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작은외할머니 그리고 예단

연집하 | 2014.08.15 09:01:47 댓글: 3 조회: 2223 추천: 2
분류수필·산문 https://life.moyiza.kr/mywriting/2335535
나에게는 친가편에 친척이라곤 단 한명도 없다. 천애고아인 아버지는 박씨가문에서 태여나서 세살에 부모를 여의고 다시 남씨네 가문에 수양아들로 들어갔다가 광복 나던해에 동북민주련군에 참군하였고 현역시절에 엄마를 만나 결혼하였다. 대신 외가편에 외할아버지 형제가 다섯분이나 되기에 친척도 줄느런하다. 외할아버지가 맏이고 그아래로 작은 외할아버지가 네분이 계셨는데 네분 작은 외할아버지의 자녀들만도 20여명이나 된다. 그러나 엄마는 우로 언니 한분만 계셨는데 광복이 나던해 1945년에 남편 따라 조선으로 나가다 보니 엄마한테는 친형제가 없는 셈이된다. 슬하에 자식이라고는 딸뿐인것을 못내 서운해하시던 외할아버지는 셋째작은 외할아버지의 작은아들을 데려다 애지중지 부양하여 대학공부까지 시켰다. 작은집 외숙부가 그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그후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비롯한 외가편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선후로 돌아 가시면서 집안에 어르신이라곤 셋째작은외할머니만 남게 되였다. 엄마는 외할아버지에 대한 원망 같은것을 전혀 마음에 담지않고 사촌들과 아주 화목하게 지내셨을뿐더러 셋째작은외할머니한테는 주일마다 어김없이 다녀오군 하였다. 작은집 5촌외숙부들도 엄마를 친누나처럼 따랐고 우리형제를 친조카처럼 반겨주었다.
한편 엄마는 외가편 대소사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다 참석하였을뿐만 아니라 늘 넓다란 가마목에서 두팔을 걷고 부엌일을 걸싸게 해제꼈다. 가문에서 작은외할머니 다음으로 엄마가 좌상이니 가만히 앉아있어도 누가 뭐라 하지 않겠지만 엄마는 항상 사촌녀동생들이나 올케들과 함께 가마목에서 바삐 돌아치군 하셨다.

우리민족은 시집오는 새며느리가 시집쪽에 예단을 갖추는 풍습이 있다. 째지게 가난하던 그세월에 예단이라야 기껏해서 데트론 옷감이였고 심지어 세수수건까지 한몫 끼여있었다. 그런데 우리외가편은 엄마네 사촌만해도 수십명인지라 가문에 들어오는 외숙모들이 시집쪽 일가친척한테 예단을 빠짐없이 돌리자 하면 늘 힘이 벅찰때가 많았다. 그래서 한번 결혼잔치를 치르고나면 외가편 친척들은 예단때문에 서로 얼굴을 붏히는 일들이 비일비재였다. 혹시 자기앞으로 차례지는 몫이 없게되면 다시는 그 집에 발길을 돌리지 않는다면서 난리를 쳤다. 다른일에 그렇게 아량이 넓은 엄마는 당신보다 아버지한테 예단이 차례지지 않으면 그토록 서운해 하시면서 외가집 식구들에게 화를 내기까지 하였다. 그럴때면 아버지가 되려 엄마를 달래서 집으로 돌아오군 하였다.

서운함을 안고 다시는 본가편으로 안 간다고 다짐하였지만 얼마쯤 지나면 엄마는 언제 그런일이 있었더냐싶게 설명절이 돌아오니 작은외할머니집으로 설 쇠러 간다면서 크고 작은보짐을 싸느라고 서둘렀다. 한편 딸하나 없는 작은외할머니는 기별이 없이 들이닥치는 엄마를 멀리서 알아보고 반가운 나머지 맨발바람으로 마당으로 뛰쳐 나오시였다. 지난세기 80년도 겨울에 작은외할머니가 장암으로 돌아 가셨을때 엄마는 대성통곡 하셨다.
"셋째숙모, 내 그때 정말 잘못했어요."
"그깐 예단때문에 숙모를 원망한걸 용서 해주소."

그로부터 7년이 지난후 엄마는 때이르게 불치병에 걸리게 되였다. 병상에 누운채 매일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있던 엄마가 어느날 작은집 사촌들의 이름을 힘들게 하나하나 외우셨다. 우리는 급기야 외가집 친척들을 불렀다. 림종을 앞두고 바짝 말라든 입술을 음씰거리면서 뭐라 말하려고 모지름을 쓰던 엄마는 초점잃은 두눈으로 외숙부를 맥없이 바라 보다가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생전에 작은외할머니에게 안겨준 상처에 대한 성찰이나 외숙부에게 용서를 비는 간절한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였을가. 그렇게 엄마는 조용히 눈을 감고 그리운 작은외할머니곁으로 총망히 떠나셨다.

그날 엄마의 림종을 지켜봐 주시던 외숙부가 눈물을 왈칵 쏟으면서 오열을 하셨다. 엄마 생전에 대소사때면 가끔 사촌누나인 엄마와 시야비야하던 외숙부지만 엄마의 두손을 꼭 쥔채로 말씀 하셨다.
"우리가문에 너의 엄마만큼 훌륭한 사람이 없다."
 
엄마가 떠나신지도 어언 28년이 되여온다. 그시기 대부분 여성들처럼 여자로 태여난탓으로 엄마는 공부를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사리가 밝고 마음씨도 착하여 가정에서 "현처량모"로 가문에서 큰조카, 큰누님, 큰언니로 살아온 엄마였다. 사촌은 둘째치고 친형제간도 서로 등을 돌리는 일이 심심찮은 요즘의 삭막한 세월에 다시 그 시절에 있었던 감회스러운 사연들을 추억하노라니 이미 돌아가신 엄마가 눈물겹게 그리워난다.
추천 (2) 선물 (0명)
IP: ♡.245.♡.74
newsky (♡.239.♡.170) - 2014/08/15 11:48:38

부엌에서 부지런히 돌아치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는것 같네요.
가슴찡한 글 잘봤어요.

북위60도 (♡.60.♡.229) - 2014/08/16 14:59:48

옛날에는 꼭 대소사를 집에서 하다보니 어르신들이 많이 고생했지요...

연집하 (♡.136.♡.146) - 2014/08/16 22:51:06

그시대 여자들이 고생이 많했죠. 남자들은 아침부터 술상을 벌리고 앉아 마셔대고 먹어주는대 술상이 채가 떨어지면 채를 올리고 술이 떨어지면 술을 다시 올리고 ..,그래서 한번 군일이 끝나면 가마목의 여자들은 쓸어져 며칠씩 앓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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