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6권 21~22

나단비 | 2024.04.11 18:38:35 댓글: 4 조회: 114 추천: 1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6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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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4월이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찾아들었다. 햇볕은 따사롭게 내리쬐고 부드러운 바람이 며칠 동안 불어왔다. 그러더니 북동쪽에서 눈보라가 몰아쳐 세상은 또다시 하얀 담요를 뒤집어썼다.
“4월에 눈이 내리다니 이건 너무해. 입맞춤을 해달라 내민 얼굴에 철썩 따귀를 때리는 꼴이야.”
앤이 말했다.
2주 동안이나 ‘잉글사이드’를 빙 둘러 고드름이 매달렸고 바람이 매섭게 불어치면서 밤이면 몹시 추웠다. 눈보라는 마지못해 겨우겨우 꼬리를 내렸다. 골짜기에 처음으로 울새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들리자 그제야 ‘잉글사이드’는 마음을 활짝 열어젖히고 정말로 봄의 기적이 다시 시작되었음을 믿었다.
“엄마, 오늘은 봄 냄새가 나요. 엄마, 봄이 오면 정말로 신이 나요.”
낸이 신선한 공기를 킁킁거리며 유쾌한 듯 외쳤다.
그날은 봄이 걸음마 연습을 하러 나온 듯했다. 이제 막 걸음걸이를 익힌 귀여운 아기처럼 봄이 아장아장 다가왔다. 아직 겨울 모습을 띠고 있던 나무들이며 들판은 녹색 싹을 틔울 준비를 마쳤고, 젬은 또다시 맨 처음에 핀 산사나무 꽃을 엄마에게 가져왔다. 그러나 ‘잉글사이드’ 거실 안락의자에 숨을 헐떡이며 앉아 있는 엄청나게 뚱뚱한 부인은 한숨을 내쉬며 요즘에는 봄이 젊었을 때처럼 그다지 좋지 않다고 슬프게 한탄했다.
“변한 것은 우리 자신인지도 모르겠어요, 봄이 아니라요, 미첼 부인.”
앤이 웃으며 말했다.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요. 나도 내가 많이 변했다는 것을 알아요. 지금 나를 보면 왕년에는 내가 이 근방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였다고 누가 믿겠어요?”
앤에게도 그리 믿을 사람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첼 부인의 크레이프 보닛과 길고 풍성한 ‘미망인 베일’ 밑으로 보이는 얇고 가느다란 쥐색 머리는 흰머리까지 섞여 희끗희끗했고, 푸른 눈은 아무런 감정도 생기도 없이 공허해 보이기만 했다. 아무리 동정심을 발휘해 잘 봐주려 해도 분명 턱은 두 개였다. 하지만 앤서니 미첼 부인은 포 윈즈에서 누구보다도 훌륭한 상복을 갖고 있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부인의 검은 상복 크레이프는 아주 풍성하게 무릎까지 덮었다. 당시에는 사람들이 철저하게 상복을 입었다.
미첼 부인이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아서 앤은 말할 필요를 덜었다.
“이번 주 내내 우리 집 연수 장치에서 물이 나오지 않아요. 어디 물이 새는 데가 있는 모양이에요. 그래서 오늘 아침 레이몬드 러셀에게 와서 좀 고쳐달라는 말을 하려고 마을로 내려왔어요. 그리고 기왕에 여기까지 왔으니 잠깐 ‘잉글사이드’에 들러 블라이드 부인에게 앤서니 추모시를 써달라고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추모시요?” 
앤이 놀라 물었다.
“네. 사람이 죽으면 신문에 싣는 거 있잖아요. 난 앤서니를 위해 아주 훌륭한 추모시를 내보내고 싶거든요. 아주 특별한 걸로요. 부인은 글을 쓰잖아요, 그렇죠?”
앤서니 부인이 설명했다.
“가끔씩 조그만 이야기를 쓰죠. 하지만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그것마저도 쓸 시간이 별로 없어요. 예전에는 아주 커다란 꿈을 품었지만 지금은 작가로서 제 이름이 남기를 바란다는 건 어림없는 일인 것 같아요. 그리고 전 평생 추모시는 써본 적이 없답니다.”
“추모시를 쓰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그동안 아래 글렌 마을 사람들 추모시는 찰리 베이츠 아저씨가 다 써주었는데 별로 시적이지가 않아서요. 난 앤서니의 추모시는 시적이었으면 하거든요. 앤서니는 시를 아주 좋아했어요. 지난주에 글렌 회관에 가서 블라이드 부인이 붕대 감는 법에 관해 설명하는 것을 들었거든요. 저렇게 막힘없이 줄줄 이야기를 잘하는 사람이라면 정말로 시다운 추모시도 쓸 수 있겠구나 생각했죠. 저를 위해 하나 써줄 수 있죠, 블라이드 부인? 부인이 써주기만 하면 앤서니가 아주 좋아할 거예요. 앤서니는 항상 부인을 칭찬했거든요. 전에 그런 말도 한 적이 있어요. 블라이드 부인이 방으로 들어오면 다른 여자들은 모두 너무 평범해 보이고 눈에 띄지도 않게 되어버린다고요. 앤서니는 가끔씩 정말 시적인 소리도 잘했는데 정말 좋은 의미가 담긴 것들이었죠. 난 추모시를 아주 많이 읽고 커다란 스크랩북에 모두 모아 두었어요. 하지만 앤서니가 좋아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지요. 아니, 앤서니는 그것들을 비웃었어요, 이젠 그럴 수도 없지만. 죽은 지 두 달이 되었죠. 아주 미적거리다가 죽었지만 죽을 때 고통은 없었어요. 봄이 막 오기 시작할 때 세상을 뜨면 좀 귀찮은 일이 많지만 나는 잘해냈답니다, 블라이드 부인. 다른 사람에게 앤서니의 추모시를 쓰게 한다면 찰리 노인이 굉장히 화를 내겠지만, 뭐 괜찮아요. 찰리 노인은 청산유수로 말을 만들어내지만 앤서니와는 잘 맞지 않았거든요. 길든 짧든 간에 앤서니의 추모시를 그 양반에게 써달라고 할 생각은 없어요. 나는 앤서니의 충실하고 사랑하는 아내로서 35년을 살아왔어요. 35년이에요, 블라이드 부인.”
마치 앤이 겨우 34년이라고 여기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워하는 듯이 35년을 강조해 말했다.
“나는요, 비록 내 다리 하나를 잃어야 한대도 앤서니가 기뻐할 만한 추모시를 쓸 작정이에요. 결혼해서 로브리지에 사는 내 딸 세러핀도 내게 그렇게 말하더군요. 세러핀이란 이름이 참 예쁘다는 생각 안 드세요? 내가 어떤 묘비에서 보고 따왔어요. 앤서니는 그 이름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자기 어머니 이름을 따서 주디스라고 하길 원했지요. 하지만 내가 그 이름은 너무 엄숙하다고 하니까 그 사람이 아주 점잖게 포기를 하더군요. 그 사람은 입씨름하는 재주는 없었어요. 하지만 세러핀을 꼭 세러프라고 불렀어요. 아 참, 내가 무슨 말을 하다가 말았죠?”
“따님이 무슨 말을 했다고.”
“아, 그래요. 세러핀이 내게 ‘어머니, 무슨 일이 있어도 아버지에게 멋진 추모시를 바쳐요.’ 하고 말하지 뭐겠어요. 세러핀과 그 애 아버지는 마음이 아주 잘 맞았어요. 앤서니가 가끔씩 딸을 놀려대기는 했지만 말예요. 나를 놀려대던 것처럼요. 자, 그럼 하나 써주겠어요, 블라이드 부인?”
“저는 정말로 남편에 관해 아는 것도 없는걸요, 미첼 부인.”

“아, 내가 다 이야기해주겠어요. 그의 눈 색깔을 알고 싶다는 말만 하지 않는다면 말예요. 글쎄, 블라이드 부인, 장례식이 끝난 뒤에 세러핀과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내 남편의 눈 색깔을 도무지 모르겠더군요. 35년이나 함께 살았는데도요. 어쨌건 부드럽고 꿈꾸는 것 같은 눈인 건 분명해요. 내게 청혼을 하면서도 아주 간청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죠. 그 사람은 나를 얻으려고 무척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답니다, 블라이드 부인. 몇 년 동안이나 내게 반해 있었거든요. 그 당시에는 나를 따라다니는 남자들이 수도 없이 많았고 난 그중에 하나를 고르기만 하면 됐어요.
내게는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아요. 쓸 것이 없으면 말만 하세요, 블라이드 부인. 하지만 그 시절은 가버렸지요. 예전에는 나를 따라다니는 남자들이 무척 많았어요. 부인은 절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이요. 하지만 그 사람들은 모조리 내 곁을 서성이기만 했죠. 앤서니처럼 줄기차게 내게 구애하지는 않았어요.
그는 잘생겼었어요. 참 인상도 좋고 날씬하기도 했지요. 나는 뚱뚱한 사람을 몹시 싫어했으니까요. 그리고 나보다 집안도 좋았어요. 그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요. 우리 어머니는 ‘플러머가 미첼과 결혼하면 신분이 상승하는 셈이다.’ 하고 말했어요. 내가 플러머 집안사람이거든요, 블라이드 부인. 존 A. 플러머의 딸이에요. 앤서니는 내게 멋지고 낭만적인 칭찬을 늘어놓고는 했어요.
한번은 내게 영묘한 달빛과도 같은 매력을 지녔다고 말한 적도 있지요. 난 그 ‘영묘한’이란 말이 뭔가 좋은 의미란 것은 알았지만 정확히 뭘 말하는지는 몰랐어요. 언제나 사전을 찾아보아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아직까지도 못 찾아봤네요.
난 결국 그 사람 신부가 되어주겠다고 약속하고 말았어요. 아, 내가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을 부인도 봤어야 해요. 모두들 내가 꼭 그림처럼 아름답다고 했죠. 송어처럼 미끈한 몸매에 황금처럼 노란 금발머리 그리고 또 피부는 얼마나 고왔게요. 아, 시간은 우리 인간을 완전히 달라지게 만들어요. 부인은 아직 그런 걸 잘 모를 거예요. 블라이드 부인이야 아직도 아름답고, 공부도 많이 한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사람이 모두 그렇게 머리가 좋을 수는 없는 일이죠, 누군가는 부엌에서 요리를 해야 해요. 부인이 입은 드레스는 정말 보기 좋네요. 검은색은 입질 않죠, 블라이드 부인? 하지만 곧 검은색 옷을 입어야 할 나이가 될 거예요. 꼭 입어야 할 날이 올 때까지 미뤄두는 것도 좋아요. 그런데 어디까지 이야기했죠?”
“저에게 미첼 씨에 관해 이야기해주시던 중이었어요.”
“아, 그랬지. 그래서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어요. 그날 밤 큰 혜성이 나타났죠. 결혼식을 마치고 마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혜성을 봤어요. 블라이드 부인이 그 혜성을 보지 못해 정말로 유감이에요. 정말로 아름다웠거든요. 그걸 추모시에 넣을 수 있을까요, 할 수 있겠어요?”
“그건 좀 어렵겠는데요.”
미첼 부인은 한숨을 쉬면서 혜성을 단념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주세요. 그 사람은 그리 떠들썩하게 삶을 살지는 않았어요. 딱 한 번 술에 취한 적도 있긴 했죠. 술을 마시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서 한 번쯤은 마셔보고 싶었다고 하더군요. 항상 그렇게 궁금증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그것을 추모시에 넣을 수는 없겠죠? 그 사람 인생엔 뭐 커다란 일도 없었어요. 불평할 일도 없었지요.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변화가 없고 뭐 되는 대로 편하게 살자는 주의였죠. 접시꽃을 바라보며 한 시간이나 멍하니 앉아 있기도 했어요. 꽃을 참 좋아했거든요. 미나리아재비를 뽑아내 버리기도 싫어했죠.
여름을 아쉬워하며 마지막으로 피어 있는 꽃들과 미역취만 있으면 밀 수확량이야 많든 적든 상관하지 않았죠. 게다가 나무랑 과수원은 또 어떻고요. 난 언제나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이가 나보다 나무를 더 좋아한다고 말했죠.
그리고 그의 농장도요. 그 사람은 땅을 참 사랑했어요. 땅을 마치 인간처럼 여겼어요. 그 사람이 ‘이제 나가서 내 농장이 내게 속삭이는 소리를 들어줘야겠어.’라고 말하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지요. 나이를 먹고 나서는 우리에rps 아들이 없으니 농장을 팔고 로브리지로 가서 살자고 했지만 남편은 ‘난 농장을 팔 수 없어. 내 심장을 도려내는 것 같을 거야.’ 하더라고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남자지요? 그 사람이 죽기 얼마 전에는 점심으로 삶은 닭요리를 해달라고 했어요. ‘당신이 언제나 하는 요리 있잖아, 그걸 먹고 싶어.’ 하고 말했죠. 그 사람은 언제나 내가 손수 해주는 요리를 좋아했지요. 내가 만들어주는 음식 중에 한 가지 싫어했던 음식은 호두를 넣은 양상추 샐러드였어요. 느닷없이 호두가 튀어나오면 몹시 불쾌하다고 했지요. 하지만 우리 집엔 삶아 먹을 암탉이 없었어요. 다들 알을 아주 잘 낳았거든요. 그리고 수탉은 딱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놈을 잡아먹을 수는 없었어요. 그 멋진 수탉이 어슬렁어슬렁 다니는 것이 얼마나 보기 좋은데요. 그렇지 않아요, 블라이드 부인? 멋진 수탉보다 더 보기 좋은 게 있다고 생각해요, 블라이드 부인? 그런데 어디까지 이야기했지요?”
“남편이 암탉 요리를 해달라고 말한 대목이요.”
“아, 그랬지요. 그래서 난 닭요리를 해주지 않았던 것을 내내 후회하며 살지요. 밤에 잠이 깨서도 그 생각이 난다니까요. 하지만 난 앤서니가 죽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블라이드 부인. 절대로 불평 같은 건 하지도 않았고 언제나 어제보다 더 나아졌다고만 말했거든요. 그리고 죽는 날까지도 이런저런 일에 흥미를 잃지 않았어요. 내가 만일 앤서니가 죽을 거라는 걸 알았다면 알을 낳든 못 낳든 암탉을 잡아 요리해주었을 거라고요, 블라이드 부인.”
미첼 부인은 빛바랜 검은 레이스 장갑을 벗고 5센티미터는 되게 검은색으로 가장자리를 두른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부인은 흐느끼며 말했다.
“닭요리를 해주었으면 맛있게 먹었을 텐데.”
그런 다음 손수건을 접고 장갑을 다시 끼며 말을 계속했다.
“마지막까지도 이는 튼튼했거든요. 어쨌거나 그 사람은 예순다섯까지나 살았으니 나이로 말하면 그렇게 일찍 죽었다고 볼 수도 없죠. 나는 관 뚜껑 명찰을 또 한 장 손에 넣은 셈이고요. 메리 마르타 플러머와 나는 같이 관 뚜껑 명찰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메리가 곧 나를 앞질러버렸어요. 메리의 자식 셋은 말할 것도 없고 메리 친척이 숱하게 세상을 떴으니까요. 어쨌거나 메리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관 뚜껑 명찰을 많이 가졌어요. 나는 운이 별로 없어 그걸 많이 모으지 못했지만 그래도 벽난로 선반을 가득 채울 만큼은 모았지요. 내 사촌 토머스 베이츠가 지난주에 묻혀서 토머스 아내에게 관 뚜껑 명찰을 달라고 했더니, 토머스와 함께 땅에 묻어버렸다더군요. 관 뚜껑 명찰을 모으는 취미는 야만적인 풍습이라나요. 그 여자는 햄프슨 집안사람인데 햄프슨 집안사람은 다들 그렇게 이상한 구석이 있어요. 내가 어디까지 이야기했죠?”
이번에는 앤도 미첼 부인이 어디까지 이야기했는지 알수 없었다. 관 뚜껑 명찰 이야기로 완전히 멍해져 버린 상태였다.
“어쨌거나 우리 가여운 남편은 세상을 떴어요. ‘나는 기쁜 마음으로 조용히 가겠소.’라는 말만 남기고요. 그런데 나와 세러핀을 향해서가 아니라 천장을 향해서 말했어요. 마지막까지 미소를 지은 채 갔어요. 나는 앤서니가 그렇게 행복하게 세상을 떠나서 무척이나 기뻐요. 한때는 그 사람이 그렇게 행복하지 않은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어요, 블라이드 부인.
앤서니는 아주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사람이었거든요. 하지만 관에 누워 있는 그 사람 모습은 너무나 고상해 보이고 숭고해 보이기까지 했어요. 우리는 장례식을 근사하게 치러주었죠. 그날은 날씨도 참 좋았어요. 산더미처럼 많은 꽃과 함께 묻혔답니다. 나는 마지막에 기절해버렸는데, 그 일만 빼놓으면 모든 것이 다 잘되었어요. 그 사람 가족은 전부 로브리지에 묻혔지만 우린 앤서니를 글렌 윗마을 묘지에 묻어주었어요. 자기 농장 근처에 묻히고 싶다면서 그 사람이 자기 묻힐 곳을 오래전에 골라두었거든요. 바닷소리도 들을 수 있고, 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 소리도 들을 수 있는 곳에 있고 싶다고 했어요. 그 묘지는 삼면이 나무로 둘러싸여 있어요. 그래서 나도 기분이 좋아요. 묘지가 아주 아늑하게 느껴지거든요. 무덤가에 제라늄을 심을 생각이에요. 앤서니는 참 좋은 사람이었어요. 지금은 틀림없이 천국에 가 있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죽은 사람이 천국으로 갔는지 지옥으로 떨어졌는지도 모르면서 추모시를 쓰는 것은 힘들 거라고 생각해요. 그럼 이제 내가 블라이드 부인을 믿어도 되겠지요?”
앤은 이 일을 허락하지 않으면 미첼 부인이 절대로 가지 않고 허락할 때까지 앤을 붙들고 이야기를 계속할 것 같아 추모시를 써주기로 했다. 미첼 부인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고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제 가봐야겠네요. 우리 칠면조가 오늘 알을 깔 것 같거든요. 부인과 참 즐겁게 이야기 잘 나누었네요. 더 놀다 가고 싶은 생각까지 들어요. 미망인으로 산다는 게 참 쓸쓸하거든요. 남자가 뭐 대단한 존재는 아닐지 모르지만 가버리고 나니 쓸쓸해요.”
앤은 정중하게 보도까지 따라 나가 부인을 배웅했다. 아이들은 잔디밭에서 몰래 울새 뒤를 쫓느라 정신이 없었고, 사방에서 수선화가 머리를 삐죽이 내밀고 있었다.
“집이 참 좋네요. 정말로 자랑스럽게 여길 만한 집이에요, 블라이드 부인. 난 언제나 큰 집을 갖고 싶었죠. 하지만 가족이라고는 세러핀과 나뿐인데 돈이 어디서 나오겠어요? 그리고 앤서니는 그런 말을 귀담아듣지도 않았어요. 앤서니는 그 낡은 집에 굉장한 애착을 갖고 있었죠. 난 그 집을 팔고 로브리지나 모브레이 내로우즈로 가서 살 생각이에요. 미망인이 살기에 좋은 곳들이죠.
앤서니의 보험금이 아주 유용해요. 주머니가 텅 비어 있을 때보다는 두둑한 편이 슬픔을 견디기에도 더 낫거든요. 부인도 미망인이 되어보면 내 말을 이해하게 될 거예요. 그래도 그런 일은 앞으로 오래오래 후에 생기길 바라죠. 의사 선생님은 어떠신가요? 정말이지 올겨울에는 아픈 사람이 많아서 수입이 꽤 짭짤했을 거예요. 다복하게도 아이들이 참 많네요! 따님이 셋이라니! 지금은 좋지만 머지않아 남자한테 빠져서 헤맬 때 보세요. 그렇다고 내가 세러핀 때문에 애먹었다는 건 아니에요. 그 아이는 아주 얌전했어요. 제 아버지처럼요. 고집스러운 것도 제 아버지를 닮았고요. 존 휘태커와 사랑에 빠졌을 때도 내가 무슨 말을 하건 기어이 그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고집을 피웠거든요. 마가목인가요? 현관 옆에 심지 그랬어요? 요정을 쫓아내 준다는데.”
“왜 요정을 쫓아내려고 하죠, 미첼 부인?”

“앤서니와 똑같은 말을 하는군요. 그냥 농담이에요. 물론 나는 요정 같은 건 믿지 않아요. 만일 그런 것이 있다고 해도 아주 몹쓸 짓이나 한다더군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블라이드 부인. 다음 주에 추모시를 가지러 다시 들르지요.”





22






부엌에서 은그릇을 닦으며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다 들은 수잔이 말했다.
“아니, 어쩌다 그런 일에 휘말려 들었어요, 사모님?”
“그러게 말이에요. 하지만 수잔, 정말로 ‘추모시’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나도 앤서니 미첼을 좋아했으니까요. 만난 일은 별로 없지만. 그분도 <데일리 엔터프라이즈>에 자기 추모시가 실리면 무덤 속에서 벌떡 일어날 만큼 놀랄걸요. 앤서니는 유머감각을 가진 사람이거든요.”
“젊었을 때 앤서니 미첼은 정말 좋은 사람이었어요, 사모님. 좀 몽상가 기질이 있긴 했지만요. 베시 플러머를 얻을 수 있을 만큼 배짱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남부럽지 않게 살았고 빚도 다 갚았어요. 그 사람이 그런 아가씨와 결혼할 줄은 아무도 몰랐죠. 지금 베시 플러머는 꼭 희극에 나오는 성 밸런타인 같지만 젊었을 때는 그림처럼 아름다웠지요. 우리들은 말이죠, 사모님, 그렇게 추억으로 간직할 것도 없거든요.”
수잔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맺었다.
“엄마, 뒤 베란다 주변으로 금붕어꽃이 가득 피었어요. 그리고 울새 한 쌍이 부엌 창문턱에 둥지를 짓기 시작했어요. 거기 살도록 놔둘 거죠, 엄마? 창문을 열어서 새들을 놀라게 하면 안 돼요, 알았죠?”
월터가 말했다.
미첼 씨 집은 아래 글렌 마을에 있었고, 그곳 사람들은 대부분 모브레이 내로우즈 의사에게 다니긴 했지만 앤은 앤서니 미첼을 한두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가문비나무 숲과 바다 사이에 있는 그 작고 우중충한 집은 버드나무가 커다란 우산처럼 가지를 뻗어 감싸고 있었다.
가끔씩 길버트가 앤서니에게 건초를 사서 건초 더미를 갖고 오는 앤서니를 앤이 정원 구석으로 안내했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마음이 통하는 것을 느꼈다. 앤은 앤서니 미첼을 좋아했다. 앤서니의 마르고 주름졌지만 친근해 보이는 얼굴, 용기 있어 보이고 예리해 보이던 갈색 눈은 어떤 일에도 결코 주춤거리거나 속아 넘어가는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아마도 단 한 번, 베시 플러머의 천박하고 하릴없는 아름다움에 현혹되어 결혼까지 하게 되었을 때만 빼고는.
그러나 앤서니는 결코 불행해 보이거나 삶에 불만을 품고 있는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뜰을 가꾸고 추수를 하며 양지 바른 정든 목장을 만족스럽게 바라볼 수만 있다면 만족할 사람이었다. 그의 검은 머리칼에도 이제 살짝 은빛 서리가 내렸지만 가끔씩 보이는 그의 보기 좋은 미소에는 원숙하고 평화로운 마음이 드러나 있었다. 그의 정든 농장은 그에게 빵과 즐거움을 주었다. 구하던 것을 얻었을 때의 기쁨과 슬플 때의 위안도 주었다. 앤은 그가 가까이 묻혀 있는 것을 기쁘게 여겼다. 앤서니는 ‘기쁘게 갔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도 기쁘게 살았으니까.
모브레이 내로우즈 의사 말에 따르면 회복될 가망이 없다고 했을 때 앤서니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고 한다.
“삶이란 가끔씩 너무 단조롭더군요. 이제 난 늙어갑니다. 죽음이 이런 삶에 변화를 가져다주겠군요. 난 죽음이 어떤 것인지 정말로 궁금합니다, 선생님.”
앤서니 부인이 두서없이 늘어놓았던 사소한 이야기 가운데서 두서너 가지 참다운 앤서니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이삼일 뒤 저녁 무렵 앤은 흡족한 마음으로 자기 방 창가에 앉아 <노인의 묘지>를 다시 한 번 읽어보았다.

소나무 가지를 부드럽고 다정하게 스치며
그곳으로 바람이 불어오리
반짝이는 초원을 지나
바다의 속살거림이 들려오리
빗방울이 그 사람 잠든 곳으로 떨어지며
다정하게 노래 부르리

그 사람이 누운 목장 여기저기
초록으로 물들으리
그가 걷고 추수하던 들판
클로버가 물결을 이룬 서쪽 들판
만발한 꽃 이파리 휘날리는 과수원
오래전에 그 사람이 심은 과일나무들

별빛이 흐릿해지는 곳에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으리
그의 침상 주변으로 풍요롭게
떠오르는 해의 영광이 퍼지리
잠들어 있는 그를
이슬 머금은 풀들이 부드럽게 감싸리

그 사람은 긴 세월 동안
이런 것들을 다정히 여기며 살았으니
그것들이 그가 안식하는 곳에 있으리
그것들과 만나는 은총을 누리리
바다의 속살거림이
영원히 그에게 만가를 불러주리

“앤서니 미첼도 이 시가 마음에 든다고 할 거야.”
앤은 창문을 활짝 열고 봄 속으로 몸을 내밀며 중얼거렸다. 아이들이 가꾸는 뜰에는 벌써부터 양상추의 어린 새싹이 구불구불 작은 줄을 지어 나오고 있었다. 단풍나무 숲 뒤로 저녁 해는 부드러운 분홍빛을 드리웠고, 골짜기에서 아이들의 귀여운 웃음소리가 울렸다.
“봄은 너무 아름다워서 잠을 자버리고 싶지 않아. 한순간도 놓치기 싫어.”
앤이 말했다.
그다음 주 어느 날 오후, 앤서니 미첼 부인이 ‘추모시’를 가지러 왔다. 앤은 마음속으로 아주 만족해하며 그 시를 읽어주었다. 그러나 미첼 부인 얼굴은 별로 만족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아주 활기가 있어요. 글은 아주 잘 썼어요. 하지만, 하지만 앤서니가 천국에 있다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잖아요. 천국에 있는 걸 확신하지 못했어요?”
“분명히 천국에 계시다는 걸 아니까 오히려 말할 필요가 없었던 거예요, 미첼 부인.”
“어떤 사람들은 의심할지도 몰라요. 앤서니는 교회에 그리 자주 가는 편이 아니었으니까요. 교회의 정식 신도이기는 했지만 말예요. 그리고 앤서니 나이도 말하지 않았고, 꽃 얘기도 없어요. 관 위에 놓인 화관이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요. 꽃은 충분히 시적이잖아요. 내 생각엔 그런데요.”
“죄송하군요…….”
“부인을 나무라는 건 아니에요. 조금도 나무라고 싶진 않아요. 최선을 다하셨고 훌륭하게 되었잖아요? 얼마를 드려야지요?”
“아니에요, 전 돈을 받으려고 한 일이 아니에요, 미첼 부인. 그런 건 생각해보지도 않았어요.”
“사실은 부인이 그렇게 말할 것 같아서 내가 민들레 약술을 한 병 가져왔어요. 배 속에 가스가 차서 속이 거북할 때 한 잔 마시면 속이 편해져요. 약초 차도 한 병 가져올까 했지만 선생님이 좋아하지 않으실 것 같아서요. 하지만 부인만 좋다면 선생님 모르게 살짝 좀 드릴테니까 말만 하세요.”
“아, 아니에요, 천만에요.”
앤이 분명하게 거절했다. 앤은 그 ‘활기차다’라는 말에서 아직 벗어나질 못했다.
“원하면 말씀만 하세요. 부인이 달라면 언제든 기꺼이 줄게요. 나는 올봄에 약이 필요 없거든요. 겨울에 내 육촌동생 말라치 플러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말라치 부인에게 남은 약 가운데 세 병을 달라고 했답니다. 그 집은 약을 다스로 사거든요. 약을 버리려 했다는 거예요. 난 무슨 물건이건 그렇게 함부로 버리는 건 싫어요. 내 몫으로 한 병을 남기고 남은 두 병은 우리 집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주었어요. 효과는 없을지 몰라도 적어도 해롭지는 않을 거라고 말하면서요.
추모시 대금을 받지 않겠다고 하여 실은 마음이 놓인답니다. 지금 난 돈이 좀 부족하거든요. D. B. 마틴이 이 근방에서 제일 싸게 장례를 치러주긴 하지만 장례식엔 원래 돈이 많이 들잖아요. 아직 내 상복 값도 다 치르지 못했어요. 그 돈을 다 갚을 때까지는 내가 정말로 상복을 입고 애도를 하고 있다는 기분이 나지 않을 것 같아요. 다행히도 보닛은 새로 만들지 않아도 되었지요. 10년 전 어머니 장례식 때 이 보닛을 만들어둔 게 있었거든요. 나한테 상복이 잘 어울려서 참 다행이에요. 그렇지요? 말라치 플러머의 미망인 꼴을 봤다면, 그 파리하고 누르스름한 얼굴을 말예요! 그럼 그만 일어서야겠네요. 참으로 신세 많이 졌어요, 블라이드 부인. 난 부인이 최선을 다했고 이건 아주 멋진 시라고 생각해요.”
“좀 더 있다가 우리랑 같이 저녁을 들고 가시죠. 수잔과 나뿐이에요. 남편은 집에 없고 아이들은 올봄 처음으로 골짜기에서 소풍하며 저녁을 먹기로 했거든요.”
“그럼 그렇게 하는 것도 괜찮겠군요. 조금만 더 앉았다가겠어요. 나이가 들면 쉬는 것도 조금 앉아 있는 걸로는 어림도 없어요.”
앤의 말에 미첼 부인은 얼른 다시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 혈색 좋은 얼굴에 꿈꾸듯 더없이 행복한 미소를 떠올리며 덧붙였다.
“그런데 어디서 방풍나물튀김 냄새가 나지 않나요?”
앤은 그다음 주 <데일리 엔터프라이즈>가 나왔을 때 미첼 부인에게 대접했던 방풍나물튀김이 아까운 마음마저 들었다. 부고란에는 <노인의 묘지>가 실려 있었다. 하지만 앤이 원래 써준 4연이 아니었다. 그 시는 5연으로 되어 있었고, 그 5연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훌륭한 남편이자 친구요 원조자였던 당신,
신이 만든 사람 가운데 누가 그토록 훌륭했겠는가!
훌륭한 남편이자 다정하고 진실했던 당신,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람! 앤서니, 바로 당신입니다!

‘잉글사이드’ 사람들은 모두 할 말을 잃어버렸다.
“내가 한 절을 덧붙였다고 마음 쓰지 말아요. 나는 그저 앤서니를 좀 더 칭찬해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내 조카 조니 플러머더러 그렇게 써달라고 했죠. 조니는 자리에 앉자마자 눈 깜짝할 사이에 그걸 썼어요. 조니도 꼭 부인 같거든요. 보기에는 별로 시적으로 보이지 않아도 뭐든 시로 만드는 건 잘해요. 그런 기질을 제 어머니한테 물려받았죠. 어머니가 위크포드 집안사람이거든요. 플러머 집안사람은 시를 쓰는 소질 같은 건 조금도 없어요, 전혀요.”
미첼 부인은 다음 협회 모임 때 앤을 만나자 변명했다.
“처음부터 미첼 씨 추모시를 조니 플러머에게 써달라고 했었더라면 좋았을 뻔했네요.”
앤이 차갑게 말했다.
“그렇지요? 하지만 난 그 애가 시를 쓰는 줄 몰랐어요. 나는 꼭 시로 앤서니를 떠나보내고 싶었는데요. 그런데 그 애 어머니가 그 아이가 쓴 거라면서 메이플 시럽 통에 빠져 죽은 다람쥐에 관한 시를 보여주더군요. 정말 감동적인 시였어요. 하지만 블라이드 부인의 시도 정말 잘되었어요. 난 두 사람의 시가 함께 엮여서 정말로 훌륭한 시가 탄생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아요?”
“네, 그래요.”
앤이 말했다.


추천 (1) 선물 (0명)
IP: ♡.252.♡.103
뉘썬2뉘썬2 (♡.169.♡.51) - 2024/04/12 01:52:45

소설 등장인물들이 정말로 많네요.이때는 남편이 돌아가면 검정색상복을 입어야햇고 추모시도
썻댓네요.딸이크면 남자도 만나고 연애도 해야지 맨날 엄마꽁무니만 졸졸쫓아다닐순 없죠.

앤은 봄이 너무 아름다워서 잠자고싶지 않다는데 나는너무 졸리네요.

나단비 (♡.62.♡.158) - 2024/04/12 06:34:38

봄날에는 꽃구경 돌아다니고싶은데 봄이라서 졸린게 함정이네요.

예전 소설이라 시대차이를 보는 재미도 쏠쏠해요.

뉘썬2뉘썬2 (♡.169.♡.51) - 2024/04/12 07:11:22

캐나다가 많이 춥던가요?4월에도 눈이내린다니.캐나다는 땅이넓고 시골이많죠?
시대차이와 동서양차이도 느껴지지만 이렇게 소설로나마 가보지못한 캐나다이야
기를 들을수잇어서 좋죠.

나단비 (♡.62.♡.158) - 2024/04/12 11:34:26

드라마 도깨비에서 단풍나무 나오는 것만 본적 있어요.
듣기론 캐나다도 춥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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