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6권 15~16

나단비 | 2024.04.09 23:27:39 댓글: 2 조회: 94 추천: 1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9783
15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내가 여기 오지 않을 수 없었어요. 전화로 한 말을 설명해야겠더라고요.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그건 다 실수였어요. 아무튼 우리 사촌 사라는 죽지 않았어요.”
앤은 부인에게 의자를 권하며 웃음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수잔은 조카 글래디스에게 주려고 코바늘로 뜨고 있는 아일랜드풍 레이스 칼라에서 얼굴을 들고 아주 정중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시죠, 엘리엇 부인!”
“오늘 아침 병원에서 연락이 왔는데, 아, 어젯밤에 사라가 세상을 떴다는 거예요. 난 사라가 블라이드 의사의 환자였으니까 앤에게 말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건 다른 사라 체이스였어요. 내 사촌동생 사라는 살아 있고, 감사하게도 앞으로도 계속 살아 있을 것 같아요. 여기 베란다는 정말 쾌적하고 시원하네요, 앤. 내가 언제나 말하잖아요. 산들바람은 ‘잉글사이드’ 바람이 최고라고.”
“수잔과 저는 저렇게 별들이 휘황찬란하게 아름다운 밤을 즐기던 참이었어요.”

앤이 낸을 위해 만들고 있던 주름이 많이 잡힌 분홍 모슬린 드레스를 옆에 내려놓고 두 손으로 무릎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 잠깐 게으름을 부려볼 핑계로 나쁘지 않았다. 요즘은 앤이나 수잔이나 일손을 놓고 빈둥거리는 때가 참 많았다.
이제 막 달이 떠오를 참이었다. 이렇게 달이 막 떠오를 것 같은 때가 달이 완전히 떠올랐을 때보다 더 아름다웠다. 보도를 따라 참나리가 ‘불타듯 밝게’ 피어 있고, 인동덩굴에서 풍겨오는 향기도 꿈꾸듯 바람의 날개를 타고 떠돌아다녔다.
“정원 담 옆으로 물결처럼 일렁이고 있는 저 양귀비꽃들을 좀 보세요, 미스 코넬리아. 수잔과 제게는 저 양귀비가 올해 큰 자랑거리예요. 하지만 우리는 저 꽃을 심거나 가꾸지 않았답니다. 올봄에 월터가 씨를 싼 꾸러미를 저기다 엎질렀는데 꽃이 저렇게 탐스럽게 피었어요. 해마다 꼭 뭔가 기쁘고 놀라운 일이 벌어져요.”
“나도 양귀비를 좋아해요. 꽃이 오래가지는 않지만요.”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하루밖에 살지 못하죠. 하지만 어쩌면 저렇게 당당하고 화려할 수 있을까요! 영원히 버티겠다고 드는 뻣뻣하고 흉한 백일홍보다 낫잖아요. ‘잉글사이드’에는 백일홍이 하나도 없어요. 우리와 사이가 좋지 않은 꽃이라면 그것뿐이에요. 수잔은 백일홍에게는 말도 걸어주지 않지요.”
앤이 말했다.
“지금 골짜기에서 누가 살해라도 당하고 있는 건가요?”

미스 코넬리아가 물었다. 사실 골짜기에서 들려오는 고함소리로 봐서는 누군가 화형이라도 당하는 소리로 들리긴 했다. 하지만 앤과 수잔에게는 아주 익숙한 일이어서 그 소리에 신경 쓰지 않았다.
“퍼시스와 케네스가 와서 온종일 집안에서 같이 놀았는데, 이제 골짜기로 가 파티를 열고 있는 모양이네요. 체이스 부인 일은 길버트가 오늘 아침 시내로 갔으니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오겠죠. 체이스 부인이 잘 이겨내고 있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다른 의사들이 길버트가 내린 진단에 동의하지 않아 좀 걱정했었거든요.”
“사라가 병원으로 가면서 우리에게 주의를 주었어요. 자기가 죽었는지 확인도 하기 전에 내다 묻어버리지 말라고요.”
미스 코넬리아는 위엄 있게 부채질을 하며 앤은 어쩜 저렇게 언제나 멋져 보이는지 궁금했다.
“우린 사라의 남편이 산 채로 묻힌 거나 아닌지 항상 걱정하는 마음이었잖아요. 그 사람은 죽었어도 정말로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요. 하지만 그 사람을 묻어버리고 나서야 그런 걱정이 들었죠. 그 사람은 봄에 로브리지에서 무어사이드네 농장을 사서 이사 온 리처드 체이스 동생이에요. 리처드는 좀 괴짜죠. 평화를 얻으려고 시골로 이사를 왔다나. 그 사람은 로브리지에서 살던 때도 미망인들 뒤꽁무니나 쫓아다녔어요.”
미스 코넬리아는 미망인들 뒤에 ‘노처녀들’이란 말도 덧붙이려다 수잔의 감정을 상하게 할까 봐 입을 다물었다.
“그분 딸 스텔라를 만났어요. 성가대 합창 연습에 왔더군요. 아주 마음에 드는 아가씨였어요. 스텔라도 저를 좋아하는 것 같았구요.”

앤이 말했다.
“스텔라는 좋은 아가씨예요. 요즘엔 얼굴을 붉힐 줄 아는 아가씨가 참 드문데 스텔라는 얼굴을 붉힐 줄 알거든요. 나도 언제나 스텔라를 아끼고 걱정하죠. 스텔라 엄마와 나는 좋은 친구였는데. 가엾은 리제트.”
“젊어서 돌아가셨나요?”
“그래요. 스텔라가 겨우 여덟 살 때 죽었지요. 리처드 혼자서 스텔라를 키웠어요. 하지만 그럼 뭐 해요. 그 사람은 신앙이 없는걸요! 그 사람이 한다는 소리는 여자란 생물학적으로나 중요하다나, 그 말이 무슨 의미든지 간에요. 그 사람은 언제나 그렇게 어려운 말을 툭툭 던지길 좋아해요.”
“그렇지만 자식만큼은 잘 길렀어요.”
앤은 스텔라 체이스가 보기 드물게 참한 아가씨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맞아요. 스텔라는 제멋대로 굴거나 하는 아가씨는 아니죠. 그리고 리처드도 확실히 머리는 좋아요. 하지만 젊은 남자한테는 까다롭게 굴어요. 가엾게도 스텔라는 지금껏 남자친구 한번 사귀어보지 못했다니까요. 스텔라와 데이트를 하려던 남자들은 모두 엄청나게 욕을 먹고 물러나야 했어요. 그 사람처럼 사람을 잘 비꼬는 사람도 없거든요. 스텔라도 그런 아버지를 어쩌지 못해요. 스텔라 엄마도 마찬가지였고요. 둘 다 리처드 다루는 방법을 몰랐던 거지요. 리처드는 무슨 일이든 반대로만 하는 사람인데, 둘 다 그걸 깨닫지 못한 것 같아요.”
“스텔라는 자기 아버지를 꽤 위하는 것 같던걸요.”
“오, 그래요. 스텔라는 아버지를 존경해요. 그 사람도 분별력 있게 행동하기만 하면 꽤 괜찮은 사람이거든요. 하지만 스텔라 결혼 문제만큼은 사리분별을 못 하는 것 같아요. 자기가 평생 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러네요.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들으면 평생 살 작정인가 보다고 생각되기도 해요. 하기야 리처드가 뭐 그리 늙은 사람도 아니고, 사실 리처드는 아주 어려서 결혼을 했거든요. 하지만 그 집안에는 뇌졸중이 내려와요. 그 사람이 갑자기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스텔라는 어떻게 되겠어요? 그저 시들어 말라죽겠죠.”
“나이 든 사람이 젊은 사람의 일생을 그렇게 망쳐버리면 안 되죠.” 수잔이 복잡한 장미 무늬를 뜨다가 한마디 하고는 다시 뜨개질로 돌아갔다.
“스텔라가 정말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아버지의 반대는 그리 문제도 아닐 거예요.”
앤이 말했다.
“그건 잘못 생각한 거예요, 앤. 스텔라는 아버지가 싫다는 사람하고는 절대로 결혼하지 않아요. 그리고 인생을 망치게 생긴 사람이 또 있어요. 바로 마셜의 조카인 올덴 처칠이죠. 메리가 무슨 일이 있어도 올덴의 결혼을 막으려고 작정하고 있거든요. 리처드보다 더 반대가 심해요. 풍향계에다 비유를 하자면 바람이 남쪽에서 부는데 풍향계 바늘이 북쪽을 가리키는 격이지요. 올덴이 결혼하게 되면 지금 메리 재산이 전부 올덴에게 넘어가잖아요. 그래서 올덴이 여자만 만난다 싶으면 기어이 떼어놓으려고 드는 거라고요.”
“메리만 행동거지가 그런 거예요, 엘리엇 부인? 어떤 사람들은 올덴이 아주 변덕이 심하다고 하던걸요. 바람둥이라고 하는 소리도 있고.”
수잔이 물었다.
“올덴이 잘생겨서 여자들이 쫓아다니는 거예요. 올덴이 여자들을 줄줄 달고 다니다가 차버리는 것도 다 여자들에게 본보기를 보이는 거예요. 하지만 올덴이 정말로 좋아했던 여자들도 한두 명은 있었어요. 메리가 매번 훼방을 놓아서 그렇지. 메리가 내게 직접 그런 말을 했다고요. 성경책을 딱 펼치면 언제나 올덴이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구절이 나온다나. 자기는 성경말씀대로 따라 살기로 작정을 했다면서요. 난 이제 그 여자 술수에도 진절머리가 나요. 왜 그 여자는 교회를 다니면서 포 윈즈의 다른 사람들처럼 점잖게 살지를 못하는 거죠? 아니, 그 여자는 자기 스스로 종교를 만든 게 틀림없어요. ‘성경책을 딱 펼치면’이란 종교요. 지난가을에도 그 집 말이 병이 났어요. 아주 좋은 말이었죠. 돈으로 따지면 4백 달러는 되는 말이죠. 그런데 글쎄, 로브리지 수의사를 부르러 가지는 않고 성경책으로 달려가서 성경책을 딱 펼쳤더니 ‘주신 분도 주님이시요, 가져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라는 성경 구절이 나오더래요. 그래서 수의사를 부르지 않아 말은 죽어버렸어요. 성경 구절을 그런 식으로 적용하다니, 그건 불손하고 무례한 거 아니에요? 내가 메리에게도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더니 나를 쏘아보더군요. 그리고 이 사람은 당최 전화를 놓을 생각도 안 해요. ‘내가 벽에 붙어 있는 상자에 대고 말을 할 거라고 생각해요?’ 누가 그 문제를 들먹이면 그렇게 대꾸를 한답니다.”
미스 코넬리아는 숨이 차는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시누이의 별난 행동은 항상 코넬리아를 기막히게 했다.
“올덴은 어머니와는 전혀 다르죠.”
앤이 말했다.
“올덴이야 아버지를 닮았죠. 올덴 아버지는 그렇게 점잖을 수가 없었어요. 엘리엇 집안사람들은 그런 사람이 어떻게 메리와 결혼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는 일이라고들 했답니다. 물론 메리네 집안에서는 딸을 좋은 사람에게 시집보냈다고 무척 기뻐했지만요. 메리는 원래부터 허우대만 멀쩡하게 크고 좀 이상스러운 데가 있는 여자였어요. 물론 돈은 많았죠. 메리의 고모가 전 재산을 메리에게 남겨주었으니까요. 하지만 조지 처칠이 돈 때문에 메리와 결혼한 건 아니었어요. 진심으로 메리를 사랑했어요. 난 어떻게 올덴이 어머니의 변덕을 참아내는지 모르겠어요. 참 착한 아들이에요.”
“지금 제게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지 알아요, 미스 코넬리아? 올덴과 스텔라가 연인이 된다면 멋진 커플이 되지 않을까요?”
앤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 일은 일어날 것 같지도 않고, 혹시 그렇게 된다 해도 소용없어요. 메리가 나서서 둘 사이를 갈라놓을 것이고, 리처드도 스텔라가 평범한 농사꾼을 데려오면 당장 쫓아내 버릴걸요. 자기도 농사꾼이면서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텔라는 올덴이 좋아할 만한 아가씨가 아니에요. 올덴은 세련되고 성격이 밝고 잘 웃는 아가씨를 좋아해요. 그리고 스텔라 역시도 올덴과 같은 남자에게는 관심 없어요. 듣자하니 로브리지에 새로 온 목사가 스텔라에게 은근히 관심을 보인다고 하더군요.”
“그 목사님은 빈혈이 있는 듯 창백하고 근시잖아요.”
앤이 말했다.
“거기다 눈까지 튀어나왔죠. 그 눈으로 분위기를 잡자면 참 가관일 거예요.”
수잔도 거들었다.
“적어도 그 사람은 장로교인이죠. 이제 집에 가봐야겠네요. 이슬을 밟고 돌아다니면 신경통이 도져서요.”
미스 코넬리아가 그것이 죄를 짓는 일이라도 된다는 투로 말했다.
“제가 문까지 바래다드릴게요.”
“앤은 그 옷을 입으면 언제나 여왕처럼 품위가 있어요.”
미스 코넬리아가 뜬금없이 앤을 보고 감탄하는 말을 했다.
대문 앞에서 앤은 오언과 레슬리를 만나 두 사람과 함께 베란다로 돌아왔다. 수잔은 지금 막 돌아온 의사 선생님에게 줄 레몬주스를 준비하러 가고 없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모두 졸리고 행복한 모습으로 골짜기에서 몰려 올라왔다.
“내가 집에 들어오면서 들으니 너희들 엄청나게 떠들면서 놀더구나. 너희들 소리가 마을 전체에 다 들렸을 거야.”
길버트가 말했다.
퍼시스 포드가 꿀 색깔의 곱슬머리를 뒤로 흔들며 길버트에게 혀까지 날름 내밀어 보였다. 퍼시스는 길버트 아저씨가 무척이나 예뻐하는 아이였다.
“우리는 고함치는 회교 수도사 흉내를 냈어요. 그러니까 물론 크게 소리를 쳐야 했죠.”
케네스가 설명했다.
“네 옷 좀 보렴.”
레슬리가 좀 엄한 투로 나무랐다.
“다이의 진흙 파이에 넘어져 버렸거든요.”

케네스가 말했지만 그래서 무척이나 만족스럽다는 투였다. 케네스는 글렌으로 올 때 엄마가 입혀준 얼룩 하나 없이 풀까지 먹인 블라우스가 무척이나 싫었다.
“엄마, 다락방에 있는 그 헌 타조 깃털을 내 바지 뒤에다 달아서 꼬리를 만들어도 돼요? 내일 서커스를 하기로 했는데 나는 타조가 되어야 하거든요. 그리고 우리는 코끼리도 살 거예요.”
젬이 말했다.
“코끼리를 키우려면 1년에 2백 달러나 든다는 걸 아니?”
길버트가 정색을 하고 물었다.
“하지만 상상의 코끼리는 돈이 전혀 안 들어요.”
젬이 아무렇지도 않게 아빠에게 설명하자 앤이 웃었다.
“그래, 우리의 상상 속에서는 돈 걱정 같은 건 필요 없지. 얼마나 감사한 일이야.”
월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월터는 지금 조금 피곤했고 엄마 곁 계단에 앉아 엄마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것이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레슬리 포드는 그 모습을 보면서 월터가 천재의 얼굴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꼭 다른 별에서 온 아이인 듯, 이 세상 것에는 무관심한 듯, 초연한 표정이었다. 분명 지구는 저 아이가 사는 곳이 아니었다.
모두가 황금 같은 날 황금 같은 시간 속에서 행복했다. 항구 너머에서 교회 종소리가 은은하고 감미롭게 들려왔다. 달은 물 위에 그림자로 무늬를 만들고 언덕은 희미한 은빛으로 빛났다. 공기 중에는 박하향이 감돌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너무나도 달콤한 장미꽃 향내도 풍겨왔다. 여섯이나 되는 아이들의 엄마인 앤은 여전히 젊디젊은 눈으로 아련하게 잔디밭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달빛을 받은 미루나무만큼 늘씬하고 요정 같아 보이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면서.
이제 앤은 스텔라 체이스와 올덴 처칠을 두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길버트가 뭘 그리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내가 중매쟁이 노릇에 재주가 좀 있잖아, 다시 한 번 그 재주를 발휘해볼까 생각 중이야.”
앤이 대답했다.
길버트가 짐짓 절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내 언젠가는 그 병이 다시 도질 거라고 걱정을 했어요. 그 병을 고치려고 나도 최선을 다했지만 이 사람의 타고난 중매쟁이 기질을 고칠 수는 없더군요. 정말 대단한 열정이에요. 지금까지 이 사람이 맺어준 쌍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요? 그 일을 내가 해야 했다면 아마 난 밤잠도 못 잤을 거예요.”
“하지만 내가 맺어준 사람들은 모두 행복하게 살아요. 난 이 일에 정말로 재주가 있다고요. 날 중매쟁이라고 몰아붙이기 전에 내가 맺어준 사람들을 한번 생각해봐요. 테오도러 딕스와 루비딕 스피드, 스티븐 클라크와 프리시 가드너, 재닛 스위트와 존 더글러스, 카터 교수와 에스메이 테일러, 노라와 짐, 그리고 도비와 자비스.”
앤이 항의했다.
“그래, 앤, 나도 인정해. 오언, 우리 집사람은 결코 실망하지도 않는답니다. 언젠가는 엉겅퀴에서도 무화과가 열릴지 모른다고 믿고 있으니까요.8)아마 앞으로도 죽 사람들을 맺어주고 다닐 겁니다.”
“부인은 그 사람들 말고 다른 사람 결혼에도 관계가 있을걸요.”
오언이 자기 아내를 보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내가 아니에요.”
앤이 얼른 부정하고 나섰다.
“내가 얼마나 길버트를 탓했게요. 조지 무어를 수술 받게 해서는 안 된다고 얼마나 길버트를 들볶았는지 몰라요. 밤에 잠도 오지 않았고, 자다가도 수술이 성공했다는 꿈을 꾸고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난 밤도 수없이 많았어요.”
“글쎄, 오로지 행복한 사람만 남의 혼담을 맺어줄 수 있다고 하니까 그게 그리 나쁜 일은 아니지. 그나저나 이번에는 누구를 엮어줄 참인데, 앤?”
길버트가 흡족한 듯 말했다.
앤은 생긋 웃어 보이고 말았다. 인연을 맺어주는 일은 세심하고 신중해야 하는 일이므로 남편에게조차 털어놓을 수 없었다.
8. 마태복음 7장 16절: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6






앤은 그날 밤 몇 시간을 잠도 이루지 못한 채 누워만 있었다. 그 뒤로도 며칠 동안이나 올덴과 스텔라를 생각하느라 잠을 설쳤다. 앤은 스텔라도 결혼하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다. 결혼, 가정, 아기 그런 것들을 꿈꾸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느 날 저녁, 스텔라는 릴라를 목욕시키게 해달라고 한 적도 있었다.
“통통하고 귀여운 아기를 목욕시키는 건 정말 기분이 좋아요. 아기는 너무나 사랑스러워요, 블라이드 부인. 저 조그맣고 벨벳처럼 부드러운 팔을 엄마한테 뻗는 것 좀 보세요. 너무 귀여워요.”
 아주 수줍은 듯 얌전하게 말을 하기도 했다. 그 괄괄한 아버지 때문에 이 처녀의 아름다운 꿈을 피우지 못하게 놔두어서는 안 되었다.
둘은 무척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일이 성사될 수 있을까? 모두가 그렇게 고집을 피우고 반대로만 나오는데? 고집과 아집이라면 둘의 부모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앤은 올덴이나 스텔라 역시도 그런 기질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전과는 다른 식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앤은 도비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앤은 턱을 번쩍 치켜들고 자신감 있게 일에 착수했다. 앤은 그 순간부터 올덴과 스텔라는 결혼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우물쭈물할 시간도 없었다. 올덴은 항구 어귀에 살았고, 항구 건너편에 있는 영국 성공회 교회에 나가므로 스텔라를 만나본 일도 없었다. 아마 스텔라를 본 일조차 없을 것이다. 요 몇 달 동안 올덴은 관심을 두고 있는 아가씨 없이 얌전히 지냈지만 어느 순간 또 누구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닐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글렌 윗마을에 사는 재닛 스위프트 부인 집에 아주 예쁜 조카가 와서 지내는데 늘 새로운 아가씨에게 눈독을 들이는 올덴이 또 무슨 일을 꾸밀지 모른다. 무엇보다도 먼저 올덴과 스텔라를 마주치게 해야 했다. 어떻게 둘을 만나게 할 수 있을까? 이 일은 절대로 우연인 듯 자연스럽게 꾸며야 했다.
앤은 머리를 쥐어짰지만 파티를 열어 두 사람을 다 초대하는 것 외에 다른 묘안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생각도 그리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파티를 열기에는 날이 너무 더웠고 또 포 윈즈의 젊은이들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떠들썩하게 놀기를 좋아했다.
수잔도 ‘잉글사이드’의 다락방에서부터 지하실까지 대청소를 하지 않고는 파티를 열려고 들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수잔은 이번 여름에 더위로 쩔쩔매고 있는데. 그러나 좋은 목적을 위해서는 희생도 필요한 법. 마침 대학을 졸업한 젠 프링글이 아주 오래전부터 해온 약속을 지키려고 ‘잉글사이드’를 방문하겠다는 편지를 보내와서 그야말로 파티를 열기에는 아주 좋은 핑곗거리도 생겼다. 이제 행운의 여신은 앤 편에 있었다. 드디어 젠이 왔고 초대장은 보내졌다. 수잔은 ‘잉글사이드’를 다 뒤집어엎듯이 청소했고 찜통 같은 더위를 마다하지 않고 앤과 함께 파티 음식을 장만했다.

파티 전날 밤이 되자 앤은 몹시 피곤해졌다. 더위도 끔찍하게 심했고 젬은 아파서 침대에 누워버렸다. 앤은 맹장염이 아닐까 걱정했지만 길버트는 풋사과를 먹어 배탈이 난 것뿐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슈림프는 화상을 입어 거의 죽을 뻔한 사고를 당했다. 젠 프링글이 수잔을 도우려다 뜨거운 물이 든 냄비를 슈림프에게 쏟아버린 것이다. 앤은 온몸의 뼈마디가 다 쑤셨고, 머리가 욱신거렸으며, 발이며 눈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젠은 앤이 좀 쉴 수 있도록 아이들을 다 몰고 등대를 보러 나갔다. 하지만 앤은 잠자리에 들지 않고 오후에 폭풍우가 내린 다음이라 눅눅한 베란다에 앉아 올덴 처칠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올덴은 어머니가 기관지염에 걸려 약을 받으러 왔지만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건 한사코 사양했다. 앤은 언제고 올덴과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어서 이것이 하늘이 내려준 기회라고 생각했다. 올덴은 이런 비슷한 일로 ‘잉글사이드’를 자주 방문해서 둘은 이미 좋은 친구였다.
올덴은 모자도 쓰지 않은 맨머리를 기둥에 기댄 채 베란다 계단에 앉아 있었다. 앤은 올덴을 볼 때마다 참 잘생긴 청년이라고 생각했다. 키도 크고 어깨는 떡 벌어졌으며, 대리석처럼 흰 얼굴은 햇볕에 그을리지도 않았다. 푸른 눈은 생기가 돌고 머리카락은 잉크처럼 새까맣고 곧았다. 목소리는 웃고 있는 듯 경쾌하고 은근해서 나이를 불문하고 모든 여자들이 좋아할 만했다. 올덴은 퀸스 학교를 3년간 다닌 후 레드먼드 대학에 갈 생각이었지만, 어머니가 성경말씀을 들어 말리는 바람에 농장에 자리를 잡았다. 농사짓는 일도 좋고 집 밖으로 나가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독립된 일이라서 그럭저럭 만족하며 지낸다고 앤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올덴은 어머니로부터는 돈 버는 재주를, 아버지에게서는 매력적인 성품을 물려받았다. 확실히 올덴은 누구나 결혼상대자로 욕심낼 만한 신랑감이었다.

“올덴,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겠어요?”
앤이 상냥하게 물었다.
“그럼요, 블라이드 부인. 말씀만 하십시오. 부인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해드리겠습니다.”
올덴은 기꺼이 들어주겠다고 했다.
올덴은 블라이드 부인을 무척 좋아해서 부인의 일이라면 어떤 일이건 나섰다.
“좀 지루한 일일지도 모르겠어요. 내일 저녁 파티에서 스텔라 체이스가 즐겁게 지낼 수 있도록 신경을 좀 써주었으면 하는 부탁이거든요. 스텔라는 파티에서도 즐겁게 지내려 들지 않을 것 같아서요. 주변에 아는 사람도 별로 없어요. 대부분이 스텔라보다 젊은 사람들이라서, 남자들은 말이에요. 스텔라에게 춤도 신청하고 혼자 우두커니 있지 않도록 좀 해주세요. 낯선 사람들과 있으면 스텔라가 부끄러움을 많이 타거든요. 난 정말이지 스텔라가 내일 즐겁게 지냈으면 해요.”
앤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오, 그런 일이라면 최선을 다해보죠.”
올덴이 기꺼이 말했다.
“하지만 스텔라와 사랑에 빠져서는 안 돼요.”
앤이 웃으면서 주의를 주었다.
“세상에나, 블라이드 부인, 왜요?”
“왜냐하면요, 내 생각에 로브리지에 사는 팍스톤이 스텔라를 상당히 좋아하는 것 같거든요.”

앤이 은근히 말했다.
“그 잘난 척하고 멋이나 부리는 녀석이요?”
올덴이 뜻하지 않게 흥분해 받아들였다.
앤은 온화하게 그러면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요, 올덴, 난 그 사람이 아주 괜찮은 젊은이란 얘기를 들었는걸요. 그런 젊은이라야 스텔라의 아버지를 이길 수 있어요. 안 그래요?”
“그럴까요?”
올덴은 다시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럼요. 그렇지만 난 그 젊은이라도 확신할 수는 없어요. 체이스 씨는 자기 딸한테 마땅한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하니까요. 내 생각에는 평범한 농부라면 감히 얼굴도 내밀지 못할 것 같거든요. 그래서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얻지도 못할 사람과 사랑에 빠져 곤란을 겪을까 봐서요. 그저 우정의 경고를 해준 것뿐이라고요. 올덴의 어머니도 나처럼 생각할 테니까요.”
“오, 감사하군요. 그나저나 도대체 어떻게 생긴 아가씨예요? 예쁜가요?”
“글쎄요, 그렇게 미인이라고 할 수는 없죠. 하지만 난 스텔라를 아주 좋아해요. 좀 창백하고 조용한 아가씨죠. 그렇게 건강해 보이지도 않고요. 하지만 내가 듣기에 팍스턴 씨는 돈이 많다고 하더군요. 내 생각에는 둘이 꽤 이상적인 커플이 될 것 같아서 둘을 방해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럼 부인 파티에 팩스턴 씨를 초대해 그 소중한 스텔라를 즐겁게 해주라고 부탁하지 그러세요?”

올덴이 좀 거칠게 따지고 들었다.
“어머나, 목사는 댄스파티 같은 덴 오려 들지 않죠, 올덴. 자, 이제 골은 그만 내고 스텔라가 재밌게 지내도록 신경이나 써주어요.”
“그러죠. 스텔라가 광란의 밤을 보내도록 해주지요. 안녕히 계세요, 블라이드 부인.”
올덴은 휭 하니 나가버렸다. 앤은 혼자 남아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올덴은 당장 자기가 스텔라를 차지할 수 있다는 걸 세상에 알리려 들걸. 내가 조금이라도 인간의 본성을 안다면 말이야. 내가 던진 목사라는 미끼를 단박에 물려 들 거라고. 하지만 나는 이렇게 머리가 아프니 당장 침대로 가야겠어.’
앤은 밤새 괴로웠다. 수잔이 ‘목에 쥐가 났다.’고 말하는 그 증상까지도 겹쳐 괴로운 밤을 보냈다. 아침이 되었는데도 몸은 여전히 우중충한 플란넬 빛깔처럼 개운하지 못했다. 하지만 저녁이 되어서는 명랑하고 씩씩하게 여주인 역할을 해냈다. 파티는 성공적이었다. 모두들 즐겁게 파티를 즐겼고, 스텔라도 확실히 즐거워했다. 앤은 올덴이 스텔라를 돌보는 임무를 잘해주었다고 생각했다. 너무 열심히 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저녁 식사가 끝난 뒤 올덴이 스텔라를 어두컴컴한 베란다로 데리고 나가 한 시간이나 시간을 보낸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좀 지나쳤다. 두 사람은 그날 처음 만나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다음 날 이 일을 전체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앤은 꽤 만족스러웠다.
식당 카펫은 아이스크림을 두 접시나 엎지르고 케이크까지 바닥에 떨어뜨려 짓밟아 엉망이 되어버렸고, 길버트 할머니의 브리스틀 유리 촛대도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손님방에서 누가 물병을 엎었는지 물이 밑으로 스며들어 서재 천장이 차마 볼 수 없는 꼴로 얼룩져버렸다. 체스터필드 소파의 술은 절반이나 뜯겨나가고 수잔의 자랑인 커다란 보스턴 양치류는 누군가 덩치 큰 사람이 깔고 앉아버린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 파티로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는지 득실을 따져보면 분명 이득이 더 컸다. 올덴이 스텔라에게 빠진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동네에 떠도는 소문으로도 이런 생각이 틀림없다는 것은 확인되었다. 올덴이 낚이고 말았다는 증거는 점점 더 확실해졌다. 하지만 스텔라 쪽은? 앤은 스텔라가 남자가 손을 내민다고 해서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갈 사람이 아니란 것을 잘 알았다. 스텔라도 아버지의 반대로만 하려는 성미를 얼마쯤 물려받았고 그 점이 또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이기도 했다.
다시 한 번 행운이 이 걱정 많은 중매쟁이에게 다가와 주었다. 어느 날 저녁 스텔라가 ‘잉글사이드’의 참제비고깔꽃을 보러 왔고, 둘은 베란다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스텔라 체이스는 얼굴이 좀 창백해 보이고 몸도 가냘픈 아가씨로 수줍음을 많이 탔지만 아주 상냥한 성격이었다. 연한 금발 머리칼은 부드러운 구름 같았으며 눈은 나무 색깔이었다. 앤은 사실 스텔라가 대단한 미인은 못 되지만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가 모두 속눈썹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속눈썹이 무척이나 길어서 그 눈을 올려 떴다 내리떴다 하는 모습에 남자들이 반하고 말았다. 스텔라는 행동거지가 너무나 조심스럽고 점잖아서 스물네 살보다 나이가 좀 더 든 것 같은 인상을 주었으며, 코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매부리코가 될 듯했다.
“내가 스텔라의 소문을 들었어요. 그런데 난 확신할 수가 없군요. 그게 그렇게 바람직한 것 같지 않아요. 내가 이런 말을 해서 기분이 나쁠지도 모르겠지만 올덴 처칠이 과연 스텔라에게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앤이 손가락 하나를 스텔라를 향해 흔들며 말했다.
스텔라는 깜짝 놀라 얼굴을 돌렸다.
“어머나, 왜요? 전 블라이드 부인이 올덴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요.”
“좋아하기는 해요. 하지만 그 사람은 변덕이 심하다고들 하잖아요. 올덴을 오래 붙들어둘 수 있는 아가씨는 아무도 없다고 들었어요. 지금까지 그 누구도 올덴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대요. 난 또 올덴의 마음이 변해서 스텔라가 상처를 받을까 봐 걱정된다구요.”
“올덴을 오해하고 있어요, 블라이드 부인.”
스텔라가 천천히 말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스텔라. 하지만 스텔라 같은 타입은…… 아일린 스위프트처럼 활기 넘치고 쾌활한 사람이라면 몰라도.”
“글쎄요. 전 이제 그만 집에 가봐야겠어요. 아버지가 외로워하셔서요.”
스텔라가 좀 다른 생각에 빠진 듯이 말했다.
스텔라가 가버리자 앤은 다시 한 번 웃었다.
‘스텔라는 지금 마음속으로 자기가 올덴의 마음을 사로잡을 능력이 있다는 것을 말 많은 친구들에게 보여줄 거라고 맹세하고 있을 거야. 아일린 스위프트 따위가 올덴에게 손을 뻗치도록 할까 보냐고. 머리를 휙 젖히고 볼이 갑자기 붉어진 게 바로 그런 뜻이지. 이제 젊은이들 문제는 해결되었고, 어른들 일을 해결하기가 더 힘들 것 같아 걱정이야.’



추천 (1) 선물 (0명)
IP: ♡.252.♡.103
뉘썬2뉘썬2 (♡.169.♡.51) - 2024/04/12 03:33:28

엉겅퀴에서도 무화과가 열릴수잇다고 믿고잇는 엉뚱한 중매쟁이 앤이 과연 올덴과
스텔라를 성사시킬수 잇을지 궁금하네요.더보고싶은데 아저씨가 안잔다고 야단쳐서
일단 여기까지.

나단비 (♡.62.♡.158) - 2024/04/12 06:31:29

앤은 어른이 돼서도 여전히 엉뚱해서 재밌어요.

23,518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더좋은래일
2024-04-29
0
21
더좋은래일
2024-04-29
0
29
chillax
2024-04-29
0
32
chillax
2024-04-29
0
25
chillax
2024-04-29
0
20
더좋은래일
2024-04-28
0
41
더좋은래일
2024-04-27
4
95
더좋은래일
2024-04-26
4
67
더좋은래일
2024-04-25
3
98
chillax
2024-04-25
1
60
더좋은래일
2024-04-24
3
92
더좋은래일
2024-04-24
3
71
더좋은래일
2024-04-24
3
79
chillax
2024-04-24
1
51
더좋은래일
2024-04-23
3
89
chillax
2024-04-23
1
113
더좋은래일
2024-04-22
3
296
chillax
2024-04-22
1
212
더좋은래일
2024-04-21
3
353
나단비
2024-04-20
1
858
chillax
2024-04-19
2
783
나단비
2024-04-19
0
737
나단비
2024-04-19
0
84
나단비
2024-04-19
0
63
나단비
2024-04-19
0
64
나단비
2024-04-19
0
54
chillax
2024-04-18
2
156
나단비
2024-04-18
0
49
나단비
2024-04-18
0
54
나단비
2024-04-18
0
57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