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7권 21~22

나단비 | 2024.04.15 13:51:11 댓글: 0 조회: 102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61172
21
불가능한 말






맑고 차가운 기운이 퍼져 있는 겨울 저녁, 존 메러디스 목사는 생각에 잠겨 ‘무지개 골짜기’를 걸어갔다. 저 앞쪽 눈 덮인 언덕이 달빛에 반사되어 아름답게 빛났다. 골짜기에 길게 늘어선 키 작은 전나무들이 바람과 서리의 하프 소리에 맞추어 노래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목사관 아이들과 ‘잉글사이드’ 아이들이 휙휙 소리를 내며 썰매를 타고 동쪽 비탈길을 미끄러져 내려가 거울 같은 연못 위까지 쌩하고 달려 나갔다. 유쾌하게 어울려 노는 아이들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골짜기에 울려 퍼지고 나무들 사이를 빠져나가 요정의 폭포 속으로 사라졌다. 오른쪽 단풍나무 숲 사이로 ‘잉글사이드’에서 나오는 불빛이 언뜻언뜻 보였다. 그 불빛이 사람이건 영혼이건 언제나 사랑과 즐거운 웃음소리가 피어나는 자기 집으로 따뜻하게 두 팔 벌려 초대한다는 메시지로 보였다. 메러디스 씨는 그 유명한 도자기 개가 지키고 있는 ‘잉글사이드’의 난롯가에서 의사와 논쟁을 즐기며 보내는 오후 시간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날 밤 메러디스 목사의 눈은 ‘잉글사이드’ 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더 멀리 서쪽 언덕 위에, 빛은 약하지만 훨씬 더 마음을 끄는 별이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메러디스 목사는 로즈마리 웨스트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처음 로즈마리를 만난 이후로 조금씩 그의 가슴에 싹트기 시작한 어떤 것이 페이스가 로즈마리를 향한 찬사를 보내던 밤에 활짝 꽃을 피워버렸다. 오늘 밤 목사는 자기 마음을 털어놓을 작정이었다.
그는 자기가 로즈마리에게 사랑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세실리아를 사랑하던 것과는 다르다.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 시절의 낭만, 꿈, 영광이 담긴 사랑은 다시는 느끼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로즈마리는 아름답고 달콤하고 다정한 여인이었다. 무척이나 다정하고 좋은 친구였다. 로즈마리와 같이 있으면 행복했다. 다시는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없을 줄 알았건만. 그리고 로즈마리는 목사관의 이상적인 주부가 되어줄 것이고 아이들에게도 좋은 엄마가 되어줄 것이다.
그동안 아내 없이 살아오면서 메러디스 목사는 교회 사람들이나 동료 목사들로부터 다시 결혼하라는 암시가 담긴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그들 중에는 그저 좋은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딴 속셈이 있어서 하는 말인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목사는 그런 암시를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 사람들은 메러디스 목사가 그런 암시를 알아채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니었다. 메러디스 목사도 다 알았고, 때때로 상식적인 사고가 돌아오면 결혼하는 것이 좋으리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존 메러디스 목사는 역시 상식이란 것이 좀 약했고, 가정부 고르듯이 아무런 감정도 없이 적당한 여자로 부인을 고를 수도 없는 일이었다. 목사는 그 ‘적당한’이란 말을 싫어했다. 그 말만 들으면 제임스 페리가 떠올랐다. 페리 목사는 암시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리가 멀게 “적당한 나이에, 적당한 여자 말이야.” 하고 충고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존 메러디스 목사는 미친 듯이 달려 나가 아무나 가장 나이도 어리고 가장 적당하지 않은 여자와 결혼해버리고 싶다는 충동적인 기분이 일기도 했다.
마셜 엘리엇 부인은 메러디스 목사의 친구였다. 목사는 엘리엇 부인을 좋아했다. 그러나 부인이 불쑥 결혼하라는 말을 꺼내면 자기의 순수한 내면의 성지를 보호하고 있던 장막이 찢겨지는 기분이 들면서 부인을 대하기가 두려웠다. 목사 자신도 교회 신도들 중에 자기와 기꺼이 결혼해줄 적당한 나이의 여자들이 몇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정신을 놓고 사는 메러디스 목사도 글렌 세인트 메리에 오자마자 그런 사실을 곧 인식했다. 그 여자들은 모두 선량하고 현실적인 사람이었지만 별로 매력은 없는 사람들이었다. 한둘은 그런대로 괜찮은 얼굴이고, 나머지는 꼭 그렇다고 볼 수도 없었다. 존 메러디스 목사는 눈 딱 감고 그들 중 하나와 결혼할까도 생각해보았다.
메러디스 목사에게도 이상적인 여성상이란 것이 있어서 단순히 필요한 일이라고 해서 마음에도 없는 일을 할 수는 없었다. 아무 여자에게나 자기 집에 들어와 세실리아의 빈자리를 채워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옛날 청순했던 신부에게 바친 사랑과 존경을 아주 조금이라도 바칠 수 있는 상대여야 했다. 이런 조건에 부합하는 여자를 찾을 수 있을까?
로즈마리 웨스트가 그 가을 저녁 무렵 그의 삶으로 들어왔다. 메러디스 목사는 로즈마리를 만나면 편안했고 대화도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낯선 사람으로 살던 장벽을 넘고 우정의 손을 잡았다. 메러디스목사는 그 은밀한 샘가에서 로즈마리와 이야기를 나눈 지 단 10분 만에 에밀린 드류나 엘리자베스 커크, 에이미 아네터 더글러스와 1년 동안 알고 지낸 것보다도 더 많이 알게 된 느낌을 받았다. 아니, 그 사람들을 백 년은 알고 지낸 것보다도 더 많이 로즈마리와 친해진 기분이었다.
알렉 데이비스 부인이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던 날에도 로즈마리에게서 위안을 얻었다. 그 이후로 목사는 종종 언덕 위의 그 집을 찾았다. 밤중에 어둑한 ‘무지개 골짜기’로 난 길을 따라 로즈마리 웨스트를 만나러 다녀서, 글렌의 말 좋아하는 아낙들도 이 일을 확신하지는못했다. 한두 번은 웨스트 자매 집을 찾아온 방문객들 눈에 띄기도 했다. 부인회 모임에서 모은 정보도 그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커크는 그 이야기만 듣고도 상냥하지만 평범한 얼굴로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소중하게 간직했던 희망을 접어버렸다.
에밀린 드류는 다음번에 로브리지에 사는 노총각을 만나면 지난번에 그랬던 것처럼 무시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로즈마리 웨스트가 목사를 차지해야겠다고 결심했다면 이야기는 끝난 거였다. 로즈마리는 자기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고 미모로도 모든 남자들의 찬사를 받는 여자였다. 게다가 이 자매는 돈도 많다!
에밀린 드류가 악의적인 말을 한 것이라고는 언니에게 “메러디스 목사가 너무 정신을 팔고 살다가 멍청하게 로즈마리가 아닌 엘런에게 청혼하는 일이나 없기를 바랄 뿐이야.” 한 것이 전부였다. 에밀린은 로즈마리에게 더 이상 나쁜 감정은 품지 않았다. 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결혼한 경험이 없는 노총각이 애가 넷이나 딸린 홀아비보다는 낫다. 더 나은 것을 두고도 일시적으로 에밀린의 눈을 가리고 있던 것은 단지 목사관 안주인이라는 매력이었다.
꽥꽥 소리를 내지르는 세 아이를 태운 썰매 하나가 연못을 향해 빠르게 메러디스 씨 곁을 스쳐 지나갔다. 페이스의 긴 고수머리가 바람에 날렸고, 페이스의 웃음소리가 다른 아이들의 웃음소리보다 더 높게 울렸다. 존 메러디스목사는 부드럽고 우수에 찬 눈으로 아이들의 뒷모습을 좇았다. 목사는 자기 아이들이 블라이드 아이들과 어울리며 즐겁게 지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블라이드 부인처럼 현명하고 명랑하고 다정한 친구를 둔 것도 기뻤다. 하지만 목사에게는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그 무엇인가는 로즈마리 웨스트를 목사관의 신부로 맞아들이는 것으로 채워질 것이다. 로즈마리에게는 모성적인 것을 자극하는 면이 있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고 목사는 토요일 밤에는 외출을 잘 하지 않았다. 일요일에 할 설교 준비로 바쁜 날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오늘 밤을 선택한 이유는 엘런 웨스트가 집을 비울 거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집에는 로즈마리 혼자뿐일 것이다. 봄에 로즈마리를 처음 만난 이후로 언덕 위의 집을 찾아 종종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한 번도 로즈마리 혼자 집에 있었던 적은 없었다. 언제나 엘런이 함께 있었다.
엘런이 집에 있는 것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엘런 웨스트도 무척 좋아했고 둘은 좋은 친구였다. 엘런은 남자들 일도 아주 잘 이해했고 유머감각도 있어 겉으로는 수줍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유머를 즐기는 목사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다. 엘런이 정치나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도 좋았다. 글렌에는 블라이드 의사를 제외하고는 그런 문제를 토론할 상대도 없었다.
“나는 우리가 살아 있는 한은 모든 일에 흥미를 갖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으면 살아 있어도 죽은 것과 다름없죠.”
엘런은 그렇게 말했다.
메러디스 목사는 엘런의 나직이 울리는 목소리도 좋았고, 가슴까지 시원하게 만드는 명랑한 웃음소리도 좋았다. 엘런은 유쾌한 이야기를 재미나게 들려주고는 언제나 그 웃음소리로 끝을 맺었다. 글렌의 다른 여자들처럼 아이들 일로 목사를 추궁하지도 않았고, 마을에 도는 소문 이야기로 목사의 기운을 빼지도 않았으며, 소견이 좁지도 않았다. 언제나 아주 진지했다.
메러디스 목사도 미스 코넬리아의 사람을 구분하는 방법을 들어 알고 있어서 엘런을 ‘요셉을 아는 종족’에 속하는 사람으로 여겼다. 어디로 보든 처형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여자였다. 그러나 아무리 높이 사는 사람이라도 남자가 한 여자에게 청혼하려는 자리에서까지 함께하고 싶지는 않은 법이다. 그런데 엘런은 언제나 옆에 있었다. 자기가 메러디스 목사를 혼자 차지하려거나 혼자만 이야기하려 들지는 않았다. 로즈마리에게도 메러디스 씨와 함께 할 시간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아예 모습을 감추는 일도 곧잘 있었다. 자기는 세인트 조지를 무릎에 앉혀놓고 방구석으로 물러나 있고 메러디스 목사와 로즈마리에게 두 사람만이 이야기하고 노래 부르고 책을 읽도록 해주었다. 가끔씩은 엘런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때도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선택한 노래가 엘런에게 조금이라도 남자와 여자의 사랑 놀음처럼 느껴지면 엘런은 얼른 그 꽃봉오리를 꺾어버리고 그날 밤엔 줄곧 로즈마리를 다그쳤다. 하지만 아무리 엄중한 감시가 따르더라도, 꼭 말이 아니라도 은밀하게 눈짓과 미소로 마음을 주고받는 것까지야 막을 수 없어서 목사의 구애 작전은 나름대로 진척이 있었다.
그러나 구애가 절정에 이르려면 엘런이 없어야 했다. 그런데 엘런은 세상 어디를 봐도 자기 집 난롯가보다 나은 곳은 없다고 하면서, 특히 겨울 동안에는 좀처럼 집을 비우지 않았다. 엘런은 할 일 없이 여기저기 쏘다니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는 했지만 사람을 만나도 자기 집에서 만났다.
메러디스 씨는 로즈마리에게 자기 마음을 전하려면 편지를 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엘런이 불쑥 다음 주 토요일 밤에 친구의 은혼식에 갈 거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 부부가 결혼할 때 자기가 신부 들러리를 섰다고 했다. 나이 든 사람들만 초대되어 로즈마리는 끼지 못했다. 그 말에 메러디스 목사의 귀가 번쩍 뜨이고 멍하던 검은 눈이 번쩍 빛났다. 엘런도 로즈마리도 그것을 알아차렸다. 엘런도 로즈마리도 다음 토요일 밤에는 메러디스 목사가 틀림없이 언덕을 올라오리라고 짐작했다.

“그래, 일이 빨리 끝나는 것이 나을지도 몰라. 저 사람은 로즈마리에게 청혼할 생각이야, 세인트 조지. 난 확신해. 목사에게 일찌감치 기회를 주어서 로즈마리를 자기 아내로 삼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 낫다고, 세인트 조지. 로즈마리도 그 청혼을 받아들이고 싶어 해. 나도 그건 알지만 어디까지나 약속은 약속이야. 나도 로즈마리가 가엾기는 하단다, 세인트 조지. 제부가 필요한 존재라면 메러디스 목사는 제부로 삼고 싶은 사람이기도 하고. 그 사람에겐 뭐 하나 흠잡을 구석이 없어. 카이저가 유럽의 평화에 해독한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려고도, 그렇게 믿도록 설득할 수도 없다는 점만 빼면 단 한 가지도. 그것이 그의 사각지대지. 하지만 그 사람은 좋은 대화상대고 난 그 사람이 마음에 들어. 존 메러디스처럼 멋진 입을 가진 사람에게라면 여자들은 자기 속을 다 털어놓고 싶기 마련이지. 분명 원하는 대로 이해도 받게 될 것이고. 그런 남자는 사실 루비보다도 더 나아. 아주 드문 사람이지, 조지. 하지만 그 사람은 로즈마리를 가질 수 없어. 그 사실을 그 사람이 알게 된다면 우리 둘 다 만나려 들지 않을 거야. 우리는 그 사람을 그리워하게 될 거라고, 세인트. 우리가 그 사람을 그리워할 거라니 정말 망측한 일이야. 하지만 로즈마리는 약속을 했고 난 그 약속을 지키도록 할 거야!”
메러디스 씨가 집으로 가고 로즈마리가 조용히 2층 자기 방으로 올라간 다음 엘런은 엄한 얼굴로 검은 고양이를 보며 말했다.
단호한 결심을 한 듯 입술을 꼭 다문 굳은 표정의 엘런은 흉해 보이기조차 했다. 로즈마리는 2층에서 베개에 얼굴을 묻고 울어야 했다.
결국 메러디스 씨는 로즈마리가 혼자 있는 틈을 찾았고, 오늘 밤 그녀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로즈마리는 오늘 밤을 위해 특별히 치장을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러고싶었지만 청혼을 거절할 남자 앞에서 멋을 낸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 생각되었다. 로즈마리는 어두운 색깔의 평범한 드레스를 입었지만 그래도 꼭 여왕 같았다. 마음의 흥분을 억누르고 있어서 얼굴에는 홍조가 서렸고 커다란 푸른 눈은 빛났으며, 다른 날보다 좀 산만해 보였다.
로즈마리는 메러디스 목사가 빨리 이야기를 끝내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온종일 지금 이 순간이 오기를 두려워하면서도 기다렸다. 메러디스 씨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자기의 사랑이 첫사랑만큼은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자기가 청혼을 거절하면 무척 실망이 크겠지만 그 일로 큰 상처를 입을 것으로는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람을 위해서나 자신을 위해서나 메러디스 씨를 실망시키긴 싫었다. 로즈마리는 자신의 감정에 정직한 사람이었다. 자기가 존 메러디스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 일이 허락되는 일이기만 하다면.
로즈마리는 자기가 메러디스 목사를 거절하고 나면 삶이 얼마나 무미건조해질지도 알았다. 메러디스 목사는 친구로 지내자고만 한다면 분명 거절할 것이다. 그와 함께하는 삶은 무척 행복할 것이다. 자기가 메러디스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로즈마리와 행복 사이에는 몇 년 전에 엘런에게 했던 약속이라는 감옥의 철문이 가로놓여 있었다.
로즈마리는 아버지의 기억이 없었다. 겨우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때 엘런은 열세 살이었고 아버지를 기억하고 있었지만 특별히 그립다는 생각은 없었다. 아버지는 엄하고 말이 별로 없던 남자였고, 미인이었던 엄마보다 나이도 훨씬 많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5년 후에 열두 살이던 남동생도 세상을 떠났다. 그 이후로 두 자매는 어머니와 함께 조용히 살았다. 두 사람은 글렌이나 로브리지의 사교 모임에 나가는 일도 별로 없었다. 사교 모임에 가면 엘런은 늘 재치 있게 행동해 분위기를 활기 있게 했으며, 로즈마리는 상냥하고 아름다워 어디서나 크게 환영받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소녀 시절에 그들 말대로 ‘실망’을 겪었다. 로즈마리는 바다에 연인을 빼앗겼고, 엘런은 잘생긴 빨간 머리의 청년 노먼 더글러스를 잃었다. 떠들썩하고 요란하게 말을 몰기로 유명하던 노먼은 엘런과 별일도 아닌 걸로 싸우고는 떠나가 버렸다.
마틴이나 노먼을 대신할 후보자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웨스트 자매의 눈으로는 마음에 드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모양이다. 엘런과 로즈마리는 서서히 젊음과 꽃다운 아름다움이 시들어갔고, 그렇다고 겉보기에는 그런 것을 아쉬워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언제나 병을 앓던 어머니에게만 헌신했다. 세 사람은 책, 애완동물, 꽃이라는 매우 제한적인 집 안의 관심거리만으로 살았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행복했고 만족했다.
로즈마리가 스물다섯 살 생일에 웨스트 부인도 세상을 떠났고 두 자매는 깊은 상심에 빠졌다. 처음에는 참을 수 없이 외로운 생각이 들었다. 특히 엘런이 심했다. 오랫동안 비애감에만 잠겨 말도 하지 않고 생각에만 잠겨 있다가 갑자기 발작이라도 일으킬 듯 엉엉 우는 일이 잦았다. 로브리지의 늙은 의사는 로즈마리에게 엘런의 우울증이 없어지지 않거나 더 심해질지도 모른다고 했다.
어느 날 엘런이 온종일 먹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고 앉아만 있자 로즈마리는 언니 무릎으로 몸을 던지며 애원했다.
“오, 엘런 언니. 내가 있잖아? 나 따위는 필요 없다는 거야? 우리는 여태까지 서로 아끼며 잘 지내왔잖아.”
“네가 언제까지나 나와 같이 있어줄 건 아니잖니? 넌 언젠가 결혼해서 날 떠날 거야. 그럼 나 혼자 남게 돼. 난 그 생각만 하면 참을 수가 없어. 난 죽는 게 나아.”
엘런이 침묵을 깨뜨리고 거칠게 말했다.
“난 결혼하지 않을 거야, 절대로, 엘런 언니.”
로즈마리가 말했다.
엘런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로즈마리의 눈을 살피듯 바라보았다.
“너 지금 그 말 맹세할 수 있어? 어머니 성경책에 대고 맹세할 수 있어?”
엘런이 말했다.
로즈마리는 엘런의 기분을 맞추려고 기꺼이 승낙했다. 결혼을 안 하는 것이 뭐 대수인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사랑은 마틴 크로퍼드와 함께 바다 저 아래로 가라앉아 버렸고, 사랑 없이는 누구하고도 결혼할 수 없는 것 아닌가. 로즈마리는 기꺼이 엘런과 약속했다. 하지만 엘런은 두려울 정도로 격식을 갖추고 맹세를 하자고 했다. 둘은 주인도 없는 어머니 방에서 성경책 위에 손을 마주 잡아 올리고 일생 동안 결혼하지 않고 언제까지나 함께 살겠다고 맹세했다.
그렇게 약속한 후 엘런의 병은 회복되어 갔고, 곧 원래의 쾌활한 성품을 되찾았다. 그 후로 10년 동안 엘런과 로즈마리는 결혼 생각 같은 것으로 마음이 흔들리거나, 물론 결혼하는 일도 없이 낡은 집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둘이 한 약속이 큰 부담도 아니었다. 하지만 엘런은 괜찮은 남자가 자기네 삶으로 들어올 때마다 동생에게 그 약속을 상기시켰다. 그렇지만 존 메러디스 목사가 그날 밤 로즈마리를 찾기 전까지는 사실 위협다운 위협도 없었다. 로즈마리로서는 그 약속에 엘런의 강박증을 재미삼아 놀림거리로 만들기도 했다. 최근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지금 이것은 가혹한 족쇄였다. 자기 쪽에서 기꺼이 받아들인 속박이었기에 결코 뿌리칠 수도 없었다. 그 약속 때문에 오늘 밤 로즈마리는 행복을 외면해야 했다.
아직 소년이었던 연인에게 주었던 수줍고 달콤한 장미 꽃봉오리 같던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는 줄 수 없을 줄 알았건만. 하지만 로즈마리는 존 메러디스에게 더욱더 풍부하고 여자다운 사랑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 존 목사는 마틴도 건드린 적 없는 로즈마리의 깊은 내면까지 와 닿았다. 그런데 오늘 밤 그를 떠나보내야 한다. 그를 그 외로운 유배지로, 그 텅 빈 삶으로, 그 가슴 아픈 문제들로 돌려보내야 했다. 자기는 10년 전 어머니의 성경책을 두고 엘런과 한 맹세 때문에 절대로 결혼할 수 없는 것이다.
존 메러디스는 급히 서둘지 않았다. 전혀 연인 사이에 나누는 대화라고 볼 수 없는 이야기를 꼬박 두 시간이나 나누고도 정치 이야기까지 끄집어냈다. 로즈마리에게는 그처럼 따분한 화제가 없었는데도. 로즈마리는 자기가 착각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렇게 가슴 두근거리며 두려워하던 자신이 갑자기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맥이 빠지고 바보스럽게 여겨졌다.
로즈마리의 얼굴에서 홍조도 사라지고 눈빛도 흐려졌다. 존 메러디스는 자기에게 청혼할 마음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 별안간 메러디스 목사가 몸을 일으켜 로즈마리의 옆으로 와 서더니 청혼했다. 온 방 안이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세인트 조지조차도 가르랑거리는 소리를 멈추었다. 로즈마리에게 자기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심장 소리는 틀림없이 존 메러디스에게도 들렸을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상냥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해야 할 시간이었다. 로즈마리는 그동안 며칠 동안을 오늘 이 순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준비해왔다. 조금은 과장되게, 하지만 유감스러운 마음을 담은 거절의 말을. 그런데 지금 머릿속이 캄캄해지면서 한 마디도 떠오르지 않았다. 안 된다고 말을 해야 하지만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그건 불가능한 말이었다. 자기는 존 메러디스를 사랑할 수 없었지만 사랑하고 있었다. 그를 밀어내고 나면 자기 인생은 괴로움뿐일 것이다.
로즈마리는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로즈마리는 금빛 머리를 들고 더듬거리며 이삼일 동안 생각해볼 시간을 달라고 했다.
존 메러디스는 좀 놀랐다.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자만심이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로즈마리 웨스트가 당연히 자기 청혼을 받아들일 줄 알았다. 틀림없이 자기를 사랑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 애매한 태도는 어떻게 된 것일까? 이 망설임은? 로즈마리가 자기 마음이 어떤지 모르는 소녀도 아니지 않은가. 메러디스 목사는 몹시 실망하고 당황했다. 그러나 여느 때처럼 부드럽고 예의 바르게 로즈마리의 대답을 받아들이고 집을 나왔다.
“며칠만 기다려주세요.”
로즈마리는 눈을 내리고 새빨갛게 열이 오른 얼굴로 말했다.
그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 방으로 들어가 두 손을 붙들고 괴로움에 온몸을 떨었다.





22
세인트 조지는 모두 알고 있다






엘런 웨스트는 폴록의 은혼식에 갔다가 한밤중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손님들이 모두 돌아간 다음 은발의 신부를 도와 설거지를 하고 왔기 때문이다. 두 집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았고, 길에는 달빛이 내리비치고 있어 엘런은 기분 좋게 집까지 걸어왔다.
엘런은 그날 저녁 무척 즐거웠다. 벌써 몇 년 동안이나 파티에 참석해보지 않았건만 그날은 참 유쾌했다. 은혼식에 온 손님들은 모두 옛날부터 아는 사람들이었고, 폴록 부부의 외아들은 멀리서 대학교에 다녀서 젊은이들이 끼어들어 분위기를 망친 일도 없었다.
노먼 더글러스도 왔다. 그해 겨울철에는 교회에서 노먼을 한두 번 마주치기야 했지만 사교 모임에서 만난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노먼 더글러스를 만났다고 해서 엘런의 마음이 뒤숭숭하거나 그렇지도 않았다. 그 옛날에 자기가 왜 노먼을 좋아했는지, 노먼이 갑자기 결혼해버렸을 때 왜 그렇게 가슴 아팠는지 이상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도 어쨌건 노먼을 다시 만나니 즐거웠다. 엘런은 노먼 더글러스가 얼마나 활기에 넘치고 유쾌한 사람인지 잊고 있었다. 노먼이 없으면 어떤 모임도 활기가 없었다.

노먼이 나타나자 모두들 깜짝 놀랐다. 노먼은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 것으로 알고들 있었기 때문이다. 폴록 부부도 노먼이 자기들 결혼식에 참석했던 사람이어서 초대는 했으나 정말로 올 줄은 몰랐다. 그는 팔촌인 에이미 어네터 더글러스의 상대가 되어주면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엘런도 식탁 맞은편에 앉아서 노먼과 입씨름을 벌였다. 말이 오가면서 노먼이 고함을 지르거나 약을 올리기도 했지만 엘런은 그런 일로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노먼을 꼼짝 못 하게 해서 거의 10여 분이나 입도 못 열게 만들어버리기도 했다. 결국 노먼은 “여전히 씩씩하구먼, 조금도 변함없이 여전히 씩씩해!” 하고 중얼거리더니 에이미 어네터를 상대로 허풍을 떨기 시작했다. 노먼의 공격에 야멸치게 되받아치던 엘런과는 달리 에이미 어네터는 그저 실실 웃기만 했다.
엘런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런 일들을 되새기며 즐거움을 맛보았다. 달빛 어린 공기가 눈과 함께 반짝거렸다. 발밑에서 사각사각 눈 밟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아래로는 글렌 마을의 풍경이, 그리고 더 멀리로는 하얀 눈으로 덮인 항구가 보였다. 목사관 서재에서도 불빛이 비쳤다. 그렇다면 존 메러디스 목사는 집으로 돌아간 것인가? 그가 로즈마리에게 청혼했을까? 로즈마리는 어떤 식으로 청혼을 거절했을까? 엘런은 평생 이 일을 모른 체하리라 생각했다. 정말 궁금하기는 하지만 로즈마리는 그 일을 결코 입 밖에 내지 않을 것이고, 엘런 쪽에서도 먼저 묻지는 못할 일이었다. 거절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결국 중요한 건 거절했다는 사실이니까.
“그 사람이 가끔씩 들러주었으면 좋겠는데. 전과 다름없이 친하게 지낼 만큼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가끔씩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남자 친구가 없으면 사는 것이 정말 무료하거든. 하지만 메러디스 목사는 두 번 다시 우리 집에 오지 않을 거야. 노먼 더글러스도 있지만…… 그 사람도 좋지. 때때로 노먼과 통쾌하게 토론을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 사람은 사람들의 눈이 무서워서 절대로 우리 집에 오려고 들지 않을걸. 내게 구혼하려고 그런다고들 할 게 뻔하니까. 그런 말을 듣는 건 나도 싫어. 이제는 그 사람이 존 메러디스보다도 더 낯선 사람이 되었군.”
엘런은 혼자 있는 것을 아주 싫어해서 외로움을 밀어내려고 예전부터 생각하는 것을 소리 내어 말하고는 했다.
“그 사람과 내가 옛날에 연인이었다니 꿈만 같은 일이야. 그래, 그것이 뭐 어떻다는 거야. 온 글렌을 찾아보아도 내가 대화를 나누고 싶은 남자는 단 두 사람뿐인데 소문이 무섭다고, 또 그 몹쓸 사랑 타령 때문에 둘 다 만날 수가 없다니. 내 손으로 세상을 확 바꾸어버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
엘런은 차가운 별들을 향해 심술궂게 소리를 질렀다.
엘런은 문 앞에서 갑자기 가슴이 철렁해 멈추어 섰다. 거실에는 아직도 불이 켜져 있었고, 창문으로 한 여자가 불안정하게 오락가락하는 그림자가 비쳤다. 로즈마리는 이렇게 밤늦게까지 잠자리에 들지 않고 도대체 뭘 하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정신 나간 듯 배회하는 거야?
엘런은 조용히 집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을 열자 로즈마리가 나왔다. 로즈마리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고 숨도 가빠 보였다. 긴장되어 있고 열에 뜬 감정이 마치 입은 옷처럼 로즈마리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왜 안 자고 있니, 로즈마리?”
엘런이 물었다.
“이쪽으로 와줘요. 할 이야기가 있어요.”
로즈마리의 목소리는 긴장되어 있었다.

엘런은 침착하게 외투와 방한용 덧신을 벗고 동생을 따라 난롯불이 타고 있는 따뜻한 방으로 들어갔다. 탁자로 가 손을 얹고 서서 기다렸다. 엘런은 무표정하고 심각한 표정에 눈썹까지 짙었지만 그런대로 잘생긴 용모였다. 그날은 파티를 위해 새로 맞춘 뒤꼬리 장식이 달리고 V자 목둘레로 된 검은색 벨벳 드레스를 입고 있어 더더욱 위엄 있어 보였다. 목에는 웨스트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호박 구슬 목걸이를 여러 겹으로 두르고 있었다. 추위 속을 걸어와서 엘런의 볼은 타는 듯이 빨갰다. 그러나 강철 같은 푸른 눈은 얼음장처럼 차가워 보였고, 겨울 밤하늘처럼 그 어느 것에도 굴복하지 않으려는 듯 보였다. 서서 기다리고 있는 엘런의 위엄에 눌려 로즈마리는 겨우 입을 뗐다.
“엘런 언니, 메러디스 씨가 아까 여기 왔었어요.”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그분이 내게 청혼했어요.”
“그럴 줄 알았다. 물론 넌 거절했겠지?”
“아니요.”
“로즈마리, 그럼 네가 그 청혼을 받아들였단 말이니?”
엘런이 손을 꼭 쥐고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아니, 그런 것은 아니고.”
엘런은 겨우 자제심을 회복했다.
“그럼 어쨌다는 거야?”

“내가, 내가 며칠만 대답할 시간을 달라고 했어요.”
“왜 그래야 했는지 난 이해할 수 없구나. 네가 그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대답은 단 하나뿐일 줄 알았는데.”
엘런이 경멸을 담아 차갑게 말했다.
로즈마리는 간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엘런 언니, 난 존 메러디스를 사랑해요. 난 그 사람 아내가 되어주고 싶어요. 날 그 약속에서 자유롭게 해주면 안 될까요?”
로즈마리가 간청했다.
“안 돼.”
엘런이 두려움에 질려 단칼에 거절했다.
“언니, 언니…….”
“잘 들어. 난 너더러 그런 약속을 해달라고 한 적 없어. 네가 그러겠다고 한 거야.”
엘런이 말했다.
“나도 알아요. 나도 알아요. 하지만 그때는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될 줄 몰랐어요.”
“네가 그렇게 하겠다고 했어. 넌 우리 어머니의 성경책을 놓고 약속했다고. 그것은 약속 이상이야. 그것은 맹세라고. 그런데 그 맹세를 지금에 와서 깨버리겠다고?”
엘런이 가차 없이 말했다.
“그 약속에서 그만 날 놓아달라는 것뿐이에요, 엘런 언니.”
“난 그럴 수 없어. 약속은 약속이야. 내가 살아 있는 한은 안 될 일이야. 그 약속을 깨는 건 네가 한 맹세를 저버리는 일이야. 난 허락할 수 없어.”
“나한테 너무 심한 거 아녜요, 엘런 언니?”
“내가 심하다고? 그럼 난 어쩌라고? 내가 여기 혼자 남으면 얼마나 외로울지 생각해본 적 있어? 난 견디지 못할 거야. 미치고 말 거라고. 난 혼자서 살 수 없어. 내가 너한테 좋은 언니가 아니었니? 내가 언제 네가 원하는 일을 못 하게 한 적 있어? 네가 원하는 일이라면 뭐든 다 하게 해주었잖아.”
“그래, 그랬어요.”
“그런데도 만난 지 1년도 안 된 남자 하나 때문에 날 떠나버리겠다는 거야?”
“난 그 사람을 사랑해요, 엘런 언니.”
“사랑! 넌 마치 중년여자가 아니라 여학생 같은 말을 하는구나. 그 사람도 널 사랑하는 줄 아니? 그 사람은 가정부와 가정교사가 필요한 것뿐이야. 너도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게 아니야. 그저 ‘부인’이라는 호칭이 필요한 거지. 너도 노처녀로 전락하는 것을 불명예로 여기는 마음 약한 여자 중 하나일 뿐이야. 단지 그런 것이 사랑은 아니라고.”
로즈마리는 몸을 떨었다. 엘런은 이해하지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더 이상 말싸움해봐야 소용없었다.
“그래서 날 놓아주지 않겠다고요?”
“안 돼, 절대로. 그리고 이 문제는 다시는 꺼내지 마라. 넌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켜야만 해. 더 이상은 할 말이 없다. 가서 자거라. 시간을 좀 봐! 넌 너무 낭만적인 감상에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거야. 내일 아침이 되면 좀 더 분별력을 찾을 게다. 어쨌거나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다시는 내 귀에 들리지 않게 해라. 가서 자.”
로즈마리는 더 이상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창백하고 풀죽은 얼굴로 방에서 나갔다. 엘런은 얼마 동안 방 안을 미친 듯이 오락가락하다가 세인트 조지가 오후 내내 조용히 자고 있는 의자 앞에 멈추어 섰다. 엘런의 거뭇한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퍼졌다. 엘런이 비극을 이겨내지 못한 적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단 한 번밖에 없었다. 오래전 노먼 더글러스와 헤어졌을 때도 울기보다는 그런 일로 괴로워하는 자신을 비웃었다.
“이번 일로 로즈마리가 며칠 동안은 좀 샐쭉해서 지내게 되겠지, 세인트 조지. 그래, 당분간은 유쾌하지 못할 거지만 우린 이겨낼 거라고, 조지. 우리는 전에도 어리석은 아이 같은 사람들을 다루었어. 당분간은 로즈마리가 얼굴을 펴지 않을 테지만 그 애도 이겨낼 거야. 그 앤 자기가 한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해. 그것이 내가 로즈마리에게나 너에게 할 마지막 말이야, 세인트.”
엘런은 이렇게 말하면서도 아침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 날 로즈마리는 샐쭉해 있지 않았다. 창백하고 말이 없긴 했지만 그 외에는 별다른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 엘런에게 나쁜 감정을 품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폭우가 내리는 날씨라서 교회에 가겠다고 나서지도 않았다. 오후가 되자 로즈마리는 자기 방에 틀어박혀 존 메러디스에게 편지를 썼다. 직접 대하고는 도저히 ‘안 돼요.’란 말을 할 자신이 없었다. 메러디스 목사는 자기가 마지못해서 ‘안 돼요.’라고 말하는 것으로 알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지도 몰랐다. 목사가 간청하거나 애원한다면 자기도 어떻게 대답해버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자기가 메러디스 목사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고 여기게 하려면 편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로즈마리는 존 메러디스에게 몹시 딱딱하고 냉정한 거절의 편지를 썼다. 예의만 겨우 갖춘 차가운 거절이었다. 아무리 대범한 연인이라도 전혀 희망을 품을 만한 여지가 없도록 하려면 어쩔 수 없지만 메러디스는 대범한 연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음 날 메러디스 목사는 먼지투성이 서재에서 로즈마리의 편지를 읽었다. 목사는 상처받았고, 굴욕감에 움츠러들었지만 굴욕감 속에서도 무서운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았다. 전에는 자기가 로즈마리를 세실리아만큼 깊이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제 로즈마리를 잃고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로즈마리는 그에게 전부였다. 전부! 그런데 그의 삶에서 로즈마리를 전부 없애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심지어는 우정조차도 불가능하다. 앞으로의 인생이 참을 수 없이 황량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 일도 해나가야 하고 아이들도 돌보아야 하지만 마음이 텅 비어버린 듯 허전했다.
메러디스 목사는 어둡고 춥고 위안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서재에서 밤새도록 혼자 머리를 감싸 쥐고 앉아 있었다. 언덕 위의 집에서는 로즈마리가 두통이 난다며 일찍 침대에 들어갔고, 엘런은 세인트 조지를 상대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세인트 조지는 어리석은 인간을 경멸하듯 가르랑거리면서 자기에게 중요한 것은 부드러운 쿠션뿐이라는 얼굴이었다.
“여자들에게 두통이 없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세인트 조지?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어. 이삼 주 동안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고 지내는 거야. 솔직히 나도 기분이 그다지 좋은 건 아니야, 세인트 조지. 꼭 새끼 고양이를 물에 빠뜨린 것 같다고. 하지만 로즈마리는 약속했어. 먼저 그런 약속을 하자고 한 사람도 바로 그 애야. 정말이라고, 세인트 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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