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눈물 ---- [1편]

진달래8 | 2014.05.22 13:50:29 댓글: 19 조회: 4482 추천: 9
분류실화 https://life.moyiza.kr/mywriting/2158002

[아버지는 나에게 특별한 존재이다.
가끔은 태산같기도 하고
가끔은 작은 동산의 아기자기한 둔덕이기도 하고
분명 흔들림없는 거목 같았는데
미세한 바람에도 흔들리는 연약한 갈대였기도 하다.


늘 가슴으로 말하고
가슴으로 표현하는 나의 아버지
나의 인생에 있어서 뒷동산의 바윗돌과 같고
시골의 흐늣한 느티나무와도 같은 아버지셨다.]


윗글은 제가 모이자에 올린 [아버지란 누구인가?]글중의 몇단락입니다.
언젠가는 나의 아버지에 대하여 써내려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란 이름앞에서 항상 눈물부터 먼저 뛰쳐나오는 바람에
쓰다가 지우고 지우다 또 쓰고 그렇게 반복을 하다가 오늘에야 이렇게
주절주절 다시 써보려고 시작은 하였습니다만 많은 응원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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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2월의 어느하루.

나는 아버지와 함께 기차를 타고 한참을 달리다가

또 뻐스를 갈아타고 흙길을 덜컹거리며 달려서야 고향에 도착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고향을 떠나온지도 십여년이 가까웠다.


나의 동년은 바로 여기 작은 시골마을에서부터 시작되였다.

내가 태여날 무렵 우리집은 부유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째지게 가난한 정도는 아니였지만

부지런한 아버지와 현처양모인 어머니 슬하에서

오빠와 나는 3살차이 오누이로 사랑 받고 자랐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기적같은 생명이라고 들은적이 있다.

오빠를 낳고 시름시름 앓았던 어머니라 임신한줄도 모르고

하루하루 독한 베네실린 같은 약들만 투여했다고 한다.

나중에 몸상태가 호전이 없이 점점 심각해지자 큰병원을 찾았더니

임신이라는 희소식이 아닌 희소식이 전해진것이다.


기뻐할새도 없이 의사선생님은 면역력 약한 어머니의 생명까지 위협할수 있는

위험한 아이라고 판정내리고 하루라도 빨리 지우시라고 권고했지만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꿈틀대는 생명은 어머니의 모성애를 찐하게 자극했고

어머니는 "어머니"란 위대한 이름으로 10개월을 지켜내셨다.

그리고 어머니의 옆에는 안해를 잃을가봐

해산하는 날까지 내가 태여나는걸 반대하셨던 아버지가 계셨다고 한다.


그렇게 나는 어머니의 지극정성에 보답하기라고 하듯이

약물땜에 지력장애가 있을거라던 걱정도 뒤로한채 누구보다도 더 건강하게 태여났다.


그때 당시 사회는 남존녀비 사상이 강렬했다.

오빠가 태여날때 아버지는 온 마을을 다니면서 자랑하셨단다.

하지만 내가 달갑지 않은 존재에다가 딸이여서 그런지

동년시절 나의 기억속에 아버지 모습은 참으로 희미하셨다.

내가 정말 친딸인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내 아버지 어머니 친딸은 맞음까?>

<넌 다리밑에서 주어왔다>

그게 어른들의 농인데도 어린 가슴에 못으로 박힐줄은 전혀 몰랐다.


내가 태여나서부터 부모님은 더 바삐 돌아쳤다.

낮에는 밭일을 나가시느라 오빠는 친할머니집으로

나는 이웃집 정씨 성을 가진 할아버지,할머니집으로 보내졌다.

비록 가까운 거리였지만 4식솔이 본의 아니게 뿔뿔히 흩어져 있어야 했다.

그때문이였던지 아버지 어머니와 정이 붙지 못했던 나는

정할아버지,할머니가 나의 친할아버지,할머니인줄만 알았고

나에게 남들이 그렇게 부러워하는 친오빠가 있다는것까지도 알지 못했다.


그때 정할아버지네 집엔 아버지 나이쯤 되는 삼촌이 계셨는데

나를 끔찍이도 사랑해주셔서 나는 자주 보지도 못하는 아버지보다 삼촌을 더 따랐고

어릴적부터 삼촌한테 시집가겠다고 떼질써서 삼촌이 장가가던 날 울며불며 난장판이였단다.

그리고 차츰 집에 있는 시간보다 정할아버지,할머니와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나의 어릴적 기억 또한

아버지,어머니와 함께 한 기억보다

정할아버지 댁에서 보냈던 기억들이 더 많았던것 같다.


비록 부모님과 함께했던 시간들은 희미했으나

그 대신 부지런하게 뛰여다니셨던 부모님 덕분이였던지

내가 유치원 다닐때쯤 우리는 마을에서 멀지않은 진으로 이사를 가게 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든 고향의 형제와, 다년간 함께 생활해온 친인들과

눈물겨운 작별 인사를 나누고 기차타고 도시로 장거리 이사를 하게 되였다.


그렇게 고향을 떠나 우리 네식구는 똘똘 뭉쳐

4가구가 한 울안에 모여사는 10평도 안되는 세집에서부터 새 생활을 시작했다.

마루바닥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연기를 맡고 가스중독에 김치국물만 들이켰던 날도 있고

한겨울에 먹을 물이 없어 땡땡 얼어버린 뽐뿌물을 젖어 올려야 했던 세집에서부터

2층집이 한줄로 쭉 즐비하게 세워져

문과 문 사이 거리가 불과 1~2메터도 되지 않는 다세대 주택구로 이사왔다.


그리고 점점 철이 들어 성숙해 가고 있는 아들 딸땜에

아버지는 그때 당시 쏘련(로씨야) 장사로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이 세칸으로 나뉘여진 단층집으로 세번째 이사를 하게 되였다.

아직도 그때 아버지가 쏘련(로씨야)에서 가져온 쵸콜렛과 쵸코파이 맛은 잊을수가 없다.

너무나 달콤하고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 행복했으니 말이다.


그후, 또 얼마나 지났을가?

부지런한 부모님의 다년간 분투로 끝끝내 불때는 집을 떠나

더이상 가스중독으로 고생할 필요가 없는 놘치(暖气)가 있는 층집으로 이사했다.


그때 무렵 소리없이 흐르는 시간과 함께

오빠는 고중입시,나는 중학교 승학을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공부에 지장될가봐 늘 혼자만 찾으셨던 고향을

올해엔 특별히 나를 데리고 함께 가기로 하셨다.


아버지와 단둘이 외출은 처음이였다.

그래서인지 과묵하고 자식들 앞에서 표현을 아끼셨던 아버지가 어색하기만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말은 없으셨지만 분명 행동 하나하나로 모든걸 배워주시는 속이 깊은 분이셨다.


고향은 여전했다.

크고 넓직하게 느껴졌던 마을길도 여간 좁기만 했고

역겨웠던 소똥냄새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정겹기 시작했다.

어릴때 짧고 희미한 기억으로 마을분들 면목은 있을리가 없었지만

하나같이 내 얼굴만 보고 아버지 이름과 나의 이름을 친절히도 불러주시는것이였다.

비록 작은 일이였지만 어린 가슴에 그렇게도 행복할수가 없었다.

고향을 떠난지 오랜시간이 흘렀으리만도 한데 잊지 않으셨다는게 고마울 따름이였다.



우리가 제일 먼저 찾은 곳은 뒷산에 안치된 친할머니 묘지였다.

친할머니 마지막 가는 길에 나는 작별 인사조차 하지 못했다.

하필이면 학교 통일시험때문에 혼자 집에 남은채

가슴으로,눈물로 할머니를 보내드려야 했다.

생전에 끔찍이도 손녀를 아끼셨던 할머니는

눈감으시기 전까지도 벽에 걸려있는 손자손녀 사진들 속에서

유독 빨간옷을 입고 해맑게 웃는 나의 사진에서 눈길을 떼지 않으셨단다.


(할머니…미안함다..못난 손녀 이제야 찾아와서 미안함다…

할머니 그동안 잘 계셨음까?? 이 못난 손녀 절 받으쇼~)


한참을 할머니와 마음속의 대화를 나누고 내려오다가

가까운 정할아버지 집으로 가는줄 알았는데 아버지는 잠간 멈칫하더니

맞은켠 울바자문을 열고 흙으로 지붕을 얹은 거의 찌글어드는 초가집으로 발길을 돌리셨다.

페허라 그런지 집은 거의 비여있었다.

예전과 달리 생기로 넘치던 마을에 놀랍게도 빈집이 많았다.

하긴 자식들 공부와 출세를 위해 마을을 떠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한참을 초가집 앞에서 망설이던 아버지의 눈가는 촉촉히 젖어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가다듬으시고 여기저기 눈여겨 보신다.

그리고 소중하게 챙기셨던 필림식 사진기를 꺼내드시고 사진 한장 남기자고 하신다.

아버지가 찍어라고 하니 말없이 그 앞에서 사진은 찍었다.

뭔가 이야기가 있을것 같지만 나는 이집에 대하여 전혀 기억이 없었다.


나중에 맞은켠 정할아버지 집에 가서야 알게 된것인데

우리가 사진 남겼던 그 찌글어든 초가집이 바로

내가 태여나고 뛰여놀던 나의 집이란다.

그말에 나는 급히 뛰쳐나가 다시 한번 자세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것이 나에겐 오직 정할아버지 집밖에 기억나지 않았던것이다.


그날 아버지와 함께 다니면서 고향에 계시는 친척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큰아버지집이 아닌 정할아버지 집에 있겠다고 고집부려

나의 성화에 못이긴척 아버지는 나를 정할아버지네 집에 데려다 주었다.

나는 늘 엄격하셨던 큰아버지가 싫었다.

그리고 내편하시던 친할머니가 없었기에 어린맘에 큰아버지가 더 무섭고 싫었다.



정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코흘리던 꼬맹이가

어느덧 소녀가 다되여 나타나니 여간 반가우신게 아니셨다.


삼촌도 이젠 4살 둘째아들애를 가진 아저씨가 다 되여있었다.

세월이 무섭다더니 지금도 그 우스개는 여전하시다.


<똥돌아, 어때 삼촌한테 시집올래?>

<됐음다…누기 삼촌한테 시집간다구 그램까.>

<니 어렸을때 맨날 삼촌 뒤꽁무니 따라다니면서 삼촌한테 시집온댔다.

이젠 다 컸다구 삼촌은 싫다는게야? 귀여운 녀석 >


정할아버지네 집은 나의 기억 그대로 친근하고 따스했다.



명길이네 마당앞에 놓인 그네가 부러워 궁시렁 거릴때

나를 극진히도 사랑해 주셨던 정할아버지는

어디서 바줄을 얻어다 외양간에 그네를 만들어 주셨다.

소똥냄새를 무척이나 싫어했던 나였지만

그네에 정신이 팔려 냄새 나는줄도 모르고 놀았는데

지금은 그 그네를 삼촌네 아들놈이 이어받아 놀고 있었고

할아버지네 뜰안에서 채 자라지도 않은 가지며, 고추를 다 뜯고 좋다고 헤헤하던 기억도,

옥수수 가득 쌓아놓은 뒤장재에 올라가 누워 하늘을 실컷 보다가 잠들었던 기억도,

뒷도랑 개울물에서 할아버지 따라 허리 굽혀 두손모아 물을 마시다

작은 몸이 지탱을 못하고 통째로 거꾸로 입수했던 기억도,

삼촌이 밭일 끝나고 휘리릭 휘바람 불면 신호라도 받은듯 달려나가

소수뢰 타고 마을 한바퀴 돌아다니던 기억도,

삼촌이 점심에 싸 가지고 갔던 벤또(도시락)를 뚜지며 남은 밥알을 뜯어 먹었던 기억도,

그것땜에 삼촌은 왕성한 혈기에 부족했을만도 한 점심도 나때문에 항상 절반 남겨주셨던 기억도,

삼촌이 실수로 먹였던 고추장에 실실 거리며 마당을 뒹구는 모습이 잼있다고

한숟가락 움푹 내 입에 넣어줬던 기억도

참으로 나의 동년의 모든 추억의 시점은 여기서부터였다.


그랬다. 삼촌의 고추장 한숟가락 돌발 행동 때문에 할아버지는 몽둥이를 들이 밀었지만

그일로 하여 나의 생활습관이 바뀔줄이야. 식탁에 고추장 없으면 거의 밥을 먹지 않았다.

그뒤로 우리집엔 사시장철 고추장이 떨어질때가 없었다.

친척집에 놀러 갈때도 내가 왔다 싶으면 밥상에 꼭 고추장이 놓여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할머니는 오늘도 어김없이 장독에서 고추장을 꺼내오신다.


<혹시나 니가 오겠는가 싶어서 매년마다 저 노치 이거 해놓구 널 기다린다, 어여 먹어~>


할아버지 말에 울컥 눈물이 날것 같았다.

친손녀도 아닌 나를, 친손녀보다 더 사랑해주신 두분이셨기에…

꾹 눈물을 겨우 참고 할머니가 맛나게 차려주신 밥상에 앉아

고추장에 쓱쓱 비벼 꾸역꾸역 맛있게 밥을 먹었다.

할아버지,할머니 사랑이 듬뿍 담겨서인지

어느때 보다도 꿀맛이였고 맛난 밥상이였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두분다 여닐곱살에 친아버지를 여의셔서

나는 태여날때부터 할아버지 얼굴은 커녕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고 자랐다.

하지만 나는 참으로 복많은 아이였다.

정할아버지가 그 빈자리를 틈새없이 꽉 채워주셨으니 말이다.


<너네 할머니가 네가 온다구 오늘에 가마에 직접 밥을 했네라

어릴때 네가 밥만하면 까마치(누룽지)를 그렇게 좋아했는데…

저기 니오면 준다고 가득 모아뒀네라,갈때 가져가>


그리고 식장우에 놓여있는 꽃소래를 여시는데 여는대로 전부다 까마치(누룽지)였다.

그 또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키워주신 이 못난 놈에 대한 사랑이였다.


조금더 일찍 찾아뵙지 못한것에 나는 참으로 죄송스러웠다.

그리고 지금에라도 더 늦지 않게 나를 데려와준 아버지께 너무 고마웠다.


할머니는 아직도 내가 애인줄로만 알고 오랜만이 라시며 품에 꼭 끌어안고 자잔다.

이젠 할머니 키보다도 더 큰 애를 말이다.


<그래도 갓난 애기때부터 너를 돌봐주면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더 행복했네라.

나중엔 할아버지도 눈만 뜨면 네가 보고 싶다고 앞집에 가서 콩알만하던 너를 안아왔네라..허허 >


<고맙음다. 내 나중에 커서두 할아버지,할머니는 잊지 않겠음다.

그니깐 할아버지, 할머니두 나르 잊지 마쇼에 .. 꼭>


<당연하지…할아버지 할머니는 우리 영이 대학가고…시집갈때까지 옆에 있을거다>


친할머니 묘소에서 내려올때 말못할 먹먹함이 가슴에 남아있었는데

정할머니 품에서 그 서러움을 어린애처럼 달랬다.


며칠째 정할머니 집에 머무르다

마지막 밤은 큰아버지네 댁으로 가야 한다는

아버지의 불호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큰아버지네 집에서 뾰로통해 있다가

오후쯤 우리는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동네 인심은 항상 후덕하셔서

시내에서는 먹기 힘들다는 개구리 말린고기며 참깨며

마른 반찬들 절인 반찬들을 넣어주셔서

올때보다 우리는 더 많은 짐과 사랑을 안고 가야했다.



추우니 나오지 말라는데도 큰아버지네 일가는 나와서

우리가 마을 어구에서 사라질때까지 배웅해주셨다.

나는 집간다는 기쁨에 철없이 뒤도 안본채 걸어갔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아버지는 한발자국 한발자국 어렵게 옮기시면서 머뭇거리셨다.



아버지는 웃으면서 저 멀리에 계시는 큰아버지를 향해 두손을 흔들었지만

가까이에 있었던 나는 분명 볼을 타고 흐르는 두줄기의 눈물을 보고 말았다.


처음으로 보는 아버지의 눈물이였다.


하지만 나도 어쩔수 없는 아버지의 딸인가 보다

아버지의 눈물을 보노라니 저도 모르게 뭔가 치밀어 올라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그렇게 나와 아버지는 큰아버지네와 작별 인사를 참으로 오래도 한것 같았다.

아버지는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으셨는지 한참 머뭇하셨다.


돌아오는 뻐스안에서…

아버지도,나도…맘을 가라앉히지 못한채 침묵만 지켰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가?

기차를 바꿔타고 침묵하시던 아버지가 묶어 두셨던 맘속의 말을 꺼내셨다.

이것도 처음이셨다. 아버지의 속심말을 들어본것이.



아버지는 3남2녀중. 넷째로 태여났고 여동생이 한명 있었다.

굶주린 배도 제대로 채우기 힘들 정도로 가난했던 60년대에

설상가상으로 아버지가 7살때 유일한 집안 기둥이셨던 할아버지는 빚만 잔뜩 남긴채

세상을 떠나셨다고 한다. 그래서 슬하의 여동생은 굶어 죽게 생겼으니

그 대신 배불리 먹고 따스하게 지낼수 있는 한족집으로 팔리워 갔단다.

그리하여 집안의 모든 무거운 짐은 장남이셨던 큰형님(나에겐 큰아버지)등에 얹히우게 되였고

큰형님은 학교도 그만두고 일찍 장가 가서 안해와 같이 어린 동생들 먹여 살리느라

두손으로 잡히는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고 갖은 고생을 다 하면서

어린 동생들 학교 보내고 장가 보내면서

아버지 역할, 큰형 역할 다해 가면서 동생들 뒷바라지만 하셨단다.


그리고 큰형님 덕분에 동생들은 하나둘 출세하여 자기 가정 꾸리고 행복하게 살고 있지만

점점 주름이 패이고 늙어가는 큰형님은 아직도 찌글어진 농촌 집에서 밭갈이 하고 모를 심고

소를 키우는 모습 보면 너무 가슴 아프고 큰형님이 너무 불쌍하여 눈물만 흐른단다.

그렇다고 떵떵 거리면서 형님네 4식솔 책임지고 도시로 데려오고 싶지만

자기에게도 가정이 있으니 참 쉬운 일은 아니라고 하신다.


그런 아버지 맘이라도 눈치 채신듯 큰아버지는 우리가 떠나기전 연신 당부하셨다.


<우리 걱정은 말거라. 애들 잘 키워서 꼭 훌륭한 사람 만들거라.

난 이젠 늙어서 그런지 고향이 젤 좋다. 누기 뭐래두 어디두 안 가구

여기 뒷산에 어머니 곁을 지키구 있을거니깐 내 걱정은 말거라…>



엄격하시기만 하시던 큰아버지의 사정을 듣고나니 못되게만 굴었던 내 자신이 미웠다.

모진 세월의 풍파속에서 큰아버지 또한 말수가 적고

아버지 역할과 ,형님 역할 겸비해야 하셨기에 동생들에게 엄격하지 않을수가 없으셨고

그 이미지 또한 우리한테까지 비춰졌던것이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큰아버지는 표현을 하지 않았지만

소리없이 나를 끔찍이도 아껴주시고 사랑해 주셨다.

그걸 철없던 내가 싫다고만 생각하고 거부했던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떠났던 고향길에서

비록 짧은 시간이 였지만 맘만은 풍요롭게 채우고 돌아왔다.

형제는 무엇으로도 대신할수 없는

부모가 만들어준 제일 큰 재산이란것을 알게 되였고

피를 섞지 않은 사람임에도 불과하고

피보다 더 찐한 인연과 정을 나눌수 있다는것도 배웠다.


그리고 나는

늘 무뚝뚝하시고

태여날때부터 나를 미워하신줄만 알았던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느꼈고

말로 아닌 행동으로 직접 보여주고 가슴으로 말하는 아버지를 이해하기 시작했고

그런 아버지가 늘 존경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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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후기:

그때로부터 10년이란 세월이 더 흐른 지금...

정할아버지는 아픔이 없는 안락한 곳에서 지금도 나를 지켜보고 계실것이다.

그리고 정할머니는 아픈 허리를 부여잡으면서도

이 손녀와 한 약속은 꼭 지키신다고

나의 결혼식에 멀리서 찾아와주셨고  그 자리를 한껏 빛내주셨다.

고집이 강하셨던 큰아버지 내외는 가족들의 몇년간의 설득하에

끝내 찌글어드는 농촌집을 떠나 아들,며느리가 있는

연해 도시에서 손자를 안고 노후를 즐기시고 계신다.

무정한 시간은 소리없이 흘러 지났지만

우리 서로의 가슴속엔 아직도 뜨거운 난류가 흐르고 있음을...


추천 (9) 선물 (0명)
IP: ♡.31.♡.39
한단 (♡.231.♡.17) - 2014/05/22 15:52:10

흠.. 돌이켜보면 저 역시도 행복한 동년이 있었음을..
가슴따뜻한 글이였습니다.

진달래8 (♡.81.♡.178) - 2014/05/23 09:45:42

한단님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힘찬 좋은 하루가 되시기를...

예의채 (♡.149.♡.163) - 2014/05/22 16:06:14

진달래 곷숲속에 스며 있는 한 가정의 력사------ 아버지의 눈물 입니다 눈물로 읽었지만 아름다운 정을 풍겨줍니다. 행복 하세요

진달래8 (♡.81.♡.178) - 2014/05/23 09:46:56

예의채님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벅찬 하루입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ymh (♡.208.♡.203) - 2014/05/23 12:19:15

참, 보는동안 눈물이 자꾸 앞을 가렸어요.
마음으로 와닿는 찐한 정들이~~너무나 따뜻하네요.
부모님에 대해 생전에 잘해주어야 하겠다는걸
다시한번 반성하게 합니다.
그리고 친할아버지, 할머니가 아니지만 아낌없는 사랑을 주셨던
그분들이 정말로 고맙네요.

진달래8 (♡.81.♡.178) - 2014/05/23 14:21:28

아낌없이 댓글 달아주셔서 고맙네요.
시간이 지나면서 느끼는건데 다른건 몰라도
사람복은 많은것 같아요.

늑대비 (♡.169.♡.98) - 2014/05/23 15:57:16

왜 나를 울림가 ㅠㅠㅠ

진달래8 (♡.123.♡.143) - 2014/05/26 08:52:30

ㅠ.ㅠ 본의 아니게....
아무튼..감사합니다.

수함 (♡.38.♡.75) - 2014/05/23 18:59:06

지다래 동무 이런재간두있으셨나요 ? 허허 ~

잔잔한 감동이 가슴을 적시는 글이였습니다

그리고 저만의 느낌인지 모르겠지만

독자들로 하여금 쉽게 이해를 할수있게끔하는

그 어떤 설득력이 뛰여나신거 같네요

그 당시 상황이랑 본인의 심경을 골고루 너무 잘버무려주셔서

이토록 따뜻하고 맛갈진 요리가 만들어진게 아닌가 싶습니다 ~ 허허

담편도 기대할께요 ^^ 추천 추천 ~!

진달래8 (♡.123.♡.143) - 2014/05/26 08:55:07

ㅋㅋ 과찬에 몸둘바 모르겠네용

자작글방에서 이렇게 만나니 반갑구

시간내서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맛있게 음미하셨다니 쓴 사람도 뿌듯하네요.

WENBIN (♡.203.♡.14) - 2014/05/26 09:39:51

따뜻한 인정미가 그대로 흘러넘치네요.
글을 보니 동년 시절이 눈따갑게 떠오르면서 가슴이 짠해나기도 하구요. 고향 생각 그리고 평생 고생만 하시다 하늘 나라 가신 부모님 생각에 그만 ... ...
가슴에 와닿는 글 추천 드립니다.

진달래8 (♡.123.♡.143) - 2014/05/26 10:13:58

늘 아버지 어머니 이름만 떠올려고 가슴이 벅차지요.

부족한 글임에도 시간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올감재 (♡.91.♡.226) - 2014/05/26 16:21:33

아주 정이 넘치는 감성적인글 잼 있게 역었네요,
그럼 진달래 님은 지금 어디세요?
아직도 학생인가요?

진달래8 (♡.123.♡.143) - 2014/05/26 16:46:55

올감재님 이렇게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학생이란 터울을 벗은지 몇해 되는

지금은 애어른이 되여 있지요. ㅋㅋ

올감재 (♡.91.♡.226) - 2014/05/26 16:21:56

아주 정이 넘치는 감성적인글 잼 있게 역었네요,
그럼 진달래 님은 지금 어디세요?
아직도 학생인가요?

진진이네 (♡.131.♡.43) - 2014/06/03 14:13:10

잘 보고 갑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

진달래8 (♡.31.♡.190) - 2014/06/05 09:15:14

진진이네님.
들려줘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시간이 되셨기를...

솜사탕520 (♡.56.♡.122) - 2014/06/19 10:57:51

감동적인 글입니다.오늘따라 한국에 계시는 우리 아빠가 보고싶네요 .~

진달래8 (♡.123.♡.75) - 2014/06/19 17:28:33

들려줘서 고맙습니다.
즐거운 하루가 되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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