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7권 27~28

나단비 | 2024.04.16 15:34:41 댓글: 0 조회: 61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61485
27
성가 음악회






아무리 미스 코넬리아가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고는 해도 목사관 아이들이 또다시 벌인 어이없는 행동에는 역시 마음이 편치 못했다. 사람들 앞에서는 그 상황을 훌륭하게 모면했다. 수선화가 필 무렵 앤이 했던 웅변을 더 힘주어 역설해 소문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어리석었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 연설을 들은 사람들은 아이들 장난을 갖고 자기네가 너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던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미스 코넬리아는 좀처럼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아이들의 행동에 앤을 붙들고 불편한 심정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앤, 저 아이들이 지난주 목요일 저녁에 묘지에서 음악회를 열었다더군요. 감리교인들이 기도회를 열고 있는 동안에요. 한 시간이나 헤저키어 폴록의 묘석에 앉아 노래를 불렀대요. 물론 거의 찬송가를 불렀긴 해요. 다른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면 뭐 그리 문제 될 것도 없었을 거예요. 그런데 글쎄 아이들이 <폴리 월리 두들>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부르는 것으로 그 음악회를 마무리했다는군요. 데컨 벡스터가 기도를 올리는 동안에요.”
“나도 그날 밤 거기 있었어요. 내가 사모님에게 특별히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도 아이들이 왜 하필이면 그날 저녁을 골랐는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죽은 사람들이 누운 곳에 앉아서 그런 경박한 노래를 목청껏 부르는 것을 듣고 있으니 온몸에 오싹 소름이 돋더군요.”
수잔이 말했다.
“수잔이 감리교인 기도회에 가서 뭘 했는지 궁금하군요.”
미스 코넬리아가 신랄하게 말했다.
“난 감리교파에 마음이 끌린 적은 없어요. 그리고 난 감리교인에게 기죽거나 하지도 않았다는 말을 하려던 참인데 부인이 내 말을 가로막고 나서니 기분이 좋질 않군요. 내가 교회에서 나오는데 데컨 벡스터 부인이 ‘저 얼마나 망신스러운 일이에요!’ 하고 말하더군요. 난 그 부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저 아이들은 모두 노래를 아주 잘하는군요. 감리교회 성가대하고는 비교가 안 되게요, 벡스터 부인. 여기 성가대는 기도회에서까지 목소리를 맞출 생각은 없는 모양이에요. 성가대 합창이 제대로 맞는 때는 일요일뿐이잖아요!’ 하고 대꾸해주었어요. 그 말을 듣고 부인이 찍 소리도 못 하더군요. 내가 그 부인의 기를 제대로 꺾어놓았다 싶더라고요. 그렇더라도 그 부인의 기를 완전히 꺾어놓을 수도 있었는데요, 사모님. 그 <폴리 월리 두들> 노래만 부르지 않았다면요. 그 노래를 묘지에서 부르다니 정말 한심한 일이에요.”
수잔이 야무지게 말했다.
“거기 묻혀 있는 사람 중에도 살아 있을 때 <폴리 월리 두들> 노래를 부른 사람이 있었을 텐데요, 수잔. 그 노래를 듣고 반가웠을지도 몰라요.”
길버트가 말했다.

미스 코넬리아가 책망하듯 길버트를 바라보고 나중에 때를 보아서 앤더러 저런 말은 좀 삼가라는 충고를 의사에게 해주라고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 말을 했다간 의사 노릇에 지장을 줄 게 뻔했다. 사람들이 길버트가 정통적인 믿음을 갖지 않았다고 의심할지 모른다. 마셜이야 길버트보다도 더 심각한 말을 습관적으로 잘도 하지만 적어도 마셜은 공인이 아니었다.
“메러디스 목사는 언제나 창문을 열어둔 채 서재에 있는데 왜 아이들이 노래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모르겠어요. 물론 언제나처럼 책에 푹 빠져 있었겠지만요. 하지만 내가 어제 그 문제로 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어떻게 감히 그럴 수가 있어요. 마셜 엘리엇 부인?”
수잔이 책망했다.
“감히라니요! 누군가 나서야 해요.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요. 목사님은 페이스가 <저널>에 편지를 낸 일도 전혀 몰라요. 목사님에게 그 이야기를 해준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지요. 물론 목사님은 <저널> 따위를 쳐다보지도 않고요. 하지만 앞으로라도 다시는 그런 일이 없으려면 목사님도 이 일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난 생각해요. 목사님도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보겠다고 했어요. 문을 나서자마자 그런 생각을 싹 잊어버리는 것이 문제이기는 하지만요. 목사님은 유머감각이 없어요, 앤. 정말이에요. 목사님이 지난 일요일에 설교하면서 자녀 양육법에 관해 이야기했죠. 아주 훌륭한 설교였어요. 하지만 교회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왜 목사님은 자기가 가르치는 것을 스스로는 행하지 못할까 하고 생각했어요.”
메러디스 씨가 자기가 한 이야기를 금방 다 잊어버렸을 거라는 미스 코넬리아의 생각은 틀렸다. 메러디스목사는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집에 돌아갔고, 아이들은 아이들이 돌아다니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밤늦은 시간까지 ‘무지개 골짜기’에서 놀다 들어왔다. 메러디스 씨는 아이들을 모두 서재로 불러들였다.
아이들은 무슨 일일까 궁금해하며 서재로 들어갔다. 아빠가 자기들을 모두 서재로 부르는 일은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최근에 꾸중 들을 만한 일을 했던가,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 봐도 생각나는 일은 없었다. 칼은 이틀 전 밤에 마사 할머니의 초대로 저녁 식사를 하러 왔던 피터 플래그 부인의 비단 드레스에 잼을 떨어뜨렸다. 하지만 아빠는 그것을 보지 못했고 플래그 부인은 아주 마음씨가 고운 분이므로 그 일로 소란을 피우지도 않았다. 그리고 칼은 그 벌로 그날 밤 내내 우나의 옷을 입고 있었다.
우나는 아빠가 미스 웨스트와 결혼하겠다는 이야기를 하려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우나의 심장이 세차게 고동치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지만 아빠의 얼굴이 몹시 굳어 있고 슬퍼 보이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그 문제는 아닌 모양이었다.
“얘들아, 난 몹시 괴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너희들이 지난 목요일 저녁때 묘지에 앉아 상스러운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 사실이냐? 감리교회에서 기도회를 하는 중에 말이다.”
“아빠, 우리는 그날이 감리교회 기도회 날인지 몰랐어요.”
제리가 몹시 난감해하며 외쳤다.
“그렇다면 그 말이 사실이었구나. 너희들이 그런 짓을 했다는 게?”
“하지만 아빠, 왜 상스러운 노래라고 하시죠? 우리는 찬송가를 불렀어요. 우린 성가 음악회를 열었다고요. 그게 왜 나빠요? 감리교회 기도회 밤이라는 건 몰랐어요. 전에는 화요일에 했으니까, 목요일로 바꾼 걸 자꾸만 까먹어요.”
“너희들 찬송가 외엔 정말 아무 노래도 부르지 않았단 말이냐?”
“아 참, 그러고 보니 마지막에 <폴리 월리 두들>을 불렀어요. 페이스가 마지막 노래는 즐거운 걸로 부르자고 했거든요.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누구에게 피해를 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어요.”
제리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음악회를 열자고 한 것은 저였어요, 아빠. 감리교회에서 3주일 전에 음악회를 열었어요. 우리도 그런 음악회를 따라 해보면 재미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감리교인들은 기도를 드렸지만 우리들은 기도는 빼버렸어요. 사람들이 우리가 묘지에서 기도드리는 것이 못된 짓이라고 한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우리가 음악회를 여는 동안 아빠도 내내 여기 서재에 계셨어요.”
너무 제리에게만 뒤집어씌우는 것 같아 페이스가 나서 말했다. 그리고 페이스가 한마디 더 덧붙였다.
“하지만 우리를 혼내지 않으셨잖아요.”
“난 너희들이 무얼 하는지 몰랐다. 나도 변명의 여지가 없어. 너희들보다는 나를 비난해야 마땅한 일이야. 난 이제야 그걸 깨달았다. 하지만 왜 마지막에 그런 노래를 불렀니?”
“생각을 못 했어요. 잘못했어요, 아빠. 정말이에요. 우리를 혼내 주세요. 우리는 혼이 나야 마땅해요.”
페이스에게는 ‘선행 클럽’ 회의를 하면서 생각이 부족하다고 그렇게 야단을 했건만 이것은 말도 안 되는 변명이라고 생각하며 제리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메러디스 씨는 아이들을 혼내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 작은 범죄자들을 가까이 불러 모아 부드럽게 타일렀다. 아이들은 모두 후회와 부끄러움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고 다시는 그런 어리석고 생각 없는 짓은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우리 스스로 단단히 벌을 주어야 해. 내일 아침 일찍 ‘선행 클럽’ 회의를 열어서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하자. 아빠가 그렇게 속상해하시는 것은 처음 봤어. 감리교인들도 기도회를 이날저날로 옮기지 말고 한 날로 가만 좀 놔뒀으면 좋겠어.”
제리가 계단을 내려오며 속삭였다.
“그나저나 내가 걱정했던 일은 없어서 다행이야.”
우나가 중얼거렸다.
아이들 뒤로 메러디스 씨는 얼굴을 팔에 묻고 서재 책상 위에 엎드렸다.
“하느님, 저를 도와주소서! 전 너무 형편없는 아버지입니다. 로즈마리! 당신이 날 사랑해주기만 한다면!”
그가 중얼거렸다.





28
단식일






다음 날 학교에 가기 전 ‘선행 클럽’ 특별회의를 열었다. 다양한 의견이 나왔지만 단식이 가장 적당한 벌이라고 결정되었다.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는 거야. 나는 온종일 굶으면 어떤 느낌이 드는지 궁금했는데 잘됐어. 그걸 알아낼 수 있는 좋은 기회야.”
제리가 말했다.
“단식일을 언제로 하지?”
우나가 물었다. 우나는 단식하는 것쯤은 아주 쉬운 일이라고 생각했고, 제리나 페이스가 어째서 좀 더 어려운 것을 궁리해내지 않았을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월요일로 하자. 일요일 점심은 상당히 잘 먹는 편이지만 어차피 월요일에는 별로 먹을 것도 없잖아.”
페이스가 말했다.
“안 돼. 단식일을 가장 쉬운 날로 정해서는 안 돼. 가장 어려운 날로 정해야 하는 거야. 그러니까 일요일로 해야 해. 우리는 일요일이면 차가운 디토 대신 소고기구이를 먹잖아. 디토를 굶는 일은 벌이라고 할 수도 없어. 우리 다음 일요일을 단식일로 정하자. 그날이 적당해. 아빠가 로브리지 목사님이랑 교환 설교를 하러 가는 날이라서 저녁까지 돌아오시지 못할 거야. 마사 이모할머니가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내려고 하면 솔직하게 우리 영혼을 위해서 단식하는 거라고 말해주면 돼. 그것은 성경에 나와 있는 말이니까 할머니도 간섭하려 들지 않을 거야.”
제리가 외쳤다.
마사 이모할머니는 정말 간섭하지 않았다. 단순히 아이들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저 쓸데라고는 없는 것들이 이번에는 무슨 바보 같은 짓을 꾸미는 거야?” 하고 중얼거리고 말았다. 메러디스 씨는 아침 일찍 식구들이 일어나기도 전에 아침도 먹지 않고 집을 나섰다. 물론 메러디스 씨가 아침을 굶는 일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절반은 자기가 잊어버려서 못 먹었고, 절반은 아무도 아침 먹으라고 챙겨주는 사람이 없어서였다. 그리고 마사 이모가 차려주는 아침이야 안 먹는다고 해서 서운할 것도 없었다.
심지어는 ‘쓸데라고는 없는 것들’도 메리 밴스가 멍울이 진 죽과 푸르뎅뎅한 우유라고 경멸하던 아침을 먹지 않았다고 해서 결핍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하지만 점심이 되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아이들은 모두 극심하게 배가 고팠고, 목사관을 꽉 채운 소고기 굽는 냄새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고기가 덜 구워졌더라도 한 입만이라도 먹고 싶은 생각에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절망적으로 묘지로 달아났다. 그래도 여전히 우나는 창문으로 보이는 식당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로브리지 교회 목사님이 앉아서 유유히 고기를 먹고 있었다.
“아주, 아주 작은 고기 조각 하나라도 먹었으면 좋겠어.”

우나는 입맛을 다셨다.
“그런 말 하지 마. 물론 힘들지만 이건 벌이야. 나는 지금 조각해놓은 가짜 음식이라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지만 불평하지 않잖아. 뭔가 다른 생각을 하자. 위장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려야 해.”
제리가 명령했다.
저녁이 되자 이제 허기 때문에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배가 고픈 느낌에도 익숙해져 버린 모양이야. 난 지금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 들어. 속이 텅 비어버린 것 같아. 하지만 배가 고픈 것 같지는 않아.”
페이스가 말했다.
“내 머릿속도 이상해. 가끔씩 모든 것이 빙글빙글 돌아.”
우나가 말했다.
그래도 우나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교회에 갔다. 만일 메러디스 씨가 자기 설교에 그렇게 완전히 빠져 있지 않았다면 설교단 아래 목사 가족석에 앉은 우나의 창백하고 눈마저 쑥 들어간 얼굴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으리라. 그러나 메러디스 씨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으며 더욱이 오늘 저녁 설교는 다른 때보다 더 길었다. 메러디스 씨가 막 마지막 찬송가를 부르자고 했을 때 우나는 목사관 가족석 의자에서 바닥으로 쓰러져 버렸다.
클로 장로 부인이 맨 먼저 달려왔다. 부인이 놀라 창백해진 페이스의 팔에서 작고 마른 몸을 받아 안아 성구실로 데려갔다. 메러디스 씨는 찬송가고 뭐고 다 잊어버리고 미친 듯 우나에게 달려왔다. 신도들은 알아서 예배를 끝내고 제각각 흩어졌다.
“클로 부인, 우나는 죽었나요? 우리가 우나를 죽인 건가요?”
페이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우나가 도대체 왜 이러니?”
창백해진 목사가 물었다.
“그냥 기절한 것 같아요. 아이고, 여기 의사 선생님이 있네요, 천만다행이에요.”
클로 장로 부인이 말했다.
길버트도 우나의 의식을 되돌리기가 쉽지 않았다. 한참 동안이나 애를 쓴 다음에야 우나가 겨우 눈을 떴다. 그런 다음 길버트는 우나를 목사관으로 데려다주었고 그 뒤를 페이스가 훌쩍거리며 따랐다.
“우나는 배가 고픈 거예요. 오늘 아무것도 먹지 않았거든요. 우리 모두 아무것도 먹지 않았어요. 우리는 단식 중이거든요.”
“단식 중이라고!”
메러디스 씨가 외쳤다.
“단식?” 
의사도 외쳤다.
“네. 묘지에서 <폴리 월리 두들> 노래를 부른 벌로요.”

페이스가 말했다.
“얘야, 난 그 일로 너희 스스로 벌하는 것은 원치 않아. 난 그냥 너희를 좀 야단친 것뿐이야. 너희들이 모두 뉘우쳐서 내가 용서했잖니.”
메러디스 씨가 고통스럽게 말했다.
“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벌을 받아야 했어요. 그것이 우리 규칙이에요. 우리 선행 클럽 규칙이요. 우리가 뭐든 잘못을 하면요, 아빠에게 피해를 주는 잘못 같은 거라도요, 우리는 스스로에게 벌을 주어야 해요. 우리는 스스로를 가르치고 있다고요. 우리를 가르칠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요.”
페이스가 설명했다.
메러디스 씨는 신음을 내뱉었다. 하지만 의사는 안도하는 기색으로 우나 곁에서 일어섰다.
“그렇다면 이 아이는 음식을 먹지 못해서 쓰러진 거군요. 클로 부인, 이 아이에게 먹을 것 좀 가져다주시면 안 될까요? 그리고 페이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이들 모두 뭘 좀 먹게 하는 게 좋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기절하는 아이가 더 나올지도 모르니까요.”
“우나에게 단식을 시키는 게 아니었어요. 제리 오빠와 저만 벌을 받았어도 됐는데. 저희 둘이 음악회를 열자고 했고, 저희는 우나보다 나이도 위니까요.”
페이스가 후회하며 말했다.
“저도 함께 <폴리 월리 두들> 노래를 했어요. 그러니 저도 벌을 받아야 해요.”
우나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클로 부인이 컵에 우유를 담아가지고 왔다.
페이스와 제리와 칼은 조용히 부엌으로 갔고 메러디스 씨는 서재로 물러갔다. 그리고 그는 불도 켜지 않고 오래오래 혼자 쓰디쓴 생각에 잠겨 앉아 있었다. 아이들은 자기들을 가르칠 사람이 없어 스스로 가르치려고 했다. 아이들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있어도 손을 내밀어 이끌어줄 사람도 조언해줄 사람도 없어 고통을 겪고 있었다.
페이스가 순진무구하게 하던 말들이 아버지의 가슴에 대못이 되어 박혔다. 아이들을 돌보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 작은 영혼들을 위로해주고 그 작은 몸을 보살펴줄 이가 없었다. 성구실 소파에 누워 있던 우나의 얼굴은 얼마나 창백하고 연약해 보였던가! 그 조그맣고 마른 손과 몸이라니. 후하고 한 번만 불면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가 버릴 것처럼 보였다. 가엾은 우리 우나, 그 아이는 아내 세실리아가 죽어가면서 잘 키워달라고 애절하게 부탁하고 간 아이인데.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로 아까 정신을 잃은 작은딸 옆에 있었던 때만큼 괴롭고 두려웠던 적이 없었다.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엘리자베스 커크에게 결혼해달라고 부탁해볼까? 엘리자베스는 좋은 여자고 아이들도 잘 돌보아줄 것이다. 지금 자기가 로즈마리 웨스트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면 아마도 엘리자베스에게 청혼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마음을 없애버리지 않는 이상, 다른 여자에게 결혼하자고 할 수는 없었다. 그는 로즈마리를 향한 마음을 없앨 수가 없었다. 그러려고 해보았지만 불가능했다. 그날 밤 로즈마리는 교회에 와 있었다. 킹스포트에서 돌아온 뒤 처음이었다. 설교를 막 마쳤을 때 꽉 들어찬 사람들 속에서 맨 뒤에 앉아 있던 로즈마리의 얼굴을 얼핏 보았다. 그의 심장이 세차게 고동쳤다. 성가대가 봉헌송을 부르는 가운데 헌금을 걷는 동안 목사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앉아 있었다. 지난번 청혼했던 밤 이후로 로즈마리를 보지 못했다. 찬송가를 부르려고 일어섰을 때 그의 손은 떨리고 창백하던 얼굴은 붉어졌다. 그 순간은 우나가 기절한 일이며 세상 모든 일이 그의 마음에서 사라졌다. 지금 서재에 혼자 앉아 있는 동안 그 기억이 세찬 파도처럼 되돌아왔다. 그에게 로즈마리는 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의 여자였다.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아이들 때문이라 하더라도 그럴 수는 없었다. 그는 이 무거운 책임을 혼자서 져야 했다. 더 좋은, 더 책임감 있는 아버지가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아이들에게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문제가 있으면 달려와서 모두 털어놓으라고 얘기해야 한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램프를 켠 다음 두꺼운 새 책을 펼쳤다. 종교계에 논쟁을 불러일으킨 책이었다. 마음이 가라앉도록 제1장만 읽기로 했다. 5분이 지나자 그는 이 세상의 일이나 괴로움은 모두 잊고 말았다.



추천 (0) 선물 (0명)
IP: ♡.252.♡.103
23,518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더좋은래일
2024-04-29
0
22
더좋은래일
2024-04-29
0
29
chillax
2024-04-29
0
33
chillax
2024-04-29
0
25
chillax
2024-04-29
0
20
더좋은래일
2024-04-28
0
41
더좋은래일
2024-04-27
4
95
더좋은래일
2024-04-26
4
67
더좋은래일
2024-04-25
3
98
chillax
2024-04-25
1
60
더좋은래일
2024-04-24
3
92
더좋은래일
2024-04-24
3
71
더좋은래일
2024-04-24
3
79
chillax
2024-04-24
1
51
더좋은래일
2024-04-23
3
89
chillax
2024-04-23
1
113
더좋은래일
2024-04-22
3
296
chillax
2024-04-22
1
212
더좋은래일
2024-04-21
3
353
나단비
2024-04-20
1
858
chillax
2024-04-19
2
783
나단비
2024-04-19
0
737
나단비
2024-04-19
0
84
나단비
2024-04-19
0
63
나단비
2024-04-19
0
64
나단비
2024-04-19
0
54
chillax
2024-04-18
2
156
나단비
2024-04-18
0
49
나단비
2024-04-18
0
54
나단비
2024-04-18
0
57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