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7권 3~4

나단비 | 2024.04.13 19:34:46 댓글: 0 조회: 40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6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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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사이드 아이들






한낮이면 블라이드 아이들은 ‘잉글사이드’와 글렌 세인트 메리 연못 사이에 있는 나뭇잎이 무성하고 적당히 그늘이 드리워진 큰 단풍나무 숲에서 주로 놀았지만, 어둠이 내리면 단풍나무 숲 뒤에 있는 작은 골짜기가 놀기에 더 좋았다. 아이들에게 그 골짜기는 모험과 낭만으로 가득한 요정의 나라였다. 여름 폭풍우가 한바탕 몰아쳐 간 어느 날 월터가 ‘잉글사이드’의 다락방 창문으로 내다보니 안개가 자욱한 골짜기 위로 찬란한 무지개가 걸쳐 있었다. 무지개 한쪽 끝은 연못 한구석으로 퐁당 빠져 있었고 다른 끝은 골짜기 아래 끄트머리에 내려앉아 있었다.
“우리 저 골짜기를 ‘무지개 골짜기’라고 부르자.”
월터가 기쁨에 넘쳐 외쳤고, 그 뒤로 골짜기는 ‘무지개 골짜기’가 되었다.
‘무지개 골짜기’ 밖에서는 요란스럽고 세차게 불던 바람도 골짜기 안에서는 부드러워졌다. 좁다란 요정의 오솔길이 구불구불 이어져 있고, 가문비나무 뿌리 위로는 폭신한 이끼가 덮였다. 산벚꽃이 피는 계절이 오면 온 골짜기에 안개 같은 하얀 꽃 이파리가 거무스름한 전나무 사이로 흩날렸고 골짜기를 가로질러 마을을 지나는 개울에는 호박(琥珀) 빛깔 물이 졸졸 흘렀다.
마을에는 집들이 알맞게 떨어져 있었고, 골짜기 위쪽 끄트머리에는 거의 무너져 가는 버려진 집이 하나 홀로 서 있었다. ‘베일리네 빈집’이라고 불리는 그 집은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고, 무성하게 풀이 돋아난 돌담이 둘러쳐져 있었으며, 집 안으로 들어서면 뜰에 제비꽃, 데이지, 백합꽃이 어지럽게 피어 ‘잉글사이드’ 아이들을 환영했다.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미나리도 제멋대로 자라 흔들거렸는데 그 광경은 꼭 바다에서 여름밤 달빛 아래 은빛 파도가 부서지는 모습을 보는 듯했다.
그 너머로는 연못이 보였고, 더 멀리로는 보랏빛 숲이 아득히 보였으며, 높은 언덕 위에는 잿빛 농가 하나가 동그마니 서서 글렌 마을과 항구를 내려다보았다. ‘무지개 골짜기’는 마을에서 가깝지만 깊은 숲 같기도 했고, ‘잉글사이드’ 아이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도 고즈넉함이 느껴졌다.
그 골짜기에는 친근하게 느껴지는 오목한 분지가 많이 있었고, 아이들은 그중의 가장 큰 분지에서 뛰어놀고는 했다. 그 특별한 저녁, 어린 가문비나무 숲이 있는 분지에 아이들이 다시 모였다. 그 가운데엔 풀만 나 있는 아주 조그만 오솔길이 있었고, 길은 개울둑으로 이어졌다. 개울 옆으로는 어린 은빛 자작나무가 서 있었는데 월터는 이 보기 좋게 늘씬한 나무에 ‘하얀 숙녀’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오솔길에는 또한 ‘연인 나무’도 있었다. 가문비나무 한 그루와 단풍나무 하나가 아주 가까이 자라 나뭇가지가 서로 얽혀 있는 것을 보고 월터가 붙인 이름이었다. 젬이 마을 대장장이가 준 헌 썰매 방울 한 쌍을 ‘연인 나무’에 매달았는데, 산들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쨍그랑쨍그랑 울리는 소리가 꼭 요정의 방울 소리 같았다.
“집으로 돌아오니까 너무 좋다! 에이번리에는 ‘무지개골짜기’만큼 좋은 곳은 없어.”
낸이 말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에이번리도 다 좋아했다. 아이들은 ‘초록 지붕 집’에 가는 일을 큰 상이나 받는 것처럼 몹시 좋아했다. 마릴라 할머니는 아이들에게 무척 잘해주었고 레이철 린드 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린드 할머니는 틈만 나면 퀼트 이불을 만들었다. 앤의 딸들이 새 인생을 시작할 때 쓰려는 것이다. 에이번리에는 같이 신나게 놀 친구도 많았다. 데이비 삼촌 아이들과 다이애나 아줌마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그 옛날 엄마가 ‘초록 지붕 집’에 살던 시절에 좋아했던 장소들을 모두 알았다. 그 기다란 ‘연인의 오솔길’에는 분홍색 들장미 덩굴로 덮인 울타리가 있었다. 버드나무와 미루나무가 자리 잡은 뜰은 언제나 정갈했다. ‘드리아드의 샘’은 그 옛날처럼 맑고 다정하게 빛났으며, ‘반짝이는 호수’와 ‘버드나무 연못’에도 가보았다. 쌍둥이는 엄마가 그 옛날에 자던 박공창이 있는 동쪽 방에서 지냈고, 마릴라 할머니가 밤이면 올라와 잠든 아이들을 흐뭇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모두들 마릴라 할머니가 가장 예뻐하는 사람은 젬이라는 것을 알았다.
젬은 지금 연못에서 갓 잡아온 송어를 구우려고 바삐 서두르고 있었다. 붉은 돌을 둥그렇게 둘러놓고 그 안에서 불을 피워 즉석으로 스토브를 만들었다. 요리 도구도 두들겨서 납작하게 편 양철 깡통과 이가 하나뿐인 낡은 포크가 전부였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만들어본 적 없는 아주 근사한 요리가 완성되어가고 있는 참이었다.
젬만 ‘꿈의 집’ 아이였고, 다른 아이들은 모두 ‘잉글사이드’에서 태어났다. 젬은 엄마처럼 곱슬거리는 빨간 머리에 눈은 아버지를 닮아 갈색이었다. 모양 좋은 코는 엄마에게 물려받았고, 장난기가 가득하면서도 의지가 굳어 보이는 입매는 아버지를 닮았다. 그리고 수잔이 식구들 중에서 제일 멋진 귀를 가졌다고 칭찬하는 아이도 젬이었다. 하지만 젬은 수잔이 아직까지도 자기를 ‘젬 꼬맹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열세 살이나 먹은 나를 꼬맹이라고 부르다니.” 하면서 씩씩거렸다. 엄마 편이 훨씬 더 분별력이 있었다.
“난 이제 꼬맹이가 아니에요, 엄마. 나는 이렇게 크단 말이에요.”
여덟 살 생일날에 젬은 화가 나서 엄마에게 그렇게 소리쳤다.
엄마는 한숨지으며 웃었다. 그리고 또 한숨지었다. 그 뒤로는 두 번 다시 ‘젬 꼬맹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적어도 젬이 듣는 곳에서는.
젬은 언제나 듬직하고 믿음직한 소년이었다. 절대 약속을 어기는 법도 없었고, 말이 많지도 않았다. 젬의 선생님은 젬이 명석한 학생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성격 좋고 성실한 학생이라고 말했다. 젬은 무슨 일이든 그대로 믿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자기 스스로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들었다. 언젠가 수잔이 “서리 앉은 쇠 문고리에 혀를 대면 껍질이 홀랑 벗겨진다.” 하고 말한 적이 있었다. 젬은 ‘정말로 그렇게 되는지 알아보려고’ 곧바로 그렇게 해보았다. 그 결과, 수잔의 말은 사실로 드러나 며칠 동안이나 쓰라린 혀를 참아내야 했다. 하지만 젬은 과학에 대한 흥미로 얻은 고통에는 불평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실험하고 관찰한 결과 젬은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고, 동생들은 젬의 광범위한 지식에 존경을 표했다.
젬은 딸기가 가장 먼저 익는 곳이 어디고, 연보랏빛 제비꽃이 제일 먼저 수줍게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곳이 어디인지도 알았으며, 단풍나무 숲 울새 둥지에 파란 알이 몇 개나 들어 있는지도 알았다. 데이지 꽃잎으로 점치는 법도 알았고, 붉은 클로버에서 꿀을 빨아 먹는 법도, 연못 둑에 자라는 풀 중에서 먹을 수 있는 풀뿌리를 찾아낼줄도 알았다. 그 때문에 수잔은 아이들이 독이 든 것을 먹지나 않을까 날마다 노심초사했다. 젬은 가장 맛있는 가문비나무 열매가 어디 있는지도 알았다. 이끼가 끼어 있는 나무껍질에 옅은 호박 빛깔로 혹처럼 튀어나온 옹이였다. 항구 어귀 언저리에 있는 너도밤나무 숲에서 열매가 가장 많이 열리는 자리도 알았고, 개울 어디에서 송어가 제일 잘 잡히는지도 알았다. 또 포 윈즈 근방에서 볼 수 있는 모든 들새며 동물 울음소리도 흉내 낼 수 있었고, 봄부터 가을에 걸쳐 피어나는 야생화를 볼 수 있는 곳도 모두 알았다.
월터 블라이드는 ‘하얀 숙녀’ 아래 앉아 있었다. 곁에는 시집이 한 권 놓여 있지만, 읽지는 않았다. 연못가에 서 있는 에메랄드 빛 안개에 둘러싸인 버드나무를 바라보기도 하고, 바람에 떠내려 온 은빛 양털 구름이 ‘무지개 골짜기’ 위를 두둥실 떠돌아다니는 것을 올려다보기도 했다. 그 크고 아름다운 눈에는 기쁨이 넘쳐 보였다. 월터의 눈은 무척 보기 좋았다. 땅 밑에 잠들어 있는 수 세대 사람들이 간직했던 모든 기쁨과 슬픔, 웃음과 성실함, 열망이 그 짙은 잿빛 두 눈에 다 들어 있는 듯했다.
월터는 겉모습으로 보면 ‘아무도’ 닮지 않았다. 친척 중에서도 닮은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 ‘잉글사이드’ 아이 중에서 가장 잘생긴 아이였다. 곧은 검은색 머리에 생김새 하나하나도 참 섬세하게 생겼다. 제 엄마의 풍부한 상상력과 아름다움에 대한 열정을 그대로 물려받아 월터에게는 온통 하얀 세상이 되는 겨울, 봄의 초대, 여름의 꿈, 가을의 풍요로움이 모두 의미 있게 다가왔다.
학교에서 젬은 대장 노릇을 했지만 월터는 친구들로부터 그다지 존경을 받지 못했다. 월터는 좀 ‘여자아이’ 같고 젖비린내를 풍긴다는 평이었다. 절대로 친구들과 싸우는 법이 없었고, 학교에서 벌어지는 운동경기에 참여하는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월터는 혼자서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구석을 찾아가 책이나 읽는 것이 더 좋았다. 특히 시집을 좋아했다. 월터는 시인을 존경했다.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자마자 손에서 시집을 놓지 않았다.
시인이 연주하는 불멸을 노래한 음악은 그의 자라나는 영혼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월터는 자기도 언젠가 시인이 되고 싶다는 야심을 품었다.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 아니었다. 월터는 ‘미국’이라는 신기한 곳에 살고 있는 폴 아저씨를 동경했다. 월터가 친근하게 폴 아저씨라 부르는 그 시인은 옛날에 에이번리 초등학교에 다녔고, 지금은 어디서나 칭송받는 시인이었다. 그러나 글렌 마을 남자아이들은 월터가 이런 꿈을 가지고 있는 줄 몰랐으며, 비록 알았다 하더라도 특별한 감명을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월터는 힘이 세지는 않았지만 책 이야기를 잘해서 어느 정도는 존경받았다. 글렌 세인트 메리 학교에서 월터만큼 말을 잘하는 아이는 없었다. 한 아이는 월터를 가리켜 “말이 목사처럼 술술 잘도 나와.” 하고 말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월터는 왕따가 되기도 했고, 괴롭힘을 면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주먹다짐을 싫어하거나 무서워하는 것을 눈치채이면 그야말로 끝이지만, 월터만은 예외였다.
나이가 열 살인 ‘잉글사이드’ 쌍둥이는 둘이 전혀 닮지 않아 쌍둥이의 전통을 깨뜨렸다. 원래 이름은 ‘앤’이지만 모두들 ‘낸’이라고 부르는 아이는 아주 예쁜 얼굴에 벨벳 같은 밤색 눈과 비단처럼 부드러운 밤색 머리카락을 가졌다. 낸은 무척이나 활발하고 귀티 나게 생긴 꼬마 아가씨로 낸의 선생님은 ‘블라이드’란 이름답게 성격도 쾌활하다고 했다.3)피부도 나무랄 데 없이 아름다워서 낸의 엄마는 무척 흡족해했다.
“분홍 옷을 입을 수 있는 딸이 하나 있어서 나는 아주 기쁘단다.”
블라이드 부인은 그렇게 말하며 무척 행복해했다.

흔히 다이라고 불리는 다이애나 블라이드는 엄마를 꼭 닮아서 해 질 무렵이면 이상한 광채를 띠는 잿빛 도는 초록색 눈과 빨간 머리를 가졌다. 아버지가 다이를 제일 예뻐하는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이리라. 아이들 중에서 다이와 월터는 사이가 좋아 월터는 자기가 쓴 시를 다이에게만 읽어주고는 했다. 월터가 어떻게 보면 <마미온>4)과 무척 흡사한 서사시를 아무도 모르게 열심히 쓰고 있는 것을 아는 사람도 다이뿐이었다. 다이는 월터가 말해준 비밀을 낸에게도 말하지 않고 꼭 지켰고, 자기 일도 하나 빠짐없이 모두 월터에게 이야기해주었다.
“이 물고기 언제 다 구워져, 젬 오빠? 냄새를 맡고 있으니까 배가 고파 못 견디겠어.”
낸이 기품 있는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다.
“이제 곧 다 돼. 여자아이들은 빵과 접시를 늘어놓아. 월터, 이젠 그만 눈 좀 떠.”
젬은 익숙한 솜씨로 물고기를 뒤집으며 말했다.
“오늘 저녁에는 어쩌면 이토록 공기가 빛날까. 꽃의 천사가 걸어 다니는 것 같아. 꽃들을 부르면서. 저기 숲 옆에 있는 언덕에 파란 날개가 보여.”
월터는 꿈꾸듯 말했다. 송어구이를 무시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영혼의 음식이 무엇보다도 으뜸이었다.
“어머나, 내가 본 천사의 날개는 모두 하얗던걸.”
낸이 말했다.
“꽃의 천사 날개는 그렇지 않아. 아지랑이처럼 얇고 희미한 파란빛으로 마치 골짜기에 스며든 안개 같아. 아, 나도 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정말 멋질 거야.”

“꿈속에서는 날 수 있어.”
다이가 말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난 날아다니는 꿈은 꾸어본 적이 없어. 언제나 땅을 날아올라 담장이랑 나무 위를 날고는 마는 꿈이지. 하지만 그것만도 좋아. 그런 꿈을 꾸면서 난 이것은 꿈이 아니야, 라고 생각해. 그렇지만 언제나 눈이 번쩍 뜨여지고 말아. 그땐 정말 아쉬워.”
월터가 말했다.
“얼른 서둘러, 낸.”
젬이 명령했다.
낸이 연회용 널빤지를 꺼냈다. 모양으로만 보아서는 말 그대로 널빤지였지만 ‘무지개 골짜기’에서 벌어지는 향연에 그야말로 딱 어울리는 연회용 탁자였다. 큼직한 이끼 낀 돌 두 개를 널빤지 밑에다 받치면 금방 식탁이 되었고, 식탁보는 신문지였으며, 수잔이 쓰다가 내버린 이 빠진 접시와 손잡이 없는 찻잔이 식기였다.
낸이 땅으로 튀어 올라온 가문비나무 뿌리 아래 몰래 감추어둔 양철통에서 빵과 소금을 꺼냈다. 마실 물은 개울에 흘러가는 수정처럼 맑은 물을 떠 마시면 되었다. 이 향연에 필요한 나머지는 신선한 공기와 아이들의 식욕을 섞어 만든 양념이었다. 그것이면 이 성찬에 필요한 것은 모두 갖추어졌다. 절반은 황금빛으로, 절반은 자수정 빛으로 빛나는 봄날 황혼녘에 초록으로 물든 ‘무지개 골짜기’에 앉아 발삼 전나무에서 나오는 향기를 마시며 구운 송어와 빵을 먹으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여기저기서 야생 딸기가 별처럼 반짝였고, 나뭇가지에 매달린 요정 벨은 바람에 흔들리며 쨍그랑쨍그랑 소리를 냈다.

“모두들 앉아. 젬 오빠가 감사 기도를 올릴 차례야.”
젬이 탁자에 지글지글 끓는 송어를 담은 양철 접시를 올려놓는데 낸이 말했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다 했어. 송어를 구웠잖아. 기도는 월터더러 하라고 해. 월터는 감사 기도 올리는 걸 좋아하잖아. 짧게 해, 월터. 난 배가 고파 죽겠단 말이야.”
감사 기도 올리기를 싫어하는 젬이 항의했다.
하지만 월터는 짧게든 길게든 감사 기도를 올리지 못했다. 바로 그때 이들의 향연을 방해하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목사관 언덕을 달려 내려오는 아이들이 누구야?”
다이가 말했다.
3. ‘블라이드(Blythe)’란 이름과 ‘즐거운’, ‘쾌활한’, ‘기쁜’이라는 뜻의 ‘블라이드(blithe)’는 발음이 같다.
4. 스코틀랜드 시인이며 소설가인 월터 스콧(Walter Scott, 1771년~1832년)경의 서사시.



4
목사관 아이들






마사 이모할머니만큼 집안 살림살이에 형편없는 사람도 없었고, 존 녹스 메러디스 목사님만큼 얼이 빠져 매사에 분명한 것이 하나도 없는 아버지도 드물었다. 그러나 질서가 있건 없건 글렌 세인트 메리 목사관에는 어딘지 친밀하고 가정적인 구석도 분명 있었다. 말 많은 마을 주부들까지도 목사관의 이런 분위기를 느꼈고,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 이 집 식구들을 바라보는 눈길이 부드러워졌다. 아마 목사관을 둘러싸고 있는 보기 좋은 주변 환경도 이런 호감에 한몫했을 것이다.
무성한 덩굴 식물이 회색 판자벽을 온통 휘감았고, 그 곁으로는 아카시아 나무와 길리아드 발삼 나무가 오랜 친구처럼 무리지어 서 있었으며, 바로 앞으로는 아름다운 항구와 모래톱 풍경이 보였다. 그렇지만 이런 풍경은 메러디스 목사 전임자가 살 때도 마찬가지였고, 그때는 목사관이 더 이상 정갈할 수 없을 만큼 정갈했지만 글렌에서 가장 살풍경한 집이었다. 그런 걸 보면 지금의 이런 친근한 모습은 아마도 새로 이사 온 사람들의 성품과 분위기 탓일 것이다. 지금 목사관에는 웃음이 있고 동지애가 있었다. 목사관 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었고, 집안과 바깥세계가 사이좋게 손을 마주 잡고 있는 것 같았다. 글렌 세인트 메리 목사관을 지배하는 단 하나의 법은 ‘사랑’이었다.
교회 신도들은 메러디스 씨가 자기 아이들 버릇을 너무 버려놓고 있다고 말했다. 그것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메러디스 목사는 아이들을 나무라고 야단칠 마음이 없었으니까. 사실 메러디스 씨는 엄청난 소동이 일어 도저히 자기 눈에 띄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생겨야 한숨을 내쉬며 ‘이 아이들에게는 엄마가 없으니까.’ 하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나저나 메러디스 목사는 자기 아이들에게 일어나는 일을 절반도 알지 못했고, 순전히 몽상에만 잠겨서 살았다. 서재 창문이 묘지 쪽으로 나 있기는 했지만 서재를 오락가락 거닐면서도 영혼의 불멸성만 깊이 성찰할 뿐 제리와 칼이 개구리 놀이를 한다고 죽은 감리교인이 누워 있는 비석 위를 아무리 소란스럽게 뛰어다녀도 알아채지 못했다.
메러디스 씨도 간간이 아이들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제대로 보살핌을 받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 있었다. 마사 이모할머니가 집을 관리하면서부터는 아내가 죽기 전과 집이건 식사건 모든 것이 다르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의식했다. 하지만 메러디스 목사에게 그렇게 의식이 돌아오는 순간도 잠시고, 대부분은 책과 추상의 세계에서 살았다. 옷차림은 언제나 후줄근했고, 섬세하고 아름다운 이목구비지만 살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창백한 얼굴에 가는 손을 보면서 글렌 주부들은 목사가 충분히 먹고 있지 못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불행한 사람은 아니었다.
만일 묘지를 즐거운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글렌 세인트 메리 감리교회에 딸린 오래된 묘지야말로 그러했다. 교회의 다른 한쪽에 있는 새 묘지는 잘 정돈되고 이상하게 점잔 뺀 모양새였다. 하지만 이 오래된 묘지는 대자연의 친절하고 은혜로운 손길에 내맡겨진 채 방치된 덕에 아주 유쾌한 곳이 되었다. 묘지의 세 방향은 돌과 흙으로 된 담이 둘러쳐져 있고 맨 위에는 잿빛인지 뭔지 모를 나무 울타리도 둘러져 있었다.

돌담 밖으로는 커다란 전나무들이 두껍고 향기 나는 가지를 뻗고 일렬로 자랐다. 글렌에 맨 먼저 터를 잡은 사람들이 쌓은 이 돌담은 적당히 오래되어 갈라진 돌 틈 사이로 이끼며 풀이 자라 무척이나 보기 좋았다. 이른 봄에는 돌담 아래쪽에 보랏빛 제비꽃이 가득 피었고. 가을에는 구석구석에 과꽃이며 미역취가 보기 좋게 피었다. 작은 풀고사리가 돌과 돌 틈 사이를 조화롭게 메워주었고 여기저기 키 큰 고사리도 자랐다.
울타리도 담도 없는 동쪽으로는 어린 가문비나무 묘목지가 묘지 쪽으로 슬금슬금 기어 들어와서 이제는 묘지에 아주 가깝게 울창한 숲을 이루었다. 공기는 하프 소리 같은 파도의 중얼거림이며 나무들이 내는 음악소리로 언제나 가득하고, 봄날 아침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두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느릅나무 숲 속에서 지저귀는 작은 새들은 죽음이 아니라 삶의 노래를 합창했다.
메러디스 아이들은 그 오래된 묘지를 좋아했다.
담쟁이덩굴이며 정원용 가문비나무, 박하나무가 오래된 무덤들 위로 무성하게 뻗어 있었다. 전나무 숲 옆으로 모래땅 한구석에는 월귤나무도 자랐다. 3세대가 잠들어 있는 묘지의 묘비 모양도 각양각색이었다. 초기 이주자들의 묘석은 주로 넓적한 타원형의 붉은 사암 묘석이었고, 그다음 세대의 것은 수양버들 무늬 비석과 두 손을 꼭 마주 잡은 그림이 새겨져 있는 묘석이 주로 많았으며, 최근의 것은 높은 기념탑 같은 비석 위에 주름이 늘어진 천을 덮은 항아리가 놓인 괴상한 비석이 많았다.
그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보기 흉한 것은 알렉 데이비스라는 사람의 비석이었다. 그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감리교도였으나 더글러스 집안의 장로교인 신부를 얻으면서 장로교로 옮기게 되었고 평생을 장로교인으로 살았다. 하지만 그가 죽었을 때 부인은 항구 건너편 장로교회 묘지에 혼자서만 외롭게 잠들게 할 수 없어서 그의 친척들이 모두 묻혀 있는 감리교회 묘지에 매장했다. 그리하여 알렉 데이비스는 죽어서 다시 자기의 원래 종파로 돌아올 수 있었으며, 그의 아내는 감리교도라면 꿈도 꾸어보지 못할 비싼 비석을 세우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메러디스 아이들은 그 비석을 싫어했다. 아이들은 왜 그런지 몰랐지만 옛날의 편평하고 의자 같은 묘석이 더 좋았다. 그리고 그런 묘석들에는 풀이 아무렇게나 무성히 자라 있었다. 우선은 재미있는 의자가 되어주니 좋았다. 지금도 아이들은 그런 묘석 가운데 하나에 모두 모여 앉아 있었다. 개구리 뜀뛰기에 싫증이 난 제리는 구금(口琴)을 불었고 칼은 자기가 찾아낸 이상한 딱정벌레를 살펴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나는 인형 드레스를 만들어보려고 애쓰는 중이고, 페이스는 햇볕에 그을린 가느다란 팔을 짚고 제리가 부는 구금 소리에 맞추어 맨발을 앞뒤로 흔들고 있었다.
제리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검은 머리와 크고 검은 눈을 가졌으나, 아버지 눈처럼 꿈꾸듯 멍하지 않고 반짝반짝했다. 그 아래 동생인 페이스는 장미꽃처럼 아름다운 소녀였다. 눈도 고수머리도 금갈색이었으며 뺨은 발그레했다. 거기다 너무 잘 웃어 교회 신도들이 불만스럽게 생각할 정도였다. 남편을 몇 번이나 먼저 보내고 쓸쓸한 세월을 보내고 있는 테일러 할머니에게 충격을 준 일도 있었다. 페이스가 교회 입구에서 이 할머니를 만나자 건방지게도 “이 세상은 눈물의 계곡이 아니라 웃음꽃 피는 세상이에요, 테일러 할머니.” 하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생각이 많은 꼬마 우나는 잘 웃는 아이가 아니었다. 땋아 늘어뜨린 곧고 검은 머리는 무지막지하게 흐트러졌고, 아몬드처럼 생긴 진한 푸른색 눈은 꿈에 젖은 듯 슬퍼 보였다. 어쩌다 우나의 입이 벌어지면 작고 하얀 이가 들여다보였고, 작은 얼굴에는 수줍고 사색에 잠긴 웃음이 가끔씩 나타났다.
우나는 언니인 페이스의 의견보다는 마을 사람들의 의견에 더 예민했고 양심에 꺼리는 일은 하지 못했다. 살면서 조금이라도 정도를 벗어나는 일이 생기면 바로잡고 싶은 마음에 괴로웠지만 어찌해야 할지는 잘 몰랐다. 가끔씩 우나는 가구에 쌓인 먼지를 털기도 했지만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순전히 먼지떨이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집에는 물건이 같은 자리에 놓여 있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혹시 토요일에 옷솔을 찾으면 아버지의 외출복을 털어주기도 했다. 한번은 아버지 외출복 단추가 떨어진 것을 보고 하얀 실로 단추를 달아놓은 적도 있었다. 그 주 일요일에 메러디스 목사가 교회에 갔을 때 모든 여자들의 눈이 그 단추에 꽂혔고, 그 일로 몇 주 동안이나 부인회의 평화는 깨져버렸다.
칼은 맑고 밝은 진한 푸른색 눈을 가졌다. 엄마의 눈을 닮은 두려움을 모르는 솔직한 눈빛이었다. 그리고 머리도 엄마처럼 황금빛 머리칼이 하나씩 섞인 갈색 머리였다. 칼은 온갖 벌레들의 비밀을 알았고 벌과 풍뎅이에게 일종의 우애를 느꼈다. 우나는 절대로 칼 곁에는 앉지 않으려고 했다. 칼한테서는 언제 괴상한 생물체가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제리도 칼이 전에 어린 누룩뱀을 침대에 끌어들인 일이 있어서 칼과 한 침대에서 자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칼은 어릴 때 쓰던 아기 침대에서 혼자 잤다. 그 침대는 너무 작아서 몸을 펴고 잘 수도 없는데 칼은 꼭 이상한 친구들까지 데리고 잤다. 칼의 침대를 정리하는 마사 할머니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렇긴 해도 모두들 즐겁고 서로 사랑하는 식구들이었다. 세실리아 메러디스는 이 아이들을 남겨두고 떠나면서 무척이나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네가 감리교도였다면 어디에 묻히고 싶어?”
페이스가 쾌활하게 물었다.
이 질문이 여러 가지 재미있는 추측을 줄줄이 이끌어냈다.
“여긴 이미 꽉 차버렸는데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 그래도 나는 저 길가 구석진 곳이 좋아. 사람들이 지나다니면서 하는 소리를 다 들을 수 있잖아.”
제리가 말했다.
“나는 저 울고 있는 자작나무 아래 오목하게 들어간 곳이 좋아. 자작나무에 새들이 앉아서 노래를 부르잖아. 아침마다 새들이 즐겁게 노래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야.”
우나가 말했다.
“나는 아이들이 많이 묻혀 있는 포터네 자리가 좋아. 난 같이 놀 친구들이 많은 게 좋거든. 칼, 너는 어디가 좋으니?”
페이스가 물었다.
“나는 묻히고 싶지 않아. 하지만 꼭 묻혀야 한다면 개미집에 묻힐래. 개미집은 엄청 재미있거든.”
칼이 대답했다.
“여기 묻힌 사람들은 다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거야. 여기 묘지에 묻힌 사람은 나쁜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어. 감리교인이 장로교인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들인가 봐.”
찬사로 가득한 묘비를 읽고 있던 우나가 말했다.
“감리교인들은 나쁜 사람들을 고양이 묻듯이 묻어버리는 모양이지. 여기 묘지까지 묻으러 오지도 않고 말이야.”

칼이 자기 의견을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여기 묻힌 사람들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좋은 사람은 아니라고, 우나. 그냥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에 관해 나쁜 말은 하지 않는 거야. 좋은 말만 해야 하는 거라고. 안 그러면 그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복수할지도 모르잖아. 마사 이모할머니가 그렇게 말했어. 그래서 내가 아빠한테도 진실이냐고 물어봤는데 아빠는 나를 멍하니 보더니 ‘진실? 진실? 진실이 무엇이지? 진실이 도대체 뭐냐고? 오, 조롱하는 빌라도?’라고만 말했어. 그래서 난 그 말이 정말인지 알았지.”
페이스가 말했다.
“저기 알렉 데이비스 씨 비석 꼭대기에 올려놓은 항아리에 돌을 던지면 저 아저씨 귀신이 나와서 내게 달라붙을까?”
제리가 물었다.
“데이비스 부인이 달라붙겠지. 그 부인은 마치 고양이가 쥐를 노리듯 교회에서 우리를 감시하잖아. 지난 일요일에도 내가 그 부인 조카를 째려봤더니 그 남자아이도 똑같이 나를 째려보더라. 그걸 본 데이비스 부인 눈에서 불꽃이 튀기더라고. 아마 교회 밖으로 데리고 나와서 그 애 따귀를 갈겨줬을 거야. 마셜 엘리엇 아주머니 말로는 데이비스 부인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건드려선 안 된대. 그 말만 안 들었으면 그 부인도 째려봐 줬을 텐데.”
페이스가 킬킬대며 말했다.
“사람들이 그러는데 젬 블라이드가 전에 그 부인한테 혀를 내밀었다고 절대로 그 애 아버지한테 진찰을 받지 않는대. 남편이 죽어가는데도 의사에게 보이지 않았대. 그 블라이드 아이들이 얼마나 못된 아이들인지 정말 궁금해.”
제리가 말했다.
“그 애들 생긴 것은 아주 마음에 들던데. 특히 젬이 아주 잘생겼어.”
페이스가 말했다. 마침 블라이드 조무래기들이 역에 도착한 날 목사관 아이들도 그 자리에 있어 서로 얼굴들을 익혔다.
“학교 아이들 말로는 월터는 여자아이 같다고 하던걸.”
제리가 말했다.
“그렇지 않을 거야.”
우나가 반대했다. 우나는 월터가 매우 멋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튼 그 애는 시를 쓴대. 작년에도 시를 써서 선생님한테 상을 받았다던데. 버티 셰익스피어 드류가 말해줬어. 버티의 엄마는 이름으로 봐서는 버티가 상을 받아야 하는 거라고 했대. 하지만 버티는 자기는 시라고는 한 줄도 쓰지 못한다고 했어.”
“그 아이들이 학교에 나오면 우리랑 금방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여자아이들이 좋은 아이들이었으면 좋겠어. 이 근방 여자아이들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거든. 그중에 제일 나은 애들도 시시해. 하지만 블라이드 쌍둥이는 정말 괜찮은 아이들 같아. 난 쌍둥이는 모두 똑같이 생긴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가 봐. 그 아이들은 전혀 닮지 않았어. 빨간 머리 쪽 아이가 더 예쁘더라.”

페이스가 생각에 잠겨 말했다.
“나는 그 아이들 엄마가 예쁘다고 생각해.”
희미하게 한숨을 내쉬며 우나가 말했다. 우나는 엄마가 있는 아이라면 누구나 다 부러웠다. 우나는 겨우 여섯 살 때 엄마가 돌아가셨다. 하지만 우나는 소중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저녁이 되어 집으로 달려가면 안아주던 엄마의 품, 아침의 장난질, 엄마의 다정한 눈길이며 목소리, 즐겁고 달콤한 웃음소리가 보석처럼 가슴에 담겨 있었다.
“그 아이들 엄마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대.”
제리가 말했다.
“엘리엇 아주머니가 그러는데 블라이드 부인은 절대로 자라지 않는다고 했어.”
페이스가 말했다.
“그 부인이 엘리엇 아주머니보다 크던걸.”
“엘리엇 아주머니가 말한 건 마음이야. 블라이드 부인의 마음은 아이로 남아 있대.”
“지금 무슨 냄새가 나지 않아?”
칼이 코를 킁킁거리며 하던 말을 멈추었다.
이제 아이들이 모두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목사관 언덕 아래 우거진 작은 골짜기 쪽에서 아주 좋은 냄새가 저녁 공기를 타고 날아왔다.
“저 냄새를 맡으니까 배가 고프다.”

제리가 말했다.
“우리는 언제나 저녁으로 빵과 당밀을 먹고 점심으로 차가운 디토5)만 먹잖아.”
우나가 애처롭게 말했다.
마사 이모할머니는 일주일에 한 번씩 커다란 양고기 덩어리를 삶아서는 매일 그것만 주었다. 차갑게 식었거나 말거나, 기름 냄새가 나거나 말거나, 고기가 없어질 때까지 날마다 그것만 식탁에 내놓았다. 언제나 같은 음식만 나오는 걸 보고 페이스가 문득 그 말을 생각해내어 목사관에서는 모두들 그것을 ‘디토’라 부르게 되었다.
“우리 저 냄새가 나는 곳이 어디인지 따라가 보자.”
제리가 말했다.
아이들이 모두 벌떡 일어나 강아지 떼처럼 잔디밭을 달리고, 담을 폴짝 뛰어넘고, 이끼 낀 언덕을 달려 내려가 점점 더 강해지는 냄새를 따라갔다. 얼마 후에 아이들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무지개 골짜기’의 깊숙한 성지에 닿았다.
블라이드 아이들은 마침 식사를 하려던 참이었다.
목사관 아이들은 수줍은 듯 멈춰 섰다. 우나는 이렇게 허둥대며 오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걸,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이 블라이드도 우나 못지않게 눈치가 빠른 아이였다. 다이가 친근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 너희들이 누군지 알 것 같아. 목사관 친구들이지? 그렇지 않니?”
다이가 물었다.

페이스가 뺨에 보조개를 만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가 송어 굽는 냄새를 맡았어. 처음엔 무슨 냄새인지 궁금해서 와본 거야.”
“자, 여기들 앉아서 함께 먹자.”
다이가 말했다.
“너희들 먹을 것밖에 없잖아.”
제리가 양철냄비 쪽을 배가 고픈 듯 바라보면서 말했다.
“여기 많이 있어. 한 사람이 세 조각씩이나 먹을 수 있다고. 자, 어서 앉아.”
젬이 말했다.
더 이상 인사치레는 필요 없었다. 모두들 이끼 낀 돌에 둘러앉아 즐겁게 먹기 시작했다. 낸과 다이는 칼의 호주머니에 새끼 쥐 두 마리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아마 기절해버렸을 것이다. 그런 사실을 페이스와 우나는 잘 알고 있었지만, 쌍둥이는 알 리 만무해서 해가 될 일도 없었다. 같이 음식을 나누는 것만큼 사람들을 친해지게 만드는 일이 또 있을까. 마지막 송어가 사라졌을 때쯤에는 목사관 아이들과 ‘잉글사이드’ 아이들 사이에 굳은 우정과 동맹이 맺어졌다. 이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서로 알아온 아이들 같았고, 앞으로도 죽 그럴 것이다. 요셉의 종족은 서로를 알아보는 법이니까.
아이들은 서로의 이야기를 쏟아놓았다. 목사관 아이들은 에이번리와 ‘초록 지붕 집’ 이야기를 들었고, ‘무지개 골짜기’의 전통과 항구에 있는 젬이 태어난 작은 집에 관해서도 들었다. ‘잉글사이드’ 아이들은 메러디스네가 글렌으로 이사 오기 전까지 살았던 메이워터란 곳에 대해 들었고, 우나가 아끼는 눈이 하나밖에 없는 인형이야기며, 페이스의 애완동물 수탉 이야기도 들었다.
페이스는 자기가 수탉을 귀여워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웃어대서 무척 화가 났는데, 블라이드네 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해주어서 이 아이들이 좋아졌다.
“애덤처럼 잘생긴 수탉은 개나 고양이처럼 귀여워해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 애덤이 카나리아였다면 아무도 시비 걸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애덤은 아주 작은 병아리 때부터 내가 길렀거든. 전에 살던 메이워터의 존슨 아주머니가 준 거야. 애덤의 형제들은 족제비한테 물려 죽었어. 존슨 아주머니의 아저씨 이름을 따서 애덤이라고 이름을 붙였지. 나는 인형이나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아. 고양이는 너무 교활하고 인형은 죽은 거잖아.”
페이스가 설명했다.
“저기 저 집에는 누가 살아?”
제리가 물었다.
“두 미스 웨스트가 살아. 로즈마리와 엘런이지. 다이와 나는 올여름에 미스 로즈마리에게 음악 레슨을 받기로 했어.”
낸이 얼른 대답했다.
우나는 행복한 쌍둥이를 부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아니, 단지 부러운 눈빛이라고만 한다면 너무 부드러운 표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 음악 레슨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나의 작은 꿈이었다. 하지만 우나의 식구들 중에는 우나에게 음악 레슨을 받게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사람도 없었다.
“미스 로즈마리는 참 예쁜 분이야. 옷도 언제나 예쁜 드레스만 입고.”

다이가 말을 하고는 생각에 잠겨 덧붙였다.
“머리는 이제 막 만들어놓은 당밀 색깔이지.”
다이는 엄마가 어렸을 때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머리가 빨간색이라는 것이 아무래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언니인 미스 엘런도 좋아. 교회에서 언제나 사탕을 주거든. 그런데 다이는 미스 엘런이 무섭대.”
낸이 말했다.
“눈썹이 시커멓고 목소리가 무척 크고 우렁차서 그럴 거야. 케네스 포드도 어렸을 때는 미스 엘런을 무척 무서워했대. 엄마에게 들었는데 포드 아주머니가 케네스를 처음 교회에 데리고 간 날 바로 뒤에 앉아 있던 미스 엘런을 보고 케네스가 앙 하고 울음을 터뜨려서 밖으로 데리고 나가야 했대.”
다이가 말했다.
“포드 아주머니가 누구지?”
우나가 물었다.
“포드 가족은 여기에 살지 않고 여름에만 와서 지내는데 올여름에는 오지 않을 거야. 저어기 아래 바닷가에 있는 작은 집에 살아. 우리 아빠와 엄마가 예전에 살던 집이야. 너도 퍼시스 포드를 봐야 해. 꼭 그림에 나오는 아이처럼 예쁘게 생겼단다.”
“나도 포드 부인 이야기를 들었어. 버티 셰익스피어 드류가 말해줬지. 죽은 사람이랑 14년 동안이나 결혼했었는데 그 사람이 살아났대.”
페이스가 끼어들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전혀 다른 이야기라고. 버티 셰익스피어는 말을 똑바로 하는 법이 없어. 나는 어떻게 된 이야긴지 전부 알지만 나중에 말해줄게. 지금은 집에 얼른 돌아가야 해. 이렇게 축축해지는 밤까지 밖에 나와 놀면 엄마가 좋아하지 않으셔.”
낸이 말했다.
목사관 아이들은 축축한 밤에 밖에 나와 놀거나 말거나 뭐랄 사람 하나 없었다. 마사 이모할머니는 이미 잠자리에 들었을 것이고, 목사인 아버지는 썩어 없어질 육체를 기억해줄 불멸의 영혼에 관한 깊은 사색에 잠겨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목사관 아이들도 집으로 돌아갔다. 마음에는 앞으로 즐겁게 보내게 될 기대를 잔뜩 품고서.
“‘무지개 골짜기’가 묘지보다 훨씬 좋은 것 같아. 나는 블라이드 아이들이 정말로 좋아. 싫은 사람이 너무나 많은 세상에서도 좋아할 사람이 있다는 건 너무 좋은 일이야. 아빠가 지난 일요일에 설교할 때 누구나 다 사랑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알렉 데이비스 부인 같은 사람을 어떻게 사랑해.”
우나가 말했다.
“아빠도 설교니까 그렇게 말한 거야. 교회 밖에서는 그럴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 만큼 분별력이 있으셔.”
페이스가 젠체하며 말했다.
나머지 블라이드 아이들은 ‘잉글사이드’로 올라갔지만 젬은 혼자 빠져나와 산사나무가 자라는 ‘무지개 골짜기’ 끄트머리로 향했다. 젬은 엄마에게 산사나무 꽃을 가져다주는 일을 잊는 법이 없었다. 이 세상에 산사나무 꽃이 피는 한은 그럴 것이다.


5. 디토(ditto)는 ‘위와 같음’, ‘꼭 닮은 것’이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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