에게 알릴까봐 그랬던 것이다.
오미애는 밀라와 모겐도와의 관계를 너무도
속속들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관계,
그러니까 그녀 자신까지 포함된 삼각관계를
생각하면 그녀는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유밀라와 오미애가 영어를 배운답시고
함께 모겐도를 만나고 그의 집에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이미 그녀들 사이에는 모겐도를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모겐도는 은밀하게 전개되는 그녀들의
치열한 싸움을 여유있게 관망하면서
그녀들과 개별적으로 관계를 맺어나갔다.
그때만해도 유밀라와 모겐도가 동거생활에
모겐도의 집을 방문해 보면 흐트러진
침대와 미처 옷 매무새를 다듬지 못한
밀라의 모습이 보였고, 반대로 미애 자신이
그 집에서 모겐도와 놀아나다가 밀라의
습격을 받고 그녀한테 정사의 흔적을
보여주기도 했다.
번갈아가면서 그녀들을 농락하던
모겐도는 점점 심각해지고 치열해지는
그녀들의 싸움을 기술적으로 조정하기 위해
다른 남자 한 명을 그 판에 끌어들였다.
화이트라고 하는 같은 미국인 친구로
거한이었다.
모겐도의 집에서 네 명이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된 어느 날 저녁 그들은
포르노필름을 보면서 술을 마시고 대마초
담배를 피웠다.
것들이었기 때문에 수치심이 없어진 그들은
이내 옷들을 벗어던졌고 나체 파티라는
것을 열어 상대를 바꿔가면서 성관계를
맺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파티는
난잡해져갔고 그 때문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그룹섹스가
끝나고 다음 날 아침 제정신이 돌아왔을 때
그녀들은 상대방을 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수치심을 느꼈다. 그러나 그
난잡한 그룹섹스가 준 황홀감은 머리 속에
계속 남아 있었다. 그것이 수치스럽고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들은 그
미치도록 자극적이었던 파티를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결국 두번째 파티가 열렸을 때 그녀들은
설레는 가슴을 안고 그곳에 참석했다.
여자애와 외국인이 또 한 명 끼어 들었던
것이다. 낯선 여자애 역시 대학생 같아
보였고, 그 외국인은 그냥 제임스라고
불렸다. 제임스는 헌칠한 키에 몹시 마른
몸집을 지니고 있었다.
그날 밤 벌어진 두번째 섹스 파티는 더욱
자극적이었다. 여섯명이 벌거벗은 채
뒤얽혀 돌아가느라고 날이 새는지도
몰랐다.
그와 같은 파티는 한 달에 두번꼴로 거의
여섯 달 동안이나 계속 되었다.
그동안 새로운 얼굴들이 수시로
등장했다가 사라지곤 했는데, 그
가운데에는 배미화의 얼굴도 있었다.
놀라운 것은 나중에 배미화와 유밀라가
시누이와 올케 사이가 됐다는 사실이었다.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것은 기절초풍할
정도로 놀라운 사실임에 틀림없었다.
오미애가 배미화를 처음 본 것은 물론
섹스 파티장에서였다. 그전에는 알지도
못하던 얼굴이었다. 그녀가 그녀를
눈여겨보게 된것은 그녀의 뛰어난 미모와
몸매 때문이었다. 배미화는 그 파티에
두번인가 얼굴을 내민 뒤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1년쯤인가 지나 그녀를 다시
보게되었는데 그때는 섹스파티장이 아닌
유밀라의 신혼집에서였다. 유밀라의
신혼집에 초대받아 갔다가 그녀를 그곳에서
발견하게 되었고 그녀가 바로 밀라의
시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
미애의 놀라움은 자못 컸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밀라 같은 난잡한 과거를 지닌 여자가
되었는지, 더구나 그녀의 과거를 알고 있을
시누이의 입을 막고 어떻게 그 부인이 될
수 있었는지 생각이 짧은 그녀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의문은
얼마 가지 않아 풀렸다. 그것을 알고 난
그녀는 더욱 어이가 없었다. 밀라의
신혼집을 방문하고 나서 얼마 후 미애는
밀라를 밖으로 불러내 그녀에게 결혼하기
전에 배미화를 어디선가 만난 적이
없었느냐고 물어보았다. 밀라는 그런
여자는 본 적도 없었고, 창기와 결혼하고
나서 몇달 후에야 그녀를 만나볼 수가
있었다고 말했다. 밀라가 창기와 결혼할
당시 미화는 미국에 가 있었다. 디자인
공부를 하겠다고 미국으로 건너가 얼마
동안 있다가 오빠의 결혼식이 끝나고 나서
것이다.
"미국에서 돌아와가지고 너를 처음 봤을
때 그 여자가 너를 못알아보던?"
"그때 처음 만난 건데 알아보긴 뭘
알아봐. 도대체 왜 그러니?"
미애는 기가 막힌 나머지 한동안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마침내 속에 있는 말을
꺼내놓고 말았다.
"그 여자...... 파티에서 봤던 여자야.
미스터 모겐도의 파티에서 말이야."
"뭐, 뭐라구?! 정말이야?!"
밀라의 경악하는 모습을 미애는 차가운
눈으로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틀림없어. 두번인가 봤어."
"그런데 왜 난 본 기억이 안 나지?"
창백해진 그녀는 입술까지 달달 떨어대고
"한번은 너도 함께 있었어. 두번째 그
여자가 왔을 때는 너는 빠졌더랬어."
"그런데 왜 기억이 안 나지?"
"넌 그때 많이 취해 있었고...... 뽕까지
맞았잖아. 그러니까 봤더래도 기억이 나지
않겠지."
그녀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환상적인 어두운 조명 아래 모두가 술에
취해 있었고, 대마초를 피우고 히로뽕을
맞은 상태였기 때문에 출입하는 사람들에
무관심할 수밖에 없었다. 몽롱한 상태
속에서 마치 물건을 보듯 사람들을
쳐다보고, 섹스에 탐닉하고, 그리고
깨어나면 모두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럼 그 여자도 나를 못 알아봤을까?"
밀라는 그것이 제일 두려웠다.
수 있겠지."
미애의 겁주는 말에 밀라는 고개를
완강히 흔들었다.
"아니야! 못 알아본 게 틀림없어!
알았다면 가만 있을 여자가 아니야! 자기
오빠한테 이야기해서 이혼시켰을 거야."
그녀는 몸서리를 치면서 돌아갔다.
돌아가면서 미애한테 절대 비밀로 해달라고
신신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미애는 물론 그 비밀을 지켰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과 호기심을 가지고
밀라의 결혼생활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밀라한테는 그후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아들까지 낳았고, 날이
갈수록 행복에 겨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미애는 결국 미화가
결론을 내렸고, 미화야말로 복이 많은
년이라고 생각해 버렸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나중에 가서 바뀌게 되었다.
그건 그렇고 그 환상적이고 자극적인
파티는 화이트와 제임스가 갑자기 귀국하게
됨으로써 반년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 환상적이고 자극적인 파티에 깊이
빠져 있던 아가씨들은 몹시 서운해 했지만
남자들이 줄행랑쳐버린 마당에 모겐도만
붙잡고 늘어질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제 모겐도 한 남자에 세 명의 여자들이
남은 셈이었다. 상황으로 볼 때 그는 세
여자들 가운데 한 명을 선택해야 했다.
여자들은 그의 눈치만 살폈다.
나중에 나타난 이명지는 깜찍하고 귀엽게
생긴 아가씨였다. 그녀에 비해 밀라는
미모는 좀 빠진 편이었지만 차가운
지성미를 풍기고 있었다.
마침내 어느 날 모겐도는 세 아가씨들을
불러 앉혀놓고 자기는 유밀라를 사랑하기
때문에 멀지않아 그녀와 결혼식을 올리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는 다른 두 아가씨들이 보는
앞에서 밀라와 입을 맞추었다. 미애와
명지는 참담한 패배감과 모욕감을 안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것들은 그녀들이
그 집을 나올 때쯤 증오감과 분노로 바뀌어
있었다.
모겐도의 그와 같은 발표가 있은 직후
밀라는 보따리를 싸들고 즉시 그의 집으로
들어갔다. 미국인과의 동거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동거생활에 들어간 지
남자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 결혼식에
미애와 명지는 물론 초대되지 않았다.
그녀들이 모르는 사이에 밀라는 식을
올렸던 것이다. 그리고 모겐도의 집에는
밀라 대신 다른 아가씨가 들어갔다. 나중에
알고보니 다른 사람도 아닌 배미화였다.
일은 점점 묘하게 꼬여가는 것 같았다.
유밀라에 이어 배미화까지 모겐도와
동거생활을 하다니, 생각만해도 기가 찰
일이었다. 미애가 그 사실을 밀라에게
이야기해 주자 그녀는 놀라서 자지러지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녀의
입장으로서는 모른 체하고 있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1년쯤 지난 어느 날 배미화로부터
미애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밀라의
묻기에 미애는 물론 잘 기억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때는
이미 모겐도와 미화의 동거생활이 이미
끝장나 있을 때였다. 미화는 지금 좀 만날
수 없느냐고 물었다. 한 시간 후 그녀들은
지금 미애가 앉아 있는 카페에서 만났다.
미화는 표정이 몹시 굳어 있었다.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그녀는 다 알고 왔으니까
솔직히 말해 달라고 하면서 밀라가 결혼
전에 어떤 미국인과 동거생활을 한 적이
있느냐고 따져 물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미애는 처음에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완강히 부인했다.
"이건 매우 중요한 일이에요. 잡아뗀다고
해서 덮어질 줄 알아요? 친구라고 덮어놓고
옹호하면 안 된다구요. 이명지도 다
만나봤어요. 모두 시인했어요. 아가씨도 잘
알고 있다고 했어요. 이제 미애씨 말만
들으면 확인이 끝나는 거예요. 이래도
부인할래요? 입을 열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요. 단지 나는 조용히
해결하고 싶어서 이렇게 만나자고 한
거예요. 내가 직접 나서지 않아도 얼마든지
알아볼 수 있지만 난 어디까지나 조용히
해결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 깡패를
동원할 수도 있고 경찰을 동원할 수도
있어요. 사기결혼이니까요. 하지만 난
시끄러운 거 싫어요. 자, 아는 대로 솔직히
말해 줘요. 동거생활한 거 맞죠?"
그렇게 나온데야 아무리 강심장이라 해도
배겨낼 도리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미애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미화는 표독스런 표정으로 다그쳤다.
잔뜩 주눅이 든 미애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한 1년 한 걸로 알고 있어요."
"잘 안 들려요. 좀더 크게 말해 봐요!"
"한 1년쯤 동거생활했어요. 제가 이런
말했다는 건 비밀로 해주세요.
부탁이에요."
미애는 거의 울상이 되어 있었다.
"물론 비밀을 지켜야지요."
"어, 어떻게 하실 거예요? 파혼시킬
건가요?"
"파혼 정도로 되겠어요?! 내가 데리고
사는 건 아니지만...... 우리 오빠가 알면
아마 죽이려 들걸요. 이건 명백히
사기결혼이에요! 경찰에 고발하면 당장
외국놈하고 1년 동안이나 동거생활한 것이
처녀라고 속이고 버젓이 남의 집 며느리로
들어오다니 정말 그 낯짝을 보면
오장육부가 뒤틀려서 두고볼 수가 없어요!"
모겐도를 외국놈 운운하는 것이 지금은
그를 몹시 증오하는 것 같았다.
미애는 자신이 죄를 짓기라도 한 듯
고개를 떨구었다. 그것이 사기 결혼으로
그녀 말마따나 경찰에 고발하면 밀라가
정말 당장 걸려드는지 어떤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잔뜩 겁을 집어먹은 그녀는
그런 것 저런 것 생각해 볼 새도 없이
미화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언니, 밀라를 용서해 주세요. 한때의
실수로 생각하고 용서해 주세요. 그애는
아주 좋은 애예요."
녹음기를 꺼내보였다.
"우리가 한 말은 여기에 다 녹음이 되어
있어요. 나중에 혹시 무슨 일이 있거들랑
진술을 번복할 생각하지 말아요."
이명지가 미화에게 고자질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미애는 미화와 헤어지고
난 뒤 즉시 명지에게 전화를 걸어 따졌다.
그러나 명지는 펄쩍 뛰면서 자기가 먼저
고자질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미화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자기를 찾아왔었고, 그래서
자기는 오히려 미애쪽에 의심을 두고
있었다고 했다. 그녀들은 서로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입씨름을 벌이다가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남편한테 당장 이혼당해 비참한
몰골로 나타날 줄 알았던 밀라가 웬일인지
들려오지 않았다. 오히려 밀라는 전보다
더욱 사치스러운 차림으로 행복에 겨운
미소를 띠고 책방에 나타나곤 했다.
모겐도를 독차지한 연적으로서 그렇지
않아도 질투와 증오에 사로잡혀 있던
그녀는 마음 속으로 은근히 밀라가
못되기만을 바라고 있었는데 그렇게 되기는
커녕 더욱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니 속이
뒤틀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궁금한 나머지 미화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보았다.
"언니, 저번에는 죄송했어요. 정말
고마워요. 밀라가 쫓겨나면 어쩌나
싶었는데 언니가 감싸준 덕분에 잘 있는
것을 보니까 정말 기뻐요. 언니 같으신
분은 세상에 없을 거예요. 밀라를 대신해서
그녀를 떠보기 위해 건 전화였는데 말은
그렇게 했다.
"아, 그렇지 않아도 내가 전화를 걸려던
참이었어요. 생각 같아서는 당장 쫓아내고
싶었지만 자식까지 낳은 마당에 그렇게
해서 뭐가 좋겠어요. 조카 장래를
생각하니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요즘 아가씨들치고 혼전에 스캔들
없는 사람 어디 있어요. 과거를 굳이
따지자면 한이 없는 거 아니겠어요? 다른
여자 들여봤자 그 여자 과거가 깨끗하다고
어떻게 보장해요. 그런 것 저런 것 생각해
보니까 그대로 덮어두고 사는 게
상책이다싶어 모른 체하기로 했어요.
과거가 아무리 지저분해도 일단 결혼한
뒤에는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고 새출발하면
생각해요?"
"네, 옳은 생각이에요. 오빠께서도 알고
계시나요?"
"모르고 계세요. 앞으로도 말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아가씨들도......
미애씨하고 명진가 곤진가 하는 아가씨도
앞으로 입조심해요. 누가 묻거들랑 절대
그런 적 없다고 잡아ㄸ세요. 알았어요?"
"네, 알았습니다."
다소곳이 대답하는 그녀는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미애는 밀라를 밖으로
불러내 그동안 미화와의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미화는 이미 네
과거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를
생각해서 그만 덮어두기로 했다더라.
하더라. 핼쓱한 얼굴로 이야기를 듣고 난
그녀는 미화가 자기 오빠한테는 고자질하지
않기로 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조금
안심하는 눈치를 보였다.
그러나 저러나 말썽많던 밀라는 이제
죽었다. 그녀가 죽은 마당에 배미화가
어떻게 나오는지 그녀는 궁금했다. 그리고
위로의 말이라도 해주어야 할 것 같았다.
형사들이 찾아왔었다는 말도 해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 안에
설치되어 있는 공중전화 박스쪽으로
걸어갔다.
배미화는 집에 있었다. 미애가 밀라의
죽음을 애석해 하면서 위로의 말을 전하자
그녀는 예상했던 대로 대수롭지 않게
"할 수 없죠 뭐. 자기 명이 짧아서 일찍
죽은 거 어떡 하겠어요. 우리 조카만
불쌍하게 됐죠 뭐. 오빠는 새 장가가면
되는 거고."
그녀의 전화 목소리를 들으면서 미애는
하마터면 밀라의 목소리로 착각해서 들을
뻔했다. 그만큼 두 여자의 목소리는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주 비슷했다.
"오빠께서는 충격이 크시겠어요."
"뭐 그렇지도 않은가 봐요. 죽은
사람한테 안됐지만 우리 오빠 부부는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었어요.
위태위태했는데 결국 그런 식으로 헤어지고
말았어요. 그 여자가 그렇게 죽는 바람에
우리 집안은 아주 유명해지고 말았어요.
망신살이 뻗친 거죠. 집안 망신이나 시키고
있겠어요."
"그리고 참...... 언니 약혼자도 세상을
떠나셨다는 말을 들었는데 정말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그건 어떻게 알았죠?"
"저한테 형사가 다녀갔어요. 밀라와 관계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만나고 있나봐요."
"형사하고 무슨 말을 했어요?"
"밀라가 모겐도라는 미국인하고
동거생활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어요.
처음에는 그런 것 모른다고 잡아떼었는데
이미 알고 와서 묻는 바람에 끝까지 부인할
수가 없었어요."
"시인했다 이거군요?"
"형사들이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어요. 알고 묻는데 어떻게
"할 수 없죠 뭐. 이젠 모두 끝난 거니까
이제 와서 그런 것 저런 것 따져봐야
뭐하겠어요. 그런데 내 약혼자 이야기는 왜
나왔죠?"
"형사들이 어떤 남자 사진을 보여주면서
그 사람을 아느냐고 물었어요. 모른다고
하니까 언니 약혼자라고 하면서 살해됐다고
했어요."
"그래요. 살해됐어요."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조금도
슬퍼하거나 하는 기미는 느껴지지 않았다.
"알고보니까 별로 좋은 남자가
아니었어요. 날 속였어요."
그러니까 슬퍼하지 않는구나 하고 미애는
생각했다.
"누가 밀라를 죽였을까요?"
"형사들은 눈에 불을 켜고 범인을 찾고
있는 것 같았어요."
"직업이 그런 사람들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겠죠. 나한테도 형사들이 왔었어요.
하지만 난 몰라요."
배미화는 칼로 자르듯이 말했다. 미애는
입 속이 바짝 타는 것을 느꼈다.
"왜 밀라하고 언니 약혼자하고 동시에
죽었죠? 그것도 사고로 죽은 것도 아니고
누구한테 살해당했으니 말이에요."
그녀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살해됐겠죠 뭐.
밀라는 호텔 방에서 살해된 걸로 봐서 외간
남자하고 바람 피우다가 살해됐을
거고...... 그 남자는 차 속에 갇혀 불에
타죽었는데...... 형사들 말이 어떤 여자가
그 남자 역시 어떤 여자한테 원한을 사서
죽은 게 틀림없었요. 난 마치 두 사람한테
사기를 당한 기분이에요. 그래서 하루빨리
그 사람들을 잊어버리려고 해요. 그런
사람들 생각하고 있어봤자 득되는 건
하나도 없을 테니까 말이에요. 미애씨는
친했으니까 뭔가 짚히는 게 있을 거
아니에요?"
그 말에 미애는 당황했다.
"친하긴 했지만 짚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정말 밀라가 죽은 건
뜻밖이었어요."
"밀라는 바람기가 심한 여자였어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에요. 미애씨도 그건
인정하겠죠?"
"하지만 그건 결혼하기 전이었잖아요?"
"이거 봐요. 남편이 외국에 출장간
사이에 유부녀가 호텔 방에서 살해됐어요.
외간 남자하고 호텔 방에 들어갔다가
살해된 거예요. 결국 밀라의 바람기는 결혼
전이나 후나 마찬가지였다는 결론이
나와요."
"글ㅆ요."
"숨기지 말고 말해봐요. 밀라가 만난
남자가 누구예요? 그 미국인이에요? 아니면
한국인이에요? 미애씨는 알고 있을 테니까
말해 봐요."
"전 그런 거 몰라요. 친하기 했지만
밀라는 남자 관계 같은 거 전혀 말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뒤를 흘낏보니
전화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성난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많아서 전화 끊겠어요."
그녀는 서둘러 수화기를 내려놓고
박스에서 나왔다.
황개를 살해하는데 이용되었던
베이지색의 소형 승용차 차주 김동우가
경영하는 이용원은 호텔 로미오와
줄리엣으로부터 200m쯤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남형사는 땀도 식힐
겸해서 먼저 호텔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커피숍은 냉방이 잘 돼 있어 시원했다.
실내는 빈 자리가 거의 없을 정도로
손님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남형사는 커피를 마시면서 문득 김동우가
호텔 로미오와 줄리엣 가까운 곳에서
이용원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왜 하필이면 그 두 곳이 서로
묘한 우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자가용은 범행에 이용됐고, 그의 말에
따르면 도난당했었다고 했다. 그의 차
속에서는 장미 꽁초가 발견됐었다. 범인이
남겼을 것으로 보이는 그것들을 검사한
결과 그것을 피운 사람의 혈액형은 AB형인
것으로 밝혀졌다. 장미 꽁초는 밀라의 차
속에서도 발겨됐었다. 그것을 피운 사람의
혈액형도 AB형이었다. 그런데 바로
김동우의 혈액형이 AB형이다. AB형이라고
해서 그를 용의자로 볼 수는 없다.
혈액형이 같은 사람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더구나 장미담배를 피운 범인은 여자이다.
하지만 일단 김동우를 조사해 볼 필요는
있는 것이다. 범인은 호텔 로미오와
줄리엣에 출입하는 사람으로 김동우를 알고
범행에 이용한 게 아닐까? 그렇게 본다면
두 곳이 서로 가까이 있는 이유가 어느
정도 설명될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의심은 남는다.
그는 마시다 만 커피를 그대로 둔 채
밖으로 나왔다. 머리 위에서 이글거리는
태양 때문에 바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는 얼굴을 찌푸린 채 김동우의 이용원이
들어 있는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그 건물은 15층짜리 건물로 거의가
사무실로 이용되고 있었고, 김동우의
이용원은 지하 1층에 자리잡고 있었다.
지하에는 상가가 형성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식당, 문구점, 카페 같은 것들이
들어서 있었고, 김동우의 이용원은 한쪽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
알아보고 안색이 굳어졌다. 그는 마침 어떤
손님의 머리를 깎아주고 있었기 때문에
남형사는 그가 일을 마칠 때까지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아가씨 한 명이 일거리가
없는지 그 옆에 앉아 열심히 주간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남형사는 슬그머니
그녀한테 말을 걸어보았다.
"여기사 담배 피워도 되나요?"
"네, 피우세요."
그녀는 그를 힐끗 쳐다보고 나서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초미니 스커트를
입고 있는데다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기
때문에 풍만한 허벅지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남형사는 그녀의 허벅지를
훔쳐보면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요새는 금연구역이 많아서요."
그녀는 주간지에다 시선을 박고 있었다.
"아가씨도 한 대 피울래요?"
그녀는 고개를 쳐들었다.
"전 담배 피우지 않아요."
"사장님은 피우시겠죠?"
"우리 사장님도 담배 안 피워요."
"담배를 끊으셨나보군요."
"담배 끊으신 지 오래 되셨나봐요."
그녀는 귀찮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남형사는 더 이상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대신 아까보다 더 자주 그녀의
허벅지를 훔쳐보았다.
10분쯤 지나 김동우가 일을 마치고
남형사쪽으로 다가왔다. 남형사는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김동우는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보였다. 남형사는 그에게 담배부터 권해
보았다. 동우는 손을 흔들었다.
"담배 못 피웁니다."
"언제부터 담배를 끊으셨나요?"
"오래 됐습니다. 몇년 됩니다."
"도난당했던 김사장 차 속에는 장미담배
꽁초가 여러 개 있었는데 그럼 그건 누가
피운 거죠? 꽁초에 남아 있는 타액을
검사해 보니까 혈액형AB형인 사람이
피웠던데? 김사장 혈액형도 AB형이죠?"
"네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건 제가
피운 게 아닙니다. 맹세코 저는 담배를
입에도 대지 않습니다. 그, 그건 제 차를
훔쳐간 사람이 피운 걸 겁니다. 전 절대
피우지 않았습니다. 맹세코 저는......."
그는 맹세코라는 말을 여러 번
"아, 알았습니다. 그만하면 됐습니다."
남형사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지난 7월19일 오후 6시 전후에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동우는 손으로 날짜를 짚어보더니
이용원에 하루종일 있었다고 대답했다.
그의 이용원은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일한다고 했다.
그의 이용원은 손님이 끊이지 않아 다른
이용원 같으면 저녁 8시에 문닫는 것을
10시까지 연장하고 있다고 했다. 더구나
요즘에는 밤에 이용원을 찾는 손님들이
늘어나고 있어 24시간 영업하는 이용원도
더러 생겨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는 것이 여간 고되지가
비우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손님이
많다보니까 종업원만도 6명이나 두고
있었다. 남형사는 그들을 모두
만나보았는데 하나같이 김동우의
알리바이를 증언해 주고 있었다. 그들의
증언에 의하면 김동우가 하루 중
이용원에서 자리를 비우는 때는 점심
때뿐이라고 했다. 그는 착하지만 지독한
사람이라는 것이 종업원들의 말이었다.
이로써 김동우에 대한 조사는 마무리가
지어진 것 같았다. 그에 대해서는 더 이상
조사할 것이 없었다. 그가 용의자의
혈액형과 같은 혈액형을 가진 것은 우연일
뿐이라고 남형사는 생각했다. 김동우가
이용원으로 막 들어가려는 것을 남형사가
다시 불러세웠다.
저쪽에 있는 로미오와 줄리엣인가 하는
호텔에는 더러 가십니까?"
"아아뇨.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감히
그런 호텔에 가겠습니까. 어쩌다가 커피숍
같은 데 가는 경우는 있지요. 친구가 와서
거기에 있다고 하면서 부르면 할 수 없이
가보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요즘은
한번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그 호텔에도 이용원이 있나요?"
"없습니다."
"그럼 호텔 손님들이 여기를
이용하겠군요?"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여기 오기
전에 이용원이 또 하나 있거든요. 하지만
한번 와본 손님은 저희 이용원이 깨끗하고
분위기도 좋다고 하면서 다시
"호텔측에서도 손님들에게 이곳을
이용하라고 권하겠군요?"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제가 호텔
사람들도 만나보고 해서 부탁을 드려야
하는데 워낙 사귐성이 없어서요. 저쪽
이용원에서는 호텔쪽에 선물도 보내고 해서
부탁을 하는 모양인데 저는 그럴줄을
몰라서 그냥 내버려두고 있습니다."
"저 호텔 사장 부인이 살해된 거 알고
있습니까?"
"네, 오늘 아침신문 보고서야
알았습니다. 정말 안됐습니다."
김동우는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네개의 창문을 모두 열어놓았지만 시원한
바람은 커녕 후텁지근한 열기만
마형사는 무더위에 지친 듯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뚱뚱한 그는
남형사보다도 훨씬 땀을 많이 흘리고
있었다. 그들이 탄 차는 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진 태양으로부터 쏟아지고 있는
햇볕을 정면에서 받고 있었다.
"김동우는 의심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알리바이가 완전합니다.
혈액형이 우연히 용의자와 같은 AB형이라는
것을 빼고는 의심할 게 없습니다."
남형사가 하품을 하면서 말했다.
"문제는 그 장미 꽁초인데...... 거기에
의심이 가지 않아?"
"의심이라니요?"
차가 밀리자 여기저기서 클랙슨 소리가
들려왔다. 참을성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무식한 놈들 같으니! 한국놈들은 운전할
자격도 없어. 클랙슨 울리는 것이 법으로
금지돼 있는 것을 알면서도 눌러댄단
말이야. 이건 정말 견딜 수 없는
소리공해야. 소리 때문에 살인이 일어날
정도야. 뒤에서 눌러대고 있는 저새끼를
때려죽이고 싶어. 헤드라이트를 켜대지
않나 지랄발광들이란 말이야. 차가 없을
때가 좋았지. 빌어먹을!"
접촉사고를 일으킨 차 두 대가 차도 한
가운데에 버티고 있었고, 그 차들의
운전자로 보이는 두 사내들이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그 바람에 차들이 밀리고
있었다.
"미친놈들! 차를 한켠으로 비켜놔야 할
거 아니야! 이건 무법천지가 아니라
마형사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욕설을
퍼부었다.
"장미 꽁초에 의심이 간다는 게 무슨
말씀입니까?"
"범인은 두 사람을 치밀한 계획하에
살해했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네, 그건 맞습니다."
그들은 소음 때문에 큰소리로 이야기해야
했다.
"그렇게 치밀하게 범행을 준비한 범인이
왜 자동차 안에 장미꽁초를 남겼겠어?
그것도 한 곳도 아닌 두 곳에다 말이야?
이상하지 않아?"
"하긴 그렇군요. 그럼 일부러 범인이 그
꽁초들을 남겨두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난 어쩐지 그런 느낌이 들어. 수사에
넣어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그 꽁초들은
가짜일지도 몰라."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범인이 실수로
놔뒀을 수도 있잖습니까?"
"그건 그래. 하지만 차 속에 지문 하나
남기지 않은 범인이 자기가 피우던
담배꽁초를 남겨둘 수 있다고 생각하나?"
차가 가까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클랙슨 소리가 더욱 요란스럽게 울려대고
있었다.
"범인이 우리를 농락했군요?"
남형사의 표정이 굳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 방향을 잘못 잡고 있는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어디가 제
방향인지 알 수 없으니까 가는 데까지
가보는 수밖에 없겠지. 한 가지 얻은 게
소행이라는 것을 알아냈다는 점이야.
범인은 자기꾀에 넘어간 거야. 그 꽁초를
한 군데에만 넣어둘 것이지 왜 양쪽 차에다
넣어두었느냐 말이야."
"그렇다면 범인은 여자가 아닐지도
모르겠군요?"
"루즈 묻은 담배꽁초를 구하는 거야
식은죽 먹기지."
"불고기 사건의 목격자들 증언은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그것도 가짜인가요?"
"남자가 여자로 분장하는 건 어렵지
않아. 하지만 아직은 뭐라고 단정할 수야
없지. 범인이 남자일 가능성도 배제해서는
안 되겠지."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남형사는 마형사를 힐끗 쳐다보고 나서
사람씩이나 살해했다는 것이 상식선에서
어쩐지 쉽게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던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럴 수도 있으려니
생각하고 그 방향으로만 기울어져왔던
것이다.
S자동차회사측은 미리 전화연락을 받았기
때문에 형사들이 도착하자 즉시 그들을
별실로 안내했다. 중년 간부로 보이는 남자
두 명이 형사들을 상대하고 자리에 앉았다.
명함을 보니 한 사람은 총무부장이었고
다른 한 명은 비서실 소속의 차장이었다.
그들은 형사들이 내민 명함을 보고
그들이 강력사건 담당임을 알고는 꽤나
긴장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먼저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들은 형사들이 먼저 입을
열기를 말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직원이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모겐도씨에 대해 조사하고자 한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살인사건에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외국인이기 때문에 저희는 아주
신중을 기하고 있습니다."
살인사건이라는 말에 그들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떤 살인사건입니까?"
"자세한 것은 말씀드릴 수 없고 수년
전에 모겐도씨와 동거하던 여자가 살해된
사건입니다. 하필 그 여자가 살해된 수
시간 후에 모겐도씨는 미국으로
떠났더군요.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시간이 잘 맞아떨어져서 일단 조사해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어 이렇게 찾아온
사람에 대해 아는 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형사들이 아무렇게나 차려입은 초라한
모습들인데 반해 그들은 대기업의
간부사원들답게 깔끔하고 단정해 보였다.
그리고 함부로 입을 열거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삼가는 자제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미국인은 여기서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기술 고문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비서실 소속의 차장이 말했다. 찰스
모겐도는 미국의 대자동차회사인 GW사에서
파견한 기술고문이었다. GW사에서 파견한
미국인 직원은 현재 모두 8명이 있는데
그중에서 모겐도는 가장 직위가 높은
인물이었다. 그는 엔진에 이용되는 최첨단
있었다.
그가 한국에 파견되어온 것은 7년
전이었다. 그는 결혼한 몸이었는데 한국에
오기 전에 부인과 이혼하고 그 이후에는
혼자 살고 있었다. 결혼생활이 좋지
않았는지 그는 이혼하고 나서부터는
독신주의를 고집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대우는 최상급이었다. S자동차회사에서는
GW사와 기술합작으로 소형 승용차를 하나
만들었는데 그것이 크게 히트를 치는
바람에 현재 최고급 승용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모겐도는 자신의 기술을 제공하는
대가로 월 1천만 원이 넘는 거액을 받고
있고 운전사가 딸린 승용차와 주택까지
제공받고 있었다. 그밖에도 그 밑으로
들어가는 비용이 상당한 액수라고 비서실
혈액형은 O형이었다. 미국 주소는 뉴욕의
맨해턴으로 되어 있었다.
"그의 여자관계에 대해서 아십니까?"
"저희는 사생활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모릅니다."
총무부장이 칼로 자르듯이 말했다.
"미국인들은 사생활이 알려지는 걸 아주
싫어하니까요."
"그 사람이 지난 7월19일에 미국으로
떠난 것은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잠시 다니러 간 겁니까 아니면 아주 간
겁니까?"
"잠시 다니러 간 겁니다. 본사에서 급한
연락이 와서 간 겁니다. 두 달에 한번꼴은
미국에 다녀옵니다."
"이달 말쯤 돌아오기로 되어 있습니다.
몸이 좋지 않아 예정보다 좀 늦겠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 인품은 어떻습니까? 한국
사람끼리니까 숨김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그 사람은 그야말로 신사입니다."
차장의 말에 총무부장은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은 지성적이고 국제신사라고 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아주
성실하죠."
"우리가 조사한 바로는 그렇지가
않던데요."
남형사가 빈정거리듯 말했다.
"글쎄요. 회사에서 저희가 겪는 바로는
아주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사생활이
어떤지는 몰라도......."
"어떻든 우리는 그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그 사람을 만나러 미국까지 갈
수도 없는 일이고...... 그 사람을
어떻게든지 빨리 한국에 돌아오게 해야
합니다. 경찰이 자기를 찾고 있는 걸 알면
오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그건 절대 비밀로
해야합니다. 알겠습니까?"
"물론이죠. 수사에 협조해 드리지는
못할망정 방해를 할 수야 있습니까."
"7월19일에 갑자기 떠난 겁니까, 아니면
그날 떠나도록 예정이 되어 있었습니까?"
"갑자기 떠난 건 아니고 예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빨리좀
돌아오게 할 수 없겠습니까? 우리는 한시가
급합니다."
"전화를 걸되 조금도 눈치를 채게 해서는
안 됩니다. 회사에 무슨 일이 생겨서
빨리좀 와줘야겠다는 식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말해야 합니다."
"그야 그렇죠. 언제까지 돌아오라고
할까요?"
"날짜는 못을 박지 말고 되도록 빨리좀
와달라고 하십시오."
"알겠습니다. 뉴욕은 지금 한밤중이니까
아침 시간에 전화를 걸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좀 걸어주십시오."
남형사가 당장 결과를 알고 싶다는 듯
재촉했다.
"그럴 필요 없어."
마형사가 그를 제지했다.
"지금 전화를 걸어 깨운다는 건
시입니까?"
"새벽 2시쯤 됐을 겁니다."
차장이 대답했다.
"아침 시간에 맞춰 전화를
걸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곳 시간으로 7시쯤에
전화를 걸어보겠습니다."
그 시간까지는 앞으로 다섯 시간 정도
남았다. 다섯 시간 후면 한국은 밤
9시경이다. 비서실 차장은 요즘은 할 일이
많아 밤 10시까지 야근을 한다고 했다.
형사들은 9시 지나서 그에게 전화를 걸기로
하고 그곳을 나왔다.
남형사는 9시15분쯤에 S자동차회사인
비서실 차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차장은
모겐도와 직접 통화했다고 하면서 다음과
"그렇지 않아도 25일에 한국에 올 거라고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볼 일이 있어서
일정을 앞당겼답니다. 비행기 좌석을 이미
예약해 뒀답니다. 25일밤 10시경에 김포
공항에 도착할 겁니다. 노스웨스트 편으로
온답니다."
모겐도는 동거녀인 박명희에게 한
약속대로 25일에 돌아올 모양이었다.
형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날 아침 유릴라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던 병원 영안실에서는 그녀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장례식이 늦어진 것은 경찰이
수사를 위해 그때까지 시신을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례식은 아주
간소하게 치러졌다. 너무 간소해서 거기에
사람들이라고는 형사들을 제외하면 배창기,
배미화, 배동재 등 가족과 목사가 한 명
있을 뿐이었다. 슬퍼해야 하기는커녕
수치스러운 죽음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가족들만으로 몰래 치른다는
인상이 짙었다. 참석자들 가운데 특이한
손님은 밀라가 낳은 어린 아들이었다.
아버지를 닮은 탓인지 아주 병약해
보이는 조그만 아이는 유난히도 부끄러움을
많이 탔다.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엄마의
시신앞에 다가온 아이는 아버지가 쥐어준
국화 한 송이를 엄마의 관 위에 올려놓고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아기를 끌어안은
창기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는 흐느끼지는 않았지만 몹시 비통에
잠긴 모습이었고, 창백한 얼굴에 끊임없이
유밀라는 어느 공원묘지의 양지바른 곳에
묻혔다. 형사들은 그곳까지 따라갔다.
목사가 황토로 만들어진 봉분 앞에서
하도 오랫동안 기도를 하는 바람에 그렇지
않아도 땀을 많이 흘리는 마형사는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목사를 노려보곤 했다.
뙤약볕 아래에서 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지만 목사는
상관하지 않고 기도를 계속하고 있었다.
배미화도 마형사 못지 않게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기도 도중에 눈을 뜬
그들은 자주 시선을 마주치곤 했다.
그때마다 배미화는 얼른 도로 눈을
감곤했다.
유밀라는 생전에 교회에 적을 두고
있었는데 예배에 참석하는 경우는 거의
때문에 할 수 없이 거기에 적을 두긴했지만
교회는 애초부터 그녀의 생리에 맞지가
않았다. 기도가 끝나고 모든 사람들이
홀가분한 마음으로 밀라의 산소 앞을
떠나기 시작했을 때 붙임성 있는 남형사가
미화 곁으로 따라붙었다.
"밀라씨는 독실한 신자였던 모양이죠?"
그녀는 입을 삐죽거렸다.
"독실하긴요. 교회 가는 거 한번도
못봤어요."
"미화씨는 어떻습니까? 독실한
신자신가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저 목사 꼴보기
싫어서 혼났어요."
그녀는 앞서 걸어가고 있는 목사를
흘겨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멈춰서서
남형사를 쏘아보았다.
"형사분들은 지독하군요. 이런 데까지
따라오구요."
"담당사건의 피해자 장례식에 참석하는
거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예의는
갖춰야죠."
그들의 뒤쪽에는 마형사와 배창기가
이야기를 나누며 비탈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배창기는 아내의 죽음 때문인지
더욱 왜소해 보였다.
"동재는 몹시 약해 보이더군요?"
아이는 차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창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 엄마를 닮았으면 튼튼할 텐데......
저를 닮아서요."
"동재가 글도 읽을 줄 압니까?"
"아직 말도 잘 못하는데요."
ꠑ ꠑO "천사들의 집이라는 잡지는 누가
사다줍니까? 정기적으로 사다줍니까?"
창기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안경을
벗어 얼굴에 번진 땀을 닦고 나서 도로
안경을 끼었다.
"제 엄마가 사다주곤 했습니다. 그림을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해주면 아이가 무척
좋아하곤 했지요."
그의 목소리가 잠기고 있었다.
<상권 끝. 하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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