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2권 15~16

나단비 | 2024.03.02 06:52:47 댓글: 0 조회: 81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1096
15

여름 방학을 맞으며





고요한 세상을 노랗게 물들이며 하루가 저물어갈 무렵 앤은 교실 문을 잠그고 밖으로 나왔다. 바람은 운동장을 빙 둘러선 가문비나무 위에서 소곤거리고 그림자는 숲 끝으로 길고 게으르게 누워 있었다. 한 해를 무사히 마무리했고 다음 해를 위한 재계약도 마쳤다. 뿌듯한 마음으로 앤은 주머니 안으로 열쇠를 집어넣었다. 하몬 앤드루스 씨만이 매질을 더 자주 해야 한다고 했을 뿐, 대부분이 앤에게 만족스럽다는 평가를 내려주었다. 이제 열심히 일한 대가인 두 달간의 즐거운 방학이 앤을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앤은 꽃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들고 언덕을 내려가며 세상도 자신도 평화롭다고 느꼈다. 이른 산사나무 꽃이 피어난 후로는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매슈의 무덤을 찾고 있었다. 마릴라를 제외한 에이번리의 모든 사람이 부끄럼 많고 조용하기만 했던 매슈 커스버트를 잊어버렸지만 아직도 앤의 가슴에 매슈는 생생히 살아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어린 시절 그렇게도 목말라했던 사랑을 처음으로 주었고 언제나 다정하게 무슨 일이든 이해해주던 매슈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언덕 발치 가문비나무 숲 그늘 담장에 한 소년이올라앉아있는 게 보였다. 꿈을 꾸고 있는 듯 커다란 눈을 가진 아이는 감수성이 예민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얼른 앤을 향해 뛰어오는 소년의 얼굴에눈물 자국이 얼룩져 있었다.
“여기 있으면 선생님이 오실 줄 알았어요. 선생님이 묘지에 가실 줄 알았으니까요. 저도 묘지에 갈 거예요. 할머니 대신 할아버지 무덤에 이 제라늄을 놓아드리려고요. 그리고 이 하얀 장미는 우리 엄마를 생각하면서 할아버지 무덤 옆에 놓아주겠어요. 엄마 무덤에 가서 이 꽃을 드릴 수가 없잖아요. 하지만 엄마는 모든 걸 알겠죠? 그러니까 엄마 무덤에 꽃을 놓아드린 것과 마찬가지일 거예요.”
폴이 앤의 손에 자기 손을 살짝 끼워 넣으며 말했다.
“그래, 엄마가 다 보고 계실 거야, 폴.”
“있잖아요, 선생님, 우리 엄마가 돌아가신 지 오늘로 삼 년이 됐어요.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전 아직도 마음이 아파요. 그때나 똑같이 엄마가 보고 싶어요. 너무 마음이 아파서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은 때도 있어요.”
폴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고 입술도 떨렸다. 폴은 선생님이 자기 눈물을 보지 못하도록 장미로 눈길을 떨어뜨렸다.
“그래도 슬픔이 사라지는 건 싫지. 네가 엄마를 잊을 수 있다 하더라도 엄마를 잊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앤이 부드럽게 말했다.
“네, 그래요. 전 엄마를 잊지 않을 거예요. 선생님은 제 마음을 아주 잘 아시는군요. 선생님은 이해심이 아주 많으셔요. 다른 사람은 아무도 제 마음을 그렇게 잘 이해해주지 못해요. 우리 할머니도요. 아빠는 잘 이해해주시지만 엄마 이야기는 할 수 없어요. 그럼 아빠 기분이 몹시 우울해지거든요. 아빠가 손을 얼굴로 가져가면 전 더 이상 엄마 얘기를 해서는 안 돼요. 가여운 우리 아빠는 제가 없어서 무척 외로울 거예요. 하지만 지금 아빠 곁에는 가정부 아주머니밖에 없어서 저를 키울 수가 없어요. 가정부가 아이를 기를 수는 없잖아요. 더군다나 아빠는 일 때문에 집에서 멀리 떠나 있어야 하는 날이 많으니까요. 그래서 엄마 다음으로 할머니가 가장 낫다고 했어요. 하지만 언젠가 제가 다 자라면 아빠한테 돌아가서 다시는 아빠와 헤어지지 않을 거예요.”
폴이 자기 엄마와 아빠 이야기를 하도 많이 해서 앤은 폴의 부모와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같이 느껴졌다. 폴의 어머니는 마음씨며 성격이 지금의 폴과 똑같았을 것 같았다. 아버지 스티븐 어빙은 좀 내성적인 성격에 속이 깊고 부드러운 사람이지만 그런 천성을 겉으로는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아빠와는 친해지기가 쉽지 않아요.”
폴이 전에도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저도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아빠와 친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아빠는 알고 보면 정말로 좋은 사람이에요. 전 이 세상에서 아빠를 가장 사랑해요. 그다음으로는 할머니를 사랑하고 그다음으로는 선생님이에요. 사실은, 아빠 다음으로 선생님이 좋아요. 할머니를 아빠 다음으로 가장 사랑해야 하는 게 제 의무가 아니라면. 할머니는 저를 위해 많은 일을 해주시잖아요. 하지만 제가 잠이 들 때까지 할머니가 제 방에 등을 켜두어주셨으면 좋겠어요. 할머니는 겁쟁이가 돼서는 안 된다고 하시면서 제가 침대에 눕자마자 등불을 가져가 버리거든요. 전 겁이 나서 그러는 건 아니지만 등불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엄마는 항상 제 침대 곁에 앉아서 제가 잠들 때까지 제 손을 잡아주셨어요. 엄마가 절 응석받이로 만들었죠. 엄마란 원래 그런 존재잖아요.”
하지만 앤은 그런 사랑을 알지 못했다. 상상을 해보았을 뿐이다. 앤은 슬픈 마음으로 자기 엄마를 생각해보았다. 자기를 세상에서 가장 예쁜 아기라고 했지만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 남편 곁에 묻힌 엄마를. 그 무덤은 너무 멀리 있어 가보지도 못한다. 앤은 엄마를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있어 그 점에서는 폴이 부러웠다.
“다음 주면 제 생일이에요.”
두 사람은 6월의 햇살 아래 길게 이어져 있는 붉은 언덕길을 걸어 올라갔다.
“아빠는 편지에 제가 좋아할 만한 선물을 보내주시겠다고 했어요. 제 생각에는 벌써 집에 도착해 있는 것 같아요. 할머니가 전에는 안 그랬는데 책장에 자물쇠를 채웠거든요. 그 이유를 물었더니 할머니는 알쏭달쏭한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면서 작은 애가 그렇게 궁금한 게 많아서는 안 된다고 하셨어요. 생일을 맞는 건 정말 신나는 일이에요, 그렇죠? 전 열한 살이 돼요. 그런데 전 나이가 그렇게 돼 보이지 않죠? 할머니가 그러시는데 제가 죽을 충분히 먹지 않아서 나이보다 너무 작아 보이는 거래요. 저는 열심히 먹고 있지만 할머니는 죽을 너무 많이 담아주셔요. 할머니가 나쁜 건 절대 아니에요. 지난번에 선생님과 제가 주일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기도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죠? 그때 선생님은 우리가 겪는 어려움을 해결하려면 기도를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전 매일 밤 하느님께 아침마다 제 죽을 다 먹을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기도를 드려요. 하지만 여전히 죽을 다 먹을 수가 없어요. 저한테 하느님의 은총이 부족해서 그런지, 죽이 너무 많아서 그런지는 알 수가 없지만요. 할머니는 우리 아빠도 죽을 먹고 컸대요. 아빠한테는 죽이 효과가 있었던 게 분명해요. 아빠 어깨를 보면 알 수 있어요. 하지만 가끔은 죽이 너무 먹기 싫어서 제가 죽 때문에 죽어버리지나 않을까 싶을 때도 있어요.”
폴이 한숨과 함께 자못 심각한 어조로 말을 끝맺었다.

앤은 폴이 자기를 쳐다보고 있지 않아서 웃음을 지었다. 어빙 할머니가 음식이며 예절이며 할 것 없이 모두 옛날 방식으로 손자를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에이번리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일이었다.
“세상에나, 그런 일은 없어야지. 너의 바위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니? 선원인 쌍둥이 형은 그 뒤로 심술궂게 굴지 않니?”
“아니요, 그랬다간 저하고 놀 수 없다는 걸 잘 알거든요. 굉장히 험악한 사람이긴 하지만요.”
폴이 힘주어 대답했다.
“노라는 아직도 황금 부인을 모르고 있니?”
“네, 하지만 뭔가 좀 의심하고 있긴 해요. 지난번 동굴에 갔을 때저를 감시하고 있었던 게 분명해요. 뭐 노라가 알아낸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노라 기분이 상할까 봐 그런 거니까. 하지만 노라가 자기감정을작정하고 상하게 하겠다면어쩔 수 없는 일이죠.”
“언제 저녁때 너와 함께 바닷가에 나가보면 나도 너의 그 바위 사람을 볼 수 있을까?”
폴은 진지하게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선생님은 제 바위 사람을 볼 수 없어요. 그 사람들은 저만 볼 수 있거든요. 하지만 선생님은 선생님의 바위 사람을 볼 수 있어요. 선생님은 그럴 수 있는 분이거든요.우리는 둘 다그럴 수있을 거예요.그렇죠, 선생님?”
폴은 그렇게 말하면서 친근감 있게 앤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런 사람들을 볼 수 있는 사람이란 게 멋지지 않나요, 선생님?”
“멋지고말고.”
앤이 맞장구를 치며 반짝반짝 빛나는 잿빛 눈으로 역시 반짝거리는 푸른 눈을 마주 보았다. 앤과 폴은 상상력이 열어주는 세상이 얼마나 멋진지 알고 있었다. 둘은 상상력이 행복의 땅으로 이끌어준다는 것도 알았다. 상상의 세계에서는 지지 않는 환희의 장미가 골짜기마다 피어 있고, 햇빛으로 빛나는 하늘이 구름으로 덮이는 일이 없으며, 달콤한 종소리는 언제나 아름다운 곡조를 잃지 않고, 영혼이 통하는 친구도 어디에나 있다. 동쪽으로는 태양에 가 닿고 서쪽으로는 달에 가 닿는 세상을 아는 일은값을 매길수 없는귀중한 것이며, 시장에서 누구나돈을 주고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태어날 때 마음씨 좋은요정에게 받은 선물이며, 세월이 흐른다고 그 빛을 잃거나 없어지지도 않는다. 그 세계를 알고 있는 사람은 비록 다락방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이런 세상을 모른 채 궁전에 살고 있는 사람보다 낫다.
에이번리의 묘지는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이 항상 풀만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이 처량한 묘지에 개선회원들이 이미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지난번 모임 때는 프리실라 그랜트가 묘지에 관한 보고서도 냈다. 회원들은 앞으로 이끼가 끼어 있고 비뚤어진 낡은 판지 울타리를 깔끔한철제 울타리로 바꾸고 잔디도 깎고 기울어진 비석들도 바로 세우기로 했다.
앤은 매슈의 묘지에 꽃을 놓고 헤스터 그레이가 잠들어 있는 미루나무 그늘이 진 구석에도 가보았다. 봄 소풍 이후로 앤은 매슈의 무덤에 갈 때마다 헤스터의 무덤가에도 꽃을 놓아주었다. 앤은 어젯밤 숲 속의 그 버려진 작은 정원에 가서 헤스터가 손수 가꾸었던 흰 장미를 꺾어왔다.
“다른 꽃보다 이 꽃이 더 반가울 거라고 생각했어요.”

앤이 조용히 속삭였다.
앤은 풀밭 위로 사람 그림자가 비칠 때까지 거기 앉아 있었다. 그림자는 앨런 부인이었다. 둘은 같이 이야기를 나누며 집으로 돌아왔다.
앨런 부인의 얼굴은 5년 전에 앨런 목사님이 에이번리로 처음 데리고 올 때의 그 풋풋하던 새신부 얼굴이 아니었다. 젊고 싱싱하던 얼굴은 어느덧 사라지고 눈과 입가에는 인내의 흔적인 미세한 주름살이 새겨졌다.
이 묘지의 한 작은 무덤이 그 이유의 일부를 설명해주고 있고 지금은 완쾌되었지만 부인의 어린 아들이 최근 몹시 아파서 생긴 주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앨런 부인의 보조개는 여전히 변함없이 예쁘고 귀여우며, 빛나는 눈도 맑고 진실해 보였다. 처녀다운 풋풋함이 사라진 대신 한층 더 부드러운 얼굴이 되었지만 부인의 얼굴에서는 강인함도 엿보였다.
“방학이 돼서 무척 기쁘지, 앤?”
묘지를 나오며 부인이 물었다.
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방학이라는 말을 맛있는 음식처럼 입 안에 넣고 음미하고 있는걸요.이번여름은 정말 멋질 거라고 생각해요.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모건 부인이 7월에 이 섬으로 오시기 때문이죠. 프리실라가 부인을 모셔올 거예요. 그 생각만 해도 가슴이 막 두근거려요.”
“방학 즐겁게 보내, 앤. 지난 한 해 동안 열심히 일했고 잘해냈잖아.”
“오, 아니에요. 여러 면에서 많이 부족했는걸요. 제가작년 가을 처음가르치기 시작하면서 하려고 했던 일들을 많이 해내지 못했어요. 제 이상에 충실하게 살지못했어요.”
“누구도 그런 사람은 없어.”
앨런 부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앤, 시인 로웰이 말했지. ‘실패가 잘못이 아니라 목표를 낮게 세우는 것이 잘못이다.’라고. 우리는 이상을 갖고 그것에 충실할 수 있도록 애써야 해. 우리가 온전히 성공을 거두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말이야. 이상이 없는 삶은 살 만한 것이 아니지. 이상이 있어야 삶이 위대할 수 있다고. 이상을 꼭 붙들고 있어야 해, 앤.”
“네, 그러겠어요. 하지만 전 제 교육 이론을 대부분 포기해야 했어요. 선생으로 막 출발했을 때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훌륭한 이론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이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조금씩 무너져 버렸거든요.”
앤이 나직이 웃으며 말했다.
“심지어는 체벌에 관한 것까지도.”
앨런 부인이 앤을 놀렸다.
하지만 그 말에 앤의 얼굴이 붉어졌다.
“전 앤서니에게 매질을 한저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 앤. 그 아이가 맞을 짓을 했기 때문이니까. 그 후로 그 아이와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고 오히려 앤이 훌륭한 선생님이라고 여기게 됐잖아. 그 고집불통인 마음에서 ‘여자는 별로야.’라는 생각을 없애고 그 아이의 사랑을 얻었으니 결국은 앤의 친절이 승리를 거둔 거지.”
“앤서니가 맞을 짓을 한 것은 사실인지도 모르지만 요점은 그게 아니에요. 제가 만일 앤서니를 때리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냉철하게 판단해서 그 아이를 때린 거라면 그렇게 기분이 언짢지는 않았을 거예요. 사실은 사모님, 제가 너무 화가 치밀어 그 애를 때린 거거든요. 그 일이 옳은 일인지 부당한 일인지는 생각지도 않았어요. 그때는 그게 앤서니에게 부당한 일이었더라도 그 애를 때렸을 거예요. 그 점이 부끄러워요.”
“우리는 모두 실수를 저지르면서 살아. 그러니 앤, 모두 잊어버리라고.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후회하고 그러면서 배워가는 거잖아. 그 잘못을 미래까지 끌고 가는 건 옳지 않아. 저기 길버트 블라이드가 자전거를 타고 가네. 방학이 돼서 집에 오는 길인가 봐. 두 사람 공부는 어떻게 돼가지?”
“꽤 잘돼가고 있어요. 오늘 밤에는 베르길리우스의 시를 끝내려고 해요. 20행만 해치우면 되니까요. 그러면 9월까지는 절대로 책을 펼치지 않을 거예요.”
“대학에는 갈 수 있을 것 같아?”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앤은 저 멀리 오팔 보석처럼 빛나는 지평선을 꿈꾸듯 바라보았다.
“마릴라 아주머니의 눈은 지금보다 더 좋아지진 않을 거라고 해요. 우리는 더 이상 나빠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있죠. 게다가 쌍둥이도 있고, 아무래도 아이들 외삼촌이 아이들을 데려가 줄 것 같지가 않아요. 대학이 저 길모퉁이만 돌면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직 거기까지 이르지 못했고 실망하지 않으려면 기대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나도 앤이 꼭 대학에 갈 수 있었으면 해. 하지만 가지 못하게 되더라도 너무 실망은 하지 마. 결국 우리 인생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 가는 거니까. 대학은 삶을 더 쉽게 살도록 도와주는 방편일 뿐이야. 인생이 폭넓고 풍요로운 것이 되느냐 좁고결핍된 것이 되느냐 하는 건우리가 삶을 어떻게 만드느냐에 달린 일이지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느냐에 달린 일이 아니야. 이 세상에서의 우리 삶은 풍요롭고 충만해. 어디서나 그렇지. 우리가 그 풍요로움과 충만함에온가슴을활짝열 수만 있다면 말이야.”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전 감사해야 할 일이 아주 많은 것도 알아요. 아주 많죠……. 제가 하는 일, 폴 어빙, 그리고 사랑스러운 쌍둥이, 제 모든 친구들. 그리고 사모님, 전 우정에 아주 감사하는 마음이에요. 우정이 인생을 정말 아름답게 하거든요.”
앤이 사려 깊게 말했다.
“진정한 우정은 정말 좋은 것이지. 우리는 높은 이상을 간직한 우정을 가져야 해. 진실함과 성실함을 잃은 우정은 안 되지.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만 실제로는 진정한 우정이 아니고 단순히 친할 뿐인 경우를 종종 보게 돼 안타까워.”
“네, 그래요. 거티 파이와 줄리아 벨처럼요. 그 애들은 매우 친한 사이 같고 어디를 가도 함께 붙어 다니지만 거티는 항상 줄리아 흉을 보고 다니거든요. 거티는 다른 사람이 줄리아를 비난하면 아주 좋아하니까 모두들 거티가 줄리아를 질투한다고 생각해요. 그걸 우정이라 부른다는 것은 우정에 대한 모독이죠. 친구라면 그 친구가 가진 장점을 보아야 하고, 내 장점을 친구와 나눌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면 우정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될 거예요.”

“우정은 아름다운 것이지. 하지만 언젠가는…….”
말을 삼키며 앨런 부인이 미소를 지었다.
섬세하고 하얗던 얼굴이 햇볕에 그을려 더욱 순수해 보이고 표정이 풍부하면서 눈빛이 초롱초롱 빛나는 앤은 아가씨라기보다는 아직도 소녀 같았다.
앤의 마음에는 아직 우정과 장래에 대한 포부로만 가득했다. 앨런 부인은 잠들어 있는 싹을 일깨워 그 무언가에 눈뜨게 하려던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부인은 나머지 말은 좀 더 세월이 흐른 다음에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16

기대



초록 지붕 집 부엌에 놓인 반질거리는 가죽 소파에서 편지를 쓰고 있는 앤에게 데이비가 하소연했다.
“누나, 누나, 배가 너무 고파. 내가 얼마나 배가 고픈지 누나는 모를 거야.”
“조금 있다가 버터 바른 빵을 좀 줄게.”
앤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편지에 뭔가 흥분되는 소식이 담겨 있는 모양인지 앤의 볼은 뜰에 핀 장미처럼 발그스름하고 눈빛도 그 어느 때보다도 빛났다.
“난 버터 바른 빵을 먹고 싶은 배가 고픈 게 아니라 자두 케이크가 먹고 싶은 배가 고프단 말이야.”
데이비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어머, 그래? 그래서 배가 고픈 거라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겠네. 식사 시간이 아닐 때는 버터 바른 빵이 아닌 다른 음식은 안 된다고 아주머니가 말씀하셨잖아.”
앤이 편지를 내려놓고 웃음을 터트리며 데이비를 꼭끌어안았다.



“그래도 한 조각만 좀 줘, 주세요.”
데이비도부탁할때는 ‘주세요.’ 하고높임말을써야 한다는 것을 배웠지만 언제나 잊어버리고 나중에 뒤에 붙이곤 했다. 앤이 큼직하게 잘라온 케이크 조각을 보면서 데이비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누나는 언제나 버터를 듬뿍 발라주어서 좋아. 마릴라 아주머니는 얇게 발라주는데. 버터가 많아야 목구멍으로 쏙 잘 넘어가거든.”
케이크 조각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을 보면 버터가 정말 잘 넘어가게 해준 모양이다. 데이비는 소파에서 물구나무를 서더니양탄자 위로두 번공중제비를넘은 다음 벌떡 일어서서 이렇게 선언했다.
“누나, 난 천국에 가려고 마음먹었는데, 거기 가지 않을 테야.”
“왜 안 가?”
앤이 심각하게 물었다.
“천국이 사이먼 플레처의 다락방에 있는데 난 사이먼 플레처를 좋아하지 않거든.”
“천국이 사이먼 플레처의 다락방에 있다고! 데이비 키스, 도대체 어쩌다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니?”
앤은 너무 어이가 없어 웃음이 다 나왔다.
“밀티 볼터가 그랬어. 천국이 거기 있다고. 지난주 일요일 주일 학교에서 엘리야와 엘리샤를 배울 때 그렇게 말했어. 내가 일어서서 로저슨 선생님에게 천국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선생님은 몹시 화난 표정을 지었어. 그전부터도 기분이 나빠 있긴 했지. 엘리야가 천국에 갈때 엘리샤에게 무엇을 주고 갔느냐는 질문에 밀리 볼터가 ‘헌 옷’이라고 대답했거든. 우리가 미리 생각해보지도 않고 모두 웃어버려서 그때부터 화가 났었지. 누나도 무슨 일을 하기 전에 먼저 생각을 해야 해. 생각을 하고 나면 사고를 치지 않아도 되니까. 하지만 밀티가 선생님을 화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 그냥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을 뿐이었지. 로저슨 선생님은 하느님이 계시는 곳이 천국이라고 말해주고는 그런 질문은 하는 게 아니라고 했어. 그러자 밀티가 나를 쿡쿡 찌르면서 ‘천국은 우리 사이먼 삼촌네 다락방에 있어. 내가 집에 가는 길에 설명해줄게.’ 하고 속삭였어. 그런 다음 밀티가 집에 오는 길에 모두 다 설명해주었지. 밀티는 설명을 아주 잘하거든. 자기가 잘 몰라도 지어내서 얘기해주니까 설명은 잘하는 거라고. 밀티 엄마가 사이먼 아줌마의 동생인데, 사촌인 제인엘런이 죽었대. 사이먼 아주머니의 딸 말이야. 밀티가 엄마를 따라 장례식에갔대. 목사님은 죽은 사촌이 천국으로 갔다고 말했는데 밀티가 보니까 제인이 바로 옆에 있는 관에 누워 있었다는 거야. 그 후에 사람들이 관을 다락방으로 옮겼대. 장례식이 끝난 다음 밀티와 엄마가 모자를 가지러 2층으로 갔을 때 제인이 간 천국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천장을 가리키면서 ‘저 위’야, 그랬대. 그런데 천장 위에는 다락방밖에 없었거든. 그래서 밀티는 천국이 다락방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 그다음부터는 사이먼 삼촌 집에가기가 정말 겁났다고 해.”
앤은 데이비를 무릎에 안아 올리고 이 종교적인 실타래를 풀어헤치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 일에 앤은 마릴라보다 훨씬 더 적임자였다. 앤은 자기 어린 시절을 잘 기억하고 있고 어른에게는 단순하고 아무 일도 아닌 것이 7살 된 아이에게는 호기심을 자아내는 일이 되기도 하고, 가끔씩 엉뚱하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이해했다.
뜰에서 도라와 함께 콩을 따고 난 마릴라가 집 안으로 들어섰을 때쯤에는 앤이 데이비에게 천국이 사이먼 플레처네 다락방에 있지 않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시킬 수 있었다. 도라는 어리지만 아주 부지런한 아이로 그조막만 한손으로 자기가 도울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나 돕겠다고 나섰다. 닭 모이를 주는 일이며 불쏘시개로 쓸 나뭇가지를 주워오는 일을 즐겁게 했고, 접시를 닦거나 심부름도 곧잘 했다. 무슨 일이든 시키는 대로 아주 야무지게 해냈을 뿐 아니라 눈썰미도 있었다. 한 번 배운 일이면 잊는 법이 없었고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시킨 일을 잊은 적도 없었다. 하지만 데이비는 언제나 주의 깊게 말을 듣지 않고 매사에 까먹기 일쑤였다. 그렇긴 해도 사랑스러운 면이 있어 앤과 마릴라는 데이비에게 더 끌렸다.
도라가 어른스럽게 완두콩을 까고, 데이비는 콩깍지에 성냥 돛대를 세우고 종이 돛을 달아 배를 만드는 동안 앤은 방금 받은 굉장한 소식이 담긴 편지 내용을 마릴라에게 들려주었다.
“아, 마릴라 아주머니, 이게 무슨 편지인지 아세요? 프리실라한테 온 거예요. 모건 부인이 지금 섬에 와 계시대요. 날씨가 좋다면 목요일에 에이번리에 오실 생각인데 12시경에 도착한대요. 오후에는 우리와 함께 지내고 저녁에는 모건 부인의 미국 친구를 만나러 화이트 샌즈에 있는 호텔로 가시겠대요. 아, 마릴라 아주머니, 굉장한 소식 아니에요? 꼭 꿈만 같아요.”
“모건 부인도 다른 사람이랑 비슷할 텐데 뭐.”
마릴라도 속으로야 기대에 부푼 마음이 되었지만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모건 부인은 유명인이었고 그런 사람의 방문을 받는 일이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그럼 우리 집에서 점심을 들게되는거니?”
“네, 그래요. 아, 마릴라 아주머니, 제가 점심 준비를 다 해도 될까요? 《장미 정원》의 작가를 위해 제가 뭔가를 했다는 기분을 느껴보고 싶어서 그래요. 비록 점심 한 끼라고 해도요. 그렇게 해주실 거죠, 네?”
“세상에나, 나는 7월 한더위에 불 앞에 앉아 있고 싶은 마음은 없구나. 그러고 싶어 성화인 사람이 있다니 원. 얼마든지 하려무나.”
“아, 좋아요. 오늘 밤에 바로 메뉴를 짜야겠어요.”
마릴라가 엄청난 청이라도 들어준 듯 앤이 말했다.
“너무 요란하게는 하지 않는 게 좋겠다. 그랬다가 실수라도 하면 어쩌니.”
‘메뉴’라는 말에 깜짝놀란마릴라가 주의를 주었다.
“아, 아니에요. 요란스럽게 하지는 않을 거예요. 특별한 날에 차리는 정도로만 하라는 거죠? 더 차렸다간 겉모양만 화려하게 될 뿐인걸요. 제가 그렇게까지 어리석지는 않다고요. 제가 아직 17살이고, 학교 선생님에게 걸맞은 분별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건 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지만요. 어쨌거나 모든 것을 되도록 멋있고 고상하게 준비하고 싶어요. 데이비, 얘야, 콩깍지를 층계에 버리면 안 돼. 누가 미끄러져 넘어지면 위험하잖아. 처음엔 가벼운 수프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죠? 제가 양파크림수프는 잘 만들잖아요. 그리고 구운 닭고기를 좀 만들고요, 하얀 수탉이 두 마리 있으니까. 그 닭들이 사랑스럽기는 하지만요. 회색 암탉이 저 두 마리를 부화할 때부터 내내 제 애완동물이었는데. 꼭 노란솜털 공이 굴러다니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저 닭들은 언젠가는 제물이 될 운명을 타고난걸요. 오늘 같은 날을 위해서라면 제물이 되는 보람도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마릴라 아주머니, 제 손으로 저 닭들을 죽일 수는 없어요. 아무리 모건 부인을 위해서라고 해도요. 존 헨리 카터에게 잡아달라고 해야겠어요.”

“내가 할 수 있어. 아주머니가 다리만 꼭 붙들어준다면 내가 할게. 도끼를 휘두르려면 두 손이 다 필요하니까. 머리가 달아나 버렸는데도 뛰어다니는 꼴을 보면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아.”
데이비가 나섰다.
“그리고 야채로는 완두콩, 강낭콩, 감자 크림수프, 상추 샐러드를 내놓고 디저트로는 휘핑크림12)을 얹은 레몬 파이에 커피, 그리고 치즈와레이디핑거13)쿠키가 좋겠어요.”
앤이 말을 계속했다.
“내일은 파이와레이디핑거를 만들고 하얀 모슬린 옷을 손질하겠어요. 다이애나한테도 오늘 밤 이야기를 해야 해요. 다이애나도 옷을 준비해야 하니까요. 모건 부인의 여주인공은 언제나 거의 하얀 모슬린 옷을 입고 있거든요. 그래서 모건 부인을 만날 기회가 오면 우리도 꼭 그렇게 하자고 전부터 다이애나와 약속해두었었죠. 그렇게 하면 진심 어린 환영의 표시가 되지 않을까요? 데이비, 어머나, 콩깍지를 마루 틈새로 밀어 넣으면 안 되지. 앨런 목사님 내외분과 스테이시 선생님도 초대할 거예요. 모두들 모건 부인을 무척 만나보고 싶어 하시거든요. 마침 모건 부인이 오실 때 스테이시 선생님이 오시기로 해서 정말 잘됐어요. 데이비, 콩깍지를 양동이 물에 띄우고 놀면 어떻게 하니. 밖에 있는 구유 물통에 띄우고 놀아. 아, 목요일에는 날씨가 좋아야 할 텐데. 하지만 틀림없이 활짝 갠 날씨일 거예요. 에이브 아저씨가 해리슨 아저씨 댁에 와서 이번 주에는 비가 온다고 했다니까요.”
“그럼 날씨가 좋겠구나.”
마릴라도 맞장구를 쳤다.

앤은 그날 저녁 무렵에 비탈길 과수원으로 달려가 다이애나에게 그 소식을 전해주었다. 다이애나 역시도 그 소식에 몹시 마음이 들떴다. 둘은 배리 씨네 정원에 있는 커다란 버드나무에 매달려 있는그물침대에 앉아 이 일을 의논했다.
“오, 앤, 나도 점심 준비를 도우면 안 될까? 너도 알잖아, 난 상추샐러드를 아주 잘 만들 수 있다고.”
다이애나가 사정했다.
“그럼, 그래도 되고말고.”
앤이 기분 좋게 대답했다.
“그리고 장식도 좀 도와줘야 해. 응접실을 꽃이 가득 핀 정자처럼 꾸미고 싶으니까. 식탁에는 들장미를 꽂아 장식할 거야. 모든 일이 잘되어야 할 텐데. 모건 부인의 여주인공은 결코 당황하거나 쩔쩔매지 않잖아. 늘 침착하고 집안일도 척척 해내고. 모두들 훌륭한 주부 기질을 타고난 것 같아. 《숲에서 보낸 시절》의 거트루드는 8살 때부터 벌써 집안일을 하며 아버지 시중을 들었잖니. 내가 8살 때는 아이 돌보는 일밖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었어. 모건 부인이 젊은 여자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 쓰는 것을 보면 아가씨들을 잘 알고 있나 봐. 우리도 좋게 생각해주었으면 좋겠어. 나는 그분을 여러 가지로 상상해봤어. 모건 부인이 어떤 분인지, 어떤 말을 할지,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같은 것들 말이야. 난 내 코가 걱정이야, 코에 주근깨가 일곱 개나 있거든. 여기 좀 봐. 지난번 마을 개선회 소풍 갔을 때 모자도 쓰지 않고 햇볕 아래서 너무 오래 돌아다녔더니 생긴 거야. 어릴 때처럼 온 얼굴이 주근깨투성이가 아닌 것만도 감사를 드려야지, 겨우 이 정도 같고 걱정하는 건 말도 안 돼. 하지만 주근깨가 전혀 없었더라면 훨씬 좋을 뻔했어. 모건 부인 작품의 주인공들은 모두 완벽한 피부를 갖고 있으니까. 주근깨가 있는 주인공은 한 명도 없었던 것 같거든.”
“그 주근깨는 별로 두드러져 보이지 않아. 정 신경 쓰이면 오늘 밤에레몬즙좀 바르고 자보던지.”
다이애나가 위로해주었다.
다음 날 앤은 파이와레이디핑거 쿠키를 만들고 하얀 모슬린 드레스를 손질하고 그럴 필요까지야 없었지만 온집 안을 청소했다.‘초록 지붕 집’이야 마릴라가 언제나 정갈하게 정리정돈을 잘해두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앤은 샬럿 E. 모건이 이 집을 방문하는데 먼지 조각 하나라도 보인다면 굉장히 결례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심지어층계 밑 잡동사니를 넣어두는 벽장까지도 청소했다. 모건 부인이 그 안까지들여다볼리야 만무한데도.
“그분이 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한 다음 그분을 맞이하고 싶어요.”
앤이 마릴라에게 말했다.
“그분의 작품 《황금 열쇠》에 나오는 두 주인공인 앨리스와 루이자는롱펠로의 시를 좌우명으로 삼고 살거든요. 바로 이런 시예요.

‘아주 옛날에 집을 짓던 사람은
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구석까지
정성을 다해 집을 지었다
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구석이 없어서’14)


그래서 두 사람은 늘 지하실 층계도 윤이 나게 닦고 침대 밑도 잊지 않고 청소했거든요. 모건 부인이 왔을 때 층계 밑 벽장이 지저분하면 저도 마음이 개운치 않을 거예요. 지난 4월에 《황금 열쇠》를 읽은 다음부터 다이애나와 저도 그 시를 좌우명으로 삼아 살기로 했어요.”
그날 밤 존 헨리 카터와 데이비가 하얀 수탉 두 마리를 잡았고 앤이 닭털을 뽑고깨끗이씻었다. 보통 때라면 아주 싫은 일이었지만 그 살찐 닭의 운명도 그날만큼은 거룩하게 느껴졌다.
“저는 닭털 뽑는 일이 싫어요. 하지만 제 손이 하는 일과 제 마음이 하는 일이 같을 필요가 없다는 건 다행이에요. 제 손이 닭털을 뽑고 있기는 하지만 제가 지금 은하수를 걷고 있다고 상상할 수 있으니까요.”
앤이 마릴라에게 말했다.
“그러느라 그렇게 털을 여기저기 어질러놓았니?”
마릴라가 한마디 했다.
일을 마친 앤은 데이비를 재우면서 내일은 예의 바르게 행동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내일 하루만 아주 착한 아이가 되면 다음 날은 나쁜 애가 되어도 되는 거야?”
데이비가 물었다.
“그런 약속은 할 수 없어.”
앤이 신중하게 대답했다.
“그렇지만 너와 도라를 호수로 데려가 배를 태워줄게. 호수 제일 깊은 곳까지 저어간 다음 해변 모래 언덕으로 
12) 세게 저어 잘게 거품이 일게 한 크림.
13) 스펀지케이크용 반죽을 손가락 모양으로 만들어서 구운 과자.
14)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Henry Wadsworth Longfellow, 1807~1882)의 시 <집 짓는 사람(The Builders)> 중 제5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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