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8권 11~12

나단비 | 2024.04.17 15:04:29 댓글: 0 조회: 76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61684
11
선과 악






크리스마스가 되자 대학에 다니던 아들딸이 모두 돌아와서 ‘잉글사이드’에는 다시 유쾌한 소리가 떠들썩하니 울렸다. 하지만 모두가 모인 것은 아니었다.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 중에 빠진 사람이 생겼다. 야무지게 다문 입매에 두려움을 모르는 눈을 한 젬은 멀리 가 있었다. 릴라는 젬의 빈자리를 바라볼 수 없었다. 수잔이 전과 다름없이 젬의 자리도 마련해야 한다고 우겨 젬이 어렸을 때부터 써오던 비틀어진 작은 냅킨꽂이와 ‘초록 지붕 집’의 마릴라 할머니가 준 높다랗고 이상하게 생긴 잔을 식탁에 놓았다. 젬은 항상 그 잔을 쓰겠다고 고집하고는 했었다.
“우리 젬도 자기 자리가 있어야 해요, 사모님. 걱정이나 하고 있어선 안 돼요. 젬의 마음은 틀림없이 이곳에 와 있을 테고, 내년 크리스마스에는 몸도 돌아올 거예요. 봄이 되어 대공세를 퍼붓게 될 때까지만 기다리자고요. 그럼 눈 깜짝할 사이에 전쟁은 끝나버릴 거예요.”
수잔이 단호하게 말했다.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다. 하지만 즐거운 척 떠들고 있는 사람들 마음 한구석에는 그림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월터는 크리스마스 내내 조용하고 침울해 보였다. 월터가 릴라에게 레드먼드 대학교에서 받은 잔혹한 익명의 편지를 보여주었다. 애국심으로 분개한 편지라기보다는 악의적인 것이 분명해 보이는 내용이었다.
“그래도 이 편지에 쓰인 것은 모두 사실이야, 릴라.”
릴라는 월터의 손에서 편지를 빼앗아 불 속에 던져 넣어버렸다.
“아니야, 사실인 것은 한 가지도 없어, 오빠. 오빠는 병적이 되어버린 거야. 올리버 선생님도 너무 한 가지 일만 지나치게 생각하면 병적으로 변해버린다고 했어.”
“레드먼드에는 달아날 곳이 없어, 릴라. 온 학교가 전쟁 이야기로 들끓고 있어. 징병 적령기에 있고 어디 부족한 데도 없는 남자가 군대에 가지 않으면 병역 기피자로 낙인이 찍히고 말아. 그리고 그에 합당한 대접을 받게 되지. 언제나 날 아껴주던 영문학과 밀른 교수님은 아들 둘을 모두 군대로 보냈어. 그 후로 교수님이 나를 대하는 태도도 변했다고 느껴져.”
“그건 공정하지 않아. 오빠는 군대에 갈 만큼 건강하지도 않잖아.”
“내 몸은 아주 건강해. 단지 마음이 문제지. 그래서 불명예스럽고 수치스러운 거야. 내가 갈까 봐 걱정하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어. 난 가지 않을 거니까. 밤이나 낮이나 내 귓가에서는 그 피리 부는 사나이의 피리 소리가 들려. 하지만 난 따라갈 수 없어.”
“만일 오빠가 가버리면 엄마와 나는 견디지 못할 거야. 월터 오빠, 가족 중에 전쟁터로 간 사람은 하나로 족하다고.”
릴라가 훌쩍였다.

릴라에게 그 크리스마스 휴가는 행복하지 못했다. 그래도 낸과 다이, 월터와 셜리가 집에 와주어 훨씬 견디기가 수월했다. 케네스 포드에게서도 편지가 왔다. 편지의 어떤 문장들은 릴라의 볼을 붉게 물들게 하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지만, 편지 말미를 읽으며 릴라는 갑자기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오싹해지고 말았다.

내 복사뼈는 이제 거의 다 나았어. 앞으로 두 달 뒤면 입대할 수 있을 거야. 릴라, 나의 릴라, 떳떳하게 군복을 입을 수 있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야. 그렇게 되면 나도 얼굴을 똑바로 들고 세상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고, 아무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거야. 다리를 절지 않고 걷게 된 이후로 요즘 기분이 몹시 나빴어. 내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내가 마치 병역 기피자라도 되는 듯이 바라보았거든. 이제부터는 그런 눈빛을 받지 않아도 돼.

“난 이 전쟁이 정말 싫어.”
릴라는 겨울 저녁 해를 받아 분홍빛과 황금빛으로 빛나는 단풍나무 숲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새해 첫날, 블라이드 의사가 말했다.
“1914년도 갔군. 아름답게 떠올랐던 해는 선혈이 낭자한 채로 졌어. 1915년은 무엇을 가져올까?”
“승리죠!”
수잔이 간단하게 답했다.
“우리가 정말로 전쟁에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수잔?”

미스 올리버가 물었다. 그날 미스 올리버는 월터와 다이와 낸이 레드먼드로 돌아가기 전에 만나보려고 로브리지에서 와 있었다. 미스 올리버는 좀 우울하고 비꼬인 마음으로 모든 것을 어둡게만 보고 있었다.
“믿어요, 우리는 전쟁에 이겨요! 미스 올리버, 나는 우리가 승리하게 되리라는 걸 믿는 게 아니라 알아요. 난 전쟁에 질까 봐 걱정한 적은 없어요. 내가 걱정하는 것은 전쟁으로 인한 고생과 희생이죠. 하지만 달걀을 깨지 않고는 오믈렛을 만들 수 없잖아요.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대포를 만들어야 해요.”
수잔이 외쳤다.
“가끔씩은 하느님보다 대포를 믿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미스 올리버가 반항적으로 말했다.
“아니, 아니, 그래서는 안 돼요. 독일군은 마른에서도 커다란 대포를 쏘아댔어요, 그렇지 않은가요? 하지만 하느님이 처리했잖아요. 그것을 잊으면 안 돼요. 마음에 의심이 들 때마다 그 믿음에 의지해요. 의자 양쪽을 꼭 붙들고 단단하게 힘주고 앉아서 계속해서 ‘대포도 좋지만 전능하신 하느님이 낫다. 카이저가 뭐라고 하건 하느님은 우리 편이다.’ 하고 말해요. 나도 요즘 자칫 잘못했으면 미치고 말았을 거예요, 미스 올리버. 단단하게 앉아서 그 말을 반복하지 않았더라면요. 우리 사촌 소피아도 미스 올리버 같아요. 언제나 암울한 쪽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죠. 어제도 ‘오, 독일군이 여기까지 밀고 들어온다면 우리는 어쩌면 좋아.’ 하고 징징거리더군요. 그래서 내가 ‘그놈들을 죄다 묻어버리면 되지. 저기 묘지에 빈자리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하고 말해줬죠. 그랬더니 소피아는 나더러 경박하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나는 경박하지 않아요, 미스 올리버. 다만 침착하게 영국 해군과 우리 캐나다군을 믿고 있을 뿐이지요. 나는 항구 어귀 윌리엄 폴록 영감님과 같은 정신을 가졌어요. 그 할아버지는 나이가 꽤 많은데다 오랫동안 병으로 누워 지냈는데 지난주 어느 날 밤에 상태가 더 위중해졌지요. 며느리가 시아버지가 곧 숨을 거둘 것 같다고 누군가에게 속삭였어요. 그 소리를 듣고 폴록 영감님은 ‘제기랄, 난 안 죽어.’ 하고 외쳤대요. 미스 올리버, 그 할아버지는 ‘제기랄’이란 점잖은 소리만으로 그치지 않았어요. ‘제기랄, 난 카이저가 죽는 꼴을 보기 전까지는 절대로 죽을 수 없어.’ 그랬다고요. 미스 올리버, 난 그렇게 기개를 가진 사람을 존경해요.”
수잔이 말을 맺었다.
“저도 그런 사람을 존경하지만 저로서는 도저히 흉내도 낼 수가 없네요. 전에는 힘든 일이 있으면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펴고 공상의 나라를 다녀오면 다시 거인처럼 힘이 났는데, 이번 일에는 도저히 그렇게 되지가 않아요.”
거트루드 올리버가 한숨을 쉬었다.
“나도 마찬가지예요. 전에는 잠자리에 드는 것이 참으로 즐거웠어요. 잠들기 전 30분 동안 즐겁고 환상적인 공상에 빠졌지만 지금은 상상을 하더라도 예전과는 너무나 다른 것들이에요.”
블라이드 부인이 말했다.
“저는 잠잘 시각이 오면 기뻐요. 어둠 속으로 들어가 버릴 수 있어서죠. 웃을 필요도 없고 용감한 척 말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하지만 가끔씩은 상상력이 제 통제를 벗어나 버려 끔찍한 장면을 보게 돼요. 앞으로 만나게 될 끔찍한 세월을요.”
미스 올리버가 말했다.

“난 상상력 같은 것은 한 줌도 갖고 있지 않아 천만다행이에요. 그것만큼은 축복을 받았어요.”
수잔이 말했다.
“또 황태자가 죽임을 당했다는 기사가 신문에 났어요. 이번만은 제발 죽은 대로 가만히 좀 있어주었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또 각서를 발표할 모양이에요. 난 그 남자 학교 선생님이 아직 살아 있는지 궁금하다니까요.”
수잔은 요즘 그 가여운 윌슨 대통령 얘기를 할 때마다 신랄한 비난조였다.
1월에 짐스는 다섯 달이 되어서 릴라는 이제 짐스에게 기쁜 마음으로 아기 옷 대신 유아용 옷을 입혔다.
“짐스 몸무게가 6킬로그램이 되었어요. 모건이 6개월이면 되어야 한다고 말한 딱 그 몸무게예요.”
릴라는 기뻐 어쩔 줄 모르며 보고했다.
짐스가 점점 더 예쁜 모습이 되어간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볼은 둥글고 약간 분홍빛을 띠었다. 커다란 눈은 반짝였으며 작은 손은 손가락 첫 마디마다 옴폭옴폭 들어가 있었다. 머리칼도 나기 시작해서 릴라는 말하지 않았지만 이제야 마음이 놓였다. 머리 전체가 연한 금발 잔머리로 덮여 있어 빛을 받으면 뚜렷이 보였다. 짐스는 모건이 그렇다고 한 대로 거의 똑같이 잘 자고 소화도 잘 시키는 착한 아기였다. 가끔씩 방긋방긋 웃기는 했지만 아무리 웃기려 해도 소리 내어 웃는 일은 아직 없었다. 이것 또한 릴라의 고민거리였다. 모건은 아기들이 보통 3개월에서 5개월이 되면 소리 내어 잘 웃는다고 했다. 그런데 짐스는 5개월이 지나도 웃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왜 웃지를 않는 걸까? 아기가 혹시 정상이 아닌 것은 아닐까?
어느 날 밤 릴라는 글렌에서 열린 신병 모집을 위한 회합에 나가 애국적인 내용의 낭송을 하고 집에 늦게 돌아왔다. 릴라가 전에 사람들 앞에서 낭송을 한 적은 없었다. 혀 짧은 소리를 내지 않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글렌 윗마을 모임에서 낭송 부탁을 받았을 때 릴라는 거절했다. 그러나 거절한 일이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다. 비겁한 일이 아닐까? 젬이 알면 어떻게 생각할까? 릴라는 이틀 동안이나 괴로워하다가 애국협회 회장에게 낭송을 하겠노라고 전화로 알렸다. 그래서 낭송을 하긴 했는데 몇 군데 혀 짧은 소리를 낸 것이 부끄러워 거의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이틀 뒤에 다시 항구 어귀에서 낭송을 했다. 그 이후로 로브리지에서도, 항구 건넛마을에서도 낭송을 하게 되었고, 종종 혀 짧은 소리가 튀어나오긴 했지만 이제는 체념했다. 그리고 혀 짧은 소리를 낸다고 해서 자기 말고는 다른 누가 신경 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 릴라는 아주 진지했고 호소력이 있었으며 눈은 별처럼 빛났다. 릴라가 낭송할 때마다 적어도 한 사람은 지원자가 나왔다. 릴라의 눈이 똑바로 자신을 보고 있는 듯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남자가 자기 선조의 무덤과 신의 성전을 지키려고 싸우다 죽는 것보다 더 보람 있는 일이 어디 있겠느냐고 정열적으로 호소하는데 거부할 도리가 없었다. 거기다 단 1시간을 살더라도 영광된 삶을 살다 죽는 것이 이름 없이 긴 세월을 사는 것보다 더 낫다고 강력하게 단언할 때는 둔감한 밀러 더글러스까지도 몹시 감동을 받고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덕분에 메리 밴스는 밀러의 분별력을 정상으로 되돌려놓으려고 몇 시간을 설득해야 했다. 메리 밴스는 릴라 블라이드가 젬이 전선으로 가서 정말로 마음이 아프다면 다른 아이들의 오빠나 친구가 군대에 가도록 부추겨서는 안 된다고 쓰디쓰게 말했다.
그날 밤 릴라는 특별히 더 지치고 추웠던 밤길을 걸어돌아와 따뜻한 잠자리가 더욱 반가웠다. 잠자리에 들어서는 언제나 그렇듯 맨 먼저 젬과 제리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슬픈 마음이 들었다. 몸이 따뜻해지고 잠이 사르르 들려고 하는데 갑자기 짐스가 울어대기 시작했다. 울음은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다.
릴라는 침대 속에 몸을 옹크린 채로 짐스를 울게 내버려두겠다고 생각했다. 릴라 뒤에는 모건이라는 훌륭한 후원자가 있었다. 짐스는 몸도 따뜻하고 불편한 일도 없다. 울음소리로 보건대 어디가 아파서 우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 조그만 배도 기분 좋을 만큼 부르다. 지금 짐스에게 가서 야단을 떤다면 응석받이로 만들 뿐이다. 그렇게는 하지 않을 작정이다. 울다가 지치면 다시 잠들겠지.
그런데 릴라의 상상력이 릴라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내가 저 아기처럼 이제 겨우 다섯 달 된 작고 힘없는 아기이고, 아빠는 프랑스 어딘가에 있고, 엄마는 나를 무척 염려하지만 무덤에 묻혀 있다면? 내가 저 한 줄기 불빛도 없는 커다랗고 캄캄한 방에 혼자 있고, 그 누구의 눈길도 미치지 않는 곳에 있다면? 내가 바로 사랑하는 사람이라고는 단 한 사람도 없는 아이라면? 아빠라는 사람은 한 번도 나를 본 적이 없으니 나에게 애정을 가졌을 리 없고, 더욱이 내게 소식 한 줄 없다면? 그런 처지라면 울지 않고 배길 수 있을 것인가? 나라도 너무나 외롭고 버림받은 기분일 것이다. 무서워서 울고 말 것이다.
릴라는 얼른 침대에서 뛰쳐나갔다. 요람에서 짐스를 들어 올려 자기 침대로 데려갔다. 가엾게도 조그만 손이 찼다. 그러나 짐스는 곧 울음을 그쳤다. 거기다 어둠 속에서 릴라가 꼭 안아주자마자 갑자기 소리 내서 웃었다. 정말로 목을 울리며 좋아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귀여운 웃음소리였다.
“어머나, 요 귀여운 것!”

릴라는 소리쳤다. 캄캄한 큰 방에 혼자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아니까 그렇게 기쁘니? 릴라는 아기에게 뽀뽀를 해주고 싶은 생각이 났다. 아기의 부드럽고 좋은 냄새가 나는 작은 머리에도, 통통하고 작은 볼에도, 조그맣고 차가운 손에도 입을 맞추어주었다. 새끼 고양이를 껴안아주고 어르던 것처럼 짐스를 꼭 끌어안아 보고 싶었다. 무언가 즐겁고 흐뭇한 생각이 속에서 끓어올랐다.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기분이었다.
잠시 후에 짐스는 곤히 잠들었다. 릴라는 짐스의 부드럽고 규칙적인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온전히 자기를 믿고 의지하고 있는 조그만 몸을 조용히 안고 있었다. 릴라는 드디어 자기가 이 전쟁고아에게 애정을 품고 있음을 깨달았다.
‘짐스가 너무 귀여워졌어.’
릴라는 졸린 듯 생각하며 꿈나라로 갔다.
2월이 되자 젬과 제리, 로버트 그랜트 씨 모두 참호에 들어가서 ‘잉글사이드’ 사람들의 생활은 전보다 더 긴장되고 걱정도 심했다.
3월에는 수잔이 ‘이프레즈’13)라고 부르는 곳이 주요 뉴스거리가 되었다. 신문에는 거의 날마다 사상자 명단이 실렸고, ‘잉글사이드’ 사람들은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끔찍한 공포감에 떨었다. 바다 건너에서 전보가 왔다는 역장의 전화일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잉글사이드’의 그 누구도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두려움 없이는 아침에 눈을 뜨지 못했다.
‘전에는 아침이 오는 것이 좋았었는데.’
릴라는 생각했다.
그런데도 삶과 의무는 부단 없이 수행되었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학생이었던 글렌의 소년들이 매주 군복을 입고 떠나갔다.
“오늘 밤은 너무 춥군요, 사모님. 참호에 있는 군인들은 따뜻하게 지내고 있을까요?”
맑고 반짝이는 캐나다의 겨울 황혼녘 외출했다 돌아온 수잔이 말했다.
“모든 것이 다 전쟁 이야기로 이어져요. 우리는 전쟁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날씨 이야기를 하면서도 꼭 전쟁 이야기가 되어버리니. 저도 춥고 어두운 밤에 밖으로 나가면 참호 속에 있을 군인들이 생각나요. 꼭 우리나라 병사뿐만 아니라 모든 군인들이요. 제가 아는 사람 중에는 전선에 나가 있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해도 그건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따뜻하고 편안한 잠자리에 들어갈 때면 제가 편히 지내는 것이 죄책감이 들어요.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데 저만 편히 지내는 것 같아 제가 나쁜 사람처럼 느껴져요.”
거트루드 올리버가 말했다.
“가게에서 메러디스 부인을 만났는데 브루스가 모든 것을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여 큰일이라고 하더군요. 굶주린 벨기에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울면서 잠든 지가 벌써 일주일째래요. 브루스가 ‘오, 엄마. 어린아이들은 굶지 않겠지요? 어린아이들은요! 아이들은 굶지 않는다고 말을 해주세요, 엄마.’ 하고 애원하다시피 묻더래요. 메러디스 부인은 거짓말을 할 수 없어 대답도 못 하고 어찌해야 좋을지 정말 괴롭다고 하더군요. 브루스에게 그런 얘기를 하지 않으려고 해도 브루스가 어디서 다 듣고 와서 정말 난감하대요. 뭐라고 위로해줄 말을 찾을 수가 없고요. 그런 얘기는 내가 읽어도 정말이지 가슴이 아파요, 사모님. 그 얘기들이 사실이 아니라고 나를 위로해도 소용이 없어요. 내가 소설을 읽으면서 울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나는 자신에게 엄하게 ‘이봐, 수잔베이커. 그런 건 다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있잖아.’ 하고 말해요.”
수잔이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계속했다.
“잭 크로퍼드는 농사일이 지겨워서 전쟁에 나간다더군요. 잭이 전쟁에 나가 정말로 기분전환이 되기나 바라야죠. 그리고 항구 너머 리처드 엘리엇 부인은 남편이 군대에 간 뒤로 아주 마음 아파하며 지내고 있어요. 남편이 응접실 커튼 뒤에서 담배를 피운다고 잔소리를 해댔던 것이 그렇게 마음에 걸린대요. 그리고 사모님도 조시아 쿠퍼와 윌리엄 델리를 아시죠? 그 두 사람은 원래 아주 단짝 친구였는데 20년 전에 싸우고는 그 뒤로 말을 않고 지냈대요. 그런데 며칠 전에 조시아가 윌리엄을 찾아가서 화해를 청했대요. ‘우리 다시 친구로 지내세. 지금은 그런 앙심을 품고 지낼 시기가 아니네.’ 하고요. 윌리엄도 기뻐하며 기꺼이 손을 내밀었고 둘은 사이좋게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죠.
그런데 30분도 지나지 않아서 다시 싸움이 났다더군요. 전쟁을 어떻게 치러나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말예요. 다르다넬스 원정을 두고 조시아는 형편없는 작전이었다고 말하고, 윌리엄은 연합군이 한 일 가운데 가장 분별 있는 일이었다고 주장했대요. 그래서 그 둘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사이가 나빠져 버렸다는군요. 윌리엄은 조시아가 구레나룻 난 보름달만큼이나 독일 편을 드는 나쁜 놈이라고 말을 한대요. 하지만 구레나룻 난 보름달은 자기는 독일 편을 드는 것이 아니고 반전주의자일 뿐이라고 말을 한다나요.
내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제대로 된 일을 말하는 건 아닐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구레나룻이 그런 일을 하겠어요. 그 사람은 누브 샤펠에서 영국군이 크게 승리를 거둔 것도 얻은 것보다는 잃은 것이 더 많았다고 한대요. 그 소식을 듣고 조 밀그레이브가 자기 아버지 국기를 내다 걸었다고 해서 조를 자기 집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한대잖아요. 그거 알고 계셨어요, 사모님? 러시아 황제가 자기 이름을 프리시에서 프셰미실로 바꾸었어요. 그 사람이 러시아인이기는 해도 지각 있는 사람인 거예요. 가게에서 조 비커스한테 들었는데요. 조가 오늘 밤에 로브리지 상공에서 아주 이상하게 생긴 물건을 보았다고 하더라고요. 혹시 체펠린이 만들었다는 비행선 아닐까요, 사모님?”
“그럴 리가 있나요, 수잔?”
“구레나룻 난 보름달이 글렌에 살고 있지만 않더라도 내가 마음이 이렇게 불편하지는 않을 텐데요. 사람들이 그러는데 그 사람이 요즘 밤에 자기 집 뒤뜰에 등불을 밝혀놓고 이상한 기계들을 만지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 사람이 신호를 보내는 거라고 하는 사람도 있어요.”
“누구에게요? 무슨 신호를요?”
“아, 그것이 바로 미스터리라니까요, 사모님. 내 생각으로는 우리 모두가 잠을 자다 살해당하는 일이 없으려면 정부가 그 사람을 잘 감시해야 해요. 이제 나는 우리 젬에게 편지를 쓰기 전에 잠깐 신문이나 훑어봐야겠네요. 내가 전에는 하지 않던 일이 두 가지가 있었어요, 사모님. 편지 쓰는 일과 정치 이야기는 읽지 않는 거였지요. 그렇지만 요새는 내가 매일 하는 일이 그 두 가지네요. 정치에는 뭔가가 있더라고요. 우드로 윌슨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알아내 보고 싶어요.”
윌슨과 정치를 좇던 수잔은 뭔가 마음을 어지럽히는 문제를 발견하고 실망에 찬 소리를 내질렀다.
“그 악마 같은 카이저가 앓던 병이 겨우 부스럼이었다는군요.”
“불경한 말은 삼가세요, 수잔.”

블라이드 의사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
“‘악마 같은’이란 말이 불경한 말은 아니에요. 선생님. 난 ‘불경한 말’이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을 헛되이 남발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는걸요.”
“글쎄, 그게 그런 말이 아니더라도 점잖은 말은 아니죠.”
의사가 미스 올리버에게 눈을 찡끗하며 말했다.
“아니요, 의사 선생님. 악마와 카이저는 서로 다른 존재가 아니고, 둘 다 점잖은 것들이 아니니, 선생님이라고 해도 그 둘을 점잖게 말할 수는 없어요. 그러니 내가 한 말이 틀리지 않지요. 의사 선생님도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아직 어린 릴라가 곁에 있을 때는 이런 말을 가급적 쓰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답니다. 하지만 난 신문이 카이저가 폐렴에 걸렸다고 해서 사람들에게 혹시나 하는 희망을 품게 하고 나중에는 폐렴이 아니라 부스럼에 지나지 않았다고 할 권리가 없다는 내 입장을 고수할 거예요. 부스럼이라니, 내 정말! 부스럼이 그놈의 온몸을 덮어버렸으면 좋겠구먼.”
수잔은 부엌으로 가서 젬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날 온 젬의 편지를 읽고 식구들의 위안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젬이 보내온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오늘 밤 우리는 낡은 지하 술 창고에 있습니다. 물이 무릎까지 차 있고 여기저기서 쥐가 돌아다녀요. 불도 없고, 비마저 부슬부슬 내리고 있어서 좀 침울합니다. 그러나 더 지독한 곳도 있는걸요. 오늘 수잔 아줌마가 보내준 소포 상자를 받았습니다. 너무 맛있는 음식이 많아서 큰 잔치를 벌였어요. 제리는 전선에 나가 있어요. 거기서 주는 배급은 옛날에 마사 할머니가 주던 디토보다 더 형편없대요. 그렇지만 여기는 그렇게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끼니마다 같은 음식을 준다는 것이 나쁘지요. 수잔 아줌마에게 전해주세요. 그 원숭이 얼굴 쿠키를 한 아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1년치 봉급을 다 써버려도 좋을 것 같다고요. 하지만 정말로 그걸 보낼 생각은 말라고 해주세요. 보관할 수 없을 테니까요.
지난 2월 마지막 주부터 우리는 심한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어제 한 사람이 바로 내 옆에서 목숨을 잃었어요. 노바스코샤 출신 병사라고 하더군요. 우리 바로 옆에서 포탄이 터졌는데 혼란이 수습되고 보니 그 사람이 죽어 있었어요. 몸이 많이 손상되거나 하지는 않았고 그냥 좀 놀란 모습이었어요. 그런 일을 바로 이렇게 가까이에서 당한 것은 처음이에요. 정말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여기서는 이런 끔찍한 일에도 적응해야만 해요. 우리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살고 있으니까요. 여기서도 다르지 않은 것 하나는 반짝이는 별이에요. 별은 반짝이는 곳이 따로 있지는 않은 모양이에요.
어머니에게 제 걱정은 하지 말라고 전해주세요. 전 아주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여기 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세상에서 완전히 없애버려야 할 무리들이 바로 저 건너편에 있으니까요. 완전히 없애버리지 않으면 영원히 악의 독소를 내뿜으면서 우리에게 해악을 끼칠 우리의 적들이에요. 아무리 오래 걸린다 할지라도, 또 어떤 희생을 치러야 한대도 그 임무를 완수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제 대신 글렌 사람들에게 알려주세요. 저들이 저지르고 있는 만행을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저도 잘 몰랐어요. 그저 재미있는 모험쯤으로만 생각했죠. 하지만 이것은 결코 그런 일이 아닙니다! 전 꼭 와야 할 곳에 와 있는 거예요. 여기서 저들이 무고한 가정과, 정원과 사람들에게 한 짓을 보면서 독일군 악당들이 ‘무지개 골짜기’와 글렌을 휩쓸고 ‘잉글사이드’로 몰려가는 것을 보는 듯했습니다. 여기는 정원이 많아요. 수 세기 동안이나 아름다움을 간직했던 아름다운 정원들이었죠. 하지만 지금 그 정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세요? 참혹하게 파괴되어 흉측한 모습으로 변해 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가 어린 시절에 놀던 그 정다운 곳들을 다른 아이들도 안전하게 뛰어놀 수 있도록 지켜주려고 싸우는 것입니다. 모든 다정하고 옳은 것들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요.
누구든 역에 가면 저를 대신해서 먼데이를 많이 쓰다듬어주세요. 우리 강아지가 충성스럽게 역에서 날 기다리고 있다니! 솔직하게 말해서요, 아버지. 이 춥고 어두운 참호 속에서도 수만 리 떨어진 글렌 역에서 우리 점박이 강아지가 나와 같이 밤을 지키며 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감동을 받고 용기가 나요.
릴라에게도 전쟁고아를 그렇게 훌륭하게 키워놓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척 기뻤다고 전해주세요. 그리고 수잔 아줌마에게도 제가 그 흉악무도한 독일군 놈들과도 ‘군실이’와도 잘 싸우고 있다고 전해주시구요.

“사모님, 그런데 ‘군실이’가 뭐죠?”
수잔이 근엄한 얼굴로 조용히 물었다.
블라이드 부인이 역시 조용히 대답해주자 수잔이 혐오스럽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참호에는 이가 구물거리기 마련이에요, 수잔.”
수잔은 머리를 흔들며 입을 굳게 다문 채 방에서 나가 젬에게 보내려고 포장해둔 소포를 다시 풀어 참빗을 집어넣었다.
13. 독일군이 프랑스군에게 인류 최초로 독가스를 살포했던 벨기에의 ‘이프르’ 전선을수잔이 자기 마음대로 읽은 것.





12
랑게마르크에서






릴라는 일기를 쓰고 있었다.

이렇게 끔찍한 시기에도 봄은 어쩌면 이리도 아름답게 찾아오는 것일까. 태양은 빛나고 개울가에 늘어선 버드나무에는 노란 꽃이 하늘하늘 피었으며 정원도 아름다운 빛을 띠기 시작했다. 난 잠시 플랑드르에서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렸다. 하지만 지금도 그런 끔찍한 일은 자행되고 있다!
지난주는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괴로웠던 한 주였다. 이프르 전투뿐 아니라 랑게마르크 그리고 생쥘리앙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우리 캐나다 병사들은 훌륭하게 싸우고 있다.
프렌치 장군14)은 영국군이 독일군에게 패하기 직전 캐나다군의 도움으로 전세를 반전시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난 그 소식을 듣고도 자부심도 가슴 뛰는 흥분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젬 오빠와 제리 오빠 그리고 그랜트 씨가 걱정되어 죽을 지경이다. 날마다 신문에는 사상자 명단이 실린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 난 혹여나 그 안에 젬 오빠 이름도 있을까 봐 사상자 명단을 읽기가 두렵다. 공식적으로 전보를 받기 전에 사상자 명단에서 자기 아들 이름을 발견하는 부모도 있기 때문이다. 전화도 마찬가지다. 며칠 동안 난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여보세요.” 하고 말한 다음 상대방의 대답이 들릴 때까지의 순간이 너무 괴로워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그 짧은 순간이 백 년은 되는 듯 길게 느껴지고 “블라이드 선생님께 전보가 와 있습니다.”라는 말을 듣게 되지 않을까 너무나 두려웠다.
한동안은 그렇게 전화를 피했지만 엄마와 수잔 아줌마에게만 그 괴로운 일을 떠맡겨두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이제는 억지로라도 내가 전화를 받으려 한다. 하지만 그 일이 조금도 더 쉬워지지가 않는다. 올리버 선생님은 여전히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아이들이 쓴 작문을 읽고 시험지를 나누어준다. 그러나 나는 올리버 선생님의 마음이 늘 플랑드르로 달려가 있다는 것을 안다. 선생님이 지금 어떤 눈빛을 하고 있을지 내 마음에 선하다.
결국은 케네스 오빠도 군복을 입고 말았다. 지금 그는 중위로 임관되었고, 여름쯤 해외로 나가게 될 거라고 써 보냈다. 편지에 다른 이야기는 없었다. 지금 케네스 오빠 머릿속에는 다른 나라로 떠나게 되었다는 생각밖에 없는 것 같다. 떠나기 전에 케네스 오빠를 만나지는 못할 것이다. 아마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가끔씩 포 윈즈에서의 그날 밤 일이 꿈은 아니었을까 내 자신에게 묻기도 한다.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아니, 전생에 있었던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 말고는 그 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다.
어젯밤에 낸 언니와 다이 언니, 그리고 월터 오빠가 레드먼드에서 돌아왔다. 오빠가 기차에서 내리자 먼데이는 기뻐 미친 듯 달려 나갔다. 젬 오빠도 함께 온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먼데이는 한순간 월터 오빠를 반겼지만 금방 오빠가 쓰다듬어주어도 본체만체 거들떠보지도 않고 꼬리만 불안스럽게 흔들며 서 있었다. 슬픔으로 목이 메는 듯 오빠 뒤로 기차에서 내리는 다른 사람들만 바라보았다. 젬 오빠가 기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먼데이가 보게 될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승객들이 다 내려버리자 먼데이는 월터 오빠를 올려다보며 ‘젬이 오지 않는 것이 당신 탓은 아니에요. 나도 그것을 잘 알고 있으니 염려 말아요. 내가 실망에 빠져 있어도 신경 쓰지 말아요.’ 하고 말하는 듯 월터 오빠의 손을 핥았다. 그러고는 몸을 이상하게 옆으로 흔들며 터덜터덜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꼭 뒷다리가 가려는 방향과 앞다리가 가려는 방향이 반대로 어긋난 채로 걷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먼데이도 집에 함께 데려오려고 했다. 다이 언니는 쭈그리고 앉아 먼데이의 두 눈 사이에 입을 맞추어주면서 속삭였다.
“먼데이, 사랑스러운 우리 강아지, 오늘 저녁에만 집에 가지 않을래?”
그러자 먼데이는 말했다. 정말 먼데이가 말했다!
‘정말 죄송하지만 난 그럴 수 없어요. 난 여기서 젬을 만나야 해요. 8시면 기차가 또 지나가거든요.’
월터 오빠가 돌아와서 너무 기쁘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하고 슬퍼 보이기는 하지만. 오빠를 위로해주고 기분을 북돋아주어 전처럼 웃게 해주고 싶다. 날이 갈수록 내게는 오빠가 더더욱 소중하다.
요전 밤 우연히 수잔 아줌마가 ‘무지개 골짜기’에 산사나무 꽃이 피었다는 말을 했다. 수잔 아줌마가 그 말을 할 때 우연히 엄마를 보았다. 엄마의 얼굴이 변했다.
“산사나무 꽃이라고? 작년에는 젬이 내게 산사나무 꽃을 가져다주었는데!”
꼭 울 것처럼 목이 멘 소리였다. 엄마는 거의 언제나 용기가 넘치고 명랑하게 행동해서 마음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도 할 수 없다. 그러나 가끔은 작은 일에 무너져 버려 우리에게 속마음을 드러내 보이는 때가 있다. 나는 얼른 일어나 방을 나가 ‘무지개 골짜기’로 가서 산사나무 꽃을 한 아름 따다 엄마에게 가져다주었다. 난 그것이 엄마가 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잘알았다. 그리고 어젯밤에는 월터 오빠도 슬며시 집을 나가 골짜기로 가서 산사나무 꽃을 따다 엄마에게 주었다. 아무도 월터 오빠에게 그 말을 한 사람은 없었다. 오빠는 그냥 여태까지 젬 오빠가 가장 먼저 핀 산사나무 꽃을 엄마에게 꺾어다드렸던 일을 기억하고 젬 오빠 대신 그렇게 했다. 그것만 보아도 월터 오빠가 얼마나 자상하고 인정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그런 오빠에게 잔혹한 편지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니!
나라 밖에서는 그런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나는데도 우리는 나날이 일상생활을 해나갈 수 있다니 참으로 이상한 기분이 든다. 우리들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중대한 일이 벌어지고 있고, 무서운 소식이 언제 어느 때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마치 그런 일이 없는 것처럼 하루하루 살아간다. 우리는 계속해서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수잔 아줌마는 뜰을 가꾸고 엄마와 함께 대청소를 하기도 한다. 우리 적십자 소녀단은 벨기에 돕기 발표회를 열기로 했다. 이미 한 달 동안 연습을 해왔는데 성질이 비뚤어진 아이들이 있어 좀 애를 먹고 있다. 미란다 프라이어도 우리 발표회에 참여하기로 했었다. 대화극의 한 역할을 맡아 자기가 맡은 부분 대사도 다 외웠는데 그 애 아버지가 발을 빼라고 하는 바람에 그만두어야 했다.
난 미란다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때로는 미란다가 참 답답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 강하게 밀고 나가지 못하나 싶다. 가끔씩은 미란다도 자기주장을 꺾지 않고 버틴다면 자기 아빠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집안일도 거의 다 미란다가 하고 있는데, 미란다가 파업이라도 일으킨다면 그 애 아빠도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만일 미란다 입장이라면 어떻게든 구레나룻 난 보름달을 조종하고 말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말로 해서 안 듣는다면 회초리로 때려주든, 물어뜯든 할 것이다! 하지만 미란다는 너무 순진하고 복종적인 딸이라서 그런 일은 없을 것 같다.
결국은 미란다가 맡은 역할을 대신할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그 역할은 원래부터 아무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맡을 수밖에 없었다. 올리브커크도 발표회 위원인데 사사건건 내 의견에 반대만 한다. 나는 내 의견을 밀고 나가 시내에서 채닝 부인을 초청하기로 했다. 채닝 부인 같은 훌륭한 가수가 오면 우리 발표회에 많은 사람을 끌어 모을 수 있어 출연료로 지불해야 할 돈보다 더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올리브는 이 근방의 인재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했고, 미니 클로는 자기는 채닝 부인 앞에 서면 긴장되어 얼어붙고 말 거라고 했다. 그렇게 되면 합창대에서 노래도 부를 수 없을 거라면서 반대했다.
우리 중에 알토 부분을 훌륭하게 부를 수 있는 아이는 미니뿐인데! 가끔씩은 너무 화가 나서 모든 일에서 손을 떼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내 방에서 혼자 실컷 화를 내고는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다시 돌진해 나간다.
그리고 하필이면 이런 때 아이작 리즈네 식구들이 전부 기침을 해댄다. 온 가족이 심한 감기에 걸려 있는데 이 집안사람 다섯이 프로그램의 중요한 역을 맡고 있다. 도대체 이 일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딕 리즈의 바이올린 독주는 사람들에게 아주 인기 있는 부분이고, 키트 리즈는 활인화(活人畵)15)마다 등장하기로 되어 있으며, 그 집의 꼬마 여자아이들 셋은 깃발을 들고 하는 무용에 출연하기로 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을 준비하느라고 몇 주 동안을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제 내 노력이 모두 허사로 끝날 위기에 놓였다.
오늘 처음으로 짐스의 이가 나서 몹시 기뻤다. 메리 밴스가 은근히 아홉 달이나 된 아기가 왜 이가 나지 않느냐는 말을 했던 차였다. 짐스는 기어 다니기 시작했는데, 다른 아기들처럼 배를 깔고 기지는 않는다. 입에는 뭘 물고 꼭 강아지처럼 네 발로 돌아다닌다. 그래도 아기가 늦게 긴다고 누가 시비를 걸 일은 없을 테니 다행이다. 아니, 오히려 빠른 편이다. 모건의 육아 책에서도 아기들이 보통 열 달은 되어야 긴다고 나와 있다. 아기 아빠가 짐스처럼 귀여운 아기를 보려 하지 않다니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머리카락도 알맞게 나오고 있다. 고수머리가 되지 않을까 싶다.

릴라는 짐스의 일과 발표회 일을 적으며 잠시 동안 이프르니 독가스니 사상자 명단이니 하는 것들을 잊을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심하게 그런 일들이 되살아났다. 젬 오빠가 무사하다는 소식이라도 오면 좋으련만! 전에는 젬 오빠가 거미라고 부르면 무척 화가 났었다. 하지만 지금은 젬 오빠가 휘파람을 불면서 거실을 지나다 “야, 거미!” 하고 불러주기만 한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별명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릴라는 일기장을 밀어놓고 정원으로 나갔다. 봄날 저녁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기다란 초록빛 글렌 마을에는 어둠이 내리고, 그 너머 목초지에는 황혼이 물들고 있었다. 항구도 이쪽은 보랏빛, 저쪽은 푸른빛, 또 저 너머는 오팔 빛깔로 빛났고, 단풍나무 숲은 연한 초록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릴라는 슬픈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가 일 년 중 봄은 기쁨의 시간이라고 했던가? 지금은 괴롭고 슬픈 계절이다. 옅은 보랏빛 아침과 수선화 같은 별, 소나무 사이로 불어대는 바람이 모두 슬픔을 던져준다. 이 세상이 다시 불안에서 벗어나는 날이 올까?
월터가 릴라 있는 곳으로 왔다.
“프린스에드워드 섬의 저녁 해를 다시 바라볼 수 있어서 기쁘다. 바다가 이리도 푸르고, 길이 이토록 붉고, 숲 속 구석구석이 이렇게 때 묻지 않은 자연 그대로인 모습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 같아. 꼭 요정이라도 나올 것 같아. 그래, 여기에는 아직 요정이 살고 있어. ‘무지개 골짜기’에 핀 제비꽃 밑에 요정이 아주 많이 살고 있어.”
한순간 릴라는 기뻤다. 월터는 예전처럼 꼭 월터다운 말을 하고 있었다. 릴라는 월터가 그의 마음을 괴롭히고 있는 어떤 생각을 잊었기를 바랐다.

“‘무지개 골짜기’ 위 저 하늘도 얼마나 푸른지 봐! 저 푸르름을 제대로 표현하려면 ‘푸르다, 푸르다!’를 백 번은 외쳐야 할 거야.”
릴라는 월터의 기분에 맞춰 대꾸했다.
수잔이 머리를 두건으로 꽉 묶은 채 두 손에는 뜰 일을 하는 연장을 잔뜩 들고 지나갔다. 박사가 거칠고 은밀한 눈빛으로 조팝나무 덤불 속으로 소리 죽여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하늘은 푸른지 모르지만 저놈의 고양이가 온종일 하이드 씨가 되어 있으니 오늘 밤에는 틀림없이 비가 올 거야. 그 증거로 내 어깨의 류머티즘도 도지기 시작했어.”
수잔이 말했다.
“비가 올지도 모르지만 류머티즘 같은 건 생각하지 말아요, 아줌마. 제비꽃을 생각해요.”
월터는 들떠서 말했다. 릴라는 월터가 지나치게 들떠 있다고 생각했다.
수잔은 매정한 눈으로 월터를 보며 쌀쌀하게 말했다.
“정말이지 월터, 제비꽃을 생각하라니 무슨 뜻인지 모르겠구나. 류머티즘은 농담거리가 아니야. 너도 언젠가는 그 고통을 알게 될 날이 올 거다. 나는 늘 여기가 아프다 저기가 아프다 불평만 하는 사람이 아니야. 특히 요즘같이 나쁜 소식만 들려오는 때는. 류머티즘도 괴롭지만, 어디 독일군에게 가스 공격을 당하는 것에 비하겠어?”
“오, 안 돼, 안 돼!”

월터는 큰 소리로 부르짖더니 휙 돌아서서 집 쪽으로 가버렸다.
수잔은 머리를 내저으며 ‘저런 비명 소리를 사모님이 들으면 안 되는데.’ 하고 생각했다.
릴라는 눈물이 글썽해져 수선화 꽃봉오리 사이에 서 있었다. 모처럼 기분이 좋았는데 다시 엉망이 되었다. 수잔 아줌마가 미웠다. 아줌마가 월터 오빠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그리고 젬 오빠는, 오빠 부대가 가스 공격을 받았을까? 오빠는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가 죽었을까?
‘이런 불안한 상태로는 이제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릴라는 절망적인 기분에 빠졌다.
그러나 릴라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다시 또 한 주일을 참고 견디었다. 그리고 젬한테서 무사하다는 편지가 왔다.

저는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잘 있습니다, 아버지. 저나 다른 병사들이나 우리가 모두 어떻게 무사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신문에서 모두 읽으셨을 겁니다. 제가 여기에 그 이야기를 쓰지는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독일군은 우리를 무너뜨리지 못했어요. 그들은 절대로 우리를 이기지 못해요. 제리는 폭탄이 터지자 완전히 기절해버렸어요. 다친 것은 아니고 단지 충격 때문이었죠. 이삼일 후에 괜찮아졌어요. 그랜트 씨도 무사합니다.

낸은 제리 메러디스한테서 편지를 받았다.

난 새벽녘에 의식을 되찾았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당했다는 생각은 들더라. 나는 혼자였고, 끔찍하게 두려웠어. 내 주변에는 온통 죽은 사람들이 널려 있었어. 너무나 끔찍한 잿빛 전쟁터 광경 그대로였단다. 나는 목이 타 견딜 수 없었어. 다윗과 베들레헴의 물이 생각나더군. 그리고 ‘무지개 골짜기’ 단풍나무 밑에 있는 그 정겨운 샘물도 참을 수 없이 그리웠어. 그 샘물이 바로 내 눈앞에서 아른거렸어. 그리고 낸 네가 샘 건너편에 서서 웃고 있었어. 난 내가 죽는구나 생각했단다. 그렇지만 아무렇지도 않았어. 솔직히 죽는 것은 괜찮았지만 어린아이처럼 죽은 사람들만 널려 있는 들판에 혼자 누워 있다는 것이 너무 무서웠어. 그리고 도대체 내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었단다. 그런데 사람들이 나를 발견해서 병원으로 옮긴 거야. 내 몸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대. 난 내일 참호로 돌아갈 거야. 참호에서는 언제나 병사를 필요로 하거든.

페이스 메러디스도 편지를 받고 달려왔다.
“이 세상에서 웃음이 사라져버린 것 같아요. 어렸을 때 내가 테일러 부인에게 이 세상은 웃음의 세상이라고 했던 일이 생각나네요. 하지만 이젠 더 이상 웃음의 세상이 아니에요.”
“고통의 비명을 지르고 싶은 세상이지.”
거트루드 올리버가 말했다.
“웃지 않고는 살 수 없어요. 아가씨들. 가끔씩 마음껏 웃는 것도 기도만큼이나 필요한 일이라고요.”
블라이드 부인이 말을 하고는 다시 조그만 소리로 덧붙였다.

“가끔씩이라도 웃을 수 있다면.”
사실 블라이드 부인은 지난 3주일 동안 웃기가 너무 힘들었다. 언제나 웃음을 띠고 살던 그녀였건만. 언제나 생기 넘치고 웃음이 넘쳐흐르던 앤 블라이드였건만. 무엇보다도 가슴 아픈 일은 릴라마저 웃는 일이 거의 없다는 현실이었다. 전에는 웃음이 너무 헤프다고 생각될 지경이었는데. 어찌해서 이 아이가 이렇게 어두운 소녀 시절을 보내야만 한단 말인가! 그러나 릴라는 참으로 꿋꿋하고 총명하고 여자답게 성숙했다! 끈기 있게 뜨개질과 바느질을 하고, 말 많은 적십자 소녀단 일도 잘해나가고 있다. 또 짐스를 얼마나 잘 키우고 있는가!
“아기를 열셋이나 키운 여자라 해도 릴라보다 더 아기를 잘 키우지는 못할 거예요. 우리 릴라는 너무 잘하고 있어요. 처음에 그 수프 단지에 아기를 담아 왔을 때는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지만요, 사모님.”
수잔은 진지하게 말했다.
14. 제1차 세계대전 때 육군 원수.
15. 사람을 화중인물(畵中人物)과 같이 분장시키고 말없이 부동자세로 배치시켜 장면 또는 명화(名畵)등을 모의적(模擬的)으로 나타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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