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탐내도 될까? (48회)

죽으나사나 | 2024.03.28 08:00:01 댓글: 14 조회: 259 추천: 1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556930
너를 탐내도 될까? (48회) 나름… 잘 지냈어요.

“아빠한테 사채로 진 빚이 있었어요. 사채업자는 사라져버린 아빠 대신에 어린 쌍둥이를 데리고 있던  엄마에게 돈을 갚으라고 저희를 빌미로 협박을 했죠. 엄마가  거기에서 일하게끔.“

은서는 우희 이모에게서 들었던 오래전에 이야기를 속에서 꺼냈다. 슬픔은 없었다. 

오래전부터 받아들이고 살았던 저한테는 이제 이걸 속에서 꺼낸다고 한 들 요동칠 일도 아니었다. 

“아주 어렸던 저희는 여기가 집이라고 생각할 만큼 많이 드나들었어요. 엄마가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는 나이였으니 꽤 재미있는 기억들이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은지도, 윤하정도 그랬을 거예요. 그 기억이 돌아오기만 한다면.”

은지라는 이름은 이제 저 혼자만의 기억인 거 같아서 윤하정이라고 다시 고쳐 말하며 은서는 말을 이어갔다. 

그녀의 앞에서 경청하고 있는 서울의 표정은 고요했다. 

”하정과 제가 7살이 되던 해에, 사라졌던 아빠가 돌아왔어요. 근데 자기가 졌던 빚을 그런 일로 갚고 있는 엄마를 이해할 수가 없었던 아빠는 그 자리에서 엄마한테 칼을 휘두르고 저 자신도 그대로 자살을 해버렸어요. 하루아침에 엄마 아빠가 사라져 버린 저희를 그 사채업자들한테서 떼어내려고 도망칠 수 있게 도운 이모가 있었어요. 그날, 사채업자에서 도망을 쳤던 하정과 저는 그렇게 떨어지게 되었어요.“

”강은서 씨는 잡혔고요?“

고요하던 서울의 눈동자가 좀 씩 흔들리고 있었다. 

강은서라는 누나의 쌍둥이 언니…

그녀 역시도 쉬운 삶이 아니었다는 걸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잡혔지만 괜찮았어요. 하정이라도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니 그것보다 즐거운 일이 없었거든요. 7살 밖에 안 되어서 왜 도망을 쳐야 하는지 사실 잘 알 수가 없었지만 그때 분위기가 그래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던 거 같아요. 우린 헤어지기 전에 약속을 했어요. 나중에 크면 다시 우리 추억이 깃든 그 가게서 만나자고요.“

하…

서울의 입에서 작은 탄식이 나왔다. 

”저도 저희를 도와줬던 이모네 집에서 그저 평범한 아이처럼 컸어요. 딱 스무 살이 될 때까지는요. 맨날이고 기다렸어요. 이제 곧 성인이 될 테고 은지가 날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은연중 그 가게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죠. 성인이 되자마자 사채업자가 저를 다시 찾아오더군요. 불덩이처럼 불어난 빚을 보여주면서 엄마와 같은 길을 걷기를 바랐죠.“

은서는 오랜 세월 동안 제 마음속에 외웠던 은지란 이름을 잊을 수가 없어 또 그 이름을 올렸다. 꽤 슬픈 이야기인데도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당연히 갓 스무 살 밖에 안 된 저한테는 받아들일 수가 없는 조건이라 거부를 했어요. 근데, 잘 도망을 쳤을 거라 생각했던 은지를, 그자들은 어디에 있는지 잘 알고 있더군요. 제 앞에 성인이 된 은지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제가 못하겠다면 은지를 찾아가겠다고 그러더라고요. 사진 속의 은지는 그저 평범한 대학생이었어요. 도망치던 7살 그 해에 교통사고로 저를 잊은 은지는 행복해 보였어요. 그런 은지의 삶을 깨트리고 싶지 않아서 이 길을 선택했어요. 그러면서 기다렸죠. 기억이 돌아오면 은지가 언젠가는 날 찾아오지 않을까. 그러면 그때 가서 이런 일을 하게 된 이유를 제대로 설명을 해주어야지. 이해를 못 하면 할 때까지 계속 얘기해 줄 생각이에요.“

”…“

서울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서로를 마주한 시선에는 하정에 대한 이 긴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정리하는 걸로 추정되었다. 

“누나는…”

한참을 조용하던 서울의 입술이 벌어졌다. 

“당신 같은 쌍둥이 언니가 있었다는 걸 진작에 알았더라면, 좀 더 행복했을 거예요.”

 은서의 눈이 커졌다. 

이유를 잘 모르겠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강은서의  얘기를 들어보니 누나한테 선뜻 다가갈 수 없었을 수도 있었다. 

근데 친 부모가  자신을 버렸다고만 생각했던 누나한테 사실은 저를 사랑하던 가족이 있었고 지금 또 이리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조금이라도 더 빨리 알았더라면,

그 외로웠던 누나의 빈속을 조금이라도 더 채워줄 수 있었을 텐데. 

생각하는 마음에 어긋난 이 관계는 서로에게 어쩌면 최선의 방법이 아니었다. 

적어도 누나한테는. 

그리고,

누나가 좋아하는 권기혁은 쌍둥이 언니인 강은서와 깊은 관계가 있다…

얼마나 깊고, 정확히 그게 어느 정도인지 잘은 모르지만 그냥 ‘아는 사이’ 라고 치부하기엔 그리 쉽지 않다는 걸 직감으로 알 수가 있었다. 

그래서 이 상황이 서울이한테는 그리 달갑지 않게 느껴졌다. 

누나한테 강은서의 존재를 알리는 것도 자칫 문제가 될 게 뻔했다. 

권기혁 때문에. 

어찌해야 하는지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답은 그리 쉽게 찾아지지가 않았다. 

“은지, 아니. 윤하정은 언제부터 알고 지냈나요? 입양을 한 집안에서 잘 살고 있었나요?“

강은서가 조심히 물어왔다. 누나에 대해서. 

누나와 쭉 연락을 했던 건 아니라서 14살 이후의 누나는 지금까지 어떻게 지냈는지 세세히 알 길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가장 아팠던 시간을 짧게나마 같이 했었던 저로서는 감히 말해줄 수 있었다. 

누나는 하나도 행복하지 않았다고. 

부모님의 빚을 혼자 갚고 있었던 강은서도 나름 힘든 시기를 겪고 있었겠지만 거기서 도망을 쳤었던 누나도 그리 잘 살지는 못했었다고, 다 말을 해줘야 하는지 문득 고민이 들어섰다. 

과연,

말해주는 게 맞을까.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 같은데.

아니라면,

그놈의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린단 말은 꺼낼 수가 없겠지. 

아니면 당장이라도 알은체를 했을 텐데 말이다. 

그렇다는 건…

누나에 대해 지금은 다 얘기해 줄 수가 없다. 

당장 누나한테 찾아갈 것만 같아서. 

그러면,

누나는 강은서와 권기혁과의 사이를 알아버릴 테고. 

권기혁이 강은서를 닮은 저한테 관심을 보였다고 생각할 게 뻔하니까.

그러면 누나는 또 슬픔이라는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게 뻔했다. 

누나는 이제 그만 슬펐으면 좋겠기에,

적어도 자기가 누나의 마음을 저한테로 돌리고 나서 이 모든 걸 말해줘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나름… 잘 지냈어요.”

그래서 거짓말을 했다. 누나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척이나 궁금해하는 누나랑 똑같이 생긴 강은서한테. 

서울의 답을 들은 은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미안해요. 다음에 제대로 얘기해 줄게요.

***

며칠째 회사도 안 나가고 VVIP들만 모시는 헬스장만 드나드는 기혁을 찾아 오늘도 이한은 보고서를 들고 그만 있는 그 헬스장으로 발을 들였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음에도 운동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원래도 체력 유지를 위해 다니던 헬스장이었지만 바쁜 일정 탓에 이렇게 죽치고 있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한이가 옆에 다가온 걸 느낀 기혁은 그제야 하던 운동을 멈추고 이마에서 흘러내리던 땀을 수건으로 거칠게 닦아내리고는 기구에 걸 터 앉았다. 

“홍콩 지사에서 저번 계약 건은 완벽하게 마무리를 지었다고 합니다. 대표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패션쇼 관련 업무는 리더스에서 두각을 보여줬던 몇 명 인원들을 본사로 미리 요청했습니다. 이제 저희 본사 직원들 같이 통합 업무를 볼 겁니다.“

기혁은 이한의 보고를 들으면서 생수병 뚜껑을 열어 벌컥 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보고가 안 끝난 이한이가 머뭇거렸다. 

”리더스 대표 측에서  나온 말인데요. 윤하정 씨를 추천하더라고요. 본사로 데려오면 도움이 많이 될 거라고 그러시면서. 사직서를 내고 쉬고 있는 중이지만 수리를 안 했고 잘 설득해서 데리고 있을만한 사람이라면서 그러셨습니다.“

들이켜던 생수가 기혁에 의해 잠깐 멈추었다가 이내 다시 심한 갈증을 느꼈었던지 그걸 한 번에 다 비워낸 기혁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샤워실로 향했다. 

”은서한테 갈 거니까 차 대기 시켜.“

***

“왜 갑자기 여기서 보자고 했어?”

정연이가 내가 치매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술을 거의 못 대었다. 

심하게 간섭하는 정연이 덕분에. 

저번 홍콩에서 서울의 술을 한번 뺏어 먹은 뒤로는 더욱더 술은 없었다. 

그러던 오늘,

퇴근하려는 정연에게 연락을 해 회사 근처에 있는 그때 그 식당으로 불렀다. 

정확히 이한이랑 같이 셋이서 죽이 되도록 마셨던 그 가게, 권대표가 데리러 왔다던 그 가게로. 

지금도 뭔가 그늘이 들어선 얼굴을 한 정연이가 털썩 하정이 앞에 엉덩이를 붙이며 의자에 앉았다. 

요즘의 정연은 무엇 때문인지 좀처럼 기분이 풀리지 않는지 축 처져서 다녔다. 

그래서 오늘,

반대를 무릅쓰고 같이 술을 마셔줄 생각이었다. 

”언니, 여기 생맥 하나요.“

”이미 두 잔 주문했어.“

그렇지 않아도 술 생각이 나긴 했었는지 정연이가 알바생을 부르자 하정이가 말렸다. 

”두 잔? 왜. 너도 마시려고?“

정연의 이마가 심하게 좁혀졌다. 

”딱 한 잔만 마실게.“

하정의 간절한 눈빛을 보아서 그런지, 아니면 이 찌는 무더위에 그 시원한 맥주 하나 못 마시는 것도 스트레스라 정신 건강에 더 해로울 거라 생각되었는지 정연은 뭐라 하지 않았다. 

금방 나온 생맥주는 정연에 의해 벌컥벌컥 흡입해 버렸다. 

그녀에 비해  암묵적으로 딱 한 잔만 허용된 하정은 아까워서라도 조금씩 홀짝거렸다. 여전히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정연의 눈치를 살피면서. 

“너 요즘 이 실장이랑 잘 지내? 싸운 거 아니지? 저번에 홍콩에 나까지 데리고 가서 많이 실망했을 거 같은데.”

넌지시 던져보았다. 혹시나 저 때문에 무리한 정연이가 이한에게 많이 혼나지는 않았는지. 그걸로 헤어지기라도 한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아니. 혼나지 않았어.”

오늘도 하정이가 미리 주문한 똥집을 입안에 넣으며 정연은 무심하게 답했다. 

“아, 다행이네.”

하정의 끄덕임을 끝으로 한참이나 침묵이 흘렀다. 

“오정연.“

하정은 술을 마시다 휴대폰을 만지는 정연을 불렀다. 

”어.“

답은 하는데 시선은 폰에 멈추었다. 

보다 못한 하정이가 정연의 폰을 홱 뺏어서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휴대폰에 두었던 시선은 당연히 하정에게로 옮겨졌다. 

정연은 화나 짜증 하나 없는 무감한 표정이었다. 

“나한테 뭐 화난 거라도 있어? 요즘에 너는 너무 딴 사람 같아.”

하정의 진심 어린 얘기에도 정연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고 다시 호프 잔을 들었다. 

“없어. 그냥 일도 많고 피곤해서 그래.”

정연에게서 아무 말도 들을 수가 없었다.

그저,

아주 잠깐씩 일상 얘기를 주고받다가 한 시간 남짓 지나서 가게에서 나왔다. 

“나 화장실 갔다 가자.”

밖에까지 나왔던 정연이가 다시 가게로 들어가면서 하는 말이었다. 하정은 가게 울타리 안에 배치되어 있는 벤치에 앉아서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살폈다. 

‘여긴 거의 프라이빗 한 공간이네.’

꽤 높게 쌓인 울타리 때문에 서 있을 때는 몰랐는데 벤치에 앉으니 밖이 잘 안 보였다. 

근데,

왜 이렇게 낯설지가 않지?

눈을 깜빡이며 여기저기 더 살피다가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왠지, 

뭔가가 떠오를 듯 말 듯.

[입술 훔쳐도 돼요?]

헉,

여기였구나. 

그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했던 장소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말만 했던 게 아니라,

또 무슨 말을 했지?

[저를 키워주신 부모님 빼고는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게 처음이에요. 저는. 온 마음으로 누구를 좋아한다는 그 자체가 저한테는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잘 아니까.]

좋아한다는 고백까지…

미쳤지. 

그리고 분명히 키스도 했는데….

이 실장은 분명히 권 대표와 내가 한 시간이나 지난 후에야 도착을 했다고 했는데…

한 시간 동안이나 여기에 있었다고?

[윤하정 씨 당신을 좋아하는 거 같습니다.]

어???

이건 무슨 기억이야?

이 머릿속에서 처음으로 떠오른 기억이다. 

하정의 심장이 고장이라도 난 듯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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