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년을 회억하여 (15) - 셋째 숙부 규방(圭邦)

영우맘 | 2014.11.04 14:34:03 댓글: 0 조회: 1692 추천: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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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숙부 규방(圭邦)

      셋째숙부는 농사일에 흥취가 없는 분이다. 그는 해방전부터 집을 떠나 개산툰 팔푸공장, 도문철도등 곳에서 일하였다. 그러면서 룡정 룡지촌 색시를 만나 결혼하였다.

      해방후에 할아버지는 그더러 이 땅에서 농사하라고 하며 새로 지은 큰 집 서쪽에 사랑채를 지어 세간냈다. 그러나 농사는 그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였다. 그래서 처자들을 데리고 조선 회령에 가서 공장, 탄광, 탐사대등 곳에서 일하였다.

      조선에 가서 얼마 되지 않아 조선전쟁이 폭팔하자 피신하여 우리집에 와 있었다. 그때 우리집 사랑채에 숨어살면서 우리집 손마선에 서랍이 세개 달린 마선틀을 짜주었는데 셋째숙부도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재간으로 아주 멋진 마선틀을 만들었다. 그리고 닭알 노란자위로 칠을 했다. 이 마선틀은 지금도 마선과 함께 고물로 남아 있다.

      그때 나는 식사시간이 되면 식사하라는 심부름을 했는데 하루는 부주의로 사랑채 문앞에 쌓아 놓은 썩박나무사이에 발이 빠져들어가며 종아리가 나무옹지에 긁히었는데 내가 너무 아파서 소리치자 셋째숙부는 뛰여나와 나를 안고 집에 들어가 흰 천에 석유를 묻히여 상처를 싸매주었다. 아마 그 당시는 석유를 바르는것이 감염을 방지하는 유일한 방법이였던것 같다. 그때 얼마나 아팟던지… 그 상처는 지금도 남아 있다.

      전쟁이 대치국면에 접어들기 시작한 52년에는 피난민에 대한 단속이 얼마간 풀리여 셋째숙부도 사회에 나와 활동을 할수 있었다. 그래서 셋째숙부는 지신에 내려와 먼저 ‘약국 장가’네집 뒤 ‘개장사’네집 옆집에 있다가 합작사(지금 림장) 앞길 건너 허물어져 가는 빈집을 수리해서 거기서 살았다. 그 기간 셋째숙부는 지신에서 정미소, 철공장등에서 일을 하다가 후에 리원용형님과 함께 발전소를 세워 지신촌에 전기도 공급하고 정미도 하였다. 그때 지신구에서 이름있는 기술자들은 모두 거기에 모였는데 정미소는 목탄으로 내연기를 가동시켜 쌀을 찧었고 발전소도 휘발유가 아닌 목탄을 썻다.

      셋째숙부는 후리후리한 체격과 환한 얼굴의 멋진 미남자였으며 온화하고 세심하고 총명하며 손재간이 대단했다. 조선전쟁이 끝나자 54년봄에 대부분 난민들이 조선으로 복구사업하러 돌아가게 되였는데 셋째 숙부도 례외없이 두 아들 희용이, 만용이를 데리고 보잘것없는 가구들을 여러집것과 함께 자동차에 싣고 조선 회령으로 떠났다.

      나는 그날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는데 할머니는 날로 못해가는 할아버지 건강때문이였는지 삼합쪽으로 사라지는 셋째아들네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오래도록 자리를 뜨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결국 셋째숙부는 할아버지의 림종도 보지 못하였고 할머니가 세상뜨셨을때도 오지 못했다. 다정다감한 삼촌이 그 국경만 아니였다면 어찌 오지 않았겠는가?

      셋째숙부가 지신에 계실때는 내가 학교가기전이였다. 그때 셋째삼촌집에 놀러갔다가 난생처음 영화를 보았는데 영화 이름이 ‘용감한 사람’과 ‘량산백과 축영대’이다. 어찌나 인상이 깊었던지 지금까지도 영화이름이 잊어지지 않는다. '용감한 사람'은 쏘련전투편이였는데 그 후에는 다시 보지 못했다. '량산백과 축영대'는 영화에서 묘가 갈라지고 축영대가 묘안으로 뛰여들자 나비가 나오던 장면은 얼마나 신비했던지! 처음 영화를 본 나한테는 정말로 신선한 충격이였다.

      셋째숙모 역시 조용하고 인자한 분이다. 조선전쟁 피난기간에 셋째숙부는 거의 우리 집에 있었으나 셋째숙모는 아이들을 데리고 본가에서 많이 보냈다. 셋째숙모는 노래를 잘 불렀는데 아직까지 인상에 남아 있는 명곡들이 몇개 있는데 그 가사는

두망강 압록강에 눈물 뿌리며,
다 달았네 간도 서울 용정이로다.
굽이굽이 감돌아드는 해란강수는,
산천초목 기묘하다 일송정 덕에…
 
이강산 락화유수 흐르는 봄에
샛파란 잔디 우에 피는 맹서야
세월이 금을 실어 마음을 실어
꽃다운 인생살이 고개를 넘자

등 많은 노래를 재미있게 불렀다 .

      셋째숙모는 또 옛말도 아주 재밋게 잘했는데 형님네와 나는 짬만 있으면 옛말을 해 달라고 졸라댔고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또 친구들에게 해주기도 했다. 나도 이제는 세월의 흐름이 허무하여 내용은 많이 잊어졌으나 후에 보니 ‘삼국연의’ 중의 이야기가 많았었다.


      1957년도 나는 어머니와 같이 회령군 학포 탄광마을에 있는 셋째숙부집을 찾아 간적이 있다. 그때 갑용이, 을용이 두 동생들이 더 생겨있었다. 그때 가장 인상깊은것은 셋째숙부가 벌소초를 만드는 공구를 제작했는데 길이가 40cm 직경이 8cm정도 되는 연으로 된 원주에 삼릉 홈을 수천 개를 팟는데 두 원주의 홈이 서로 한 치의 오차없이 기계로 가공한것처럼 딱딱 들어맞았다. 셋째 숙부는 정말 재간이 대단한 분이었다.

      우리 가문에는 셋째들만 술을 잘 마신다. 셋째숙부는 술을 무척 즐기셨는데 74년도에 연길에 마지막으로 왔었다. 그 당시 병사리 술(병으로 포장된 술)은 구하기 힘들었는데 큰 형님이 60도짜리 조양주 몇병을 구해드렸었다. 셋째숙부는 하루 세때 놓치지 않고 술을 드셨는데 이미 쉰을 넘긴 나이에도 60도 술을 하루에 한근넘게 마셨다.

      그때 셋째숙부는 보약과 페병에 쓰는 약, 소염제와 감기약등을 구해달라고 하셔서 큰 형님이 록용, 인삼과 기침약등을 사드렸는데 후에 알고보니 셋째 숙부는 페병으로 고생하시다가 페암으로 60여세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때 셋째숙부는 회령부근 학포탄광 탐사대 에서 일을 하셨다고 했는데 그후 편지래왕이 없어서 주소도 잘 몰랐지만 후에 조선이 어려울 때에도 그들은 한번도 우리에게 도움을 바란적이 없다. 숙모와 사촌형제들은 모두 자존심이 강한 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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