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이

xingyu | 2014.09.11 23:10:48 댓글: 19 조회: 3455 추천: 7
분류단편 https://life.moyiza.kr/mywriting/2377734

오후 세시쯤. 

내가 마지막 번역본을 출판사에 팩스로 보낸 뒤 느긋하게 차 한 잔을 하고 있을 때였다. 벨소리가 울려 전화를 받아보니 뜻밖에도 엄마였다. 아마 간호사가 대신 걸어준 모양이다.

엄마는 웬만해서 내게 전화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엄마가 전화할 때는 좋은 일이 별로 없었다. 늘 불평과 불만을 쏟아내는 엄마의 전화는 원고를 재촉하는 출판사전화 다음으로 받기 껄끄러웠다.

 

< 네, 어머니. > 나는 조심스럽게 수화기저편에 엄마의 동정을 살폈다.

< 너 향이 기억나냐? 향이 갸가 어제 죽었다는구나. 전주대학병원이라던가...>

< 향이요? > 선뜻 떠오르는 얼굴이 없었다.

< 그래. 너랑 소학교 같이 다니던 아말이다. 가네 엄마랑 나랑 친구였잖아... >

< 아, 기억나요. > 나는 그제야 끽해야 소학교 6학년을 함께 다녔던 엄마친구 딸 향이를 기억해냈다.

< 안됬네요. 어쩌다 죽었어요? > 딱히 궁금한것도 아니지만 1년동안은 같은 반에서 지냈다는 이유로 엄마의 친구딸이라는 이유로 그리고 수화기너머 물어봐주길 기다리고 있는듯한 엄마의 침묵이 나의 입을 열었다.

< 알콜중독이라더구나. 죽을 때 고작 33키로였대. 불쌍한거... > 또 잠깐의 침묵. 엄마가 혀로 마른 입술을 적시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 니가 전화 좀 해주라. 향이 엄마한테. 그래도 한때는 니 동창이였잖아. 한국엔 일가친척도 없다는구나... 순금이(향이 엄마 ) 전화전호 보낼테니 꼭 전화해라. >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도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그 다음날도 그 다다음날도... 아마 전화를 끊고 나서 엄마는 또 다른 기억속으로 빠져들었나보다.

 

추석을 앞둔 며칠전.

밤 새워 번역한 소설의 부분부분들이 뭉텅뭉텅 짤려 재편집되서 곧 인쇄에 들어간다는 편집장의 만족스런 웃음소리를 폰으로 확인하고 나서 나는 곧장 요양병원으로 향했다. 엄마가 좋아하는 모시떡을 사들고.

점심을 한참 넘겨서야 병원에 도착했다. 수간호사가 전에 없이 반기는 기색이다.

< 안녕하세요, 김작가님. >

< 네? 네... > 갑작스런 작가호칭에 나는 뜨악했다.

< 소설 " 낙"에서 프로필사진을 보고서야 선생님이 작가였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저 작가님 팬이얘요, 작가님 쓰신 모든 소설과 번역소설은 전부 다 읽었는걸요. >

< 아, 네. 감사합니다. > 지난번 출간하며 출판사에서 하도 닥달을 하는 바람에 기어이 정면사진 한 장이 책속에 박혔다. 결국 이런 사태가 벌어지고 만것이다.

< 아뇨. 제가 더 감사하지요. 좋은 글을 읽게 되서 감사하고 또 그 작가를 직접 볼 수 있다는건 더없이 행복한 일이죠. > 상기된 수간호사의 얼굴이 나를 긴장시켰다. < 이거 쑥스러운데요, 보시다싶이 이 모양입니다. >

얼른 자리를 뜨고 싶었다. 별로 유명하지도 않거니와 스타급작가들처럼 세인들의 주목을 받는 일은 나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렇다고 기분이 나쁜것은 아니였다. 다만 이제부터 병원에 들어서기 전 룸미러로 자신을 한번 더 훑어보는 일이 생겼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무릎이 닳은 청바지와 한번 입었던 셔츠를 또 입고 왔다. 두번이던가.

여튼 입고 있던 그대로 왔던것이다.

 

담당선생님을 만났다. 늘 같은 얘기였다. 치매는 낫는 병이 아니다, 약물치료는 그 진행을 늦춰줄 뿐. 보호자는 인내심을 갖고 마음을 편하게 먹어야 한다는 등등.

병실로 찾아가자 엄마는 휠체어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 저 왔어요. > 내가 부르는 소리에도 그 눈동자는 미동도 없었다. 지금은 깊이를 잃어버린 눈동자였지만 젊은 시절은 분명 숱한 남자들을 뒤흔들었을 것이다. 엄마의 기억들이 또 어느 추억의 공간에서 널뛰기하는지 나로선 짐작할 수 없다. 나는 휠체어를 밀고 밖으로 나갔다. 해볕은 따갑고 그늘은 시원했다. 이따금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 너 향이 알지? 향이가 죽었대. 알콜중독이였대. >

< 네. 참 안됬네요. > 나는 무심코 대꾸했다. 치매환자한테는 했던 얘기 자꾸 또 하냐고 역정을 내봤자 소용이 없다. 오히려 병증만 더 악화시킬 뿐이였다. 그들은 지구상에 유일무이한 아무런 구애 없이 시공간을 초월하는 존재들인것이다.

< 향이 남편이 바람을 피웠대. 향이가 한국에 있는 동안 바람이 난게지. 향이가 눈치채고 들어갔을 때는 이미 늦었지. 남편이 그 여자랑 못헤여진다고 이혼하자했다더구나. 울고불고 해봤자 소용없는 짓이였지. 마음이란 그런거야, 갈팡질팡하는것 같다가도 한번 빠져들면 헤여나기 힘든 법이지. 결국 이혼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매일 술에 빠져 살았다는구나. 순금이가 전남편이랑 이혼한것도 그늠의 술 때문이였는데 하나밖에 없는 딸년도 그 에비를 쫓아 알콜중독이 되버렸다. 그렇게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된게지. 병신같이... 남자가 어디 그 하나뿐인가? 널린게 남잔데. >

< 죽을 때 33키로였다는구나, 불쌍한것. > 어느 틈에 다시 나랑 같은 시공간으로 돌아오게 된 엄마의 기억은 전보다 세세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야외테이블에서 엄마는 모시떡을 먹고 나는 향이를 생각했다.

 

소학교 때의 향이는 얼굴에 보조개가 패이고 수줍음이 많은 아이였다.  젖살이 남아있는듯한 얼굴은 통통했고 눈두덩이에 유난히 살집이 많고 어느 한곳 딱히 이쁘다고 말할수 없는 애였다. 그런 향이가 어느날 내게 말을 걸어왔다.

< 니네 엄마랑 울 엄마 친구사인데 알고 있니? > < 아니. >

이것이 우리 둘만의 첫번째이자 마지막 대화였다. 내가 기억하는 어릴적 나는 차가운 아이였다. 엄마의 말을 빌리자면 인정머리 없는 놈이였다. 지금도 썩 친절하지 못하고 무뚝뚝한 사람이지만.

엄마가 모시떡 반접시 비우는 동안 나는 또 다른 향이를 떠올렸다. 그 향이는 헤픈 여자아이였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1학년 다니던 중이였다. 중학교 진학을 포기한 향이가 거리불량배들과 어울리더니 성폭행을 당했다는 그런 소문이 떠돌았다. 더러는 집단성폭행이였다는 소문도 있었다. 어른들도 쉬쉬하고 아이들도 너만 알고 있어 하던 소문들이 널리 퍼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대부분의 나쁜 소문들이 그러했다. 무겁게 가라앉은 LPG가스마냥 사람들을 서서히 중독시켰다.

어처구니 없는 소문들이 점점 더 많이 들려왔다. 구치소에 갇혀 있던 그 파렴치한 놈을 합의금 2만원에 고소취하하고 풀어주었다는 소문이였다. 향이를 다시 길거리에서 만나기 전까지 나는 그 소문들을 믿지 않았다. 결혼식장도 아닌 길거리에서, 짧은 미니 드레스에 짙은 화장을 한 향이를 본 순간 모든 소문은 내 머리속에서 기정사실이 되버렸다.

향이가 나를 보며 웃었지만 나는 외면했다. 나는 단돈 2만원에 팔려버린 헤픈 여자랑 웃고 싶은 기분이 아니였다. 풋돈 2만원에 딸의 정조를 팔아버린 그 에미나 줏대도 없이 거기에 수긍하고 요상한 옷차림에 길거리를 떠돌아다니는 향이나 별다를게 없는 역한 존재들이였다. 그것이 14살인 내 눈에 비춰진 그들의 진상이였다. 그리고 그들은 내 머리속에서 점점 잊혀졌고 나는 단발머리 여자아이로 가슴앓이를 시작했다.

 

모시떡 한 접시를 비우고 나자 엄마는 또 새로운 사실을 기억해냈다. 엄마에겐 전혀 새로울것 없는 기억의 밑바닥에 꽁꽁 숨겨놓았던것들이 봇물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 향이 의붓에비. 그 인간도 못되먹은 쓰레기야. 순금이(향이엄마) 몰래 향이 몸을 여러번 더듬었다더구나. 그래 둘이서 싸우고 난리도 아니였는데 그래도 그 남자랑 붙어살더라. 역겨워서 원. 향이 그 어린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가. 순금이 그년도 멍청한 년이지. 남자가 어디 그 하나뿐인가? 세상에 반은 남잔데... >

< 그리구 넌 모를게야. 니 애비라는 작자도 한동안 순금이네 집에 자주 들락거렸다는거. 그 때가 아마 순금이랑 그 놈이 싸우고 나서 한달쯤 떨어져 있었을 때일거야. 말로는 문고리를 고쳐주고 왔다는데, 그 동네 문고리 고칠 남자는 씨가 말랐나보지... >

세상의 반인 남자중에서 내가 태여나고 또 그 세상의 반이 되었다. 세상의 반을 차지한 이 미물에 대한 어떤 질문이나 해답도 질타도 듣기 거북해진 나는 서둘러 엄마를 모시고 병실로 돌아왔다. 나름 공간이동을 한 셈이였다. 치매환자들은 시각적 공간이동에 따라 기억의 공간도 바뀐다.

 

창가로 해가 지고 있었다.

< 이제 가볼게요. > 엄마의 입은 또 다시 닫혀버렸다. 참 다행이란 생각을 하며 병실을 나서려는 순간 엄마가 나를 불렀다.

< 너 향이 알어? 향이가 죽었대. 죽을 때 33키로였대. >

< 네, 알아요. 엄마가 몇번이나 말해줬잖아요.. > 나도몰래 짜증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그래? 그럼 방금 그 태도는 뭐야? 향이가 죽었다구!  슬프지 않아? 불쌍하지도 않아? 너나 너 애비나 남자들은 다 똑같애. 못되처먹은 족속들이야! >

갑자기 고함을 지르던 엄마는 끝내 울음이 터져버렸는데 쉽사리 진정이 되지 않았다. 담당의사의 지시아래 진정제 한 대를 맞고 나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나는 담당의사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며 게면쩍게 웃었다. 그는 다 알고 있다는듯 고개를 몇번 주억거리고 나가버렸다. 나도 엄마의 눈가에 맺힌 눈물과 대면하기 껄끄러워 서둘러 병원을 나섰다.

주차장을 서서히 빠져나오는데 멀리서 수간호사가 뛰여왔다. 내 신작 소설집을 내밀며 싸인을 부탁했다. 그리고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돌아갔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어느 암자에 들렀다. 법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법당과 맞붙은 방에서 간간이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합장을 하고 눈을 감았다. 향이를 위해 뭔가 빌어줘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녀를 위해 딱히 무엇을 빌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지갑을 열어보니 신용카드 한 장과 동전 하나가 들어있었다. 나는 그 오백원짜리 동전 하나를 시주함에 넣고는 암자를 떠났다.

추천 (7) 선물 (0명)
나는 죽을 때까지 흔들리는 어른아이다......
IP: ♡.159.♡.18
솜사탕520 (♡.56.♡.122) - 2014/09/12 10:02:01

히유, 왼지 이글 읽고 먹먹합니다. xingyu님의 충실한 팬입니다.님 올린 글은 꼭 확인해보는 일인입니다.재미있게 잘보고 갑니다.

xingyu (♡.159.♡.18) - 2014/09/13 15:09:35

닉넴이 서먹하진 않군요 ㅎㅎ 고마워요, 성원에 힘 입어 또 으쌰!

HAUS (♡.191.♡.225) - 2014/09/12 11:11:09

잘 봤습니다.
저는 제일 무서운 병이 치매라구 생각합니다.
다음글 기대합니다.

xingyu (♡.159.♡.18) - 2014/09/13 15:15:14

저 또한 그래요. 치매예방차원에서 만리장성이라도 열심히 쌓아야 할듯 싶습니다. ㅋㅋ

파아란8 (♡.246.♡.150) - 2014/09/12 12:30:37

글을 정말 잘 쓰시네요, 글귀 한마디 한마디가 머리에 박히는 ...
작가님이신가요?
향이 ~~ 잘 읽고 갑니다.

xingyu (♡.159.♡.18) - 2014/09/13 15:18:25

ㅎㅎ 감사합니다.또 뵙시다~

세꼬 (♡.96.♡.211) - 2014/09/13 11:53:36

향이 또 다른 한명의 향이 그리고 향이 엄마..주인공의 엄마 ..여자라서 겪어보지 않고도 그 아픔이 느껴집니다

여자의 마음을 알아줄수 없게 만들어진게 남자인걸 어떻게 할까요 ... 신에게 반항할수도 없는 일이고...

가끔 볼수 있는 xingyu님의 글 ..잘 보고 갑니다

xingyu (♡.159.♡.18) - 2014/09/13 15:24:30

오죽하면 서로 다른 별에서 왔다고 했겠어요.ㅋㅋ 그래서 언제나 서로가 종잡을 수 없는 호기심의 대상인가봅니다. 음..

두나네엄마 (♡.50.♡.58) - 2014/09/13 22:58:52

자작글게시판에 이처럼 깊은맛이 우러나는 글 처음 읽었습니다.
프로작가시죠
앞으로도 많은글 부탁드립니다

두나네엄마 (♡.50.♡.58) - 2014/09/13 22:58:55

자작글게시판에 이처럼 깊은맛이 우러나는 글 처음 읽었습니다.
프로작가시죠
앞으로도 많은글 부탁드립니다

xingyu (♡.159.♡.18) - 2014/09/14 10:59:11

감사합니다 ㅎㅎ

보라빛추억 (♡.55.♡.162) - 2014/09/14 22:16:05

잘보구 갑니다.
xingyu님 글있길래 바로 들와 밨는데
역시 감탄합니다.
한이름으로 여러가지 사색을 하게됩니다
어찌보면 우리가 곧 아니면 나중에 라도 맞이하게 될게 치매 아니겠습니까.
부모님한테 어떡해야 되나 자식으로써 돌이켜보구 있을때 잘하겠습니다.ㅡ감사합니다^^
좋은글 많이 부탁합니다.

xingyu (♡.159.♡.18) - 2014/09/17 20:40:45

네. 있을 때 잘합시다! ㅎㅎ 효는 아무리 하여도 지나치는 법이 없으니....

풍운해지 (♡.36.♡.210) - 2014/09/17 19:48:34

참 글 잘쓰시네요. 한때는 글을 썻는데 근래에 왜서인지 자꾸 시작하다 끊어지네요. 친구라도 하기싶네

xingyu (♡.159.♡.18) - 2014/09/17 20:47:12

책을 읽다 보면 답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ㅎㅎ 친구라.. 쪽지 주세요~

달빛과약속 (♡.246.♡.14) - 2014/09/23 15:09:54

작가님 맞으시죠? 마음에 와닿는 글이네요.

xingyu (♡.159.♡.18) - 2014/09/25 21:00:04

감사합니다 ㅎㅎ

Miss 오 (♡.169.♡.18) - 2014/09/25 16:52:52

오늘오후 단숨에 님 글 검색해서 다 읽었네요.
바다이야기는 끝난거예요?
이혼은 어떻게 되구요? 궁금
모이자에 간만에 작가님 나타나셨네요.

xingyu (♡.159.♡.18) - 2014/09/25 21:01:55

바다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 여럿 되는군요~ ㅎㅎ 아마도 했을거라 짐작하면서..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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