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3권 39~41 (3권 끝)

나단비 | 2024.03.29 13:40:47 댓글: 2 조회: 167 추천: 2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7279
39
결혼 적령기





초록 지붕 집으로 돌아온 첫 몇 주 동안 앤은 자기 삶의 모든 것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다는 기분을 떨치지 못했다. ‘패티네 집’에서 보냈던 친구들과의 다정했던 시간이 그리웠다. 지난겨울에는 황홀한 꿈을 꾸며 지냈건만 이제 눈앞에 보이는 건 뿌연 안개뿐이었다. 너무 자기혐오에 시달리다 보니 다시 꿈을 꾸어보기도 힘들었다. 앤은 깨달았다. 고독하지만 꿈이 있다면 아름답고, 꿈조차 꿀 수 없는 고독은 조금도 매력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그 공원 누각에서 고통스러운 이별을 맛본 이후로 로이는 다시 보지 못했다. 하지만 도로시는 킹스포트를 떠나기 직전까지도 앤을 찾아주었다.
“로이 오빠랑 결혼하지 않는다고 해서 정말 섭섭했어요. 난 앤이 우리 언니가 되어주길 바랐는데. 하지만 앤이 옳은 선택을 한 것 같아요. 우리 오빠와 결혼했다면 몹시 지루한 결혼 생활을 했을 테니까요. 난 우리 오빠를 사랑하고, 오빠가 다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다지 재미있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재미있어 보이지만 사실은 아니에요.”
“그렇더라도 우리의 우정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도로시.”

앤이 주저하며 말했다.
“그럼요, 당연하죠. 앤처럼 좋은 사람을 어떻게 잊어버리겠어요. 앤이 우리 언니가 되지는 못해도 항상 친구로 지내고 싶어요. 그리고 오빠 때문에 너무 괴로워 마세요. 물론 오빠도 지금은 괴로워해요. 저는 매일 오빠의 한탄을 들어주어야 하죠. 하지만 곧 이겨낼 거예요. 오빤 항상 그랬거든요.”
“항상요? 그럼 옛날에도 ‘이겨낸’ 적이 있었나요?”
앤은 약간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럼요, 두 번이나요. 두 번 다 나한테 얼마나 한탄을 해댔는지 몰라요. 오빠는 그저 거절당한 게 아니었어요. 두 사람 모두 다른 사람과 약혼을 해버렸어요. 물론 오빠가 앤을 만나고 나서 이번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을 만났다고 하긴 했지만요. 옛날 오빠가 했던 연애들은 다 그저 젊은 남자의 호기심 정도였어요. 어쨌든 오빠 걱정은 하지 마세요.”
그 말을 들은 후로 앤은 걱정하지 않기로 했지만 안도와 분노가 뒤섞인 기분이었다. 로이는 분명히 자기가 유일하게 사랑한 사람은 앤밖에 없다고 했다. 물론 로이는 진심이었을 것이다. 어쨌건 자기가 로이의 인생을 망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앤은 마음이 놓였다. 도로시 말에 따르면 로이에게는 신전에서 칭송을 기다리는 여신들이 여럿 있었다는 얘기니까. 이제 삶에서 달콤한 환상이 몇 개 더 사라져 버렸고 앤은 인생이 다소 무미건조하다고 느꼈다.
집에 돌아온 그날 저녁 앤은 비통한 표정으로 자기 방에서 내려왔다.
“‘눈꽃 여왕’은 어떻게 된 거죠, 마릴라 아주머니?”

“네가 그 벚꽃 나무 때문에 섭섭해할 줄 알았다. 나도 섭섭했으니까. 내가 어렸을 때부터 있던 나무인데. 3월에 큰 폭풍우가 와서 쓰러져 버렸단다. 속이 썩어 있더구나.”
“그 나무가 너무 그리워요.‘눈꽃 여왕’이 없으니‘초록 지붕 집’같지가 않아요. 이제 창문 밖을 바라볼 때마다 상실감에 빠질 거예요. 그리고 다이애나가 절 마중하러 나오지 않은 적도 없었잖아요.”
앤이 말했다.
“다이애나에게는 챙겨야 할 사람이 생겼으니까.”
린드 부인이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아주머니, 에이번리의 소식을 다 말씀해주세요.”
앤은 뒤 베란다 계단에 앉으며 말했다. 저녁 햇살이 앤의 머리카락에 떨어져 섬세한 황금빛 빗줄기처럼 반짝였다.
“너한테 편지로 알려준 것 이외에는 새 소식이랄 게 별로 있는 것 같진 않은데. 사이몬 플레처가 지난주에 다리가 부러졌다는 소식은 못 들었겠구나. 그 집 사람들한테야 오히려 잘된 일이지. 늘 하고 싶다고 말만 했지 그 늙은 괴짜 양반 때문에 못 하고 지낸 일이 어디 한두 가지였어야지.”
린드 부인이 말했다.
“그 집은 점점 더 나빠져만 가요.”
마릴라도 한마디 거들었다.
“나빠지고말고요! 그 집 부인이 기도 모임에 나와서 자기 자식들의 단점을 줄줄이 늘어놓고는 그것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하곤 했잖아요. 그러니 아이들은 당연히 화가 더 날 수밖에요. 더 나쁜 짓만 골라서 하고 다녔죠.”
“제인 얘기도 아직 안 했잖아요?”
마릴라가 말했다.
“아, 그래요, 제인.”
린드 부인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제인이 서부에서 돌아왔어. 지난주에. 위니펙에 사는 백만장자와 결혼을 한다는구나. 물론앤드루스부인이 이 소식을 듣자마자 동네방네 퍼뜨리고 다녔다. 알 만하지, 앤?”
“어머, 제인이! 너무 잘됐네요. 그런 행운을 누릴 만한 아이예요.”
앤의 말은 진심이었다.
“나도 제인에게 나쁜 말은 하고 싶지 않다. 정말 괜찮은 아이니까. 하지만 그 애가 어디 백만장자가 어울리는 애냐. 그러니 남자도 돈밖엔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일 게다, 그럼.앤드루스부인 말로는 그 남자가 영국인이라고 하더라만 분명히 미국사람일 거야. 광산에서 돈을 많이 벌었다는구나. 하여간 돈이 많은 것은 분명한 모양이야. 제인의 온몸을 아예 보석으로 덕지덕지 발랐단다. 약혼반지도 다이아몬드 덩인데 너무 커서 제인의 두꺼운 손가락에 붙은 고약 같더구먼.”
말하는 내내 린드 부인 목소리에는 씁쓸함이 묻어났다. 평범하고 그저 성실할 것밖에는 없는 제인앤드루스도 백만장자와 결혼을 하는데 앤은 부자건, 거지건 짝이 되겠다고 나타나는 사람이 없으니. 그리고 또앤드루스부인이 밉살스럽게 잘난 체를 하고 다녔다.
“길버트 블라이드는 대학에서 잘 지내고 있니? 지난주에 집에 왔을 때 보니 안색이 창백하고 너무 말라서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다.”
마릴라가 물었다.
“작년 겨울에 공부를 열심히 했거든요. 고전문학에서 최고 우등상과 지난 5년간 아무도 받은 사람이 없다는 쿠퍼 장학금도 탔어요. 그래서 그렇게 몸이 쇠약해졌나 봐요. 사실 우리 모두 조금씩은 피곤해요.”
앤이 말했다.
“어쨌든 이제 너는 학사로구나. 제인앤드루스는 아닌데 말이지. 제인이야 절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지.”
린드 부인은 그렇게 말하며 울적한 기분을 풀었다.
며칠이 지나 앤은 제인을 만나러 갔지만 제인은 샬럿타운에 가고 없었다.
“드레스를 맞추러 갔다.”
앤드루스부인이 자랑스럽게 앤에게 알려주었다.
“에이번리에는 특별한 날을 앞둔 제인에게 맞는 옷을 만들어줄사람이 아무도 없잖니.”
“네, 제인에게 좋은 소식이 있다는 얘긴 들었어요.”
앤이 말했다.
앤드루스부인이 머리를 휙 젖히며 말했다.
“맞다, 제인이 잘했지. 제인은 학사도 아닌데 말이야. 잉글리스는 백만장자야. 신혼여행은 유럽으로 가기로 했단다. 돌아오면 위니펙의 멋진 대리석 저택에서 살 거야. 단 한 가지 문제는 우리 제인이 요리를 아주 잘하는데 잉글리스는 제인이 요리를 못 하게 해. 돈이 많으니까 요리하는 하인을 따로 둘 거란다. 요리사 한 명과 하녀 두 명, 마부와 또 다른 자질구래한 일을 시킬 하인을 한 사람 더 둔다더구나.그런데 넌 어떠니, 앤? 네 결혼 소식은 못 들은 것 같은데, 대학까지 나와놓고서.”
앤은 웃으며 말했다.
“네, 전 아마 노처녀가 될 건가 봐요. 저에게 딱 맞는 사람을 도저히 못 찾겠거든요.”
이 말에는 자기가 노처녀가 된다 하더라도 그 이유가 결혼할 기회가 없어서가 아니란 것을앤드루스부인에게 인식시키려는 의도가 다분히 섞여 있었다. 하지만앤드루스부인은 앤에게 재빨리 반격을 가했다.
“글쎄, 성격이 너무 독특하다 보면 꼭 결혼도 못 하고 혼자 살게 되더라. 내가 보기엔 그래. 그리고 길버트 블라이드가 미스 스튜어트하고 약혼한다는 건 또 무슨 소리냐? 찰리 슬론이 그러던데. 그 아가씨가 그렇게 예쁘다면서? 사실이냐?”
“글쎄요, 길버트가 미스 스튜어트와 약혼한 것이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미스 스튜어트가 예쁘다는 건 확실해요.”
앤은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사력을 다했다.
“너랑 길버트가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네가 신경 쓰지 않으면 널 따라다니는 남자들이 죄다 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거야, 앤.”
앤드루스부인이 말했다.

앤은 하몬앤드루스부인과 더 이상 말싸움하고 싶지 않았다. 작은 칼 하나밖에 쥐지 못한 상대에게 전쟁용 도끼를 휘두르는 적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제인이 집에 없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야겠어요. 나중에 제인이 집에 있을 때 다시 올게요.”
앤은 성급하게 일어섰다.
“그래, 그렇게 하렴. 제인은 절대 잘난 체 같은 건 안 한다. 옛 친구들과 조금도 다름없이 지낼 거야. 너를 만나면 정말 반가워할 거다.”
제인의 백만장자 남편은 5월 말에 에이번리에 도착하여 제인을 온통 화려하게 치장시켜 데리고 떠났다. 린드 부인은 잉글리스가 마흔이 다 된 나이에 키도 작고 마른 몸에 머리까지 희끗희끗한 것을 보고 그럼 그렇지 하며 고소해했다.
린드 부인은 인정사정없이 잉글리스의 단점을 일일이 열거했다. 능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그저 웬만하게만 보이려고 해도 자기 가진 재산을 다쏟아부어야 할 거다, 그럼.”
린드 부인은 진지하게 말했다.
“친절하고 마음도 좋은 분일 거 같아 보이던데요. 그리고 오직 제인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앤은 진심이었다.
“흥!”
린드 부인은 못마땅한 듯 콧방귀를 뀌었다.

필리파 고든도그다음주에 결혼식을 올렸다. 앤은 필리파의 신부 들러리가 되려고 볼링브로크로 향했다. 신부가 된 필리파는 가냘픈 요정 같았고 신랑 조 목사는 기쁨으로 너무 환하게 빛나 아무도 조 목사가 못생겼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에반젤린 루트를 따라 신혼여행을 다녀올 거야.그러고는패터슨 거리에 자리를 잡을 거야. 어머니는 끔찍하다고 하셔. 조가 교회라도 좋은 지역 교회를 맡아야 한다고 하시지. 하지만 난 조만 옆에 있어준다면 패터슨 거리의 빈민가라도 장미꽃밭 같을 거야. 오, 앤. 난 너무 행복해서 가슴이 다 저려.”
필리파가 말했다.
앤은 친구들의 행복한 소식에 기뻤다. 하지만 자기 것이 아닌 행복감에 둘러싸여 있는 동안 가끔씩 한 줄기 외로움도 찾아들었다. 에이번리에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다이애나가 첫 아기를 옆에 뉘고 여자로서 최고의 순간을 누렸다. 엄마가 된 다이애나의 하얗고 창백한 얼굴에 경외심에 사로잡힌 눈빛이 낯설기만 했다. 이 어린 엄마가 그 옛날 같이 놀던 검은 곱슬머리에 장밋빛 볼을 가진 다이애나란 말인가? 현실과 괴리된 채 자기 혼자만 과거 속에 머무르고 있다는 생각에 앤은 묘한 고독감을 느꼈다.
“너무 완벽하지 않니?”
다이애나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다이애나의 작고 통통한 아기는 프레드 모습 그대로였다. 프레드처럼 통통하고 프레드처럼 온통 붉었다. 양심을 걸고서 아기가 예쁘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진심으로 사랑스러워 마구 입 맞추어주고 싶은 아기였다. 다들 너무 행복해 보였다.

“이 아이를 만나기 전엔 난 딸을 원했어. 그럼 아기 이름을 앤이라고 지으려고 했지. 하지만 여기 작은 프레드가 나에게 왔으니 이젠 어떤 딸하고도 바꾸고 싶지 않아. 이 아기가 너무 소중한걸.”
“‘아기들은 모두 소중하고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지. 꼬마 앤이 생겼다 해도 아마 똑같은 생각을 했을 거야, 다이애나.”
앨런 부인이 쾌활하게 읊조렸다.
앨런 부인은 에이번리를 떠난 후 처음으로 다시 이곳을 방문했다. 떠날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고 여전히 활기차고 다정하며 또 마음이 따뜻한 분이었다. 옛 친구들은 앨런 부인을 열광적으로 반겨주었다. 현재의 목사 부인도 앨런 부인만큼 존경받았지만 앤과 영혼이 통하는 친구는 아니었다.
다이애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작은 프레드가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못 기다리겠어. 아기가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싶어 미칠 지경이야. 난 아기한테 아주 좋은 엄마에 관한 첫 기억을 갖게 해줄 테야. 내가 기억하는 우리 엄마의 첫 모습은 내 엉덩이를 때리는 모습이거든. 물론 내가 혼날 짓을 했겠지. 우리 엄마는 항상 좋으신 분이었고 나도 엄마를 정말 사랑하지만 엄마에 관한 내 첫 기억이 더 좋은 것이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항상 아쉬웠어.”
앨런 부인이 말했다.
“난 우리 어머니의 기억이 딱 하나뿐이지만 그 기억은 내 모든 기억 중에 가장 따스한 것이지. 내가 다섯 살 때였어. 그날 난 두 언니를 따라 학교에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어. 그런데 학교가 끝났을 때 우리 언니들은 각자 자기 친구들과 집으로 돌아가 버렸어. 둘 다 다른 한 언니가 나를 데리고 집에 갈 거라고 생각했대. 난 쉬는 시간에 만난 친구를 따라 달려나가 버렸는데 말이야. 친구를 따라 학교 근처에 사는 친구 집으로 가서 우린 진흙 장난을 하고 놀았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신나게 놀고 있는데 두 언니들이 화가 나 씩씩거리며 내게로 왔어.
언니는 ‘이 말썽쟁이!’ 하면서 내 손을 잡아끌었어. ‘어서 집에 가자. 너, 딱 걸렸어. 엄마가 머리끝까지 화가 나셨단 말이야. 넌 이제 엄마한테 회초리를 맞을 거야.’
난 매를 맞아 본 적이 없었어. 공포심과 두려움에 떨어야 했지. 집까지 걸어오는데, 내 평생 그렇게 비참했던 적이 없었다고. 난 일부러 말썽을 피우려고 그런 것도 아니었는데. 페미 카메론이 자기 집에 가자고 해서 그게 잘못인 줄도 모르고 따라간 것뿐인데, 그것 때문에 엉덩이를 맞아야 한다니. 집에 도착하자마자 언니는 나를 부엌으로 끌고 들어갔어. 어머니는 난로 옆의 저녁 어스름 속에 앉아 계셨어. 내 약한 다리가 얼마나 떨리든지 거의 서 있지도 못할 지경이었지. 그런데 엄마, 우리 어머니는 나를 얼른 안아주셨어. 야단이나 꾸중도 하지 않고 내게 입을 맞추어주시면서 심장이 맞닿을 만큼 꼭 껴안아주셨어. ‘너를 잃어버린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단다.’ 하고 다정하게 말씀하셨지. 고개를 들어 엄마를 바라봤을 때 엄마의 눈에 담긴 사랑을 읽을 수 있었지. 엄만 나를 야단치거나 벌주지도 않고 그냥 허락 없이는 멀리 가면 안 된다고만 하셨어. 그 후로 얼마 되지 않아 우리 어머니는 돌아가셨지.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유일한 추억이야. 아름다운 추억이지 않아?”
앤은 ‘자작나무 길’과 ‘버드나무 연못’을 지나 집으로 돌아오면서 여느 때보다 더 진한 외로움을 느꼈다. 앤은 몇 달 동안이나 그 길을 걸어보지 못했다. 

그날은 짙은 자줏빛으로 꽃들이 만발한 밤이었고 대기는 꽃향기로 가득했다. 향기가 너무 진해 어지러울 정도였다. 마치 컵에서 찰찰 넘쳐 쏟아지는 물처럼 꽃향기가 넘쳐났다. 길가에 선 자작나무들은 어린 묘목에서 완전히 다 자란 나무들로 변해 있었다. 모든 것이 변했다. 앤은 어서 여름이 끝나고 다시 일에 몰두했으면 하고 바랐다. 그럼 이렇게까지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지진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세상을 다 보았지만,
낭만의 색깔은 없었다.’”41)

앤은 한숨지었다. 하지만 이제 세상에서 낭만이 사라져 버렸다는 생각이 너무 낭만적으로 느껴져 얼마간 위안을 받았다.
41. 주로 자연을 노래한 미국 시의 아버지라 불리는 시인 브라이언트(William Cullen Bryant, 1794~1878)의 시 <개울(The Rivulet)>에서 인용.





40
계시록





7월이 되자 어빙 씨네가 여름을 보내려고 ‘메아리 집’으로 돌아와 앤은 이들과 함께 3주를 행복하게 보냈다. 라벤더는 별로 변한 게 없었다. 샬로타 4세는 이제 다 자란 아가씨가 되었지만 앤을 숭배하는 마음은 여전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보스턴에는 미스 셜리 같은 사람이 없어요.”
샬로타의 말은 진심이었다.
이제 열여섯 살이나 된 폴도 거의 청년이 다 되었다. 머리도 밤색의 부드러운 고수머리 대신 말쑥하게 깎은 다갈색으로 변했고 요정보다는 축구에 더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옛 선생님 앤과 맺은 끈끈한 우정만은 여전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영혼이 통하는 친구는 변하지 않는 법이다.
‘메아리 집’에서 보내던 앤은 어느 습하고 황량하며 모진 여름날 저녁 무렵에‘초록 지붕 집’으로 돌아왔다. 가끔씩 육지를 휩쓸어버리는 광폭한 여름 폭풍우가 바다에서 휘몰아치곤 했다. 앤이 문으로 들어서는 순간 첫 번째 빗방울이 창살을 때렸다.
“폴이데려다주었니? 여기서 자고 가라고 하지 그랬어. 날씨가 곧 사나워질 것 같은데.”
마릴라가 말했다.
“빗줄기가 더 세지기 전에‘메아리 집’에 도착할 거예요. 폴이 오늘 밤엔 돌아가고 싶어 했어요. 그곳에서도 너무 즐거웠지만 우리 식구들을 만나니 너무 기뻐요. ‘동쪽을 보아도 서쪽을 보아도 내 집이 최고여라’예요. 데이비, 나 없는 동안 또 키가 자랐니?”
“누나가 간 뒤로 3센티미터나 더 컸어. 난 지금 밀티 볼터만큼 커. 기분이 너무 좋아, 누나. 밀티도 이제는 자기가 더 크다고 뻐기는 걸 그만둬야 할 거야. 근데 누나, 길버트 형이 거의 죽게 된 거 알아?”
데이비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앤은 아무 말 없이, 전혀 움직이지도 못한 채, 물끄러미 데이비를 바라보았다. 하얗게 질린 앤의 얼굴을 본 마릴라는 앤이 곧 기절이라도 할까 봐 불안했다.
“데이비, 입 못 다무니? 앤, 그런 표정 짓지 마라. 그러지 마. 우리도 이렇게 불쑥 그 말을 전하고 싶진 않았는데.”
린드 부인이 화를 내며 말했다.
“저, 정말이에요?”
앤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가 전혀 다른 사람 목소리 같았다.
“길버트가 많이 아프단다. 네가‘메아리 집’으로 떠난 바로 뒤에 길버트가 장티푸스에 걸렸어. 전혀 소식 못 들었니?”
린드 부인이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아니요.”
여전히 낯선 목소리였다.
“병이 시작될 때부터 상태가 나빴다고, 의사 말로는 길버트 몸이 너무 쇠약해져 있다고 하더구나. 노련한 간호사를 데려와 돌보게 하고, 온갖 조치를 다 취했어. 그런 표정 짓지 마라, 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희망도 있는 법이야.”
“해리슨 아저씨가 아까 다녀가셨는데 형은 희망이 없다고 했어요.”
데이비가 다시 툭 나서서 말했다.
초췌하고 늙어 보이는 마릴라가 벌떡 일어나 데이비를 억지로 부엌 바깥으로 떠밀어내었다.
“오, 그런 표정 짓지 마라.”
린드 부인은 언제나처럼 핏기라고는 없이 파리해진 앤을 따뜻하게 감싸안아 주었다.
“난 희망을 포기해본 적이 없다. 그러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길버트는 블라이드 집안의 튼튼한 체질을 지녔으니 괜찮을 거다, 그럼.”
앤은 가만히 린드 부인의 팔을 치우고 아무런 표정도 없는 얼굴로 부엌을 가로질러 복도를 지나고 계단을 올라가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창문 앞에 앉은 앤은 그저 멍하니 창문 밖만 바라보았다. 밖은 어두웠다. 빗줄기는 몸부림치는 들판을 내리쳤다.‘유령의 숲’은 폭풍우에 혹사당해 괴로운 소리를 내는 나무의 울부짖음으로 가득 찼고 대기는 저 멀리 해변을 사정없이 때리는 천둥 같은 파도 소리와 함께 떨고 있었다. 길버트가 죽어가고 있다니!

성경에 계시록이 있듯 모든 사람의 인생에는 계시록이 있게 마련이다. 그 혹독한 폭풍과 어둠 속에서 고통스러운 밤을 지새우면서, 앤은 자기의 계시록을 읽었다. 앤은 길버트를 사랑했다. 언제나 길버트를 사랑하고 있었다. 아! 사랑을 이제야 깨닫다니. 길버트를 자기 운명에서 내쫓는다는 것은 자기 오른손을 잘라내 버리는 것과 같은 아픔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너무 늦게야 알았다. 마지막을 그와함께할수 있다는 쓰디쓴 위안마저 얻을 수 없을 만큼 너무 늦어버렸다. 앤이 그렇게 바보스럽지만 않았더라면, 그렇게 눈이 멀어 있지만 않았다면 지금 길버트를 보러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길버트는 앤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다. 앤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믿으며 이 세상을 떠나갈 것이다. 오, 이제 앞으로 펼쳐질 공허하고 암담한 세월이란! 그런 세상을 살아나갈 자신이 없다. 자신이 없다. 앤은 창가에 웅크리고 앉아 기도를 올렸다. 그동안은 무척이나 행복한 삶을 살았지만 지금 앤은 처음으로 자기도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만약 길버트가 한 마디 말도, 손짓도, 메시지도 남기지 않고 이 세상을 떠나가 버린다면, 자기도 살 수 없을 것이다. 길버트 없이는 삶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앤은 길버트를 위해 태어났고 길버트 또한 앤을 위해 태어났다. 극심한 고통의 시간에 앤은 그런 사실을 깨달았다. 길버트는 크리스틴 스튜어트를 사랑한 게 아니었다. 절대로 그럴 수 없었다. 자기 자신과 길버트를 연결해주는 끈이 얼마나 단단한지 알지 못했던 바보! 로이 가드너에게 느꼈던 허영 같은 낭만을 사랑이라고 여겼다니! 이제 앤은 자신의 바보 같은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는 죄인이 되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린드 부인과 마릴라는 앤의 방문에 살짝 귀를 대보고 심상치 않은 침묵에 도리질을 하며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 내내 사납게 휘몰아치던 폭풍우도 새벽이 되자 잦아들었다. 앤은 어둠의 끝자락에서 올라오는 희미한 빛줄기를 바라보았다. 곧 동쪽 언덕마루에서 홍옥 테두리를 두른 것처럼 붉은 태양이 서서히 떠올랐다. 먹구름은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하얗고 부드러운 한 덩이 구름이 되어 물러났고 하늘은 파랗게 은빛으로 빛났다. 온 세상이 고요했다.
무릎을 꿇었던 앤이 일어나 조용히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뒤뜰로 나가자 비가 섞인 바람이 시원하게 앤의 하얀 얼굴을 어루만지며 앤의 타는 듯한 마른 눈을 식혀주었다. 그때 명랑한 휘파람 소리가‘초록 지붕 집’오솔길 쪽에서 들려왔고 잠시 뒤 퍼시피크 뷰트가 시야에 들어왔다.
앤은 갑자기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낮게 내려온 버드나무 가지를 붙잡지 않았다면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퍼시피크는 조지 플레처 씨네 일꾼이었고, 조지 플레처 씨 집은 블라이드네 바로 옆집이었으며 플레처 부인은 길버트의 아주머니였다. 그러니까 퍼시피크는 분명 길버트 상태가 어떤지 알고 있을 것이다.
퍼시피크가 오솔길을 따라 휘파람을 불며 터벅터벅 걸어 내려왔다. 그는 앤을 보지 못했다. 앤은 세 번이나 그를 불러세우려 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가 앤을 거의 지나치려 했을 때에야 앤은 떨리는 입술로 겨우 소리를 낼 수 있었다.
“퍼시피크!”
퍼시피크는 미소를 지으며 돌아보았다. 그리고 유쾌하게아침 인사를 건넸다.
“퍼시피크, 오늘 아침 조지 플레처 씨 집에서 오는 길인가요?”
앤이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 그래요. 어젯밤에 아버지가 아프시다는 소릴 들었지만, 밤새 폭풍우가 워낙 심해 꼼짝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오늘 아침 일찍 나섰어요. 여기 숲 속 지름길로 질러가려고요.”
퍼시피크는 상냥하게 대답했다.
“혹시 오늘 아침 길버트 블라이드의 상태가 어떤지 들었나요?”
앤은 절망스러운 마음을 억누르며 이렇게 물었다. 가장 최악의 순간이라도 지금의 억누른 긴장감보다는 견디기 쉬울 것 같았다.
“좀 나아졌어요. 어젯밤에 고비는 넘겼다고 하더군요. 의사가 이제 곧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지요. 완전히 구사일생이지요. 대학에서 몸을 완전히 다 망쳤대요. 아이고, 서둘러야겠네. 나도 빨리 가서 우리 집 노인네를 봐야지.”
퍼시피크는 다시 휘파람을 불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앤은 간밤의 고통이 사라지고 대신 기쁨이 넘치는 눈으로 사라져 가는 퍼시피크의 모습을 좇았다. 퍼시피크는 말라깽이 몸에 털도 덥수룩하고 볼품이라곤 없는 청년이었지만 오늘따라 산꼭대기까지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아름다운 천사처럼 보였다. 앤은 앞으로 퍼시피크의 동그란 갈색 얼굴과 검은 눈동자를 볼 때마다 그가가져다준이 환희의 순간을, 가슴 저 밑바닥까지 따뜻해오는 이 안도감을 추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퍼시피크의 명랑한휘파람 소리가 희미해지다가‘연인의 오솔길’저 멀리 단풍나무 밑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린 한참 후까지도 앤은 버드나무 밑에 우두커니 서서 커다란 고통이 사라졌을 때만 가능한 인생의 달콤함을 음미했다. 그날 숲의 아침은 안개와 매혹적인 아름다움으로 가득 채워진 잔과 같았다. 앤이 서 있는 한 모퉁이에서 이슬을 머금고 갓 피어난 장미꽃들이 진한 향기를 풍겼다. 머리 위로 큰 나무에 앉은 새들도 앤의 지금 기분을 안다는 듯 즐겁게 지저귀었다. 아주 오래된 진리의 책 한 구절이 문득 앤의 입가에 맴돌았다.
“밤새도록 울며 슬퍼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42)



42. 시편 30장 5절.




41
진실하고 순수한 사랑의 열매





길버트가 베란다 모퉁이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내며 말했다.
“오늘 오후에는 예전처럼 9월의 숲을 산책하면서 ‘점점 더 향기가 진해지는 언덕’에도 올라가 보지 않을래? 헤스터 그레이의 정원에도 가보자.”
무릎 가득 하늘하늘한 연한 녹색 드레스를 펼쳐놓고 돌계단에 앉아 있던 앤은 놀란 듯 길버트를 올려다보았다.
“나도 그러고 싶어. 하지만 지금은 나갈 수 없어, 길버트. 오늘 밤에 엘리스 펜할로우의 결혼식에 가야 하거든. 그래서 드레스를 손질하는 중이야. 드레스 손질을 마치면 곧바로 나갈 준비를 할 거야. 미안해, 하지만 나도 정말 숲으로 나가고 싶다.”
앤이 천천히 말했다.
“그럼 내일 오후에는 갈 수 있겠니?”
별로 실망한 기색 없이 길버트가 물었다.
“그래, 내일은 갈 수 있어.”

“그럼 당장 집으로 가서 내일 할 일을 미리해놓아야겠다. 엘리스 펜할로우가 오늘 저녁에 결혼한다니. 그나저나 넌 결혼식에 가는 것이 이번 여름에만 벌써 세 번째구나. 필, 엘리스, 제인. 제인은 자기 결혼식에 날 초대하지도 않았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제인 탓 하지 마.앤드루스집안과 친분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 작은 집에 그 많은 사람들을 다 초대할 수는 없었겠지. 나도 제인의 옛 친구라는 특권으로 겨우 초대받았는걸. 제인의 생각은 그런데, 아마앤드루스부인이 날 초대한 이유는 화려한 드레스 입은 제인을 자랑하려고 했을 거야.”
“어디까지가 다이아몬드고 어디부터가 제인인지 구분하기도 힘들 만큼 다이아몬드를 주렁주렁 달았다며?”
앤은 웃었다.
“좀 많이 달긴 했어. 그 많은 다이아몬드에, 흰 공단 드레스, 베일, 레이스, 장미꽃과 오렌지 꽃들 속에 파묻혀, 새침하고 자그마한 제인이 거의 안 보일 지경이었으니까. 하지만 제인은 아주 행복해 보였어. 잉글리스 씨도 그랬고. 물론앤드루스부인도 무척 기뻐하셨지.”
“그 드레스, 오늘 밤에 입을 거니?”
길버트가주름 장식이 달린 화사한 드레스를 내려다보면서 물었다.
“응, 예쁘지 않니? 머리에는 별꽃을 꽂을까 해. 올여름에 별꽃이‘유령의 숲’에 가득 피었더라.”
길버트는 앤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주름 잡힌 녹색 드레스와 드레스 밖으로 드러난 싱그러운 팔과 목의 곡선, 말아 올린 붉은 머리 위에서 하얗게 빛나는 별꽃.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길버트의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시선을 먼 곳으로 돌렸다.
“그럼 내일 다시 올게.오늘 밤즐겁게 보내라.”
앤은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멀어져 가는 길버트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길버트는 다정했다, 너무나 다정했다. 너무, 너무나 다정한 사람이었다. 병에서 회복된 후 길버트는 자주‘초록 지붕 집’을 찾아왔고, 두 사람의 오랜 우정은 다시 피어났다. 하지만 이제 앤은 우정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사랑의 장미꽃이 피고 보니 우정의 꽃봉오리가 그만 빛깔도 향기도 모두 잃어버렸다. 이제 앤은 길버트가 우정 외에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것인지 궁금했다. 길버트가 무사하다는 것을 알게 된 날, 하늘에라도 오를 듯한 기쁨을 맛보았던 그날 아침에 느꼈던 확신이 평범한 날의 평범한 빛 속에서 퇴색해갔다. 앤은 자기가 저지른 실수를 절대 만회할 수 없으리란 생각에 절망스럽고 두려웠다. 결국 길버트가 사랑했던 사람은 크리스틴일지도 모른다. 아니, 크리스틴과 정말 약혼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앤은 불확실한 희망을 마음속에서 지워버리고, 사랑 대신 일과 야망으로 미래를 채우고자 했다. 가르치는 일이 그리 고상한 일은 아니라 해도 잘할 자신은 있었다. 더구나 앤의 단편 소설들이 몇몇 편집자들 사이에 반응이 좋아서 이제 막 피어나는 문학을 향한 앤의 이상에 희망을 던져주었다. 하지만, 하지만 앤은 녹색 드레스를 집어 들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날 오후 길버트가 다시‘초록 지붕 집’을 찾았을 때, 앤은 나갈 채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어젯밤 잠을 잘 자지 못했을 텐데도 앤은 새벽녘처럼 상큼하고 별처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앤은 녹색 드레스를 입었다. 결혼식에 입고 갔던 드레스가 아니라 길버트가 특히 마음에 든다고 말했던 옛날 레드먼드 파티에서 입었던 드레스였다. 녹색 드레스와 대비를 이루어 붉은 머리는 더욱 풍부한 색채로 빛났고, 잿빛 눈은 별처럼 반짝였으며 하얀 피부는 아이리스처럼 섬세하고 부드러웠다. 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진 길을 걸어가면서 길버트는 옆에서 걷고 있는 앤을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앤이 오늘처럼 아름다워 보인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앤 또한 이따금씩 길버트를 곁눈질로 바라보면서 병을 앓은 후 길버트가 훨씬 더 성숙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길버트에게 이제 소년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세상도 아름답고 길도 너무 아름다웠다. 헤스터 그레이의 정원에 다다르자 앤은 오히려 아쉬운 생각까지 들었다. 두 사람은 낡은 벤치 위에 나란히 앉았다. 그곳 역시 아름다웠다. 예전에 다이애나, 제인, 프리실라, 앤이 황금 같은 소풍을 했던 날 처음 보았던 그때와 다름없이 아름다웠다. 사랑스러운 수선화와 제비꽃이 가득 피었던 정원에는 이제 요정의 횃불 같은 미역취 꽃이 만발했고, 과꽃이 정원 여기저기를 파랗게 수놓았다. 자작나무 계곡에서 시작한 시냇물은 옛날처럼 정겹게 숲 속을 흘렀고 부드러운 공기를 타고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저 멀리 펼쳐진 밭들을 둘러싼 울타리들은 숱한 여름의 태양을 견뎌내느라 은회색으로 색이 바랬고, 길게 뻗은 언덕 위로는 가을 구름이 드리워졌다. 서쪽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을 따라 어린 시절 꿈도 함께 돌아왔다.
“내 생각엔, ‘꿈이 실현되는 땅’은 파란 아지랑이가 피는 저쪽 어딘가에 있는 것 같아. 저 작은 언덕 너머에.”
앤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라도 있는 거니?”
길버트가 물었다.
그 목소리에는,‘패티네 집’과수원에서의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날 저녁 일 이후로 듣지 못했던 뭔가가 있어 앤의 심장을 거칠게 뛰게 했었다. 하지만 앤은 가볍게 받아넘겼다.
“물론이야.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까? 누구에게나 이루지 못한 꿈은 있게 마련이잖아. 만약 우리에게 이룰 꿈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면 그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일 거야. 저기 낮게 져가는 저녁 해가 뽑아 올린 고사리와 과꽃 향기, 너무 근사하지 않니? 그 향기를 눈으로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 아름다운 모습일 거야.”
길버트는 화제를 돌리려 하지 않았다.
길버트가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나에게도 꿈이 하나 있어. 항상 간직하고 있던 꿈이야. 절대 이룰 수 없는 꿈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만. 난 작은 벽난로가 있는 어떤 집을 꿈꾸고 있어. 고양이와 강아지와 친구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집이지, 그 집엔 너도 있어!”
앤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행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거의 두려울 지경이었다.
“2년 전에 너에게 했던 질문을 다시 하고 싶어, 앤. 만약 오늘 내가 너에게 다시 한 번 묻는다면 전과는 다른 답을 해주겠니?”
앤은 여전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들어 반짝이는 눈빛으로 길버트를 올려다보았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러할 눈빛으로. 길버트는 원하는 대답을 그 눈에서 읽었다.
두 사람은 땅거미가 질 때까지 에덴동산의황혼 녘만큼이나 달콤한 그 오래된 정원을 거닐었다. 얘기를 나누면서 함께 되돌아보고 싶은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동안 말하고, 행하고, 듣고, 생각하고, 느끼고, 오해했던 일들을.
“난 네가 크리스틴 스튜어트를 사랑한다고 믿었어.”
앤은 마치 자기가 로이 가드너를 사랑했다고 믿을 만한 빌미를 전혀 준 적이 없었다는 듯 길버트를 나무랐다.
길버트는 마치 소년처럼 웃었다.
“크리스틴은 이미 고향에 약혼자가 있었어. 난 그걸 알고 있었고 내가 안다는 걸 크리스틴도 알고 있었지. 크리스틴 오빠가 졸업하면서 다음 겨울에 자기 여동생이음악 공부를 하려고 킹스포트로 올 테니 동생을 좀 돌봐달라고 부탁했어. 아는 사람이 없어서 무척 외로울 거라고 하면서. 그래서 돌보아준 것뿐이야. 물론 크리스틴은 좋은 사람이야. 그렇게 상냥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모두들 우리가 사랑하는 사이라고 수군댄다는 걸 알았지만, 네가 절대로 날 사랑할 수 없다고 선언한 마당에 무슨 상관이 있었겠어. 앤, 내겐 아무도 없어. 너밖에는. 그 옛날 네가 내 머리에다 석판을 내려친 뒤로 난 변함없이 너만 사랑해왔어.”
“나 같은 바보를 어떻게 그렇게 변함없이 사랑할 수 있었어?”
앤이 말했다.
“물론 사랑을 멈추려고도해봤지. 네가 바보 같아서가 아니라, 로이 가드너가 등장한 이후로 정말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난 너를 향한 사랑을 멈출 수가 없었어. 물론 이런 내 마음을 너에게 말할 수도 없었지. 지난 2년간 날 가장 힘들게 했던 건 네가 로이와 곧 결혼하리란 사실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었어. 그리고 매주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누군가가 다가와 너와 로이 가드너가 곧 약혼 발표를 할 거라고 전해주는 말이었지. 심한 열로 고통스러웠던 밤이 지나고그다음날 잠이 깨서야 모든 걸 알게 되었어. 축복받은 그날 아침 난 필리파 고든, 아니 필리파 블레이크가 보내온 편지를 받았어. 너와 로이는 별 관계가 아니니 다시 한 번 시도해보라고 쓰였더라. 그 이후 나의 빠른 회복에 의사도 무척 놀라워했지.”
길버트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앤은 웃었다. 그리고 몸서리를 쳤다.
“난 네가 죽어간다고 생각했던 그날 밤을 절대 잊을 수 없어, 길버트. 오, 난 깨달았어. 그날 깨달았던 거야. 그리고 너무 늦어버렸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그렇지 않았잖아, 앤.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이 다 보상된 거야. 그렇지? 우리, 죽을 때까지 지금 이 순간을 우리의 아름다운 날로 기념하자. 잊을 수 없는 선물을 받은 날이잖아.”
“그래, 우리가 다시 행복을 찾은 날이니까.”
앤이 부드럽게 말했다.
“이 오래된 헤스터 그레이의 정원을 항상 사랑해왔지만, 지금부턴 더욱 사랑하게 될 것 같아.”
“그런데 앤, 넌 날 오랫동안 기다려줘야 해.”
길버트가 슬픈 듯이 말했다.
“의대 공부를 마치려면 앞으로 3년은 걸릴 거야. 그리고 그 후에도 난 다이아몬드 보석이나 대리석 저택은 줄 수 없어.”

 앤은 웃었다.
“난 보석도 대리석 저택도 원하지 않아. 그냥 너만 있으면 돼. 나, 필 못지않게 뻔뻔스럽지? 물론 다이아몬드나 대리석 저택도 좋겠지만, 그런 것들이 없으면 훨씬 더 상상의 여지가 있지 않을까. 그리고 기다리는 것도 난 문제 없어. 서로를 기다려주면서 일하고 꿈꾸고, 그러면서 우린 행복할 테니까. 아, 이젠 달콤한 꿈만 꿀 것 같아.”
길버트는 앤을 바짝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길버트와 앤은 어둑해진 길을 함께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둘은 이제 사랑이라는 왕국의 왕과 왕비가 되었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사랑스러운 꽃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활짝 피었고, 목장을 지나 희망과 추억의 바람이 불어왔다.



추천 (2) 선물 (0명)
IP: ♡.252.♡.103
뉘썬2뉘썬2 (♡.203.♡.82) - 2024/03/30 19:53:04

몽고메리가 평생에걸쳐 각색한 앤셜리란 캐릭터를 단비덕분에 잘읽고잇어요.
백년전소설이지만 현시대 우리의삶을 조명하는 시대를 넘나드는 훌륭한 걸작
이네요.

친구들은 결혼하고 애기낳고 행복에 겨워하는데 앤만이 고독하고 힘든사랑을
하네요.사랑하는 사람을 운명에서 내쫓는다는것은 자신의 오른팔을 잘나내는
것과 같은 아픔이라는 말이 와닿네요.

爱情两个字好辛苦。

나단비 (♡.252.♡.103) - 2024/03/30 21:40:49

사랑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던 앤, 알아봐서 얼마나 다행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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