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8권 1~2

나단비 | 2024.04.16 20:23:48 댓글: 0 조회: 81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6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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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렌 소식과 이런저런 이야기






하늘에는 황금빛 구름이 깔린 온화하고 평화로운 오후였다. 널찍한 ‘잉글사이드’ 거실에 앉아 있는 수잔 베이커의 근엄한 얼굴은 더없이 만족스러워 보였다. 지금은 4시고, 그날 아침 6시부터 쉬지 않고 일했으니 이제 한 시간 정도 쉬면서 수다를 떨어도 좋을 만큼 충분히 일했다는 만족감이었다. 지금 수잔은 참으로 행복했다. 그날은 부엌일도 하나 꼬이는 일 없이 순조로웠고, 지킬 박사가 하이드 씨로 돌변하는 일도 없어서 신경을 거슬리는 일도 없었다. 수잔이 지금 앉아 있는 자리에서는 가슴속 깊이 뿌듯함을 느끼게 하는 자신의 자랑거리도 잘 보였다. 자기 손으로 심고 가꾼 작약꽃밭이었다. 활짝 꽃을 피운 붉은 작약, 은빛이 도는 분홍 작약, 겨울날에 흩날리는 눈처럼 하얀 작약, 글렌 세인트 메리 어느 집 꽃밭에서도 이렇게 탐스럽게 핀 작약꽃은 볼 수 없었다.
수잔은 지금 마셜 엘리엇 부인도 평생 입어본 적 없는 고급스러운 검은색 실크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거기다 입고 있는 풀을 빳빳하게 먹인 흰색 앞치마 가장자리에는 폭이 12센티미터나 되는 코바늘뜨기로 짠 레이스를 빙 둘러 달았다. 물론 이 근방에서 이보다 더 멋진 레이스를 단 앞치마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므로 수잔은 훌륭한 옷차림에 어울리게 우아하게 앉아 <데일리 엔터프라이즈> 신문을 펼쳐 들고 ‘글렌 소식’을 읽을 채비를 마쳤다. 미스 코넬리아의 말에 따르면 기사의 한 절반은 ‘잉글사이드’ 식구들 이야기가 차지하고 있다고 했다.

맨 먼저 <엔터프라이즈> 1면에 커다란 검은 글씨로 된 표제가 눈에 띄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인지 뭔지 하는 사람이 사라예보인지 뭔지 하는 이상한 이름을 가진 곳에서 암살당했다는 기사였다. 하지만 수잔은 그런 재미없고 시시한 기사에는 관심이 없었다. 정말 중요한 기사를 찾고 있었다.

‘오, 여기 있었구나. 글렌 세인트 메리 소식이라!’

수잔은 그 기사에 더할 나위 없이 만족감을 느끼는 듯 열심히 소리 내어 한 자 한 자 읽어나갔다.

블라이드 부인과 손님인 미스 코넬리아, 다시 말해 마셜 엘리엇 부인은 베란다로 통하는 현관문 옆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열린 문을 통해 시원하고 상쾌한 산들바람이 불어와 정원에서 나는 향기로운 꽃 냄새를 실어다주었다. 담쟁이덩굴이 늘어진 뜰 한구석에서는 릴라와 미스 올리버, 그리고 월터가 즐거운 듯 웃으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릴라 블라이드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웃음소리가 났다.

거실에는 또 한 생명체가 소파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냥 보아 넘길 수 없게 성질이 유별나서 수잔이 이 세상에서 정말로 싫어하는 오직 하나의 피조물이었다.

고양이는 다 좀 신비스러운 구석이 있긴 하지만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를 줄여서 박사라고 부르는 이 고양이는 정말이지 속을 알 수 없는 놈이었다. 그야말로 이중성격이었고, 그게 아니라면 수잔의 말마따나 악마에 씐 녀석이었다. 아무튼 이 고양이에게는 처음부터 뭔가 섬뜩하고 기분 나쁜 기운이 서려 있었다. 4년 전 릴라 블라이드는 몸이 눈처럼 하얗고 꼬리 끝이 멋지게 검은색으로 둘러진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무척 귀여워했다. 릴라는 이 고양이를 ‘잭 프로스트’라고 불렀다. 수잔은 별 이유도 없이 잭 프로스트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제 두고 보세요, 사모님. 저 고양이가 문제를 일으키고 말 테니까요.”

수잔은 그렇게 불길한 말을 하고는 했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수잔?”

블라이드 부인은 물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난 알아요.”

수잔은 단언했다.

다른 ‘잉글사이드’ 사람들은 잭 프로스트를 몹시 좋아했다. 이 고양이는 무척이나 깔끔하고 몸단장도 잘해서 그 아름다운 흰 털옷에 얼룩 하나 묻혀오는 법이 없었다. 가르랑거리는 소리도 너무나 사랑스러웠고 붙임성 좋게 사람에게 다가와 안기기도 잘했다.

그런데 ‘잉글사이드’에 비극이 일어났다. 잭 프로스트가 새끼 고양이를 낳은 것이다!

그 일로 수잔이 내가 저 고양이가 요물 짓을 할 거라고, 모두를 곤란한 지경에 빠뜨릴 거라고 누누이 얘기하지 않았느냐며 얼마나 기세등등하니 떠들어댔는지 모른다. 이제는 저 고양이가 얼마나 요물인지 눈으로 직접 확인했느냐며 난리가 아니었다.

릴라는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자기 고양이로 삼았다. 아주 예쁘게 생긴 녀석으로 진한 노란색 윤기가 도는 털에 오렌지 색깔 줄무늬가 있었다. 귀가 무척이나 크고 공단처럼 부드러운 금빛이었다. 릴라는 이 새끼 고양이에게 ‘골디’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그 이름은 재롱둥이 고양이에게 꼭 어울렸다. 골디는 새끼 고양이였을 때는 나쁜 성질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다. 물론 수잔은 악마 같은 잭 프로스트의 자손에게 기대 따위를 품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카산드라의 예언1)같은 수잔의 음산한 경고에 주의를 기울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블라이드 사람들은 잭 프로스트를 아주 자연스럽게 자기네 남자 가족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이 고양이를 지칭할 때 사람에게 말하듯 아무렇지도 않게 남성 대명사를 썼는데 이게 또 수잔에게는 참으로 눈뜨고는 못 볼 광경이었다. 릴라가 아무 생각 없이 ‘잭과 그의 아기’라고 말하거나 또는 골디를 향해 엄하게 “네 엄마한테 가서 털을 씻어달라고 해!”라고 명령하는 소리를 들으면 수잔뿐 아니라 이 집에 온 손님들도 기겁했다.

“이건 점잖은 일이 못 돼요, 사모님.”

수잔은 쓰디쓰게 말하고는 했다. 수잔은 언제나 잭을 ‘그것’이나 ‘그 흰 짐승’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것’이 다음 겨울에 사고로 독약을 먹고 죽었을 때도 혼자만 전혀 가슴 아파하지 않았다.

1년 정도 지나자 이 오렌지 색깔 새끼 고양이는 골디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을 만큼 몸집이 커져버려, 마침 그때 스티븐슨의 소설을 읽고 있던 월터가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라는 긴 이름으로 바꾸었다. ‘지킬 박사’ 같은 기분일 때의 이 고양이는 ‘쓰다듬어주고 안아주면 무척 좋아하고, 쿠션에서 뒹굴기도 좋아하는 애굣덩어리 고양이였다. 특히 뒤로 벌러덩 드러누워 그 크림빛 같은 윤기 나는 목을 쓰다듬어달라고 하길 좋아했다. 거기다 아주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듯 가르랑거리는 소리도 잘 냈다. ‘잉글사이드’ 고양이 중에서 이렇게 밤낮없이 그리고 기분 좋은 듯 가르랑거리기 잘하는 놈이 없었다.

“고양이한테 부러운 점 딱 한 가지는 이 가르랑거리는 소리야. 세상에 그 소리처럼 만족스럽게 들리는 소리가 없거든.”

전에 블라이드 의사는 박사의 쾌활한 멜로디에 귀를 기울이며 그런 말을 한 적도 있었다.

박사는 매우 잘생긴 고양이고 움직임이 무척이나 우아했으며 자세도 위엄이 있었다. 박사가 기다랗고 거무스름한 꼬리를 다리에 착 붙이고 베란다에 앉아 먼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볼라치면 이집트의 스핑크스보다 더 수호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블라이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 고양이가 하이드 씨 기분으로 변하는 날이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눈초리마저 달라져 꼭 미친 것 같았다. 그런 일은 반드시 비가 내리기 전이나 바람이 불기 전에 일어났고, 언제나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명상에 잠긴 듯 조용히 있던 놈이 광포한 외침 소리와 함께 거칠게 튀어 오르면서 으르렁댔다. 누가 진정시키려고 하거나 쓰다듬으면 사납게 물어뜯었다. 가르랑거리는 소리는 더 음침해지고 눈빛은 악마 같은 빛을 내뿜으며 반짝였다. 하지만 그 모습은 신비로우리만치 아름다웠다. 황혼녘에 그런 변화가 일어나면 ‘잉글사이드’ 사람들은 모두 그놈에게 공포감을 느꼈다. 아주 두려운 짐승이 되어버리므로 그 고양이를 감싸주는 사람은 릴라뿐이었다. 릴라는 “착한 고양이지만 방황하는 거예요.” 하고 말했다. 방황하는 것은 확실했다.

지킬 박사는 갓 짠 우유를 좋아했다. 하지만 하이드 씨는 우유는 입도 대지 않고 고기를 주어도 으르렁거리기만 했다. 지킬 박사는 층계를 내려올 때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소리 없이 내려왔다. 하지만 하이드 씨는 남자 어른처럼 우당탕거리며 내려왔다. 저녁때 수잔이 혼자 집에 있다가 이런 소리에 기절할 뻔했던 일도 여러 번 있었다. 하이드 씨는 부엌 바닥 한가운데 앉아 한 시간 동안이나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수잔을 노려보기도 했다. 수잔은 몹시 신경에 거슬렸지만 고양이가 너무 무서워 쫓아내 버리지도 못했다. 한번은 수잔이 감히 막대기를 집어던진 일이 있었다. 그러자 하이드 씨는 곧장 수잔을 향해 포악하게 덤벼들었다. 수잔은 얼른 문밖으로 달아나야 했고, 그 후로 다시는 하이드 씨와 맞서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이드 씨의 못된 행동에 대한 보복을 무고한 지킬 박사에게 다 해주었다.

박사가 수잔 옆에서 얼쩡거릴 때마다 인정사정없이 쫓아내 버렸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 해도 주지 않았다.
신문을 들고 있는 수잔은 입안에 달콤하고 맛있는 음식을 넣고 음미하듯 이름들을 읽어 내려갔다.

‘페이스 메러디스, 제럴드 메러디스, 그리고 제임스 블라이드는 몇 주 전에 레드먼드 대학에서 돌아왔고, 많은 친구들이 이들을 매우 기쁜 마음으로 환영했다. 제임스 블라이드는 1913년에 문과대학을 졸업했고, 올해 의과 대학교 1학년을 마쳤다.’

미스 코넬리아가 뜨개질을 하며 끼어들었다.

“페이스 메러디스가 몰라보게 예뻐졌더군요. 난 지금까지 그렇게 예쁜 아가씨는 본 적이 없어요. 로즈마리 웨스트가 목사관으로 들어간 후로 아이들이 완전히 달라져 버렸지요. 그 아이들이 얼마나 짓궂은 아이들이었는지도 다 잊어버렸어요. 앤, 그 아이들이 얼마나 말썽을 일으키며 다녔는지 생각나요? 로즈마리가 그 애들을 아주 딴 아이들로 만들어놓았어요. 로즈마리는 아이들에게 새엄마보다는 놀이 동무가 되어주었지요. 아이들도 모두 로즈마리를 좋아하고, 특히 우나는 제 새엄마를 숭배해요. 그 꼬마 브루스도 무척 귀여워요. 우나는 아주 그 아이 노예 노릇을 해요. 그런데 그 애처럼 이모를 많이 닮은 아이도 없을 거예요. 엘런처럼 피부도 가무잡잡하고 아주 씩씩하게 생겼잖아요. 로즈마리를 닮은 데라고는 한 군데도 찾아볼 수 없어요. 노먼 더글러스는 언제나 황새가 아기를 자기와 엘런에게 물어다준다는 게 그만 실수로 목사관으로 잘못 가져다준 거라고 떠들고 다녀요.”

“브루스는 젬을 숭배해요. 우리 집에만 오면 충성스러운 강아지처럼 젬을 졸졸 따라다녀요. 그 검은 눈으로 젬을 올려다보면서요. 아마 젬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을걸요.”

블라이드 부인이 말했다.

“젬이랑 페이스는 결혼하게 되나요?”

블라이드 부인은 미소를 지었다. 한때 미스 코넬리아는 남자를 경멸하기로 악명이 높았지만 나이를 먹어서는 남녀 간에 짝을 지어주는 일에 아주 재미를 붙이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아이들은 아직 좋은 친구일 뿐이에요, 미스 코넬리아.”

“아주 좋은 친구죠. 난 젊은 아이들 하는 일도 다 듣고 있어요.”

미스 코넬리아가 힘주어 말했다.

“메리 밴스가 죄다 보고를 하겠지요, 마셜 엘리엇 부인. 하지만 난 아직 아이들을 두고 결혼이니 어쩌니 하는 것은 적당한 일이 아니라고 봐요.”
수잔이 말했다.

“아이들이라고요! 젬은 스물한 살이고, 페이스는 열아홉 살이에요. 그걸 잊으면 안 돼요, 수잔. 우리 같은 늙은이만 어른이 아니라고요.”

미스 코넬리아가 되받아쳤다. 누가 자기 나이를 언급하면 몹시 싫어하는 수잔은 화가 나서 다시 ‘글렌 소식’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지만 그 이유는 수잔이 허영심이 있는 사람이어서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자기가 일을 계속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다고 생각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였다.

‘칼 메러디스와 셜리 블라이드는 지난주 금요일 밤에 퀸스 학교에서 돌아왔다. 칼은 내년부터 항구 어귀 학교에서 가르칠 것이라고 한다. 칼은 분명 아이들이 좋아하는 선생님이 될 것이다.’

“칼은 아이들에게 벌레를 가르치겠지요. 메러디스 씨와 로즈마리는 칼에게 이제 퀸스 학교도 졸업했으니 가을에 곧 바로 레드먼드 대학교에 입학하라고 했대요. 하지만 칼이 독립심 강한 아이라 얼마간은 자기 힘으로 대학 학비를 벌겠다고 고집을 피웠다고 하네요. 그편이 나을 거예요.”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수잔은 계속해서 신문을 읽었다.

‘지난 2년 동안 로브리지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던 월터 블라이드는 학교에 사직서를 냈다. 올가을 레드먼드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월터는 이제 레드먼드에 갈 수 있을 만큼 건강해졌나요?”

미스 코넬리아가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가을쯤이면 몸이 완전히 회복되기를 바라고 있어요. 여름에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햇볕을 충분히 쬐면서 쉬면 건강해질 거예요.”

블라이드 부인이 말했다.

“장티푸스는 회복하기 힘든 병이에요. 특히나 월터처럼 간신히 목숨을 건진 경우에는요. 내 생각에는 1년은 더 기다렸다가 대학에 가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월터가 아주 가고 싶어 하는 모양이에요. 다이와 낸도 대학에 가나요?”

미스 코넬리아가 물었다.

“네. 둘 다 1년만 더 가르치고 싶다고 했지만 애들 아버지가 올가을에는 꼭 레드먼드에 입학하라고 해서요.”

“잘됐네요. 월터가 열심히 공부만 하지 않도록 둘이 지켜봐 줄 테니까요.”

미스 코넬리아가 수잔을 흘낏거리며 말을 계속했다.

“방금 전에도 타박을 받았는데, 제리 메러디스가 낸에게 흑심을 품고 있다고 하면 또 한소리 듣겠죠?”

수잔은 그 말을 무시해버렸고, 블라이드 부인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미스 코넬리아, 나도 마음이 무척 부담스럽답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내 아들 딸들이 온통 내 주위에서 애틋한 눈길들을 주고받고 있으니 말예요. 하지만 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어요. 아직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다고 생각지는 않거든요. 저렇게 훌쩍 커버린 두 아들을 보면 저 아이들이 그 통통하고 귀엽던 아이들인가 싶긴 하지만요. 내가 입을 맞추어주고, 안아주고, 자장가를 불러주던 여기저기 보조개가 쏙쏙 들어간 아이들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다니까요. 미스 코넬리아,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젬은 그 옛날 ‘꿈의 집’의 귀염둥이 아기였잖아요? 그런데 이제 젬은 대학을 졸업했어요. 그리고 연애를 하고 있구요.”

“우리는 전부 나이를 먹어요.”

미스 코넬리아가 한숨을 쉬었다.

“나를 나이 들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유일한 것은 내 발목이에요. ‘초록 지붕 집’에 살던 시절에 베리 씨네 집 용마루를 걷다 떨어져 다친 발목이요. 조시 파이가 나를 부추겼죠. 동풍이 불 때마다 쿡쿡 쑤셔요. 류머티즘이라고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정말 아프답니다. 아이들은요, 우리 집 아이들과 메러디스 아이들은 가을에 학교로 돌아가기 전까지 여름을 즐겁게 놀 계획들을 세우고 있어요. 모두들 즐겁게 놀 궁리만 하네요. 그 덕분에 이 집이 조용할 날이 없어요.”

블라이드 부인이 말했다.

“셜리가 퀸스 학교로 돌아갈 때 릴라도 같이 가나요?”

“그 문제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어요. 난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길버트도 릴라가 집을 떠나 공부할 만큼 튼튼하다고 생각하지 않기도 하구요. 그런데 릴라가 키는 크죠? 아직 열다섯도 안 된 여자아이치고는 너무 키가 커요. 난 정말이지 릴라를 보내고 싶지 않아요. 올겨울에는 집에 아이들이 하나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 정말이지 너무 쓸쓸해요. 수잔이랑 나는 너무 무료해서 서로 붙들고 싸우기라도 해야 할 거예요.”

“사모님과 싸워요?”

수잔은 그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릴라는 가고 싶어 하나요?”

미스 코넬리아가 물었다.

“아니요. 사실 릴라는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야망이라고는 없는 아이예요. 난 릴라가 조금만 더 야망을 가져주었으면 하거든요. 그 아이에게는 심각한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어요. 그저 즐겁게 살자는 생각 하나뿐인 것 같아요.”

“릴라가 그럼 안 될 이유가 뭐예요, 사모님? 젊은이들은 즐겁게 살아야 해요. 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면서도 라틴어니 그리스어니 충분히 공부할 시간은 있다고요.”
‘잉글사이드’ 식구에 관해서라면 단 한 마디도 나쁜 말을 참지 못하는 수잔이 따지고 들었다. 자기 식구가 그런 말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릴라도 책임감을 좀 가져야 한다는 얘기예요, 수잔. 수잔도 알잖아요, 릴라가 좀 터무니없이 허영심이 많다는 거요, 안 그래요?”

수잔이 따지고 들었다.

“허영심을 가질 만하니까 그런 거예요. 릴라는 글렌 세인트 메리에서 제일로 예쁘잖아요. 항구 건넛마을의 매컬리스터 집안이나 크로퍼드 집안, 엘리엇 집안 사람들이 4대를 거쳐 딸을 낳아도 릴라의 피부 같은 피부를 가진 애를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림없지요. 나는 내 분수를 아는 사람이지만요, 사모님. 릴라를 깎아내리는 일은 허락할 수 없어요. 마셜 엘리엇 부인, 이 기사를 잘 들어보세요.”

수잔은 미스 코넬리아가 연애 문제로 아이들을 걸고넘어진 일에 반격할 기회를 찾았다. 수잔은 다시 힘차게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밀러 더글러스는 서부로 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정다운 프린스에드워드 섬에 만족하므로 고모인 알렉 데이비스 부인의 농장 일을 계속 할 것이라고 한다.’

수잔이 미스 코넬리아를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듣자하니, 마셜 엘리엇 부인, 밀러가 메리 밴스 뒤꽁무니를 쫓아다닌다면서요?”

이 공격으로 수비 방패가 뚫려버린 미스 코넬리아는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었다.

“밀러 더글러스 따위가 메리 주변에서 얼쩡거리도록 놔두지 않겠어요. 밀러는 천한 집안 출신이잖아요. 그 아이 아버지는 더글러스 집안에서 쫓겨난 사람이에요. 그 집안에서는 그 사람을 자기 집안사람이라고 쳐주지도 않는다고요. 그리고 어머니는 항구 어귀의 그 끔찍한 딜런 집안사람이에요.”

미스 코넬리아가 차갑게 말했다.

“내 생각엔 마셜 엘리엇 부인, 메리 밴스도 귀족 집안 출신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래도 메리 밴스는 교육을 잘 받고 컸어요. 게다가 영리한 아이고, 재치도 있고 능력도 있어요. 메리는 겨우 밀러 더글러스한테 자신을 내던질 아이가 아니라고요. 아, 정말이에요! 메리도 그 문제에 대한 내 생각을 잘 알고 있으니 내 뜻을 거스르진 않을 거예요.”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글쎄, 그런 걱정은 필요 없을 것 같네요, 마셜 엘리엇 부인. 알렉 데이비스 부인도 엘리엇 부인 못지않게 반대하고 있으니까요. 자기 조카를 메리 밴스 같은 하찮은 아이와 맺어지게 하지는 않겠다고요.”

수잔은 바로 이 말이 최대의 공격 효과를 냈으리라 생각하면서 그만 각설하고 계속해서 다른 ‘소식’을 읽었다.

‘미스 올리버가 한 해 더 학교에 머물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한다. 미스 올리버는 방학 동안 로브리지 집으로 돌아가 휴가를 보내고 돌아올 것이다.’

“거트루드 올리버 선생님이 남기로 했다니 아주 잘됐네요. 그만두었더라면 무척 그리웠을 거예요. 릴라는 올리버 선생님을 무척이나 숭배하거든요. 둘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만 꼭 친구 같아요.”

블라이드 부인이 말했다.

“올리버 선생님이 결혼한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런 말이 나오긴 했지만, 결혼식을 1년 미뤘다고 하던걸요.”

“상대는 누구죠?”

“로버트 그랜트예요. 샬럿타운의 젊은 변호사죠. 난 거트루드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힘든 일을 많이 겪으며 산 사람이잖아요. 그 때문에 모든 일을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여요. 철부지 젊은 시절은 가버렸고 올리버 선생님은 외톨이나 마찬가지라고요. 새로 사랑이 찾아왔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그런데 결혼을 연기할 수밖에 없다고 했을 때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거예요. 아마 이 결혼이 정말로 이루어질 거라고 믿지 못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건 그랜트 씨 잘못이 아니에요. 그랜트 씨 아버지가 작년에 세상을 떠나고 재산상속 문제로 좀 복잡한 일이 있다고 하거든요. 그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그랜트 씨는 결혼할 수 없대요. 하지만 거트루드는 그것을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이고 자기의 행복이 또다시 달아나 버릴 거라고 생각하나 봐요.”

“남자에게 너무 깊은 애정을 주는 건 좋지 않아요, 사모님.”

수잔이 근엄하게 한마디 했다.

“그랜트 씨도 미스 올리버를 깊이 사랑하고 있어요, 수잔. 미스 올리버가 믿지 못하는 것은 그랜트 씨가 아니에요, 운명이죠. 그 선생님은 좀 신비론자적인 기질을 갖고 있잖아요. 어떤 사람은 미신을 믿는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어요. 이상한 꿈을 믿으니까요. 그렇지만 그걸 비웃을 수도 없어요. 나도 그런 꿈을 꿀 때가 있거든요. 하지만 지금 내가 한 이단적인 말이 길버트 귀에 들어가선 안 돼요. 아니, 왜 그래요, 수잔? 뭐 재미있는 기사라도 발견했어요?”

수잔이 탄성을 질렀다.

“이것 좀 들어보세요, 사모님. ‘소피아 크로퍼드 부인은 로브리지의 집을 처분하고 앞으로는 조카딸 앨버트 크로퍼드 부인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이 기사는 제 사촌 소피아 얘기예요, 사모님. 우리는 어렸을 때 장미 꽃봉오리 화환 그림에 ‘주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쓰여 있는 주일 학교 카드를 누가 받느냐 하는 문제로 싸우고는 여태 서로 말을 안 하고 지냈어요. 그런데 바로 우리 앞집으로 이사를 온다고 하네요.”

“이젠 서로 화해를 해야겠군요, 수잔. 이웃끼리 서로 말을 안 하고 지내는 것은 말도 안 돼요.”

“소피아가 먼저 싸움을 시작했어요. 그러니 화해도 소피아가 먼저 청해야 한다고요, 사모님. 그렇게 한다면 나도 선량한 그리스도교인답게 절반은 양보하겠어요. 소피아는 성격이 쾌활하질 못하고 평생을 눈물이나 짜면서 사는 사람이에요. 지난번에 봤을 때도 얼굴에 주름을 천 개는 만들어놓고 있더군요. 아니, 천 개도 더 되었죠. 아니, 그보다는 적었나? 모든 일을 미리 걱정하고 염려하느라고요. 첫 번째 남편의 장례식에서도 엄청나게도 울어댔지만 1년도 안 되어서 다시 결혼했잖아요. 그다음 소식은 지난주 일요일 우리 교회에서 있었던 특별 예배에 관한 이야기예요. 교회 장식을 아주 아름답게 했다고 했네요.”

“그 얘길 듣고 보니 생각나네요. 프라이어 씨는 교회를 꽃으로 장식해서는 안 된다고 아주 성화예요. 그 사람이 로브리지에서 여기로 이사 올 때부터 문제를 만들고 다닐 거라고 다들 염려했었죠. 그 사람을 교회 장로로 임명해서는 안 되었다고요. 그건 실수였어요. 언젠가는 후회할 날이 올 거예요. 아, 내 말을 믿어요!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여자들이 계속해서 설교단을 풀 같은 걸로 어질러놓으면 다시는 교회에 나오지 않겠어.’ 그러더라고요. 내가 똑똑히 들었어요.”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그 늙은 ‘구레나룻 난 보름달’이 글렌으로 이사 오기 전까지는 교회가 잘 굴러갔어요. 내 생각에는 그 사람이 떠나버려도 우리는 잘해나갈 수 있어요.”

수잔이 말했다.

“그나저나 그 사람에게 그런 이상한 별명을 붙인 건 누군가요?”

블라이드 부인이 물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로브리지 사내아이들이에요, 사모님. 그 사람 얼굴이 동그랗고 붉어서일 거예요. 거기다 얼굴 가장자리에 모래 색깔 구레나룻이 빙 둘러 났잖아요. 하지만 그 사람 듣는 데서 그렇게 불렀다가는 큰일 나요. 그 구레나룻보다도 그 사람의 나쁜 점이 뭔 줄 아세요, 사모님? 그 사람은 하는 짓마다 얼토당토않은 짓이고, 머릿속에 든 생각들도 죄다 이상하다는 거예요. 그 사람은 교회 장로고, 아주 신앙심도 깊은 사람이지만요. 20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세요, 사모님? 내가 아주 그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지요. 로브리지 묘지에다 소를 풀어놓고 풀을 먹였어요. 네, 정말이에요. 난 절대로 그 일을 잊지 않지요. 난 그 사람이 기도회에서 기도를 올릴 때마다 그 일이 생각나요. 자, 글렌 소식은 이게 다고 신문에 더 이상 읽을 만한 기사는 없네요. 외국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관심이 없으니까요. 그나저나 살해당했다는 프란츠 페르디난트라는 사람이 누구지요?”
참혹한 운명은 그때부터 꿈틀거리기 시작했으나 수잔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얼마나 끔찍한 사실인지를 알지 못하는 미스 코넬리아는 말했다.

“그 사람이 누구건 우리랑 무슨 상관이에요. 그 발칸 제국에서는 항상 누군가를 죽이고, 누가 죽임을 당하는 일이 일어나잖아요. 그 사람들은 원래가 그렇게 살아요. 우리 신문에 그런 충격적인 기사를 실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요. <엔터프라이즈>지가 그런 기사나 실으면서 점점 선정적으로 변해가고 있다니까요. 자, 이제 난 집에 가보아야겠네요. 아니에요, 앤. 더 있다가 저녁을 먹고 가라고 해도 소용없어요. 마셜은 내가 집에 없으면 밥도 먹으려 들질 않아요. 꼭 사내다운 짓이지요. 그래서 가야 해요. 세상에나, 앤. 저 고양이는 왜 저런대요? 발작이라도 일으키는 건가요?”

박사가 갑자기 미스 코넬리아 발 아래 깔개로 덤벼들더니 귀를 깔고 누워 노려보다가 미친 듯이 창문을 통해 뛰쳐나가 버렸다.

“오, 아니에요. 하이드 씨로 탈바꿈하는 거예요. 오늘 밤 비가 내리거나 바람이 세차게 불어올 거라는 징조지요. 박사는 일기예보보다 더 정확해요.”

“저놈이 내 부엌으로 뛰어 들어오지 않고 저렇게 밖으로 뛰쳐나가서 천만다행이네요. 난 이제 가서 저녁 준비를 해야겠어요. 지금처럼 ‘잉글사이드’가 식구들로 꽉 차 있을 땐 식사도 늦지 않게 제때 준비해야지요.”
수잔이 말했다.


1.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자 예언자. 하지만 카산드라의 예언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트로이가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했을 때도 아무도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2

아침 이슬






잉글사이드 정원 잔디밭은 햇빛과 얼룩덜룩한 그림자로 온통 황금빛 연못이 되어 있었다. 릴라 블라이드는 커다란 스코틀랜드 소나무에 매달린 그물침대에 누워 편안하게 몸을 흔들거렸다. 거트루드 올리버는 릴라 옆으로 나무 아래에 앉았고, 월터는 풀밭에 온몸을 죽 뻗고 누워 옛날 옛적의 영웅과 미인들을 생각하며 기사도의 낭만에 빠져 있었다.

블라이드 식구들은 릴라를 여전히 ‘아기’ 취급했지만 릴라는 이제 자기도 어른이 다 되었다고 믿었다. 그렇건만 아무도 그런 사실을 믿어주지 않아 언제나 불만이었다. 나이도 이젠 열다섯 살이 다 되었으니 스스로를 어른으로 여기는 것도 당연했고, 다이와 낸만큼이나 키도 크고, 수잔이 예쁘다고 믿는 만큼이나 예뻤다. 커다란 갈색 눈은 꿈을 꾸는 듯 보였고, 우유처럼 부드러운 피부에는 작은 황금빛 주근깨들이 박혀 있으며, 아주 예쁘게 아치를 이룬 눈썹은 꼭 뭐라고 묻고 있는 듯 기묘한 표정을 만들었다. 릴라의 눈빛은 사람들에게, 특히 십대 소년들에게 그 눈빛에 화답하고 싶게 했다. 붉은빛이 도는 갈색 머리칼이 물결쳤으며, 윗입술 위로 귀엽게 오목 들어간 부분은 릴라의 세례식 때 어떤 착한 요정이 손가락으로 쿡 눌러 그렇게 되었는지도 몰랐다.

릴라에게는 허영심도 약간 있었다. 그것은 릴라의 단짝 친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릴라는 자기 얼굴에는 만족했지만 손가락과 다리가 너무 긴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엄마가 드레스를 좀 더 길게 만들어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무지개 골짜기’에서 뛰어놀던 시절에는 오동포동한 어린애였지만 이제 팔과 다리만 자라는 시기가 되었는지 무척 날씬하게 자랐다. 젬과 셜리는 그런 릴라를 ‘거미’라고 부르며 놀리고 괴롭혔다. 그렇지만 릴라의 모습이 이상해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릴라의 걸음걸이를 보면 걷는 것이 아니라 꼭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 너무 귀여움을 많이 받고 자란 탓에 좀 응석받이가 된 면도 없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릴라 블라이드가 낸이나 다이처럼 영리하지는 못하더라도 아주 귀엽다고 생각했다.

미스 올리버는 1년 동안 ‘잉글사이드’에서 하숙을 했고 이제 방학을 맞아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미스 올리버가 ‘잉글사이드’에서 하숙할 수 있었던 것은 릴라가 올리버 선생님을 몹시 숭배한다는 단 한 가지 이유였다. 남는 방도 없어서 릴라의 방을 함께 썼다. 스물여덟 살인 거트루드 올리버는 순탄한 인생을 살지 못했다. 한 번 보면 쉬이 잊히지 않을 인상으로 좀 슬퍼 보이는 얼굴에 아몬드 모양의 갈색 눈을 가졌으며 입술은 영리해 보이면서도 약간 사람을 조롱하는 듯도 보였다. 숱이 많은 검은 머리는 칭칭 감아올리고 다녔으며, 그렇게 예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뭔가 끌리면서 신비로운 얼굴이었다. 릴라는 미스 올리버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심지어는 간간이 우울해 있고 심사가 뒤틀려 있는 것마저 릴라에게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미스 올리버가 이런 기분을 드러내는 때는 피곤할 때뿐이고, 대부분은 함께하기 무척 재미있고 유쾌한 상대라서 ‘잉글사이드’ 아이들은 미스 올리버가 자기들보다 나이가 훨씬 많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어울렸다. 미스 올리버는 특히 월터와 릴라를 좋아했고, 둘은 비밀스럽게 품고 있는 자기의 소망과 야망을 모두 털어놓았다. 미스 올리버는 릴라가 낸과 다이처럼 아름다운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파티에도 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물론 연인도 원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여럿을!

월터로 말할 것 같으면, 미스 올리버는 월터가 ‘로자몬드에게,’ 즉 페이스 메러디스에게 바치는 연작 소네트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유명한 대학교의 영문학 교수가 되는 것이 꿈이란 것도 알았다. 월터가 아름다움을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추한 것을 진정 혐오한다는 것도 알았다. 미스 올리버는 월터의 장점이 무엇이고 약점이 무엇인지 모두 알았다.

월터는 여전히 ‘잉글사이드’ 남자들 중에 가장 잘생긴 젊은이였다. 미스 올리버는 그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즐거웠다. 아들이 있다면 꼭 월터처럼 생긴 아들을 갖고 싶었다. 윤기 나는 검은 머리에, 총명해 보이는 짙은 잿빛 눈, 나무랄 데 없는 이목구비, 거기다 월터의 손끝에서는 시가 나왔다! 그 연작 소네트는 스무 살 젊은이가 쓴 것치고는 상당히 훌륭했다. 미스 올리버가 비평가는 아니더라도 월터 블라이드가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는 것은 잘 알았다.

릴라는 진심으로 월터를 좋아했다. 월터는 젬이나 셜리처럼 릴라를 놀리는 일도 없었고, ‘거미’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월터는 릴라의 이름을 약간 변형해 ‘릴라, 나의 릴라’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릴라라는 이름은 ‘초록 지붕 집’의 마릴라 할머니 이름을 딴 것이지만, 릴라가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할머니를 잘 모르는 릴라는 그 이름이 너무 옛날 이름 같고 촌스럽다고 싫어했다. 왜 차라리 첫 번째 이름 베르타로 불러주지 않을까? 바보스러운 ‘릴라’라는 이름보다는 베르타가 훨씬 더 예쁘고 고상하게 들리는데. 릴라는 월터가 ‘릴라, 나의 릴라’라고 부르는 건 싫어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은 그렇게 부르지 못하게 했다. 그래도 미스 올리버는 월터가 운율을 넣어 감미롭게 ‘릴라, 나의 릴라’라고 부르면 그 소리가 꼭 은빛 개울물이 흘러가는 소리 같다면서 자기도 가끔씩 그렇게 불렀다. 릴라는 월터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다고 미스 올리버에게 말했다. 릴라도 다른 열다섯 살 소녀와 마찬가지로 과장해서 말하기를 좋아했다. 어쨌거나 릴라가 가장 속상할 때는 월터가 자기보다는 다이에게 비밀을 더 많이 털어놓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였다.

릴라가 올리버 선생님을 붙들고 아주 반항적으로 한탄한 적도 있었다. “월터 오빠는 제가 자기 얘기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어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전 어른이라고요! 전 월터 오빠에게 들은 말을 누구에게 말한 적도 없어요. 선생님에게도요. 하지만 제 이야기는 모두 해요. 전 선생님에게 비밀을 갖고 있는 건 견디지 못하니까요. 하지만 월터 오빠의 비밀은 절대로 말하지 않아요. 전 오빠에게 제 이야기를 다 해요. 심지어는 제 일기장도 보여준다고요. 그런데도 오빠가 제게 자기 마음을 다 털어놓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몹시 상해요. 그렇지만 시는 모두 보여줘요. 아주 훌륭한 시들이죠. 올리버 선생님, 언젠가는 저도 오빠에게 워즈워스의 동생 도로시 같은 존재가 되고 싶어요. 그래도 워즈워스는 월터 오빠와 같은 시는 쓰지 못해요. 테니슨도 마찬가지구요.”

“어디 월터의 시를 그 두 사람 시에 대겠니? 그 두 사람은 변변찮은 시도 많이 썼는걸.”

미스 올리버는 비아냥대는 소리를 했다. 하지만 릴라의 눈에 상처받은 표정이 떠오른 것을 보고 후회하는 마음이 되어 얼른 덧붙였다.

“하지만 난 월터도 아주 훌륭한 시를 쓰게 될 거라고 믿어. 언젠가는 말이야. 그리고 너도 나이를 더 먹으면 월터의 신임을 받을 수 있을 거야.”

릴라는 의젓한 체 한숨을 쉬었다.

“작년에 월터 오빠가 장티푸스에 걸려 입원해 있을 때 저는 미칠 것만 같았어요. 고비를 넘길 때까지 오빠의 병이 얼마나 심각한지 아무도 이야기해주지 않았거든요. 아빠가 말을 못 하게 했어요. 저도 나중엔 몰랐던 것이 다행이었다고 생각해요. 알았더라면 견디지 못했을 거예요. 하지만 가끔씩은 월터 오빠가 저보다 우리 강아지 먼데이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릴라가 씁쓸한 어조로 말을 끝냈다. 릴라는 미스 올리버의 흉내를 내 쓰디쓴 어조로 말하길 좋아했다.

먼데이는 ‘잉글사이드’에서 기르는 개 이름이다. 그런 이름을 갖게 된 연유는 마침 월터가 월요일에 《로빈슨 크루소》를 읽고 있는데 왔기 때문이었다. 먼데이는 젬의 개지만 월터도 잘 따랐다. 지금도 월터의 곁에 누워 월터의 팔에 코를 문지르고 있었다. 월터가 무심하게 쓰다듬어주는 손길이 마냥 좋은지 기쁜 듯이 꼬리를 바닥에 탁탁 내리치고 있다. 먼데이는 콜리나 세터종이 아니고 사냥개도 아니었으며 뉴펀들랜드산도 아니었다. 젬이 언제나 말하듯 ‘평범한 개’였고, 더 인정머리 없는 사람들은 아주 흔해빠진 똥개라고 말하는 그런 종류였다.

분명 먼데이의 겉모습은 별로 볼 것도 없었다. 검은 점이 노란 털 위로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고 눈에도 점이 있었다. 귀는 너덜너덜했다. 명예를 지키려고 싸움을 벌이더라도 한 번도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먼데이에게는 그 무엇도 건드리지 못할 소중한 능력이 있었다. 개들이 전부 잘생긴 것은 아니고 유창하게 잘 짖는 것도 아니고 언제나 승리를 거두지는 못하더라도 사랑할 수는 있다는 것을 알았다. 먼데이의 평범한 외모 안에는 애정 많고, 충성스럽고, 고귀한 개의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 그의 갈색 눈에서는 어떤 철학자도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의 영혼에 감동을 주는 어떤 것이 느껴졌다.

‘잉글사이드’ 사람은 누구나 먼데이를 좋아했다. 심지어는 수잔조차도 먼데이를 귀여워했다. 그런데 먼데이는 한 가지 나쁜 버릇을 갖고 있었다. 몰래 손님방에 들어가 침대 위에서 낮잠을 자는 것으로, 그 때문에 수잔이 큰 골머리를 앓았다.

그날 오후는 정말 멋진 날씨였다. 특히 릴라는 무척 기분이 좋았다.

“6월은 정말이지 기분 좋은 달이란 생각이 들지 않나요? 저희는 정말로 즐겁게 보냈고, 날씨도 환상적이었죠. 모든 면에서 완벽했어요.”

저 멀리 ‘무지개 골짜기’ 위로 평화롭게 걸려 있는 작고 고요한 은빛 구름을 꿈꾸듯 바라보며 릴라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 뭔가가 불길해. 완벽한 것은 신의 선물이지. 앞으로 닥칠 나쁜 일에 대한 보상으로 주는 선물 같은 거야. 나는 그런 일을 너무 자주 겪어서 사람들이 완벽한 시간을 보냈다고 하는 말을 그대로 믿지 않아. 그래도 6월은 즐거웠어.”

미스 올리버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물론 그렇게까지 신날 일은 없었어요. 근래 글렌 마을에서 일어난 일들 중에서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은 노처녀 미드 할머니가 교회에서 기절한 것뿐이니까요. 전 가끔씩 뭔가 극적인 일이 일어나 주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어요.”

릴라가 말했다.

“그런 일은 바라지 마. 극적인 일에는 언제나 고통도 함께 따르기 마련이니까. 너희들은 모두 걱정 하나 없이 즐겁게 여름을 보내게 될 거야. 나는 로브리지에서 속을 썩이며 지내겠지!”

“여기 자주 오실 거죠, 그렇죠? 올여름엔 모두들 아주 즐겁게 지낼 거예요. 하지만 언제나처럼 저는 끼워주지 않겠죠. 저도 어른이 다 되었는데 사람들은 왜 절 어른으로 생각해주지 않는 건지 모르겠어요. 정말 속상해요.”

“그렇게 서둘러 어른이 되려고 할 필요 없단다, 릴라. 어린 시절이 가버리기를 그렇게 기다리지 마. 그렇지 않아도 젊음은 너무 빨리 가버리거든. 너도 곧 삶의 맛을 보게 될 거야.”

릴라가 깔깔거리며 외쳤다.

“삶의 맛을 보게 된다고요! 전 먹어버리고 싶어요. 전 모든 것을 다 맛보고 싶어요. 여자로서 맛볼 수 있는 모든 것을요. 이제 한 달만 있으면 저도 열다섯 살이에요. 그럼 아무도 저더러 아이라고 하는 사람도 없을 거예요. 전 누군가가 여자의 일생 중에 최고로 좋은 시절은 열다섯 살에서 열아홉 살까지라고 하는 말을 들었어요. 전 그 시절을 후회 없이 멋지게 보낼 생각이에요. 정말 재미있게만 보낼 거라고요.”

“네가 어떻게 살겠다고 작정한다고 해서 꼭 그렇게 되는 건 아니야. 마음먹은 대로만 살아지는 건 아니거든.”

“그래도 즐겁게 보낼 기대를 하면 아주 신나잖아요.”

릴라가 외쳤다.

“너는 신나는 일밖에 생각지 않는구나. 이 장난꾸러기. 그래, 열다섯 살에 즐거움 외에 뭘 더 생각할 수 있겠니. 그런데 올가을에 대학 갈 생각은 없니?”

미스 올리버는 릴라의 턱 선이 정말 예쁘다고 생각하며 응석을 받아주듯 말했다.

“아니요. 올가을뿐만 아니라 어느 가을에도 가고 싶지 않아요. 낸 언니나 다이 언니가 그렇게 좋아하는 이념이니 주의니 하는 것들엔 전 관심이 없어요. 그리고 우리 형제들 중에 다섯이나 이미 대학에 다니고 있잖아요. 그거면 충분해요. 어느 집에나 다 머리 나쁜 애가 하나쯤은 있는 법이라고요. 전 예쁘고 인기 있고 즐겁게 살 수만 있다면 바보가 되어도 상관없어요. 전 머리 좋은 아이는 될 수 없어요. 저한테는 특별한 재능이 없다고요. 그리고 이렇게 사는 것이 얼마나 편한지 선생님은 모르실 거예요. 아무도 제가 특별한 일을 할 거라고 기대하거나 절 귀찮게 하지도 않거든요. 그렇지만 전 집에서 요리나 하는 주부 타입도 아니에요. 전 바느질도 청소도 싫어해요. 그리고 수잔아줌마는 아무나 할 수 있는 비스킷 굽는 법도 제게는 못 가르치겠대요. 아빠는 저에게 수고할 필요도 없고 길쌈을 하며 살 필요 없다고 했어요. 그러니 전 ‘들에 핀 백합’2)이 될 수밖에 없어요.”

릴라가 웃으며 말했다.

“넌 공부를 모두 포기하기에는 아직 너무 어려, 릴라.”

“아니에요. 엄마가 올겨울에 문학 읽기를 지도해주신댔어요. 문학사 학위를 받은 엄마의 실력을 발휘하게 될 거예요. 다행히 저도 책 읽는 것은 좋아해요. 절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선생님. 전 진지하고 심각하게만은 살 수 없다구요. 저한테는 모든 것이 장밋빛이고 무지갯빛으로만 보이는걸요. 다음 달이면 전 열다섯 살이 돼요. 내년이면 열여섯이 되고요. 그리고 내후년이면 열일곱이 되지요. 이보다 더 매혹적인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정말 못 말리겠다, 릴라, 나의 릴라.”

거트루드 올리버는 웃으면서도 심각하게 말했다.


2. 마태복음 6장 28절:‘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를 생각하고 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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