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6권 37~38

나단비 | 2024.04.13 14:18:38 댓글: 0 조회: 72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6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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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쉬는 시간에 델릴라 그린이 다이에게 물었다.
“올해엔 나를 네 단짝 친구로 삼아주면 안 되겠니?”
델릴라는 아주 예쁜 소녀였다. 동그랗고 파란 눈에 매끄러운 머리는 갈색 설탕 빛깔로 곱슬거렸으며 입술은 꼭 장미 같았다. 델릴라의 목소리는 떨리기조차 했다. 다이애나 블라이드는 그 매력적인 목소리에 즉각 마음이 움직였다.
다이 블라이드에게 단짝이 없다는 것은 온 글렌 학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지난 2년 동안 다이와 단짝으로 지내던 폴린 리즈네 집이 이사를 갔기 때문이었다. 폴린은 좋은 친구였다. 이제는 거의 잊어버린 제니 페니가 가졌던 신비로운 매력 같은 것은 없었지만, 매사에 현실적이고 명랑했으며 분별력 있는 아이였다. 분별력 있는 아이란 수잔의 표현이었고, 다이의 친구로 폴린에게 아주 만족하고 있던 수잔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였다.
다이는 마음을 정하지 못한 듯 델릴라를 바라보며 운동장에 있는 로라 카 쪽도 흘끗 보았다. 로라 카도 새로 전학 온 아이였다. 로라와 다이는 오전 쉬는 시간을 함께 보냈고 서로 마음이 아주 잘 맞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로라는 얼굴이 평범하고 주근깨가 있었으며 모래 색깔머리는 좀 봐주기 힘들었다. 델릴라 그린의 아름다움이나 매력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델릴라는 다이의 망설이는 표정을 알아차리고 얼굴에 상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 푸른 눈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았다.
“네가 저 아이를 좋아한다면 나를 좋아할 수 없잖아. 어느 쪽인지 결정해줘.”
델릴라가 극적으로 손을 모아 쥐고 말했다. 그 목소리가 너무도 황홀해서 다이의 등골이 다 오싹오싹했다. 다이는 델릴라의 손에 자기 손을 얹고 엄숙하게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평생 변치 않을 우정을 약속했다. 적어도 다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너 나를 영원히 사랑할 거지, 그렇지?”
델릴라가 열정적으로 물었다.
“영원히.” 
다이도 똑같이 열정적으로 맹세했다.
델릴라가 다이애나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둘은 개울가를 함께 걸어 내려갔다. 4학년 나머지 아이들은 둘 사이에 우정의 언약이 맺어진 것을 알았다. 로라 카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로라는 다이를 아주 좋아했지만 델릴라와는 겨룰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너를 사랑하도록 허락해줘서 너무 기뻐. 나는 애정이 아주 많은 사람이야. 난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어. 제발 내게 다정하게 대해줘, 다이. 나는 슬픔의 아이야. 내게는 태어날 때부터 저주가 따라다녀. 아무도,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단다.”
델릴라가 말했다.

델릴라는 어떻게 연구했는지 그 ‘아무도’라는 말에 무한한 쓸쓸함과 사랑스러움을 담아 말했다. 다이는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델릴라, 이 시간 이후로는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을 거야. 난 언제나 너를 사랑할 거니까.”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다이가 대답했고, 둘은 서로 키스했다. 이런 의식에 키스가 빠질 수는 없는 일이니까. 울타리에 있던 두 남자아이가 놀려댔지만 누가 마음 쓸까!
“너는 로라 카보다 나를 훨씬 더 좋아하게 될 거야. 네가 로라를 택했다면 절대로 해주지 않았을 이야기를 해줄게. 로라는 아주 속임수를 잘 써. 아주 거짓말쟁이야. 네 앞에서는 너와 친구인 척하지만 네 뒤에서는 너를 욕하고 다닌다고. 아주 나쁜 소문을 내고 다녀. 로라와 모브레이 내로우즈 학교에 같이 다니던 친구 말로는 넌 큰일 날 뻔했다는 거야. 나는 그 애와는 아주 달라. 나는 금처럼 절대로 변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다이.”
델릴라가 말했다.
“나도 네가 변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아. 그런데 네가 슬픔의 아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니, 델릴라?”
델릴라가 더 이상 크게 뜰 수 없을 만큼 눈을 크게 떴다.
“우리 엄마는 계모야.”
델릴라가 속삭였다.
“계모?”

“만일 네 엄마가 죽어서 아빠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그 사람이 네 계모가 돼. 내가 어떤 대접을 받고 사는지 네가 안다면! 하지만 난 절대로 불평 같은 것은 하지 않아. 나는 침묵 속에서 고통 받지.”
델릴라가 목소리에 더더욱 감정을 실어 말했다.
델릴라가 정말로 그렇게 아무 말 없이 고통을 삼키며 살고 있다면 그 뒤로 몇 주일 동안이나 다이가 ‘잉글사이드’ 사람들에게 쏟아놓은 그 말들은 모두 어디서 주워들은 것인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다이는 학대받으며 살아야 하는 델릴라를 동정하는 마음과 열렬하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기도 괴로워하며 누구든 붙들고 델릴라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일도 때가 되면 식겠죠. 그런데 그 델릴라라는 아이는 누구죠, 수잔? 나는 다이더러 누구와 놀지 말라고 해서 다이를 잘난 척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지만, 제니 페니의 경험도 있고 해서요.”
앤이 말했다.
“그린 집안은 훌륭한 사람들이에요, 사모님. 로브리지에서도 유명한 집안이죠. 지난여름에 헌터 저택으로 이사 왔어요. 그린 부인은 두 번째 부인이에요. 자기 아이는 둘이죠. 나도 그 부인을 잘 모르지만 내가 듣기로는 성격이 너그럽고 친절하고 낙천적인 사람이라던데. 그 사람이 델릴라에게 다이가 말하는 것 같은 짓을 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아요.”
“델릴라가 하는 말을 그대로 믿지 않는 게 좋겠어, 다이. 그 애는 과장이 좀 심한 것 같더라. 너 제니 페니 일 기억하지?”
앤은 다이에게 주의를 주었다.

“왜요, 엄마? 델릴라는 제니 페니랑은 달라요.”
다이는 분개해서 말했다.
“조금도 같지 않다고요. 델릴라는 정말로 진실해요. 엄마도 그 애를 만나보면 당장 알 수 있을 거예요. 거짓말 같은 건 못 하는 애라는 걸 당장 알 거라고요. 그 애가 너무 착해서 식구들이 그 애를 못살게 구는 거예요. 얼마나 애정이 많은 성격을 가졌다고요. 그 애는 태어날 때부터 저주를 받았어요. 그리고 그 애는 계모한테 미움을 받고 살아요. 그 고통으로 그 아이 가슴이 찢어진다고요. 충분히 먹지도 못하면서요. 정말이에요. 그 애는 배가 고프지 않은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른대요. 저녁밥을 먹지 못하고 잠을 자야 했던 적도 너무 많아서 그럴 때면 울면서 잠든대요. 엄마는 배가 고파 울어본 적이 있어요?”
“자주 있었지.”
엄마는 대답했다.
다이는 눈이 휘둥그레져 엄마를 보았다. 애써 웅변적인 질문을 던졌는데 그만 맥이 빠지고 말았다.
“‘초록 지붕 집’으로 오기 전, 그러니까 고아원에서 살았을 때랑 그전에는 엄마도 배가 많이 고팠어. 그 시절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을 만큼.”
“그렇다면 델릴라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다이는 혼란스러웠던 마음을 수습하고 말했다.
“델릴라는 배가 고파 견딜 수 없을 때면 앉아서 여러 가지 음식을 상상한대요. 음식을 상상하다니, 생각해보세요!”

“그런 상상이라면 너나 낸도 곧잘 하잖니.”
앤이 말했다. 하지만 다이는 엄마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델릴라의 고통은 신체적인 고통만이 아니에요. 영혼의 고통이라고요. 그래서 그 애는 선교사가 되려고 해요. 엄마, 자기 삶을 희생하려고 한다고요. 모두들 그 애를 비웃어요.”
“사람들이 참 인정머리도 없구나.”
앤도 동의해주었다. 하지만 엄마의 말이 그다지 진심으로 들리지는 않았다.
“엄마, 무엇 때문에 그렇게 의심하는 거예요?”
다이가 원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는데 난 너에게 제니 페니 일을 되새겨주고 싶은 거야. 넌 제니도 믿었잖니.”
엄마가 웃으며 말했다.
“그때는 내가 어렸잖아요. 그래서 쉽게 속았다고요.”
다이는 온갖 위엄을 다 동원해 말했다. 엄마는 다른 때와는 다르게 델릴라 그린에게 참으로 무정하게 굴었다. 좀처럼 동정해주거나 이해해주려고 들지 않았다. 그런 뒤로 다이는 수잔에게만 델릴라 이야기를 했다. 낸은 델릴라의 이름이 나오면 고개만 한 번 끄덕하고 말았다. ‘샘내고 있는 거야.’ 다이는 슬프게 생각했다.
수잔도 완전히 동정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이는 누구에게든 델릴라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고, 수잔이 비웃는 것은 엄마가 그러는 것보다 기분이 덜 상했다. 수잔에게는 처음부터 완전히 이해받으리라는 기대도 갖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는 자기도 소녀 시절이 있었다. 엄마도 다이애나 아줌마를 사랑했다. 엄마는 감수성 어린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왜 델릴라가 학대받는다는 이야기에는 그렇게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아마 엄마도 좀 질투가 나는 모양이야. 엄마들은 그렇게 된다잖아. 소유욕 같은 거.’
다이는 현자나 된 것처럼 생각했다.
“델릴라 계모가 델릴라를 어떻게 학대하는지 이야기만 들어도 피가 끓어. 그 아이는 ‘순교자’야, 아줌마. 아침 식사도 저녁 식사도 죽만 조금 먹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먹지 못한대. 죽 조금밖에. 그리고 죽에 설탕도 넣지 못한대. 아줌마, 나도 내 죽에 설탕을 넣지 않을래. 델릴라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거든.”
다이는 수잔에게 말했다.
“오, 그래, 잘됐네. 설탕 값이 1센트 올랐거든. 아주 잘됐다.”
다이는 이제 수잔에게도 델릴라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다음 날 저녁 무렵 몹시 분개하여 다시 말을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아줌마, 델릴라의 엄마가 어젯밤 새빨갛게 달아오른 주전자를 들고 델릴라를 막 쫓아다녔대. 생각 좀 해봐, 해봐. 물론 그런 일이 자주 벌어지는 것은 아니고 엄마가 심하게 화가 났을 때만 그렇대. 다른 때는 그냥 델릴라를 컴컴한 다락방에 가두어둔대. 유령이 나오는 다락방에 말이야. 그 가엾은 아이는 유령을 봤대. 이건 아이에게 할 짓이 아니야. 아줌마! 지난번에 다락방에 갇혔을 때 델릴라가 어떤 귀신을 봤는지 알아? 아주 이상하게 생긴 검은 생물체가 물레바퀴에 앉아 콧노래를 부르고 있더래.”
“어떤 생물체였다고?”
수잔이 정색을 하고 물었다. 수잔은 델릴라의 고생 이야기도 재밌고 다이의 열렬한 말투도 재미있어 종종 사모님과 그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웠다.
“몰라. 그냥 생물체랬어. 그 때문에 델릴라는 하마터면 자살할 뻔했대. 그런 일이 또 생길까 봐 나는 정말 걱정이야. 있잖아, 아줌마, 그 아이네 삼촌은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대.”
“한 번으로는 충분치가 못했나 보지?”
수잔이 인정머리 없이 대꾸했다.
다이는 씩씩거리며 가버렸다. 하지만 다음 날 다이는 또 믿지 못할 새로운 이야기를 가져왔다.
“델릴라는 인형을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대, 아줌마. 작년 크리스마스에는 자기 양말 속에 인형이 하나 들어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대. 그랬더니 그 대신 뭐가 들어 있었다고 생각해, 아줌마? ‘회초리’였대! 그 집 사람들은 거의 날마다 델릴라를 회초리로 때린대. 가엾게도 그 아이는 회초리를 맞으며 살고 있어. 생각을 좀 해봐, 아줌마!”
“나도 어렸을 때는 종종 회초리를 맞았지만 지금은 그것이 하나도 나쁘다고 생각지 않는단다.”
수잔이 말했다. 하지만 만일 누가 ‘잉글사이드’ 아이에게 매질을 하려 들면 수잔이 어떻게 할지는 아무도 몰랐다.
“우리 집 크리스마스트리 이야기를 했더니 델릴라는 눈물을 흘렸어, 아줌마. 델릴라는 크리스마스트리를 꾸며본 적이 한 번도 없대. 하지만 올해는 어떤 일이 있어도 꾸며보고 싶다고 했어. 뼈대만 남은 낡은 우산을 하나 갖다가 우산 통에다 세우고 크리스마스트리로 장식할 거래. 정말 가엾지 않아, 수잔?”
“사방에 널린 것이 어린 가문비나문데 왜 그런 짓을 한다니? 헌터 씨네 집 뒤쪽에도 가문비나무가 많잖아. 그 아이 이름은 델릴라가 아니라 다른 이름이었어야 해. 그런 이름은 그리스도교도 아이에게 붙이는 게 아니거든!”
수잔이 말했다.
“하지만 성경에 나와, 아줌마. 델릴라는 자기 이름이 성경에서 따온 거라고 얼마나 자랑한다고. 아줌마, 오늘 학교에서 내가 우리 집은 내일 점심에 치킨 파이를 먹을 거라고 이야기해줬거든. 그 애가 뭐라고 얘기했는지 알아?”
“내가 어찌 알겠니. 그리고 공부시간에 그런 얘기나 해도 되는 거야?”
수잔이 인정사정없이 말했다.
“아니야. 우리는 수업 시간에 이야기하지 않았어. 우리는 학교 규칙을 하나도 어기지 않는다고. 델릴라는 규칙을 잘 지켜야 한다고 했어. 델릴라는 아주 엄격해. 우리는 서로 노트에 편지를 써서 바꿔 읽는 방법을 쓰고 있어. 델릴라가 ‘내게 뼈를 하나 갖다 주지 않겠니, 다이?’ 하고 썼어. 난 눈물을 흘리고 말았어. 난 고기가 많이 붙은 걸로 내일 그 애에게 뼈를 하나 가져다줄 거야. 델릴라에게는 좋은 음식이 필요해. 그 애는 노예처럼 일만 하거든, 아줌마. 그 애는 집안일을 다 해야 해. 아니, 거의 다.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잔인하게 괴롭힘을 당한대. 아니면 부엌에서 하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든지.”
“그린 씨네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라고는 프랑스 소년 하나밖에 없는걸.”
“글쎄, 그 남자아이와 같이 먹어야 한대. 그 남자아이는 양말만 신고 소매도 없는 셔츠를 입고 밥을 먹는대. 델릴라는 지금은 내 사랑만 있으면 그런 것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했어. 델릴라에게는 나 말고는 사랑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아줌마.”
“가엾기도 하지!”
수잔은 엄숙한 표정으로 대꾸해주었다.
“델릴라는 자기에게 백만 달러가 있으면 그 돈을 전부 나에게 주겠다고 했어. 난 물론 그 돈을 받지 않겠지만 그것만 봐도 그 아이가 얼마나 착한 마음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어.”
“어차피 그 돈을 갖고 있지도 않은데 백만 달러를 주건 얼마를 주건 뭐가 어렵겠니.”
수잔은 그 외에 달리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38






다이는 너무나도 기뻤다. 엄마는 질투를 했던 것이 아니었다. 우리 엄마는 소유욕을 가진 엄마가 아니다. 우리 엄마는 이해심이 많은 엄마다.
엄마 아빠는 주말을 에이번리에서 보내게 되었는데, 엄마는 다이에게 토요일 밤에 델릴라 그린을 불러 ‘잉글사이드’에서 함께 지내도 좋다고 했다.
“내가 주일 학교 소풍 때 델릴라를 봤는데 귀엽고 얌전한 아이 같았어요. 말을 과장해서 하는 건 틀림없지만 말예요. 그 아이의 새엄마가 좀 무정하게 대하는 것이 사실인지도 모르구요. 그리고 그 아이 아빠도 무척 무뚝뚝하고 엄격한 사람이래요. 그 아이에게 뭔가 슬픈 일이 있어서 동정을 구할 방법으로 과장해서 말하는 버릇이 생긴 건지도 몰라요.”
앤이 수잔에게 말했다.
수잔은 그래도 좀 의심스러웠다.
수잔은 그래도 로라 그린 집안사람은 믿을 수 있으니까 이번 일에는 참빗 따위는 필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이는 델릴라를 즐겁게 해줄 여러 가지 계획들을 세웠다.

“구운 닭고기를 먹을 수 있을까, 아줌마? 속을 꽉꽉 채워서. 그리고 파이도. 그 불쌍한 아이가 얼마나 파이를 먹고 싶어 하는지 아줌마는 몰라. 델릴라네 집에서는 파이를 먹지 않는대. 계모가 너무 인색한 거야.”
수잔은 마음씨 좋게 다이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젬과 낸도 에이번리에 갔고 월터는 ‘꿈의 집’ 케네스 포드에게 갔다. 델릴라의 방문에 그림자를 던질 만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토요일 아침에 델릴라가 아주 예쁜 분홍색 모슬린 드레스를 입고 왔다. 계모가 적어도 옷만큼은 관대하게 구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수잔이 보기에도 귀 뒤며 손톱도 깨끗하니 나무랄 데가 없었다.
“오늘은 내 평생 가장 행복한 날이야.”
델릴라가 다이에게 엄숙히 말했다.
“집이 어쩌면 이렇게 크니? 저것이 도자기 개구나! 정말 멋지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고 델릴라는 일도 열심히 도왔다. 다이가 점심 식탁 꾸미는 일을 도와 분홍빛 스위트피를 가득 담은 조그만 유리 화병을 식탁 가운데에 장식하기도 했다.
“아, 내가 얼마나 이런 일을 해보고 싶었는지 몰라. 난 이런 일을 좋아하니까. 내가 더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없을까?”
델릴라가 다이에게 말했다.
“오후에 케이크를 구울 생각인데 호두를 까주렴.”
수잔이 말했다. 수잔도 델릴라의 예쁜 모습과 상냥한 목소리의 마력에 빠져들어 버렸다. 델릴라 말대로 로라 그린은 정말로 못된 애인지도 몰랐다. 사람들 앞에서 보이는 행동과는 다른 애인지도. 모두가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속이 항상 같지는 않으니까. 델릴라의 접시에는 닭고기와 그레이비가 푸짐하게 담겼다. 더 달라는 눈치를 보이지도 않았지만 파이도 두 번이나 주었다.
“나는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음식을 먹으면서 산다면 어떨까 상상해보고는 했단다. 그런데 진짜로 이렇게 배불리 먹으니 너무너무 좋구나.”
식탁에서 일어서면서 델릴라가 다이에게 말했다.
둘은 오후를 아주 즐겁게 보냈다. 수잔이 다이에게 사탕 한 상자를 통째로 주었고 다이는 그것을 델릴라와 나누어 먹었다. 델릴라는 다이의 인형을 보면서도 입이 마르도록 찬사를 보내 인형도 하나 주었다. 둘은 팬지 꽃밭에서 풀을 뽑기도 했고 잔디밭으로 침입해 들어온 민들레 두서너 개도 파냈다. 둘은 수잔이 은그릇 닦는 것을 돕기도 하고 저녁 식사 준비를 거들기도 했다. 델릴라가 아주 일을 잘하고 깔끔해서 수잔은 완전히 반해버렸다. 그런데 그 즐거운 오후를 망친 일이 두 가지 벌어졌다. 델릴라가 실수로 자기 드레스에 잉크를 튀게 만들었고 진주 구슬 목걸이를 잃어버렸다. 하지만 잉크는 색깔이 약간 남긴 했지만 수잔이 레몬 소금으로 깨끗이 지웠고, 목걸이는 괜찮다고 했다. 델릴라는 다이와 ‘잉글사이드’에 있을 수만 있다면 ‘다른 것은’ 아무래도 좋다고 했다.
잘 시간이 되자 다이가 수잔에게 물었다.
“우리 손님방에서 자도 될까? 손님이 오면 언제나 손님방에서 자게 했잖아.”
“내일 저녁에 엄마 아빠와 함께 다이애나 아줌마가 오시잖아. 손님방 침대는 다이애나 아줌마가 잘 수 있도록 준비해둔 거야. 그리고 네 침대야 슈림프가 들어가도 좋지만 손님방 침대는 안 돼.”

수잔이 말했다.
“어머나, 너희 집 시트는 좋은 냄새가 나는구나.”
둘이 침대에 들어가자 델릴라가 감탄했다.
“수잔 아줌마가 늘 붓꽃 뿌리로 삶거든.”
다이가 말했다.
델릴라가 한숨을 쉬었다.
“다이, 넌 정말 운이 좋은 아이야. 네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겠다. 나도 이런 집이 있다면…… 하지만 이것은 내 운명이야. 그러니까 내가 참아야만 하는 거라고.”
밤이면 자기 방으로 물러가기 전에 집을 한 바퀴 도는 수잔이 방으로 들어와 이제 그만 이야기하고 자라고 했다. 그리고 메이플 시럽 빵을 주었다.
“저에게 이렇게 잘 대해주다니 은혜를 결코 잊지 않겠어요, 미스 베이커.”
델릴라는 감격하여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수잔은 저렇게 예의도 바르고 참한 아이는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며 자기 방으로 갔다. 자기가 델릴라 그린을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순간 수잔은 먹을 것을 충분히 얻어먹지 못하는 아이치고는 델릴라가 굉장히 통통하게 살이 쪘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오후 델릴라는 집으로 돌아갔고, 밤에 아빠와 엄마 그리고 다이애나 아줌마가 왔다.
월요일, 학교에서 다이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다이가 점심을 먹고 학교로 돌아가 막 현관에 들어서는데 자기 이름을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교실 안에는 여자아이들이 무리지어 서 있고 그 한가운데에 델릴라가 서 있었다.
“난 말이야, ‘잉글사이드’에 정말 실망했어. 다이가 자기 집 자랑을 하도 해서 큰 저택이나 되는 줄 알았거든. 물론 그 집이 크기는 했어. 하지만 가구가 초라한 것도 있더라. 의자는 다시 천을 씌워야 되겠고, 꼴이 형편없더라고.”
“도자기 개를 봤니?”
베시 팔머가 물었다.
“그것도 별로야. 털도 없던걸.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다이에게 실망했다고 말했어.”
델릴라가 대답했다.
다이는 그 자리에 붙박여버린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이들 말을 엿들으려고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저 너무 놀라고 멍해 움직일 수가 없을 뿐이었다.
“다이도 참 안됐더라. 그 애 부모는 아이들을 되는대로 내버려둬. 아주 놀랐다니까. 다이 엄마는 어린아이들을 나이 먹은 수잔에게만 맡기고 그렇게 나다니기만 하다니 한심하지 뭐니. 그리고 수잔도 머리가 좀 이상한 사람이야. 수잔 덕분에 그 집 식구들은 전부 구빈원에 들어갈지도 몰라. 부엌에서 물건을 너무 함부로 써대더라고. 그 의사 부인은 너무 화려하고 게을러서 집에 있어도 요리 같은 것은 안 해. 그래서 수잔이 제멋대로 한다고. 우리 밥도 부엌에서 먹으라고 해서 내가 벌떡 일어서서 ‘제가 손님인가요, 아닌가요?’ 하고 따졌지. 그랬더니 수잔이 내가 또다시 말대꾸하면 뒤 장롱에다 처넣어버리겠다고 위협했어. 그래서 내가 ‘나한테는 감히 그런 짓을 못할걸요.’ 하고 말해줬지. 수잔이 그런 짓을 하지는 못했지. ‘잉글사이드’ 아이들은 당신 마음대로 벽장에 처넣어버릴 수 있을지 몰라도요, 수잔 베이커, 나한테까지는 함부로 못 해요.’ 하고 말해주었거든. 수잔이 릴라에게 진정제를 먹이려 했을 때도 내가 일어나서 막았어. ‘그것이 아이에게는 독이 된다는 걸 모르나요?’ 하고 말이야.”
델릴라의 말은 계속되었다.
“수잔이 밥 먹으면서 그 분풀이를 했어. 내 그릇에 밥을 얼마나 조금 주었는지 알아? 닭고기가 있었지만 다리 하나만 주었고, 내게 ‘파이 한 조각 더 줄까?’ 하는 말을 하는 사람도 없었어. 그래도 수잔이 나를 손님용 침실에서 자게 해준다고 했는데 다이가 도무지 말을 들어야지. 아무 이유도 없이 고약하게 심술을 부리더라니까. 그 애가 원래 샘이 많잖아. 그래도 난 다이가 참 안됐다고 생각해. 다이가 그러는데 낸이 자꾸 자기를 꼬집는대. 그 애 팔이 온통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더라고. 우리는 다이 방에서 잤는데 피부병에 걸린 것 같은 더럽고 늙어빠진 암고양이가 밤새 그 아이의 침대 발치에서 같이 잤어. 난 더러운 고양이와 함께 자는 건 위생적인 일이 아니라고 다이에게 말해줬어. 그리고 내 진주 목걸이가 없어졌단다. 물론 수잔이 훔쳐갔다는 건 아니야. 난 수잔이 정직하다고 믿거든. 하지만 이상한 일인 것만은 분명하지. 그리고 셜리가 나한테 잉크병을 던져서 내 옷이 엉망이 되었지만 그래도 괜찮아. 우리 엄마가 새 옷을 사줄 테니까. 그리고 나는 그 집 잔디밭에서 민들레를 모두 뽑아내고 은그릇도 닦아주고 왔단다. 너희들도 그 그릇들을 봤어야 해. 도대체 그릇들을 얼마 만에 닦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더럽더라고. 의사 부인이 없을 때는 수잔이 순전히 놀기만 한단다. 나는 수잔에게 내 눈은 속일 수 없다는 걸 보여주었어. ‘왜 감자 냄비는 씻지 않죠, 수잔?’ 하고 말해줬을 때의 수잔의 얼굴을 봤어야 해. 내 새 반지를 봐, 얘들아. 로브리지에 사는 남자아이가 주었어.”

“어머나, 그 반지는 다이 블라이드가 끼고 다니던 것인데.”
페기 매컬리스터가 경멸적으로 말했다.
“난 네가 ‘잉글사이드’에 관해 한 말을 한 마디도 믿지 않아, 델릴라 그린.”
로라 카가 말했다.
델릴라가 대답하기도 전에 입과 몸을 움직일 힘을 되찾은 다이가 교실로 뛰어 들어갔다.
“너는 유다야!”
다이가 소리쳤다. 그런 말은 숙녀가 입에 담을 말이 아니라고 나중에야 후회했지만, 심장을 찔리고 감정이 온통 뒤죽박죽되었을 때는 말을 가려할 여유가 없다.
“난 유다가 아니야.”
델릴라가 평생 처음으로 말을 더듬거리며 대꾸했다.
“넌 유다야! 네 이야기는 모두가 거짓말이잖아! 살아 있는 한 다시는 내게 말도 걸지 마!”
다이는 학교를 뛰쳐나와 집으로 달려갔다. 그날 오후 다이는 도저히 학교에 있을 수 없었다.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잉글사이드’의 현관문이 처음으로 쾅 하고 닫혔다.
“다이, 무슨 일이니?”
앤이 물었다. 앤이 수잔과 부엌에서 대화를 하고 있는 참에 다이가 울면서 들어와 엄마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흐느끼면서 자초지종을 모두 털어놓았다. 좀 갈피를 잡기 어려운 이야기이긴 했지만.
“나는 마음이 너무나 많이 상했어요. 다시는 아무도 믿지 않을 거예요.”
“네 친구 모두가 그렇지는 않아. 폴린은 그렇지 않았잖아.”
“벌써 ‘두 번째’예요. 세 번째는 없을 거예요.”
다이는 아직 배신감과 패배감에 시달리며 씁쓰레하게 말했다.
“다이가 인간에게 신뢰를 잃어버리게 되어 참 안타까워요. 다이에게는 정말 비극적인 일이잖아요. 다이가 친구들 일로 운 나쁜 꼴을 당했어요. 제니 페니, 이번에는 델릴라 그린. 딱하게도 다이는 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여자아이에게 반해버리잖아요. 게다가 델릴라의 순교자적인 태도에 완전히 빠져버렸죠.”
다이가 2층으로 올라가자 앤이 씁쓸하게 말했다.
“사모님, 그 그린네 딸아이는 정말 건방져요. 우리 슈림프가 더러운 고양이라니! 고양이 중에 더러운 수고양이가 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조그만 여자아이들이 입에 담을 말은 아니지요. 내가 뭐 고양이 애호가는 아니지만, 우리슈림프는 이제 나이도 일곱 살이나 먹었고 최소한의 존중은 해줘야 할 나이라고요. 그리고 내 감자 냄비에도…….”
수잔은 자기도 델릴라의 눈과 태도에 속을 뻔해서 델릴라가 더욱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수잔은 그 감자 냄비만큼은 아주 마음이 상해 도저히 자기감정을 있는 그대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다이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 아직 로라 카와 친구가 되기에 너무 늦지는 않았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로라는 아주 재미있는 아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정직한 아이였다. 다이는 한숨을 쉬었다. 인생을 화려하게 수놓았던 색채가 델릴라의 가엾은 운명에 대한 믿음과 함께 얼마쯤은 사라져버린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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