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2권 27~28

나단비 | 2024.03.07 11:23:20 댓글: 0 조회: 414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2283
27

돌집에서 보낸 오후






데이비가 말했다.
“누나, 어디 가는데 그렇게 예쁜 옷을 입은 거야? 그 드레스 입으니까 끝내주게 멋진데!”
앤은 점심 식사에 옅은 초록색깔 새 오건디 드레스를 입고 내려왔다. 매슈가 세상을 떠난 뒤로 처음 입은 색깔 있는 옷이었다. 연초록색 오건디는 섬세하고 꽃처럼 아름다운 앤의 혈색을 더욱 돋보이게 했고 윤기 나는 머리를 더욱 반짝이게 했다.
“‘메아리 집’에 가려는 거야. 그런데 데이비, 내가 몇 번이나 그런 말을 써서는 안 된다고 했지?”
앤이 나무랐다.
“나도 데려가 줘.”
데이비가 떼를 썼다.
“마차를 타고 가면 널 데려갈 수 있지만 오늘은 걸어갈 거라서 안 돼. 여덟 살짜리 다리로 걷기에는 너무 먼 거리야. 폴도 나랑 같이 갈 건데, 넌 폴을 좋아하지도 않잖아.”
“아니야, 이제 폴을 전보다 훨씬 더 좋아하게 됐어.”
데이비가 자기 앞에 놓인 푸딩을 우악스럽게 삼키며 말했다.
“나도 이제는 꽤 착한 아이니까 폴이 나보다 더 착해도 상관없다고. 내가 계속해서 노력하면 언젠가는 폴을 따라잡을 수 있어. 다리도, 착한 것도. 또 폴은 학교에서 우리 2학년 아이들한테 아주 잘해줘. 다른 큰 아이들이 우리를 괴롭히지 못하게 막아주기도 하고 여러 가지 놀이도 가르쳐준다고.”
“참, 왜 폴이 어제 점심시간에 시냇물에 빠졌니? 운동장에서 봤을 때 온몸이 젖어 있었어. 얼른 마른 옷으로 갈아입으라고 집에 보내느라 무슨 일인지 물어보지 못했는데.”
앤이 물었다.
“그건 어쩌다 그렇게 된 거야. 물에다 머리를 넣은 건 이유가 있었지만 그 뒤에 빠지게 된 건 그냥 그렇게 됐어.”
데이비가 설명했다.
“어제 모두 시냇가로 갔는데 프릴리 로저슨이 무슨 일로 폴한테 화가 났었어. 프릴리는 아주 못됐어. 예쁘긴 해도. 폴이 매일 밤 곱슬머리를 만들려고 할머니한테 머리를 말아달라고 한다고 말했거든. 폴도 프릴리가뭐라건상관 안 했을 텐데, 그레이시 앤드루스가 웃어버렸어. 그래서 폴이 엄청 화가 난 거야. 그레이시는 폴의 여자 친구거든. 폴은 그레이시한테 완전 맛이 갔어. 꽃도 갖다 주고 해안가 길까지 책을 들어주기도 해. 폴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져서는 할머니가 머리를 말아준 게 아니라 자기 머리는 원래부터 곱슬머리라고 했어. 그러고는그 증거를 보여준다고 둑에 누워서 머리를 샘물 속에 집어넣은 거야. 아, 우리가 마시는 그 샘물은 아니었어.”
마릴라의 놀란 얼굴을 보고 데이비가 얼른 변명했다.
“그 아래에 있는 샘. 하지만 둑이 엄청나게 미끄러웠거든. 폴이 누우니까 그냥 쏙 미끄러져 들어가 버린 거야. 와, 풍덩 빠지는 게 끝내주게 볼 만했어. 아! 앤 누나, 나 그 말 일부러 쓰려고 했던 건 아닌데, 내가 생각하기도 전에 그냥 나와버렸어. 폴이 굉장히 볼 만하게 풍덩하고 빠져버렸다고. 하지만 물속에서 기어 나올 때가 더 웃겼어. 온몸이 물에 젖은 데다 진흙까지 뒤집어쓰고 있었거든.여자아이들이 더 심하게 웃었지. 하지만 그레이시는 웃지 않았어. 폴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 그레이시는 착하지만 들창코야. 난 나중에 커서 여자 친구를 사귀더라도 들창코는 싫어. 난 앤 누나처럼 코가 예쁜 여자 친구를 고를 거야.”
“얼굴에 온통 시럽을 바르고 푸딩을 먹는 아이가 어떻게 여자 친구를 만들어?”
마릴라가 냉정하게 핀잔을 주었다.
“얼굴을 씻고 나서 여자 친구를 구하러 가면 되지요.”
데이비가 마릴라에게 말대답을 한 뒤 보란 듯이 손등으로 얼굴을 쓱 문질렀다.
“그리고 말하지 않아도 귀 뒤도 다 씻을 거라고요. 오늘 아침에도 귀 뒤를 씻었다고요. 요즘은 예전처럼 그렇게 자주 까먹지도 않아요. 하지만…….”
데이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남자한테는 신경 써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그 모든 것을 다 기억하기가 어렵단 말이에요. 라벤더 아줌마집에 데려가 주지 않을 거면 난 해리슨 아줌마한테나 가봐야겠다. 해리슨 아줌마는 정말로 좋거든요. 아이들이 오면 주려고 항상 부엌에과자 통을 준비해둔다고요. 자두 케이크를 구운 다음 팬에눌어붙어 있는 것을 긁어주기도 하고. 자두 덩어리가 옆쪽에 아주 많이눌어붙거든요. 해리슨 아저씨도 원래부터 좋은 아저씨지만 다시 결혼한 다음부터는 두 배로 더 좋아졌어요. 남자가 결혼하면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건가 봐요. 마릴라 아주머니도 결혼하지 그래요? 왜 결혼을 안 해요?”
마릴라는 독신녀로서의 자기 삶을 조금도 슬퍼하지 않아서 데이비의 말에 그리 언짢아하지 않았다. 그저 앤에게 또 시작이라는 듯이 눈짓을 해보이며 아무도 데려가는 사람이 없어서라고 기분 좋게 대답해주었다.
“하지만 아줌마가 데려가 달라고 아무한테도 부탁하지 않았으니까 그렇지요.”
데이비가 끈질기게 따지고 들었다.
“오, 데이비, 그런 부탁은 남자가 하는 거야.”
놀랍게도 아무도 도라에게 말하라고 하지 않았는데 도라가 끼어들었다.
“왜 항상 남자만 그래야 해? 이 세상은 다 남자에게만 뒤집어씌우는 것 같아. 푸딩 좀 더 먹어도 될까요, 마릴라 아줌마?”
데이비가 투덜댔다.
“넌 충분히 먹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마릴라는 데이비에게 조금 더 덜어주었다.
“푸딩만 먹고 살았으면 좋겠어. 왜 그러면 안 되지? 궁금해.”
“그것만 먹으면 곧싫증 나니까 그렇지.”
“내가 한번 해볼게요. 하지만 푸딩을 전혀 먹지 않는 것보다는 손님을 초대했을 때랑 물고기를 먹는 금요일만이라도 먹는 편이 좋아요. 밀티 볼터네는 푸딩을 전혀 먹지 않는대요. 밀티가 그러는데 손님이 오면 밀티네 엄마는 치즈를 작게 잘라서 한 조각씩 준 다음 예의상 한 조각 더 준대요.”
“밀티 볼터가 자기 어머니를 그렇게 말하더라도 너는 그 말을 옮기고 다녀선 안 돼.”
마릴라가 엄히 타일렀다.
“이런, 이런!”
데이비는 요즘 해리슨 씨의 이 말투를 한창 흉내 내고 다녔다.
“밀티는 자기 엄마를 칭찬한 거예요. 사람들이 자기 엄마는 돌을 씹으면서라도 살 수 있을 거라고 말한대요. 얼마나 자랑한다고요.”
“저 성가신 닭들이 내 팬지 꽃밭을 다 망치고 있겠구나.”
마릴라가 얼른 일어나 밖으로나가면서 말했다.
하지만 암탉들은 팬지 꽃밭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고, 마릴라도 꽃밭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지하실 입구에 앉아 스스로도 무슨 짓인가 싶을 때까지 한참동안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제하지 못했다.
그날 오후 앤과 폴이 돌집에 도착했을 때 라벤더와 샬로타 4세는 정원에 나와 있었다.잡초를뽑고,갈퀴로 긁어모으며나무가 소중한 생명이나 되는 것처럼정성스럽게 정원수를 손질하고 있었다. 평소좋아하는 프릴과 레이스가 잔뜩 달린 옷을 입고 즐겁게 일을 하고 있던 라벤더는 앤을 보자 가위를 내던지고 얼른 뛰어왔고 샬로타 4세도 기쁜 듯이 씩 웃었다.
“잘 왔어, 앤. 나도 오늘은 앤이 오겠구나 생각하고 있었어. 앤은 저녁 무렵에 속한 사람이니까 이 저녁이 앤을데려다주었을 거야. 같은 세계에 속한 것은 늘 함께 오는 법이거든. 사람들이 그걸 안다면 문제가 없을 텐데. 하지만 그걸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아. 서로 어울리지도 않는 것들을 한데 섞으려고 소중한 에너지를 낭비하고들 있어. 어머나, 폴, 어쩌면 이렇게 많이 자랐니? 지난번 왔을 때보다 머리 절반은 더 커졌네!”
“네, 밤에 잠든 사이에 쑥쑥 자라는 풀처럼 잘 큰다고 린드 아주머니도 말씀하셨어요.”
폴은 그 사실이 무척 즐거운 듯 말했다.
“할머니는 틀림없이 죽을 먹은 효력이 나타난 거라고 하시는데, 그럴지도 모르죠. 신만이 아시는 일이겠죠.”
폴이 한숨을 푹 쉬었다.
“누구라도 저만큼 많이 먹으면 자라지 않을 수 없을 거예요. 이제 키가 자라기 시작했으니까 우리 아빠만큼 커질 때까지 계속해서 클 거예요. 우리 아빠는 키가 180센티미터도 넘어요. 라벤더 아줌마도 아시죠?”
그렇다. 라벤더도 알고 있다. 라벤더의 아름다운 붉은 볼이 더욱 붉어졌다. 한 손에는 폴의 손을, 다른 손에는 앤의 손을 잡고 조용히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메아리를 들을 수 있을까요, 라벤더 아줌마?”
폴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지난번에는 바람이 너무 심해 메아리를 들을 수 없어 실망했었다.
“그래, 오늘은 메아리를 듣기에 아주 좋은 날이야.”
라벤더가 깊은몽상에서막 깨어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우선은 뭘 좀 먹어야지. 너도밤나무 숲을 내내 걸어왔으니 배가 고플 거야. 그리고 샬로타 4세와 나는 언제든 먹을 수 있단다. 우리 식욕은 아주 말을 잘 듣거든. 어서 부엌으로 쳐들어가자. 맛있는 음식이 많이 있어. 오늘은 어쩐지 손님이 올 것 같아 샬로타 4세와 내가 손님 맞을 준비를 해두었거든.”
“아줌마는 언제나 부엌에 맛있는 음식을 잔뜩 만들어두시는군요. 우리 할머니도 그러시긴 하지만 그래도 간식은 먹지 못하게 하세요. 그런데…….”
폴이 생각에 잠겨 말했다.
“할머니가 간식은 안 된다고하시는데도남의 집에서는 먹어도 될까요?”
“오, 네가 그렇게 먼 길을 걸어온 뒤니까 할머니도 안 된다고 하시지는 않을 것 같은데. 평소 때와는 다르잖아.”
라벤더는 폴의 갈색 머리 너머로 앤과 눈짓을 주고받으며 말했다. “나도 간식이 좋지 못한 습관이란 것은 알아. 그래도 ‘메아리 집’에서는 자주 간식을 먹지. 샬로타 4세와 나는 좋은 식사 습관 같은 건 싹 무시하고 생각날 때마다 소화가 잘 안 될 음식을 밤낮으로 먹어도 언제나 이렇게 새파란 월계수처럼 건강하단다. 우리도 이런 나쁜 습관을 고쳐보려고 했어. 그래서 나쁜 식습관을 경고하는 기사를 보면 잊지 않도록 그걸 오려서 부엌 벽에 붙여놓기도 해봤지. 하지만 소용없었단다. 곧 또다시 먹어서는 안 된다는 걸 먹게 되는 거야. 그래도 지금까지는 안 죽고 잘 지내고 있는걸. 하긴 샬로타 4세는 자기 전에 도넛이며 고기 파이며 과일 케이크를 먹으면 꼭 나쁜 꿈을 꾼대.”
“할머니는 자기 전에 우유 한 컵과 버터 바른 빵 한 조각만 줘요. 일요일 밤에는 잼도 발라주시지만요. 그래서 언제나 일요일 밤이 되면 기뻐요. 다른 기쁜 이유가 있기도 하지만요. 저한테는 해안가 길의 일요일이 너무 길어요. 할머니는 너무 짧다고 하시면서, 우리 아빠도 일요일을 지루하게 지낸 적이 없었다고 하세요. 제 바위 사람들과 얘기를 할 수 있다면 그렇게 길지 않을 테지만 일요일 날만은 할머니가 바위 사람과 얘기를 못 하게 하시거든요. 그래서 생각을 많이 하지만 모두 종교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어요. 할머니는 일요일에는 종교적인 생각만 해야 한대요. 하지만 여기 우리 선생님은 아름다운 생각이 모두 종교적인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그것이 무슨 생각이건, 어느 날 그 생각을 했건 상관없이요. 하지만 할머니는 설교나 주일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만이 종교적인 생각이라고 여기세요. 할머니와 선생님 생각 중에 어느 것이 옳은지 정말 모르겠어요. 제 마음속에서는.”
폴은 한 손을 가슴에 대고 진지한 푸른 눈으로 라벤더의 정다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선생님 생각이 옳은 것 같아요. 하지만 할머니는 그런 생각으로 아버지를 훌륭하게 길러내셨고, 선생님은 아이를 길러본 적이 없으니까. 데이비와 도라 기르는 일을 돕고는 있지만, 아직은 그 애들이 어떻게 자랄지 모르는 일이고요. 그래서 가끔씩 저는 할머니 의견에 따르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기도 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할머니와 내가 표현 방법은 달라도 알고 보면 결국 같은 말일 거야. 그리고 할머니의 생각은 경험으로 얻은 거니까 너는 할머니 말씀에 따르면 돼. 나는 쌍둥이가 아직 어떻게 자랄지 모르니까 내가 말하는 방법이 옳다고 확신할 수 없어.”
앤이 진심으로 말했다.
세 사람은간식을 먹은 뒤 다시 정원으로나왔고, 폴은 신기한 듯메아리를 들으며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앤과 라벤더는 미루나무 아래 놓인 돌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 가을에는 떠난다고?”
라벤더가 생각에 잠겨 말했다.
“앤을 위해서는 아주 잘된 일이고 몹시 기뻐해야 하지만 나만 생각해서 그런지 난 좀 슬프구나. 많이 그리울 것 같아. 가끔씩은 친구를 만드는 게 다 무슨 소용이냐 싶을 때가 있어. 때가 되면 다시 떠나가 버리고 말잖아. 혼자일 때보다 더 큰 아픔을 남기고.”
“그건 엘리자 앤드루스 아주머니나 할 얘기지 라벤더 아주머니가 하실 얘기는 아니에요. 허전함보다 더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없어요. 하지만 전 라벤더 아주머니의 인생에서 나가버리려는 게 아니에요. 편지도 할 거고 방학을 하면 들르기도 할 거예요. 좀 피곤하고 지쳐 보이시네요.”
앤이 말했다.
“야호, 야호, 야호, 호…… 호…… 호…….”
폴이 아까부터 지치지도 않고 소리를 질러댔다. 아무리 시끄러운 고함소리도 강 건너 요정 연금술사는 소리마다 금방울과 은방울 흔드는 소리로 바꾸어 돌려보내 주었다. 라벤더는 초조한 듯 보였지만 그 아름다운 손을 흔들어주었다. 

“난 모든 것이 그저 지겨워졌어. 심지어는 메아리조차도. 내 인생에는 메아리밖에 없어. 메아리는 잃어버린 희망과 꿈과 즐거움이지. 그 메아리는 아름답지만 날 조롱하는 것 같아. 오, 앤, 내가 손님을 두고 이런 말을 하다니 어떻게 된 모양이야. 나이를 먹어 초조해진 거지. 이러다간 60살쯤 되면 아주 고약스러운 할머니가 되겠어. 하지만 푸른 환약을 먹으면 아마도 좀 나아지겠지.”
그때 간식이 끝난 후부터 보이지 않던 샬로타 4세가 돌아와 존킴벌씨네 목장 위쪽으로 철 이른 딸기가 빨갛게 익었으니 앤에게 따러 가자고 했다.
“차와 함께 곁들일 딸기라! 내가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늙은 것만은 아닌 게로군. 푸른 환약 따윈 한 알도 필요 없겠어. 둘이 딸기를 따 가지고 오면 여기 은빛 미루나무 아래서 같이 차를 마시자구. 집에서 직접 만든 크림을 준비해둘게.”
라벤더가 외쳤다.
앤과 샬로타 4세는킴벌씨네 목장으로 갔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목장은 벨벳처럼 부드럽고 제비꽃 화원처럼 향기로웠으며 보석처럼 반짝이는 황금빛 초원이었다.
“여기 공기는 너무 달콤하고 신선해. 내가 햇빛을 들이마시고 있는 기분이야.”
앤이 숨을 깊이들이쉬며말했다.
“네, 정말 그래요. 저도 똑같은 기분이에요.”
만일 앤이 대자연 속의 펠리컨 같은 기분이 든다고 했더라도 똑같은 기분이라고 말했을 샬로타 4세가 맞장구를 쳤다. 앤이‘메아리 집’을 다녀간 후면 샬로타 4세는 언제나 부엌 위에 있는 자기의 조그만 다락방으로 올라가서 거울을 보며 앤의 말투와 표정과 행동을 그대로 연습했다. 샬로타가 흡족해할 만큼은 되지 않았지만 그런대로 성공을 거둔 셈이다. 무엇이든 연습하면 숙달하게 된다고 학교에서도 배우지 않았던가. 자기도 언젠가는 턱을 고상하게 치켜드는 법이며 별처럼 반짝이는 눈빛, 바람에 나뭇가지가 살랑거리는 것 같은 걸음걸이를 배울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앤을 관찰하는 동안은 별로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샬로타 4세는 앤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숭배했다. 그것은 앤이 눈에 띄게 예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앤의 달빛 같은 회색 눈과 창백한 얼굴이 주는 매력보다는 다이애나 배리의 진홍빛 볼과 검은색 곱슬머리가 훨씬 샬로타 4세의 마음에 들었다.
“전 예쁜 것보다 아가씨 같은 얼굴이 더 좋아요.”
샬로타는 진심으로 앤에게 말했다.
앤이 그 말에 담긴 부정적인 의미는 내버려두고 달콤한 찬사의 말만을 음미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앤은 이제 이런 식의 상반된 의미가 섞인 찬사를 받는 일에도 익숙해졌다. 앤의 외모를 평가하는 의견은 좀처럼 일치되지 못했다. 앤이 예쁘다는 말을들었던사람은 앤을 보고 실망했으며 앤이 평범하다는 말을 들은 사람은 어떻게 앤을 보고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느냐고 의아해했다. 앤은 자기가 결코 미인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거울을 들여다보면 코에 일곱 개의 주근깨가 박힌 작고 창백한 얼굴이 보일 뿐이었다. 거울은 감정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변하는 표정이며, 장밋빛 광채, 꿈을 꿀 때나 웃고 있을 때마다 달라지는 커다란 눈의 매력은 보여주지못했다.
미의 기준을 놓고 따지자면, 앤은 엄밀히 말해서 미인이아니었다. 그러나 앤에게는 어떻게 정의할 수 없는 매력과 개성이 있어 모두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앤에게서 느껴지는 절로 미소 짓게 만드는 소녀다움과 비범함에 사람들은 앤이 충분히 예쁘다고 생각했다. 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앤의 가장 큰 매력이 설사 자기들이 그것을 깨닫고 있지 못하더라도 어떤 가능성, 앞으로 앤이 뭔가 해낼 것이란 가능성이 엿보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둘이 딸기를 따며 샬로타 4세는 라벤더가 걱정스럽다고 했다. 이 따뜻한 마음을 지닌 아이는 숭배하는 주인의 건강을 진정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라벤더 마님은 건강이 좋지 않아요, 앤 아가씨. 어디가 아프다고 말씀은 하시지 않지만 건강이 좋지 않은 것만은 분명해요. 얼마 전부터 예전 같지가 않아요. 아마 앤 아가씨와 폴이 지난번 다녀간 이후로 그런 것 같아요. 그날 밤에 감기에 걸리셨나 봐요. 두 분이 돌아간 후에 마님은 얇은 숄만 걸치고 오랫동안 정원에 혼자 나가 계셨거든요. 길에 눈이 잔뜩 쌓여 있었으니까 몹시 추웠을 거예요. 그 이후로 내내피곤해하고 외로워하는 것 같았어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는 것 같았고요. 손님이 올 거라면서 음식을 만들지도 않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앤 아가씨가 왔을 때만 조금 기운을 차리시는 것 같아요. 그리고 가장 심한 건요, 아가씨.”
샬로타 4세가 정말 심각하게 이상하고 끔찍한 증상이라도 말하려는 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제가 물건을 깨뜨려도 화를 안 내셔요. 어제도 있잖아요, 제가 책장 위에 올려둔 초록색과 노란색으로 된 항아리를 깨뜨렸거든요. 라벤더 마님의 할머니가 영국에서 가져온 항아리라 굉장히 소중히 여기는 물건이에요. 저도 조심조심 항아리의 먼지를 털었는데 그만 책장에서 툭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어요. 제가 잡으려고 했지만 못 잡고 말았거든요. 전 너무 죄송하고 무서웠어요. 심하게 혼이 날 거라고 생각했죠. 전에는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라벤더 마님은 방에 들어와서 보시고도 건성으로 ‘괜찮아, 깨진 것들을 주워 밖에 내다버려.’ 하시지 뭐예요. 할머니가 영국에서 가져온 물건이 아니라는 듯 이요. 틀림없이 어디가 아픈 거예요. 그런데 저 말고는 아무도 돌봐드릴 사람이 없으니 걱정스러워 견딜 수가 없어요.”
샬로타 4세의 눈에 눈물이 일렁였다. 앤은 이 빠진 분홍색 컵을 들고 있는 아이의 작은 손을 다정하게 어루만져주었다.
“나도 라벤더 아주머니에게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샬로타. 여기서 너무 오래 혼자 지내셨어. 어디 여행이라도 가보시도록 라벤더 아주머니를 설득해볼까?”
샬로타는 좋은 생각이 아니란 듯이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건 안 될 거예요, 아가씨. 라벤더 마님은 어디 가는 걸 싫어하셔요. 찾아가는친척 집이 세 집이나 있는데 그것도 가족 간의 예의상 가는 거라고 말씀하세요. 지난번친척 집에 다녀오셔서는 예의상 가야 한대도 이제는 가지 않겠다고 한걸요. 그리고 저한테 이런 말씀도 하셨어요. ‘난 외로움과 사랑에 빠져 내 집이 견딜 수 없이 그리워, 샬로타. 담쟁이덩굴과 무화과나무가 있는 내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을 거야. 우리 친척들은 나를 노처녀로 만들지 못해 안달이야. 기분이 좋질 않다고.’ 아가씨. 라벤더 마님이 기분이 좋질 않다고 했어요. 그래서 전 마님에게 어딜 가시라고 하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요.”
“우리가 뭐든 해봐야 해. 방학이 되면 내가 한 주를 몽땅 여기서 보내야겠어. 날마다 소풍도 가고, 여러 가지 재미있는 상상을 하면서 진짜인 척 놀기도 하자. 그럼 아주머니의 기분도 좀 좋아지실 거야.”
분홍색 컵에 마지막 딸기를 따 담으며 앤이 마음을 굳힌 듯 말했다.

“그럼 아주 재미있을 것 같아요, 앤 아가씨.”
샬로타 4세가 신이 난다는 듯 소리를 쳤다. 자기를 위해서뿐만이 아니라 라벤더를 생각해서 기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 주일 내내 앤을 보고 연습하면 앤처럼 움직이고 행동하는 법을 많이 배울 수도 있을 것이다.
앤과 샬로타가‘메아리 집’으로 돌아왔을 때 라벤더와 폴은 부엌에서 작은 탁자를 정원으로내놓고차 마실 준비를 마쳐놓았다. 보송보송한 하얀 구름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푸른 하늘 아래서 숲의 그림자가 길게 누워 속살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먹었던 그 딸기와 크림처럼 맛있는 것은 이 세상에 또 없었다. 차를 마신 다음 앤은 샬로타를 도와 부엌에서 설거지를 했고 라벤더는 폴과 함께 돌 벤치에 앉아 폴의 바위 사람 얘기를 들었다. 라벤더는 폴의 이야기를 아주 잘 들어주었지만 폴은 다정한 라벤더가 마지막으로 쌍둥이 선원 이야기를 할 때는 갑자기 흥미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줌마,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폴이 진지하게 물었다.
“내가 어떻게 봤는데, 폴?”
“저를 통해서 마음속에 있는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요.”
폴이 말했다. 가끔씩 이 아이는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 이 아이 옆에서 비밀을 간직하기 어려운 때가 있었다.
“넌 내가 오래전에 알고 있던 누군가를 생각나게 해.”
라벤더가 아련한 눈빛으로 말했다.
“아줌마가 젊었을 때요?”

“그래, 내가 젊었을 때. 내가 너한테는 아주 늙어 보이지, 폴?”
“전 아직 그 점에는 마음을 정하지 못했어요.”
폴이 아주 씩씩하게 말했다.
“머리는 늙어 보여요. 전 젊으면서 머리가 하얀 사람을 본 적이 없거든요. 하지만 눈은, 특히 웃을 때면 우리 선생님만큼이나 젊고 아름다워요. 제가 해줄 말이 있는데요, 라벤더 아줌마.”
폴의 목소리는 판사의 목소리만큼이나 진지했다.
“제가 생각하기에 아줌마는 아주 멋진 엄마가 될 것 같아요. 눈이 그래요. 우리 엄마 눈이 항상 그랬거든요. 아줌마는 아들이 없어서 참 안됐지만요.”
“나한테도 꿈속의 아들은 있단다, 폴.”
“아, 그래요? 몇 살인데요?”
“네 나이쯤 됐을 거야. 참,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내 꿈속에 있었으니까 너보다 나이가 많겠구나. 하지만 내가 나이를 먹지 못하게 해서 아마, 열한 살인가 열두 살 때부턴 더 크지를 못했지. 그 애가 나이를 먹도록 내버려두면 나중에 어른이 돼서 내 곁을 떠나려 할지도 모르잖니.”
“네, 그렇겠군요.”
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바로 꿈속 사람들의 좋은 점이에요. 나이를 맘대로 할 수가 있잖아요. 이 세상에서 꿈속 사람들을 갖고 있는 사람은 오로지 아줌마, 우리 예쁜 선생님, 그리고 저뿐이에요. 우리 셋이 서로를 알고 있다는 게 너무 재밌고 좋지 않아요? 하지만 비슷한 사람끼리는 항상 서로를 알아보고 찾아내는 법이죠. 우리 할머니도 꿈속 사람을 가져본 적이 없고 메리 조 누나는 제 머리가 이상하대요. 하지만 꿈속 사람을 갖는다는 건 굉장히 멋진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렇죠, 라벤더 아줌마? 아줌마의 꿈속 아이 이야기 좀 해주세요.”
“그 아이는 파란 눈에 곱슬머리를 가졌지.아침마다몰래 내 방으로 들어와 나에게 입맞춤을 하며 나를 깨워줘. 그러곤 이 정원에서 온종일 나랑 같이 놀지. 어떤 놀이를 하냐면, 달리기 시합도 하고, 메아리와 이야기를 하거나, 내가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해. 그러다 보면 어느새 황혼이 찾아오지…….”
“저도 알아요.”
폴이 얼른 라벤더의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그 아이가 아줌마 곁으로 와서 옆에 앉아요. 열두 살이면 무릎에 앉기는 너무 큰 아이니까요. 그리고 머리를 아줌마 어깨 위에 올려놓죠. 그러면 아줌마는 아이를 꼭 안아줘요. 꼭 안고 볼을 아이의 머리에 대죠. 예, 바로 그렇게요. 오, 라벤더 아줌마가 제대로 알고 있군요.”
앤이 돌집에서 나오면서 둘의 모습을 보았다. 라벤더의 얼굴을 보니 둘을 방해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그만 집에 가야 할 시간이야, 폴. 어두워지기 전에 가려면. 라벤더 아주머니, 제가 곧‘메아리 집’에 다시 와서 한 주일을 몽땅 머물 생각이에요.”
“한 주일을 머물러 오면 내가 두 주일을 붙들고 있을 거야.”

라벤더가 겁을 줬다.




28

마법의 성으로 돌아온 왕자님





드디어 학교의 마지막 날이 왔다. 앤의 학생들은 모두 학기말 시험에 보기 좋게 통과했다. 아이들이 송별사를 낭송했고 작별 선물로 석판을 주었다. 송별식에 참석한 여자아이들과 부인들 모두가 눈물을 흘렸으며 남자아이 중에도 항상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만 아이들이 있었다.
하몬 앤드루스 부인, 피터 슬론 부인, 윌리엄 벨 부인이 같이 집으로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들이 앤 선생님과 정이 아주 많이 들었는데 떠나게 돼서 아쉬워요. 하지만 내년에 오는 선생님도 역시 좋은 선생님이니까 뭐 괜찮겠죠.”
슬론 부인이 한숨을 쉬며 말하고는 얼른 한마디 덧붙였다. 항상 한숨 쉬는 버릇이 있는 슬론 부인은 농담을 하면서조차 한숨으로 마무리를 짓곤 했다.
“제인은 자기 임무를 틀림없이 다할 거예요. 그 애라면 학생들에게요정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숲 속을헤매다니며 시간을 낭비하지도 않을 거예요. 게다가 그 아이는 장학관의 우수교사 명부에 올랐잖아요. 지금 뉴브리지 사람들은 제인이 떠난다고 난리들이에요.”

앤드루스 부인이 좀 으스대듯 딱딱한 표정으로 말했다.
“앤이 대학에 가게 돼서 잘됐어요. 그렇게 대학에가고 싶어 했으니 앤에게는 아주 잘된 일이지요.”
벨 부인이 말했다.
“글쎄, 저로서는 잘 모르겠네요.”
앤드루스 부인은 그날 그 누구 말에도 뜻을같이하지않겠다고 단단히 마음이라도 먹은 모양이었다.
“난 앤이 더 이상 교육을 받아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앤은 길버트 블라이드와 결혼하게 될 텐데, 만일 길버트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도 앤에게 반해 있다면요. 라틴어와 그리스어가 결혼 생활에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대학에서 남편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그런 것이나 가르친다면 또 모르겠지만.”
하몬 앤드루스 부인은 남편 다루는 법을 아직도 모른다고 에이번리의 말 많은 사람들이 속닥거리고 있으니 앤드루스 집안은 그리 행복하고 모범적인 가정이라고 할 수 없었다.
“앨런 목사님도 샬럿타운에서 초청을 받았으니, 곧 우리 교회를 떠나겠지요.”
벨 부인이 말했다.
“9월이 되어야 떠날 거예요. 목사님이 떠나시면 우리 마을로서는 크나큰 손실이죠. 나는 앨런 부인이 목사의 아내로서는 너무 화려한 옷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만 세상에 완전한 사람이란 없죠. 오늘 해리슨 씨가 얼마나 단정하게 차려입고 나왔는지 봤어요?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 달라질 수 있죠? 일요일마다 교회도 나오고 목사님 월급을 드리기 위한 기부금도 낸대요.”

“오늘 보니 폴 어빙이 아주 많이 컸더군요. 처음 이 마을에 왔을 때는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이더니, 오늘 아주 못 알아볼 뻔했어요. 제 아버지를 꼭 빼닮았던데요.”
앤드루스 부인이 말했다.
“아주 영리하기도 해요.”
벨 부인이 말했다.
“영리하긴 해도 이상한 소리를 한대요. 지난주에 우리 그레이시가 집에 와서 그러는데 폴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더래요. 바닷가에 어떤 사람들이 산다는 얘기였는데 전부 지어낸 얘기래요. 내가 그레이시더러 그 얘기를 믿어서는 안 된다고 했더니, 폴도 믿으라고 한 얘기는 아닌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믿으라고 한 얘기도 아니면 도대체 그 얘기를 왜 했죠?”
앤드루스 부인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앤이 그러는데 폴은 천재래요.”
슬론 부인이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죠. 미국사람들이야 그 속을 알 수가 없으니.”
앤드루스 부인이 말했다. 앤드루스 부인은 이 천재라는 말의 의미를 사람들이 흔히 특이한 사람을 일러 기인22)이라고 말할 때의 그 의미로만 생각했다. 지금도 앤드루스 부인은 폴네 집에서 일하는 메리 조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폴이 좀 머리가 이상한 아이라는 뜻으로 그렇게 말했다.
한편 앤은 교실에 혼자 앉아 2년 전 처음 왔던 날과 마찬가지로 손으로 턱을 괸 채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을 억지로 참으면서 창밖 ‘반짝이는 호수’를 바라보았다. 학생들과 헤어지는 일이 너무 가슴 아프게 느껴져 잠시 동안은 대학에 대한 매력마저 뒷전으로물러나 버렸다. 아직도애너터벨이 목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았고 ‘다른 선생님은 절대로 선생님만큼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 절대로.’ 하던 어린아이 같은 그 목소리가 귓전에서 떠나지 않았다.
2년 동안 앤은 온 마음을 다해 헌신적으로 일했다. 실수도 많이 저질렀지만 그 실수로 인해 배우기도 많이 배웠다. 그리고 그 보람도 있었다. 분명 자기가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오히려 학생들로부터 배우는 일이 더 많다고 느끼기도 했다. 부드러움, 자제심, 아이들만의 때 묻지 않은 지혜, 순수한 마음과 같은 것들이다. 아이들의 마음에 커다란 야심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을지라도 의도적인 가르침에 의해서라기보다 앤의 다정한 성품으로 가르친 것도 많았다. 거짓과 악이 판치는 세상에 물들지 않고 진실과 예의와 선함을 간직한 채 살아야 아름답고 감사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아이들의 미래에 반드시 필요한 가르침이었다. 학생들이 그런 교훈을 배웠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이름이며 장미전쟁의 연대를 잊은 뒤에도 그 가르침만은 잊지 않고 실천할 것이다.
“내 인생의 한 장이 닫혔어.”
앤은 책상을 열쇠로 잠그며 소리 내어 말했다. 순간 슬픈 마음이었지만 ‘닫힌 장’이라는 낭만적인 말이 약간은 위로가 되었다.
방학이 되자 앤은‘메아리 집’으로 가서 2주일을 보냈고, 모두에게 좋은 시간이었다.
앤은 라벤더를 시내로 데리고 나가 새 드레스를 만들 오건디 옷감을 사도록 했다. 이어서 재단을 하고 옷을 만드는 일로 한바탕 법석을 떨었다. 신이 난 샬로타 4세는 옷감을 잘라내고 어질러진 주변을 쓸었다. 아무것에도 통 신이 안 난다고 푸념했던 라벤더도 아름다운 드레스를 만드는 사이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내가 참 경박하고 어리석은 사람인가 봐. 새 옷을 만든다고 이렇게 좋아하다니.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물망초빛 오건디라고 하더라도 말이야. 정말 부끄러운 일이지. 아무 걱정도 없이 살고, 해외 선교 헌금을 많이 낼 수 있다 해도 이렇게 기분이 좋지는 않을 거야.”
‘메아리 집’에서 보낸 지 일주일쯤 지난 후 앤은‘초록 지붕 집’으로 가서 쌍둥이의 양말도 기워주고 그동안 밀린 데이비의 질문도 해결해주었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서는 폴 어빙을 만나려고 해안가로 내려갔다. 거실의 낮은 창가를 지나갈 때 폴이 누군가의 무릎에 앉아 있는 것이 언뜻 보였다. 다음 순간 폴이 복도를 뛰어나왔다.
“오, 선생님, 무슨 일이 있는지 아세요? 정말 멋진 일이에요, 아빠가 오셨어요. 아빠가요! 어서 들어오세요. 아빠, 우리 예쁜 선생님이야. 우리 아빠 알죠, 선생님?”
스티븐 어빙이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왔다. 키가 크고 잘생긴 중년 남자로, 회색 머리에 깊고 푸른 눈은 우수를 띠었고 강해 보이지만 슬픈 듯 보이는 얼굴에 특히 턱과 이마가 아름다웠다. 로맨스의 영웅다운 모습에 앤은 너무나도 만족스러워 가슴이 다 떨려왔다. 로맨스의 주인공을 만났는데 대머리라거나 등이 굽었다거나 아니면 다른 이유로 남자다운 멋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실망스럽겠는가? 라벤더의 로맨스 상대가 그렇게 멋진 사람이 아니었다면 정말이지 끔찍했을 것이다.
“폴이 늘 말하던 그 아름다운 선생님이시로군요.”
어빙 씨가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폴이 편지에 선생님 얘기를 하도 많이 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 같습니다. 폴에게 여러 가지로 잘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선생님은 폴에게 꼭 필요한 걸 주셨어요. 어머니는 훌륭하고 다정한 분이시지만, 스코틀랜드식으로 엄하고 융통성 없이 아이를 대해서 우리 폴의 성격에 맞지를않아요. 다행히 선생님이 계셔서 우리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보충해주셨어요. 우리끼리 얘기지만 덕분에 폴이 지난 2년 동안 엄마 없는 아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훌륭하게 교육을 받았습니다.”
칭찬을 받고 기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어빙 씨로부터 이런 감사의 말을 듣고 앤의 얼굴은 활짝 핀 장미꽃처럼 붉어졌으며 이 모습에 세상살이에 지친 어빙 씨는 빨간 머리와 반짝이는 눈동자를 가진 이 작은 시골 여선생처럼 괜찮고 아름다운 아가씨는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폴은 둘 사이에 행복하게 눈을 반짝이며 앉아 있었다.
“아빠가 오실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 했어요.”
폴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할머니도 몰랐어요. 그래서 깜짝 놀랐죠. 다른 때 같으면 깜짝 놀라는 일은 싫어요.”
폴이 갈색 머리를 흔들어 보였다.
“기다리는 즐거움이 없어지잖아요. 하지만 이번만큼은 괜찮아요. 아빠는 제가 잠든 사이 한밤중에 오셨어요. 놀란 할머니와 메리 조 누나가 정신을 차린 다음에 아빠는 할머니와 함께 2층으로 올라와 저를 깨우지는 않고 보려고만 했죠. 그런데 제가 벌떡 일어나 아빠를 보았어요.그러고는아빠에게 달려들었죠.”
“꼭 곰처럼 매달렸지. 난 내 아들이 이렇게 많이 자라고 튼튼해졌을 줄 몰랐어.”

어빙 씨가 웃으며 폴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아빠가 돌아오신 것을 저랑 할머니 중에 누가 더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할머니는 온종일 부엌에서 아빠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드시거든요. 메리 조 누나에게만 맡겨둘 수 없다면서요. 그게 할머니가 기뻐한다는 표시예요. 저는 아빠랑 앉아서 얘기를 하는 거고요. 하지만 지금은 좀 나가봐야 해요. 메리 조 누나를 대신해서 소를 몰고 와야 하거든요. 제가 매일 해야 할 일이에요.”
폴이 말을 계속했다.
폴이 자기 할 일을 마치려고 뛰어나간 다음 어빙 씨는 앤과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앤은 어빙 씨가 여기 앉아 얘기를 하고 있지만 어떤 다른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고 느꼈다.
“폴이 지난번에 보낸 편지로는 그 애가 선생님과 그래프턴의 돌집으로 나의 옛 친구인 라벤더를 만나러 갔다고 하던데요. 라벤더를 잘 아시나요?”
“네, 그래요. 그분은 저의 아주 친한 친구지요.”
앤은 가슴에서 방망이질하는 걷잡을 수 없는 전율을 애써 감추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로맨스가 드디어 길모퉁이까지 와서 이쪽을 살피고 있음을 앤은 직감했다.
어빙 씨가 일어나 창가로 가더니 거친 바람과 함께 황금빛 파도가 휘몰아치는 바다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작고 어두운 방 안이 잠시 쥐 죽은 듯 고요에 휩싸였다. 이윽고 어빙 씨가 돌아서서 사려 깊은 앤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다음 돌아서 앤을 바라보는 어빙 씨의 얼굴에는 절반은 장난스럽고 절반은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얼마나 알고 계신지 궁금하군요.”

그가 말했다.
“모두 알고 있어요. 라벤더 아주머니와 저는 아주 친하게 지내거든요. 그분은 이런 얘기를 아무에게나 하지 않아요. 우리는 서로 영혼이 통하는 친구거든요.”
앤이 얼른 대답했다.
“네, 그렇군요. 그럼 제가 한 가지 부탁을 좀 하겠습니다. 라벤더를 만나고 싶어요. 라벤더가 허락한다면, 제가 찾아가도 좋을지 물어봐 주실래요?”
물론 앤은 그 부탁을 들어줄 것이다. 오, 세상에, 왜 안 들어주겠는가! 이거야말로 진정한 로맨스인걸. 시와 소설과 꿈의 매력을 고스란히 갖추고 있는 진정한 로맨스다. 6월에 피어났어야 할 장미가 조금 늦게 10월에 피어난 것과 같다. 그래도 장미임에는 틀림없다. 한가운데 금빛을 띤 꽃술에 아름답고 달콤한 향기로 가득한 장미꽃. 다음 날 아침 앤은 즐거운 사명을 띠고 총총걸음으로 너도밤나무 숲을 지나 그래프턴으로 갔다. 라벤더는 뜰에 나와 있었다. 앤은 너무 흥분해 손이 얼음처럼 차갑고 목소리는 떨려 나왔다.
“라벤더 아주머니, 할 말이 있어요. 아주 중요한 말이에요. 무슨 일인지 맞춰보세요.”
앤은 라벤더가 이 일을 알아맞히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라벤더의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평소의 화려한 색채와 광채로 빛나던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스티븐 어빙이 돌아왔군.”
“어떻게 알았어요? 누가 얘기를 해줬나요?”
앤이 라벤더를 놀래주려던 기대가 사라져 버려 실망스럽게 외쳤다.
“아무한테서도 듣지 않았어. 앤의 말을 듣고 그럴 거라고 짐작했을 뿐이지.”
“어빙 씨가 아주머니를 만나보고 싶어 해요. 찾아와도 된다고 전해드려도 될까요?”
“그럼, 물론이지. 그가 여기 오면 안 될 이유가 어디 있겠어. 오로지 옛 친구로서 찾아오는 건데.”
라벤더가 말을 더듬거렸다.
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가 라벤더의 책상에 앉아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스티븐 어빙 씨에게 편지를 썼다.
“소설 같은 이야기를 실제로 보다니 정말 기쁜 일이야. 모든 일이 다 잘될 거야. 잘되어야 해. 폴에게는 바라던 대로 어머니가 생기고 모두들 행복해질 거야. 하지만 어빙 씨가 라벤더 아주머니를 멀리 데려가 버리겠지. 그러면 이 작은 돌집은 어떻게 되는 거야. 그러니까 이 일에도 양면이 있구나. 세상일이 다 그렇지.”
앤이 중얼거렸다. 중요한 편지를 다 쓰자 앤이 직접 그 편지를 그래프턴 우체국으로 가져가 우체부를 기다려 에이번리 우체국으로 배달해주도록 부탁했다.
“아주 중요한 편지예요.”
앤이 걱정하며 다짐을 해두었다. 우체부는 좀 무뚝뚝한 노인으로 어느 모로 보나 전혀 큐피드의 심부름꾼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기억력을 믿을 수밖에 다른 도리는 없었다. 어쨌거나 그는 잊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고 앤은 그 말에 만족해야 했다.
샬로타 4세는 그날 오후 돌집에 무슨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고 자기만 그 일을 모르고 있다고 느꼈다. 정신이 산만해 보이는 라벤더는 뜰을 서성거렸다. 앤도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안정을 찾지 못하고 오락가락하거나 위아래 층을오르락내리락했다. 샬로타 4세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지경까지 참았지만, 앤이 꿈을 꾸듯 몽롱한 눈으로 볼일도 없이 세 번째로 부엌에 들어오자 마침내 참지 못하고 앤 앞을 막아섰다.
“앤 아가씨, 지금 라벤더 마님과 아가씨에게 무슨 일이 있죠? 분명히 뭔가 비밀이 있어요. 제발 부탁이니 무슨 일인지 말 좀 해주세요.주제넘은말인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그동안 그렇게 잘 지내왔는데 저한테만 말을 안 해주고 정말 너무해요.”
샬로타 4세가 정말 분한지 파란 리본을 휙 젖히며 말했다.
“오, 샬로타, 이런, 이게 내 비밀이었다면 내가 다 얘기해주었을 거야. 하지만 이건 라벤더 아주머니의 비밀이야. 그렇지만 내가 이건 말해줄게. 만일 일이 잘못된다면 절대로 이 얘기를 남에게 해서는 안 돼. 있잖아, 오늘 밤에 왕자님이 오셔. 아주 오래전에 왔지만, 사소한 일로 다시 가버렸고 길을 잃고 헤매다 다시 오시는 거야. 마법에 걸린 성으로 돌아오는 마법의 길을 잃어버린 거야. 공주님은 왕자님을 그리워하면서 내내 울고 지내셨지. 하지만 결국은 왕자님이 길을 기억해냈고 공주님은 지금 기다리고 계시는 거야. 왕자님이 아니면 아무도 공주님을 성에서 데리고 나갈 수가 없으니까.”
“오, 앤 아가씨, 시적으로 말고요, 산문적으로 말해보세요.”
샬로타가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앤이 웃었다.

“산문적으로 말하면 라벤더의 옛 친구가 오늘 밤에 오신대.”
“그분의 옛 애인이요?”
샬로타가 물었다.
“그래,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 폴의 아버지지, 스티븐 어빙 씨. 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잘되길 빌어보자고, 샬로타.”
앤이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분이 라벤더 마님과 결혼했으면 좋겠어요. 이 세상에는 본디 독신녀로 살게 태어난 사람도 있는데 제가 바로 그런 사람이 아닌가 싶어요, 앤 아가씨. 왜냐하면 저는 남자들한테 별로 참을성이 없거든요. 하지만 라벤더 마님은 그렇지 않아요. 저는 몹시 걱정이 돼요. 제가 다 커서 보스턴으로 떠나면 어떻게 할지. 우리 집에는 이제 남은여자아이도 없는데, 낯선 애가 와서 라벤더 마님의 공상을 비웃고, 물건들을 아무 데나 놓고 다닌다고, 또 샬로타 5세라고 부르는 걸 싫어하면 어쩌죠? 저처럼 접시를 잘 깨먹는 애가 오기는 쉬워도, 저처럼 라벤더 마님을 좋아하는 아이가 오기는 쉽지 않을 거예요.”
샬로타가 솔직하게 걱정을 털어놨다.
말을 마치자 이 충직한 작은 소녀는 코를 훌쩍거리며 아궁이로 뛰어갔다.
그날 밤 세 사람은 보통 때처럼 저녁 식탁에 마주 앉았으나 누구도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저녁 식사 후에 라벤더는 자기 방으로 올라가 새로 만든 물망초 빛깔 오건디 드레스를 입었다. 앤이 라벤더의 머리를 손질해주었다. 둘은 너무 흥분해 있었지만, 라벤더는 차분하고 무관심한 척했다.
“내일은 잊지 말고 커튼을 꿰매야겠어.”
라벤더는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커튼을 들어 살펴보며 이 일이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이라도 되는 듯 말했다.
“이 커튼은 값보다 질기지 못한 것 같아. 저런, 샬로타가 또 층계 난간을 닦지 않았군. 단단히 일러야겠어.”
앤이 현관 층계에 앉아 있는데 스티븐 어빙이 뜰을 지나 집 쪽으로 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곳은 시간이 멈추어버린 것 같군요. 내가 25년 전에 왔을 때와 정원이고 집이고 달라진 게 없어 보여요. 다시 젊어진 기분이 들어요.”
감개가 무량한 듯 주변을 돌아보며 어빙 씨가 말했다.
“마법에 걸린 성에서는 시간이 원래 멈추어버린다는 걸 모르세요. 시간은 왕자님이 오셔야 다시 움직인답니다.”
어빙 씨는 슬픈 듯 미소를 지으며 젊음과 희망이 넘치는 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가끔씩은 왕자님이 너무 늦게 나타나기도 하지요.”
어빙 씨는 앤이 지금 한 이야기를 쉬운 말로 다시 해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 역시 영혼이 통하는 친구 중 한 사람으로 앤이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했다.
“오, 아니에요, 진짜 왕자님이 진정한 공주님을 찾아온 거라면.”
앤이 빨간 머리를 단호하게 흔들며 말했다. 그러고는 응접실 문을 열어 어빙 씨를 들어가도록 한 다음 다시 문을 닫았다. 복도에서는 샬로타 4세가 눈짓 손짓을 하며 웃고 있었다.
“오, 앤 아가씨, 부엌 창문으로 내다봤는데, 정말 멋진 분이에요. 나이도 라벤더 마님과 딱 어울려요. 문 뒤에서 좀 엿들으면 안 될까요?”
“그런 짓 하면안 되지, 샬로타. 우리, 유혹에 지지 않도록 저쪽으로 가자.”
앤이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아요. 그렇다고 그저 서성거리며 기다리는 것도 못 견디겠어요.”
샬로타가 한숨을 쉬었다.
“청혼을 하지 않으면 어떡하죠, 아가씨? 남자들이란 그 속을 알 수가 없잖아요. 제 큰언니인 샬로타 1세는 옛날에 자기가 어떤 남자와 약혼했다고 믿었대요. 그렇지만 그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대요. 그래서 언니는 이제 절대로 남자를 믿지 못하겠다고 했어요. 다른 경우도 있었어요. 어떤 남자가 한 여자를 정말로 좋아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남자가 평생 원하던 여자는 그 여자의 언니였다는 거예요. 남자는 자기 마음을 모르는 걸까요, 앤 아가씨? 그럼 여자는 도대체 남자 마음을 어떻게 믿을 수 있죠?”
“부엌에 가서 은수저나 닦자. 그건 생각이 필요 없는 일이잖아. 오늘 밤은 생각을 전혀 할 수가 없어. 그리고 시간도 잘 갈 거야.”
앤이 말했다.
한 시간이 지나갔다. 앤이 반짝반짝 빛나는 마지막 숟갈을 내려놓았을 때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둘은 순간 서로의 눈에서 위안을 구했다.

“오, 앤 아가씨, 이렇게 일찍 어빙 나리가 가버리는 거라면 아무 일도 없는 거예요. 그리고 앞으로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샬로타가 울먹였고 둘은 얼른 창가로 달려갔다. 어빙 씨는 떠나려는 게 아니었다. 그와 라벤더가 천천히돌의자쪽으로 나 있는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오, 앤 아가씨, 어빙 나리가 라벤더 마님의 허리를 안고 있어요. 아마 청혼했을 거예요. 하지만 라벤더 마님이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은 거예요.”
샬로타 4세가 들뜬 목소리로 속삭였다.
앤은 샬로타 4세의 통통한 허리를 잡고 둘 모두 지칠 때까지 부엌을 빙빙 돌며 춤을 추었다.
“오, 샬로타,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딸도 아니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예언할 테니 잘 들어. 단풍잎이 빨갛게 물들기 전에 이 돌집에서 결혼식이 있을 것이로다. 더 쉬운 말로 해주길 바라니?”
앤이 외쳤다.
“아니요, 이해할 수 있어요. 결혼식은 시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앤 아가씨, 지금 울고 있잖아요! 왜 울어요?”
샬로타가 말했다.
“오, 이건 너무 아름다운 이야기야, 마치 소설 같아. 너무 낭만적이고 슬픈 이야기. 너무나 멋진 이야기이지만 이 이야기엔 어쩐지 슬픈 데도 있어.”
앤이 눈물이 흐르는 눈을 깜박거리며 말했다.

“그야 결혼이 모험이기는 하죠. 하지만 이 세상에는 남편보다 더 애먹이는 것이 얼마든지 있어요.”
샬로타 4세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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