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7권 13~14

나단비 | 2024.04.14 18:17:24 댓글: 0 조회: 178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61015
13
언덕 위의 집






무지개 골짜기에는 무척이나 예쁜 작은 샘이 하나 있었다. 자작나무가 커튼처럼 둘러싼 습지 한구석 오목한 곳에 얼음처럼 차고 수정처럼 맑은 물이 샘솟았다. 그곳에 샘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몇 되지 않았다. 목사관 아이들과 ‘잉글사이드’ 아이들이야 그 마법의 골짜기에 관해 모르는 것이 없어서 그 샘가를 찾아가 물을 마셨고, 또 옛 모험의 낭만을 되살리는 놀이에도 쓰고는 했다. 앤도 그 샘을 알았고, ‘초록 지붕 집’에 살던 시절 사랑해 마지않던 ‘드리아드의 샘’을 떠올리게 하는 그 샘을 사랑했다. 로즈마리 웨스트도 그 샘을 알았다. 로즈마리에게는 낭만의 샘이었다. 18년 전 어느 봄날 황혼녘, 그 샘 옆에 앉은 로즈마리에게 마틴 크로퍼드는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소년다운 열렬한 사랑을 고백했다. 로즈마리도 가슴속 깊이 간직했던 사랑을 작은 소리로 속삭여주었고 둘은 서로 키스를 나누며 장래를 약속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 뒤로 두 번 다시 그 샘을 찾지 못했다. 얼마 안 있어 마틴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항해를 떠나버렸기 때문이었다. 로즈마리 웨스트에게 그 샘은 언제까지나 청춘과 사랑의 영원한 추억이 깃든 장소였다. 로즈마리는 샘 옆을 지날 때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옛 꿈과 은밀한 만남을 가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예전의 괴로움은 사라지고 달콤함만이 남은 꿈이었다.
샘은 사람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있었다. 바로 옆에 서서도 샘이 거기 있는지 모른 채 그냥 지나치기 쉬웠다. 샘에 그늘을 드리우고 서 있는 거대한 소나무는 두 세대를 지나왔다. 너무 오래 산 나무는 너덜너덜한 나무줄기만 남아 있는데, 거기에 풀고사리가 무성하게 자라 꼭 샘 위에 푸른 지붕과 레이스 커튼을 드리운 것처럼 보였다. 샘 가까이에는 단풍나무도 한 그루 자라고 있었다. 나무기둥은 꼬불꼬불 구부러지고 줄기는 묘하게 마디가 생겨 위로 튀어 올라와 있어 아주 재미있는 의자가 되어주었다. 9월이 되면 샘이 있는 오목한 곳 주변으로 과꽃이 피어나 옅은 청색의 스카프를 펼쳐놓은 것처럼 보였다.
어느 날 저녁 무렵, 존 메러디스 목사는 항구 어귀 근처 신도 집을 방문했다가 ‘무지개 골짜기’로 나 있는 지름길을 통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목사는 바로 옆에 있는 작은 샘에서 물을 마시려고 그쪽으로 향했다. 바로 며칠 전에 월터 블라이드가 거기 샘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둘은 단풍나무 의자에 앉아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존 메러디스 목사는 내성적이고 세상일에 무심한 성격이지만 소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도 젊은 시절에는 잭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지만 글렌 세인트 메리 사람은 아무도 그 사실을 믿으려 들지 않을 것이다. 월터와 목사는 서로 마음이 통했고 흉금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메러디스 씨는 다이도 알지 못하는 월터의 마음 깊숙이 숨겨진 신성한 공간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둘이 그렇게 다정한 시간을 보낸 후 월터는 목사님을 다시는 무서운 사람으로 여기기 않게 되었다.
“전에는 목사님과 친해질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어요.”
그날 밤 월터는 엄마에게 말했다.

존 메러디스는 그 가늘고 하얀 손으로 물을 떠 마셨다. 하지만 그와 악수를 해본 사람은 그 가는 손에서 나오는 강철 같은 힘에 놀라고는 했다. 집에 서둘러 가야 할 이유도 없어서 목사는 단풍나무 의자에 앉았다. 주변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메러디스 목사는 내내 선량하지만 무지한 사람들과 무료한 이야기를 나누다 와서 정신적으로 좀 지쳐 있었다.
달이 떠올랐다. ‘무지개 골짜기’ 그가 앉아 있는 곳으로 바람이 불어왔고 파수꾼처럼 별이 빛났다. 조금 떨어진 골짜기 위쪽에서 아이들의 즐거운 웃음소리와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
달빛을 받아 천상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는 과꽃, 반짝반짝 빛나는 샘물, 낮고 부드럽게 속살거리는 개울물 소리, 한들한들 우아하게 몸을 흔들고 있는 풀고사리, 이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하얀 마법의 세상을 만들었다. 존메러디스는 교회 신도들에 관한 걱정이나 영적인 문제도 다 잊어버렸다. 세월도 모두 잊어버리고 다시 한 번 젊은 신학도로 돌아갔다. 세실리아의 여왕처럼 아름답고 검은 머리에는 유월의 장미가 붉게 만발해 향기를 발했다. 그는 거기 앉아 소년 같은 꿈에 잠겼다. 바로 딱 그 순간에 로즈마리 웨스트가 지름길로 들어오더니 위태한 마법에 휩싸인 그 곁으로 와 섰다. 존 메러디스는 일어서 그녀를 보았다. 정말로 그녀를 보았다. 처음으로.
교회에서 한두 번 마주친 적은 있지만 통로를 걸어가다 아무나 만나면 늘 그러하듯 멍한 상태로 악수를 나눈 것이 전부였다. 다른 곳에서는 로즈마리를 만난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웨스트 집안은 로브리지 교회에 연고를 둔 감독교회 교인이라서 그 집에 초대를 받은 적도 없었다. 그날 밤 이전에 누군가가 로즈마리 웨스트가 어떻게 생긴 사람이냐고 물었다면 누구를 말하는 건지 전혀 짐작도 못 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존 메러디스목사는 부드러운 달빛의 마력에 둘러싸여 샘 옆에 앉아 있던 자기 앞에 나타난 로즈마리를 두 번 다시 잊지 못하게 되었다.
로즈마리는 메러디스 목사가 언제나 아름다운 여자의 전형이라고 믿던 세실리아와는 전혀 닮은 점이 없었다. 세실리아는 몸집이 작았고, 검은 머리에 생기가 넘쳤다. 반면에 로즈마리 웨스트는 금발 머리에 키도 크고 조용한 성격이었다. 하지만 존 메러디스는 로즈마리를 본 순간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는 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로즈마리는 금발 머리를 말아 올려 핀을 꽂고 있었고 모자도 쓰지 않았다. 다이 블라이드는 그 부드러운 금발머리를 당밀 태피 색깔이라고 했다. 편안해 보이는 커다란 푸른 눈은 언제나 친근해 보이고 이마는 희고 넓었으며 얼굴은 무척 아름다웠다.
로즈마리 웨스트는 언제나 ‘상냥한 여인’으로 불렸다. 너무나 상냥한 성격이어서 그녀의 품위와 귀부인 같은 자태에서 당당함이 풍겨 나와도 오만한 사람이란 소리를 듣지 않았다. 글렌 세인트 메리의 다른 사람이 그런 자태를 가졌다면 분명 거만하다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삶은 로즈마리에게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가르쳤다. 인내심을 갖고 용감하게 살라고도 가르쳤다. 로즈마리는 자기 애인을 태운 배가 석양 무렵 포 윈즈 항구를 떠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애타게 바다를 바라보아도 그 배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 로즈마리에게서 소녀 시절의 생기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놀랍도록 젊어 보였다. 그 이유는 아마도 삶을 경이롭고 유쾌한 것으로 보는 태도를 잃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태도를 어린 시절에 두고 떠나와 버렸지만. 그런 마음이 로즈마리 자신도 젊어 보이지만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다른 사람까지도 다시 젊어진 것 같은 즐거운 환상에 빠지게 했다.
존 메러디스는 로즈마리의 아름다움에 놀라고, 로즈마리는 그가 여기 있다는 것에 놀랐다. 로즈마리는 이런 한적한 샘가에서 누구를 만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고, 더군다나 글렌 세인트 메리 목사관의 은둔자를 만난 것은 정말 뜻밖이었다. 너무 놀라서 팔 한가득 들고 있던 책을 떨어뜨릴 뻔했다. 글렌 도서관에서 빌린 것들이었다. 놀란 마음을 감추고 싶어 하는 로즈마리의 입에서 불쑥 거짓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아무리 훌륭한 여자라도 가끔은 그런 법.
“전, 전 여기 샘물을 마시러 왔어요.”
로즈마리가 더듬거리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메러디스 씨가 진중하게 “안녕하세요, 미스 웨스트.” 하고 인사를 건넨데 대한 답이었다. 로즈마리는 자기가 형편없는 숙맥처럼 느껴졌고 정신을 차리도록 다그쳤다. 하지만 존 메러디스도 허영심 많은 남자는 아니라서 로즈마리가 이런 곳에서 클로 장로를 만났다 하더라도 똑같이 놀랐을 것이라는 것쯤은 알았다. 로즈마리가 허둥지둥하는 것이 오히려 목사를 더 편안하게 했고, 깜빡 수줍음 타는 것도 잊어버렸다. 게다가 아무리 수줍음을 많이 타는 남자라도 달빛 아래서는 상당히 무모해질 수 있는 법 아니던가.
“내가 컵을 마련해드리지요.”
메러디스 목사가 웃으며 말했다. 샘 옆에는 ‘무지개 골짜기’ 아이들이 깨지고 손잡이도 없는 파란색 컵을 하나 단풍나무 아래에 숨겨놓았지만 그런 사실을 모르는 목사는 자작나무로 가서 하얀 나무껍질을 조금 벗겨내 능숙한 솜씨로 삼각형 모양의 컵을 만들어 왔다. 그 컵에 샘물을 가득 떠 로즈마리에게 건네주었다. 로즈마리는 물을 마시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컵을 받아 단숨에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마셔버렸다. 마시고 싶지도 않은 물을, 그것도 한 컵 가득 마시기는 상당히 괴로웠다. 그러나 그때 목사가 떠준 물을 마신 기억은 로즈마리에게 즐거운 추억으로 남았다.

몇 년이 지난 다음 생각했을 때도 그때의 추억이 너무 소중해서 신성하기조차 했다. 아마도 그 이유는 로즈마리가 컵을 돌려주었을 때 목사가 한 행동 때문일 것이다.
메러디스 목사는 다시 한 번 몸을 굽혀 컵에 물을 가득 채운 다음 자신도 마셨다. 로즈마리의 입술이 닿은 곳에 목사가 자기 입술을 댄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었고, 로즈마리도 그것을 알았다. 그런 줄 알면서도 로즈마리에게는 그 일이 신비스럽게만 느껴졌다. 두 사람이 같은 컵으로 물을 마신 것이다. 로즈마리는 옛날에 숙모에게 들은 이야기를 어렴풋이 기억했다. 두 사람이 같은 컵으로 물을 마시면 좋거나 나쁘거나 다음 생에서도 반드시 만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존 메러디스는 컵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들고 있었다. 물을 다 마셨으니 당연히 버려야 하겠지만 왠지 그 컵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로즈마리가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
“제게 주시겠어요? 참 멋지게 잘 만드셨군요. 자작나무 껍질로 컵을 이렇게 잘 만드는 사람은 어린 시절 제 남동생 말고는 본 적이 없어요. 동생은 오래전에 하늘나라로 갔답니다.”
로즈마리가 말했다.
“나도 컵 만드는 법을 어렸을 적에 배웠어요. 여름 캠프에 갔을 때였죠. 내가 책을 들어드리지요, 미스 웨스트.”
메러디스 씨가 말했다.
로즈마리는 깜짝 놀라 다시 한 번 “무겁지 않아요.” 하고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목사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듯 로즈마리의 손에서 책을 받아들고, 둘은 나란히 그곳을 떠났다. 로즈마리가 봄날 ‘무지개 골짜기’의 샘에 와서 마틴 크로퍼드를 생각하지 않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 순간 옛 연인과의 비밀스러운 약속은 깨져버렸다.
그 작은 오솔길은 습지를 빙 돌아 나무가 울창한 기다란 언덕으로 이어졌고, 로즈마리는 그 언덕 위에 살았다.
나무들 사이로 달빛이 여름 들판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좁은 오솔길은 나무들이 그림자를 드리워 어둑했다. 나무들은 낮이면 사람들에게 참 친근하지만 밤이 되면 그렇지가 못하다. 나무들이 정체 모를 외투를 뒤집어쓰고 서로 속삭이며 무슨 나쁜 일을 꾸미는 것처럼 보였다. 몰래 팔을 뻗어 낚아채 가버릴 것 같기도 했다. 어두워진 다음에 숲길을 걸을 때면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서로 몸을 바짝 붙이고 걷는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정체 모를 적군과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맞서기 위해서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로즈마리의 드레스가 존 메러디스의 옷깃과 스쳤다. 아무리 멍한 정신으로 사는 존 메러디스지만 아직 젊은 남자고, 비록 자기 스스로가 더 이상 낭만이나 찾고 있을 나이는 아니라고 믿더라도 밤에 오솔길을 함께 걷는 여인의 매력에 무심할 수는 없었다.
누구나 자기 삶의 어떤 부분은 이미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다지 믿을 만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이야기가 끝났다고 믿는 순간에 운명은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장을 우리 앞에 펼쳐놓는다. 지금 이 두 사람도 마음을 과거에 두고 살고, 그런 사실은 절대로 되돌릴 수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메러디스 목사와 로즈마리는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언덕길을 올라가는 것이 무척이나 기분 좋았다. 로즈마리는 글렌 교회 목사님을 무척 수줍음을 타고 무슨 말을 하려면 혀가 얼어붙어 버리는 사람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메러디스 목사는 자기 하고 싶은 얘기를 전혀 힘들이지 않고 자유롭게 잘만 했다.

글렌 마을의 주부들도 그때 메러디스 목사가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면 분명 고개를 갸웃했을 것이다. 글렌 마을 주부들이야 소문 이야기 아니면 계란 값이 얼마인지 하는 것이 관심사의 전부고, 존 메러디스는 그런 이야기에 관심이 없었을 뿐이다.
그는 로즈마리에게 책에 관한 이야기와 음악 이야기, 세상 이야기, 그리고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했고, 로즈마리는 그 이야기들을 잘 알아들었으며 자기 의견도 내놓았다. 로즈마리가 갖고 있는 책 중에 메러디스 씨가 아직 읽지 않은 책도 있었다. 로즈마리는 그 책을 빌려주겠다고 했고, 둘이 언덕 위의 집에 닿자 목사는 책을 빌리려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로즈마리의 집은 옛날식 회색 집으로 온통 덩굴 식물이 뒤덮고 있었다. 거실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이파리 사이로 다정하게 깜박였다. 집은 글렌 마을을 내려다보며 서 있고, 그 너머로 항구가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빛났다. 더 멀리로는 모래톱과 신음하는 바다가 보였다. 둘은 장미가 피는 계절이 아닐 때라도 언제나 장미향이 날 것만 같은 정원을 걸었다. 문 옆에는 백합꽃이 자매처럼 다정하게 피어 있고 넓은 보도 양편에는 과꽃이 리본처럼 줄줄이 피어 있었다. 집 뒤 언덕 위에는 전나무가 가지를 늘어뜨리고 서 있었다.
“이 집 문가에 서니 온 세상이 내 것처럼 느껴지는군요! 정말 멋진 경치입니다. 장관이에요! 난 저 아래 글렌 마을에서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으로 살고 있는데, 여기서라면 마음껏 숨 쉴 수 있겠어요.”
존 메러디스가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
“오늘 밤에는 바람이 잠잠하네요. 바람이 불면 숨도 빼앗아가 버려요. 이 높은 곳까지 바람이 불어 닥친다니까요. 이곳은 항구 마을이 아니라 포 윈즈라고 불러야 해요.”
로즈마리가 웃으며 말했다.
“난 바람을 좋아해요. 바람이 불지 않는 날에는 난 죽은 거나 마찬가지예요. 바람은 날 깨어나게 합니다.”
메러디스 씨가 후훗 웃고는 말을 이었다.
“조용한 날에는 몽상 속에 빠져버리거든요. 미스 웨스트도 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거예요. 다음번에 나를 만나면 내가 정신이 나가 있더라도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너그럽게 이해해주세요. 그리고 내게 먼저 말을 걸어주세요.”
집 안으로 들어가자 엘런 웨스트가 거실에 앉아 있었다. 엘런은 안경을 벗어 읽고 있던 책 위에 올려놓고 놀란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그 눈빛에는 놀라움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상냥하게 메러디스 목사와 악수를 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목사가 앉아서 엘런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로즈마리는 책을 찾으러 갔다.
엘런 웨스트는 로즈마리보다 열 살이 많았고, 둘이 전혀 닮지 않아서 자매라는 것도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엘런은 몸집이 크고 피부도 거뭇하며, 머리도 눈썹도 검은 색깔에 숱이 많았으며, 눈은 북풍이 불어올 때의 맑고 짠 바닷물 같은 푸른색이었다. 보기에는 엄격해 보이다 못해 무섭기까지 했지만 사실 알고 보면 매우 명랑하고 대범하고 큰 소리로 웃어대기도 잘하는 사람이었다. 깊고 시원시원한 목소리는 남성적인 느낌을 주었다.
엘런은 전에 로즈마리에게 글렌 장로교회 목사와 대화를 나눠보고 싶다고 말했었다. 여자와 대화를 나누다 궁지에 몰렸을 때 적당한 말을 찾아낼 수 있는지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제 그런 기회가 왔고, 세계 정치에 관한 문제로 그를 시험해보기로 했다. 엘런은 상당한 독서가였고, 독일의 카이저 황제16)에 관련된 서적을 탐독해서 그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메러디스 씨의 의견을 물었다.
“위험한 사람이에요.”
목사의 대답이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내 말이 바로 그렇다고요, 메러디스 목사님. 그 남자는 전쟁을 일으킬 거예요. 싸움질이 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다고요. 전 세계를 상대로 불을 지르고 말 거예요.”
미스 엘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명분도 없이 세계 대전을 일으키려고 하다니요, 난 그런 시대는 이미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메러디스 목사가 말했다.
“천만의 말씀이에요. 끝나지 않았어요.”
엘런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와 여러 나라들이 어리석은 짓을 하고 주먹을 휘두르는 시대는 결코 끝이 없어요. 천년 왕국은 아직 멀었다고요, 메러디스 씨. 그 문제는 목사님이 저보다 더 잘 알겠죠. 그리고 그 카이저도 말이에요. 내 말을 믿어요. 누가 기세를 꺾어버리지 않으면 그 사람은 큰 문제를 일으킬 거예요. 얼마 안 있으면 알게 돼요. 곧 알게 된다고요, 메러디스 씨. 누가 그 사람의 기세를 누를 수가 있을까요? 영국이 해야 하는데, 그럴 기미를 안 보이네요. 누가 카이저를 누를 수 있을까요. 얘기해보세요, 메러디스 씨.”
미스 엘런은 그 기다란 손가락으로 책을 톡톡 두드렸다.

메러디스 씨는 그 문제에 적절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지만 둘은 독일의 군사주의에 관한 토론으로 들어갔고, 로즈마리가 책을 찾아오고 난 한참 후까지도 토론은 끝나지 않았다. 로즈마리는 엘런 뒤에 놓인 흔들의자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점잖아 보이는 검은 고양이만 쓰다듬었다.
존 메러디스는 엘런과 함께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 이야기를 하면서도 간간이 로즈마리 쪽을 바라보았다. 엘런도 그런 사실을 눈치챘다. 로즈마리가 메러디스 목사를 문까지 배웅하고 돌아오자 엘런이 일어서 심문이라도 하듯 로즈마리를 바라보았다.
“로즈마리 웨스트, 저 남자는 너에게 청혼할 거야.”
로즈마리는 놀라 몸을 떨었다. 엘런의 말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 때문에 그날 저녁의 유쾌했던 기분이 다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그 말로 받은 상처를 엘런에게 내보일 생각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언니는 숲마다 내 연인이 숨어 있다고 생각하는군요. 목사님은 오늘 밤 내게 돌아가신 부인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그분이 자기에게 어떤 의미인지도요. 부인이 세상을 떠나서 자기 삶이 얼마나 공허한지도요.”
로즈마리는 말하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지만 좀 어색한 미소였다.
“그게 그 사람이 여자에게 접근하는 방식인 모양이지. 남자들은 모든 수법을 다 쓴다. 난 알아. 하지만 네가 한 약속을 잊지 마라, 로즈마리.”
엘런이 응수했다.
“그건 잊고 다시 기억하고 할 문제도 아니에요. 언니는 나도 이제는 노처녀라는 것을 잊은 모양이군요. 언니 눈에는 내가 동생이니까 아직도 젊고 꽃다운 나이고, 위험한 존재로 보이는 거라고요. 메러디스 목사님은 친구가 필요했을 뿐이에요. 그것조차도 의심스럽지만요. 우리 두 사람 문제 같은 것은 목사관에 도착하기도 전에 전부 잊어버렸을걸요.”
로즈마리가 지친 듯 말했다.
“나도 네가 그 사람과 친구로 지내는 것까지야 반대할 생각은 없다.”
엘런이 한 발 물러섰다.
“하지만 우정 이상은 안 돼, 잊지 말라고. 난 홀아비는 믿지 않아. 그 사람들은 꼭 우정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문제를 일으켜. 그 장로교회 목사도 말이다. 사람들 말로는 수줍음을 탄다고 하지 않던? 하지만 그 사람은 조금도 수줍음을 타는 사람이 아니야. 그냥 좀 정신을 놓고 사는 것뿐이지. 얼마나 정신이 없는 사람인지 네가 배웅해주니까 나한테 작별 인사 하는 것조차 잊어버리더구나. 그래도 머리는 좋은 사람이야. 이 근방에는 대화다운 대화를 나눌 사람이 별로 없는데, 오늘 저녁에는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 나도 가끔은 만나면서 지내고 싶은 사람이다. 하지만 사랑 놀음은 안 돼, 로즈마리. 잘 들어둬. 사랑 놀음은 안 된다고.”
로즈마리는 엘런의 사랑 놀음에 대한 경고를 너무 자주 들었다. 열여덟 살 이상 여든 미만의 결혼 가능한 남자와 단 5분만 대화를 나누는가 싶으면 바로 나오는 경고였다. 로즈마리는 그런 말을 들으면 언제나 웃어넘기고 말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웃고 싶지 않았다. 기분이 좀 상했다. 무엇이 사랑 놀음이라는 건가?
“그런 어처구니없는 말 하지 말아요, 언니.”

로즈마리는 다른 날과는 다르게 냉담하게 내뱉고는 등불을 들고 저녁인사도 없이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엘런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면서 검은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저 애가 무엇 때문에 저렇게 화가 났을까, 세인트 조지? ‘자꾸 악써대면 얻어맞는다.’는 말이 있지. 어쨌든 그 애는 약속했어, 세인트 조지. 로즈마리는 약속했다고. 우리 웨스트 집안사람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지. 그 사람이 사랑 놀음을 원하거나 말거나 상관없어, 조지. 로즈마리는 약속했다고, 난 그 약속을 믿어.”
엘런은 고양이에게 말했다.
2층 자기 방으로 올라간 로즈마리는 오랫동안 창밖만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달빛은 정원에서도 빛났고 항구에서도 빛났다. 로즈마리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치 못했고 안정이 되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늘 꿈만 꾸고 사는 일에 진력이 났다. 갑작스럽게 부는 바람에, 정원에 마지막 남은 붉은 장미 꽃잎이 떨어져 내렸다.
여름은 갔고, 이미 가을이었다.

16. 독일 황제 겸 프로이센 왕인 빌헬름 2세(Wilhelm II, 1859~1941. 재위 1888~1918)를 보통 카이저라고 불렀다. 적극적인 해외 진출을 도모하는 세계정책을 취했으나 독선적인 행동으로, 독일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14
알렉 데이비스 부인의 방문






존 메러디스는 천천히 집을 향해 걸었다. 처음에는 로즈마리 생각을 좀 했지만 ‘무지개 골짜기’에 이르렀을 무렵에는 로즈마리 생각을 싹 잊어버리고 엘런이 제기한 독일 신학에 관한 견해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무지개 골짜기’를 다 지났지만 그것도 몰랐다. ‘무지개 골짜기’의 매력도 독일 신학에 대항할 수는 없었다. 목사관에 다다르자 곧장 서재로 들어가 자기가 옳았는지 엘런이 옳았는지 알아내려고 두꺼운 책을 펼쳤다. 그리고 새벽이 올 때까지 그 속에 빠져 있었다. 그다음 주 내내도 새로운 사고의 경로를 좇아 추적해가느라 세상일이고, 교구고, 가족이고 온통 다 잊고 지냈다. 밤이고 낮이고 책만 보면서 살았다. 우나가 들어와 끌고 가지 않으면 식사 시간도 잊어버렸다. 로즈마리나 엘런 생각은 두 번 다시 그의 머릿속으로 들어올 틈도 없었다. 항구 건넛마을에 사는 마셜 할머니가 위독하다며 목사님의 방문을 기다린다는 전갈을 보내왔지만, 그 편지는 건드리지도 않은 채 책상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마셜 할머니는 다행히 회복되었지만 절대 목사님을 용서할 수 없었다. 젊은이 한 쌍이 결혼식을 올리려고 목사관을 찾아왔을 때도 메러디스 씨는 머리도 빗지 않고 빛이 다 바랜 실내복에 슬리퍼를 끌고 나갔다. 더군다나 결혼식을 장례식 성경 구절로 시작했다. 목사는 ‘재는 재로, 먼지는 먼지로’라는 구절에 이르러서야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세상에나, 뭔가 이상하군, 뭔가 잘못되었어.”
목사님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신부는 어쩔 줄 몰라 울음을 터트렸고, 신랑은 쿡쿡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제발요, 목사님. 목사님은 지금 우리를 결혼시키는 것이 아니라 땅에다 묻고 계시잖아요.”
신랑이 말했다.
“실례했습니다.” 
메러디스 씨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러고는 곧 결혼식으로 바꾸고는 무사히 식을 마쳤지만 안타깝게도 신부는 평생 자기가 제대로 결혼식을 올렸다는 느낌을 갖지 못했다.
목사님은 또다시 기도회도 잊어버렸지만 비가 몹시 와서 아무도 오지 않아 별 상관은 없었다. 알렉 데이비스 부인이 아니었더라면 일요일 예배도 잊을 뻔했다.
토요일 오후에 마사 이모가 들어와 데이비스 부인이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다. 메러디스 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데이비스 부인은 글렌 세인트 메리 교회 신도 중에 자기가 유일하게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목사는 큰 부자인 그 부인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말라는 교회 이사회의 경고를 받은 터였다. 웬만해서는 목사가 그런 경고를 들었다고 해도 신경 쓰지 않았을 테지만, 교회 이사회는 목사보다 더 실제적인 사람들이었고 더 용의주도했다.
돈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도 메러디스 씨의 마음에 데이비스 부인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주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마사 이모가 나가자마자 그 일을 새까맣게 잊어버렸을 것이다. 목사는 읽고 있던 ‘에발트’17)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초조한 마음으로 복도를 지나 응접실로 들어갔다.
데이비스 부인은 소파에 앉아 주변을 샅샅이 둘러보고 있었다. 얼굴에는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경멸의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정말로 꼴이 말이 아니군. 창문에는 커튼도 없고.’
데이비스 부인은 페이스와 우나가 커튼을 떼어내 궁전에서 입는 기다란 꼬리 장식이 달린 드레스로 쓴 뒤 다시 달아놓는 것을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해도 저 창문들에 대한 거센 비난을 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블라인드는 다 찢어졌고, 벽에 걸린 그림도 제대로 걸린 게 없었으며, 깔개도 다 뒤틀렸고, 꽃병에 꽂힌 꽃은 다 시든 것이었다. 먼지는 그야말로 한 겹은 되게 쌓였다.
“도대체 이게 다 무슨 꼴이야?”
데이비스 부인은 자신에게 묻고 그 아름답지 못한 입을 샐쭉거렸다.
데이비스 부인이 복도를 지나올 때도 제리와 칼이 소리를 지르며 계단 난간에서 미끄럼을 타며 놀고 있었다. 부인을 보지 못한 아이들은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며 미끄럼을 타고 있어서 데이비스 부인은 아이들이 일부러 그런다고 생각했다. 거기다 페이스가 귀여워하는 수탉 애덤이 복도를 유유히 걸어오더니 응접실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데이비스 부인을 위아래로 찬찬히 훑어보았다. 애덤은 부인의 얼굴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안으로 들어올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 데이비스 부인은 흥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정말 대단한 목사관이야, 수탉들이 복도를 활개 치며 사람을 뻔히 바라보다니.’
“쉬, 저리 가!”
데이비스 부인이 장식이 화려한 실크 파라솔을 내저으며 명령했다.
애덤이 가버렸다. 애덤은 현명한 수탉이라서 데이비스 부인의 주변에서 처형자의 분위기가 떠도는 것을 느꼈다. 부인이 50년 동안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수탉의 목을 비틀었던가! 목사가 들어오자 애덤은 복도를 황급히 달려 나갔다.
메러디스 씨는 여전히 실내복 차림에 슬리퍼를 신었고, 검은 머리는 어지럽게 넓은 이마를 뒤덮고 있었지만, 그래도 신사의 풍모를 풍겼다. 반면 알렉 데이비스 부인은 실크 드레스를 입고 깃털 장식이 달린 보닛에 염소 가죽 장갑, 금줄 시계를 차고 있을지라도 품위라고는 없는 속된 여자로 보였다. 둘은 서로 상대방의 인품에 반감을 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메러디스 목사는 잔뜩 움츠러든 반면, 데이비스 부인은 전투라도 한 판 벌여보겠다는 자세였다. 부인은 목사에게 제안할 일이 있어 찾아왔고, 시간을 낭비할 생각도 없었다. 부인은 목사에게 큰 호의를 베풀 생각이었다. 아주 큰 호의를. 그리고 목사는 그것을 빨리 아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부인은 이 일을 여름 내내 생각했고, 드디어 결정을 내렸다. 데이비스 부인에게는 그것만이 중요했다. 부인이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했으면 결정은 난 것이다. 그 문제에 관해 다른 사람이 왈가불가해서는 안 되었다. 부인은 지금까지 그렇게 살았다.
알렉 데이비스와 결혼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에도 알렉은 그 사실을 알지도 못했지만 그 결혼은 이미 성사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이상한 결혼을 위해 데이비스부인은 모든 것을 자기 마음에 들도록 준비했다. 이제 메러디스 씨에게도 일이 그리 되어야 했다.
“목사님, 문 좀 닫아주시겠습니까? 중요한 할 말이 있습니다. 밖에서 저렇게 시끄러운 소리가 나서야 말을 할 수가 없군요.”
데이비스 부인이 입술을 약간 비틀며 거칠게 말했다.
메러디스 씨는 순하게 문을 닫았다. 그런 다음 데이비스 부인 앞에 앉았다. 하지만 그가 부인을 완전히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마음은 여전히 에발트의 논쟁으로 씨름 중이었다. 데이비스 부인은 목사가 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드디어 마음을 굳혔어요. 내가 우나를 입양하기로요, 메러디스 목사님.”
데이비스 부인이 공격적인 태도로 말했다.
“우, 우나를 입, 입양이요?”
목사가 무슨 말인지 조금도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까지 더듬었다.
“네, 그래요. 난 그 일을 상당히 오래 생각해왔어요. 우리 남편이 죽은 뒤로 아이를 하나 입양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왔거든요. 하지만 적당한 아이를 구하기가 어려웠어요. 내 집으로 들여오고 싶은 아이가 없더라고요. 고아원 아이는 데려오고 싶지 않아요. 빈민가에서 살던 부랑아일 가능성이 많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어디 아이가 있어야지요. 지난가을에 항구 마을에서 아이를 여섯이나 남겨두고 어부 하나가 죽었어요. 사람들이 그 아이 중 하나를 나더러 맡으라고 했지만 그런 쓸모없는 아이를 데려올 생각은 없다고 말했지요. 그 애들 할아버지는 말을 훔쳤어요. 게다가 아이들이 죄다 남자아이들이에요. 난 여자아이를 원해요. 조용하고 순종적이어서 숙녀로 자랄 여자아이요.
우나가 가장 적당한 아이 같아요. 우나는 잘만 보살펴준다면 숙녀로 자랄 거예요. 페이스와는 다르죠. 페이스는 꿈에라도 입양할 생각이 없네요. 하지만 우나는 데려다가 좋은 집에서 살게 해주고 좋은 교육을 받게 하겠어요,메러디스 씨. 그리고 우나가 행동만 똑바로 한다면 내가 죽을 때 내 돈을 모두 우나한테 남겨줄 거예요. 우리 친척들은 1센트도 받지 못할 거라고요. 내 마음은 확고해요. 내가 처음에 아이를 입양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다 그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으니까요. 우나를 데려다가 옷도 잘 입히고 교육도 잘 시킬 거예요, 메러디스 씨. 그리고 나는 우나를 내 자식처럼 대하면서 음악 레슨이랑 미술 레슨도 받게 할 거예요.”
메러디스 씨는 지금 충분히 깨어 있는 상태였다. 창백했던 볼에는 혈색이 돌았고 그 섬세한 검은 눈은 위태하게 빛났다. 지금 이 여자가, 저 천박하고 돈밖에 모르는 여자가 나에게 우나를 달라는 것인가? 내 예쁘고 소중한 우나를, 세실리아의 짙푸른 눈을 닮은 우나를, 다른 아이들이 모두 둘러서 울고 있는 가운데 죽음의 문이 둘을 갈라놓을 때까지 세실리아가 소중하게 가슴에 품고 있던 아이를. 세실리아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작고 검은 머리의 아기와 남편을 바라보았다.
“이 아이를 잘 돌보아주어요, 존. 너무 어리고 연약한 아이예요. 다른 아이들은 제 앞길을 잘 헤쳐 나가겠지만 우나에게는 세상이 힘겨울 거예요. 오, 존, 당신과 우나가 어떻게 살아갈지 모르겠군요. 두 사람 다 내가 필요할 텐데……. 아이를 꼭 곁에 두세요. 아이를 꼭 곁에 두어요.”
세실리아는 그렇게 부탁했다.
그 말은 남편을 위해 남긴 잊지 못할 말 몇 마디를 제하면 세실리아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그런데 지금 데이비스 부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우나를 데려가겠노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메러디스 씨는 몸을 일으켜 세우고 데이비스 부인 쪽을 보았다. 너덜너덜해진 실내복을 입고 닳아빠진 슬리퍼를 신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성직자의 품위가 느껴졌다.
“데이비스 부인, 친절한 말씀에 감사합니다만, 난 부인에게 내 자식을 줄 수 없습니다.”
데이비스 부인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가 거절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니, 왜요, 메러디스 씨. 설마 진심은 아니겠죠.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해요. 내가 그 아이에게 얼마나 큰 은혜를 베풀고 있는 것인데요.”
“아니요. 더 이상 생각해 필요도 없는 문제입니다, 데이비스 부인.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부인이 우나에게 아무리 큰 세속적인 혜택을 줄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이 아버지의 사랑과 관심을 잃은 것을 보상해주지는 못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두 번 다시 생각해볼 필요도 없는 문제입니다.”
데이비스 부인은 너무나도 실망스러워 평소의 자제력도 모두 잃어버릴 만큼 화가 끓어올랐다. 부인의 넓적한 얼굴은 보랏빛으로 변했고 목소리는 떨려 나왔다.
“내가 그 아이를 맡아주기만 한다면 고마워할 줄 알았습니다.”
부인이 코웃음을 쳤다.
“왜 그렇게 생각하셨죠?”
메러디스 씨가 조용히 물었다.

“그 누구도 목사님이 자기 자식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죠. 목사님은 아이들을 아무렇게나 내버려두잖아요. 사람들이 다 그렇게 말해요. 아이들은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한 채로 지내고,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잖아요. 아이들이 예의라고는 하나도 몰라요. 저 황야에 사는 인디언 아이들 같다고요. 목사님은 아버지로서 의무는 생각지도 않고요. 길거리 아이가 집에 들어와 2주일이나 지냈는데도 그것도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다면서요. 그 아이 욕지거리가 대단하더군요. 그 아이에게 천연두를 옮아도 괜찮다고 하겠지요. 페이스는 설교 단상에 올라가 그런 못된 연설을 하지를 않나! 그리고 돼지를 타고 거리를 내달렸지요. 그것도 내가 알기로는 바로 목사님 눈앞에서 그랬다지요. 아이들 하는 짓이 도대체 상식을 뒤엎는데도 목사님은 전혀 아이들을 말리려들지도 않고, 아이들을 가르치려들지도 않지요. 그리고 이제 내가 그 아이들 중 하나에게만이라도 좋을 집을 주고 장래를 보장해주겠다는데 그것을 거절하고 나를 모욕하다니요. 참으로 대단한 아버지예요. 아버지의 사랑과 관심이라고요?”
데이비스 부인이 경멸을 가득 담아 일장 연설을 했다.
“이제 됐습니다, 부인.”
메러디스 씨가 말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똑바로 데이비스 부인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 눈빛에 데이비스 부인은 몸을 움찔했다.
“이제 됐습니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습니다, 데이비스 부인. 내가 아버지로서 의무를 간과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부인이 그런 식으로 나를 가르칠 필요는 없습니다. 이제 그만 돌아가시죠.”
데이비스 부인은 간다는 인사조차도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목사를 획 지나쳐가는데 살찐 커다란 두꺼비 한 마리가 부인의 발 아래로 폴짝 뛰어올랐다. 칼이 거실에 몰래 숨겨놓은 것이었다. 데이비스 부인은 그 끔찍한 물건을 밟지 않으려고 비명을 내지르며 피하려다 몸의 균형도, 파라솔도 잃어버렸다. 부인이 정확히 넘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매우 우아하지 못하게 방 저쪽으로 비틀비틀 넘어지다가 문에 꽝하고 부딪히는 바람에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경련을 일으켰다. 메러디스 목사는 두꺼비를 보지 못해서 데이비스 부인이 중풍이나 마비를 일으킨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놀라 달려가 도우려고 했다. 그러나 몸을 추스른 부인은 불같이 화를 내며 손을 내저었다.
“감히 내 몸에 손대지 말아요. 이것도 이 집 아이들 중 하나 짓이겠죠. 정말이지 고상한 부인이 올 곳이 못 돼요. 내 양산이나 이리 내요. 난 갈 테니까. 다시는 목사관이고 교회고 발걸음도 하지 않겠어요.”
데이비스 부인이 호통을 쳤다.
메러디스 씨는 순순히 화려한 양산을 집어주었다. 데이비스 부인은 그것을 낚아채어 휑하니 나가버렸다. 제리와 칼은 계단 난간에서 미끄럼타기를 그만두고 페이스와 함께 베란다 끝에 앉아 있었다. 안타깝게도 셋은 “오늘 밤에 이 마을에 큰 소동이 벌어질 거야.” 하는 노래를 목청껏 부르고 있었다. 데이비스 부인은 그 노래가 자기를 겨냥한 것이라고 믿었다. 부인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이들에게 양산으로 삿대질을 해보였다.
“너희 아빠는 순전히 바보야. 너희 해충들 셋은 회초리로 흠씬 때려줘야 해!”
“아니에요!” 
페이스가 아버지를 두둔하며 소리쳤다.
“우리는 해충이 아니에요!”

남자아이들은 자기들을 변명했다. 그러나 이미 데이비스 부인은 가버리고 없었다.
“세상에! 저 아주머니가 미쳤나? 그런데 해충이 뭐지?”
제리가 말했다.
존 메러디스 목사는 잠시 응접실 안을 서성거리다 서재로 가서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독일 신학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 일로 마음이 너무나 심란해져 있었다. 데이비스 부인은 호되게 메러디스 목사를 깨워놓았다. 데이비스 부인이 비난한 것처럼 자기가 그토록 책임을 소홀히 하고 무관심한 아빠였을까? 자기가 엄마도 없이 자기만 의지하고 사는 네 아이들을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심각하게 방치해두었을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만큼? 마을 사람들이 정말 데이비스 부인이 큰소리친 것처럼 생각할까? 그런지도 모르겠다. 데이비스 부인이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자기가 우나를 맡아야겠다고 했을 정도이니 틀림없이 마을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부인은 내가 기쁜 마음으로 넙죽 우나를 내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일까? 마치 환영받지 못하는 고양이 새끼를 주어버리듯. 만일 그것이 모두 사실이라면 어쩌지.
존 메러디스는 신음 소리를 내면서 다시 먼지가 가득 쌓여 있고 무질서한 서재를 오락가락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자기는 아이들을 어떤 아빠보다도 깊이 사랑했다. 그리고 아이들도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런 사실은 데이비스 부인이건 뭐건 아무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가 아이들을 돌보기에 적절한 사람일까?
그는 자기의 약점이나 한계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지금 자기에게 필요한 일은 좋은 여자가 있어 아이들을 상식에 맞게 돌보아주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가정부만 들이려도 마사 이모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쉽지 않았다. 마사 이모는 이 집에 필요한 일은 자기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여겼다. 도저히 저 불쌍한 마사 이모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없었다. 마사 이모는 지금까지 자기뿐 아니라 가족들에게 최선을 다해왔다. 세실리아를 얼마나 끔찍하게 예뻐해주셨는지 모른다. 더구나 세실리아로부터도 이모를 잘 보살펴드리라고 부탁받지 않았는가.
분명히 마사 이모가 전에 자기더러 다시 결혼하라고 하긴 했다. 가정부는 안 된다고 해도 아내를 데려오는 일은 허락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안 되는 일이다. 결혼할 의사가 없기 때문이다. 세실리아가 아닌 여자를 사랑할 마음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다. 그러면 도대체 이 일을 어찌 해결해야 한단 말인가? 이때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잉글사이드’로 가서 이 어려운 문제를 상의해보아야겠다. 블라이드 부인과는 같이 있어도 수줍거나 멋쩍지도 않았고 혀가 마비되어버리지도 않았다. 그 부인은 이해심이 많아 같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속이 후련해졌다. 블라이드 부인이 지금의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의견을 내놓아줄지 모른다. 해결책을 얻지 못한다 해도 데이비스 부인에게서 받은 불쾌함을 해소하려면 점잖은 사람과의 대화가 좀 필요했다.
목사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평소보다는 덜 멍한 상태로 저녁을 먹었다. 저녁 식사가 좀 부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을 살펴보았다. 모두들 장밋빛 얼굴이고 건강해 보였다. 우나만 좀 창백해 보였다. 우나는 제 엄마가 살아 있을 때도 그리 튼튼한 편이 못 되었다. 아이들은 즐겁게 웃고 떠들었다. 모두들 행복해 보였다. 특히 칼이 가장 즐거운 듯했다. 멋지게 생긴 거미 두 마리가 밥그릇 주변을 기어 다니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이들의 목소리는 쾌활했고 예의범절도 나쁘지 않았으며 서로를 아껴주었다. 그런데도 데이비스 부인은 사람들이 이 아이들의 행동거지가 나쁘다고 말한다고 했다.
메러디스 목사가 막 대문을 나섰는데 블라이드 의사와 부인이 마차를 타고 로브리지로 가는 길을 지나는 것이 보였다. 메러디스 목사는 실망으로 얼굴을 땅에 떨어뜨렸다. 블라이드 부인은 외출 중이다. 지금 ‘잉글사이드’에 가보아야 아무런 소용도 없다. 하지만 목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대화가 필요했다. 메러디스 목사는 실망스러운 마음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 언덕 위에 서 있는 고풍스러운 웨스트 자매의 집 창문에 석양이 비치고 있었다. 창문은 장밋빛으로 희망의 빛을 발했다. 그는 갑자기 로즈마리와 엘런 웨스트를 떠올렸다. 그리고 엘런과 통렬한 대화를 다시 한 번 갖는 것도 좋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즈마리의 차분하고 상냥한 웃는 얼굴과 편안하고 아름다운 파란 눈을 보는 것도 좋으리라. 필립 시드니 경의 시에 나오는 ‘늘 위안을 주는 얼굴’이란 시구는 로즈마리와 딱 어울렸다. 그리고 지금 메러디스 목사에게는 위안이 필요했다. 못 갈 이유가 무엇인가? 메러디스 목사는 가끔 들러달라던 엘런의 말을 떠올렸다. 로즈마리에게 책도 돌려줘야 한다. 맞다. 잊어버리기 전에 책을 돌려주어야 했다. 메러디스 목사는 빌린 책들을 잊어버리고 돌려주지 않아 서재에 책이 많이 쌓여 있다는 것이 생각나 마음이 불편해졌다. 이번에는 반드시 잊지 않고 돌려주리라. 메러디스 목사는 서재로 다시 돌아가 책을 갖고 ‘무지개 골짜기’로 힘차게 내려갔다.

17. 독일의 구약학자 에발트(H. G. A. Ewald, 1603~1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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