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6권 31~32

나단비 | 2024.04.12 18:51:25 댓글: 0 조회: 51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60517
31






저녁 식사를 하며 수잔이 물었다.
“왜 그렇게 먹지를 못하니, 낸?”
“너 햇빛에 너무 오래 나가 논 거 아니니? 머리가 아파?”
엄마도 물었다.
“네에에.”
낸이 대답했다. 하지만 낸은 머리가 아픈 것이 아니었다. 지금 내가 엄마에게 거짓말하고 있는 걸까? 만일 그렇다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이 거짓말을 해야 할까? 낸은 다시는 음식을 먹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렇게 무서운 비밀을 가슴속에 숨겨두고 사는 한은 두 번 다시 음식을 먹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이 사실을 엄마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꼭 약속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젠가 수잔이 나쁜 약속이라면 깨버리는 게 차라리 낫다고 했다. 하지만 그 말을 하면 엄마도 괴로울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낸은 이 일이 엄마를 지독하게 괴롭히리라는 것만은 틀림없이 알았다. 결코 엄마를 괴롭혀서는 안 된다. 아빠도 마찬가지다.
그렇긴 하지만, 캐시 토머스는? 낸은 캐시를 낸 블라이드라고 부를 수 없었다. 캐시 토머스를 낸 블라이드라고 부르는 건 말로 다할 수 없이 끔찍스러운 일이다. 그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자기 존재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것 같았다. 자기가 낸 블라이드가 아니라면 자기는 아무도 아니다. 절대로 캐시 토머스는 될 수 없다.
하지만 캐시 토머스란 이름이 낸에게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한 주 동안이나 낸은 캐시에게 시달림을 당했다. 그 한 주 동안 잘 먹지도 놀지도 않고 괴로워만 보이는 아이를 두고 앤과 수잔은 걱정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수잔의 말을 빌면 ‘멍하니 우울해’ 보이기만 했으니까. 도비 존슨이 집에 가버려서 그러냐고 물어도 낸은 아니라고 했다. 낸은 아무 일도 없다고, 단지 피곤할 뿐이라고 했다. 아빠가 낸을 살펴본 다음 약을 주자 순하게 받아먹었다. 그 약은 피마자기름보다 나았지만 지금은 피마자기름이건 뭐건 아무 상관도 없었다. 캐시 토머스란 이름이 낸의 마음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이 무섭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는 그 어느 것도 의미가 없었다.
‘캐시 토머스가 자기 권리를 찾도록 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이것은 캐시 토머스, 아니 낸 블라이드에게 공정한 일이 아니다. 낸은 자기의 정체성에 필사적으로 매달려보려고 했지만 사실은 이 모든 것이 캐시의 것이지 않은가? 아니다. 이건 공정하지 않다. 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절망에 빠져버렸다. 낸은 매우 강한 정의감과 페어플레이 정신을 가진 아이라서 캐시 토머스에게 이 모든 사실을 털어놓아야 한다는 생각이 점점 더 강해졌다.
그리고 결국에는 아무도 이 일에 신경 쓰지 않게 될 것이다. 엄마 아빠도 물론 처음에는 가슴 아파하겠지만 캐시 토머스가 자기 자식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 엄마 아빠의 사랑이 모두 캐시에게 가 버릴 것이다. 낸은 곧 잊히고 말 것이다. 엄마는 캐시 토머스에게 입맞춤을 해주고, 여름날 해 질 무렵이면 캐시에게 노래를 불러줄 것이다. 낸이 가장 좋아하던 노래를…….

“나는 항해 중인 배 한 척을 보았죠, 바다 위를 항해하는.
그 배는 나를 위해 멋진 것들을 가득 싣고 있답니다!”

낸과 다이는 자기네 배가 들어오면 얼마나 좋을지 이야기하고는 했다. 하지만 이제 예쁜 것들은 모두 캐시 토머스의 차지가 되어버릴 것이다. 다음 주일 학교에서 있을 발표회에서 낸이 하기로 되어 있는 요정 여왕 역할도 캐시 토머스가 맡게 될 것이다. 반짝반짝하는 황금빛 옷을 입기로 했는데. 낸은 그날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모른다! 수잔은 이제 캐시 토머스를 위해 과일을 올린 슈크림 케이크를 만들 것이고, 푸시 윌로우도 캐시를 위해 가르랑거릴 것이다. 낸의 장난감도 다 차지해버릴 것이고, 단풍나무 숲에 있는 이끼가 폭신폭신하게 덮인 장난감 집도 캐시 것이 될 것이며, 자기 침대에서 자는 사람도 캐시가 될 것이다. 다이가 그걸 좋아할까? 다이는 캐시와 자매가 되고 싶어 할까?
결국에는 그날이 왔다. 낸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옳은 일이라고 생각되는 일을 해야만 했다. 낸은 항구 어귀 토머스네 집에 찾아가서 모든 진실을 밝히기로 했다. 엄마 아빠에게는 그 사람들이 이야기해줄 것이다. 낸은 차마 엄마 아빠에게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낸은 이렇게 결정을 내리고 나자 마음이 좀 편해졌지만 너무나 슬펐다. ‘잉글사이드’에서 하는 마지막 식사이므로 저녁밥을 조금 먹어보려고 했다.

‘난 언제나 우리 엄마를 엄마라고 부를 거야. 그리고 여섯 발가락 지미에게 ‘아빠’라고 부르지도 않을 거야. 그냥 공손하게 ‘토머스 씨’라고만 부르겠어. 그래도 그분은 기분 상해하지 않을 거야.’
낸은 절망적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무엇인가가 목구멍에서 치밀어 올라왔다. 눈을 들어보니 수잔의 눈에 ‘피마자기름’이라고 쓰여 있었다. 수잔은 저 꼬마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도 이 집에 머물러 얌전히 피마자기름을 받아먹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걸 삼킬 사람은 캐시 토머스겠지. 그것 하나만큼은 캐시를 부러워하지 않아도 되겠군.
낸은 저녁을 먹자마자 길을 나섰다. 어두워지기 전에 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용기를 잃고 말 것 같았다. 낸은 체크무늬 무명 놀이옷을 입고 있었지만 옷을 갈아입을 생각은 감히 하지 않았다. 그랬다간 수잔이나 엄마가 왜 옷을 갈아입느냐고 물을 것이다. 게다가 이제 낸의 예쁜 옷은 모두 캐시 토머스의 것이지 않은가. 하지만 수잔이 새로 만들어준 앞치마는 입었다. 조가비 장식이 달린 무척 보기 좋고 귀여운 앞치마였다. 낸은 붉은색 조가비 장식이 붙은 그 앞치마를 무척 좋아했다. 이 앞치마를 입었다고 캐시 토머스도 많이 불평하진 않을 것이다.
낸은 마을을 향해 걸어갔다. 마을을 벗어나 부두 길도 지나고 항구 길로 내려갔다. 얼마나 용감하고 불굴의 의지를 가진 꼬마인지. 하지만 낸은 자기가 영웅이라는 생각조차도 없었다. 아니, 그 반대로 자신이 부끄러웠다. 옳고 정당하다고 여기는 일을 하기가 무척이나 힘들었고, 캐시 토머스가 밉다는 생각도 누르기 힘들었으며, 여섯 발가락 지미가 무서운 마음을 참기도, 뒤돌아 ‘잉글사이드’로 달려가 버리고 싶은 마음을 참기도 힘들었다.
저녁 해가 점점 떨어져 가고 있었다. 바다 저 위로 검은 구름이 커다란 검은 박쥐처럼 무겁게 걸려 있었다. 항구 저 너머 그리고 언덕 너머 우거진 숲 위에서 번개가 번쩍이는 것이 보였다. 항구 어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어부의 집들이 구름 아래로 빠져나온 붉은 불빛의 홍수에 어른거렸다. 여기저기 물웅덩이도 거대한 루비처럼 반짝였다. 바다에는 하얀 돛을 펼친 배 한 척이 신비로운 바다의 부름에 응하여 조용하게 떠내려갔다. 갈매기들이 우는 소리가 낯설게 느껴졌다.
낸은 어부들 집에서 나는 냄새가 싫었고, 모래 언덕에서 서로 뒤엉켜 소리 지르며 노는 더러운 아이들도 싫었다. 낸이 어느 집이 여섯 발가락 지미네 집인지 물으려고 발길을 멈추자, 아이들이 호기심 어린 눈길로 낸을 바라보았다.
“저기 저 집인데, 그런데 그 집엔 무슨 일로 가려는 거지?”
한 남자아이가 손으로 집을 가리키며 물었다.
“고마워.” 
낸은 말하고 몸을 돌렸다.
“넌 무슨 애가 예의라는 것도 모르냐?”
여자아이 하나가 소리쳤다.
남자아이가 낸의 길을 막아섰다.
“너 저 토머스네 집 뒤 보이지? 저 집에는 커다란 바다뱀이 살아. 네가 여섯 발가락 지미네 집에 무슨 볼일이 있는지 이야기해주지 않으면 널 저 집에 가두어버릴 거야.”
아이가 위협했다.

“어이, 거만한 아가씨, 너 글렌 살지? 글렌에 사는 것들은 모두 제가 잘난지 알더라. 자, 빌이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보시지.”
커다란 여자아이도 낸을 을러댔다.
“너 조심하지 않으면, 고양이 새끼들을 바다에 빠뜨려버리고 너도 같이 처박아버릴 거야.”
다른 남자아이도 위협했다.
“너 10센트 있으면 내놔. 내 이를 팔게. 어제 이를 하나 뽑았거든.”
피부가 가무잡잡한 여자아이가 말했다.
“난 10센트도 없고, 네 이 같은 건 필요 없어. 날 내버려둬.”
낸이 용기를 내어 외쳤다.
“입 닥쳐!”
가무잡잡한 여자아이가 말했다.
낸은 달리기 시작했다. 바다뱀 소년이 발을 걸어 낸을 넘어뜨렸다. 낸은 파도 자국이 나 있는 모래에 벌러덩 넘어져 버렸고 아이들이 모두 와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젠 머리를 그렇게 꼿꼿이 들고 거만 떨지 못하겠지? 빨간 조가비 같은 걸 달고 잘난 척하기는.”
무섭게 생긴 여자아이가 말했다.
“블루 잭의 배가 들어온다!”
그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아이들이 모두 달려가 버렸다. 검은 구름은 더욱 낮아지고 루비 같은 물웅덩이는 모두 잿빛으로 변했다.
낸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옷에는 모래가 묻고 양말도 더러워졌다. 그러나 심술궂은 아이들로부터 풀려난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앞으로는 저 애들이 내 친구가 되는 것일까?
울어선 안 된다. 울어선 안 돼! 낸은 여섯 발가락 지미네 집 문 앞에 놓인 덜거덕거리는 나무 층계를 올라갔다. 다른 항구 어귀의 집들처럼 여섯 발가락 지미네 집도 높은 파도가 닿지 못하도록 나무 받침대 위에 지어졌다. 집 아래 빈 공간에는 깨진 접시며 빈 깡통, 낡은 갯가재 어망과 같은 온갖 잡다한 것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문이 열려 있어 낸은 부엌을 들여다보았다. 그런 부엌은 평생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맨 마룻바닥은 더럽기 짝이 없었고,천장은 얼룩과 그을음이 가득했으며, 개수대에는 더러운 접시가 잔뜩 쌓여 있었다. 먹다 남은 음식은 낡은 나무 식탁 위에 너저분하게 널려 있고 끔찍스럽게 커다란 검은 파리들이 그 위에 잔뜩 앉아 있었다. 잿빛 머리를 어지럽게 흐트러뜨린 여자가 흔들의자에 앉아 뚱뚱한 아기를 어르고 있었다. 아기도 어찌나 더러운지 새까맸다.
‘내 동생이야.’
낸은 생각했다.
캐시와 여섯 발가락 지미는 없는 것 같았다. 지미가 없어 낸은 무척 다행이다 싶었다.
“넌 누구니? 무슨 일이지?”
여자가 무뚝뚝하게 물었다.
여자는 낸에게 들어오라고 하지 않았지만, 낸은 안으로 들어갔다. 밖은 비가 오기 시작했고 천둥소리로 집이 흔들릴 지경이었다. 낸은 용기가 없어지기 전에 무엇 때문에 왔는지 이야기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끔찍한 집과 저 끔찍한 아기와 더더욱 끔찍한 파리에게 등을 돌리고 달아나버리게 될 게 틀림없었다.
“캐시를 만나고 싶어요. 중요한 할 이야기가 있어요.”
낸이 말했다.
“아니, 이런 시간에! 너 같은 꼬마가 밤중에 오다니 뭔가 중요한 이야기인 게 틀림없겠지. 그런데 캐시는 지금 집에 없단다. 아빠 따라서 글렌 윗마을에 갔어. 이렇게 비바람이 몰아치니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구나. 좀 앉으렴.”
낸은 다 부서진 의자에 앉았다. 항구 어귀 사람들이 가난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낸은 이렇게 가난하게 사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글렌 마을의 톰 피치 부인도 가난하지만 톰 피치 부인의 집은 ‘잉글사이드’ 못지않게 깔끔하고 정갈했다. 물론 여섯 발가락 지미가 돈을 버는 족족 다 술을 마셔버린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집이 바로 낸이 살아야 할 집인 것이다!
‘집은 내가 치우면 되지, 뭐.’
낸은 생각했지만 너무나 슬픈 기분이 들었고 마음이 납덩이같았다. 낸을 여기까지 오게 만든 숭고한 자기희생의 불꽃은 모조리 꺼져버렸다.
“무슨 일로 캐시를 만나러 왔지?”
토머스 부인이 궁금해 죽겠다는 듯 물으며 더러운 아기 얼굴을 그보다 더 더러운 앞치마로 닦아주었다.
​​“만일 주일 학교 발표회 때문이라면 캐시는 갈 수 없단다. 그건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어. 캐시는 입을 만한 옷도 하나 없다고. 내가 어떻게 캐시에게 좋은 옷을 마련해줄 수 있겠니?”
“아니요. 발표회 때문이 아니에요.”
낸이 기운 없이 말했다. 토머스 부인에게 다 말해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알아야 할 일이니까.
“캐시를 만나러 온 이유는…….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캐시가 저고, 제가 캐시라는 거예요.”
토머스 부인이 그 말이 무슨 소린지 얼른 알아듣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네가 정신이 좀 돈 모양이구나. 도대체 그 말이 다 무슨 소리니?” 부인이 말했다.
낸은 머리를 들었다. 적어도 가장 힘든 말은 다 했다.
“캐시와 저는 같은 날 밤에 태어났어요. 그런데…… 간호사가 우리를 바꿔치기해버린 거예요. 그 간호사는…… 우리 엄마를 싫어했거든요. 사실은 그래서…… 캐시는 ‘잉글사이드’에 살아야 하는 거라고요. 캐시가 혜택을 누려야 해요.”
그 마지막 말은 주일 학교 선생이 하는 말을 들은 것인데 그 덕에 앞뒤 조리가 엉망인 이야기를 위엄 있게 끝맺을 수 있었다고 낸은 생각했다.
토머스 부인은 지그시 낸을 보았다.
“내가 정신이 돈 거니, 아니면 네가 돌았니?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구나. 네가 한 말은 말이 안 돼. 누가 그런 말을 너에게 하던?”
“도비 존슨이요.”
토머스 부인은 정신 사납게 흐트러진 머리를 뒤로 젖히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부인은 지저분하고 깔끔하지 못한 모습이었지만 웃는 얼굴은 보기가 좋았다.
“내가 그 애를 아는데 말이야. 내가 올여름 내내 그 애 숙모네 집에서 빨래를 해주었거든. 그 아이는 정말로 골칫거리더구나. 세상에, 남을 속이는 일이 똑똑한 거라고 알고 있으니! 있잖니, 꼬마 아가씨, 네 이름이 뭐랬더라, 하여간 넌 그 도비가 한 헛소리를 그대로 믿으면 안 돼. 그렇지 않으면 머리가 뱅뱅 돌아버릴걸.”
“그러니까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건가요?”
낸은 숨이 막혔다.
“전혀 아니야. 그나저나 그런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버리다니 너도 상당히 숙맥인 모양이구나. 캐시는 아마 너보다 한 살 위일 거야. 어쨌든 너는 대체 누구냐?”
“낸 블라이드예요.”
아, 이 얼마나 멋진가! 나는 낸 블라이드인 것이다!
“낸, 블라이드라고? ‘잉글사이드’의 쌍둥이 중 하나구나! 그렇지, 나는 너희가 태어난 날 밤 일을 다 기억하고 있어. 마침 볼일이 있어서 그날 내가 ‘잉글사이드’에 들렀었거든. 그때는 내가 아직 여섯 발가락과 결혼하지 않았을 때였어……. 일이 그리 된 것이 몹시 유감이다만…… 캐시의 어머니도 건강하게 살아 있었을 때였지. 캐시는 이제 막 걷기 시작했을 때였고. 넌 꼭 너희 할머니를 닮았었다. 그날 밤 거기에 그분이 계셨거든. 쌍둥이 손녀들을 아주 자랑스러워했지. 너도 그런 미친 소리를 믿다니 분별력을 길러야겠구나.”
“전 원래 사람들을 잘 믿는 버릇이 있어요.”
낸이 약간 위엄 있는 태도로 말했다. 하지만 토머스 부인을 날카롭게 꾸짖기에는 정신이 나가버릴 지경으로 너무나 행복한 마음이었다.
토머스 부인이 힐난하는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면 그런 버릇 같은 건 버리는 게 낫겠다. 그리고 사람을 놀리고 다니는 아이들하고는 어울리지 말고. 자, 앉아 봐, 얘야. 이 소나기가 멈출 때까지는 집에 갈 수가 없잖니. 칠흑같이 깜깜한 밤에 소나기가 억수같이 퍼붓고 있으니. 어머나, 저 애가 가버렸잖아…….”
낸은 벌써 소나기가 퍼붓는 밖으로 뛰쳐나와 버렸다. 그 폭풍우 속에서 집으로 가는 동안 낸과 함께한 것은 토머스 부인이 준 엄청난 기쁨 외에 그 어느 것도 없었다. 바람이 온몸을 휘감고 쏟아지는 빗물에 휩쓸려가 버릴 것 같았으며, 무섭게 내리치는 천둥에 세상이 끝장날 것 같은 밤이었다. 끊임없이 번쩍거리는 차갑고 푸른 번갯불만이 낸의 앞길을 비추었다. 낸은 넘어지고 또 넘어졌다. 하지만 드디어 빗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비틀비틀 ‘잉글사이드’ 현관에 도착했다.
엄마가 달려 나와 낸을 품에 안았다.
“오, 우리 아가, 너 때문에 얼마나 놀랐는지 아니? 어디 갔었어?”
“이 빗속에 너를 찾으러 나간 젬이랑 월터가 무사히 돌아오기나 했으면 좋겠다.”
수잔의 목소리에도 긴장이 서려 있었다.
낸은 숨이 멎어버릴 지경이었다. 엄마의 품에 안겨 숨을 몰아쉬었다.
“엄마, 나는 나예요, 정말로 나예요. 나는 캐시 토머스가 아니에요. 다시는 나 외에 다른 사람이 되지 않을 거예요.”

“저 가여운 것이 헛소리를 하네요. 뭘 잘못 먹은 모양이에요.”
수잔이 말했다.
앤은 우선 낸을 씻기고 침대에 들도록 한 다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든 설명을 들었다.
“아, 엄마, 나 정말 엄마 딸 맞죠?”
“물론이지, 우리 아가. 엄마 딸이 아니면 누구게?”
“난 도비가 내게 거짓말을 한 줄 몰랐어요. 도비는 믿지 못할 아이예요. 제니 페니는 다이에게 끔찍한 말을 하고…… 어디 믿을 사람이 있을까요?”
“아니야, 네가 아는 친구들 중에 그런 말을 한 아이는 그 둘밖에 없었잖니. 다른 친구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잖아.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가끔 있단다. 네가 어른이 되면 누가 좋은 사람이고 누가 나쁜 사람인지 알아볼 수 있게 될 거야!”
“엄마, 월터 오빠와 젬 오빠, 그리도 다이는 내가 바보 같은 일을 한 것을 몰라도 되지 않을까요?”
“그럼, 그럴 필요 없지. 다이는 아빠랑 로브리지에 갔단다. 그리고 오빠들은 네가 항구 길을 너무 멀리까지 갔다가 폭풍우를 만난 걸로만 알아. 네가 도비 말을 믿은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지만 네가 옳다고 생각한 일을 하려고, 가여운 캐시의 자리를 돌려주려고 로브리지까지 갔던 것은 무척이나 용감한 행동이었어. 엄마는 네가 무척이나 자랑스럽다.”
폭풍우는 멎었고, 달이 멋지고 행복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난 너무 기뻐, 내가 나라서.’
낸은 이런 생각을 하며 꿈나라로 갔다.
밤중에 길버트와 앤이 아이들이 자는 것을 살펴보러 들어왔다. 아이들은 서로 사랑스럽게 몸을 꼭 붙인 채 잠들어 있었다. 다이는 그 조그맣고 야무진 입을 꼭 다물고 자고 있고, 낸은 미소를 지은 채 잠들어 있었다. 길버트는 앤에게 자초지종을 모두 듣자 무척 화를 냈다. 도비 존슨이 50킬로미터는 떨어진 먼 곳에 있기에 천만다행이지만 앤은 자신을 자책하는 마음이 컸다.
“낸이 무슨 일로 힘들어하는지 내가 잘 알아보았어야 했는데. 이번 주에는 다른 일이 많아서 온통 정신이 딴 데 가 있었어. 그렇지만 낸의 괴로움보다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었는데. 그 어린것이 얼마나 괴로워했겠어.”
앤은 몸을 구부리고 후회스럽고 미안한 마음으로 두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두 아이 다 내 것이다, 전적으로 내 품안에 있는 내 아이. 내가 돌봐주고 사랑해주고 지켜주어야 한다. 아이들은 그 작은 가슴에 사랑이 넘쳐도 슬픔이 넘쳐도 앤에게 온다. 앞으로도 몇 년은 더 그럴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앤은 몸을 떨었다. 어머니란 것은 너무나 달콤하지만 또 너무 끔찍하기도 하다.
“이 아이들에게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을까?”
앤이 속삭였다.
“적어도 둘 모두 제 엄마 남편만큼 멋진 남편을 갖게 되기를 바라고 믿어보자고.”
길버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32






길버트가 말했다.
“그래, 부인회 퀼트 이불 만드는 모임을 ‘잉글사이드’에서 갖기로 했다고. 수잔이 마음껏 요리 솜씨를 자랑할 기회가 드디어 왔군. 온갖 소문을 다 쓸어 담으려면 비도 여러 자루 준비해야겠고.”
수잔은 중요한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남자의 무딘 마음을 봐주어야지 어쩌겠냐는 듯 희미하게 웃기는 했지만, 사실 웃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부인회 모임 저녁 식사 준비에 관한 일이 모두 정해지기까지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뜨거운 치킨 파이는 안 돼요. 주 요리에는 으깬 감자와 크림을 얹은 콩이 좋겠어요. 그리고 새 레이스 테이블보를 쓸 아주 좋은 기회죠, 사모님? 글렌에서는 그런 물건을 본 사람이 없을 테니까요. 틀림없이 모두들 입을 다물지 못할 거예요. 애너벨 클로의 표정이 어떻게 변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네요. 그리고 꽃을 담을 바구니로는 파란색과 은색 바구니를 쓰면 어떨까요?”
수잔은 일을 하고 돌아다니면서도 계속 중얼거렸다.
“좋아요. 팬지랑 노란빛이 섞인 녹색 풀고사리를 단풍나무 숲에서 가득 꺾어다 담아요. 그리고 수잔의 그 훌륭한 분홍 제라늄 화분 세 개도 내다 놓자구요. 거실에서 일을 할 거면 거실에 내놓고 베란다에서 퀼트를 해도 될 만큼 날씨가 따뜻하다면 베란다 계단 난간에다 내다 놓아요. 아직 꽃이 많이 남아 있어 다행이에요. 올여름처럼 정원이 아름다웠던 적이 없었죠, 수잔? 그런데 내가 이 말을 가을철마다 하지 않나요?”
정해야 할 일이 아직 많았다. 누구를 누구 옆에 앉게 해야 할지도 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사이먼 밀리슨 부인을 윌리엄 매크리리 부인 옆에 앉도록 해서는 안 된다. 두 사람은 기억도 가물가물한 아주 옛날 학창 시절의 일로 서로 말도 하지 않고 지낸다. 그리고 누구를 초대할지도 아직 정하지 않았다. 주인은 부인회 회원이 아니더라도 두세 명 더 초대할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베스트 부인과 캠벨 부인을 초대할 거예요.”
앤이 말했다.
하지만 수잔의 표정을 보니 별로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사람들은 새로 이사 온 사람들이잖아요, 사모님.” 하는 수잔의 말은 “속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는 악어 같은 사람들이라고요.” 하는 의미였다.
“나도 한때는 그랬어요, 수잔.”
“경우가 달라요. 선생님 큰할아버지가 여기서 몇 해나 사셨잖아요. 베스트 집안과 캠벨 집안 사람들 일은 아무도 모른다고요. 하지만 이 집은 사모님 집이니, 사모님이 누구를 초대하든 말든 내가 참견할 일이 아니죠. 몇 년 전에 카터 플래그 부인 집에서 있었던 퀼트 모임 일을 잊지나 마세요. 플래그 부인이 그때 낯선 부인을 초대했잖아요. 그런데 그 여자는 면모교직 옷을 입고 왔어요. 한다는 소리가 부인회 모임에 옷을 차려입고 나타날 이유가 없다나요! 캠벨 부인은 적어도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겠더군요. 옷을 아주 멋지게 차려입고 다니잖아요. 그래도 교회에 수국꽃 색깔 파란색 드레스를 입고 온 여자는 내 평생 처음 봤어요.”
앤은 웃음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웃을 수도 없었다.
“그 옷은 캠벨 부인의 은빛 머리와 아주 잘 어울렸어요, 수잔. 아, 그러고 보니 캠벨 부인이 수잔의 그 향료 넣은 구즈베리 과자 요리법을 적어주었으면 고맙겠다고 하더군요. 추수감사절 만찬에 만들어 내놓으면 아주 좋아들 할 거라고요.”
“글쎄요, 사모님, 향료를 넣은 구즈베리 과자를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건 아닐걸요.”
그것으로 수국꽃 색깔 파란 드레스는 더 이상 비난을 면했다. 아니, 앞으로 캠벨 부인이 피지 섬사람 옷을 입고 나타난다 할지라도 수잔은 그 일을 용서할 핑곗거리를 찾아낼 것이다.
계절은 무르익었지만 가을이 아직도 여름을 잊지 못했는지 퀼트 모임을 갖기로 한 날은 10월이라기보다는 6월 같았다. 부인회의 모든 회원은 ‘잉글사이드’의 훌륭한 음식과 수다를 기분 좋게 고대하고 있었다. 게다가 의사 부인이 근래 시내에 다녀왔으니 멋진 새 옷도 구경할 수 있을 터였다.
수잔은 부엌에 신경 쓸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으나 쩔쩔매기는커녕 의기양양하고 침착하게 부인들을 손님방으로 안내했다. 고급 실로 뜬 13센티미터나 되는 레이스로 단을 장식한 앞치마를 가진 사람은 자기 외에 아무도 없겠거니 싶은 생각에 기분마저 우쭐했다. 수잔은 1주일 전에 샬럿타운의 박람회에서 이 레이스로 1등상을 받았다. 거기서 레베카 듀를 만나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그날 밤 수잔은 프린스에드워드 섬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여자가 되어 돌아왔다.
수잔의 얼굴은 완벽하게 시치미를 뗀 표정이긴 했지만, 생각이야 자기 자유이므로 때로는 살짝 악의를 띤 생각도 즐겼다.
‘실리아 리즈가 왔군. 언제나처럼 뭔가 비꼬아줄 일이 없을까 찾고 있겠지. 글쎄, 우리 집 식탁에서는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할걸. 정말이라고. 미라 머레이는 빨간색 벨벳 옷을 입었군. 퀼트 모임에 입고 오기에는 좀 지나치게 화려한 옷차림 아니야. 하지만 잘 어울리기는 하는군. 적어도 면모교직 옷은 아니니까.
애거사 드류가 왔군. 언제나처럼 안경을 끈으로 잡아맸잖아. 사라 테일러……. 이번이 저 여자에게는 마지막 퀼트 모임이 될지도 모르지. 의사 선생님이 심장이 굉장히 안 좋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기운이 펄펄 나는 것 같은걸!
도널드 리즈 부인이로군. 고맙게도 메리 안나를 데려오지 않았어. 하지만 오늘도 틀림없이 귀에 쥐가 날 만큼 그 아이 이야기를 듣게 될걸. 윗마을에 사는 제인 버어도 왔군. 저 여자는 부인회 회원도 아니지. 그래, 식사가 끝나면 반드시 스푼을 세어봐야 해. 정말이라고. 저 집안사람들은 모두 손버릇이 나빠.
캔디스 크로퍼드라, 저 사람은 부인회 모임에 잘 나오지 않지만 퀼트 모임만큼은 꼭 나오지. 저 고운 손과 다이아몬드 반지를 자랑하기 딱 알맞은 자리니까. 엠마 폴록은 오늘도 어김없이 치맛자락 밑으로 페티코트가 보이는군. 얼굴은 예쁘지만 저 집안사람들은 모두 아주 경박스러워. 틸리 매컬리스터, 팔머네 퀼트 모임에서처럼 테이블보에 젤리를 엎지르면 안 되는데. 마사 크로더스, 오늘은 저 여자가 제대로 된 식사를 한번 해보겠군. 남편을 데리고 오지 못해서 아주 유감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걸. 남편이 호두인지 뭔지만 먹고 살아야 한다고 들었는데. 벡스터 장로 부인이야. 벡스터 장로가 드디어 해럴드 리즈를 미나에게서 떼어내 버렸단 소리를 들었는데. 해럴드는 원래 등뼈는 없고 가슴뼈만 있는 사람이니까. 성경에도 나와 있듯이 약한 가슴으로는 예쁜 여자를 얻을 수 없지.
자, 이제 퀼트 이불 두 장은 만들고도 남을 만큼 사람들이 모였으니 남은 사람들은 바늘귀에 실이나 꿰어주면 되겠군.’
퀼트 이불은 널찍한 베란다에서 만들기로 했고, 사람들은 모두 손가락과 혀를 바쁘게 놀렸다. 앤과 수잔은 부엌에서 식사 준비에 여념이 없었고, 그날 아침 목이 아파 학교에 가지 못한 월터는 베란다 층계에 쪼그리고 앉아 담쟁이 이파리 사이로 부인들을 지켜보았다. 월터는 항상 어른들 하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앉아 있는 것이 좋았다. 어른들은 항상 재밌고 신기한 이야기들을 했다. 두고두고 생각하면서 이야기로 꾸미기도 좋고, 들은 이야기에 그림자와 색깔을 입히면서 놀아도 재미있었다. 모두 포 윈즈에 사는 일족들의 온갖 비극과 희극, 즐거움과 슬픔이 담긴 이야기들이었다.
여기 모인 부인들 가운데서 월터는 미라 머레이를 가장 좋아했다. 이 아주머니는 아주 잘 웃어서 보는 사람까지 기분 좋게 했으며 웃으면 눈가에 아주 우스운 주름이 잡혔다. 게다가 별 이야기 아닌 것도 아주 극적이고 무척 중요한 이야기로 둔갑시키는 재주가 있어 이 부인이 가는 곳은 어디든 즐거움이 넘쳤다.
오늘 미라 머레이 부인은 체리빛이 나는 붉은 색깔 벨벳 드레스를 입고 검은 머리가 고불고불 부드럽게 물결치면서 귀에 붉은색 귀걸이까지 단 모습이 아주 예뻤다.
월터가 제일로 싫어하는 부인은 바늘처럼 비쩍 마른 톰 처브 부인이었다. 아마도 그 부인이 월터에게 ‘병약한 아이’라고 부른 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월터는 앨런 밀그레이브 부인이 날렵한 회색 암탉처럼 생겼고, 그랜트 클로 부인이 다리 두 개 위에다 나무통을 얻어놓은 것처럼 생겼다고 생각했다.
머리카락이 태피 사탕 빛깔인 젊은 데이비드 랜섬 부인은 아주 예쁘게 생겼다. 랜섬 부인이 데이비드와 결혼했을 때 수잔은 ‘농사꾼에게는 너무 과분하게 아름다운 여자’라고 말했다. 젊은 새 신부 모튼 맥도걸 부인은 졸고 있는 흰 양귀비꽃처럼 보였다. 글렌 마을 양재사인 이디스 베일리는 안개 같은 은빛 고수머리에 검은 눈이 무척 익살스러워 보여 ‘노처녀’ 같지 않았다.
월터는 거기 모인 부인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미드 부인도 좋아했다. 부인은 다정하고 너그러운 눈매로 자기가 말하기보다는 주로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월터는 모두를 비웃는 것처럼 눈빛이 심술궂어 보이는 실리아 리즈를 좋아하지 않았다.
부인들의 이야기보따리는 아직 본격적으로 풀리지 않았다. 아직은 날씨가 어떻다느니 퀼트를 부채꼴로 해나갈지 마름모꼴로 할지 하는 의논들뿐이었다. 그래서 월터는 무르익어가는 가을날의 아름다움에 빠져들어 갔다. 넓은 잔디밭에는 거대한 나무들이 서 있어 마치 어떤 위대하고 친절한 존재가 황금 팔을 뻗어 세상을 감싸 안고 있는 듯이 보였다. 가을 색으로 물들기 시작한 나무들은 서서히 이파리를 떨어뜨리기 시작했지만, 기사와도 같은 접시꽃은 벽돌담을 등지고 여전히 화려하게 피어 있었다. 미루나무는 헛간으로 이어진 좁은 길을 따라 마법 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월터는 자기를 둘러싼 아름다움에 흠뻑 취해 퀼트 모임의 수다가 본격적인 궤도에 올라섰다는 것도 잊어버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사이먼 밀리슨 부인이 이렇게 선포하고 있었다.
“그 집안은 떠들썩한 장례식으로 유명하죠. 피터 커크의 장례식에 갔던 사람은 모두 그때 일어난 일을 잊을 수 없을 거예요.”
월터는 귀를 쫑긋 세웠다. 무척 흥미로운 이야기일 것 같았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사이먼 부인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까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모두가 그 장례식에 갔었던지 아니면 그 이야기를 모두 아는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왜 모두들 저렇게 불편한 표정들을 하고 있지?’
“클라라 윌슨이 피터에 관해 한 말은 사실임이 틀림없지만, 그 불쌍한 피터는 무덤에 들어가 있으니 잠자코 내버려두자고요.”
톰 처브 부인이 자기는 항상 옳은 말만 하는 사람이라는 듯 말했다. 마치 누군가가 피터의 시체를 파내려고 한다는 듯한 말투였다.
“우리 메리 안나는 항상 영리한 말만 해요. 지난번 우리가 마거릿 홀리스터 장례식에 갈 때 메리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엄마, 장례식에 가면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어?’ 그러더군요.”
부인 두셋은 은밀히 재미있다는 미소를 주고받았지만 대부분은 도널드 부인의 말을 무시해버렸다. 도널드 부인이 대화에 메리 안나를 끌어들이기 시작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번 시작하면 그치질 않고 메리 안나 이야기만 줄줄이 늘어놓아서 대책이 안 섰다. 조금이라도 맞장구를 쳐주면 신이 나서 아주 볼만해졌다.
“메리 안나가 뭐라고 한 줄 알아요?”라는 말은 글렌 마을의 사라질 줄 모르는 유행어가 되었다.
실리아 리즈가 말했다.
“장례식으로 말하자면, 내가 어렸을 때 모브레이 내로우즈에서도 이상한 일이 있었지요. 스탠턴 레인이란 사람이 서부로 갔는데 얼마 후에 그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어왔어요. 스탠턴의 부모는 시신을 집으로 보내달라고 전보를 쳤고, 시신이 도착했어요. 장의사 월리스 매컬리스터는 관을 열어보지 않고 매장하는 편이 좋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요? 장례식을 막 시작하려는데 스탠턴 레인이 건장한 모습으로 위세 좋게 집으로 걸어 들어왔어요. 그 시체는 누구인지 끝내 모르고요.”
“그래서 시신은 어떻게 했나요?”
애거사 드류가 물었다.
“땅에 묻었죠. 월리스가 그런 일을 미뤄서는 안 된다고 했거든요. 그렇지만 그건 장례식이라고 부르기도 뭐했어요. 모든 사람이 다 스탠턴이 돌아왔다고 기쁨에 들떠 있었으니까요. 도슨 씨가 장례식의 마지막 찬송가를 <그리스도인이여, 위안을 얻으라>에서 <갑자기 거룩한 빛이 나타나다>로 바꿨지만, 거기 있던 사람들은 찬송가를 바꾸지 않는 게 더 나았을 거라고 생각했죠.”
“지난번에 메리 안나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엄마, 목사님은 뭐든지 다 알아?’ 하고 묻더라고요.”
제인 버어가 말했다.
“도슨 씨는 위급한 일이 생기면 정신이 나가버려요. 그 무렵 윗마을은 도슨 씨 교구였거든요. 지금도 기억나는데, 목사님이 어느 일요일 교회가 파하고 나서야 헌금을 안 걷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는지 알아요? 헌금 그릇을 움켜쥐고 뜰로 뛰어나가 그때까지 한 번도 헌금을 내지 않았던 사람까지 죄다 헌금을 내게 했답니다. 목사님 말씀을 거절하기는 그렇잖아요. 하지만 그리 위엄 있는 모습은 아니었어요.”

“도슨 씨가 하는 일 중에 제일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장례식에서 기도를 너무 길게 하는 거예요. 죽은 사람이 부러워질 정도로 지겹게 기도를 한다니까요. 레티 그랜트의 장례식에서는 그야말로 정도가 지나쳤어요. 레티의 어머니가 금방 쓰러질 것 같아서 내가 도슨 씨 등을 우산으로 쿡쿡 찌르며 이제 그만 해도 충분하다고 말해주었다니까요.”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그분은 내 가엾은 자비스를 묻어주었어요.”
조지 카 부인이 눈물까지 흘리며 말했다. 남편이 죽은 지 20년이나 지났어도 남편 이야기를 할 때면 카 부인은 언제나 눈물을 흘렸다.
“도슨 씨 동생도 목사였어요. 내가 어렸을 때 글렌 교회를 맡고 있었죠. 어느 날 저녁 공회당에서 발표회가 열렸을 때 일어난 일이에요. 그분도 무대에 서기로 되어 있어 다른 설교자들과 함께 강단 위에 앉아 있었죠. 동생도 형 못지않게 숫기가 없던 사람이라 불안하고 초조하다 보니 몸을 가만두지 못하고 움직이면서 의자를 조금씩 뒤로 밀어냈던가 봐요. 그러다가 의자와 함께 강단 뒤로 벌렁 나자빠져버렸잖아요. 그 아래 꽃이며 화분을 잔뜩 늘어놓았었는데 그 위로 떨어져버렸어요. 강단 위로 두 발만 불쑥 나와 있던 꼴이 얼마나 우습던지. 그 후로는 그분이 설교할 때마다 그 발만 생각나고 설교 내용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더군요. 그 발이 엄청나게 크기도 했고요.”
크리스틴 마시의 이야기였다.
“레인 집안 장례식은 정말 실망이었지만 그래도 장례식이 전혀 없는 것보다는 나았어요. 크롬웰 집안의 소동을 다들 기억하죠?”

에머 폴록이 말했다.
그러자 모두들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그 이야기나 한번 들어보죠. 플록 부인, 난 이 마을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어느 집 사화(史話)고 간에 내가 아는 이야기는 없어요.”
캠벨 부인이 말했다.
엠마는 ‘사화’가 무슨 의미인지 몰랐지만, 이야기하기는 무척이나 좋아했다.
“애브너 크롬웰은 로브리지 근방에서 제일 큰 농장을 갖고 있었어요. 그 무렵 보수당 거물로 국회의원을 하기도 했고, 이 섬에서 유명한 사람은 다 알았어요. 줄리 플래그와 결혼했는데 줄리의 어머니는 리즈 집안사람이었고 줄리 할머니는 클로 집안사람이었지요. 그러니까 그 집안은 포 윈즈의 거의 모든 집안과 연을 맺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데일리 엔터프라이즈>에 부고 기사가 났어요. 애브너 크롬웰이 로브리지에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 장례식이 다음 날 오후 2시에 거행된다고 말예요.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애브너 크롬웰은 그 부고 기사를 보지 못했어요. 그리고 물론 그 무렵에는 시골에 전화도 없었죠.
이튿날 아침 애브너는 자유당 집회에 참석하러 킹스포트에 갔어요. 2시가 되자 사람들이 애브너의 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죠. 모두들 빨리 가서 좋은 자리를 잡으려고 서둘렀어요. 애브너가 유명한 사람이라 사람들이 엄청나게 모일 거라고 생각들을 한 거죠.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모이긴 했어요. 마차가 큰길에 6킬로미터나 되게 늘어섰고, 3시 무렵까지 사람들이 끊임없이 모여들었지요.

애브너 부인은 남편이 죽지 않았다고 해명하느라 미칠 지경이 되었어요. 사람들이 처음에는 애브너 부인 말을 믿지도 않았죠. ‘모두들 내가 시체를 치워버린 줄 아나 봐요.’ 하고 울먹였다니까요. 결국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되자 사람들은 마치 애브너가 죽었어야 했다는 태도를 보였죠. 그리고 줄리가 자랑으로 여기던 잔디밭이랑 화단을 죄다 짓밟아 엉망으로 만들어버렸어요. 멀리 사는 친척들도 많이 왔어요. 저녁을 먹고 하룻밤 묵어갈 요량들을 하고요. 하지만 부인은 음식도 별로 해놓지 않았어요. 줄리는 앞을 내다볼 줄을 통 모르거든요. 그 점은 줄리도 인정했어요. 이틀 후에 애브너가 집에 돌아왔을 때 줄리는 신경쇠약에 걸려 몸져누워 있었죠. 6주 동안이나 아무것도 먹지를 못했어요. 아니, 거의 먹지를 못했다고요. 줄리가 진짜 장례식을 치렀더라도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거라고 말했다더군요. 하지만 난 줄리가 정말로 그런 말을 했다고는 믿지 않아요.”
“그건 모르는 일이에요. 사람들은 그런 끔찍한 말을 하기도 해요. 정신이 나갔을 때는 저도 모르게 입에서 진심이 튀어나와 버리거든요. 줄리의 언니 클러리스는 남편을 묻고 바로 그다음 일요일에 아무렇지도 않게 성가대에 앉아 노래를 불렀잖아요.”
윌리엄 맥크리리 부인이 말했다.
“아무리 남편 장례식이라도 클러리스를 그리 오래 풀죽어 있게 할 수는 없어요. 줄리에게는 진득한 구석이 전혀 없다고요. 언제나 춤추고 노래를 부르잖아요.”
애거사 드류가 말했다.
“나도 곧잘 춤추고 노래했는걸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바닷가에서요.”
미라 머레이가 말했다.

“그래도 부인은 그 뒤로 분별력이 생겼잖아요.”
“아니요, 천만에요, 더 바보가 되었죠. 이제는 너무 바보가 되어서 바닷가에서도 춤을 못 추겠어요.”
미라 머레이가 생각에 잠겨 말했다.
엠마가 이야기를 마저 끝내려고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모두들 누가 장난으로 그 부고 기사를 냈다고 생각했어요. 바로 며칠 전에 애브너가 선거에서 낙선했으니까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 기사는 오보였어요. 죽은 사람은 애머사 크롬웰이었어요. 로브리지 반대편에 사는 사람으로 애브너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이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실망감이 너무나 커서 오랫동안 애브너를 용서하지 못했어요.”
“그럼요, 파종도 해야 하고 한창 바쁜 때 그 먼 길을 달려왔는데 화가 날 만도 했겠죠. 힘들게 한 일이 헛수고가 되었는데 누가 안 그렇겠어요.”
톰 처브 부인이 변호하듯 말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대체로 장례식을 좋아하잖아요. 어른도 아이랑 하나도 다르지 않다고요. 메리 안나도 고돈 삼촌 장례식에 데려갔더니 아주 즐거워하던걸요. ‘엄마, 삼촌을 파내서 다시 묻으면 아주 재미있겠지?’ 그러더라고요.”
도널드 리즈 부인이 아주 신이 나서 말했다.
이 말에 모두들 웃음을 터트렸다. 벡스터 장로 부인 한 사람만 빼고. 벡스터 부인은 길고 마른 얼굴에 새치름한 표정을 띠고 이불 바느질 하는 손놀림을 재개했다. 요즘에는 도대체 신성한 일이라는 게 아무것도 없어. 아무 일이나 다 농담 삼아 웃고 난리들이야. (하지만 장로 부인인 나는 장례식과 관련된 일로 웃거나 하지는 않을 거야,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애브너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그 사람 사촌 동생이 자기 부인의 부고 기사를 어떻게 썼는지 기억들 해요?”
앨런 밀그레이브 부인이 이야기를 꺼냈다.
“그 기사는 이렇게 시작되었죠. ‘하느님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사촌형 윌리엄의 못생긴 아내는 내버려두고 나의 아름다운 신부는 데려가셨도다.’ 그것 때문에 큰 소동이 났는데, 어떻게 잊겠어요.”
“그런 기사가 어떻게 신문에 실렸을까요?”
베스트 부인이 물었다.
“그 사람이 당시에 <엔터프라이즈> 편집장이었거든요. 그 사람은 자기 아내를 숭배했어요. 부인 이름이 베르타 모리스였죠. 그리고 윌리엄 크롬웰 부인을 아주 싫어했죠. 형수가 결혼을 반대했거든요. 베르타가 너무 변덕스럽다고요.”
“그렇지만 베르타는 참 아름다웠어요.”
엘리자베스 커크가 말했다.
“나도 평생 그렇게 예쁜 사람은 두 번 다시 본 일이 없죠.”
밀그레이브 부인도 인정했다.
“모리스 집안사람은 모두가 잘생겼어요. 하지만 변덕이 심했죠. 산들바람처럼 변덕스러웠어요. 베르타가 존과 정말로 결혼하기까지 마음이 변하지 않은 것도 모두들 기적이라고 했어요. 베르타 어머니 덕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요. 베르타가 전에 프레드 리즈와 만났는데 프레드가 바람둥이로 악명을 날렸잖아요. 모리스 부인이 딸에게 ‘손에 잡은 새 한 마리가 숲에 있는 새 두 마리보다 낫단다.’라는 말을 해주었대요.”
“나도 그 속담을 자주 듣지만 그 말이 진실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숲에 있는 새는 노래도 부를 수 있는데 손에 쥔 새보다 낫지 않을까요?”
미라 머레이 부인이 말했다.
그 말에 아무도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랐지만 톰 처브 부인이 한마디 했다.
“미라는 언제나 보면 좀 기발한 데가 있어요.”
“지난번에 우리 메리 안나가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엄마, 아무도 나한테 신부가 되어달라고 하지 않으면 어쩌지?’ 하더라고요.”
도널드 부인이 말했다.
“그 대답은 우리 노처녀 중 하나가 해줄 수 있잖겠어요.”
실리아 리즈가 이디스 베일리를 팔꿈치로 쿡 찌르며 말했다. 실리아는 이디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디스는 아직도 예쁘고 매력적이어서 완전히 희망 없는 노처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거트루드 크롬웰은 아주 못생겼어요.”
그랜트 클로 부인이 말했다.
“생긴 것이 꼭 납작한 널빤지 같았죠. 하지만 집안 살림은 아주 잘했어요. 커튼도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빨았지요. 베르타는 일 년에 한 번이나 빨까 말까 했거든요. 그리고 베르타네 블라인드는 늘 비뚤어져 있었죠. 거트루드는 존 크롬웰네 집을 지날 때마다 진저리가 쳐진다고 했어요. 그런데도 존 크롬웰은 베르타를 몹시 숭배했어요. 윌리엄은 거트루드와 마지못해 살아주었지만요. 남자들이란 정말 이해할 수 없다니까요. 사람들이 그러는데 윌리엄은 자기 결혼식 날 아침에도 늦잠을 자서 옷도 급하게 대충 입고 헌 구두를 신고 양말도 짝짝이로 신고 교회에 갔다더군요.”
“아이고, 그래도 올리버 랜섬보다는 나아요. 올리버는 결혼식에 입을 예복 맞추어두는 것도 잊었었으니까요. 평상시에 입는 외출복은 입을 만한 상태도 아니었고요. 외출복이라는 것이 더덕더덕 기운 옷이었거든요. 그래서 자기 형 옷들 중에 제일 나은 옷을 빌려 입었어요. 옷이 잘 맞지도 않았지요.”
조지 카 부인이 쿡쿡 웃으며 말했다.
“윌리엄과 거트루드는 그나마 결혼을 했으니 다행이죠. 거트루드의 여동생 캐롤라인은 결혼도 못 했잖아요. 캐롤라인과 로니 드류는 어떤 목사님에게 주례를 부탁해야 할지 하는 문제로 다투다가 결국은 결혼을 못 하고 말았어요. 그 일로 로니가 화를 심하게 냈는데 그 화가 풀리기도 전에 에드나 스톤하고 결혼해 버거든요. 캐롤라인도 그 결혼식에 참석을 했죠. 머리는 꼿꼿하게 들고 있었지만 얼굴은 꼭 죽은 사람 같았어요.”
사이먼 부인이 말했다.
세라 테일러 부인이 말을 받았다.
“그래도 캐롤라인은 아무 말이나 막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필리파 애비와는 달랐죠. 필리파가 짐 모브레이에게 퇴짜 맞았을 때 어떻게 했는지 알아요. 모브레이의 결혼식에 가서 식을 올리는 내내 큰 소리로 심한 독설을 퍼부어댔어요. 물론 결혼식에 온 사람들은 모두 영국국교회 사람들이었죠.”
세라 테일러는 그 까닭이 전부 영국 국교회 신도였기 때문이라는 듯 말을 맺었다.
“그 후로 필리파가 짐하고 약혼하면서 받은 보석을 전부 달고 결혼식 피로연까지 갔다는 말이 사실이에요?”
실리아 리즈가 물었다.
“아니에요,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어요! 그런 소문이 어떻게 났는지 모르겠어요. 가끔 보면 할 일들도 없는지 여기저기 헛소문만 내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어요. 짐 모브레이는 아마 평생을 후회하며 살았을 거예요. 필리파와 헤어지지 말았어야 했다고요. 그 사람 자기 부인에게 완전히 눌려 살거든요. 부인만 없으면 신이 나서 요란법석을 떨었잖아요.”
“난 짐 모브레이를 딱 한 번밖에 보지 못했어요. 로브리지 교회 기념예배에 모인 사람들에게 풍뎅이가 한꺼번에 몰려들었던 날 밤이었지요. 그 풍뎅이 때문에 짐 모브레이가 그날 밤 큰 공헌을 했지요! 날이 몹시 더워서 창문을 모두 열어두었는데 풍뎅이 수백 마리가 그냥 쏟아져 들어왔어요. 그다음 날 아침 성가대 단상에서 죽은 풍뎅이를 여든일곱 마리나 집어냈다니까요. 어떤 여자들은 풍뎅이가 얼굴 가까이로 날아들자 히스테리를 일으켰죠. 내 자리 옆 통로 건너편에는 새로 온 목사님의 부인인 피터 로링 부인이 앉아 있었어요. 버드나무 솜털 장식을 단 커다란 레이스 모자를 쓰고요.”
크리스틴 크로퍼드가 말했다.
“그 부인은 목사 부인으로서는 너무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다녔어요.”
별안간 벡스터 장로 부인이 끼어들었다.

“짐 모브레이가 ‘사모님 모자에 앉은 벌레를 털어낼 테니까 봐요.’ 하고 속삭이더군요. 짐 모브레이는 목사님 부인 바로 뒤에 앉아 있었거든요. 짐이 몸을 앞으로 숙이고 벌레를 겨냥해 툭하고 손가락을 튕겼어요. 그런데 빗나갔죠. 모자만 빙그르르 날아가 버렸어요. 복도를 타고 죽 단상까지 가버렸어요. 짐도 놀라 거의 발작을 일으킬 지경이었고, 목사님도 자기 아내 모자가 허공을 날아오는 것을 보고는 그만 설교를 어디까지 했는지도 다 까먹어버렸어요. 결국엔 설교를 어디까지 했는지 끝내 알아내지 못해 설교를 중단해버렸잖아요. 성가대는 쉴 새 없이 손으로 풍뎅이를 쫓으며 마지막 찬송가를 불렀어요. 짐은 내려가 모자를 집어다 로링 부인에게 돌려주었고요. 로링 부인이 화를 잘 낸다는 말이 있어서 짐은 마땅히 욕먹을 각오를 하고 있었죠. 그런데 부인은 그 아름다운 금발에 다시 모자를 쓰고 짐에게 웃어 보이며 ‘모브레이 씨가 내 모자를 날려 보내지 않았으면 피터가 설교를 20분은 더 했을 거예요. 그럼 우리 모두 완전히 미쳐버렸을 거라고요.’ 하지 않았겠어요. 그 부인이 화를 내지 않은 건 다행이었지만 자기 남편을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 되는 거라고들 생각했었어요.”
“그렇지만 그 부인이 어떻게 태어난 사람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해요.”
마사 크로더스가 말했다.
“어떻게 태어나다니요, 그게 무슨 말이죠?”
“그 부인은 서부 출신으로 처녀 적 이름이 베시 탤보트예요. 베시는 어느 날 밤 집에 불이 나서 큰 소동이 벌이진 틈에 태어났어요. 그것도 뜰에서 말예요. 별 아래서요.”
“어머나, 낭만적이네요.”

미라 머레이가 말했다.

“낭만적이라고요? 점잖지 못한 거지요.”

“하지만 별 아래서 태어나는 걸 생각해보세요! 그 부인은 별의 아이임이 틀림없어요. 반짝반짝 아름답고, 용감하고, 진실하고, 눈도 초롱초롱하겠죠.”

미라 머레이가 꿈을 꾸듯 말했다.

“맞아요. 꼭 그랬어요. 별이 그렇게 만들었는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그렇지만 로브리지에서 힘든 생활을 했죠. 그곳 사람들은 목사 아내란 그저 단정하고 겸손하고 소박해야 한다고만 생각했으니까요. 어느 날인가는 그 부인이 아기 요람을 돌며 춤추는 것을 마침 한 장로가 봤어요. 그 장로는 아들이 선택받은 인간인지 아닌지 알게 될 때까지는 그렇게 기뻐하면 안 된다고 했다지 뭐예요.”

마사가 말했다.

“아기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요, 저번에 메리 안나가 뭐라고 한 줄 아세요? ‘엄마, 여왕도 아기를 낳아요?’ 하고 묻더라고요.”

“그 말을 한 장로라는 사람은 틀림없이 알렉산더 윌슨일 거예요. 그 사람은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났어요. 말할 수도 없이 까다로운 사람이라고요. 식사할 때도 가족들이 말 한마디 못 하게 한대요. 그 집에서는 웃음소리도 들려서는 안 된다지 뭐예요.”

앨런 부인이 말했다.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집이라니…….”

미라 머레이가 말했다.

“그건 신성 모독이라고요.”

“알렉산더는 한번 화가 나면 부인에게 3일씩도 말하지 않는대요. 그렇지만 그 통에 부인이 한숨 돌릴 수 있었을 거예요.”

앨런 부인이 말했다.

“알렉산더 윌슨은 그래도 선량하고 정직한 사업가였어요. 죽을 때 아내에게 4만 달러나 남겨주었잖아요.”

그랜트 클로 부인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렉산더 윌슨은 클로 부인의 팔촌뻘 되는 친척이다.

“그걸 남겨두고 가야 했다니 참 안됐네요.”

실리아 리즈가 말했다.

“알렉산더의 동생 제프리는 한 푼도 남기지 않았지요. 제프리는 그 집안의 문제아였어요. 웃기는 잘했죠. 버는 돈은 전부 써버리면서요. 사람들과 희희낙락 지내다가 땡전 한 푼 없이 죽었죠. 그렇게 하고 싶은 대로 즐기기만 하면서 살아 무엇을 얻었을까요?”

클로 부인이 말했다.

“별로 없었겠죠. 하지만 그가 이 세상에 준 것들을 생각해보세요. 그 사람은 언제나 주면서 살았어요. 즐거움, 동정, 친절함, 심지어는 돈까지요. 적어도 친구로만 따지면 그 사람도 부자예요. 하지만 알렉산더는 평생 친구가 단 한 명도 없었어요.”

미라 머레이 부인이 말했다.

“제프를 묻어준 것은 친구들이 아니었어요. 알렉산더가 묻어주었죠. 아주 좋은 비석도 세워주었고요. 그비석에 몇백 달러나 들였대요.”

앨런 부인이 말을 되받아쳤다.

“하지만 제프가 수술비용으로 쓰려고 백 달러를 빌려달라고 했을 때는 거절했잖아요? 수술을 받았으면 목숨을 건졌을지도 모르는데. 알렉산더가 분명히 그 돈을 빌려주지 않았죠?”

실리아 드류가 물었다.

“아이고, 이거 우리가 너무 몰인정한 거 아니에요. 우리는 지금 물망초나 데이지 세계에 살고 있는 게 아니잖아요. 누구에게나 결점이 있다고요.”

카 부인이 말했다.

“오늘 렘 앤더슨이 도로시 클라크와 결혼을 해요. 제인 엘리엇이 결혼을 안 해주면 자기 머리를 날려버리겠다고 맹세한 지 아직 일 년도 안 됐는데 말이에요.”

밀리슨 부인이 이제 좀 더 유쾌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릴 시간이라고 생각하면서 말했다.

“젊은이들이야 그런 이상한 말도 가끔 하죠. 둘은 결혼 이야기를 비밀로 해왔어요. 모두들 두 사람이 약혼했다는 사실을 3주 전에야 알았으니까요. 지난주에 렘 어머니와 이야기했을 때에도 이렇게 빨리 결혼하게 되리라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스핑크스처럼 속을 알 수 없는 여자가 하는 이야기를 다 믿는 것은 아니지만요.”

처브 부인이 말했다.

“나는 도로시 클라크가 렘의 청혼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더 놀랐어요. 지난봄까지만 해도 도로시는 프랭크 클로와 맺어지는 줄 알았으니까요.”

애거사 드류가 말했다.

“도로시는 프랭크를 자기 배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참을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했어요. 아침에 눈을 뜨면 프랭크의 돌출부가 이불 위로 솟아 있을 것을 생각하면 도저히 결혼을 못 하겠더래요.”

벡스터 장로 부인은 노처녀처럼 몸을 떨기만 할 뿐 다른 사람들처럼 웃으려 들지 않았다.

“이디스 같은 어린 아가씨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에요.”

실리아가 이불을 짓고 있는 부인들에게 눈짓을 해보이며 말했다.

“에이더는 약혼했나요?”

에머 폴록이 물었다.

“아니, 아직 거기까지는 아니에요.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죠. 하지만 아직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지는 못했어요. 그 집 딸들은 모두 남자 낚는 재주가 있어요. 에이더의 언니 폴린도 항구에서 제일 큰 농장으로 시집갔잖아요.”

밀리슨 부인이 말했다.

“폴린은 예쁘기는 하지만 어리석은 생각으로 가득한 사람이에요. 늙어죽을 때까지도 철이 들지 않을지도 몰라요.”

밀그레이브 부인이 말했다.

“걱정 말아요. 폴린도 언젠가는 아이들이 생길 것이고, 그러면 아이들에게서 지혜를 배우게 된다고요. 우리도 다 그랬잖아요.”

미라 머레이가 말했다.

“렘과 도로시는 어디서 살 거래요?”

미드 부인이 물었다.

“아, 렘이 윗마을에 농장을 샀잖아요. 캐리네가 살던 농장이요. 그 가여운 로저 캐리 부인이 남편을 살해했던 바로 그 집이죠.”

“남편을 살해했다고요?”

“그 남편이 그런 일을 당할 만한 짓을 했지만요. 모두들 캐리 부인이 좀 너무했다고는 생각했죠. 로저의 찻잔에 제초제가 들어 있었어요, 아니 수프였던가요? 아무튼 모두가 그 일을 알고 있었지만 그냥 내버려두었답니다. 실패 좀 건네줘요, 실리아.”

“하지만, 밀리슨 부인, 캐리 부인이 그런 일을 저질렀는데 재판도 안 받고 벌도 받지 않았단 말이에요?”

캠벨 부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이웃사람을 그런 곤란한 지경으로 몰아넣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게다가 캐리 집안은 윗마을 사람들과 거의 친척관계였어요. 그 부인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기도 했고요. 물론 사람을 습관적으로 죽여도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살해당할 만한 남자가 있다면 바로 로저 캐리라고요. 그 후로 캐리 부인은 미국으로 가서 재혼해서 살다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몇 년이나 지났어요. 두 번째 남편은 부인보다 오래 살았어요. 이 모든 일이 다 내가 어렸을 때 일어난 일이지요. 사람들은 로저 캐리 귀신이 돌아다닌다고 말하고는 했어요.”

“지금 같은 개명 천지에 귀신을 믿는 사람은 없죠.”

벡스터 부인이 말했다.

“귀신을 믿지 않는다고요? 귀신은 아주 재미있잖아요. 난 귀신에 씌었다는 어떤 남자를 알아요. 귀신이 너무 비웃고 경멸하는 바람에 그 남자가 미쳐버렸대요. 맥도걸 부인, 가위 좀 주세요.”

틸리 매컬리스터가 말했다.

어린 신부는 그 말을 두 번이나 듣고서야 얼굴이 새빨개지며 가위를 건네주었다. 맥도걸 부인이라는 호칭이 아직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 항구 건너편에 있는 옛날 집 트루액스네 집에 몇 해 동안이나 유령이 나온대요. 온 집 안에서 발걸음 소리랑 똑똑 노크하는 소리가 들린다는데, 그게 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죠.”

크리스틴 크로퍼드가 말했다.

“트루액스 집안사람들은 죄다 위가 안 좋았어요.”

벡스터 부인이 말했다.

“물론 귀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귀신이 나타나지 않죠. 하지만 우리 언니는 노바스코샤의 어떤 집에서 일했는데 낄낄거리는 귀신이 나오는 집이었대요.”

매컬리스터 부인이 샐쭉해서 말했다.

“참 재미있는 귀신이네요. 그런 귀신이라면 나한테 와도 좋아요.”

미라 머레이가 말했다.

“아마 올빼미 소리였을 거예요.”

벡스터 부인이 믿지 못하고 말했다.

“우리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 천사들이 침대를 빙 둘러서 있는 것을 보셨대요.”

애거사 드류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천사는 유령이 아니에요.”

벡스터 부인이 말했다.

“참, 파커 아저씨는 좀 어때요, 틸리?”

처브 부인이 물었다.

“나빠졌다 좋아졌다 해요.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죠. 그 때문에 일을 착착 진행할 수가 없어요. 아니, 내 말은 우리 겨울옷 마련하는 일이 그렇다고요. 그래도 지난번에 내가 언니에게 ‘검은색 옷을 준비해두는 게 좋을 거예요. 그럼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걱정할 게 없잖아요.’ 그랬죠.”

“지난번에 우리 메리 안나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엄마, 이젠 하느님한테 내 머리를 곱슬거리게 만들어달라고 부탁하지 않을 거예요. 내가 밤마다 일주일이나 기도했는데도 하느님은 아무것도 안 해줬어요.’ 하지 않겠어요.”

“나는 하느님께 20년이나 기도했어요.”

던컨 부인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부인은 지금까지 말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이불에서 그 검은 눈을 들지도 않았다. 던컨 부인은 퀼트 이불을 잘 만들기로 유명했다. 아마도 소문 이야기에 정신을 팔지 않고 한 땀 한 땀 바느질에만 정성을 모으기 때문일 것이다.

잠시 조용해졌다. 모두들 던컨 부인의 기도가 무엇인지 짐작하긴 했지만, 퀼트 이불 만드는 모임에서 이야기할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던컨 부인은 다시는 입을 열지 않았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마사 크로더스가 물었다.

“메이 플래그와 빌리 카터가 헤어지고 저기 항구 마을의 맥두걸 집안 아가씨와 만난다는 것이 사실이에요?”

“그래요. 하지만 앞으로 일이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어요.”

“대수롭지도 않은 일로 혼담이 깨지는 걸 보면 참으로 안타까워요. 딕 프랫과 릴리언 매컬리스터를 봐요. 딕이 릴리언과 소풍 갔을 때 그 자리에서 청혼할 생각이었는데 그때 그만 코피가 났다더군요. 피를 씻으려고 개울로 달려갔고, 거기서 생전 처음 보는 아가씨가 손수건을 빌려주었대요. 그런데 글쎄 그 아가씨와 사랑에 빠져서 단 2주 만에 결혼을 해버렸잖아요.”

캔디스 크로퍼드가 말했다.

“지난 토요일 저녁에 항구 어귀에 있는 밀트 쿠퍼네 가게에서 빅 짐 매컬리스터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었어요?”

귀신이니 배신이니 하는 이야기보다는 더 유쾌한 화제로 돌려야 한다고 생각한 사이먼 부인이 말했다.

“밀트는 여름에도 난로를 치우지 않았대요. 그런데 토요일 저녁에 추워서 난로에 불을 피웠지요. 그런데 그 불쌍한 빅 짐이 말이에요, 난로 위에 덜컥 앉아버렸다지 뭐예요……. 그래서 거기를 그슬려버렸대요.”

부인은 어디를 그슬렸다는 건지는 말하지 않고 자기 몸 일부를 말없이 쓰윽 쓰다듬었다.

“엉덩이예요.” 

월터가 담쟁이덩굴에서 머리를 쑥 내밀고 진지하게 외쳤다. 월터는 사이먼 부인이 어딘지는 생각나지 않아서 말을 안 한 줄 알았다.

부인들 사이에 무시무시한 고요가 흘렀다. 월터 블라이드가 거기 계속 있었단 말인가? 모두들 어린아이가 들으면 안 될 이야기라도 하지 않았는지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되새겨보았다. 블라이드 의사 부인은 아이들이 들어서 될 이야기와 안 될 이야기를 엄격하게 구별하고 있다는데. 모두들 혀가 마비되어버린 채 아직 풀리지 않았는데 앤이 부엌에서 나와 식사가 준비되었다고 했다.

“10분만 기다리세요, 블라이드 부인. 이제 곧 퀼트 이불이 두 장 다 끝나가요.”

엘리자베스 커크가 말했다.

퀼트 이불이 다 완성되자 모두들 일어나 펼쳐놓고는 감탄을 자아내며 감상했다.

“누가 이 이불을 덮고 잘지 궁금하네요.”

미라 머레이가 말했다.

“새로 엄마가 된 사람이 아기와 함께 덮고 자겠죠.”

앤이 말했다.

“아니면 몹시 추운 밤에 어린아이들이 이 이불 속으로 몸을 웅크리고 기어들겠죠.”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아니면 관절염에 걸린 가여운 노인이 아늑하게 덮고 자던가요.”

미드 부인이 말했다.

“이 이불을 덮고 죽는 사람은 없었으면 좋겠군요.”

벡스터 부인이 슬프게 말했다.

“여기 오기 전에 우리 메리 안나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엄마, 접시에 있는 음식을 다 먹는 거 잊으면 안 돼.’ 하더군요.”

모두들 식당으로 들어가는데 도널드 부인이 말했다.

부인들 모두 악의는 없는 사람들이었고, 오후 내내 일을 했으니 배가 고파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며 음식을 먹고 마셨다.

저녁 식사가 끝나자 모두들 돌아갔다. 제인 버어는 마을까지 사이먼 밀리슨 부인과 함께 걸어갔다.

제인은 수잔이 스푼을 세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생각에 잠겼다. ‘식기와 음식 모두 기억해두었다가 어머니에게 말해주어야겠어. 어머니는 몸져누워 있어서 외출을 못 하지만 내가 이야기를 들려주면 좋아하시니까. 식탁을 어떻게 차렸는지 들려주면 몹시 좋아할 거야.’

“식탁이 꼭 잡지에 나와 있는 그림 같더군요. 요리라면 나도 누구 못지않게 잘할 수 있지만 식탁을 그렇게 품위 있게 꾸미는 일은 못 해요. 나라면 그 월터 녀석 볼기를 실컷 때려줬을 거예요. 갑자기 나타나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잉글사이드’가 죽은 사람들로 들썩였겠지?”

길버트가 말했다.

“난 이불 만드는 곳에 있지 않아서 하나도 못 들었어.”

앤이 말했다.

“앤이 같이 이불을 만들었다면 모두들 그렇게 분별없는 말은 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다들 앤이 소문 이야기 같은 건 탐탁지 않게 여긴다고 알고 있으니까.”

뒤에 남아 수잔이 이불 정리하는 일을 돕고 있던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이야기에 따라 다르죠.”

앤이 말했다.

“오늘은 그 누구도 심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어요. 대부분 죽은 사람들 이야기뿐이었다고요. 아니면 죽어야 했다거나.”

미스 코넬리아가 애브너 크롬웰의 어긋난 장례식 이야기가 떠올라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만 밀리슨 부인이 꺼낸 매지 캐리가 남편을 살해했다는 그 끔찍한 이야기는 좀 그랬죠. 나도 아는 일이지만 매지가 그런 일을 했다는 증거는 없었어요. 그 수프를 먹고 고양이가 죽었다는 것만 빼면요. 그리고 그 고양이는 전부터 일주일이나 아팠던 고양이구요. 내 생각에 로저 캐리는 맹장염으로 죽었어요. 그때는 그 사람이 맹장염에 걸렸는지 아무도 몰랐지만요.”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그 사실을 모르다니 참 안타까운 일이에요. 스푼이 하나도 없어지지 않았네요, 사모님. 테이블보도 무사하구요.”

수잔이 말했다.

“자, 난 이제 가봐야겠어요. 다음 주에 마셜이 돼지를 잡으면 갈비를 좀 보내줄게요.”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월터는 다시 꿈에 젖은 눈동자로 계단에 앉아 있었다. 밖은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월터는 이 어둠이 어디서 오는 것일까 궁금했다. 박쥐 날개 같은 날개를 단 정령이 자줏빛 항아리에서 이 어둠을 꺼내 온 세상에 뿌려주는 것일까?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바람에 가지가 휘어진 가문비나무 세 그루는 말라깽이 꼽추 등을 가진 마녀 할머니 세 사람이 언덕을 올라가는 것처럼 보였다. 저 그늘에 웅크리고 있는 것은 귀에 털이 난 작은 파우누스14)인가? 벽돌담에 난 문을 연다면 이리로 들어올지도 몰라. 아니, 여기 정원으로가 아니라, 요정의 땅으로. 마법에 걸려 잠들어 있는 공주님이 깨어나고, 언제나 바라고 바라 마지않던 메아리를 찾아 따라갈 수 있는 땅으로. 월터는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소리를 내면 그 마법의 세상이 모두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월터, 밖에 이렇게 오래 나와 있으면 못 써. 추워졌잖니. 목 아프지 않아?”

이 말로 주문은 풀렸다. 마법의 등불이 꺼져버렸다. 정원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요정 나라는 아니었다. 월터는 일어났다.

“엄마, 피터 커크의 장례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해주세요.”

앤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몸을 떨었다.

“지금은 안 돼. 아마 나중에는 이야기해줄 수 있을 거야.”


14. 반인반수의 농경, 목축, 수렵을 보호하는 신.



추천 (0) 선물 (0명)
IP: ♡.252.♡.103
23,518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더좋은래일
2024-04-29
0
22
더좋은래일
2024-04-29
0
29
chillax
2024-04-29
0
33
chillax
2024-04-29
0
25
chillax
2024-04-29
0
20
더좋은래일
2024-04-28
0
41
더좋은래일
2024-04-27
4
95
더좋은래일
2024-04-26
4
67
더좋은래일
2024-04-25
3
98
chillax
2024-04-25
1
60
더좋은래일
2024-04-24
3
92
더좋은래일
2024-04-24
3
71
더좋은래일
2024-04-24
3
79
chillax
2024-04-24
1
51
더좋은래일
2024-04-23
3
89
chillax
2024-04-23
1
113
더좋은래일
2024-04-22
3
296
chillax
2024-04-22
1
212
더좋은래일
2024-04-21
3
353
나단비
2024-04-20
1
858
chillax
2024-04-19
2
783
나단비
2024-04-19
0
737
나단비
2024-04-19
0
84
나단비
2024-04-19
0
63
나단비
2024-04-19
0
64
나단비
2024-04-19
0
54
chillax
2024-04-18
2
156
나단비
2024-04-18
0
49
나단비
2024-04-18
0
54
나단비
2024-04-18
0
57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