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년을 회억하여 (16) - 넷째숙부 규열(圭烈)과 조선전쟁-1211고지전투

영우맘 | 2014.11.05 15:22:04 댓글: 1 조회: 2522 추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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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숙부 규열(圭烈)

내가 인상깊은것은 우리 집에 있던 넷째숙부의 지신소학교때 찍었던 축구운동원사진이다. 그때 숙부는 지신소학교에서 축구운동선수였는데 키파 즉 꼴문지기이였다. 어느해 지신향에서 8.15에 운동대회를 했는데 넷째숙부는 성남대 키파로 나갔다. 그때 성남대는 뽈을  잘 차지 못하여 계속 공격을 받았는데 넷째숙부가 얼마나 잘 막았는지 성남대는 꼴을 하나도 먹지 않고 도리려 꼴을 넣어 승리를 하게되여 넷째숙부는 바로 지신의 명키파로 소문났었다. 우리 가문에 운동원이라고는 없는데 넷째숙부가 유일하게 이름이 났던 축구선수였다.

조선전쟁이 터지자 연변에서 대규모 징병이 있었다. 넷째숙부도 자원참전을 지원했다. 당시 성남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참군했는데 참군할때 분위기는 그리 좋지 않았다. 우리집에서도 숙부가 참군한다고 걱정을 하는데 넷째숙부만은 휘바람 색색불면서 친구들과 동네분들에게 작별인사하며 다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전쟁이 끝나고 후에 넷째숙부는 무사히 귀환을 했지만 그때 참군을 두려워했던 사람들은 모두 돌아오지 못했다. 그중에는 넷째숙부의 처남도 포함 되여있었다.

넷째숙부는 항미원조일원으로 참전했는데 무슨 영문인지 조선인민군에 편입되였으며 유명한 1211고지 전투에도 참가하였었다. 넷째숙부의 말씀에 의하면 그가 부상당한 날까지는 부상병들이 후방으로 호송되였으나 이튿날부터는 호송되지 못했다고 한다. 1211고지 참전용사들중에 살아남은 분들이 몇명 안 되는데 이는 하늘이 도와준 운이 아닌가 싶다. 넷째숙부는 1211고지 참전용사의 자격으로 국기 훈장 3급을 수여받았다고 했는데 그때 많은 사람들은 이를 믿지 않았다. 후에 나도 많은 책들을 찾아보았는데 이는 사실인것 같다.

휴전후 숙부는 인민군일병으로 강원도에 제대되였다가 1957년에 친척방문의 기회로 중국에 들어오게 되였는데 조선측 해관에서 넷째 숙부가 휴대했던 모든 전쟁에서 수여받은 훈장이나 문건들은 해관에 남겨두고 돌아갈 때 찾아가라고 했단다. 그러나 넷째숙부는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그렇게 중국에서 조교가 되여 어이없게도 참전공신이였지만 아무 권리도 없이 심지어 중국국민이면 모두 부여 받는 천을 살 때 쓰는 부표(布票)마저 받을수 없게되였다.

나는 조선전쟁과 1211고지 전투에 대해 간단히 쓰려한다. 그것은 넷째삼촌의 공적을 좀 더 상세히 알려드리고 싶어서다.

1950년 10월 25일, 지원군의 참전으로 전쟁국면은 완전히 역전되였다. 지원군은  整師 整團이 미군을 섬멸시키기 위한 1,2,3차 전역을 벌이였는데 미군은 번번히 공중우세로 간신이 부대번호를 지울 지경의 참패는 모면했으나 부대의 손실은 엄중하여 중장비를 버리고 비행기의 엄호하에 서울까지 내여주며 남으로 도주했다. 이것이 남조선에서 말하는 1.4후퇴다. 지원군은 미군을 추격하여 37도선까지 진격하였다. 이때 김일성과 쓰딸린은 계속 진격하여 남조선을 해방시킬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모택동은 공군이 없는 상황에서 제 2차 ‘인천상륙’을 고려하여 진격하지 않았고 미군은 군사를 재 정비하여 서울을 되찾았다. 
 
지원군과 인민군은 서쪽으로는 38선이남 임진강천험을 리용하여 임진강북에 땅굴을 파서 요새를 쌓고 철원부터 그 이동 동해까지 38선 부근에서 땅굴을 파며 방어공사를 구축했다. 이렇게 1951년 여름에는 전쟁이 거이 원점에 돌아와 있었다. 다만 원래 옹진반도의 38선이남, 황해도 해주이남의 땅은 북에서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곳은 조선전쟁 이전에도 충돌이 심한 곳으로 미군은 이곳을 되찾을 생각은 없었으며 그 대신 철원부근 한탄강평원을 차지하려고 했다.

당시 미국은 조선에 많은 대가를 치를 생각이 없어 조속히 조선전쟁을 결속지으려 했다. 아이젠하워는 한편으로는 담판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에서 지원군에 심중한 타격을 주어야 전쟁이 결속될수 있다고 여겼으며 반면 쓰딸린은 조선전쟁이 끝나면 동구라파가 위기에 직면하게 되기에 미국을 묶어두는 유일한 방법은 조선전쟁을 계속하는 것이라 여기였다. 그러나 중국도 전쟁을 계속하는것을 반대했다.

그리하여 담판하면서 싸우는 전쟁이 2년간이나 지속되었다. 담판은 처음에는 개성에서 후에는 판문점에서 했다. 조선전쟁기간에 가장 치렬하고 참혹한 전투는 바로 담판을 하며 담판을 위한 전투었다. 그 전투가 바로 한탄강평원을 쟁탈하기 위한, 한치의 땅도 양보하지 않은 또 양보할수 없는 전투었다. 조선전쟁 3년남짓한 기간에 제일 사람이 많이 죽은 전투도 이 기간에 몇개 주요고지에 포격과 폭격에서였다.

사실 쓰딸린은 조선전쟁을 발동한 장본인이며 조선사람으로 조선사람을 살육시킨 원흉이며 조선반도 문제를 오늘까지 해결하지 못하게한 력사인물중의 하나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많은 사람들이 죽지도 않았을것이며 대립과 갈등이 오늘같이 엄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1211고지는 우리가 알고있는 상감령고지 동쪽에 있다. 상감령고지나 1211고지는 철원북동쪽 김화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즉 한탄강평원 남쪽에 있다. 이 두고지전투는 모두 결국 북에서 고지도 내여주고 한탄강평원도 내여주는것으로 결말을 지었고 이 전투에서 지원군과 인민군이 엄청난 희생과 대가를 치렀지만 한탄강평원 이북에 군사방어시설을 구축하게 되였다. 만약에 이 저격전이 실패했다면 또 3-40 리를 더 후퇴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1211전투에서 하루에도 수십만발의 포탄과 폭탄이 고지에 떨어졌으며 하루에도 고지의 주인이 몇 번씩이나 서로 바뀌고 산에 나무 한구루 서 있지 못하고 산 전체가 한메터이상 깍여 내려앉고 주봉고지가 몇 메터씩 내려 앉은 전투다. 이건 전투의 치렬함과 가혹함을 충분히 설명한다. 이는 세계전쟁사에 전례없는 전투였으며 이 저격전의 승리로 현재 군사분계선이 위치가 확정하게 돠였으며 전쟁은 결속짓게 되였다.

이 전투에서 생존한 분들은 전투초기에 부상으로 후방에 호송된 부상병들과 전투가 끝나는 때까지 고지를 사수하였던 최후의 용사 몇분뿐이다. 전투가 가장 치렬하던 시기에는 용사들은 죽기로 포화를 무릅쓰고 고지를 향해 돌진했을뿐 부상병들 호송은 할수 없었다. 때문에 1211고지 전투에서 생존한 분들이 얼마되지 않는다. 이 전투는 조선인민군의 자랑이며 이 전투도 상감령전투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공화국의 영웅들이 배출되였다. 휴전후 조선내각은 1211전투에서 생존한 모든 용사들에게 국기 훈장 3급(영웅 칭호)을 수여했다고 한다.

넷째숙부가 군대 가는 날 할머니의 근심은 말할수 없이 많았다. 할머니의 생에는 언제나 근심과 걱정이 떠나지 않았던것 같다. 1944년에 둘째아들이 일본놈들이 감방에서 생사의 고비를 간신이 넘기고 구사일생으로 돌아와 허약한 몸으로 농사를 짓고 있는데 1947년에는 큰 아들이 불의의 사고를 당해 먼저 떠나보내야 했고 1950년에 조선전쟁이 나자 셋째가 피신해 와서 숨어살고 있는데 또 넷째가 전쟁마당으로 떠난다고 했으니 말이다.

넷째숙부가 군대가던 날은 10월중순이다. 늦가을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아쓸한 날이다. 우리친척들이 모두 지신까지 갔는데 지신 중학교 앞 구성원 상점 근처에서 넷째숙부등 참군가족들이 마차 몇대를 타고 용정으로 향했다. 그때 넷째숙모와 어머니도 덕용이를 업고 따라 떠났다. 우리 일행은 마차를 따라 지신소학교 제5교사 뒤 자유하 골물이 내려오는 곳까지 바래였다. 이튿날 넷째 숙모네는 돌아 왔다.

1957년봄 아마 3월말, 4월초였던것 같다. 밤새내린 봄눈이 내 무릎을 넘었다. 나는 여느때와 같이 학교에 갔다. 간조시간이었는데 눈때문에 체조는 할수 없었는데 장난꾸러기인 나는 다른 아이들과 같이 밖에서 눈싸움을 하면서 놀고 있었다. 이때 한 사람이 배낭을 메고 눈길을 힘들게 뚜벅뚜벅 걷고 있었다. 그 사람은 혹시나 하면서 우리가 놀고있는 쪽을(지신소학교 정문) 바라보는 것이였다. 이때 나도 무심이 고개를 들어 보았는데 넷째숙부였다. 그런데 넷째숙부는 조카를 지척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는것이였다.  나는 ‘아즈바이!’  하면서 달려갔고 넷째숙부는 한참이나 멍하니 서서 보더니 그제서야 나를 알아보고 ‘이게 락용이 아니야! 야 모질컷구나!’ 하며 할머니, 숙모, 덕용이 안부를 물어보는것이다. 나는 대충 알아듣고 예, 예 대답하며 어디에서 오느냐고 물었는데 숙부의 강원도 사투리는 한마디도 알아들을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상학종이 울려서 나는 교실로 가야했고 가면서 ‘군대에 가더니 한족 말을 잘한다’고 생각했다.

그날 수업은 오전에 끝났다. 나는 부랴부랴 집으로 향했다. 내가 아래마을 넷째숙부 집에는 들지도 않고 집으로 가는데 둘째숙부와 어머니는 할머니를 수레에 모시고 모래불 내리막을 내려오고 있었다. 어머니는 나보고 넷째숙부를 보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예’ 하면서 ‘넷째 숙부가 어찌 한족말을 잘하는지 알아듣지 못하겠다’고 했다. 둘째숙부와 어머니는 웃기만 했다. 나는 할머니를 따라 넷째숙부 집으로 왔다. 할머니는 돌아온 아들을 바라보며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눈물만 흘리셨다.

1960년대초, 3년재해기간에 국가에서 布票를 내여주어 그것으로 천을 사게 하였는데 넷째숙부는 공훈대우는 커녕 布票마저 받지 못하는 처지가 됐다. 대학에 다니던 큰 형님은 이 일때문에 몇번이나 장춘주재 조선영사관에 편지를 써보냈는데 1964년에야 넷째숙부의 국적문제가 해결되였다. 그러나 대우문제는 1990년대에 겨우 해결되였지만 일반 참전전사의 대우였지 공훈용사의 대우는 아니었다.

넷째숙부는 장풍동에 1974년까지 계시다가 석정향으로 이사가셨댔는데 1985년에 큰 아들 덕용이를 따라 연길에 왔다가 중풍으로 오래동안 고생하시다가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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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달팽이 (♡.234.♡.53) - 2014/11/11 16:14:00

우리 민족의 역사이시네요. 책을 내시는데 한표입니다.
우리 민족의 후대들에게 알려줘야 하는 중요한 문장들입니다.
당사자들이 저서한것이기에 더욱 값진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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