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7권 33~35 (7권 끝)

나단비 | 2024.04.16 15:36:37 댓글: 0 조회: 124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61488
33
칼은 회초리를 맞지 않았다






메리 밴스가 뭔가를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내가 너희들에게 꼭 해주어야 할 말이 있어.”
메리와 페이스, 우나는 아까 플래그 씨네 상점에서 만나 서로 팔짱을 끼고 마을 큰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우나와 페이스는 ‘이제 또 뭔가 불쾌한 일이 일어나겠군.’ 하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메리 밴스가 꼭 해주어야 할 말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분명 듣기 좋은 말이 아니었다. 우나와 페이스는 자기들이 왜 메리를 좋아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메리를 참 좋아하기는 했다. 메리는 분명 재미있고 유쾌한 친구였다. 다만 메리가 뭔가를 말해주는 것이 자기 의무라고 믿지만 않았으면 좋으련만!
“너희들 로즈마리 웨스트가 너희 아빠와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다는 걸 알고 있니? 너희들이 너무 거친 아이들이라서 자기가 제대로 키울 수 없을까 봐 두려워서 너희 아버지 청혼을 거절했대.”
그 말에 우나는 은밀한 기쁨을 느꼈으나 페이스는 미스 웨스트가 아빠와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다니 좀 실망이었다.

“네가 어떻게 알았는데?”
페이스가 물었다.
“그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엘리엇 아주머니가 의사 부인에게 하는 소리를 내가 다 들었다고. 아주머니들은 내가 멀리 있어 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내 귀는 고양이처럼 잘 들리거든. 엘리엇 아주머니는 분명히 로즈마리가 너희들이 나쁜 아이란 소문을 듣고 새엄마 노릇을 할 자신이 없었던 거라고 했어. 너희 아버지는 요즘 언덕 위의 집을 찾아가지도 않잖아. 노먼 더글러스 아저씨도 그 집에 가지 않는대. 사람들 말로는 미스 엘런이 그 아저씨를 차버렸대. 자기가 옛날에 채인 것을 복수하려고 말이야. 하지만 노먼 아저씨는 기어이 미스 엘런을 차지하고 말 거라고 사방에 떠들고 다닌대. 내 생각에는 너희들이 아빠 결혼을 망쳐버린 거야. 얼마 안 있으면 너희 아빠가 다른 여자랑 결혼할 텐데 정말 안됐다. 로즈마리 웨스트만큼 부인 노릇을 잘해줄 사람도 없을 텐데.”
“넌 모든 계모란 잔인하고 나쁘다고 했잖아.”
우나가 말했다.
“계모는 대부분이 못됐지.”
메리가 좀 이해할 수 없게 말했다.
“그렇지만 로즈마리 웨스트는 누구에게 못되게 굴 사람이 아니거든. 만일 너희 아버지가 마음을 바꾸어 에밀린 드류와 결혼한다고 해봐. 너희는 무척 후회할걸. 착하게 굴어서 로즈마리가 도망치게 만들지 말걸 하고. 너희 소문이 너무 나쁘게 난 탓에 너희 아버지가 좋은 사람과 결혼할 수 없다니 그건 너무하잖아. 물론 나는 너희에 관한 소문들 중 절반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한번 나쁜 평판을 얻으면 그걸로 끝장이야. 지난번 스팀슨 부인네 창문으로 돌을 집어던진 것도 제리와 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고. 사실은 보이드 씨네 남자아이들 둘이 한 짓인데. 하지만 카 할머니 마차에 뱀장어를 넣은 것은 칼 짓이 분명해. 그건 정말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지. 처음에는 나도 알렉 데이비스 부인이 한 말 말고 더 분명한 증거를 내놓기 전에는 그 말을 믿지 않겠다고 했어. 엘리엇 아주머니에게도 그렇게 말했다고.”
“칼이 무슨 짓을 했는데?”
페이스가 외쳤다.
“사람들이 그러는데, 난 그냥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말하는 것뿐이니까 나를 원망해도 소용없어. 지난주 어느 날 저녁에 칼이랑 남자아이들 여럿이서 저기 다리 위에서 뱀장어를 낚고 있었는데 카 부인이 지붕도 없는 낡은 마차를 타고 그 다리를 지나갔대. 그런데 칼이 카 할머니 마차 안으로 뱀장어를 던져 넣었다는 거야. 그런데 카 할머니가 ‘잉글사이드’를 지나 언덕을 올라가는데 그 뱀장어가 슬금슬금 할머니 발밑으로 기어 나왔다지 뭐니. 카 할머니는 그것이 뱀인지 알고 비명을 지르며 마차에서 뛰어내렸대. 말은 놀라서 달아나 버렸지만 그래도 집으로 돌아와서 별 피해는 없었다더라. 하지만 카 부인은 발목을 심하게 삐었고 그 뒤부터는 뱀장어 생각만 해도 신경이 곤두선대. 모두들 가엾은 카 할머니에게 그런 짓을 한 것은 돼먹지 못한 짓이라고 말하고 있어. 카 할머니가 생긴 것과는 다르게 착한 사람이거든.”
페이스와 우나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이것은 ‘선행 클럽’에서 다뤄야 할 문제였다. 메리가 왈가불가할 일은 아니었다.
“저기 너희 아빠가 오신다. 메러디스 목사님은 우리가 여기 있는 것도 모르고 지나쳐버렸어. 나도 이제는 그런 일에 이골이 났으니 별로 마음 쓰지는 않지만 그런 일에 마음 쓰는 사람들도 있다고.”
메리가 말했다.
메러디스 씨는 아이들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평상시대로 몽상에 젖어 있어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초조하고 괴로운 마음으로 언덕을 올라갔다. 방금 알렉 데이비스 부인에게 카 부인과 뱀장어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알렉 데이비스 부인은 몹시 화를 냈다. 카 부인은 그 부인과 팔촌지간이었다. 메러디스 씨는 단순히 화가 난 것이 아니었고 상처를 입고 충격에 빠져 있었다. 그는 칼이 이런 짓을 하리라고는 생각해보지도 못했다. 그는 단순히 아이들이 부주의해서 아니면 깜빡 잊고 실수한 것이라면 나무랄 생각이 없었지만 이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못된 짓이었다. 집에 도착해보니 칼은 잔디밭에 앉아 인내심을 갖고 말벌 집단의 습관과 행동을 연구하고 있었다. 메러디스 씨는 칼을 서재로 불러 아이들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엄한 얼굴로 그 말이 모두 사실인지 물었다.
“그랬어요, 아빠.”
칼은 얼굴을 붉혔으나 용감하게 아버지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이야기해봐라.”
메러디스 씨는 신음했다. 적어도 그 소문이 과장된 것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칼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남자아이들이 다리에서 뱀장어를 낚고 있었어요. 링크 드류가 굉장히 큰 놈을 잡았어요. 전 그렇게 큰 뱀장어는 본 적이 없어요. 그것도 낚시질을 시작하자마자 잡았어요. 그래서 링크의 낚시 바구니에 한참이나 담아놓았죠. 움직이지도 않더라고요. 그래서 전 그놈이 죽은 줄 알았어요. 정말로 죽은 줄 알았어요. 그런데 카 할머니가 마차를 몰고 다리를 지나가면서 우리에게 해충이라고 하면서 얼른 집으로 가라고 했어요. 그래도 우리는 그 할머니에게 대꾸 한 마디 안 했어요. 그런데 그 할머니가 가게에 들렀다 집으로 돌아가느라 다시 오자 아이들이 링크의 뱀장어를 마차로 던져 넣으라고 했어요. 전 죽은 놈이니까 할머니에게 해가 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던져 넣었죠. 그런데 마차가 언덕을 올라갈 때 뱀장어가 살아나 버린 거예요. 우리는 카 할머니가 비명을 지르며 마차에서 뛰어나오는 것을 봤어요. 전 정말 할머니에게 미안했어요. 그게 다예요, 아빠.”
칼의 설명을 듣고 보니 메러디스 씨가 처음 생각했던 것만큼 심각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나쁜 일인 것만큼은 틀림없었다. 메러디스 씨는 슬픈 듯 말했다.
“너에게 벌을 줘야겠다, 칼.”
“네, 알고 있어요, 아빠.”
“회초리로 때려줄 거다.”
칼은 몸을 움찔했다. 이제까지 한 번도 회초리를 맞아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아빠가 너무나도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는 일부러 쾌활하게 말했다.
“네, 맞을게요, 아빠.”
메러디스 씨는 칼이 밝은 표정을 짓자 칼이 자기 잘못을 모르는 것으로 오해했다. 메러디스 씨는 저녁을 먹고 난 후에 서재로 오라고 했고, 칼이 밖으로 나가자 의자에 몸을 던지며 다시 신음했다.
메러디스 씨는 저녁이 다가오는 것이 두려웠다. 칼이 두려운 것보다 일곱 배는 더 두려웠다. 그 가여운 목사는 아들을 무엇으로 때려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회초리질은 무엇으로 하는 것인가? 막대기? 지팡이? 아니, 그것은 너무 잔인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낭창낭창한 나뭇가지? 그것을 구하려면 존 메러디스 목사가 몸소 숲으로 가서 하나 꺾어 와야 했다. 그것은 생각만 해도 참으로 혐오스러웠다. 그때 그의 머리에 어떤 그림이 떠올랐다. 쭈글쭈글한 호두 같은 얼굴의 카 부인이 되살아난 뱀장어를 보고 놀라 이륜마차를 날 듯 튀어나오는 장면이 눈앞에 떠올랐다.
목사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와 버렸다. 웃음을 터트리고 나서는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고 칼에게는 더더욱 화가 났다. 당장 가서 회초리를 구해오리라. 이것은 대충 넘어가서는 안 될 일이었다. 칼은 방금 집으로 돌아온 페이스와 우나와 묘지로 가서 이 문제를 의논했다. 칼이 아빠에게 회초리를 맞을 거라는 말을 듣고 페이스와 우나는 무서움에 떨었다. 아빠가 자기들을 때린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너 심한 짓을 했나 보구나, 칼. 그리고 그런 일이 있었으면 ‘선행 클럽’에 보고를 했어야지.”
페이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잊어버렸어. 그리고 난 내가 누구에게 해를 끼쳤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고. 난 그 할머니 발이 삔 것도 몰랐어. 하지만 회초리를 맞을 테니까 그것으로 대가를 치르는 셈이야.”
칼이 말했다.
“아플까, 몹시 아플까?”
우나가 칼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대단하지 않을 거야. 어쨌든 아무리 아파도 난 울지 않을 거야. 내가 울면 아빠 기분이 안 좋으시잖아. 지금 아빠는 몹시 속이 상해 있어. 차라리 내가 아빠 대신 내 손으로 나를 아프게 매질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칼이 용감하게 말했다.
칼은 저녁도 아주 조금밖에 먹지 못했다. 메러디스 씨는 전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식사가 끝나자 두 사람은 말없이 서재로 갔다. 탁자 위에는 작은 회초리가 놓여 있었다. 메러디스 씨는 알맞은 나뭇가지 회초리를 구하느라 무척 애를 먹었다. 처음에 꺾은 가지는 너무 가늘었다. 칼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짓을 했다. 그다음 가지는 너무 굵었다. 그래도 칼은 뱀장어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세 번째 가지가 적당할 것 같았다. 탁자 위에 놓인 회초리를 집어 들었을 때 그것이 너무 두껍고 무겁게 느껴져 회초리라기보다는 막대기 같았다.
“손을 내밀어.”
메러디스 씨는 칼에게 명령했다.
칼은 머리를 뒤로 젖히며 용감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칼은 아직 어린아이고, 겁에 질린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메러디스 씨는 그 눈을 보았다. 아, 그것은 아내 세실리아의 눈이었다. 세실리아도 언젠가 그에게 말하기 어려운 일이 있었을 때 꼭 이런 표정을 지었다. 목사는 칼의 작고 하얀 얼굴에서 아내의 눈을 보았다. 6주 전, 그날이 밝지 않을 것 같던 밤에는 이 어린아이가 죽어간다고 생각했다.
존 메러디스 씨는 회초리를 내려놓았다.
“나가거라. 나는 널 도저히 때릴 수가 없다.”
칼은 아버지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을 보고 차라리 맞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며 묘지로 달려갔다.
“벌써 끝났니?”

페이스가 물었다. 페이스와 우나는 폴록의 묘석 위에 앉아 손을 마주 잡은 채 이를 악물고 있었다.
“아빠는 날 때리지 않았어. 전혀. 차라리 날 때렸으면 좋겠어. 아빠는 몹시 속이 상해서 서재에 앉아 계셔.”
칼이 흐느껴 울며 말했다.
우나는 살짝 묘지에서 나왔다. 우나의 마음은 아빠를 위로해주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생쥐처럼 소리도 없이 살짝 서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저녁 어둠이 내린 방은 어둑했다. 머리를 감싸 안고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아빠의 등이 보였다. 메러디스 씨는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그 말소리가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면서 들려왔다. 하지만 우나는 다 들었다. 다 이해했다. 엄마 없는 아이들이 그렇듯 눈치가 빠른 우나는 들어올 때처럼 나갈 때도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존 메러디스는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자기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혼자 토로하고 있었다.





34
우나가 언덕 위의 집을 방문하다






나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칼과 페이스는 방금 떠오른 달빛을 받으며 벌써 ‘무지개 골짜기’로 가고 있었다. 제리가 부는 구금 소리가 마치 요정의 음악 소리처럼 들려왔다. 블라이드 아이들도 벌써 와서 즐겁게 놀고 있을 것이다. 우나는 골짜기에 나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우선 자기 방에 혼자 앉아 좀 울고 싶었다. 우나는 그 누구라도 자기 엄마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싫었다. 자기를 미워하고 아빠가 자기와 언니 오빠를 미워하게 만드는 계모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러나 지금 아빠는 몹시 불행했다. 아빠를 조금이라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우나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뿐이었다. 아까 서재에서 나오며 자기가 그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우나는 실컷 운 다음 눈물을 닦고 손님방으로 갔다. 방은 어두웠고 곰팡내도 났다. 오랫동안 블라인드를 올리거나 창문을 열어두지 않은 탓이었다. 마사 이모할머니가 신선한 공기를 싫어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고, 그저 목사관에는 창문을 닫아두거나 열어두거나 신경 쓰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무슨 불편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다른 목사님이 방문해서 손님방에 머물 때 좋거나 싫거나 간에 밤새 나쁜 공기를 마셔야 한다는 것뿐.
손님방에는 옷장이 하나 있었고, 그 옷장 맨 뒤에는 색 바랜 실크 드레스가 걸려 있었다. 우나는 그 옷장으로 다가가 그 부드러운 실크 드레스에 볼을 댔다. 그것은 엄마의 웨딩드레스였다. 옷에서는 엄마의 사랑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 달콤하고 은은한 향내가 났다. 우나는 그곳에 오면 엄마가 바로 옆에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엄마 발치에 꿇어앉아 엄마 무릎에 머리를 얹고 있는 것 같았다. 우나는 사는 일이 너무 힘겨울 때면 가끔씩 여기로 왔다.
“엄마, 난 엄마를 절대로 잊지 않을 거예요. 난 언제나 엄마를 가장 사랑할 거예요. 하지만 엄마, 난 이 일을 해야만 해요. 아빠가 저렇게 불행하니까요. 엄마도 아빠가 불행하기를 원하지는 않죠. 그리고 난 그분에게 친절하게 할 거예요. 그분도 메리 밴스가 말한 것처럼 나쁜 계모이긴 하겠지만 그래도 사랑하도록 노력할 거예요.”
우나는 잿빛 실크 드레스에게 속삭였다.
우나는 자기만의 신전에서 정신적 힘을 얻었다. 예쁘고 진지한 작은 얼굴에 아직 눈물 자국이 남았지만 그날 밤 우나는 평화롭게 잤다.
다음 날 오후 우나는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가장 좋은 모자를 썼다. 가장 좋은 것이라고는 해도 사실은 너무 초라한 옷이었다. 이번 여름엔 글렌의 모든 여자아이들이 새 옷을 입었지만 페이스와 우나만은 예외였다. 메리 밴스도 무척 예쁜 드레스를 입었다. 자수가 놓인 하늘하늘한 하얀 드레스에 진홍빛 실크로 만든 어깨끈을 두르고 나비 리본까지 달았다. 그러나 오늘 우나는 자기 옷차림이 초라한지 그렇지 않은지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저 단정하게 보이기만 바랐다. 얼굴도 다른 때보다 더 깨끗이 씻었고 검은 머리도 공단처럼 부드러워질 때까지 빗었다. 그나마 괜찮은 단 하나밖에 없는 양말에 난 구멍도 꿰매어 신고 구두끈을 꼭 묶었다. 구두에 구두약을 칠하고 싶었으나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목사관을 나와 ‘무지개 골짜기’를 지나고 소곤소곤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숲을 지나 언덕 위의 집으로 이어진 길로 나왔다. 꽤 먼 거리라서 도착했을 때는 지치고 더웠다.
우나는 로즈마리 웨스트가 정원 나무 밑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달리아 꽃밭을 지나 살그머니 다가갔다. 로즈마리는 무릎 위에 책을 펼쳐놓고는 있었지만 슬퍼 보이는 눈은 저 멀리 바다 쪽을 보고 있었다. 요즘 언덕 위의 집은 전처럼 즐겁지 못했다. 엘런은 언짢은 얼굴로 지내지는 않았지만, 화가 나 있었다. 감정이란 것은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법이고, 가끔씩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침묵은 견딜 수 없이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전에는 삶을 활기 있게 해주었던 많은 익숙한 것들이 지금은 괴롭게만 느껴졌다.
노먼 더글러스는 주기적으로 찾아와 엘런을 달래기도, 위협하기도 했다. 로즈마리는 더글러스가 언젠가는 엘런을 질질 끌어내어 데려가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만 해준다면 기쁠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참을 수 없이 외롭겠지만 더 이상 폭탄을 품고 사는 것처럼 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누군가 살그머니 로즈마리의 어깨를 건드려 불쾌한 공상에서 깨어났다. 돌아보니 우나 메러디스였다.
“어머나, 우나, 여기까지 오다니 무슨 일이니?”
“전, 전…….”
우나가 말했다.
우나는 자기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목소리는 잠겨버렸고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우나, 왜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말을 해봐.”
로즈마리는 여위고 작은 우나의 몸에 팔을 두르고 가까이 끌어당겼다. 로즈마리의 눈이 무척 아름다웠고, 손길은 너무나 부드러워 우나는 말할 용기를 되찾았다.
“전 미스 웨스트에게 부탁이 있어 왔어요. 우리 아빠와 결혼해주세요.”
우나가 얼른 말했다.
로즈마리는 너무나 놀라 순간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우나를 바라보았다.
“제발 화내지 말아주세요, 미스 웨스트. 사람들이 우리가 너무 나쁜 아이들이라서 미스 웨스트가 우리 아빠와 결혼하지 않는 거라고 해요. 하지만 우리 아빠는 지금 매우 불행해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온 거예요. 우리는 절대로 일부러 나쁜 게 아니에요. 우리 아빠와 결혼만 해준다면 좋은 아이들이 되도록 노력할 거예요. 우린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을 거라고요. 제발 부탁이에요, 미스 웨스트.”
우나가 간청했다.
로즈마리는 재빨리 이 상황을 머릿속으로 가늠해보았다. 뭔가 잘못된 소문이 우나의 귀에 들어간 것 같았다. 이 아이를 솔직하고 진지하게 대해주어야 했다.
“우나, 내가 우나 아빠와 결혼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아니야. 난 그런 건 생각해보지도 않았어. 너희들은 나쁘지 않아. 난 절대로 그런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단다. 그게 아니고, 다른 이유가 있어, 우나야.”
로즈마리가 부드럽게 말했다.

“우리 아빠를 좋아하지 않으세요? 미스 웨스트, 우리 아빠는 멋지고 훌륭한 분이에요. 틀림없이 좋은 남편이 될 거예요.”
우나가 책망하듯 눈을 올려 뜨며 말했다.
로즈마리는 당황스럽고 난처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웃지 마세요, 미스 웨스트. 아버지는 이 일로 너무너무 괴로워하고 있어요.”
우나는 정신없이 외쳤다.
“네가 뭘 잘못 알고 있는 것 같구나.”
로즈마리가 말했다.
“아니에요, 그럴 리 없어요. 오, 미스 웨스트. 아빠가 어제 회초리로 칼을 때리려고 했어요. 칼이 못된 짓을 했거든요. 하지만 아빠는 칼을 때리지 못했어요. 아빠는 우리를 한 번도 때려본 적이 없어요. 칼이 나와서는 아빠 기분이 무척 좋지 않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아빠를 위로해드리려고 서재로 갔죠. 아빠는 언제나 제가 위로해드리면 아주 기뻐하셨거든요. 그런데 아빠는 제가 서재로 들어온 걸 몰랐어요. 전 아빠가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를 다 들었어요. 제가 귓속말로 속삭이게 해준다면 아빠가 뭐라고 했는지 알려드릴게요.”
우나가 정직하게 속삭여주었다. 그 속삭임을 듣고 로즈마리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아직 존 메러디스는 나를 좋아하고 있다. 그 사람 마음은 변하지 않았어. 그 사람이 정말로 그런 말을 했다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도 더 깊이 나를 사랑하고 있는 거야.’ 로즈마리는 얼마 동안 말없이 앉아서 우나의 머리만 쓰다듬어주었다. 이윽고 로즈마리가 입을 떼었다.

“아빠에게 내 편지를 갖다드리겠니, 우나?”
“그럼 우리 아빠와 결혼해주시는 거죠, 미스 웨스트?”
우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물었다.
“아마도. 아빠가 정말로 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하신다면.”
로즈마리는 또다시 뺨을 붉히며 말했다.
“기뻐요. 너무 기뻐요. 그런데 제발, 미스 웨스트, 우리 아빠가 우리를 미워하게 하지는 말아주세요. 아빠가 우리를 나쁜 아이라고 여기게 하지 말아주세요.”
우나는 용기를 내어 로즈마리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말하는 우나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로즈마리가 다시 놀란 듯 바라보았다.
“우나 메러디스! 너는 내가 그런 일을 하리라고 생각하니?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지?”
“메리 밴스가 계모는 다 그렇다고 했어요. 계모들은 다 의붓자식을 미워하고, 남편이 자기 자식을 미워하게 만든대요. 자기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고 만대요. 계모가 되면 그렇게 변하는 거래요.”
“세상에나, 가엾은 우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더러 아빠랑 결혼해달라고 부탁하러 여기까지 왔구나. 착하기도 하지. 정말 용감하기도 하고. 엘런 언니가 네 말을 들었으면 ‘넌 참 괜찮은 애구나!’ 하고 말했을 거야. 자, 우나야, 내 말을 들어보렴. 내 말을 잘 들어봐. 메리 밴스는 뭘 잘 모르는 바보 같은 아이야. 그리고 어떤 일에 관해서는 상당히 잘못 알고 있지. 난 네 아빠가 너희들을 미워하게 할 생각 같은 것은 조금도 없어. 난 너희를 진심으로 사랑할 거야. 난 네 엄마 자리를 대신할 생각 같은 것도 하지 않을 거라고. 네 가슴에는 언제나 엄마가 자리하고 있겠지. 하지만 난 너희 계모가 될 생각도 없어. 난 너희 친구가 되어줄 거고, 너희들을 도와줄 거고, 같이 놀아줄 거야. 그럼 정말 좋을 것 같지 않니, 우나? 만일 너와 페이스 그리고 칼과 제리가 나를 좋은 친구로 생각해준다면 말이야, 아니 제일 큰 언니로는 생각해줄 수 있지 않겠니?”
“어머나, 그럼 너무 좋을 거예요.”
우나는 죽었다 살아난 표정으로 외쳤다. 우나는 자기도 모르게 로즈마리의 목을 끌어안았다. 너무 기뻐서 날개가 돋아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다른 아이들도, 그러니까 페이스와 오빠도 너처럼 생각하고 있니?”
“아니에요. 페이스 언니는 메리 밴스의 말을 믿은 적이 없어요. 메리의 말을 정말이라고 믿다니, 제가 너무 바보였어요. 페이스 언니는 가엾은 애덤이 잡혀 먹혔을 때부터 미스 웨스트를 좋아했어요. 오, 미스 웨스트, 우리랑 같이 살게 되면 우리에게 요리하는 법이랑 바느질하는 법, 그리고 다른 것도 가르쳐주실 건가요? 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전 귀찮게도 하지 않고 잘 배우도록 노력할게요.”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뭐든지 다 가르쳐주고말고. 그런데 이 일은 아직 아무에게도 이야기하면 안 돼. 페이스에게도. 아빠가 직접 그렇게 해도 된다고 말할 때까지는. 자, 조금 더 나랑 같이 머물면서 함께 차를 마실까?”
“감사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제 생각엔 제가 얼른 돌아가서 아빠한테 편지를 조금이라도 빨리 전해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빠르면 빠를수록 아빠가 기뻐할 거 잖아요.”
우나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로즈마리는 집 안으로 들어가 편지를 써서 우나에게 건네주었다. 편지를 꼭 움켜쥔 조그만 아가씨는 행복한 마음으로 가슴을 두근거리며 언덕길을 달려 내려갔다. 우나가 간 다음 로즈마리는 뒤 베란다에서 콩을 까고 있는 엘런에게로 갔다.
“엘런 언니, 아까 우나가 자기 아빠와 결혼해달라고 왔었어요.”
엘런은 얼굴을 들고 로즈마리의 얼굴을 보았다.
“그래서 넌 결혼할 생각이니?”
“그럴 것 같아요.”
엘런은 여전히 한동안 잠자코 콩을 까고 있더니 별안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짙은 눈썹 사이로 눈물이 새어 나왔다.
“나도, 나도 우리가 다 행복했으면 좋겠다.”
엘런은 울다가 웃으며 말했다.
저 아래 목사관에서는 장밋빛 볼을 한 우나 메러디스가 아빠의 서재로 힘차게 걸어 들어가 아빠의 책상에 편지를 놓았다. 메러디스 목사는 낯익은 보기 좋은 글씨체를 보자 창백했던 얼굴이 붉어졌다. 그가 봉투를 열었다. 무척 짧은 편지였다. 하지만 그는 편지를 읽으며 20년은 흐른 듯 느꼈다. 로즈마리는 오늘 저녁에 ‘무지개 골짜기’ 샘가에서 만나자고 했다.


35

피리 부는 사나이여, 오라!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이달 중순경에 두 쌍이 결혼식을 올릴 모양이더군요.”
9월이면 저녁에는 벌써 으스스하게 한기가 느껴졌다. 앤은 커다란 거실에 언제나 준비해두고 있는 표류목으로 난롯불을 지폈고, 미스 코넬리아와 함께 기묘한 모양을 만들며 날름거리는 불꽃을 즐겼다.
“정말 기쁜 일이에요. 특히 메러디스 씨와 로즈마리를 생각하면요. 꼭 내가 결혼하는 것처럼 행복해요. 엊저녁에 언덕 위의 집으로 가서 로즈마리의 혼수품들을 구경했는데 꼭 내가 다시 신부가 된 기분이었어요.”
앤이 말했다.
“사람들 말로는 공주 혼수품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훌륭하더군요. 나도 보러 오라는 초대를 받았으니 언제 틈을 내서 가볼 생각이에요. 로즈마리는 새하얀 실크 웨딩드레스를 입고 베일을 쓸 생각이지만 엘런은 군청색 드레스를 입을 거라고 들었어요. 엘런이 그런 결정을 내린 건 지각 있는 생각이지만, 나라면 하얀 드레스와 베일을 택하겠어요. 그래야 더 신부 같죠. 난 언제나 결혼한다면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베일을 쓰겠다고 생각했어요.”
수잔이 ‘구릿빛 왕자님’을 품에 안고 어두운 구석에 앉아 말했다.
수잔이 하얀 드레스를 입고 베일을 쓴 모습이 떠올라 앤은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메러디스 씨는 말이에요, 약혼하면서부터 벌써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아요. 이젠 그전처럼 몽상에 잠겨 있지도, 넋이 나가 있지도 않아요. 그나저나 두 사람이 신혼여행을 간 동안 목사관 문을 닫고 아이들도 다 다른 데로 보내기로 했다니 너무 잘됐어요. 한 달 동안이나 마사 이모할머니에게만 목사관이랑 아이들을 맡겨두었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잖아요. 난 밤사이 목사관이 홀랑 불에 타버리지나 않았을까 불안해하면서 매일 아침 눈을 뜰 거라고요.”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마사 할머니와 제리는 우리 집에 와서 지내기로 했어요. 칼은 클로 장로님이 맡기로 했구요. 페이스와 우나는 어디로 가게 됐는지 아직 모르겠네요.”
앤이 말했다.
“그 아이들은 내가 맡기로 했어요. 물론 나도 기꺼이 그러고 싶었지만, 메리가 그렇게 하자고 어찌나 성화를 해대던지. 신랑 신부가 돌아오기 전에 부인회에서 목사관을 청소하기로 했고요. 노먼 더글러스가 그 집 지하실에 채소도 좀 넣어주기로 했어요. 요즘 그 사람은 평생을 기다린 후 엘런과 결혼하게 되었다고 얼마나 신이 나서 다니는지 말도 못 해요. 만일 내가 엘런이라면, 하지만 나는 엘런이 아니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엘런만 상관없다면 뭐 왈가불가할 일은 아니죠. 엘런은 아주 옛날 학교 다니던 때부터도 남편감으로 순한 남자는 싫다고 했어요. 노먼이야 순한 거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니까요.”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해는 ‘무지개 골짜기’ 너머로 지고 있었다. 연못은 자줏빛, 황금빛, 초록빛, 진홍빛으로 짠 아름다운 옷을 입었고 동쪽 언덕 위로는 푸른 안개가 옅게 끼었으며 그 위로는 동그랗고 커다란 달이 은빛 거품처럼 떠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골짜기의 작은 빈터에 모여 있었다. 페이스와 우나, 제리와 칼, 젬과 월터, 낸과 다이, 그리고 메리 밴스였다. 특별한 파티를 하는 중이었다. 젬의 작별파티였다. 젬은 이제 ‘무지개 골짜기’에 나올 수 없었다. 아침이 되면 퀸스 학교에 입학하려고 샬럿타운으로 떠나기로 되어 있어 아이들의 즐거운 놀이집단은 깨지게 되었다. 그 때문에 파티는 떠들썩해도 아이들의 마음 한구석은 어딘지 모르게 서운하기만 했다.
“저것 좀 봐. 저 석양이 물든 곳에 커다란 황금 궁전이 솟아 있어. 저 빛나는 탑 좀 봐. 탑에 펄럭이는 새빨간 깃발도. 전쟁터에서 승리를 거둔 영웅이 말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인가 봐. 그 영웅을 맞이하려고 깃발을 걸어둔 걸 거라고.”
월터가 말했다.
“그런 옛날이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어. 난 군인이 되고 싶어. 아주 위대한 승리를 거두는 장군 말이야. 큰 전투에 나갈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겠어.”
젬이 외쳤다.
그렇다. 젬은 자기 소원대로 군인이 되어 이제까지 이땅에서 벌어졌던 어떤 전투보다도 더 큰 전투에 나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더 먼 훗날의 얘기다. 그리고 젬은 맏아들이다. 젬의 어머니는 새삼스레 아들을 바라보며 젬이 동경하는 ‘용사의 시대’는 영원히 지나버린 것을 감사했다. 캐나다의 아들들이 ‘조상의 유해와, 신들의 신전을 지키려고’ 전장에 나가야 할 날은 이제 없을 것이다.
대전(大戰)의 그림자는 아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프랑스며 플랑드르, 갈리폴리며 팔레스타인의 전쟁터로 나가게 될, 그리고 쓰러지게 될지도 모를 젊은이들은 아직 풋내 나는 학생들이고 장래가 촉망되는 소년들이었다.
여자아이들은 앞으로 슬픔에 가슴이 무너져 내릴 운명일지라도 아직은 희망과 꿈으로 눈을 빛내는 아름다운 소녀들이었다. 저녁 해를 받으며 펄럭이는 깃발에서 점점 진홍빛과 황금빛이 희미해졌다. 정복자 행렬도 점점 흐려져 갔다. 골짜기에는 저녁 어둠이 내렸고 아이들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 월터는 그날도 좋아하는 옛 전설 이야기를 읽고 있었다. 그리고 꼭 이런 저녁 무렵에 피리 부는 사나이가 골짜기를 향해 다가오는 상상을 했던 것도 떠올려보았다.
월터는 꿈에 젖은 듯 몽롱하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친구들을 좀 으스스하게 해주고도 싶었지만, 자기가 아닌 다른 무엇인가가 자기 입을 빌려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피리 부는 사나이가 가까이 오고 있어. 지난번 저녁에 내가 봤을 때보다 더 가까이 왔어. 그의 검은 긴 망토자락이 펄럭이고, 그 사람이 부는 피리 소리가 들려. 그 사람이 피리를 불어. 우리는 그를 따라가야 해. 젬 형, 칼, 제리, 그리고 나는 세상을 돌아다닐 거야. 들어봐, 저 피리 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월터가 말했다.

여자아이들은 몸을 떨었다.
“넌 연극을 너무 잘해. 제발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어. 넌 너무 진짜처럼 말을 한다고. 월터의 피리 부는 사나이는 정말 싫어.”
메리 밴스가 항의했다.
그러나 젬은 밝게 웃으며 벌떡 일어섰다. 조그만 언덕에 우뚝 선 젬은 키가 크고 당당했다. 이마는 넓고 눈빛에도 두려움이라고는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단풍의 나라 캐나다에는 젬 같은 청년이 수도 없이 많았다.
“피리 부는 사나이여, 오라! 오라고! 난 기꺼이 그를 따라 세상 여행에 나서겠어.”
젬이 손을 흔들며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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