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년을 회억하여 (18) - 고모 금진(今珍)

영우맘 | 2014.11.08 18:40:11 댓글: 2 조회: 1821 추천: 4
분류실화 https://life.moyiza.kr/mywriting/2456209
고모 금진(今珍)

나는 1952년~1953년 여름에 성남촌에서 꾸리는 고모가 선생님으로 있는 유치원에 다녔다. 내가 유치원에 가는 첫날, 어머니는 나에게 평생 잊지 못할 교지같은 말씀을 하셨다. "너 어디 가서던지 잘 못해서 얻어 맞아 울며 다니지 말아라! 남들이 너를 홀에미 자식이라 손가락질 말게!"  집을 나서는 나에게 이 말씀은 좌우명처럼 들리었다. '나는 누구에게도 지면 안된다.', '아무리 아파도 울면 안된다.' 이것이 그때 내가 가슴속에 새겨놓은 좌우명이었다.

당시 유치원선생님은 고모와 번동에 있는 고모의 친구 영숙이였다. 유치원은 대반과 소반으로 나누어졌고 나는 대반에 다니였다. 학생 수는 40여명 정도였으며 교실은 촌정부 강당이다. 대반 선생님은 고모였으며 대반에서는 습자, 가  나 다 라도 좀 배워주었다. 고모는 주로 노래를 배워주고 유희를 했는데 수건 돌리기, 눈 막고 사람 붙잡기, 기차놀이등 많은 다양한 절목이 있었다. 고모가 아이들과 함께 재미있게 유희도 놀고 노래도 배워줘 아이들은 유치원에 오기를 좋아했다.

유치원에서는 간식으로 옥수수 티우개를 주었으며 간혹 옥고시도 주었다. 점심은 기본상(대부분) 변도(도시락)를 사가지고 다니면서 먹었는데 나는 점심을 고모와 같이 먹었다. 나는 원래 발랑거리는 편이였는데 특히 선생님이 고모라 좀 더 발랑거린것 같다. 유치원에서 벽보를 꾸리였는데 말 잘 듣고 좋은 일을 하면 붉은색 도표가 올라가고 말 잘 듣지 않고 싸우거나 장난이 심하면 푸른색 도표가 올라간다. 나는 푸른색 도표가 붉은색 도표보다 높았는데 이건 아마 고모가 나에게 더 엄격하게 요구해서 그랬을것이다.

고모는 유치원에서 늘 다양한 놀이를 조직해줬는데 그래서 우리들에서 아주 인상 깊은 유치원생활을 남겨 주었다.
그때 부르던 이 노래는 아직도 인상깊어 잊어지지 않는다

씩씩하게 자라나는 우리동무 내동무
엄마아빠 말 잘듣고 자라나는 우리들
우리들도 다같이 숙제공부 잘하여
앞날에 조국의 큰 일군이 될래요.

내가 유치원에 다니던 시기는 조선전쟁시기여서 밤이면 방공경보를 했는데 주로 구두로 밖에서 등불을 끄라는 경고였다. 두 형님은 늘 공부했기때문에 우리는 저녁만 되면 창문을 헐망한 일본군대탄자로 가리곤 했다. 나는 이러한 환경에서 자랐기때문에 그때 이미 소위 가 나 다 라 거나 9.9단은 별로 힘들지 않게 줄줄 외울 수 있었다.

1953년 8월 나는 고모와 같이 학교붙으러 갔다. 학교에서는 처음에 나에게 생일을 물었는데 8월 21일이라 대답하자 두말없이 래년에 학교에 오라했다. 이때 고모가 "야 형들이 일용이 백용임다" 라고 했다. 그때 두 형님은 워낙 공부를 잘하기로 소문나서 학교에서 이름을 대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말을 듣고 선생님이 나에게 가나라와 구구단을 물어보았다. 례하면 2.8이하면 나는 바로 16, 3.6하면 18이라고 술술 대답했다. 그렇게 나는 학교에 붙게 되였고 고모는 나에게 입학기념으로 가방을 만들어 이름까지 수 놓아 주었다.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고모가 나를 어릴때 많이 업어주었다 한다. 나도 어렸을때 고모뒤를 졸졸따라 다니던 일들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렇게 고모는 조카를 엄청 귀여워해줬고 언제나 아껴주고 보살펴 주었었다.

고모가 학교를 필업한후 성남촌정부에서는 고모더러 촌정부에 나와서 일하라고 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리고 남들처럼 중학교에 가고싶어 하였지만 그것도 동의 하지 않았다. 아마도 아버지가 사망되면서 로동력이 부족했던것도 있고 녀자가 공부하여 무었하겠냐가 리유였을것이다. 이때문에 고모는 눈물도 많이 흘렸다.

고모는 신체소질이 그다지 좋지 못했는데 결혼후에도 애들을 키우며 가무일(집안일)만 돌보았다. 고모는 재봉기술이 아주 좋았는데 아마 이건 우리 어머니의 영향이 컸던것 같다. 결혼후에 후훠호트시에서 살때도 전시 재봉시합이 있었는데 시합에서 천을 가장 적게 쓰고도 제일 맵시있는 옷을 지어 대회 일등까지 하였다 한다.   

고모는 1958년에 결혼하고 고모부를 따라 내몽고 울란호트, 후훠호트시 등지에서 지내시다가 1997년에 돌아가셨다.

추천 (4) 선물 (0명)
IP: ♡.137.♡.67
착한달팽이 (♡.234.♡.53) - 2014/11/11 16:04:14

구수한 옛말이네요. 고모님이 참으로 좋으신 분인거 같아요.
나도 이젠 고모가 되면 조카를 이뻐해줘야겠어요.
그런데 남동생이 너무 애를 먹여서 정말 조카까지 밉을가봐 걱정이네요.

WENBIN (♡.57.♡.99) - 2014/11/12 18:06:56

재밌는 동년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다음집 기대합니다.

22,943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보라
2006-08-09
33
63065
싱싱걸
2014-12-24
2
3596
피노키온
2014-12-21
6
4956
xingyu
2014-12-19
4
3714
싱싱걸
2014-12-19
3
3830
싱싱걸
2014-12-18
2
3180
싱싱걸
2014-12-17
5
3795
피노키온
2014-12-16
4
4075
싱싱걸
2014-12-16
5
4613
녀사장
2014-12-16
7
3752
녀사장
2014-12-15
6
3604
피노키온
2014-12-13
9
4935
녀사장
2014-12-12
5
3486
별이빛나길
2014-12-12
7
2859
애심88
2014-12-12
2
2900
별이빛나길
2014-12-12
6
2735
피노키온
2014-12-10
11
4903
하늘일기
2014-12-10
11
4632
칼과꽃
2014-12-10
15
8845
피노키온
2014-12-08
7
3929
xingyu
2014-12-08
2
2679
guo79
2014-12-08
6
2924
피노키온
2014-12-06
12
5074
칼과꽃
2014-12-05
27
19663
칼과꽃
2014-12-04
9
7503
healing365
2014-12-03
0
2428
칼과꽃
2014-12-02
34
13466
안나수이
2014-12-02
2
2725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