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7권 15~16

나단비 | 2024.04.14 18:22:56 댓글: 0 조회: 74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61016
15
온갖 소문






항구 너머에 사는 미라 머레이가 땅속에 묻힌 날 저녁, 미스 코넬리아가 메리 밴스를 데리고 ‘잉글사이드’를 찾았다. 미스 코넬리아가 꼭 속을 털어놓아야 할 일이 몇 가지 있었다. 물론 장례식에 관한 이야기도 모두 해야 했다. 그래서 수잔과 미스 코넬리아는 시시콜콜한 일까지 모두 시원하게 풀어놓았다. 앤은 그런 엽기적인 대화에는 끼지 않았고, 그것을 즐기지도 않았다.
혼자 조금 떨어진 가을 뜰에 앉아 불꽃처럼 피어오른 달리아와 저녁놀 진 9월의 하늘 아래 꿈처럼 펼쳐진 아름다운 항구로 눈길을 주고 있었다. 메리 밴스는 앤 옆에 앉아 얌전하게 뜨개질을 했다. 메리의 마음은 온통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달콤하게 들려오는 ‘무지개 골짜기’에 가 있었다. 하지만 미스 코넬리아가 보고 있었다. 골짜기로 달려가기 전에 지금 뜨고 있는 양말을 몇 바퀴 더 떠야 했다. 메리는 뜨개질을 하며 입은 가만히 다물고 있었지만 귀만은 열어두었다.
“나는 그렇게 예쁜 시체는 처음 봤어요.”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미라 머레이는 원래 미인이었어요. 로브리지의 코리 집안사람이잖아요. 코리 집안사람은 다들 잘생긴 것으로 유명하지요.”
수잔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도 시신 곁을 지나면서 ‘가여운 여자 같으니라고! 저렇게 행복해 보이는 겉모습만큼이나 죽어 누운 속도 행복했으면 좋겠구먼.’ 하고 생각했어요. 그 부인은 죽어서도 하나도 변하지 않았더군요. 입고 있는 검은색 공단 드레스는 15년 전 딸 결혼식 때 입었던 거였어요. 그때 그 부인 숙모가 그 드레스는 뒀다가 장례식에 입으라고 말했다지요. 하지만 미라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꾸했대요. ‘내 장례식에 입게 되겠지요. 하지만 우선은 이 드레스를 입고 즐겁게 지낸 다음에요.’ 미라는 자기 말대로 그렇게 즐겁게 살았어요. 미라 머레이는 죽기도 전에 자기 장례식부터 치를 사람은 아니지요. 그 후로도 난 미라가 사람들과 어울려 즐겁게 지내는 것을 보면서 아주 여러 번 이런 생각을 했어요. ‘미라 머레이는 참 미인이야. 저 드레스도 나날이 더 어울리고. 하지만 저 드레스는 분명 수의가 될 거야.’ 그런데 정말로 내 말대로 되었어요, 마셜 엘리엇 부인.”
수잔이 다시 한 번 한숨을 무겁게 내쉬었다. 수잔은 지금 아주 즐거웠다. 장례식 얘기는 언제 해도 참으로 유쾌했다.
“나는 미라를 좋아했어요. 성격이 밝고 유쾌했잖아요. 미라와 악수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어요. 미라는 무슨 일에건 언제나 긍정적이었죠.”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맞는 말이에요.”

수잔도 맞장구를 쳤다.
“미라 시누이가 그러는데 지난번에 의사가 이제 더 이상은 아무 방법도 없다고 말한 후로 미라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대요. 미라는 유쾌하게 ‘그렇다면 내 명이 다한 것에 감사해야죠. 가을에 대청소를 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대청소는 봄에는 괜찮지만 가을에는 무척 하기 싫었는데 올해는 그대로 지나가게 되어 잘됐어요.’하고 말했대요. 어떤 사람들은 그 말로 미라가 불성실하다고 했어요, 마셜 엘리엇 부인. 미라 시누이도 이것을 부끄럽게 여겼고요. 미라가 병 때문에 머리가 좀 이상해진 게 아닌지 모르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아니에요, 걱정할 필요 없어요. 미라는 인생의 밝은 면만 보면서 즐겁게 살려는 성격이라 그래요.’ 하고 말해주었지요”
“미라의 언니 루엘러는 꼭 반대 성격이에요. 루엘러에게는 밝은 면이 전혀 없지요. 오로지 어둠과 회색 그림자밖엔 없는 사람 같아요. 벌써 몇 년 동안이나 ‘난 일주일 내로 저세상으로 갈 거야.’하는 말을 해왔잖아요. ‘나는 얼마 안 있으면 죽을 테니 당신에게 더 이상 부담이 되지는 않을 거예요.’ 하면서요. 누가 미래의 계획이라도 이야기할라치면 신음 소리를 내면서 ‘그때 나는 이 세상에 없을 거야.’라는 소리를 빼놓지 않았죠. 나는 루엘러와 이야기를 하면 언제나 그냥 당신 말이 맞는다고 해주어요. 그럼 루엘러도 화가 나서 며칠 동안은 상태가 나아지죠. 그 덕택으로 몸은 좋아진 것 같은데 마음도 그런 것 같지는 않았지만요. 미라는 루엘러와는 너무 다르죠. 미라는 언제나 사람을 기분 좋게 할 말과 행동만 했어요. 그런 성품은 아마 남편들과도 관련이 있을 거예요. 루엘러의 남편은 포악하기가 타타르족 못지않았지만 짐 머레이는 아주 점잖은 사람이었지요. 오늘 그 사람은 아주 비통해 보이더군요. 짐 머레이가 참 안됐더라고요. 난 자기 아내 장례식장에서 비통한 모습을 보이는 남자가 안돼 보인다는 생각은 별로 해보지 않았는데요.”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당연히 슬프겠죠. 당장 미라 머레이 같은 부인을 어디서 다시 얻겠어요. 아마 부인을 얻으려고 애쓰지도 않을걸요. 아이들이 모두 자랐고 미라벨이 집안을 돌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홀아비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 나도 섣불리 예단하고 싶지는 않네요.”
수잔이 말했다.
“앞으로는 교회에서 미라가 몹시 그리울 거예요. 미라가 교회 일을 얼마나 열심히 했어요. 미라는 못 해내는 일이 없었지요. 해결을 못 할 일이면 그냥 그대로 받아들였고요. 그냥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일이면 그냥 없는 일인 것처럼 행동했어요. 사실 해결 못 하는 일도 별로 없었지요, 뭐. 미라가 내게 ‘난 어떤 일이고 좌절하지 않고 끝낼 때까지 해볼 작정이에요.’ 하고 말한 적도 있어요. 이제 미라의 여정도 마침내 끝난 셈이네요.”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앤이 꿈나라에서 돌아온 것처럼 갑자기 끼어들었다.
“그렇게 생각하세요? 난 그분의 여행이 끝났다고는 생각할 수 없어요. 그분이 손을 놓고 가만히 앉아만 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나요? 무엇이나 알려고 들고 열정적으로 파고드는 분이니, 새롭고 멋진 모험을 찾아 나설 거라고요. 난 그분이 죽어서도 새롭고 멋진 모험을 하러 막 문을 열고 나갔다고 생각해요.”
“아마,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요. 앤 그거 알아요? 나도 영원한 휴식이라는 교리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요. 내 말이 하느님을 비난하는 말로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지만요. 나는 천국에서도 여기 이 땅에서처럼 바쁘게 돌아다닐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천국에도 파이랑 도넛 비슷한 것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뭔가 만들 거요. 물론 가끔씩은 엄청 피곤하기도 하지요. 나이가 들면 더 피곤하고요. 하지만 아무리 피곤한 사람도 영원히 쉬지 않아도 원기를 회복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게으른 사내만 빼고요.”
미스 코넬리아가 맞장구쳤다.
“천국에서 미라를 다시 만나면 여기서와 똑같이 건강한 모습으로 웃으면서 내게 달려왔으면 좋겠어요.”
앤이 말했다.
“그럴 리가 있나요, 사모님. 설마 미라가 다음 세상에서도 웃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죠?”
수잔이 충격을 받은 듯 말했다.
“왜 안 돼요, 수잔? 그럼 우리가 천국에서 울고 있을까요?”
“오, 아니죠, 사모님. 나를 오해하지는 마세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니지요.”
“그럼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건 그냥 내 의견이에요, 사모님. 그냥 엄숙하고 거룩한 표정을 짓고 있겠지요.”
수잔이 말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요, 수잔? 미라 머레이나 내가 과연 항상 엄숙하고 경건한 표정을 짓고 살 수 있을까요? 언제까지나요, 수잔?”
앤이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글쎄, 미라나 사모님은 시시때때로 웃어야 하긴 하죠. 난 천국에서 웃는다는 건 인정할 수가 없지만요. 그건 정말로 적절한 일이 아닌 것 같아요, 사모님.”
수잔도 마지못해 인정했다.
“자, 자, 이제 이야기를 다시 이 세상으로 돌려요. 주일 학교에서 미라가 맡았던 반을 이제 누가 맡죠? 그동안은 미라 대신 줄리아 클로가 맡아왔는데, 겨울에 샬럿타운으로 이사를 간다고 하니 다른 사람이 맡아야 해요.”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로리 자미에슨이 맡고 싶다고 했대요. 자미에슨 부인은 로브리지에서 글렌으로 이사 온 후로 교회도 빼먹지 않고 잘 나오고요.”
앤이 말했다.
“새 신자를요! 한 일 년쯤은 지켜봐야 해요.”
미스 코넬리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자미에슨 부인은 조금도 믿을 수 없는 사람이에요, 사모님. 한 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라고요. 관을 맞추어서 아름답게 눕혀놨는데 가지 않고 되살아나 버렸잖아요. 그런 사람은 믿을 수 없어요. 사모님.”
수잔이 엄숙하게 말했다.
“그 사람은 언제 감리교회로 가버릴지 몰라요. 로브리지에서도 감리교회와 장로교회를 번갈아가면서 다녔대요. 여기서는 두 교회를 오락가락하는 건 못 봤지만 자미에슨 부인이 주일 학교를 맡는 것은 허락할 수 없어요. 신도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면 안 돼요. 죽어서건, 화나게 해서건 우린 너무 많은 신도들을 잃고 있어요. 알렉 데이비스 부인도 교회를 떠나버렸지만 아무도 그 이유를 몰라요. 이제부터는 메러디스 목사 월급을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했다더군요. 물론 사람들은 목사관 아이들 때문에 그런다고 하지만 난 그게 다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내가 페이스를 구슬려서 그 이유를 알아보려고 했지만 데이비스 부인이 아주 기분이 좋아서 목사관에 왔는데 목사님을 만나고는 엄청 화가 나서 가버렸다는 말만 들었어요. 아이들에게 해충이라고 부르고요.”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해충이라고요! 정말이에요? 알렉 데이비스 부인은 자기 외삼촌이 아내를 독살했다는 사실을 잊은 모양이군요. 그 증거가 나온 것은 아니고 들은 말을 모두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요, 사모님. 하지만 내가 아무런 확실한 이유도 없이 아내가 죽은 외삼촌이 있다면 천진난만한 아이들을 해충이라고 부르며 다니지는 않겠어요.”
수잔이 화를 내며 말했다.
“문제는요, 데이비스 부인이 그동안 기부금을 많이 내놓았는데 그것을 누가 보충할 수 있느냐 하는 거예요. 거기다 자기 친척 더글러스 사람들까지 메러디스 목사에게 등을 돌리게 하면 문제가 심각해지죠. 그 부인이 그렇게 한다면 목사님은 교회를 떠나야 해요.”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알렉 데이비스 부인이 그렇게까지 하지는 못해요. 친척들이 그 부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거든요. 그 부인이 친척들에게 별 힘을 쓸 수 없어요.”
수잔이 말했다.
“하지만 더글러스 집안사람들은 똘똘 뭉쳐요. 만일 한 사람이라도 건드리면 전부를 건드리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그 사람들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말이에요. 그 사람들이 목사님 월급의 절반을 낸다고요. 더글러스 집안을 누가 뭐라고 하든 그 사람들은 인색하지는 않아요. 노먼 더글러스는 교회를 떠나버리기 전에 일 년에 백 달러를 내놓았었어요.”
“그분은 왜 교회를 떠났죠?”
앤이 물었다.
“소를 거래할 때 교회 신도 중 한 사람이 자기를 속였대요. 교회에 안 나온 지 벌써 20년은 될 거예요. 그 사람 부인은 건강하게 살아 있을 때는 교회에 나왔어요. 하지만 노먼 씨가 헌금은 1센트 이상 못 내게 했어요. 부인은 그것을 몹시 수치스러운 일로 생각했지요. 부인이 자기 남편에게 볼멘소리를 하는 것을 들을 일이야 없지만 노먼 씨가 훌륭한 남편은 아니었죠. 부인은 늘 겁먹은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살았어요. 노먼 더글러스 씨는 30년 전에 원하던 여자를 얻지 못했는데, 더글러스 집안사람은 차선책으로 얻은 것으로는 만족하는 성미들이 아니에요.”
“노먼 더글러스가 원하던 여자는 누구였나요?”
“엘런 웨스트지요. 약혼까지 하지는 않았지만 2년 정도 교제하다가 갑자기 헤어졌어요. 그 이유는 아무도 몰라요. 하찮은 말다툼이었겠죠. 화가 가라앉을 새도 없이 노먼은 헤스터 리즈와 결혼해 버렸지요. 엘런에게 복수하려고 결혼해버린 거예요. 사내들 하는 짓이 다 그렇지요, 뭐. 헤스터는 예쁘고 귀엽기는 한 여자였지만 지나치게 소극적이었어요. 걸핏하면 울기나 했고요. 너무 순해서 노먼은 매력을 못 느꼈죠. 노먼은 남자에게도 지지 않고 덤비는 여자를 좋아했어요. 엘런이라면 노먼을 꼼짝 못 하게 했을 것이고, 노먼은 그런 여자를 더 좋아해요. 노먼은 헤스터를 무시했어요. 아, 정말이에요. 헤스터가 언제나 복종했기 때문이지요. 노먼은 젊을때부터 씩씩한 여자가 좋다고 했어요. 무슨 일에나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여자를 좋아했죠. 그런데 결혼은 말도 제대로 못 하고, 거위가 쫓아와도 무섭다고 도망치는 여자랑 했으니, 사내다운 짓이지요. 리즈 집안사람은 다들 그렇게 숙맥이잖아요. 그저 이리저리 흔들리는 대로 살아갈 뿐 정말로 사는 듯 사는 사람이 없어요.”
“러셀 리즈는 두 번째로 결혼할 때 첫 번째 부인에게 주었던 반지를 다시 끼워주었대요. 내 생각엔 그건 절약정신이 강해도 너무 강한 거지요, 사모님. 그리고 그 사람 동생 존은 항구 건너편 묘지에 사망일만 빼고 비문까지 다 새긴 자기 묘비를 자기 손으로 세우고 일요일마다 묘지를 방문한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게 어디 할 만한 일이에요. 하지만 그 사람은 그런 일이 즐겁답니다. 다들 자기 즐거운 일이 다르니까요. 노먼 더글러스 씨로 말하면 완전히 이교도지요. 목사님이 왜 교회에 나오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그가 한 말이 ‘보기 흉한 여자들이 너무 많아요. 보기 흉한 여자가요!’ 그랬다잖아요. 난 그 남자 앞에 가서요, 엄숙하게 ‘지옥에나 가시지요!’ 하고 말해주고 싶어요.”
수잔이 말했다.
“노먼 씨는 지옥이 있다는 것도 믿지 않아요. 그 양반이 죽어서 자기가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좋겠어요. 메리야, 양말은 그만큼 떴으면 됐으니, 이제 반 시간 정도는 아이들하고 놀아도 된다.”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메리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무지개 골짜기’로 달려 내려갔다. 그리고 페이스 메러디스에게 알렉 데이비스 부인의 일을 낱낱이 말해주었다.
“엘리엇 아주머니가 그랬는데, 데이비스 부인이 더글러스 집안사람 모두를 네 아빠에게 등 돌리게 할 거래. 그럼 목사님 월급을 못 받으니까 너희는 글렌을 떠나야 한대. 나도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노먼 더글러스 씨가 다시 교회에 나와서 기부를 해주면 문제가 다 해결되겠지만 그분은 그러지 않을 거야. 그리고 더글러스 집안도 교회를 떠나버릴 거라고 했어. 그럼 너희도 떠나야 해.”
메리가 단정했다.
페이스는 그날 밤 무거운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글렌을 떠나야 한다니 참을 수가 없었다. 세상 어디에도 블라이드 아이들 같은 친구는 없을 것이다. 지난번에 살았던 메이워터를 떠날 때도 얼마나 슬펐는지 모른다. 메이워터의 다정한 친구들과 헤어지는 일도 무척 슬펐고, 엄마랑 살았고 엄마가 돌아가신 정든 목사관을 떠나기가 너무 슬퍼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또 그런 슬픔을 당한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글렌 세인트 메리와 정다운 ‘무지개 골짜기’, 그리고 그 재미있는 묘지를 떠나야 하는 일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목사님 가족은 정말 나빠. 정들어서 살 만해지면 또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야 하잖아. 나는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절대 목사에게는 시집가지 않을 거야.’
페이스는 침대에서 일어나 담쟁이덩굴이 휘감겨 있는 작은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주위는 쥐 죽은 듯 조용했고 우나의 조용한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페이스는 이 세상에 자기 혼자뿐인 듯 외로운 생각이 들었다.
가을 밤 별빛이 쏟아지는 푸른 목장 아래로 글렌 세인트 메리가 보였다. 골짜기 너머로 보이는 ‘잉글사이드’ 여자아이들 방과 월터 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페이스는 월터의 이가 또 아픈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낸과 다이가 부러운 마음에 한숨이 나왔다. 그 아이들은 엄마도 있고 안정된 가정도 있다. 그 아이들에게는 누가 이유 없이 화를 내거나 해충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모두들 잠이 들어 조용한 글렌 마을 너머로 들판 한가운데에 아직 불이 켜진 집이 하나 있었다. 페이스는 그것이 노먼 더글러스네 집에서 나오는 불빛이란 것을 알았다. 그 사람은 밤새 잠을 안 자고 일어나 앉아 책을 읽는 것으로 유명했다. 메리는 그 사람이 다시 교회에 나오기만 하면 모든 일이 다 해결될 거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하면 되잖아! 페이스는 감리교회 정문 옆에 서 있는 뾰족하고 커다란 가문비나무 위로 커다란 별이 하나 낮게 걸린 것을 바라보면서 묘안을 떠올렸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는 계획이 섰다. 나 페이스 메러디스는 그렇게 할 것이다. 그렇게만 하면 모든 일이 다 해결될 것이다. 페이스는 만족스런 한숨을 내쉬고 어둡고 쓸쓸한 세계와 작별하고 동생 우나 옆 침대 속으로 살그머니 기어들어갔다.





16
보복






페이스에게 한번 마음먹은 일은 곧 행동을 의미했다. 페이스는 머리에 떠오른 일은 즉시 실행에 옮기는 아이였다. 다음 날 페이스는 학교에 다녀오자마자 목사관을 나와 글렌으로 향했다. 길을 가다 우체국 가까이에서 월터 블라이드를 만났다.
“나는 엄마 심부름으로 엘리엇 아주머니 댁에 가는 길이야. 너는 어디 가니, 페이스?”
“교회 일로 어디 좀 가는 거야.”
페이스가 거만하게 대꾸하고는 더 이상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아서 월터는 좀 무시당한 기분이 들었다.
둘은 얼마쯤 아무 말도 없이 걷기만 했다. 온화한 저녁 공기에 어디선가 향내가 실려 왔고, 모래톱 너머로는 잿빛 바다가 부드럽고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글렌 마을을 가로질러 흘러가는 개울에는 노란 나뭇잎과 붉은 나뭇잎이 둥둥 떠다니는 게 꼭 요정 나라의 작은 배 같았다. 막 보리를 베어내어 아름다운 적갈색이 된 제임스 리즈 씨의 밭에서는 까마귀들이 국회를 열고 있었다. 까마귀 나라의 복지를 위해 진지하게 한창 회의를 진행 중인데 페이스가 그 엄숙한 회의를 무자비하게 강제 해산시켜버렸다. 울타리로 올라가더니 까마귀들을 향해 부러진 나무토막을 내던진 것이다. 금세 하늘은 검은 까마귀들의 날갯짓과 성난 울부짖음으로 가득 찼다.
“무슨 짓이야? 왜 까마귀들을 방해해.”
월터가 비난했다.
“난 까마귀를 싫어하거든. 저렇게 검고 약삭빨라 보이는 것들은 뱃속도 시꺼멀 거야. 작은 새들의 둥지에서 알을 훔쳐낸다고. 지난봄 우리 집 잔디밭에서도 그런 짓을 하는 걸 내가 봤어. 그런데 월터, 얼굴이 왜 그렇게 창백해 보이니? 어젯밤에 치통이라도 앓았어?”
페이스가 말했다.
월터는 몸을 떨었다.
“응, 무지무지 심하게 아팠어. 너무 아파서 잠도 잘 수 없을 만큼. 그래서 마루를 오락가락하면서 초기 기독교 순교자들이 네로 황제의 압제 아래서 고문당하는 장면을 상상했어. 그렇게 해서 조금은 아픈 것을 잊을 수 있었지만 나중에는 너무 아파서 상상도 할 수 없게 되고 말았어.”
“그래서 울었니?”
페이스가 걱정스레 물었다.
“아니. 그렇지만 침대에 누워서 신음했어.”
월터는 솔직히 인정했다.
“내가 앓고 있으니까 쌍둥이가 들어오더라. 낸이 고추를 붙여주었어. 하지만 아픈 게 더 심해지기만 했어. 그다음엔 다이가 찬물을 입 안에 머금고 있으라고 해서 그렇게 해보려고 했는데 물을 입에 넣고 있을 수가 없었어. 결국 쌍둥이가 수잔 아줌마를 불러왔는데 아줌마가 나더러 뭐랬는지 알아? 어제 추운 다락방에서 쓸데없는 시를 쓴다고 앉아 있었던 대가래. 어쨌건 아줌마가 부엌에 불을 지피고 뜨거운 물주머니를 만들어 와서 내 치통은 가라앉았어. 난 나아지자마자 수잔 아줌마에게 내 시는 쓸데없는 것이 아니고 아줌마가 무슨 재판관도 아니라고 말해줬어. 아줌마도 자기가 재판관이 아닌 건 잘 알고, 시에 관해 아는 바도 없지만 시라는 것이 거짓말투성이라는 것만은 잘 안다고 했어. 하지만 페이스, 그 말은 맞지 않아. 그것이 바로 내가 시를 쓰는 이유이기도 하거든. 시로는 진실을 무한히 표현할 수 있지만 산문으로는 그럴 수 없어. 나는 아줌마에게도 그렇게 말해주었어. 그랬더니 아줌마는 잔소리 그만 하고 뜨거운 물주머니가 식기 전에 빨리 잠이나 자라고 하더라.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날 내버려두어 줄 테니 시가 치통을 해결해주는지 보래. 그리고 내가 이 일로 배우는 것이 있기를 바란다고 했어.”
“로브리지의 치과 의사에게 가서 아픈 이를 뽑아버리지 그래?”
월터는 몸을 떨었다.
“모두 그러라고 하지만 난 못 하겠어. 너무 아플 것 같아.”
“넌 그 정도도 못 참니?”
페이스가 경멸적으로 말했다.
월터는 얼굴을 붉혔다.
“많이 아플 거야. 난 아픈 건 싫어. 우리 아빠도 내가 싫다면 억지로 이를 빼게 하지는 않겠다고 하셨어. 내가 그러겠다고 할 때까지 기다리시겠대.”

“아픈 이를 내버려두면 계속 아플 뿐이야. 벌써 다섯 번째 아픈 거잖아. 뽑아버리면 더 이상 밤새도록 아프지 않아도 된다고. 나도 이를 뽑은 적이 있어. 그 순간은 소리를 질러댔지만 끝나고 나니까 아무것도 아니었어. 그냥 피만 조금 나왔을 뿐이야.”
페이스가 설득했다.
“난 피가 제일 싫어. 보기도 싫다고. 작년 여름에 젬 형이 발을 베었을 때도 끔찍한 기분이 들어서 혼났어. 수잔 아줌마는 젬 형보다도 내가 먼저 기절하는 줄 알았대. 하지만 젬 형이 아프다고 비명을 질러대니까 나도 고통스러웠어. 언제나 다치는 사람이 꼭 있어. 정말 끔찍한 일이야, 페이스. 난 누구든 고통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정말 싫어. 도망치고 싶어진다고. 그 모습이 보이지 않고, 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까지 멀리멀리 도망치고 싶어져.”
월터가 소리쳤다.
“누가 다쳤다고 해서 크게 야단법석 떨 것은 없어.”
페이스는 고수머리를 휙 젖히면서 말했다.
“물론 자기가 아플 때는 비명 소리가 나오지만. 피도 좀 보기 그렇고. 나도 누가 아픈 것은 보고 싶지 않아. 하지만 나라면 달아나지는 않겠어. 가서 도와주어야지. 네 아빠도 환자를 치료하려고 사람들을 아프게 하잖아. 네 아빠가 달아난다면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니?”
“달아나버리겠다고 하지는 않았어. 달아나고 싶은 생각이 든다고 했을 뿐이지. 그건 전혀 의미가 달라. 나도 아픈 사람을 도와주고 싶어. 하지만 이 세상에 보기 싫은 것이나 무서운 것이 없었으면 좋겠어. 이 세상에 기쁘고 유쾌한 일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말도 안 되는 일은 생각도 하지 말라고. 살다 보면 즐거운 일도 얼마든지 많아. 죽어버리면 치통도 없어지겠지만,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살아 있는 게 낫지 않니? 나는 살아 있는 것이 백 배 더 좋다고 생각해. 어머나, 댄 리즈가 오는구나. 항구에서 낚시질을 했나 봐.”
페이스가 말했다.
“난 댄 리즈가 싫어.”
월터가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여자아이들은 아무도 댄 리즈를 좋아하지 않아. 난 저 애를 얼른 지나쳐서 본 척도 하지 않을 거야. 보라고.”
페이스는 그 말대로 댄을 재빠르게 지나쳤다. 턱은 치켜들고 얼굴에는 비웃는 표정을 하고서. 댄이 몸을 획 돌려 페이스에게 소리쳤다.
“돼지 계집애! 돼지 계집애! 돼지 계집애!”
모욕적인 욕을 폭포수처럼 쏟아놓았다.
페이스는 못 들은 척 그냥 걸었지만 분노로 입술이 떨렸다. 페이스도 힘으로 싸워서는 자기가 댄 리즈를 당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월터가 아니라 젬 블라이드와 함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댄 리즈가 젬 앞에서 자기를 돼지 계집애라고 놀렸다면 젬이 댄을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월터가 그래 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월터를 원망하지도 않았다. 페이스는 월터가 다른 남자아이들과는 다르게 싸움질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았다. 북쪽 길에 사는 찰리 클로도 싸움을 못 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참 이상한 일은 그 아이는 겁쟁이라고 무시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월터는 경멸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냥 월터는 이 세상과는 다른 자기만의 특별한 세상에 살고 있다고 생각될 뿐이었다. 그래서 페이스는 월터 블라이드 대신 빛나는 눈동자를 가진 멋진 천사가 나타나 저 더럽고 주근깨투성이인 댄 리즈를 혼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천사가 나타나 도와주지 않는다고 섭섭해할 수 없듯이 월터 블라이드를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믿음직한 젬이나 제리가 있어서 댄을 혼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월터의 얼굴은 이제 더 이상 창백하지 않았다. 뺨은 붉게 달아올랐고 아름다운 눈은 수치감과 분노로 흐려졌다. 월터도 페이스 대신 자기가 복수해주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젬이라면 대뜸 댄에게 덤벼들어 자기가 뱉은 말을 양념까지 쳐서 도로 삼키게 해줬을 것이다. 리치 워런이었다면 댄이 페이스에게 한 욕보다 더 심한 욕설로 댄을 꼼짝 못 하게 해주었으리라. 하지만 월터는 못 했다. 그냥 할 수 없었다. 욕 같은 건 할 수 없었다. 월터는 욕을 하면 더 심한 욕이 되돌아온다는 걸 알았다.
월터로서는 댄 리즈가 마음대로 내뱉는 험악하고 상스러운 말은 생각할 수도, 입 밖에 낼 수도 없었다. 주먹질을 하고 싸우는 것도 그렇다. 월터는 싸우지 못했다. 싸운다는 생각조차도 싫었다. 싸움은 거칠고, 아프고, 무엇보다도 흉한 일이다. 젬이 가끔 싸움질을 하면서 흥에 겨워하는 것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지금 월터는 댄 리즈와 싸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기 눈앞에서 페이스 메러디스가 모욕을 당했건만 복수도 해주지 못하다니. 페이스는 분명 자기를 경멸할 것이다. 댄이 페이스더러 돼지 계집애라고 부른 다음부터 자기에게 말도 걸지 않았다. 월터는 헤어져야 할 갈림길에 다다르자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페이스 역시 다른 이유로 갈림길에 다다르자 안도했다. 페이스는 지금 자기가 해야 할 임무를 생각하고 갑자기 마음이 불안해 혼자가 되고 싶었다. 처음의 충동적인 열의는 식어버렸고, 댄이 자존심을 상하게 해 자신감이 더욱 없어졌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일을 해내야 하지만 다시 기운을 북돋아줄 열의가 사그라져버렸다.
페이스는 노먼 더글러스 씨를 만나 다시 교회에 나와 달라고 부탁할 작정이었지만, 그 사람이 무서웠다. 글렌 마을에서는 쉽고 간단한 일로 생각되던 일이 막상 여기로 오고 보니 상황이 달라 보였다. 페이스도 노먼 더글러스 씨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학교 친구 중에 몸집이 가장 큰 아이도 그 사람이 무서워 덜덜 떨었다. 사람 기분 상하게 할 말도 잘한다는데 그런 말을 듣게 되면 어쩌지. 페이스는 누가 자기에게 욕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한 대 얻어맞는 것보다 더 풀이 죽었다. 그러나 페이스 메러디스는 이 일을 해낼 것이다. 페이스는 항상 마음먹은 대로 했다. 더군다나 이 일을 해내지 못하면 아빠는 글렌 마을을 떠나야 한다.
페이스가 긴 오솔길 끝까지 다다르자 미루나무가 일렬로 죽 늘어서 있는 커다란 집이 나왔다. 노먼 더글러스는 베란다에서 신문을 읽고 있었고 옆에는 커다란 개가 한 마리 앉아 있었다. 그 뒤로 부엌에서는 가정부인 윌슨 부인이 저녁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접시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무척 요란했다. 방금 노먼과 말다툼을 해 기분이 상해 있었고, 사실 둘 다 기분이 몹시 나쁜 상태였다. 베란다로 올라가던 페이스는 노먼 더글러스가 신문을 내려놓고 성난 얼굴로 자기를 물어뜯을 듯 바라본다는 것을 알았다.
노먼 더글러스는 나름대로 상당히 잘생긴 사람이었다. 기다란 붉은 턱수염이 넓은 앞가슴까지 내려오고 붉은 머리는 나이가 들었어도 흰머리 하나 없이 무성했다. 넓은 이마에도 주름살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의 푸른 눈은 젊은이 못지않게 여전히 활기가 넘쳤다. 노먼 더글러스는 기분이 좋을 때는 친절했지만 기분이 나쁠 때는 성질이 그렇게 고약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페이스는 지금 교회 문제와 관련해 상황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에만 너무 골몰해 있었지, 하필이면 노먼 더글러스의 기분이 가장 나쁠 때 찾아온 것이다.
노먼은 처음 보는 아이를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초리로 쳐다봤다. 노먼 더글러스는 쾌활하니 잘 웃고 씩씩한 여자아이들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 순간 페이스는 겁에 질려 아주 창백해서 얼굴빛으로만 본다면 숫기라고는 없는 숙맥으로 보였다. 페이스가 겁먹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보자 노먼 더글러스는 더 아이를 놀려주고 싶어졌다.
“넌 누구네 개구쟁이냐? 여기엔 무슨 일로 왔어?”
노먼 더글러스가 무서운 얼굴로 노려보며 천둥 같은 호통 소리로 다그쳤다.
페이스는 평생 처음으로 말문이 막히고,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노먼 더글러스란 사람이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눈앞에 선 사람이 너무나 무서워 기가 죽을 대로 죽은 페이스의 마음을 읽고 노먼은 더 짜증이 일었다.
“왜 그러냐? 뭔가 할 말이 있어 오긴 왔지만 입도 못 뗄 만큼 무섭단 말이냐, 도대체 왜 그래? 털어놓아라. 입을 열라고, 너 말 못 해?”
그가 호통 쳤다.
그렇다. 페이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말이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입술만 덜덜 떨렸다.
“세상에, 울지 마라. 난 울고불고하는 건 질색이야. 할 말이 있으면 말을 해. 말을 해버려. 저 애가 귀라도 먹었나? 날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난 인간이야. 꼬리 같은 건 달리지 않았다고. 넌 누구냐, 넌 누구야?”
노먼이 또 소리를 질렀다.

노먼의 목소리는 항구에서도 들릴 지경이었다. 부엌에서 들려오던 소리도 멎었다. 윌슨 부인이 눈과 귀를 모두 쫑긋 세우고 지켜보고 있었다. 노먼은 햇볕에 그을린 그 커다란 손을 무릎에 올려놓고 몸을 앞으로 기울인 채 페이스의 창백하고 쪼그라든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 모습이 꼭 거대한 악마가 아이를 넘겨다보는 동화에 나오는 한 장면 같았다. 페이스는 노먼이 자기를 뼈까지 통째로 한 입에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전 페이스 메러디스예요.”
페이스가 겨우 소리를 내 말했다.
“메러디스라고? 그렇다면 목사 아이들 중 하나인 모양이구나. 나도 네 이야기는 들었다. 돼지를 타고 달리고, 안식일도 지키지 않았다지? 신도 났겠다!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일로 왔냐, 응? 이 늙은 불신자에게 무슨 볼일이 있냐는 말이다. 난 목사에게 아쉬울 것도 없고, 목사에게 줄 것도 없거든. 네가 원하는 건 뭐야, 응?”
페이스는 당장 달아나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솔직하고 간단하게 찾아온 이유를 밝혔다.
“저는 더글러스 아저씨가 교회에 다시 나와서 목사 월급을 내달라고 부탁하러 왔어요.”
노먼은 페이스를 노려보더니 다시 호통 치기 시작했다.
“이런 뻔뻔스러운 아이를 보게나! 누가 시키던? 누가 널 여기로 보냈어?”
“아무도 시키지 않았어요.”
페이스가 말했다.
“거짓말이야. 내게 거짓말하지 말라고. 누가 널 보냈니? 너희 아빠는 아니야. 그 사람은 그럴 배짱이 없어. 감히 널 보내서 그런 말을 할 사람이 못 된다고. 틀림없이 글렌 마을의 정신 빠진 노처녀 할멈들 짓일 거야, 그렇지, 엉?”
“아니에요. 저, 저 스스로 온 거예요.”
“내가 바본 줄 알아?”
노먼이 소리쳤다.
“아니에요, 전 더글러스 아저씨가 신사인 줄 알았어요.”
페이스가 작은 소리지만 분명 어떤 비난의 어조도 없이 말했다.
노먼 더글러스가 불같이 화를 냈다.
“너나 잘해. 네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더 이상은 한 마디도 듣고 싶지 않다. 네가 어린아이가 아니었다면 남의 일에 참견하면 어떤 꼴을 당하게 되는지 가르쳐주었을 거야. 목사나 의사에게 볼일이 있으면 내가 사람을 보낸다. 그때까지는 그런 사람과는 상종하고 싶지도 않다. 알아들었어? 그럼 네 집으로 가버려, 이 숙맥아.”
페이스는 나왔다. 비틀비틀 계단을 내려와 뜰을 지나고 대문을 나와 길로 나왔다. 오솔길을 절반쯤 오자 두려움이 사라지면서 분노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오솔길 끝까지 오자 이제까지 느껴본 적 없는 격렬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노먼 더글러스에게 당한 모욕이 페이스의 영혼을 불태우며 활활 타올랐다. 집으로 가버리라고! 안 갈 거야! 곧바로 다시 돌아가서 그 늙은 악당에게 내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주겠어. 내가 숙맥이라고?
페이스는 주저 없이 몸을 돌려 오던 길을 돌아갔다. 베란다에는 아무도 없었고 부엌문도 닫혀 있었다. 페이스는 노크도 하지 않고 문을 벌컥 열었다. 노먼 더글러스는 저녁을 먹으려고 식탁에 앉아 있었지만 여전히 손에는 신문이 들려 있었다. 페이스는 결연히 방으로 걸어 들어가 그의 손에서 신문을 잡아채 마룻바닥에 내던지고는 밟아버렸다. 그런 다음 정면으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흥분으로 얼굴은 빨개졌고 눈에서는 불꽃이 번쩍였다. 이제 보니 이 아이는 아주 예쁘게 생겼고 성질도 대단했다.
“왜 되돌아왔어?”
노먼 더글러스가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화가 났다기보다는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듯 당황한 표정이었다.
페이스는 다른 사람 같으면 마주 쳐다보지도 못할 눈을 전혀 기죽지 않고 똑같이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쏘아보아 주었다.
페이스가 또렷하고 낭랑하게 울리는 소리로 외쳤다.
“난 내가 아저씨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주러 왔어요. 난 아저씨가 무섭지 않아요. 아저씨는 무례하고 나쁜 폭군에다 불쾌한 사람이에요. 수잔 아줌마는 아저씨가 죽으면 지옥에 갈 거라고 했어요. 난 그 말을 듣고 아저씨가 안됐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아저씨 부인은 10년 동안이나 새 모자를 사지 못했다죠? 아주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것도 무리가 아니에요. 난 이제부터 아저씨를 볼 때마다 째려봐 줄 거예요. 내가 아저씨 뒤에 있을 때마다 그럴 거라는 걸 잊지 마세요. 우리 아빠 책에 악마 그림이 나오는데 그 그림 밑에 아저씨 이름을 써줄 거예요. 아저씨는 나쁜 흡혈귀예요. 아저씨한테 옴이나 생겨버렸으면 좋겠어요.”
페이스는 흡혈귀가 뭔지 또 옴이 뭔지도 몰랐지만, 수잔 아줌마가 곧잘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어서 그 말투로 미루어 나쁜 것이라고만 짐작하고 그렇게 말했다. 노먼 더글러스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았지만 페이스의 악담을 가만히 입 다물고 듣고만 있었다. 페이스가 숨을 고르려고 잠시 말을 멈추고 발을 쾅쾅 구르자 그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손으로 무릎을 탁 소리가 나게 치며 말했다.
“넌 배짱이 있는 아이구나. 난 배짱 있는 애가 좋아. 자, 좀 앉아라, 앉아.”
“싫어요.” 
페이스의 눈이 더욱 불타올랐다. 노먼이 자기를 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한 번 불같이 화를 내는 것도 좋겠지만 참기로 했다. “난 아저씨 집에 앉고 싶지 않아요. 당장 돌아가겠어요. 하지만 내가 아저씨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똑똑히 말해주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아서 돌아온 거예요.”
“나도 그래. 나도 하고 싶은 말은 다 해버려야 속이 시원하지.”
노먼은 소리 죽여 웃었다.
“나는 네가 마음에 든다. 참으로 대단한 아이구나. 혈기가 넘기고 아주 씩씩해. 내가 너보고 숙맥이라고 했니? 세상에, 넌 절대로 숙맥이 아니다. 앉아라. 처음부터 좀 그렇게 나오지 그랬니, 왜? 그래, 너 악마 그림 밑에 내 이름을 써놓을 거야, 정말 그럴 거야? 하지만 악마는 검은색이잖니. 난 붉은색이라서 악마로는 안 돼. 안 된다고. 그리고 내가 옴이나 생겼으면 좋겠다고? 하느님, 맙소사, 내가 어렸을 때 옴을 앓았단다. 나더러 또 옴을 앓으라고 하지는 말아다오. 앉아라. 좀 앉아. 우리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좀 나누자.”
“아니요, 필요 없어요.”

페이스가 거만하게 말했다.
“아니야. 이야기를 좀 하자. 자, 앉아, 내가 사과할게. 내가 사과한다고. 내가 잘 몰랐구나. 미안하다. 남자가 이 이상은 사과할 수 없지. 그만 잊고 용서하렴. 자, 악수를 하자. 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겠다니! 아니, 해야 해! 자, 이것 봐라, 얘야. 네가 나와 악수를 하고 식사를 같이 해준다면 내가 전에 냈던 만큼 목사 월급을 내고 매달 첫째 주 일요일에는 교회에 가서 알렉 데이비스 부인이 군소리 못 하게 해주마. 그 여자 입을 다물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야. 어때, 나랑 흥정해볼까?”
괜찮은 흥정일 듯 싶었다. 페이스는 그 괴물과 악수를 하고 같이 식탁에 앉았다. 페이스의 화는 가라앉았다. 사실 페이스도 화를 오래 내는 성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눈은 여전히 흥분으로 빛나고 볼도 상기되어 있었다. 노먼 더글러스는 그런 페이스를 놀라운 듯 바라보았다.
“윌슨 부인, 부인이 만든 최고로 좋은 설탕 절임을 내오시오.”
노먼 더글러스가 명령했다.
“그리고 그만 부루퉁해 있고. 윌슨 부인! 어떻소, 한번 싸워보니까. 큰 소리 치고 싸우고 나니 속이 후련하오? 하지만 싸우고 난 다음에는 개운치 못한 감정을 남겨서는 안 돼요. 감정을 남기지 말라고! 난 그런 건 딱 질색이오. 난 성질부리는 여자는 견뎌도 질질 짜는 여자는 못 봐요. 자, 얘야, 여기 감자와 고기 요리 좀 먹어봐라. 윌슨 부인은 이 요리에 근사한 이름을 붙이지만 난 그냥 ‘꿀꿀이 죽’이라고 부르지. 뭐든 정체를 모르겠는 것은 무조건 꿀꿀이 죽이라고 부르고, 뭐든 맛이 희한한 것은 ‘시금털털’이라고 불러. 윌슨 부인의 차는 맹세코 ‘시금털털’이야. 부인이 차를 우엉으로 만드는 모양이니 너무 시꺼먼 물은 마시지 마라. 여기 우유 좀 넣고. 네 이름이 뭐라고 했지?”
“페이스요.”
“그런 이름 말고, 그런 이름은 말고 말이다. 난 그런 이름은 참을 수 없어. 다른 이름은 없니?”
“없는데요.”
“그 이름은 마음에 들지 않아. 마음에 안 들어. 아무런 활기가 없어. 게다가 그 이름은 우리 지니 숙모를 생각나게 해. 숙모는 딸 셋을 낳아서 이름을 페이스, 호프, 체러티라고 지었지. 그런데 페이스는 아무것도 믿지 않았고, 호프는 염세주의자였고, 체러티는 아주 구두쇠였단다. 넌 레드 로즈라고 부르는 게 좋겠다. 넌 화가 나면 꼭 빨간 장미가 되잖니. 난 너를 레드 로즈라고 부르겠다. 그리고 넌 내가 교회에 나가겠다고 약속하게 했었잖아. 하지만 한 달에 딱 한 번이다. 잊지 말거라. 한 달에 한 번만이야. 자, 이제 본론을 말해볼까? 난 교회에 다니면서 일 년에 백 달러를 냈었지. 내가 이백 달러를 낸다면 교회에 안 나가도 되는 걸로 해주겠니? 자, 생각해봐!”
“안 돼요. 안 돼요. 난 아저씨가 교회에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페이스가 새침하게 얼굴에 보조개를 만들며 말했다.
“그래, 약속은 약속이지. 일 년에 열두 번 정도야 견딜 수 있을 거야. 내가 다시 교회에 나가면 다들 얼마나 야단법석을 떨까! 그리고 그 수잔 베이커가 내가 지옥에 갈 거라고 했다고? 너도 내가 지옥에 갈 거라고 생각하니, 그래?”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
페이스가 당황해 말을 더듬거렸다.

“왜 그러길 바라지 않는다는 거지? 왜 내가 지옥에 가길 바라지 않는다는 거야? 이유를 말해봐라, 얘야. 이유를.”
“그건, 지옥에 가면 무척 불편할 것 같아서요.”
“불편해? 그건 네가 뭘 편하다고 생각하는지에 따라 다른 거야. 난 천사들에 진력이 났다. 그 늙은 수잔의 머리에 후광이 둘러져 있다고 생각해봐!”
페이스는 정말로 그 장면을 그려보았고 웃음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노먼이 그것보라는 듯 페이스를 바라보았다.
“너도 웃기지? 아, 넌 참 마음에 드는 아이다. 그리고 이제 교회문제인데, 너희 아빠는 설교를 잘하시냐?”
“그럼요, 아주 훌륭하게 설교를 하지요.”
페이스가 충직하게 말했다.
“그 사람이, 그래? 내가 확인을 해보겠다. 그 사람이 실수는 안 하는지 내가 보겠어. 내 앞에서는 실수를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거야. 내가 흠을 잡아낼 테니까. 내가 꼼짝 못 하게 할 거야. 따지고 들겠어. 교회에 나가는 일도 재미있겠구먼. 아빠가 지옥에 관한 설교를 한 적도 있니?”
“아, 아니요.”
“거 참 아쉽구나. 난 지옥에 관한 주제로 설교하는 것이 좋던데. 나를 기분 좋게 하려거든 6개월에 단 한 번이라도 지옥에 관한 힘찬 설교를 하라고 전해라. 무시무시한 불길이 맹렬하게 치솟는 지옥 이야기일수록 좋지. 연기가 자욱하면 더 좋아. 그러면 노처녀들도 아주 즐거워할 거야. 늙은 노먼 더글러스를 흘끔거리면서 이렇게 생각하겠지. ‘지옥은 바로 당신을 위한 거요. 하느님의 버림을 받은 늙은이. 바로 당신을 위해 마련된 거라고!’ 네 아버지가 지옥에 관한 설교를 할 때마다 내가 10달러씩 더 내마. 자, 윌슨 부인이 잼을 가져왔군. 잼 좋아하니? 이건 아무렇게나 만든 것이 아니야. 맛을 봐라!”
페이스는 노먼이 한 스푼 가득 퍼준 잼을 순하게 받아먹었다. 운 좋게도 그것은 무척 맛이 좋았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자두 젬이다.”
커다란 그릇을 가득 채워 페이스 앞에 놓아주며 노먼이 말했다.
“맛있다니 나도 기쁘다. 두세 단지 가져가도록 해라. 난 쩨쩨한 사람이 아니야. 난 쩨쩨하게 살았던 적도 없어. 악마라고 해도 그 점에서는 날 옭아맬 것을 찾아내지 못할 거야. 헤스터가 10년 동안 모자를 사지 않은 것은 내 탓이 아니야. 자신이 결정한 일이었어. 모자 살 돈을 아껴서 중국 사람들에게 주려는 거였지. 난 선교헌금은 한 번도 내본 적이 없어. 앞으로도 그럴 거야. 그 문제로 나를 못살게 굴 생각은 마라. 목사 월급으로 1년에 100달러를 내고 한 달에 한 번씩 교회에 나가는 것으로 됐어. 선량한 이교도를 가련한 그리스도교 신자로 개종시킬 생각일랑 말라고. 나 같은 사람들은 천국에도 지옥에도 맞지 않아. 그 어느 쪽도 다 망쳐놓기만 할 거야. 완전히 망치고말고. 이봐, 윌슨 부인, 아직도 얼굴을 찌푸리고 있나? 하여간 여자들은 토라지기도 잘한다니까! 난 평생 토라지는 일은 없어. 있는 대로 한번 성질을 부리고 말면 그뿐이지. 천둥 번개가 쳤어도 다시 해가 나오면 그만 상쾌한 하루를 맞아야지.”
저녁 식사를 마치자 노먼은 페이스를 마차로 데려다주겠다고 고집했다. 마차에는 사과, 양배추, 감자, 호박, 잼 단지를 가득 실었다.

“우리 집 헛간에 귀여운 수고양이 새끼가 있는데 갖고 싶다면 주마, 어떠냐?”
노먼이 물었다.
“아니, 필요 없어요. 전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리고 저한테는 수탉이 있어요.”
페이스는 딱 잘라 말했다.
“아니야, 들어봐라, 얘야. 고양이는 수탉이랑은 달라. 누가 수탉을 애완동물로 삼는다던? 새끼 고양이가 더 귀엽다고. 난 그 녀석에게 좋은 집을 찾아주고 싶단다.”
“안 돼요. 마사 이모할머니가 고양이를 갖고 있는데 그 녀석이 새끼 고양이를 데리고 가면 죽일지도 몰라요.”
노먼은 어쩔 수 없이 포기했다. 페이스는 노먼이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하여 성질이 거친 두 살짜리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왔다. 노먼은 목사관 부엌 입구에 페이스를 내려주고 싣고 온 물건들을 베란다에 내려놓은 다음 “한 달에 한 번뿐이야. 딱 한 번뿐이라고. 잊지 마라.” 하고 큰 소리로 떠들고는 돌아갔다.
페이스는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회오리바람 속에 휘말려 들었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온 것처럼 어찔어찔하면서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페이스는 너무나 안도했고 감사했다. 이제 글렌과, 묘지와, ‘무지개 골짜기’와 작별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지만 페이스는 댄 리즈가 자기를 돼지 계집애라고 놀리던 불쾌한 기분만은 어쩌지 못하고 잠재의식에 담아둔 채로 잠이 들었다. 앞으로 그 아이는 기회만 오면 자기를 돼지 계집애라고 부르며 놀릴 것이다. 마치 자기가 그 기분 나쁜 별명을 갖고 태어난 아이이기나 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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