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3권 5~6

나단비 | 2024.03.25 05:42:50 댓글: 0 조회: 84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6360
5
집에서 온 편지





레드먼드에 온 첫 3주 동안 앤과 프리실라는 낯선 땅에 살고 있는 이방인 같은 느낌으로 지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인가 이것저것 관심이 생겼다. 레드먼드, 교수, 수업, 학생들, 공부, 인간관계, 조각조각 따로 놀던 삶의 파편들이 다시 조화를 이루기 시작했다. 교실에서 만나는 학생들도 서로 무관한 개인의 집합이 아니라 모두 같은 입장이란 생각이 들었다. 같은 신입생 정신으로 같은 것을 외치고, 똑같은 호기심과 똑같은 반감을 느끼며, 똑같은 야망을 공유하는 공동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매년 열리는 문과 대학 대항전에 출전한 신입생들은 2학년과 대항해 승리를 거두어 다른 동급생들의 존경을 얻었다. 스스로의 커다란 자신감을 얻은 것은 물론이었다. 지난 3년 동안은 언제나 2학년이 승리를 거두었다. 1학년 휘장 위에 승리의 전단이 나붙었고, 그 공로는 전략적인 통솔력을 발휘한 길버트 블라이드에게로 돌아갔다. 길버트는 그 대회 참가자들을 새로운 기술을 고안해 이끌어 2학년을 무찌르고 1학년에게 승리를 안긴 주인공으로 칭송되었다. 그 탁월한 통솔력의 보상으로 길버트 블라이드는 책임감과 영광의 자리인 1학년 대표로 선출되었다. 적어도 신입생의 시각으로 봤을 때는 모두가 부러워하고 탐내는 자리였다. 길버트는 또한 레드먼드의 우수학생 모임인 ‘램스’에도 초대되었다. 1학년 학생에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 영광이었다.

램스의 통과의례로써 길버트는 온종일 여자아이들이 햇볕을 가리려고 쓰는 커다란 모자와 주름이 풍성하고 화려하게 꽃무늬가 수놓인 앞치마를 두르고 킹스포트 시내를 행진해야 했다. 그래도 길버트는 아는 숙녀들이 지나갈 때마다 예의 바르게 모자를 벗어 인사를 해주며 유쾌하게 이 일을 치러냈다. 램스에 초대받지 못한 찰리 슬론은 길버트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으며 자기라면 그렇게 굴욕적인 행동은 절대로 하지 않을 거라고 단언했다.
“앞치마를 두르고 챙 넓은 모자를 쓴 찰리 슬론이라.”
프리실라가 킥킥 웃었다.
“그럼 정말 자기 할머니와똑같아보였을 거야. 길버트는 그런 옷을 입어도 정장을 입었을 때처럼 남자다워 보였어.”
앤과 프리실라는 이런저런 모임에 참석하며 레드먼드 생활에 아주 잘 적응했다. 이는 필리파 고든 덕이 아주 컸다. 필리파의 아버지는 순수한 노바스코샤 태생으로 부자에다 어느 정도 명성도 얻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필리파의 아름다운 외모와 매력까지 더해져 레드먼드의 모든 공부와 사교 모임의 문이 이들에게 활짝 열렸다. 필리파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나 앤과 프리실라도함께했다.
필리파는 앤과 프리실라를 다 좋아했지만 특히 앤을 동경했다. 앤은 너무나 멋지고 맑은 수정처럼 속물근성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친구였다. 필리파의 무의식에서 ‘나를 사랑해줘, 내 친구들을 사랑해줘.’라고 외치고 다니기라도 하는지 별 노력 없이도 필리파는 앤과 프리실라를 동행하고 사교 생활의 폭을 넓혀갔다. 덕분에 두 에이번리 여학생은 어렵지 않게 레드먼드 한가운데로 파고들어 학교생활이 즐겁기만 했다. 당연히 필리파의 도움을 얻지 못한 다른 신입생들의 부러움을 샀다. 신입생의 운명이란 게 중심이 아닌 가장자리에만 머물러야 하는 것 아니던가.
인생을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하는 앤과 프리실라에게 필리파는 처음 만난 날부터 변함없이 사랑스럽고 기분 좋은 아이 같았다. 하지만 필리파도 제 입으로 말한 것처럼 머리를 갖고 있었다. 항상 재미있는 놀이를 찾아다니고 집에는 저녁마다 방문객이 북적이는데 필리파가 언제 어디서 공부를 하는지는 미스터리였다. 필리파를 간절히 원하는 남자들은 셀 수도 없이 많아 1학년 남학생 중에서는 몇을 빼놓고 거의 전부가 그리고 다른 학년 남학생 중에서도 상당수가 필리파의 웃음을 얻으려고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필리파는 이런 일에 아이처럼 순수하게 즐거워했고, 새로운 남자를 정복할 때마다 그 불행한 연인이 들었으면 귀가 따가우리만치 신랄할 평을 곁들여 앤과 프리실라에게 일일이 보고했다.
“알렉과 알론조는 아직 그렇게 심각한 라이벌을 못 만났나 봐.”
앤이 놀리듯 말했다.
“아직 아니야. 난 그 두 사람에게 매주 편지를 써서 내가 여기서 차지한 남자들 얘기를 해줘. 두 사람도 내 이야기를재미있어할거야, 틀림없어. 물론 가장 내 마음에 드는 한 사람은 내 손에 넣지 못했지만. 길버트 블라이드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아. 내가 쓰다듬어주고 싶은 작은 고양이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야. 난 그 이유도 잘 알고 있지. 모두가 네 탓이야, 앤 여왕님. 그래서 난 너를 미워해야 하는데 너를 미치도록 좋아만 하고 있으니. 너를 매일 보지 못하면 난 견딜 수가 없다고. 넌 지금까지 내가 만나본 어떤여자아이들과도 달라. 어느 땐 네 눈빛을 보면 내가 세상에서 가장 하찮고 경망스러운 작은 괴물딱지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래서 나도 더 현명하고 더 강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길 바라지. 그렇게 되기로 마음도 먹어봤어. 그런데 처음으로 내 눈에 들어온 어떤 남자 때문에 그걸 다잊어버렸지뭐니. 대학생활이란 건 정말 근사하지? 그런데 여기 온 첫날은 이곳이 그렇게 싫었다니 정말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그렇지 않았더라면 너랑 친해지지도 못했을 거야. 앤, 나를 조금은 좋아한다고 말을 해줘. 난 정말이지 그 말이 듣고 싶어.”
“난 너를 아주 많이 좋아하는걸. 넌 정말 사랑스럽고 귀엽고 앙증맞은 발톱도 없는 작은 고양이야. 그런데 넌 어떻게 공부할 시간을 내는 거니?”
앤이 웃었다.
필리파에게도 분명 공부할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해 모든 과목을 좋은 성적으로 통과했으니까. 심지어 남녀공학을 혐오하고, 이 대학에 여학생의 입학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심술쟁이 늙은 수학 교수마저도 필리파를 낙제시키지 못했다. 신입생 중 필리파는 모든 분야에서 앞서갔지만 영문학만큼은 아니었다. 앤이 필리파를 멀찌감치 앞질러 나갔다. 앤에게는 1학년 공부가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지난 2년 동안 길버트와 에이번리에서 꾸준하게 공부한 덕택이었다. 그 결과 앤은 다른 즐거운 활동에 더 많이 참여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시라도 에이번리와 그곳 친구들을 잊은 적은 없었다. 앤에게 있어 가장 행복한 순간은 매주 집에서 온 편지를 읽을 때였다. 집에서 처음으로 온 편지를 받고서야 비로소 앤은 킹스포트를 사랑할 수 있었으며 킹스포트에서도 마음 편안하게 지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킹스포트에 도착하기 전에는 에리번리와 킹스포트가천리만리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집에서 온 편지가 이 둘이 가까이 있다는 느낌을 주었고 에이번리의 생활과 지금의 삶을 연결해주어 그 둘이 하나이며 같은 것이란생각마저들게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가망 없이 철저하게 분리된 두 세계에 살고 있다는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첫 번째로 도착한 편지 꾸러미에는 6장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제인앤드루스와 루비 길리스, 다이애나 배리, 마릴라, 린드 부인, 데이비가 보낸 편지였다. 제인의 편지는 인쇄된 글자처럼 글씨가 또박또박 깔끔했고 ‘i’자의 점 하나도 정확하게 찍혔으며 편지글에서 재미난 문장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앤에게 시기심을 많이 느꼈던 제인은 학교에 관한 언급을일절 하지않았다. 앤이 지난번 편지에서 물었던 질문에 대한 답마저도 없었다. 그 대신 최근 코바늘로 레이스를 얼마나 길게 떴는지, 에이번리의 날씨는 어떤지, 새 드레스는 어떤 식으로 만들 생각인지, 두통이 오면 기분이 어떤지 하는 것들만 적어 보내왔다.
루비 길리스는 앤이 없어 얼마나 섭섭한지 감정이 복받치는 편지를 보내왔다. 앤이 에이번리의 모든 것을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을지 안다고 했으며 레드먼드 학생들은 어떤지 물은 다음 나머지는 모두 수없이 많은 남자들이 자기를쫓아다녀너무 괴롭다는 내용이었다. 바보스러웠지만 악의는 없는 편지라서 추신만 아니었더라면 앤은 그냥 편안하게웃어넘겼을 것이다. 그런데 ‘길버트는 레드먼드가 좋은가 봐. 편지를 보니 그래. 찰리는 학교에 적응을 잘못하고 있는 것 같던데.’ 하는 말이 덧붙여 있었다.
길버트가 루비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 확실했다. 그것도 정성스럽게. 물론 당연히 그럴 권리야 있겠지만! 루비가 먼저 길버트에게 편지를 보냈고 길버트는 약간의 예의로서 답장을 했다는 사실을 앤은 알지 못했다. 앤은 루비의 편지를 경멸스럽다는 듯 한쪽으로 치워버렸다. 하지만 다이애나의 편지로 그 추신이 준 아픔은 사라졌다. 기분 좋은 다이애나의 편지에는 프레드의 이야기가 좀 많긴 했지만 그 외에는 재미있는 이야기로 꽉 차 있어 앤은 다이애나의 편지를 읽으면서 다시 에이번리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릴라의 편지는 꼼꼼하면서도 무덤덤한 내용으로 소문이나 감상에 관한 이야기도 순진할 정도로 솔직히 적혀 있었다. 하지만 마릴라의 편지에는‘초록 지붕 집’의 건강하고 단순한 생활을 그대로 담아온 듯, 오랜 평화와 함께 앤을 향한 변함없는 사랑이 가득 묻어났다. 린드 부인의 편지는 교회 소식으로 가득했다. 이제는 돌볼 집이 없는 린드 부인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시간을 교회 일에 헌신했다. 온 마음과 영혼을쏟아부으며 지금 에이번리 교회에 부족한 ‘공급품’을 채우려고 노력 중이었다.

요즘에는 바보 말고는 아무도 성직자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니 믿을 수가 없구나. 우리 교회에 오는 목사님들과 그들이 하는 설교라니! 설교 내용을 반도 믿을 수가 없어. 그보다 더 나쁜 것은 도대체 설교 같은 생각이 들어야 말이지. 새로 온 목사님은 지금까지 중 최악이다. 성경에 나온 이야기를 하는 건 분명한데 완전히 딴 얘기야. 이 사람은 이 땅에서 이교도들이 결국 영원히 사라지게 될 것이란 사실도 믿지 않는다고 한다. 생각하고는!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지금까지 해외 선교단에 기부한 돈이 다 헛것이었단 말이 되잖아, 그럼. 다음 주일에는 물에 빠진 도끼날16)을 설교하겠다고 지난 주일 밤에 그러더라. 내 생각엔 목사님이 성경에 있는 말만 하고 논란을 일으킬 문제는 좀 건드리지 말았으면 싶다. 목사가 성경책에서 설교할 거리를 찾지 못한다면 말 다한 거 아니냐, 그럼. 앤, 넌 어느 교회에 다니고 있니? 매주 빼먹지 말고 가거라. 사람들은 집에서 멀어지면 교회도 소홀히 하는 것 같더구나. 그런 면에서 보면 대학생들은 죄인들이다. 많은 대학생들이 주일날에도 공부를 한다는 얘길 들었다. 하지만 앤, 너는 그런 축에 끼지 마라. 네가 어떻게 컸는지 항상 명심하고, 친구도 조심해서 사귀어야 해. 도대체 어떤 피조물들이 대학에다니고 있는지 모를 일이잖니. 겉모습만 보면 흰 무덤같이 고요해도 속은 성난 늑대17)같을지 누가 알겠어, 그럼. 프린스에드워드 섬 출신이 아닌 남학생하고는 말도 섞지 마라.
참, 목사님이 여기 처음 온 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해준다는 걸 깜박했다. 지금까지 이렇게 우스운 일은 처음이야, 앤. 내가 마릴라에게 말했지. “앤이 여기 있었다면 앤도 웃었겠죠?” 마릴라도 웃음을 터트렸다. 목사님은 키가 작고 뚱뚱한 땅딸보란다. 게다가 다리도 안짱다리야. 그런데 해리슨 씨네 늙은 돼지가, 아, 그 왜 살이 뒤룩뒤룩 찌고 몸집이 무척 큰 돼지 있잖니. 그 돼지가 그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교회 뒷마당으로 들어와서는 아, 그만 교회 뒷문으로 들어왔단다. 아무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 그때 마침 목사님이 뒷문 현관에 나타나신 거야. 그러니 그 돼지가 황급하게 어디로튀어나가야 되는데, 어디로 도망칠 수 있었겠니? 목사님의 휜 다리 사이 말고는 말이다. 그래서 돼지가 목사님의 휜 다리 사이로 달려들었는데 돼지는 크지 목사님 다리는 짧지, 그러니 돼지가 목사님 다리에 꼭 끼어서는 목사님을 태우고 달아나 버린 거야. 모자는 저쪽으로, 지팡이는 이쪽으로 날아가 버렸지. 바로 그때 마릴라와 내가 현관으로 나왔다. 그때 목사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그 불쌍한 돼지도 아마 무서워 죽을 지경이었을 거다. 앞으로는 돼지가 미친 듯이 가파른 곳을 달려 내려가 물로 뛰어들었다18)는 성경 대목을 읽을 때마다 목사님을 태우고 달린 해리슨 씨의 돼지가 생각날 것 같다. 그 돼지도 악마가배 속이 아니라 등에 올라탔다고 생각했을 거다. 쌍둥이가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목사님이 그렇게 품위 없이 곤경에 빠진 걸 쌍둥이가 보는 건바람직하지 않잖니. 돼지가 시냇가에 도착하기 바로 전에 목사님이 돼지에서 떨어졌단다. 아니면, 목사님이 뛰어내렸거나. 돼지가 숲을 지나 시내까지 미친 듯이 돌진해버렸거든. 나와 마릴라가 달려가서 목사님을 일으켜 세우고 코트를 털어드렸지. 목사님은 다치진 않았는데 굉장히 화가 나서 나와 마릴라에게 책임을 물으려고 들었어. 우리는 얼른 그 돼지는 우리 것도 아니고, 우리도 여름 내내 그 돼지 때문에 몹시 괴롭힘을 당했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그 돼지가 왜 교회에 나타났는지 모르겠다고 했지. 앨런 목사님이었다면 절대 이런 일을 당하지도 않았을 거다. 앨런 목사님이 가신 지도 꽤 됐구나. 하지만 손해 보는 사람이 있으면 이득 보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그 뒤로 우린 그 돼지를 털끝 하나 보지 못했다. 아마 영원히 못 보게 될 것 같구나.
여기 에이번리는 조용한 편이다. 그래도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외롭진 않아. 이번 겨울엔 면실 뜨개질로 조각이불을 하나 더 만들 생각이다. 사일러스 슬론 부인이 아주 근사한 사과 나뭇잎 본을 갖고 있대.
요즘에는 뭔가 재미있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면 우리 조카가 보내준 <보스턴> 신문의 살인 사건 재판 기사를 읽는단다. 예전엔 그런 건 읽지 않았다만 읽어보니 꽤 재미있더구나. 미국은 정말 이상한 곳이야. 너는 절대 그런 데 가지 마라, 앤. 여자들이 전 세계를 누비고 다니는 꼴은 정말 끔찍해. 그런 여자들을 보면 욥기서19)의 악마가 생각난다.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는 악마 말이다. 하느님이 정말 의도하신 일인지 의심스럽다, 그럼.
데이비는 네가 떠난 후부터는 행실이 비교적 바른 편이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는 데이비가 못되게 굴어 마릴라가 야단을 치고는 벌로 온종일 도라의 앞치마를 입게 했는데, 데이비가 밖으로 나가더니 그 앞치마를 죄다 잘라놓았단다. 그래서 내가 데이비의 엉덩이를 때려주었지. 데이비는 화가 나서 밖으로 나가더니 우리 수탉을 쫓아다녀서 결국 죽게 했단다.
맥퍼슨 씨네가 우리 집으로 이사 왔단다. 맥퍼슨 부인은 솜씨 좋은 살림꾼이지만 성격 하나는 특이하더구나. 내가 심어놓은 백합을 모조리 다 뽑아버렸어. 정원이 단정하게 보이지 않는다나. 우리가 결혼했을 때 토머스가 심어놓은 것인데. 맥퍼슨 씨는 좋은 분인 것 같지만 맥퍼슨 부인은 노처녀 적 버릇을 아직도 고치지 못한 것 같더라, 그럼.
너무 열심히 공부만 하지는 마라. 날씨가 차가워지면 바로 내복 꺼내서 입구. 마릴라가 네 걱정을 많이 하고 있단다. 하지만 내가 걱정할 필요 없다고 했다. 앤이 예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분별력 있는 아이가 됐으니까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했어.

데이비의 편지는 처음부터 불평불만이었다.

앤누나, 제발 마릴라 아줌마에게 편지를 써서 내가 낚시할 때 나를 다리 난간에 묶지 말라고 좀 해줘. 애들이 자꾸 놀린단 말이야. 누나가 없으니까 정말 외로운 기분이 들어. 하지만 학교는 정말 재미있어. 제인앤드루스선생님은 누나보다 더 화를 잘 내. 어젯밤에는 내가 호박 등불로 린드 아줌마를 겁 좀 줬지. 아줌마는 화를 많이 냈어. 왜냐하면 내가 아줌마 닭을 쫓아서 뒷마당을 달렸는데 닭이 떨어져서 죽었거든. 난 닭을 떨어져 죽게 할 생각은 아니었어. 닭이 왜 죽었는지 나도 궁금해. 린드 아줌마는 그 닭을 블레어 아저씨한테 팔아도 되는데 돼지우리에 던져버렸어. 블레어 아저씨는 죽은 닭 한 마리에 50센트를 준다고. 린드 아줌마가 목사님에게 자기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하는 걸 들었어. 아줌마가 뭐 나쁜 짓을 한 걸까? 궁금해. 난 꼬리가 긴 연도 있어, 누나. 밀티 볼터가 어제 학교에서 굉장한 얘기를 해줬어. 이거 진짜야. 조 모시와 리언이 저번 주 어느 날 밤에 숲 속에서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대. 나무 그루터기에 카드를 올려놓았는데 나무보다 더 큰 남자가 와서 카드와 나무 밑동을 뽑아 들고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사라져 버렸대. 정말 무서웠을 거야. 밀티가 그러는데 그 사람이 바로 악마 해리래. 정말일까? 궁금해. 스펜서베일의 킴벨 아저씨는 많이 아파. 그래서 병원에 가야 한대. 잠깐, 내가 철자를 맞게 쓴 건지 마릴라 아줌마한테 물어보고 올게. 아저씨가 그러는데 킴벨 아저씨는 병원이 아니라 정신병원에 가야 한대. 킴벨 아저씨 몸속에 뱀이 들어 있대. 몸속에 뱀이 들어 있으면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 로렌스 벨 아줌마도 아파. 린드 아줌마 말로는 로렌스 벨 아줌마의 문제는 자기 몸을 너무 많이 생각하는 거래.

“린드 아주머니가 필리파는 어떻게 생각하실까 궁금하네.”
편지를 접으며 앤이 중얼거렸다.
16. 성경 열왕기하 6장 5절.
17. 마태복음 23장 27절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18. 마태복음 8장 32절.
19. 구약 성서 중 한 편.​




6
공원에서





어느 토요일 오후 필리파가 앤의 방으로 불쑥 들어오며 물었다.
“너희들, 오늘 오후엔 뭐 할 거니?”
“우린 공원으로 산책 나갈 거야. 방에 앉아서 이 블라우스를 끝내야 하지만 온종일 이렇게 바느질만 하고 있을 순 없지. 공기 속의 어떤 것이 내 핏속으로 들어와 나를 유혹하고 있어. 손가락에 경련이 일어나 바느질이 다 삐뚤삐뚤해. 그러니 공원으로 나가 나무들을 만나보고 인사해야 할 시간인 거지.”
앤이 대답했다.
“그 ‘우리’ 속에 프리실라와 너 외에 딴 사람도 있니?”
“길버트와 찰리도 같이 갈 거야. 물론 너도 같이 가면 더욱 즐겁겠지.”
“내가 따라가면 들러리가 돼야 할 거 아냐? 물론 필리파 고든에게는 새로운 경험이겠지만.”
필리파가 샐쭉해서 말했다.

“음, 새로운 경험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니니. 같이 가자. 그럼 들러리나 서야 하는 불쌍한 영혼들의 심정도 이해하게 될 거야. 그런데 네 희생양들은 모두 어디 있지?”
“오, 그 사람들 때문에 지쳐서 오늘은 그 누구도 보고 싶지 않아. 게다가 나 요즘 좀 우울해. 그저 느껴질 듯 말 듯 약간 우울한 거지만. 뭐 더 심해질 만큼 대단한 건 아니고. 지난주에 알렉과 알론조에게 편지를 썼어. 편지를 봉투에 넣고 주소를 적긴 했는데 편지를 봉하지는 않았었어.그런데 그날 저녁 황당한 일이 생겨버렸어. 그 일로 알렉이야 그냥 웃고 말았겠지만, 알론조는 그럴 수가 없었겠지. 그때 내가 좀 경황이 없는 상황이었는데 알렉에게 해야 할 말이 생각났어. 얼른 알렉의 편지를 꺼내 추신을 쓰고 편지 두 통을 모두 부쳤지. 그땐 적어도 그렇게 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오늘 아침 알론조의 답장을 받고서야 내가 알론조의 편지에다 알렉에게 전할 추신을 썼다는 걸 알았어. 물론 알론조는 몹시 화를 냈지. 나중엔 화가 가라앉겠지만. 안 그래도 상관없어. 그 일 때문에 온종일 기분이 나빠. 그래서 너와 프리실라를 만나 기분을 좀 달래보려고 온 거야. 축구 시즌이 시작되면 토요일 오후에도 난 한가할 틈이 없을 거야. 내가 축구를 아주 좋아하거든. 축구 경기 보러 갈 때 입으려고우리 학교색깔의 줄무늬 스웨터와 멋진 모자도 벌써 준비했단다. 멀리서 보면 내가 꼭 이발소의 네온사인 같을걸. 그런데 너희들 길버트가 축구부 1학년 주장으로 선출된 거 아니?”
“어젯밤 길버트가 얘기해줘서 알아.”
아직도 성이 나 있는 앤은 대답하지 않을 게 뻔해 프리실라가 대답했다.
“어젯밤에 길버트와 찰리가 왔었어. 두 사람이 온다는 걸 알고 우린 정신없이 에이다 하비의 쿠션을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닿지도 않을 곳으로 치웠지. 그런데 하필이면 아주 정교한 자수가 수놓인 쿠션을 원래 쿠션이 놓여 있던 의자 뒤쪽 구석 바닥으로 내려놓은 거야. 그곳이 더 안전하겠다 싶었거든. 그런데 어떻게 됐는지 알아? 찰리 슬론이 그 의자 뒤쪽에 떨어져 있는 쿠션을 본 거야. 찰리는 그 쿠션을 아주 조심스럽게 집어 올렸단다. 그러더니 저녁 내내 그 쿠션 위에 앉아 있었어. 쿠션은 완전히 망가져 버렸지! 에이다 하비는 왜 쿠션에 앉게 내버려뒀느냐고 오늘도 나를 책망했어. 미소를 지은 채 말이야. 난 내가 허락한 게 아니라고 했지, 그저 운명의 장난이었다고 말했어. 거기다뿌리 깊이박힌 슬론 집안 기질까지 한몫 거들었다고. 그렇게 둘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니 내가 이길 재간이 없었다고 변명했지 뭐.”
“에이다 하비의 쿠션은 정말 신경이 쓰여. 지난주에 솜을 채우고 자수를 놓은 쿠션을 두 개나 또 새로 만들었어. 하지만 어디 쿠션이 없는 곳이 있어야 새로 만든 쿠션을 둘 거 아니야. 그래서 계단참 벽에 세워두었는데, 밤에 우리가 계단을오르락내리락할때마다 툭하면 발에 걸려 넘어지기 일쑤야. 지난 일요일에 데이비드 박사가 바다에서 위험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 나는 쿠션이 지나치게 사랑받고 있는 집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드렸어. 자, 이제 나가자! 길버트와 찰리가 올드 세인트 존 묘지를 지나오고 있어. 필, 너도 같이 가자.”
“그래, 내가 프리실라와 찰리와 함께 걸으면 그럭저럭 괜찮은 들러리가 돼줄 수 있겠다. 너의 길버트는 너무 멋져, 앤. 그런 그가 왜 왕방울 친구하고만 같이 다니는 걸까?”
앤은 기분이 좀 상했다. 물론 앤도 찰리 슬론에게 호감을 가진 건 아니었지만 찰리 슬론 역시 에이번리 사람이었다. 섬사람이 아니라면 찰리 슬론을 보고 비웃을 자격이 없었다.

“찰리와 길버트는 옛날부터 친했거든. 찰리도 괜찮은 애야. 눈만 보고 비웃으면 안 돼.”
앤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지 마. 그 애 눈은 정말 왕방울 눈이잖아. 그런 눈으로 태어날 만큼 전생에 분명히 나쁜 일을 저질렀을 거라고. 나랑 프리실라는 오늘 오후에 찰리를 잔뜩 놀려줄 생각인걸. 우리가 아무리 놀려도 찰리는 자기를 놀리는지도 전혀 모를 거라고.”
그날 오후 앤이 ‘못 말리는 P 자매’로 시작하는 프리실라와 필리파는 자기네가 원하는 만큼 실컷 찰리를 놀려주었다. 하지만 더없이 행복한 찰리는 그런 사실도 깨닫지 못했다. 그는 자기가 두 여학생, 특히 1학년 중 최고 미인으로 꼽히는 필리파 고든과 함께 산책하기에 꽤 어울리는 사람으로 착각까지 했다. 찰리의 이런 점이 앤에게는 인상적이어서 누군가 찰리의 가치를 완전하게 평가해줄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길버트와 앤은 뒤에 좀 처져서 따라갔다. 소나무가 늘어선 항구 해변을 끼고 도는 공원 길을 따라 둘은 가을의 아름다움과 고요를 만끽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기는 기도실처럼 고요하다. 소나무들이 너무 아름다워! 아주 옛날부터 모든 낭만 속으로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는 것 같아. 살금살금 소나무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소나무와 대화를 나누면 마음이 아주 편안해져. 그래서 여기 오면 항상 행복해.”
햇살이 반짝이는 하늘을 향해 얼굴을 들어 올리며 앤이 말했다.

“성스러운 마법이런가,
산의 고독함에 휩싸여,
바람에 소나무 잎이 흔들리듯,
근심은 모두 사라지네.”20)

길버트가 읊조렸다.
“소나무들이 우리의 작은 야망을 더욱 하찮게 만드는 것 같아. 그렇지 않니, 앤?”
“난 말이야, 살다가 커다란 슬픔이 밀려온다면 여기 소나무에게서 안식을 찾을래.”
앤이 꿈꾸듯 몽롱하게 말했다.
“그런 슬픔이 너에게 오지 않기를 바란다, 앤.”
길버트는 옆에서 걷고 있는 항상 생기발랄한 앤과 슬픔이란 단어를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없었다. 길버트는 가장 높이 치솟아 오를 수 있는 사람이 가장 깊이 곤두박질칠 수 있고, 가장 큰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가장 깊은 슬픔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런 일이 생길지도 몰라. 인생이란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영광의 잔과도 같은 거거든. 그 잔 안에는 분명히쓴맛도 들어 있어. 모든 사람의 컵에 다 들어 있지. 언젠가는 내 잔의쓴맛도 맛보아야 할 거야. 그 맛을 당당히 맛볼 수 있을 만큼 내가 강하고 용감해졌으면 좋겠어. 그렇지만 내 잘못으로 그런 쓴맛을 보게 되진 않기를 바라지. 지난 일요일 저녁 데이비드 박사님이 하신 말씀 기억나니? 하느님이 우리에게 슬픔을 주실 때는 슬픔만이 아니라 이겨낼 수 있는 힘과 위안도 함께 주신다고 하셨어. 그래서 우리의 어리석음과 사악함으로 스스로 자초한 슬픔은 견디기가 훨씬 더 힘든 걸까? 하지만 오늘 오후엔 이렇게슬픈 이야기는 어울리지 않아. 오늘 같은 날엔 그저 살아 있는 진정한 기쁨을 맛보아야 한다고, 안 그래?”
“내가 만일 모든 일을 내 뜻대로 할 수 있다면 난 행복과 기쁨만 빼고 다른 건 모두 네 인생에서 없애버릴 거야, 앤.”
길버트는 마치 위험이 저 앞에 도사리고 있기라도 한 듯 말했다.
“그건 현명하지 못한 일이야. 인생은 역경과 슬픔으로 발전하고 완성되는 거라고. 우리가 그런 사실을 자기 상황이 아주 편안할 때만 인정하고 있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가자, 다른 애들은 벌써 누각에 도착해서 우릴 부르고 있다.”
앤이 재빨리 대꾸했다.
모두들 작은 누각에 앉아 타오르는불꽃 같은붉은빛과 옅은 황금빛이 섞인 가을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들 왼편으로 자리 잡은 킹스포트의 지붕과 종탑들이 자줏빛안개에 싸여희미하게 보였다. 오른쪽으로는 장밋빛과 구릿빛으로 빛나는 석양에 휩싸인 항구가 보였고, 앞으로는 공단처럼 부드러운 바다 물결이 은빛 섞인 회색으로 빛났다. 그 너머로는 나무 하나 없이 미끈한윌리엄스섬이 사나운 불도그처럼 킹스포트 시를 호위하듯 안개를 뚫고 희끄무레 모습을 드러냈다. 등대 불빛은 별이 슬픔에 잠긴 것처럼 안개 속에 흔들렸고 저 멀리 수평선 너머 다른 등대가 불빛을 깜박이며 화답했다.
“저 섬은 너무나 강인해 보여. 난 저윌리엄스섬이 정말 싫어. 갖고 싶어도 가질 수도 없겠지만. 저 요새 꼭대기 깃발 바로 옆에 서 있는 보초병을 봐. 낭만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지 않니?”
필리파가 말했다.
“글쎄, 낭만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히스를 찾아보았지만 역시나 하나도 못 찾았어. 요즘 같은 계절이면 이미 늦었나 봐.”
“히스! 아메리카 대륙에선 히스가 자라지 않지!”
앤이 소리를 높였다.
“아메리카 대륙에도 히스가 자라는 곳이 딱 두 곳이 있어. 그중 한 곳이 바로 이 공원이고, 그리고 다른 곳은 노바스코샤 어디야. 어디인지는 잊었어. 블랙 워치라고 불렸던 그 유명한 스코틀랜드 연대가 여기 주둔했던 적이 있었어. 봄에 병사들이 잠자리에 깐 짚단을 털다가 히스 씨앗이 몇 알 떨어져 여기에 히스가 뿌리를 내리고 자라게 되었대.”
필리파가 말했다.
“어쩜 그럴 수가!”
이야기에 매료된 앤이 말했다.
“우리 스포퍼드 거리를 돌아서 집에 가자. 부유한 귀족들이 사는 멋진 집들을 구경할 수 있어. 스포퍼드가 킹스포트에서 가장 고급 주택지역이거든. 백만장자가 아니면 그 거리에 집을 지을 수도 없대.”
길버트가 말했다.
“오, 그러자. 거기에 내가 보여주고 싶은 정말 멋진 집도 있어, 앤. 그 집은 백만장자가 지은 건 아니야. 공원을 나가면 맨 먼저 보이는 곳인데, 킹스포트가 아직시골길이었을 때부터 있었던 것 같아. 그곳은 저절로 생겨난 것이지, 누가 지은 게 아닌 것이 분명해. 난 이 거리의 집들에는 별로 관심 없어. 다들 너무새집이고, 쟁반처럼반짝반짝하잖아. 하지만 그 집은 꼭 꿈속에 나오는 집 같아. 그리고 그 집 이름도 정다워. 조금만 가면 볼 수 있어.”
필리파가 말했다.
공원을 벗어나 길 양쪽으로 소나무가 늘어서 있는 언덕을 오르자 필리파가 말한 바로 그 집이 보였다. 스포퍼드 거리가 평범한 길로 바뀌는언덕마루에 하얀 담장으로 둘러싸인 작은 집이 서 있었다. 낮은 지붕을 감싸 안은 듯 가지를 뻗은 소나무가 집을 빙 둘러 있고 황금빛과 붉은빛의 덩굴 식물이 집을 뒤덮은 사이로 녹색 덧문이 삐죽이 보였다. 그 앞으로는 낮은 돌담으로 둘러싸인 작은 정원이 있었다. 때는 10월이었지만, 정원에는 여전히 어여쁜 산사나무, 쑥, 방취목, 뜰냉이, 피튜니아, 금잔화, 국화꽃 같은 이 세상 것 같지 않은 사랑스럽고 고풍스러운 꽃들과넝쿨 식물들이 보기 좋게 자라고 있어 어떤 외딴 시골 오두막집을 그대로 옮겨온 듯 보였다. 정원에는 청어 가시 모양의 작은 보도가 대문에서 현관까지 이어졌다. 이 집과 바로 이웃해 담배회사 사장이 사는 큰 집이 있었는데, 이 작은 집에는 잔디로 둘러싸인 궁전 같은 그 집을 잰 체나 하는 유치한 집으로 보이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필리파가 아까 말한 것처럼 만들어진 것과 그렇게 태어난 것과의 차이라고나 할까.
“이렇게 예쁜 집은 본 적이 없어. 내가 어릴 적 느끼곤 하던 기분 좋고 짜릿한 통증이 느껴져. 라벤더 아주머니의 돌집보다도 더 예쁘고 더 친근해.”
앤이 기쁨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 집의 이름도 보여주고 싶어. 여기를 보라고. 대문 아치에 새겨진 저 하얀 글씨를. ‘패티네 집’이라니, 정말 죽이지 않니? 특히나 파인허츠 가니 엘름우드 가니 세다크로프츠 가니 하는 이름의 저택이 잔뜩 늘어선 거리에서‘패티네 집’이라니, 정말 너무 정감 있지, 그렇지 않니?”
필리파가 말했다.
“패티가 누군지 혹시 아니?”
프리실라가 물었다.
“패티 스포퍼드는 이 집 주인인 노부인이야. 내가 알아냈지. 이 집에서 조카딸과 함께 살고 있대. 여기서 몇백 년은 살았을 거야. 아니, 뭐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어쨌든 오래됐어. 이런 과장은 단순히 시적인 상상의 비약일 뿐이고. 부자들이 여러 번 이 집을 사려고 했었대. 물론 이 집이야 그리 비싼 집도 아니고. 그런데도 패티는 이 집을 절대 팔려고 하지 않았대. 이 집 뒤쪽으로 뒷마당 자리에 사과나무 과수원이 있어. 조금만 더 가면 볼 수 있어. 스포퍼드 거리에서 진짜 과수원을 볼 수 있다고!”
“오늘 밤엔‘패티네 집’꿈을 꿔야겠다. 왜 내가 여기 살았던 사람처럼 느껴지는 걸까? 우리 혹시 이 집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을까?”
앤이 말했다.
“글쎄, 그건 안 될 것 같은데.”
프리실라가 말했다.
앤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안 되겠지. 하지만 언젠간 집 안도 볼 수 있는 날이 올 것 같아. 뭔가 이상하고 약간은 오싹한 느낌이 오거든. 이런 걸 육감이라고 하나? 언젠가는 ‘패티네 집’과 좀 더 친해질 날이 올 것 같은 느낌이 들어.” 
20. 미국의 소설가·시인인 브렛 하트(Bret Harte, 1836~1902)의 <찰스 디킨스와 함께(Dickens In Camp)> 7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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