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레이] 어느날 갑자기 4회- 남자편

kiwi123 | 2016.02.29 23:05:45 댓글: 10 조회: 2827 추천: 11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3029210
4회. 남자편

약속한 술집에 도착하니 하루종일 구겨졌던 기분이 간신히 트이기 시작했다. 솔직히 뇌리에서는 아침의 한여사님의 "어명"이 언뜰거려 하루종일 마음이 무거웠다.그렇다고 아무 맞선녀를 선택해 일생을 기탁할수는 없지 않은가. 차라리 부족한것이 넘치기만 낫다는것이 서른몇해를 살아온 내 신조인것을.

나는 와이프가 친구도 데리고 온다니 술맛이 되살아날것 같다는 친구놈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며 담배 한가치에 불을 붙였다. 술자리에는 역시 이성이 함께 해야 천하일품이라고... 아줌마든, 와이프든, 아가씨든지를 막론하고라며 친구놈이 입에 침을 튕기고 있었다.

사실 친구놈이 애쓰는바를 나 또한 모르지는 않지만 그런 호의가 지금의 나에게는 부담스럽기만 했다.

“그나저나 넌 아직 결혼할 맘조차 없는거야?”
“딱히 뭐... 하긴 집에서도 맬 결혼타령이지, 소개팅을 해봤자 된서리에만 맞지. 때가 아닌가 보다.”

친구놈이 한심하다는 듯이 비꼰다.

“시들어 가는 나이에 때가 아니라구? 나중에 결혼 생활의 묘미를 느껴봐야 후회막급이겠지, 얼른 부모님의 속을 덜 썩이고 동네집 처녀를 한명 낚아둬야지.”
“처녀같은 소릴하고, 결혼하더니 말재주가 제법 늘었구나, 남 걱정 말고 혼자 실컷 즐기소이~ ”

만나기만 하면 되풀이되는 친구놈의 뻔한 레파토리 교육을 즈려밟고 술을 주문했다.

친구가 갑자기 벅찬 미소를 띄우며 카운터를 향해 손짓한다. 시선을 돌려보니 친구와이프와 웬 여성이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그제서야 친구놈의 미소에 담긴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오늘밤에도 무심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친구놈의 장단에나 맞춰줘야겠다고 생각하는 찰나...

맙소사~!내 시선이 못볼것이라도 본것마냥 허공에서 잠시 멈칫하다가 급히 테이블로 돌아왔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21세기 원수는 술집에서 만나는 법이런가? 친구놈의 호의에 휩쓸려 술 마실 기분조차 말끔히 가셔졌다.

“뭐야? 서로 아는 사이였어?"

통성명이 끝나서 서로 오고가는 기묘한 기류를 감지했는지 친구놈이 채근했다.아침에 황당했던 일이 생각나 저도 모르게 여자를 보다가 내 눈길을 의식했는지 그녀는 어이없게도 앉기도 바쁘게 실례한다면서 화장실로 내처 달려갔다. 친구놈의 와이프 은미씨도 그 뒤를 따라갔다.

“어떻게 된거야?”
“아침에 출근할때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어. 엘리베이터를 화장대로 삼는 여자는 생에 처음봤다.참나~”

내가 궁시렁거리자 친구놈은 피씩 웃더니 한술 더 떴다.

"우연인듯 우연아닌 만남이네. "
"택시까지 가로챈 여자야, 빼앗긴 기분이 지금도 찝찝한데 멋대로 엮지 마라."
"오호, 빼앗긴 맘에도 봄은 오려나... 엽기적인 그녀인가?!"
"그만하라 했다."
"하하, 지예씨가 우리 강사장님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린 모양이군. 알았어. 안엮을께."

말들을 주고 받는 사이에 그녀와 은미씨가 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아까와는 판이하게 그녀의 어수선한 옷맵시가 아까와는 달리 볼륨감으로 넘쳐흘렀다. 희한한 일이다. 여자들의 변덕스러운 성격은 흔하게 보았었지만 화장실 다녀온후 이같은 변신은 처음으로 목격한다.

친구놈은 내 말은 까맣게 잊었는지 이번엔 아예 와이프와 합세해서 나와 그녀를 엮는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 친구놈의 처사가 아니꼬운 나머지 하마터면 또 한번 그녀와 맞붙을뻔 했다. 나답지 않게 오늘따라 유치해지는것만 같아 나절로도 실소가 나왔다.

은미씨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꼼꼼한 재무관리 능력과 뛰어난 리더십으로 회사에서 정평이 나있다고 한다. 아무리 그래도 짝짝이 신발과 택시를 가로채는 행동이 재무일에 능한 사람과는 전혀 매치가 안되는데 말이다. 괘씸한 친구놈은 이번엔 와인바 재무를 그녀에게 맡기라고 꼬드기고 있었다. 아무리 매니저 혼자 재무업무까지 보기 힘든 상황이라 해도 그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무개념 무매너인 사람과는 거래하고 싶은 생각없어."
"뭐라구요? 누구는 뭐.."

보라, 이런 불같은 성격에 퍽이나 재무일을 잘하겠다.

때마침 올라온 와인 한병을 따서 통채로 완샷해버릴 충동마저 일었다. 그 충동은 그녀가 태도를 일변하고 배시시 웃을 때엔 아예 그 어떤 불길한 예감으로 변해 내 등골을 훑었다.

내가 딴 와인술을 기어이 내게 따르는 그녀의 눈에서는 목마른 사슴마냥 뭔가를 원하는 간절함이 스쳤다. 아까는 변신하더니 지금은 변심까지 하는 그녀가 나는 괜스레 두려워졌다.

"와인은 혼자 따르는건 맛이 없어요."
"고작 이걸로 쎔쎔하려구요?"
"잘못된 타이밍에 매너 따지는 분을 마주쳤을 뿐인데요.일상생활에서 실수 한번 했다고 일능력마저 의심하면 안되죠. 옷깃을 스쳐도 인연이라 하지 않나요?"

그녀는 실수 한번이 아니라 실수투성이처럼 보였는데 말이다. 그리고 이런 그녀와는 인연이 아닌 악연이 분명했다. 그녀의 태도변화에 나는 또 한번 빈정대고 싶어졌다.

"회사에선 대우가 그리 좋진 않는가 보죠?"
"그래도 저는 투잡을 할 생각이 없거든요.”

뭐야 이건...나는 허구프게 웃었다. 자고로부터 여자들은 반어법 사용의 최고 예술가들이였다. 불시에 친절을 표하는 그녀의 속셈은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데도 그녀는 옆의 은미씨와 얘기하며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나도 옆에 친구놈한테 슬쩍 눈치를 주면서 한마디 내던졌다.

"지난번에 추천했던 대학졸업생도 괜찮을것 같던데...요즘 애들이 경험은 없어도 더 헌신적으로 일하거든. 회계사는 급하지 않으니 천천히 찾아도 될것 같아."

친구놈이 얼떨결에 내 말을 받아준다.

"어? 어 그건 니가 사장이니까 알아서 할 일이고."

은미씨가 다급히 끼어들면서 그녀의 실력이 대학생 10명을 능가한다고 칭찬했다. 그러더니 아닌보살을 하고있는 그녀더러 또다시 술을 따르라고 무릎으로 툭툭 신호를 준다. 그녀 또한 그럴 생각이 분명해 보이면서도 일부러 시큰둥하게 와인병을 들었다.

그런데 이런 봉변이라고... 고의적인지 실수인지는 판단하기 어려우나 그녀가 술을 따르다가 그만 내 앞에 와인잔을 엎어뜨렸다. 하필이면 베이지색 바지에 빨간 색상이 서서히 스며들었다.

나는 깜짝 놀라 일어섰고 그녀는 연신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 입가에 머금은 한줄기 미소에서, 그녀의 이번 실수는 고의적이었음을 알아차렸다. 아까 대학생도 괜찮다고 하던 내 말에 대한 보복인게 분명했다.

"아까운 바지 적셔서 어떡하죠?비싸보이는데..."
"집에 가서 버리면 돼요. 그잖아도 옷장에 걸려있는 바지들이 줄을 서서 울고 있거든요. "
"미안하니까 하나 사드리죠. 저도 웬만큼 벌거든요."

일부러 재수없이 말했더니 한수 더 뜨는 이 여자, 아까 회사에서 대우가 안좋지 않냐는 내 말에 대한 도발이기도 했다. 서로의 날카로운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치며 강렬한 불꽃을 튕겼다. 그래, 한번 해보자 이거지...

"제것보다 비싼걸 사주면 기꺼이 받겠습니다.그럼..."

가볍게 머리를 숙여보이고 나는 자리를 떴다. 집으로 향하는 내내 젖은 바지가 찜찜했다. 아파트 단지까지 겨우 도착하고 나니 카드키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제야 와인을 열다 그만 키홀더채로 테이블에 놓아두고 온것이 생각났다.

오늘따라 자신의 처지가 한스럽기 그지없었다. 별수없이 친구놈한테 다시 전화를 걸었다.다행히 아직도 술집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어 그녀한테 대신 보내겠다고 친구놈이 대답했다. 고작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젖은 바지를 입은채로 찬바람을 맞으며 그녀를 기다렸다. 부드득 이가 갈렸는데, 그것은 단지 추워서가 아닌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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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세마리 (♡.50.♡.255) - 2016/03/01 21:04:07

바쁘신데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I판도라I (♡.96.♡.124) - 2016/03/01 21:58:44

점점 더 흥미로워 지는군요.이처럼 여러번 마주치면 인연이랍니다.담편 기대~~~

빙점 (♡.4.♡.220) - 2016/03/02 08:45:07

ㅎㅎ. 다시 20대로 돌아간 느낌입니다. 저는 두줄쓰기도 힘든 <문자>를.... 참으로 대단합니다.
좋은 필에 좋은 글 기대합니다.

후르쯔 (♡.207.♡.177) - 2016/03/02 09:52:43

다음편 스토리가 무지 기대됩니다..ㅎㅎ

newsky (♡.239.♡.170) - 2016/03/02 16:36:40

뒷이야기가 너무 궁금하네요.이거 기다리기 너무 힘드네요~~빨리빨리 길게길게 올려주세요 ㅋㅋㅋㅋ

guo79 (♡.81.♡.254) - 2016/03/02 19:19:19

kiwi님 필력 너무 훌륭하세요~~
4회 남자입장에서 스토리도 잼있고 재치있게 잘 쓰셨어요^^

내가만일 (♡.140.♡.139) - 2016/03/03 17:37:05

여주 남주앞에서 자꾸 실수장면 기엽네여..ㅎㅎ
세상의 모든 만남은 다 이유가 있다는데 우연은 아니겠죠... ㅋㅋ
잘 읽고 갑니다~|~

강니 (♡.214.♡.35) - 2016/03/04 09:14:50

변신에 변심에 그러다 회계업무는 하겠는지 말겠는지 변덕에~
아마 지금까지 남주가 여주에 대한 인상이 아닌가 싶네요 ^^
그러니까 이를 부드득 갈면서 기다리징ㅋㅋ
쫌 여주 잘봐주라니깐요 남주님~

신군님 (♡.30.♡.218) - 2016/03/06 07:57:57

키위님 좋은 글솜씨 잘 보구 갑니다 담편 기대하면서 우리 작가님들 수고 많으십니다

김동아 (♡.216.♡.201) - 2016/03/25 16:25:52

재밋게 잘 보고 갑니다. 추천 날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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