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탐내도 될까? (65회)

죽으나사나 | 2024.04.14 06:31:48 댓글: 28 조회: 240 추천: 1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560908
너를 탐내도 될까? (65회) 피의 응징.
"내가 그때 뭐라고 했었더라?"
기혁은 딱 한 번 식당에서 김재중과 마주 앉아 했었던 말을 되새겼다.
"또 건드리면 그렇게 곱게 대화로만 끝내진 않을 거라고 했을 텐데?"
딱딱한 취조실 책상을 기다란 손가락을 규칙으로 타닥타닥 두드리고 있는 그 소리는 김재중의 속을 꽤나 긁고 있었지만 짐짓 괜찮은 척 김재중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때는 강은서였고 윤하정은 괜찮은 줄로 알았습니다. 저야 뭐 알았겠습니까. 대표님이 쌍둥이 중 어떤 여자를 더 마음에 품고 있는지. 그냥 저도 도박을 건 거죠. 그 배팅에 나는 꽤 소질이 있었던 거 같았고."
꽤 불안해진 거 같은데 여유롭게 보이기 위해 건들거리는 김재중의 얼굴을 무심히 훑으며 기혁은 픽 하고 웃어버렸다.
"아~. 아쉽다. 대표님이 마음에 둔 여자는 어떤 맛일까 궁금했는데 내가 방심했...."
끼이이익- 쾅!!!
"끄윽...."
김재중의 건방진 입놀림이 끝나기도 전에 얼굴이 차갑게 식어버린 기혁은 더 뒤로 몸을 빼며 긴 다리를 뻗어 책상을 있는 힘껏 앞으로 밀어버렸고, 전혀 예상을 못 했던 김재중은 정확히 제 가슴에 꽂히 듯이 박혀오는 통증에 신음 소리를 연거푸 냈다.
"으윽!"
아까와 달리 얼굴이 파래진 김재중이 제 가슴을 웅켜 잡고 고통스러워했다. 기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미용실에 갈 의지조차 없었는지 그때 봤을 때보다  많이 길어진 그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뒤로 잡아당겼다. 정확히 기혁의 독기 품은 두 눈동자를 가까이서 마주한 김재중은 그리 오래 그와 눈을 마주하기 힘들어졌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을 때는 이미 늦었다는 것도 알았다.  
"뭐, 뭐 합니까. 아무리 재벌이라도 경찰서 내에서..."
이제야 겁을 먹기 시작한 김재중이 더듬거리면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반응을 기대하고 왔던지라 매섭던 기혁의 두 눈이 기다랗게 접혔다. 분명 미소를 머금은 듯한 표정이었지만 그게 더 찝찝한 김재중이 취조실 문쪽으로 시선을 못 떼었다. 이쯤이면 누군가가 취조실 안을 확인하고 들어와야 할 것 같았으니.
"안 들어올 겁니다. 내가 내 발로 나가기 전까지는. 그러니까, 왜 조용히 살면 될 것을 이렇게 일을 만드는 겁니까? 주제도 모르고."
몹시도 서늘한 음성이 일부러 김재중의 귓가에 다가가 속삭이듯 퍼부었다.
머릿카락이 쭈볏 서는 느낌이었다. 잘게 떨려오는 어깨를 어찌했으면 좋겠건만 김재중은 자제를 못 했고 이내 기혁의 손에 제 팔이 우악스럽게 잡히고 말자 두 눈이 커다래지며 필사코 그의 거친 손에서 빠지려고 악을 썼다.
씩 기분 나쁜 웃음과 함께 기혁은 말라비틀어진 김재중의 팔을 사정 없이 꺾어버렸다.
"으악! 살려줘!! 나 죽어!!!!"
멀쩡하던 뼈가 엇나가며 극도의 고통을 느낀 김재중이 미친놈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나 최조실 밖에는 누구도 없는지 끄떡없었다.
"김재중 씨, 아픕니까? 이 정도에? 어쩌나, 이제 당신은 평생 감옥에서 썩게 될 거고 문제는 내가 당신을 그리 곱게 감옥에서 잘 먹고 싸게 두진 않을 거란 말이지. 지금 겪는 이건 시작에 불과하단 소리야."
분명한 위협이었고 부드럽게 내뱉은 말투와 달리 이제 이성을 잃은 모습의 기혁을 차마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김재중이 미친놈한테 제대로 걸렸다는 걸 자각하며 덜덜덜 떨었다. 이미 부러져 제 기능을 못 하는 한쪽 팔을 부여잡고 취조실에서 벗어나려고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이내 기혁의 기다란 다리에 걸려 철퍼덕 넘어지고 말았다. 
"으으..."
공교롭게도 하필이면 다친 팔이 바닥에 먼저 닿으며 또 한 번의 큰 고통을 우직하게 느낀 김재중의 말라버린 그 입에서는 큰 소리를 내기도 힘든 고통이라 나지막한 신음만 흘리고 있었다. 
더욱더 날카로워진 기혁이가 제 영역 안에 겁 없이 들어온 사냥감을 데리고 놀 듯 여유롭게 뚜벅뚜벅 다시 걸어왔다. 위협을 느낀 김재중은 제 아픈 팔을 제대로 챙기지도 못 한 채 쩔뚝거리면서 취조실 문으로 다가가려고 했다. 
또다시 기혁이 사정없이 뻗은 다리로 인해 김재중은 문 손잡이를 잡기도 전에 자리에 꼬꾸라지고 말았다. 기혁은 무릎을 접어 자빠져서 신음하고 있는  김재중의 멱살을 웅켜잡았고 무감한 시선을 내리깔았다. 짙은 눈썹 아래로 가늘게 뜬 두 눈이 다음 차례는 저한테 무슨 짓을 할지 가늠이 될 거 같아서 김재중은 입술을 달싹이다 거의 죽어갈 듯이 사정했다.
"사, 살려줘. 잘못했어. 잘못했다고."
살려 달라고 빌어 대는 김재중의 처량해 보이는 얼굴을 마주한 기혁은 그런 그를 놀리기라도 하듯 피식, 입매를 늘리며 아직 멀쩡한 김재중의 다른 팔을 잡았다.
워낙에도 놀라서 커다랬던 김재중의 작은 눈동자가 그대로 쏟아져 내릴 듯 한없이 커져 갔다.
이내 다시 돼지 멱따는 소리와 함께 김재중은 기절했다.
움직임이 없는 김재중을 무심하게 발로 툭툭 건드려 보던 기혁은 김재중이 아무런 반응도 안 보이자 흥미를 잃고 그대로 큰 보폭과 함께 취조실 밖으로 나갔다.
취조실 밖에서 내내 안을 관찰하고 있던 경찰이 금방 밖으로 나온 기혁과 눈이 마주쳤고 꽤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청장님 안에 계십니까?"
"네. 계시긴 한데..."
"미안합니다."
똑바로 마주 선 기혁이가 정중하게 사과를 하며 고개를 숙여 보였고 그 길로 바로 청장실을 향해 걸어갔다. 폭력이 있을 거란 예상은 했지만 그대로 팔을 부러뜨릴 거란 생각은 못 했던 경찰은 골 때리는 인간을 만났다 생각하며 제 뒤통수를 빡빡 긁어 댔다.
청장이 그가 안에서 무얼 하든 자신이 나중에 다 책임을 질 거란 얘기는 해서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만 엄연히 범죄을 다루는 경찰서 안에서 하는 짓이란...
겁대가리가 없는 건지 미친 건지.
그는 대단한 일을 벌이고 태연하게 연기처럼 사라져버린 권기혁이 갔던 방향을 멍하니 쳐다보며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기혁은 강문철 청장을 만나 과했던 제 행동에 대해 이실직고를 했다. 강문철 역시 그 정도까지 할 줄은 몰랐기에 살짝 난감해 했지만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게 아니라고 했다.
경찰과의 대치 중 다친 거라 하면 되는 거였고 기혁이 원하는 대로 납치가 일어났던 그 폐 건물에는 이미 여러 살해 도구를 준비해 놓았고 그걸 증거로 내놓을 예정이었다.
완벽한 조작을 위해서 할 일이 남은 청장은 기혁과의 짧은 얘기를 끝내고 다시 청장실을 나섰다. 
***
그 길로 바로 펜트하우스로 돌아온 기혁은 다행히 열은 많이 떨어졌지만 밤새 앓았던 탓인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자고 있는 하정의 초췌해진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죽은 끓여놨는데 어제처럼  방안에 갖다 놓을까요?“

하정의 얼굴을 확인하고 그제야 옷을 갈아입으려고 방에서 나오는 기혁에게 도우미가 물어왔다. 

”네. 넣어주세요.“

기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편한 복장 차림으로 갈아입은 기혁은 다시 하정이가 머물고 있는 방으로 곧장 들어갔다. 

그새 따끈한 죽이 어제처럼 소형 테이블과 함께 협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어젯밤 그렇게 앓고 나서 여태 깨지 않았단다. 혹시 기절한 건 아닌가 싶어서 이마에 손을 올렸다가 가슴에 제 귀를 쫑긋 갖다 대던 기혁은 새근새근 고르게 움직이는 숨소리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열은 일단 없고, 기절한 게 아니라 자고 있는 게 확실하니 조금 기다려볼까.

침대 앞 의자에 앉아 조용히 자고 있는 하정만 제 두 눈에 가득 담았다. 

참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졌고 아픈 하정이가 제 앞에 이리 있으니 이상한 마음도 들었다. 

왜 이 여자가 정신이 말짱하고 기운이 넘칠 때는 차마 잡지 못하다가 이제야 이러는 건지. 

제 자신이 우습기도 했다. 

이제 다시는 밀어내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이불 속에 얌전히 들어가 있던 하정의 팔을 살며시 꺼내 살폈다. 

어젯밤 그녀가 고열로 정신을 못 차릴 때 부은 손목에도 찜질을 해서 그런지 어제보다는 많이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살갗이 벗겨진 자리는 밴드를 붙여주었다. 맨발로 마구 뛰었던 발은 어떨까. 다행히 유리조각 같은 거에 찔린 큰 상처는 없었지만 발톱이 부러져 있었고 발 역시 살갗이 여럿 벗겨져 있었다. 상처들이 은근 자잘하게 많아서 약을 발라줄 때 무의식으로 정신을 못 차리던 그녀는 아팠던 건지 움찔움찔했었지. 

어떻게 도망을 쳤을까. 

하정이가 자신이 납치를 당했다는 걸 알게 된 그 순간이 얼마나 무서웠을까 싶어서 가슴이 저려왔다. 

김재중 그 새끼의 싹을 더 싹둑 자르지 못한 제 자신이 또 원망스러웠다. 

놀랐을 하정을 생각하며 안타까운 마음 반, 그녀를 찾아야 한다는 마음은 컸지만 찾을 수 없어 무력해진 그 순간이 떠올라 저 자신에 대한 원망만 커져갔다. 

하정에게서 전화가 안 왔더라면… 

그녀가 거기서 도망을 못 쳤더라면 그 뒤로는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만 해도 끔찍했고 심장이 저릿하게 아파졌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무거운 눈꺼풀을 연신 들추며 껌뻑이던 하정은 제 손을 꼭 잡고 잠든 기혁을 보았다. 그는 커다란 몸을 의자 등받이에 비스듬히 기댄 채 잠이 들어있었다. 의자가 꽤 튼튼한 재질이 아니었다면 그 무게를 못 이기고 부서졌을 것만 같았다. 

하정이가 밤새 몸살로 시달려 으스러질 것 같은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러나 저보다 훨씬 피곤해 보이는 그의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어제 잠결에 느꼈던 체온은 이 사람한테서 나온 걸까.
날 밀어내기만 하던 사람이 왜 갑자기 태도를 바꾸고 이리 베풀기만 할까. 강은서는 어찌하려고 그러지? 도대체 이제 와서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지.

여러 생각으로 혼란스러운 하정이가 제 손을 꼭 덮은 그의 손아귀에서 빼려고 살짝 힘을 주자 더 큰 힘이 그녀의 손을 꽉 휘어잡았다. 

“앗…”

뭔가 소중한 게 빠져나가는 느낌이라 그것을 무심결에 꽉 잡았던 기혁이가 정신을 차리며 눈을 번쩍 떴다. 

느릿하게 깜빡이는 두 시선이 서로에 엉켜 붙었다. 

“아, 미안해요.”

살짝 찡그린 하정이 표정에 저한테 꽉 갇힌 그녀의 손을 풀어주었다. 

“언제 깼습니까?”

기혁이가 제 상체를 하정에게로 기울며 물어왔다. 무척이나 걱정된다는 기색으로. 

“… 금방이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려 했지만 등받이에 부딪히며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난감해하는 하정을 무감하게 쳐다보던 기혁이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제 몸을 뒤로 젖혔다. 

“그놈은 잡혔으니 이제 걱정 안 해도 될 겁니다.”

하정이가 깨면 제일 먼저 말해줘야 할 말이었다. 

“아…”

하정이 작은 입에서 나지막한 반응이 쏟아져 나왔다. 

기쁜 것도 없이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래. 평생 가도 쉬이 겪을 일이 아니니 놀라는 게 먼저겠지. 

기혁이 그런 그녀의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뺨 옆으로 드리운 머리카락을 귓바퀴 뒤로 넘겨주었다. 한올도 놓치지 않을 것처럼 세심하게도. 

“저, 돌아갈래요.”

그 섬세한 손길은 하정의 뜬금없는 한마디에 뚝 멈추었다.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기혁이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놈이 어떻게 잡혔냐는 궁금증도 아니고, 

저를 돌봐줘서 고맙다는 말도 아니고,

그저 돌아가겠단다. 

보아하니 굳건한 하정의 기세는 쉬이 꺾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온화하던 기혁의 표정이 굳어지고 짙은 눈썹이 구겨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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