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2권 25~26

나단비 | 2024.03.07 10:55:55 댓글: 0 조회: 448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2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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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번리 스캔들





에이브 씨의 예언대로 폭풍우가 몰아친 뒤 2주일쯤 지난 어느 상쾌한 유월의 아침, 앤은 상처 입은 하얀 수선화 두 송이를 들고 ‘초록 지붕 집’의 뒤뜰로 갔다.
“이것 좀 보세요, 마릴라 아주머니.”
앤은 슬픈 듯이 무표정한 마릴라 앞에 꽃을 내밀었다. 초록색 무명 수건을 머리에 두른 마릴라는 막 닭을 손질해 집 안으로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폭풍우 속에서 살아남은 건 겨우 이것뿐인데 이것 역시 온전하지 못해요. 너무 슬퍼요. 매슈 아저씨의 무덤에 바칠 것이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했거든요. 아저씨는 흰 수선화를 아주 좋아하셨잖아요.”
“나도 애석하구나. 하지만 더 큰 피해가있었으니 꽃 따위로 슬퍼할 때가 아니지. 모든 곡식과 과일까지 모두 엉망이 되어버렸으니.”
“귀리는 이미 다시 씨앗을 뿌렸으니까 올여름 날씨만 좋으면 좀 늦긴 하더라도 수확에는 문제가 없을 거라고 해리슨 아저씨가 말했어요. 제가 심은 한해살이풀들도 모두 싹이 났고요. 하지만 수선화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가여운 헤스터 그레이 무덤에 가져다줄 것도 없고요. 지난밤에 헤스터의 정원에 가보았지만, 거기도 남은 게 한 송이도 없었어요. 분명 헤스터가 수선화를 보고 싶어 할 거예요.”
“그런 말은 그 정도만 하는 게 좋겠다, 앤. 정말이야. 헤스터 그레이는 죽은 지가 30년이나 지났어. 영혼도 천국에 가 있을 거라고. 그러길 바라는 거지만.”
마릴라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네, 그렇긴 하지만 천국에 가 있어도 여전히 자기 정원을 잊지 않고 있을 거라고요. 저 같으면 천국에 아무리 오래 있어도 지상을 내려다보며 내 무덤가에 누군가 꽃을 들고 찾아오지 않을까 지켜볼 것 같아요. 헤스터 그레이의 정원 같은 정원을 갖고 있었다면 천국에 간 지 30년이 훨씬 더 지났다고 해도 잊을 수 없을 거라고요.”
“어쨌건 쌍둥이에게는 그런 말 하지 마라.”
마릴라가 닭을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가며 누그러진 어조지만 다짐을해두었다.
앤은 토요일 임무를 시작하려고 수선화를 머리에 꽂고 오솔길로 나가려다문가에 잠시 멈추어 서서 6월의 아침 해를 한껏 음미했다. 세상은 다시 아름다운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폭풍의 흔적을 지우려고 대자연이 온 힘을 다하고 있는 덕분에 완전히 옛 모습을 찾기까지는 아직 여러 달이 걸릴 테지만 그래도 이미 많이 달라졌다.
“이런 날은 온종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웠으면 좋겠어.” 앤은 버드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지저귀고 있는 푸른 울새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나는 학교 선생님이고 집에서는 쌍둥이 키우는 일을 도와야 하는 처지니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단다. 작은 울새야, 네 목소리는 참 아름답다. 넌 언제나 네 마음을 너무 잘 표현해. 나보다 훨씬 더 잘. 나는 도저히 그렇게 못 하는데. 어머나, 누가 오나 봐.”
대형짐마차가 덜컹거리며 오솔길을 달려왔다.앞좌석에 두 사람이 탔고 뒷자리에는 커다란 트렁크가 하나 실려 있었다. 마차가가까워져 오자고삐를 잡은 사람이 브라이트 리버 역장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고 다른 사람은 낯선 부인이었다. 부인은 마차가 대문 앞에서 미처 멎기도 전에 가볍게뛰어내렸다. 자그맣고 예쁜 부인으로 나이는 40살보다 50살 쪽에 가깝게 보였으나 장밋빛 뺨에 검은 눈이 반짝반짝 빛났으며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에는 꽃이며 깃털로 화려하게 장식한 모자를 쓰고 있었다. 마차를 타고 먼지가 이는 길을 13킬로미터나 달려왔을 텐데도 단정하고 깨끗한 차림새였다.
“여기가 제임스 A. 해리슨 씨 집이 맞나요?”
부인이 생기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요, 해리슨 아저씨 집은 저기예요.”
앤은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어리둥절했지만 대답은 해주었다.
“어쩐지, 집이 너무 깨끗하다 했어요. 제임스가 사는집치고는너무 깨끗하더라니. 내가 안 본 사이에 사람이 완전히 변하지 않았다면 그럴 리가 없지. 제임스가 이 마을 여자와 결혼한다는 게 사실인가요?”
작은 부인이 활달하게 말을 이었다.
“아니요. 오, 아니에요.”
앤이 당황해 얼굴까지 붉혀서 낯선 부인은 해리슨 씨가 결혼한다는 상대가 바로 이 아가씨가 아닌가 하는 눈초리로 앤을 쳐다보았다.

“내가 이 섬 신문에서 보았는걸요. 친구가 그 기사에 표시를 해서 보내주었어요. 친구란 늘 그런 일에 나서게 마련이죠. 제임스 이름은 ‘새로 이사 온 신사’로 되어 있었어요.”
낯선 부인은 여전히 의심을 풀지 못했다.
“아, 그 기사는 그저 농담이었어요. 해리슨 아저씨는 아무하고도 결혼할 뜻이 없어요. 정말이에요.”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장밋빛 뺨의 부인이 다시 가볍게 마차에 오르며 말했다.
“그 사람은 이미 결혼을 한 사람이고 내가 바로 그 사람의 부인이거든요. 아, 놀라셨겠지요. 그 사람이 틀림없이 자기를 독신자라고 하면서 이 사람 저 사람 마음에 상처를 내고 다녔을 게 분명하니까. 이제 두고 봐요, 제임스.”
부인은 밭 저쪽 하얀 집을 향해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제 재미는 다 봤다고요. 내가 왔으니까. 당신이 뭔가 못된 짓을 꾸미고 있는 걸 몰랐다면 내가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만.”
부인이 다시 앤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 앵무새는 여전히 입이 거칠겠죠?”
“그 앵무새는 죽었는걸요.”
앤은 그 순간 자기 이름이 기억 안 날 만큼 정신이 없었다.

“죽었다고요! 그렇다면 모든 일이 다 잘됐군요. 그 새가 없다면 제임스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죠.”
부인이 기뻐하며 외쳤다.
이 수수께끼 같은 말만 남겨놓고 부인은 아주 즐겁다는 듯이 멀어져 갔다. 앤이 부엌으로 달려가니 마릴라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앤, 그 여자 누구니?”
“제가 지금 정신이 멀쩡한 걸까요?”
이렇게 묻는 앤의 눈동자가 마구 움직였다.
“네가 언제는 뭐 달랐니?”
이렇게 말하는 마릴라도 별로 비꼬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럼 제가 지금 깨어 있는 걸까요?”
“앤, 너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도대체 그 여자는 누구냐?”
“아주머니, 제가 지금 정신이 이상한 것도, 꿈을 꾸고 있는 것도 아니라면 그 사람은 제가 만들어낸 상상의 인물도 아니겠군요. 진짜예요. 어쨌거나 저런 모자는 제가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거였어요. 저 사람이 해리슨 아저씨의 부인이래요, 마릴라 아주머니.”
이제는 마릴라가 놀랄 차례였다.
“해리슨 씨의 부인이라니! 앤 셜리! 그럼 왜 그 사람은 독신자인 척했을까?”
“해리슨 아저씨 입으로 그렇게 말한 적은 없는 것 같아요. 결혼하지 않았다는 말은 안 했어요. 사람들이 그냥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라고요. 오, 마릴라 아주머니, 린드 아주머니가 이 소식을 들으면 뭐라고 할까요?”
앤이 공정한 입장을 취하려고 애쓰며 말했다.
그날 저녁 바로 린드 부인이찾아왔고, 부인이 뭐라고 할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린드 부인은 전혀 놀라지도 않았다! 린드 부인은 항상 그런 경우도 예상해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리슨 씨한테도 무슨 사연이 있으리라 짐작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자기 아내를 버려두다니! 미국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지, 어떻게 에이번리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죠?”
린드 부인은 분개하며 말했다.
“하지만 해리슨 아저씨가 부인을 버려두었는지 어떤지는 아직 모르잖아요. 우리는 아저씨를 비난할 권리가 없어요.”
죄가 밝혀질 때까지는 친구의 결백을 믿고 싶은 앤이 항의했다.
“그렇다면 내가 당장 저 집에가서 알아내야겠어.”
사전에는 분명 ‘세심한 배려’라는 말이 나와 있건만 린드 부인은 그런 말을배우지 못했다.
“부인이 왔다는 얘기는 내가 모르는 걸로 하고, 해리슨 씨가 오늘 카모디에서 토머스의 약을 사다 주기로 했으니까 그걸 구실 삼아 다녀오면 돼요. 돌아오는 길에 내가 다 얘기를 해줄 테니 기다리고들 있으라고.”
린드 부인은 앤이라면 얼씬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집으로 쳐들어갔다. 앤은 해리슨 씨 집에 가볼 엄두야 내지 못하고 있었지만 당연히 모든 일이 궁금했다. 린드 부인이 그 비밀을 다 풀어주겠다니 내심 기뻐하며 앤과 마릴라는 린드 부인이 돌아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하지만 린드 부인은 그날 밤‘초록 지붕 집’에 다시 들르지 않았다. 9시쯤 밀티 볼터네 집에서 돌아온 데이비가 그 이유를 모두 설명해주었다.
“내가 저 아래에서 린드 아주머니와 낯선 아줌마를 만났어. 둘이서 같이 한꺼번에 얘기를 막 하고 있었어! 린드 아주머니가 미안하지만 오늘 밤에는 늦어서 갈 수 없다고 전해달래. 누나, 나 굉장히 배가 고파. 밀티 집에서 4시에 차를 마셨는데 밀티네 엄마는 너무 깍쟁이야. 설탕 절임도 케이크도 주지 않았어. 빵도 조금밖에 안 줬어.”
“데이비, 남의 집에 다녀와서 먹은 걸로이러쿵저러쿵하는 건 못된 버릇이야.”
앤이 엄하게 나무랐다.
“좋아, 생각을 좀 해볼게. 먹을 것 좀 줘, 누나.”
데이비가 밝게 말했다.
앤은 자기 뒤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와 조심스럽게 문을 닫는 마릴라를 바라보았다.
“빵에다 잼을 좀 발라줘라. 레비 볼터 집에서 먹은 게 오죽하려고.”
데이비가 휴! 하고 한숨을 내쉬며 잼 바른 빵을 받아들었다.
“세상일이 마음대로 안 되나 봐. 밀티가 자기 집에 발작 일으키는 고양이가 있댔거든. 3주 동안이나 날마다 발작을 일으켰대. 그놈 발작 일으키는 꼴이 아주 재미있다고 해서 오늘 내가 그 고양이를 보려고 일부러 밀티네 집에갔는데, 세상에 이 나쁜 고양이 녀석이오늘따라한번도 발작을 안 일으키고 팔팔하게 놀기만 잘하잖아. 밀티와 내가 내내 그 고양이 주변을 돌면서 기다리고 또 기다렸는데. 어이구, 싫으면 관두라지 뭐. 그래도 언젠가는 나도 그놈 발작 일으키는 꼴을 볼 수 있겠지. 늘 그러던 놈이 갑자기 발작을 멈춰버릴 리는 없지 않겠어, 그렇지? 이 잼은 정말 맛있어.”
데이비는 잼이 들어가자 자기도 모르게 힘이 나는지 긍정적으로 말을 끝맺었다.
데이비에게 자두 잼으로 해결되지 않는 슬픔이란 절대 없었다.
일요일은 비가 심하게 내려 아무도 외출할 수 없었지만 월요일에는 누구나 해리슨 씨네 일을 들어 알게 되었다. 학교도 온통 이 소식으로 들끓었으며 데이비가 주워듣고 온 소식도 아주 많았다.
“아줌마, 해리슨 아저씨에게 새 부인이 생겼대. 아니, 정확하게 새 부인은 아니고. 하지만 둘이 오랫동안 결혼 생활을 그만뒀었다고 밀티가 말했거든. 나는 한번 결혼하면 영원히 결혼을 하고 있어야 하는 걸로 알았는데. 하지만 밀티 말로는 안 그렇대. 맘에 들지 않으면 끝내는 방법이 있대. 그중 한 방법이 부인을 집에 두고 나와버리는 건데, 해리슨 아저씨가 그렇게 했대. 밀티는 아저씨가 부인을 두고 나와버린 이유가 부인이 물건을, 그것도 단단한 것으로 막 집어 던져서라고 했고, 아티 슬론은 부인이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해서라고 했고, 네드 클레이는 부인이 쉴 새 없이 아저씨를 비난해서였대. 난 그런 이유로 부인을 내버려두고 나와버리지는 않을 거야. 나 같으면 딱 버티고 서서 ‘데이비 부인, 나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둬. 난 남자니까.’ 하고 말할 거야. 그러면 부인도 얌전해질걸. 하지만애너터클레이는 아저씨가 현관에서 구두에 묻은 흙을 털지 않고 집으로 들어가서 아줌마가 가버렸다면서 아줌마는 나쁜 사람이 아니래. 나 지금 아저씨네 가서 어떤 아줌만지 금방 보고 올게.”
데이비는 곧 실망한 얼굴로 돌아왔다.
“해리슨 아저씨 부인은 없었어. 린드 아주머니랑 응접실에 바를 새 벽지를 사러 카모디에 갔대. 그리고 해리슨 아저씨가 앤 누나에게 좀 와달래. 할 얘기가 있다면서. 아저씨네 집 바닥이 번쩍번쩍해. 어제는 설교를 듣는 날도 아닌데 해리슨 아저씨가 면도도 했어.”
해리슨 씨네 부엌은 몰라볼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데이비 말대로 바닥은 얼룩 하나 없이 깨끗하고 가구도 반들반들했으며 스토브는 얼굴이 비칠 정도였다. 벽은 흰색으로 칠해지고 창문 유리도 햇빛에 반짝거렸다. 지난 금요일까지도 찢어지고 헤진 작업복을 입고 있던 해리슨 씨는 깨끗이 꿰매고 손질한 작업복을 입고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깔끔하게 면도도 하고 숱이 얼마 안 되는 머리카락도 단정하게 빗은 모습이었다.
“앉아, 앤. 앉아.”
해리슨 씨가 에이번리 사람들이 보통은 장례식장에서나 보이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밀리는 린드 부인과 함께 카모디에 가고 없어. 린드 부인과는 벌써 평생 사귀어온 친구 같은 사이가 되어버렸지. 정말 여자란 알 수가 없는 동물이야. 굉장히 친해졌어. 아, 앤, 이제 편안한 시절은 모두 지나가버렸어. 이제 끝장이야. 이젠 죽을 때까지 몸을 깨끗하고 단정히 하라는 성화를 받아야 할 처지가 되어버렸다고.”
해리슨 씨가 구슬프게 말하려고 애썼지만 눈빛은 반짝반짝 빛이 나는 걸 억제하지 못하고 있어 그 말이 전부 진심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해리슨 아저씨, 부인이 돌아와서 기쁜 모양이군요. 아닌 척할 필요 없다고요. 아저씨 속이 훤히 다 들여다보이니까요.”
앤이 해리슨 씨에게 손가락 하나를 흔들어대면서 말했다.
해리슨 씨가 부끄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글쎄, 글쎄, 나도 익숙해지겠지. 나도 에밀리를 다시 보게 된 것이 그리 나쁘다고만은 말할 수 없지. 특히 친구 누이동생과 결혼하려 든다는 누명을 쓰고 신문에까지 나지 않고는 이웃과 체스 게임도 할 수 없는 이런 마을에서는 남자가 보호막이 필요하니까.”
해리슨 씨가한발 물러섰다.
“아저씨가 결혼하지 않은 사람인 척만 하지 않았더라도 아무도 아저씨가이사벨라앤드루스와 사귄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거라고요.”
앤이 인정사정없이 몰아세웠다.
“난 독신자인 척하지 않았어. 누가 나더러 결혼했느냐고 물었다면 나는 그랬다고 대답했을 거라고. 하지만 사람들이 그저 당연하게 결혼하지 않았으려니 생각해버린 거지. 난 그 문제에 이러쿵저러쿵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고. 그 문제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었으니까.레이철린드 부인이 내 아내가 떠난 것을 알았더라면 아주 신이 나서 떠들고 다녔을 거 아니겠어, 안 그래?”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아저씨가 부인을 떠난 거라고 하던데요?”
“시작은 에밀리가 먼저 했다고. 내가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전부 얘기해줄 테니까 나를 나쁜 사람으로 오해는 하지 말라고. 에밀리도 그렇고. 우리 베란다로 나가서 얘기를 하자고. 여기는 모든 것이 겁이 날 정도로 정갈해. 옛날이 그립다고. 조금 지나면 익숙해지겠지. 하지만 뜰을 쳐다보고 있으면 마음이 좀 편해져. 에밀리가 아직 뜰까지는 치우지 못했거든.”
둘이 베란다에 편안하게 자리를 잡고 앉자 해리슨 씨가 넋두리를 시작했다.
“여기 오기 전에 난 뉴브런즈윅의 스코츠포드에 살았어. 우리 누님과 함께 살았는데 난 누님이 편안했지. 치우는 일도 적당히 하고 내 일에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 일도 거의 없었거든. 에밀리 말에 따르면 누님이 내 버릇을 버려놨대. 하지만 3년 전에 우리 누님이 세상을 떴어. 누님이 죽기 전에 내 걱정을 많이 하면서 결국은 내가 결혼하겠다는 약속을 하게 했었지. 에밀리 스콧을 신부로 데려오라고 하더군. 에밀리는 재산도 있고 살림을 아주 잘하는 사람이었거든. 난 에밀리 스콧이 나를 쳐다보기나 하겠느냐고 했지. 누님은 일단 청혼이나 해보라는 거야. 난 누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고 일단 그러겠다고 약조를 했지. 그리고 정말로 청혼을 했는데 에밀리가 내 청혼을 받아들이겠다는 거야. 앤, 내 생애 그렇게 놀란 일은 없었어. 에밀리처럼 영리하고 예쁜 여자와 나 같은 늙은이가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냐고. 처음에는 복이 넝쿨째 굴러들어왔다고 생각했지. 우리는 결혼을 했고 세인트존으로 2주일간 신혼여행을 다녀왔어.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날이었어. 밤 10시가 되었었지. 그런데 글쎄, 이건 사실이야, 앤. 에밀리가 돌아오자마자 집을 치우기 시작하는 거야. 오, 지금 집이 더러웠던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표정이 딱 그래. 하지만 아니야. 그렇게 지저분하지 않았다고. 나 혼자 살 때야 상당히 어수선했지. 그건 나도 인정해. 하지만 결혼하기 전에 사람을 불러 청소를 했다고. 페인트도 새로 칠하고 부서진 건 고치기도 했고. 내가 장담하는데 에밀리는 새로 지은 대리석 궁전에 데려다 놔도 집에 들어서자마자 낡은 옷으로 갈아입고 청소부터 하려 들 거라고. 어쨌건 에밀리는 그날 밤 1시까지 청소를 했어. 그런데 다음 날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또다시 청소를 하는 거야. 계속 그런 식으로 집을 청소해댔다고. 내가 보기로는 청소를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지. 일요일만 빼고는 끝도 없이 닦고 쓸고 털고 해댔어. 그러고도 또 청소가 하고 싶어 월요일만 기다리는 거야. 청소하는 게 에밀리에게는 취미였어. 나를 내버려두기만 했다면 나도 그럭저럭 견딜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에밀리는 나까지도 내버려두지 않았다고. 나도 온통뜯어고치려고 들었지만 그러기엔 내가 너무 나이를 먹었다는 걸 몰랐지. 문가에서 장화를 실내화로 갈아 신기 전에는 집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어. 헛간에서가 아니면 담배도 피울 수 없었다고. 그리고 내 문법도 엉망이래. 에밀리도 전에 학교 선생님이었는데 그 버릇을 영 버리질 못한 거야. 그리고 내가 나이프로 음식을 찍어 먹는 꼴도 보기 싫다고 했지. 그랬어. 끊임없이 이것저것 꼬집고 들추어내고 잔소리를 해댔어. 하지만 나도 상당히 고집이 셌지. 내가 좀 고쳐보려고 했으면 좋았을 걸 통 그러려고 들지를 않았으니까. 에밀리가 내 단점을 들추고 잔소리를 해대면 나도 화를 내고 심술 사납게 굴었지. 어느 날인가는 내가 청혼했을 때 왜 내 문법을 문제 삼지 않았느냐고 따졌어.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여자는 남자가 때리는 건 용서할지언정 그럴 거면 왜 나랑 결혼했느냐는 말 따위는용서하지않는 법이지. 우리는 그런 식으로 서로에게 늘 으르렁거렸어. 절대로 기분 좋은 결혼 생활이 아니었지.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난 다음부터는 그런 서로에게 익숙해졌지. 진저만 아니었다면, 아무 일 없었을지도 몰라. 그런데 진저가 우리를 갈라놓아버렸어. 에밀리는 앵무새를 좋아하지 않았고 진저의 거친 입버릇을 아주 싫어했지. 나는 내 동생을 생각해서 그놈에게 아주 각별한 정을 느끼고 있었어. 우리가 어렸을 때 내가 아주 귀여워하던 동생이 죽으면서 내게 진저를 보낸 거니까. 이 앵무새가 입이 좀 거칠기로서니 화를 낼 것까지는 없었지. 사람이 그런다면 화를 내겠지만 이놈은 겨우 앵무새잖아. 그리고 제가 들은 소리를 뜻도 모르면서 따라할 뿐일걸. 우리가 중국말을 모르듯이. 그렇게 이해하면 되는데 에밀리는 그렇게 생각하지를 않았어. 여자는 논리적이지가 못하거든. 에밀리는 진저의 말버릇을 고치려고 애썼지만 내 틀린 문법을 고치려고 든 것이나 마찬가지로 아무런 효과도 없었어. 오히려 노력을 더 하면 할수록 진저는 더 나빠지기만 하는 것 같았지. 나도 마찬가지였고. 일은 그렇게 나날이 악화만 되어갔고 마침내 마지막이 오고 말았지. 하루는 에밀리가 우리 교구 목사님 부부를 초대했는데, 마침 다른 목사님 부부가 우리 목사님 부부를 방문 중이라서 같이 초대하게 되었지. 나는 에밀리와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다 앵무새를 옮겨놓겠다고 약속했어. 에밀리는 3미터짜리 장대로도 새장을 만지려 하지 않았거든. 그런데 그만 에밀리가 내 칼라가 깨끗하지 않느니 내가 문법이 틀린 말을 쓴다느니 하면서 너무 잔소리를 해대는 바람에 앵무새를 깜박 잊어버리고 말았어. 나도 내 집에서 목사님이 욕지거리를 듣기를 원치는 않았으니까 꼭 진저를 옮겨놓으려고 했었는데 말이야. 그런데 식탁에 앉아서도 앵무새 생각은 꿈에도 못 하고 있었던 거야. 그런데 바로 우리 교구 목사님이 기도를 올리기 시작한 순간 식당 창문 밖 베란다에 있던 진저가 뜰 안으로 들어오던 칠면조를 보고는 기도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큰 소리로 욕을 퍼부어버린 거야. 진저는 항상 칠면조만 보면 그랬거든. 그런데 그날따라 진저가 도를 넘었어. 그래, 웃어도 된다고, 앤. 나조차도 그 일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는 때가 있으니까. 하지만 에밀리 못지않게 나도 끔찍한 생각이 드는 때도 있지. 나는 얼른 나가서 진저를 헛간에 갖다 두었어. 그날 식사는 엉망이 되어버렸지. 에밀리도 진저와 나에게 부글부글 끓는 마음을 억누르고 있는 걸 알 수 있었어. 목사님 부부가 돌아가고 나서 난 목장으로 나갔어. 가는 도중에 생각을 좀 했지. 에밀리한테도 미안한 생각이 들었고, 에밀리에게 내가 사려 깊게 행동하지 못했단 생각과 함께 목사님들이 내가 앵무새에게 그런 말을 가르쳤다고 생각하면 어쩌나 걱정스럽기도 했지. 한참 생각을 한 후에 난 결국 진저를 없애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소 떼를 몰고 집으로 돌아왔어. 에밀리에게도 그 얘기를 해주려고 했지. 하지만 에밀리는 식탁에 편지 한 장만 남겨놓고 가버렸더군. 마치 소설에서 항상 그러는 것처럼 말이야. 그 편지에는 자기나 진저 중에 하나를 택하라. 자기는 집으로 돌아간다. 내가 그 앵무새를 없애지 않는 한 자기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쓰여 있었어.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지. 최후의 심판 날까지 그렇게 하고 싶으면 한번 해봐라 하는 심정으로 에밀리의 짐을 모두 싸서 에밀리에게 돌려보내 버렸어. 그러자 온 마을에 소문이 퍼졌어. 스코츠포드도 여기 에이번리 못지않게 소문이 잘 퍼지는 곳이거든. 모두들 에밀리가 안됐다고 했어. 나는 화도 나고 기분이 상하기도 해서 마음 편히 살 수가 없었어. 그래서 이 섬으로 이사를 해버리기로 마음을 먹었지. 이 섬에는 어렸을 때 와본 적이 있었는데 정말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에밀리는 항상 어두워지면 어디로굴러떨어지지나 않을까 걱정하면서 걸어야 하는 곳에서는 살 수 없다고 했지. 그래서 일부러 이리로 온 거야. 우리 일은 그렇게 된 거야. 그 후로 에밀리 소식은 전혀 듣지 못했지. 토요일 뒷밭에서 돌아와 바닥을 열심히 닦고 있는 에밀리를 보기 전까지 말이야. 거기다 에밀리가 가버린 뒤로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맛있는 저녁 식사까지 식탁에 차려져 있더군. 에밀리가 먼저 식사부터 하자고 해서 식사를 한 뒤에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었지. 에밀리도 이제 남자와 지내는 법을 좀 배운 것도 같고, 결국 여기 있기로 했지. 진저도 없고. 이 섬도 생각했던 것보다 커서 여기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더군. 린드 부인과 에밀리가 저기 오네. 아니, 가지 마. 앤, 에밀리와 좀 사귀어보라고. 에밀리는 토요일에 앤을 보고 무척 마음에 든다고 했어. 그 옆집에 사는 예쁜 빨간 머리 아가씨는 어떠냐고 물었다고.”
해리슨 부인은 상냥하게 앤을 맞아주며 차를 마시고 가라고 권했다.
“제임스가 앤 얘기를 다 해주었어요. 얼마나 친절하게 대해줬는지, 케이크랑 필요한 물건도 만들어준다고. 난 가능하면 빨리 새 이웃들과 낯을 익히고 싶어요. 린드 부인은 정말 다정한 분이에요. 그렇죠? 너무 친절하고.”
달콤한 유월의 저녁놀을 받으며 앤은 집으로 돌아왔다. 해리슨 부인은 반딧불이 램프처럼 불빛을 반짝이는 들판까지 배웅해주었다.
“제임스가 우리 이야기를 모두 해주던가요?”
해리슨 부인이 은밀히 물었다.
“네.”
“그렇다면 내가 다시 그 얘기를 할 필요는 없겠군요. 제임스는 정의로운 사람이라 있는 그대로 얘기했을 테니까요. 그 사람만 잘못한 게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알아요. 나는 우리 집에 돌아가 한 시간도 안 되어서 내가 너무 경솔한 짓을 했다고 후회했지만 잘못했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남자에게 지나치게 기대를 했나 봐요. 그 사람의 말투에 그렇게 신경을 쓴 것도 어리석었어요. 성실한 사람이고, 부엌에 들어와 일주일에 설탕을 얼마나 쓰는지 조사하는 사람만 아니면 말투 같은 건 상관없는데 말이에요. 이제부터는 제임스와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관찰자’가 누구인지 알았으면 좋겠어요. 고맙단 인사를 하고 싶거든요. 정말로 그 덕분이니까요.”
앤은 그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사실을 감추었고 해리슨 부인은 설마 자기가 그 관찰자에게 직접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앤은 그 장난 같은 어리석은 기사가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기사가 한 남편과 아내를 화해하게 했고 예언자에게는 명성을 가져다주었으니.
린드 부인은‘초록 지붕 집’부엌에 앉아 마릴라와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해리슨 부인은 어떻든?”
린드 부인이 앤에게 물었다.
“아주 좋아요. 정말로 예쁘고 좋은 분이라고요.”
“바로 그래. 나도 방금 마릴라에게 그 얘기를 하고 있었어. 우리 모두 부인을 위해 해리슨 씨의 특이한 성격을 봐줘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그래야 여기 얼른 적응하지. 이제 집에 가봐야겠어요. 토머스가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텐데. 엘리자가 온 다음부터는 내가 좀 나다닐 수 있게 되었고, 이삼일 전부터는 토머스도 좀 나아졌지만 그래도 너무 오래 나와 있으면 안 되거든. 길버트 블라이드가 화이트 샌즈 학교를 그만둔다는구나. 가을부터 대학에 다닐 모양이야.”
린드 부인이 힘주어 말하며 앤의 표정을 얼른 살펴보았지만 앤은 소파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데이비를 안아 올리려고 몸을 구부리고 있어서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데이비를 안은 앤이 갸름한 얼굴을 데이비의 곱슬곱슬한 노란 머리에 대고 계단을 올라갔다. 데이비는 자면서도 앤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입을 맞추었다.
“난 누나가 정말로 좋아. 밀티 볼터가 석판에다 글을 써서 제니 슬론에게 보여주었어. ‘장미꽃은 빨갛고, 제비꽃은 파란색이고, 설탕은 달콤하고 너도 달콤해.’ 앤 누나도 꼭 그래.”



26
길모퉁이에 서서





토머스 린드는 살아 있을 때나 마찬가지로 조용히 이 세상을 떠났다. 린드 부인은 지치지도 않고 자상하게 남편을 간호했다. 토머스가 건강할 때는 가끔씩 너무 느리고 답답하다며 좀 심하게 굴기도 했지만 아플 때만큼은 소리를 낮추고 너무나 부드럽고 능숙하게 불평 한 마디 없이 밤잠도 자지 않고 남편을 돌봤다.
“당신은 내게 더없이 좋은 아내였어,레이철. 당신을 좀 더 편안하게 살게 해주지 못해 미안해. 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당신을 돌봐줄 거야. 아이들이 모두 당신을 닮아 머리가 좋고 능력이 있으니까. 당신은 좋은 엄마였고, 좋은 아내였어.”
어둠이 내리던 어느 날 저녁, 린드 부인이 일하느라 마디마디가 굵어진 손으로 마르고 창백한 남편의 손을 잡고 있을 때 토머스가 말했다.
그런 다음 토머스는 잠들었고, 다음 날 아침 분지의 뾰족한 전나무 위로 새벽이 찾아들 무렵 마릴라가 동쪽 방으로 와서 앤을 깨웠다.
“앤, 토머스 린드 씨가 돌아가셨다. 일하는 아이가 와서 알려주었어.레이철에게 가봐야겠다.”

토머스 린드의 장례식 다음 날 마릴라는 이상하게 마음이 심란해‘초록 지붕 집’을 서성거렸다. 그리고 이따금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앤을 보았지만 고개를 흔들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차를 마신 다음 마릴라는레이철을 보러 갔다. 집으로 돌아와 동쪽 방에서 학생들 숙제 검사를 하고 있는 앤에게 다시 왔다.
“린드 아주머니는 좀 어떠세요?”
앤이 물었다.
“이제 정신을 좀 차린 것 같더라.”
마릴라가 앤의 침대머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이것은 마릴라의 마음이 다른 데 가 있다는 증거였다. 보통 때 같으면 마릴라가 단정하게 정리해놓은 침대에 걸터앉는다는 건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그렇지만 아주 외로워 보였어. 엘리자가 오늘 자기 집으로 돌아가야 하거든. 아들이 아파서 더 이상은 여기 머물 수 없대.”
“아이들 숙제 검사를 끝내고 나서 린드 아주머니 댁에 가서 아주머니랑 얘기나 좀 나누고 와야겠어요.오늘 밤에는 라틴어 공부를 하려고 했지만 나중에 해도 되죠, 뭐.”
앤이 말했다.
“길버트 블라이드는 가을에 대학에 갈 모양이더라. 너도 가면 어떻겠니?”
마릴라가 불쑥 물었다.
앤이 놀라 마릴라를 쳐다보았다.

“물론 저야 가고 싶죠.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요, 마릴라 아주머니.”
“가능하게 할 수도 있지. 난 항상 네가 대학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 때문에 네가 대학 공부를 포기한다면 내 마음이 편치 않아.”
“하지만 마릴라 아주머니, 전 집에 있는 걸 한순간도 아쉬워해본 적이 없어요. 전 너무 행복해요. 지난 2년 동안 전 너무너무 즐거웠어요.”
“그래, 나도 네가 만족한다는 건 안다. 하지만 그게 문제는 아니잖니. 넌 공부를 계속해야 해. 넌 레드먼드 대학에서 일 년은 공부할 수 있을 만큼 돈도 충분히 모았고, 가축을 판 돈으로 또 일 년은 더 공부할 수 있을 거야. 또 장학금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고.”
“그래요, 하지만 전 갈 수 없어요. 아주머니 눈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전 아주머니와 쌍둥이만 집에 남겨두고 떠날 수 없어요. 모두들 절 필요로 하잖아요.”
“나와 쌍둥이만 남게 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내가 너와 상의하려는 게 그거야.오늘 밤레이철과 여러 가지 얘기를 하고 왔다, 앤.레이철도 걱정거리가 많아. 모아둔 돈도 없고. 8년 전에 막내아들을 서부로 보낼 때 집을저당 잡혀자금을 대주었는데 그 이후로 돈을 갚기는커녕 이자 물기도 급급했다더라. 물론 토머스 씨가 병이 나서 이래저래 또 돈이 많이 들었지. 결국 농장과 집을 팔아야 하지만 빚을 갚고 나면 그리 남는 것이 없대. 그렇게 되면 엘리자와 함께 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데 에이번리를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고 하더구나. 나이를 먹으면 친구를 새로 사귀기도, 새로운 흥밋거리를 찾기도 쉬운 일이 아니지. 그래서 앤,레이철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해봤는데 말이다. 레이철에게 우리 집으로 와서 같이 살자고 하면 어떨까? 하지만레이철에게 그 말을 하기 전에 너하고 먼저 상의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만일레이철과 살게 되면 네가 대학에 가도 되잖니. 네 생각은 어떠냐?”
“아, 대학에 갈 수 있다는 생각만 해도, 누군가가 제 손에 달이라도 쥐어준 듯 기쁘지만,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린드 아주머니를 여기 오셔서 사시게 하는 건 아주머니가 결정하실 문제예요. 정말 그럴 수 있으세요? 린드 아주머니는 좋은 사람이고 가까운 이웃이긴 하지만…….”
“하지만레이철에게도 단점이 있단 말이냐? 그렇지, 물론 그래. 하지만레이철이 에이번리를 떠나도록 내버려둔다면 그게 훨씬 더 나쁠 거라는 생각이 들어.레이철이 너무 그리울 것 같아.레이철은 이곳에서도 내가 가장 가까이 지내던 친구 아니냐. 우리는 40년이 넘게 이웃으로 지냈지만 한 번도 싸우거나 한 적도 없어.레이철이 너더러 촌스럽고 빨간 머리라고 했다고 네가 대들었을 때는 싸우기 직전까지 가기도 했지만. 너 그거 기억하고 있니, 앤?”
“기억하고말고요. 그런 일을 어떻게 잊겠어요. 그 순간만큼은 가여운 린드 아주머니가 얼마나 미웠는지 몰라요.”
앤이 아련한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러고는네가 용서를 빌었지. 넌 그때 참 여러 면에서 다루기 힘든 아이였어, 앤. 너를 어떻게 해야 할지 도통 갈피를 잡을 수 없었으니까. 나보다는 매슈 오라버니가 너를 더 잘 이해해주었지.”
“매슈 아저씨는 모든 걸 이해해주셨어요.”
매슈 이야기만 나오면 앤의 목소리는 부드러워졌다.

“아무튼 나는레이철과 갈등 없이 그럭저럭 해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한집에서 여자들이 충돌을 일으키는 원인은 부엌을 같이 쓰면서 서로의 생활에 너무 간섭하기 때문이야.레이철이 오게 되면레이철방을 북쪽 방으로 하고 손님용 침실을 부엌으로 주면 어떨까 한다. 우리 집에는 손님용 방이 그다지 필요 없으니까 그 방에다레이철이 자기 살림살이랑 스토브를 두면 그런대로 불편하지 않게 독립적으로 생활할 수 있을 거야. 생활비는 아이들이 대줄 테고 나는 방만 빌려주면 돼. 앤,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린드 아주머니께 그렇게 말씀드려보세요. 저도 아주머니가 우리 마을을 떠나는 건 싫으니까요.”
“그리고 물론레이철이 우리 집으로 오면 넌 대학에 가도 되는 거야.레이철이 내 말벗이 되어줄 테고, 쌍둥이 돌보는 일도 도와줄 테니 네가 대학에 못 갈 이유가 없지.”
마릴라가 말했다.
그날 밤 앤은 자기 방 창가에 앉아서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가슴에는 기쁨과 아쉬움이 동시에 엇갈렸다. 뜻밖에도, 전혀 기대치도 않았는데 갑자기 길모퉁이에 다다랐다. 이 모퉁이만 돌아서면 대학이라는 가슴 벅찬 무지개 같은 꿈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이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지난 2년 동안의 즐거움을 모두 두고 떠나야 한다. 아무리 작고 사소한 일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열정을 다해 아름답고 기쁜 일로 만들었건만.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도 포기해야만 한다. 영리한 아이나 그렇지 못한 아이나, 말썽만 일삼는 아이까지 모든 아이들을 사랑했는데. 폴 어빙을 생각하기만 해도 레드먼드 대학에 가는 일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가 싶어 갈피를 잡지 못했다.

“지난 2년 동안 자그마한 뿌리들을 많이 내리게 했는데, 이제 떠나버리면 그 뿌리들이 상처를 많이 받게 될 거야. 하지만 가는 게 최선이겠지. 마릴라 아주머니 말씀대로 내가 가지 않아야 할 이유는 없어. 다시 내 야망을 꺼내 그동안 쌓인 먼지를 털어내야 해.”
앤이 달을 향해 말했다.
다음 날 앤은 학교에 사직서를 냈고 린드 부인은 마릴라와 흉금 없는 대화를 나눈 후 감사히 마릴라의 제안대로‘초록 지붕 집’에서 지내기로 했다. 하지만 여름 동안에는 자기 집에서 지내야 했다. 농장이 가을이 되어야 팔릴 것이고 정리해야 할 다른 일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런 외딴‘초록 지붕 집’에서 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 뭐야. 하지만 지금은‘초록 지붕 집’이 전처럼 이 세상과 동떨어진 집처럼 느껴지는 것도 아니고 앤을 찾아오는 사람도 많고 쌍둥이도 있어 활기가넘치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에이번리를 떠나는 것보다야 끝자락에서라도 사는 게 낫지 뭐.”
린드 부인이 혼자 중얼거렸다.
이런 두 가지 소식은 지금까지 에이번리에서 가장 화젯거리였던 해리슨 부인 얘기를 물리치고 빠르게 마을로 번져나갔다. 아는 척하는 사람들은 마릴라가 린드 부인과 살기로 했다니 경솔한 결정을 내렸다고 고개를 저었으며 둘 모두 나름대로 고집이 있는 사람이한집에서 어떻게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갖은 비관적인 예측들을 했으나 정작 두 사람은 사람들 말에 전혀 개의치 않고 서로의 의무와 권리를 분명하게 정하고 그에 따라 생활하기로 했다.
“난 마릴라 일에 상관하지 않을 테니 마릴라도 그래야 해요.”

린드 부인이 자기 결심을 말했다.
“그리고 쌍둥이에게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기꺼이 돕겠지만, 데이비의 질문에 대답하는 일만은 사양하겠어요. 난 백과사전도 아니고 달변의 변호사도 아니거든. 그 점에서는 앤이 그리울걸요.”
“가끔씩은 앤의 대답도 데이비의 질문만큼이나 이상한걸요.”
마릴라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쌍둥이가 앤을 그리워할 거예요. 하지만 데이비의 궁금증을 해소하려고 앤의 장래를 희생하게 할 수는 없죠. 난 데이비가 뭘 물어보면 뭐라 대답할 말도 찾지 못하겠고, 그저 아이들은 입 다물고 얌전하게 놀아야 한다고나 하죠. 난 그렇게 자라왔고, 또 잘은 모르겠지만 아이들 양육에 그 방법도 요즘 유행하는 방법만큼 좋다고 생각해요.”
“어쨌거나 앤의 방법은 데이비에게 상당히 효과적이었어요. 데이비 성격이 아주 많이 달라졌잖아요.”
린드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데이비가 특별히 나쁜 애는 아니에요. 난 내가 이 애들을 이렇게 좋아하게 될 줄 몰랐다니까요. 데이비는 가끔씩 사람을 놀라게 하지만 도라는 아주 사랑스러운 아이예요. 하지만 좀, 뭐랄까, 뭐랄까…….”
마릴라가 말했다.
“좀, 재미가 없다고요? 맞아요. 책이 페이지를 넘겨도, 넘겨도 똑같은 것처럼. 도라는 착하고 아주 믿음직한 어른으로 클 것이 분명하지만 큰 주목을 받을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런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편안하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보다 재미는 없죠.”
린드 부인이 뒷말을 이었다.
앤이 학교를 그만둔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에 들뜬 사람은 아마도 길버트 블라이드 한 사람뿐이었을 것이다. 앤의 학생들은 이 일을무슨 재앙이나 되는 것처럼 받아들였다.애너터벨은 집에 돌아가 히스테리를 일으켰고, 앤서니 파이는 섭섭한 감정을 떨치려고 두 번씩이나 다른 아이들과 싸움을 벌였다.바버라쇼는 밤새 울었고, 폴 어빙은 할머니에게 일주일 동안 죽을 먹지 않겠다고 반항했다.
“할머니, 전 죽을 먹을 수 없어요. 지금은 아무것도 먹을 수 없다고요. 목구멍에 커다란 덩어리가 걸려 있는 것 같거든요. 오늘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제이컵도넬이 보고 있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울어버리고 말았을 거예요. 오늘 밤에 침대로 가면 난 틀림없이 울게 될 텐데,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운 티가 날까요? 그렇지만 울고 나면 속은 좀 시원해지겠죠. 하지만 죽은 도저히 먹을 수 없어요. 지금은 온 힘을 다해 이 슬픔과 싸워야 하거든요. 죽하고 씨름할 기운이 없다고요. 할머니, 우리 예쁜 선생님이 가버리면 나는 어떡하죠? 밀티 볼터는 제인 앤드루스 선생님이 새 선생님으로 온다고 했어요. 앤드루스 선생님도 아주 좋은 분인 것 같긴 해요. 하지만 셜리 선생님처럼 이해심이 많지는 않을 거예요.”
다이애나도 역시 이 일을 매우 비관적으로 생각했다.
“이번 겨울은 몹시 쓸쓸할 거야.”
벚나무 가지 사이로 은빛 같은 달빛이 내리는 어느 날 저녁, 꿈결처럼 아련한 동쪽 방에서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앤은 창가에 놓인 흔들의자에 앉았고 다이애나는 침대 위에 올라앉았다. “너도 가버리고, 길버트도 없고, 앨런 목사님 내외분도 샬럿타운에서 초청을 받았으니 가실 테고. 물론 승낙하시겠지? 이건 너무 심해. 겨우내 목사님도 없는 교회에서 목사 후보자의 설교를 차례로 들어야 할 텐데. 그중 절반은 변변치 못할 거야.”
“이스트 그래프턴의 백스터 목사님은 부르지 말았으면 좋겠어.”
앤이 말했다.
“그분이 우리 교회로 오고 싶어 하지만 그분 설교는 우울해. 벨 장로님도 백스터 목사님이 너무 구시대적이라고 비난했어. 린드 아주머니는 백스터 목사님에게는 위장병 말고는 별다른 결점이 없다고 했지만. 백스터 목사님의 사모님 음식 솜씨가 나빠서 그렇대. 린드 아주머니 말로는 3주면 2주는 딱딱한 빵만 먹어야 하니 자연히 신학 이론도 어딘가 꼬였을 거라고 하셔. 앨런 부인은 이 마을을 떠나기가 무척 괴로우신가 봐. 처음 결혼해서 이곳에 왔을 때부터 모두 진심으로 잘해주어서 평생의 친구들과 헤어지는 기분이래. 게다가 아기의 무덤이 여기 있잖아. 그 무덤을 두고 어떻게 여기를 떠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셨어. 겨우 3개월 된 아기라 엄마가 곁에 없으면 틀림없이 외로워할 거라고 걱정하시면서. 물론 목사님한테는 그런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거의 매일 밤 목사관 뒤쪽 너도밤나무 숲을 지나 무덤에 가서 자장가를 불러준대. 어젯밤 들장미를 매슈 아저씨 무덤에 놓아주려고 갔을 때 사모님이 모두 말해주셨어. 그래서 내가 에이번리에 있을 때는 꼭 사모님을 대신해서 아기의 무덤에 꽃을 갖다 놓겠다고 약속했지. 그리고 내가 없으면 틀림없이…….”
“내가 할 거라고 말씀드렸지? 물론 내가 할게. 그리고 매슈 아저씨의 무덤가에도. 너를 대신해서 말이야.”

다이애나가 진심으로 말했다.
“오, 고마워. 나도 너에게 부탁하려고 했어. 그리고 헤스터 그레이의 무덤에도 그래 주겠지? 헤스터의 무덤도 잊지 말아줘. 난 헤스터 그레이를 하도 많이 생각하고 또 상상해서 헤스터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생생하게 느껴져. 어느 봄날 저녁, 어스름이 내리는 무렵과 밤이 만나는 그 마법의 시간에 헤스터 그레이가 놀라지 않도록 살며시 발소리를 죽여 조용히 그 정원으로 돌아가 보면, 헤스터가 그 정원의 서늘하고 조용한 구석에 돌아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너도밤나무 언덕을 넘어가 보면 그 정원이 옛날 모습 그대로 하얀 수선화며 이른 장미가 만발해 있고 담쟁이덩굴이 얽혀 있는 작은 집이 그대로 보이지 않을까 여겨져. 몸집이 자그만 헤스터 그레이도 거기 그대로 앉아 있고. 다정한 눈으로 검은 머리를 바람에 나부끼며 손가락 끝으로 수선화를 어루만지기도 하고 장미꽃과 비밀 이야기를 속삭이기도 하면서. 그러면 나는 조용히 앞으로 나아가 손을 내밀며 말하지. ‘헤스터 그레이, 나와 놀아주지 않을래요? 나도 장미를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우리는 그 낡은 벤치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꿈도 꾸지. 아니면 둘이 같이 말없이 앉아 있기도 해. 그런데 달이 떠올라서 주변을 돌아보니까, 거기에 헤스터 그레이도 없고, 담쟁이덩굴로 덮인 작은 집도 없고 장미도 없어. 그저 오랫동안 버려진 채 풀 위로 수선화만이 별처럼 총총히 피어 있는 정원만이 있을 뿐이지. 벚나무를 스치는 바람이 한숨을 쉬듯이 구슬픈 소리를 내고. 그러면 난 이것이 현실이었는지 그저 공상에 빠져 있었던 것인지 분간할 수 없게 돼.”
다이애나가 몸을 웅크리고 일어나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어둑어둑한 저녁에 상대가 이런 으스스한 이야기를 할 때면 자기 등 뒤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

“너와 길버트 둘 다 떠나버리면 우리 개선회 활동도 활기를 잃게 될까 봐 걱정이야.”
다이애나가 슬프게 말했다.
“그런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마.”
앤이 꿈나라에서 현실적인 문제로 돌아오면서 활기차게 말했다.
“우리 개선회는 이제 아주 단단하게 뿌리를 내렸잖아. 특히 나이 드신 어른들이 우리 일에 아주 적극적으로 도와주시니까 걱정 없어. 이번 여름에 모두들 자기 집 앞 잔디밭과 길을 닦아놓은 것 좀 보라고. 그리고 내가 레드먼드에 가서도 계속 관심을 갖고 여기저기 살펴보면서 겨울에는 편지도 써 보낼게. 모든 일을 그렇게 어두운 시각으로만 보지 말라고, 다이애나. 지금은 기쁨과 환희의 시간을 갖도록 날 내버려둬. 나중에 내가 정말로 가야 할 때가 되면 이렇게 기뻐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건 너에게 기쁜 일 아니니? 대학에 가면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될 거고 새로운 친구도 많이 사귈텐데.”
“나도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싶지만…….”
앤이 생각에 잠겨 말했다.
“새로운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가능성은 삶을 더 풍요롭게 하지. 하지만 내가 얼마나 많은 친구를 사귀든 내 오랜 친구만큼 친해지지는 못할 거야. 특히 검은 눈과 보조개를 가진 어떤 아이보다 말이야. 너 그 애가 누군지 알겠니, 다이애나?”
“하지만 레드먼드에는 머리 좋은 친구들이 많을 거 아냐. 나는 어쩌다 그러긴 하지만 문법에 어긋나는 말이나 쓰는 멍청한 시골여자아이에 불과한걸. 그래도 생각해 보면 내가 그렇게 바보는 아닌데. 그나저나 우린 지난 2년 동안 그 어느 때보다도 즐겁게 보냈어. 난 네가 레드먼드에 간다는 소식에 누가 기뻐할지 알지. 앤, 내가 뭐 하나 물어볼게. 이건 심각한 질문이야. 화내지 말고 진지하게 대답해줘. 너, 길버트한테 관심 있니?”
“친구로는 무척 좋아하지만 네가 말하는 그런 건 조금도 아니야.”
조용하지만 단호한 대답이었다. 앤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다이애나가 한숨을 쉬었다. 내심 앤이 다르게 대답해주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결혼은 안 할 거니, 앤?”
“아마 언젠가는 하겠지. 내 짝을 만나면 말이야.”
앤이 아련한 눈길로 달을 쳐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네 짝인지 어떻게 알아?”​
“알 수 있지. 바로 이 사람이다 싶은 뭔가가 있을 거야. 너도 내 이상형을 알잖아, 다이애나.”
“하지만 이상형이란 건 변하게 마련이야.”
“내 이상형은 변하지 않아. 나는 내 이상에 맞지 않는 사람은 사랑할 수 없어.”
“이상형을 만나지 못하면 어떻게 할 건데?”
“그렇다면 노처녀로 늙어 죽어야겠지. 그렇게 죽는 게 그다지 힘든 일은 아닐 거야.”
앤이 밝게 대답했다.

“죽는 일이 힘든 건 아닐걸. 노처녀로 사는 일이 힘들지.”
다이애나가 진심으로 말했다.
“라벤더 아주머니 같은 노처녀라면 괜찮겠지만 나는 절대로 그렇게 되지 못할 거야. 내가 마흔다섯 살이 되면 끔찍하게 뚱뚱해져 있을 테니까. 날씬한 노처녀라면 낭만적일 수도 있지만 뚱뚱한 노처녀에게는 그럴 일이 없겠지. 참, 너도 알고 있니? 3주 전에 넬슨 앳킨스가 루비 길리스에게 청혼했대. 루비가 모두 다 얘기해줬어. 루비는 넬슨하고 결혼하게 되면 부모님과 같이 살아야 하기 때문에 절대 그 청혼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지만 넬슨이 너무나도 아름답고 낭만적으로 청혼을 하는 바람에 그만 깜박 넘어가고 말았대. 하지만 루비도 서두르고 싶지는 않아서 일주일만 시간을 달라고 했대. 그리고 그 이틀 뒤에 앳킨스 어머니 집에서 열린 바느질 모임에 갔는데 응접실 탁자에 《에티켓 가이드》란 책이 놓여 있더래. ‘구혼과 결혼’ 편을 보았는데 넬슨이 자기한테 청혼하면서 한 말이 구절구절 모두 그 안에 적혀 있더래. 너무 기가 막혀서 집으로 오자마자 매몰찬 거절의 편지를 보냈대. 거절을 당한 후에 넬슨이 강물에 몸이라도 던질까 봐 넬슨 어머니와 아버지가 번갈아가면서 감시하고 있지만 루비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고 했어. ‘구혼과 결혼’ 편에 거절당한 연인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도 다 나와 있는데 물에 빠져 죽는 내용 같은 건 없었대. 그리고 윌버 블레어도 자기를 애타게 사랑하지만 자기가 거들떠보지도 않았대.”
앤은 그 이야기가 지루하기 짝이 없다는 태도였다.
“나이런 말 하기싫지만, 친구를 배신하는 말 같아서. 하지만 난 이제 루비 길리스를 좋아하지 않아. 우리가 같이 학교에 다니고 퀸스에 다닐 때는 좋아했지만. 지금은 너나 제인만큼 좋아하지 않아. 지난해 카모디에 간 뒤로 루비는 너무나 많이 달라져 버렸어. 너무나 많이.”
“나도 알아.”
다이애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루비한테서도 길리스 집안 기질이 드러나고 있어. 루비도 어쩔 수가 없겠지. 린드 아주머니는 길리스네 딸들이 남자를 생각하기 시작하면 걸음걸이와 말투에서 대번에 그게 나타난다고 하셨어. 루비도 온통 남자 이야기뿐이잖아. 남자들이 자기에게 어떤 찬사의 말을 늘어놓았는지, 카모디에 있는 남자들이 얼마나 자기한테 미쳐 있는지 하는 얘기들 말이야. 그런데 이상한 일은 그 말이 모두 틀린 말이 아니라는 거야.”
다이애나는 분하다는 표정이었다.
“어젯밤에 블레어 상점에서 루비를 만났는데 자기한테 다시 좋은 사람이 생겼다고 속삭이더라. 누군지 물어보지도 않았지.물어봐 주기를 바라면서 한 말일 테니까. 그게 바로 루비가 바라는 거잖아. 너, 생각나니? 루비는 어려서부터 어른이 되면 애인을 많이 만들어 실컷 즐기고 난 다음에 결혼하겠다고 했잖아. 루비는 제인과는 아주 다르지. 제인은 착하고 분별 있고 그야말로 숙녀다운 애니까.”
“제인 같은 아이도 없지만.”
앤이 몸을 앞으로 숙여 베개 위에 놓인 다이애나의 포동포동한 손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나의 다이애나 같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저녁 기억하니, 다이애나? 너의 집 뜰에서 우린 영원한 우정을 맹세했어. 그 맹세대로 우리는 한 번도 싸우거나 사이가 벌어졌던 적이 없었지.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의 그 가슴 설레던 기쁨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 난 어린 시절 내내 외로웠고 애정에 굶주려 지냈어. 난 이제야 내가 얼마나 쓸쓸하고 애정에 굶주린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깨닫고 있어. 나를 염려해주는 사람도, 내 일에 신경 써주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으니까. 내 상상의 나라에서 간절히 원하던 친구와 애정을 얻지 못했다면 난 무척 비참했을 거야. 하지만 여기‘초록 지붕 집’에 온 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달라졌어. 너도 만나게 됐고. 너의 우정이 내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너는 모를 거야. 늘 변함없이 따뜻한 마음으로 내 친구가 되어주어 정말 고마워.”
“나는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그럴 거야. 나는 절대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겠어. 여자 친구는 말이야. 너를 좋아한 절반만큼도. 내가 결혼해서 딸을 낳으면 이름을 앤이라고 지을 거야.”

다이애나가 훌쩍거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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