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종 - 국제열차살인사건 3-1

3학년2반 | 2022.02.05 07:54:30 댓글: 0 조회: 558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6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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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열차 살인사건(하) │
│김성종 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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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소개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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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추적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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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이상한 동반자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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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반격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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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유인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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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국제열차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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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아버지와 아들1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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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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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전남 구례 출생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196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1971년 현대문학 시 소설 추천 완료
1974년 한국일보 최후의 증인으로 장편소설 당선
작품으로 <최후의 증인>, <여명의 눈동자>, <Z의 비밀>, <안개
속으로 지다>, <제5열>, <불타는 여인>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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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추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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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형사를 포함한 네 명의 형사들이 S동 사무소 문을 두드린
것은 저녁 8시 경이었다.
당직 근무를 보고 있던 직원 두 명이 놀란 얼굴로 그들을
맞아들였다.
경찰이 찾아온 용건을 이야기하자 직원 한 명이 서류함 쪽으로
가서 한참 서류를 뒤적이다가 닳아빠진 주민등록카드를 한장
찾아가지고 돌아왔다. 거기에는 박지순과 그의 가족에 대한
인적사항이 나와 있었다. 세대주는 박지순이었고, 가족으로는 딸
하나와 노모가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주민등록표에는 붉은
사선이 그어져 있었고, 붉은 글씨로 1984년 5월 20일자로
말소되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 주소지에 다른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박지순이라는
여자는 다른 데로 이사가면서 주민등록을 옮겨가지 않았습니다.
동사무소 직원의 말이었다.
그럴 줄 알았어.
동사무소를 나서면서 마형사가 뇌까린 말이었다.
동사무소 직원의 말대로 그 주소지에는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알아본 결과 그들은 박지순이 떠난 다음에 바로 이사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 집을 전세내어 들어온 그들은 박지순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경찰이 알아낸 것은
박지순도 그 집에 세들어 살았었다는 사실 정도였다.
형사들은 밤이 깊어가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탐문수사를
벌였다. 이웃 주민들과 통반장의 증언을 맞추어본 결과 박지순은
어느 보험회사 외무사원으로 남편도 없이 병신 딸과 노모를
부양했다고 한다. 그들이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 정도가
전부였다.
박지순의 본적지인 수원으로 내려갔던 팀으로부터 연락이 온
것은 그날 밤 11시 경이었다. 최형사가 장거리 전화로
노경감에게 그 결과를 보고해 왔다.
박지순은 4년 전에 남편과 사별했는데, 남편 이름은
장태기(張泰起)였습니다. 이상입니다.
경감은 죽은 장태기에 대해 알아보았다. 전과조회를 해본 결과
그는 위조전문가로 그에게는 전과 4범의 기록이 있었다.
남편의 기술을 그 여편네가 전수 받았군.
장태기에 대한 기록을 들여다보고 나서 경감이 중얼거린
말이었다.
시간은 자정이 지나 1월 16일로 접어들고 있었다.
경감은 박지순에 대한 추적이 갑자기 정지된 것을 알고
초조감을 느꼈다. 그녀의 주소지에도, 그리고 본적지에도 그녀는
더 이상 흔적을 남기지 않은 채 종적을 감추고 있었다.
수배전단을 뿌려 전국적인 규모로 그녀를 수배한다 해도
어쩐지 그녀가 쉽게 금방 걸려들 것 같지가 않았다. 언젠가는
걸려들겠지만, 꽤나 애를 먹이다가 걸려들었을 때는 이미 상당한
시간이 흘러 모든 것이 끝나버렸을지도 모른다. 경감은 가만히
앉아 그녀가 수배망에 걸려들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경감이 직접 박지순의 과거 주소지에 나타난 것은 자정에서 한
시간이 지난 1시경이었다. 그는 체면 불구하고 단잠에 빠져 있는
주민들을 깨워 박지순에 관한 것을 캐어 물었다.
두어 시간 가까이 탐문수사를 벌이던 끝에 경감은 마침내
중요한 인물을 한 명 만날 수가 있었다.
그 사람은 박지순의 노모와 가까이 지냈던 그 동네의 어느
할머니였다. 박가 성을 가진 그녀는 박지순의 노모인 이복녀와
가끔씩 전화로 소식을 주고 받고 있다고 했다.
이복녀씨의 전화번호는 몇 번입니까?
전화번호는 몰라요. 그 집 딸이 밖에서 전화 오는 것을 몹시
싫어하기 때문에 나는 아예 그 집에 전화 걸 생각을 안해요.
그러니까 전화는 그쪽에서 걸려오지요.
경찰은 낭패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실망하지 않고
그녀를 설득했다.
이복녀씨의 딸을 만나야만 어떤 사건을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 할머니를 통해서 알아냈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겠습니다. 이복녀씨를 잡으려는 건 절대 아닙니다. 그 여자를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려는 것뿐입니다.
난 그 집이 어디로 이사갔는지 몰라요.
박할머니는 이복녀의 딸인 박지순이 노모와 병신 딸을 그렇게
박대할 수 없다고 분개하는 것이었다. 그 끝에 이런 말을 했다.
그 할머니는 독실한 신자로 나하고 같은 성당에 나가지요.
그런데 이사간 뒤로는 너무 멀어서 잘 나오지를 못하고 있어요.
수요일 미사 때는 나하고 꼭 성당에 가곤 했는데.......
가만있자. 오늘 어쩌면 성당에 나올 거예요. 오늘은 꼭
나오겠다고 약속했는데....... 글쎄....... 눈이 이렇게 많이
와서 나올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경감의 눈이 번쩍 빛났다.
이복녀 할머니가 나오기로 약속한 미사 시간은 오전 11시였다.
간 밤에 내린 눈때문에 거리는 큰 혼잡을 빚고 있었다. 차들은
굼벵이처럼 느릿느릿 굴러가고 있었고, 사람들은 보도에 쌓인
눈이 얼어붙는 바람에 뒤뚱거리며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야
했다.
눈은 거의 그쳐 있었지만 잔뜩 흐린 하늘에서는 어쩌다가 한
두개씩 눈송이들이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는 것이 보이곤 했다.
그것으로 보아 다시 또 큰 눈이 내릴 것만 같았다.
그런 날씨에 이복녀 할머니가 먼 곳에 있는 성당에까지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경감은 부하들을 데리고 미사가
열리기 한 시간 전에 성당으로 나가 잠복했다. 물론
박할머니한테는 그것을 비밀로 한 채.
11시 15분 전에 박할머니의 모습이 성당 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성당 안으로 들어가더니 중간쯤의 자리에 앉아 있는 어느
할머니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들은 반갑게 손을 잡으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그 낯선 할머니는 안경을 벗어 눈물을 훔치고
나서 고개를 끄덕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경감의 부하 두 명이 그녀들 뒤의 빈 자리에 가서 앉았다.
할머니들은 미사가 시작될 때까지 손을 맞잡은 채 계속
속삭이는 소리로 이야기했다.
그 빌딩은 빌딩 전체가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아침 10시 30분이 되었을 때 한 사내가 내리더니 곧장 길을
건너와 그 빌딩의 지하 주차장으로 급히 내려갔다.
지하 주차장은 어둠침침했다. 그는 침침한 불빛 속에 웅크리고
있는 차들의 번호판을 열심히 들여다보다가 마침내 구석 쪽에
세워져 있는 차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그 차의 번호를 확인한 다음 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차의 뒷 좌석에는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차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머리에 털모자를 쓴 사내는 차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둠 속의 사내는 그가 앉을 수 있게 한쪽으로 비켜앉았다.
그에게서는 포머드 기름 냄새가 물씬 났다. 털모자를 쓴 사내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한 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뭐 좀 알아냈어?
포머드 냄새가 나는 사내가 물었다. 털모자의 사내는
호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무엇인가를 꺼내놓았다.
이걸 한 번 보십시오.
포머드 냄새를 풍기는 사내는 그것을 받아든 다음 실내등을
켰다. 그것은 종이를 접어놓은 것이었다. 그것을 펴자 거기에는
한 중년 여인의 사진과 함께 그녀의 인적사항이 인쇄되어
있었다. 그것은 전국 경찰에 배부된 수배전단이었다.
아침에 이걸 얻었죠.
털모자가 두손을 비비며 말했다. 그는 경찰 정보원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와 손을 잡고 있는 형사에게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었다. 그는 경찰만 위해서 일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범죄조직을 위해서도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적당히 기생하고 있는 그런 인물이었다.
이거 어디서 났지?
아침에 형사한테서 얻었어요. 이 여자 잡을려고
야단이던데요.
포머드 냄새는 실내등을 껐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 털모자에게 주었다.
고맙습니다.
털모자는 절을 꾸벅하면서 봉투를 받아 챙겼다.
털모자가 먼저 밖으로 사라졌다. 포머드 냄새는 10분쯤 그대로
앚아 있다가 밖으로 나와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 빌딩의 1층에는 공중전화가 한 대 설치되어 있었다. 한
사람이 거기서 전화를 걸고 있었다. 그는 기다리지 못하고 그
빌딩을 나와 길을 건너갔다.
길 건너에 공중전화 부스가 있었다. 부스는 비어 있었다. 그는
그 안으로 들어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박지순이 경찰의 수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정체가 드러났나?
네, 드러났습니다. 지금 수배전단을 입수했는데 그
여자사진이 실려 있고 인적사항도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경찰이
혈안이 돼서 찾고 있답니다.
그렇다면 그 여자 입을 막아야 되겠지.
어떻게 할까요?
입을 막으란 말이야. 입을 막으란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나?
상대방은 가래가 끓는 듯한 목소리로 거칠게 쏘아붙였다.
네, 알겠습니다.
포마드 냄새가 나는 사나이는 머리를 조아렸다.
공중전화 부스에서 나온 그는 생각에 잠겨 천천히 걸어갔다.
그는 조금 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쥐색
코트에 두 손을 찌른 채 사람이 별로 다니지 않는 골목길을
걸어갔다. 그는 박지순의 입을 영원히 잠재울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이윽고 골목을 나온
그는 다시 공중전화를 찾았다.
그가 박지순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된 것은 그녀가 갑자기
은신처를 다른 데로 옮겼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의심을
확인하기 위해 정보원에게 부탁했던 것이고 그 정보원은 그가
부탁한 것을 아주 적당한 때에 그에게 물어다주었던 것이다.
그는 박지순의 새로운 은신처로 전화를 걸었다.
박지순은 집에 있었다.
오늘 그들은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박지순은 새로운
위조여권을 그에게 전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는 그들이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박여사, 이제부터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겠더군요.
그게 무슨 말이죠?
경찰이 박여사를 수배했어요. 난 그 수배전단을 입수했어요.
수배전단에 박여사의 사진이 실려 있습니다.
아니, 그럴 리가.......
그녀의 놀라는 목소리가 그의 귀를 때렸다.
아마 잘못 봤을 거예요. 그럴 리가 없어요. 경찰이 어떻게
나를 수배하겠어요.
사실은 사실입니다. 나는 지금 그 수배전단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박여사는 이제부터 밖으로 나와선 안 됩니다. 밖에
나왔다가는 금방 체포될 거예요.
그럼 어떡 하지?
여자는 잔뜩 불안에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박여사는 집에 계십시오. 내가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위치만
가르쳐 주십시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녀는 마지못해 그녀의 집 위치를
가르쳐주었다.
통화를 끝내고 난 박지순은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집에는 그녀와 그녀의 병신 딸만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조금 전에 성당에 다녀오겠다고 하고서 외출했다.
그녀는 너무 초조하고 불안한 나머지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래층 거실 안을 왔다갔다 하면서 밖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의 병신 딸은 방 안에서 음악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 딸을 몹시 미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딸은
그녀와 얼굴을 마주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녀는 한
집에 살고 있으면서도 얼굴을 마주치는 기회가 적었다. 그녀의
앉은뱅이 딸은 두 다리만 불구였지 그 밖의 부분은 정상인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마침내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박지순은 깜짝 놀라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11시 15분이었다. 그녀는 재빨리 인터폰을
집어들었다.
누구십니까?
강입니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대문을 밀고 호리호리한 사내가 들어서는 보였다. 그가 안으로
문을 걸어 잠그는 것을 보고 박지순은 현관으로 나가 문을
열었다.
현관으로 들어선 사내는 고개를 끄덕하면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어서오세요. 춥죠?
그녀는 불안을 감추려는 듯 억지로 웃어보였다.
이윽고 그녀는 사내를 이층 방으로 조심스럽게 안내했다.
집에 또 누가 있습니까?
아래층에 딸 애가 있어요.
사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따님이 있습니까?
그녀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못 태어난 애가 하나 있어요. 하지만 걱정할 필요없어요.
여긴 올라오지 않을 거니까요. 올라올 수도 없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안으로 문을 잠갔다.
사내는 잠자코 주머니에서 수배전단을 꺼내 그녀의 코 앞에
디밀었다.
그녀는 화난 얼굴로 그것을 낚아채서는 뚫어지게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손 끝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것을 지우려는 듯 갑자기 수배전단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가 방 구석으로 던져버렸다.
그들 사이에는 범죄자들 사이의 일반적인 거래 관계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런 관계 외에 그들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라는 이성이 으례
가질 수 있는 그런 관계였다.
벗어요.
남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급하다는 듯 옷을 벗기 시작했다.
여자는 성난 눈으로 남자의 옷 벗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방 한쪽에는 그녀의 작업용 책상이 놓여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침대가 놓여 있었다.
완전히 나체가 된 두 남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선 채로 격렬하게 키스를 하고 난
그녀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남자의 가슴을 떠밀었다.
화장실에 다녀오겠어요.
그녀가 화장실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사내는 벗어
놓은 옷에서 단도를 꺼냈다. 가죽으로 된 칼집을 빼내자 안에서
날이 시퍼런 칼이 나왔다. 그는 그것을 재빨리 침대 매트리스
밑에 찔러넣었다. 여자가 타올로 몸을 닦으면서 욕실에서
나왔다. 몸에서는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두 개의 큼직한
젖가슴이 박처럼 늘어져 있었고, 밑으로 내려가면서 음습한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이번에는 그가 욕실로 들어갔다. 그는 지문을 남기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먼저 소변을 보았다. 그러고 나서 샤워를 할까하다가
성기만 물로 씻었다.
그가 방으로 나왔을 때 여인은 침대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시트 위로 한쪽 다리와 엉덩이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는 그녀의 몸을 애무도 하지 않은 채 시트를 걷어내고 바로
그녀 위에 몸을 실었다.
아이, 급하기도 해라. 천천히 해요.
그녀가 눈을 곱게 흘기면서 남자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나
남자는 기다리지 않고 바로 행위에 들어갔다.
오늘은 왜 이렇게 서두르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그녀는 자세를 고쳐 남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사내는 위에서 여자를 관찰하면서 그녀에게 힘차게 충격을
가해 나갔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점점 뜨거운 신음소리를
내면서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사내의 머리 속은 차갑게 식어
있지만 하체는 그의 의지와는 다르게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는 그것이 그녀와의 마지막 관계라고 생각하면서 온 힘을 다해
그녀를 공격해 나갔다.
그녀는 처음에는 아래층에 있는 딸을 의식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신음소리를 냈지만 나중에는 더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높게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그녀가 팔다리로 그를 휘어감고 몸부림치면서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질렀을 때 사내의 몸도 격렬하게 정점을 향해
치달렸다.
아래층의 자기 방에서 음악을 듣고 있던 앉은뱅이 처녀
장은실은 화장실에 가기 위해 방문을 열었다. 그때 이층
어머니의 방으로부터 이상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집안이
너무도 조용했기 때문에 그것은 너무도 선명하게 아래층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귀를 막고 싶었다. 불구의 몸이라 아직
남자에게 손목 한번 잡혀보지 않은 그녀였지만 20대 처녀의
몸으로 그것이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 신음소리인지 모를 리
없었다. 그것은 분명히 여자가, 그러니까 그녀의 어머니가
토해내는 신음소리였다.
그녀는 두 다리를 쓸 수가 없었기 때문에 움직이려면 두 손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두 손으로 몸을 끌고 다닌다는
것이 몹시 힘들었지만 지금은 많이 숙달되어 웬만한데는 남의
도움없이 별로 힘들이지 않고 갈 수 있다.
그녀는 방안으로 도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소변이 마려웠기 때문에 거실을 가로질로 화장실 쪽으로 몸을
끌고 갔다. 어머니는 계속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아까 초인종 소리가 났었고, 누군가가 들어온 것
같았다. 집에 누가 방문하든 그녀는 절대 밖을 내다보아서는
안된다는 엄명을 어머니로부터 받은 바 있었다. 그것이 병신
딸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어머니의 마음이라고 생각한
은실은 어머니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누가 집에 오든 결코
밖을 내다보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귀까지
닫아둔 것은 아니었다. 누가 방문하는 기척이라도 나면 그녀의
귀는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도 밖을 향해 예민하게 열리는
것이었다. 밖을 향한 그리움으로 그녀의 청각은 보통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예민하게 발달되어 있었다.
화장실로 들어간 그녀는 그 이상한 신음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문을 꼭 닫았다. 그러나 그 소리는 조금 작아졌을 뿐 여전히
그녀의 귓 속으로 자지러지게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신음소리만은 정말로 듣고 싶지 않았다. 그와 함께
아직도 젊은 홀어머니가 육신의 욕망을 주체할 수 없어 남자와
관계를 가지는 것을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고 했다.
이층의 사내는 박지순이 절정에 달했을 때 매트리스 밑으로
손을 넣어 칼을 빼냈다. 그리고 그녀가 머리를 뒤로 젖히며 온
몸에 경련을 일으키는 순간 한 손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
막으면서 목의 왼쪽 부분에다 칼을 깊이 찔러넣었다.
거의 동시에 아래층 화장실 문이 열렸다. 은실은 무엇에
억눌린 듯한 어머니의 비명을 순간적으로 들었다. 그것은
그때까지의 신음소리와는 아주 다른 섬뜩한 느낌이 드는 그런
소리였다. 그녀는 멈칫해서 움직임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그런 소리는 더이상 나지 않았다. 갑자기 모든 것이 정지됐을
때의 무거운 정적이 엄습했다. 그녀는 어머니의 정사를
엿들으려고 한 자신을 질책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호기심을 누를
길이 없어 현관 쪽으로 기어가 보았다.
그녀가 생각했던 대로 현관에는 남자 구두가 한 켤레 놓여
있었다. 남자 구두를 별로 보지 못한 그녀의 눈에는 그것은
유난히도 커보였다. 못볼 것을 보기나 한 듯 그녀는 얼른 몸을
돌렸다. 순간 그녀는 계단 아래에 키가 장대 같이 큰 한 남자가
서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층에서 내려오다가 그녀를
발견하고는 거기에 우뚝 멈춰선 것 같았다. 앉아 있는 그녀의
눈에는 아무튼 그 사내가 장대처럼 커보였다.
사내가 그녀 쪽으로 움직일 기미를 보였다. 사내의 한쪽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방으로 들어갔더라면 사내와 마주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뒤늦게 그런 생각을 한들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거리를
재보았다. 그녀의 방보다는 화장실 쪽이 가까왔다. 화장실로
들어가 안으로 문을 걸어 잠그면 시간을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내가 문을 부수는 동안 창문 밖으로 구원을 청하면 목숨은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화장실
쪽으로 기어갔다. 그녀의 움직임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빨랐다.
그러나 사내는 별로 서두르는 기색도 보이지 않고 그녀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녀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숨이 턱에
차고 빨리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가 그보다도 조금 빨랐다.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는데
성공한 그녀는 재빨리 문을 닫았다. 그리고 손을 위로 뻗어 문을
잠그려고 했다. 그때 그녀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힘이
난폭하게 문을 확 열어젖혔다.
사람 살려요!
그녀의 입에서는 외마디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녀는 두 번
다시 소리를 지를 수 없었다. 남자의 억센 팔이 그녀의 목을
뒤에서 휘어감았고, 잠시 후 그녀의 몸뚱이는 욕조 안에 가득
채워진 물 속으로 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다.
사내는 꾸루룩하는 소리와 함께 거품이 가라앉을 때까지
그녀의 목을 짓누르고 있었다.
두 할머니는 손을 잡은 해 성당을 나섰다. 그 뒤를 형사들이
멀찍이 떨어져 따라왔다.
할머니들은 버스 정류장이 있는 곳까지 손을 잡고 와서는
눈시울을 붉히며 거기서 헤어졌다.
혼자 버스에 오른 이복녀 할머니는 박할머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었다. 이복녀 할머니와 같은
버스에 오른 형사들이 그들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어졌기 때문에
비로소 마음을 조금 놓을 수가 있었다.
이복녀 할머니는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지나서야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에서 내린 그녀는 미행이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걸어갔다. 그녀는
걸음이 몹시 느렸기 때문에 뒤따라가는 형사들은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골목을 한참 걸어가던 그녀는 마침내 막다른 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 집은 아무 특징이 없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이층 양옥이었다. 그녀는 초인종을 눌렀다. 두 번 누른 다음
기다렸지만 응답이 없었다. 문은 안에서 버튼만 누르면 자동으로
열리게 되어 있었다. 그녀가 돌아올 때까지 딸은 집에 있겠다고
했다. 딸이 없더라도 외손녀가 얼마든지 문은 열어줄 수가 있다.
그녀는 다시 초인종을 눌렀다. 초인종을 누르는 횟수가 점점
많아졌다. 그러나 웬일인지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이번에는 주먹으로 철문을 두드려보았다.
집에 아무도 없습니까?
뒤에서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그녀는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웬 남자들 셋이 거기에 서있었다.
우리가 열어 드리겠습니다. 우린 경찰입니다.
경감이 신분증을 꺼내보였고, 그 사이에 형사 두 명은 담벽에
달라붙고 있었다. 그녀가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그들은 재빨리
담을 넘어들어가 대문을 열었다. 그녀는 그들이 단지 문을 열어
주기 위해 그러는 것이 아님을 뒤늦게야 알았지만 그때는 이미
모든 것이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돌아가고 있었다.
집 안으로 먼저 뛰어들어간 형사 두 명은 경감과 함께 뒤늦게
들어서는 할머니를 막아섰다.
죄송하지만 할머니께서는 여기서 좀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다른 데 가시면 안 되고 여기 앉아 계셔야 합니다.
경찰의 말이라면 당연히 들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그녀는
시키는 대로 거실에 있는 소파에 주춤거리며 앉았다.
여자 두 명이 죽어 있습니다.
마형사가 경감의 귀에다 대고 재빨리 속삭였다.
여자가 욕조의 물 속에 거꾸로 쳐박혀 있는 것이 보였는데
위로 치솟은 두 발은 이상하게도 발육이 덜 된 채 뒤틀려
있었다.
이 여자는 그 여자의 딸인 것 같습니다. 그 여자는 이층에
있습니다.
경감은 이층으로 뛰어올라갔다.
방 안에는 피비린내가 가득 차 있었다. 침대는 온통 검붉은
피로 얼룩져 있었고, 그 위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인이 피투성이가 된 채 누워 있었다.
칼로 목을 찔렀습니다.
경감으로 머리 쪽으로 가서 맥을 짚어보았다. 맥이 가늘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 죽지 않았어! 빨리 앰뷸런스를 불러!
경감은 흥분해서 소리쳤다.
마형사가 전화를 걸기위해 뛰어나가자 경감은 박지순을 잡아
흔들었다.
박지순씨? 경찰입니다! 정신 차려요!
귀에다 대고 소리치다가 그는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풀려 있던 동자가 조금 움직이는 것 같았다. 벌려져 있던
입술도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경감은 계속 그녀를 부르며
흔들어댔다. 그리고 그녀의 눈과 입술의 움직임이 처음보다 훨씬
활발해졌을 때 그녀의 입 가까이 귀를 갖다 댔다.
누가 이랬어요?! 범인이 누굽니까?
경감은 애타게 물었다.
그녀의 입술이 크게 움직였다. 그녀가 무엇인가 말하려 무진
애를 쓰고 있음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나는 경찰입니다! 추동림이 당신을 찔렀습니까? 추동림은
어디 있습니까?
......김......명.......
마침내 거의 알아듣기 어려운 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경감은 온 신경을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김명? 그게 뭐예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김......명...... 그.......
사람 이름이에요?! 좀 더 분명히 말해 봐요! 다시 한 번
말해봐요!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는 더이상 아무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천장을 향해 초점없이 열려 있는 두 눈도 멍하니 벌려져
있는 입도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죽었어.
전화를 걸고 올라온 마형사에게 경감은 침통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끔찍하고 추한 죽음이야. 죽기 전에 이름을 하나 말했어.
김명규인지 김명기인지 분명하지가 않았어. 두 가지 이름을
조사해 봐야겠어.
다른 말은 하지 않았습니까?
경감은 머리를 흔들다가 피에 젖은 시트로 사체의 얼굴을
덮었다.
컴퓨터로 김명규와 김명기를 뽑아볼까요?
경감은 거기에 대답하지 않은 채 담배에 불을 붙였다.
두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전국에 수천 명이나 될 텐데요. 그
사람들을 일일이 조사하다가는.......
그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좋은 방법이 없을까?
출국자 명단을 조사해 보면 어떨까요? 추동림이 위조여권을
가지고 출국했다면.......
경감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는 창문을 열어젖혔다.
좋은 생각이야. 추동림이 부산집에 마지막으로 전화를 건게
언제였지?
마형사는 수첩을 꺼내 거기 적어둔 기록을 들여다보았다.
1월 15일 낮 12시 45분경이었습니다.
그 이후에 출국한 사람들 가운데 김명규와 김명기라는 이름을
찾아봐. 몇 사람 데리고 가서 철저히 조사해 봐.
마형사가 서둘러 밖으로 사라진 뒤에도 경감은 그 방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창문을 열어두었기 때문에 방안에 차있던 피비린내는 어느
정도 가신 것 같았다. 경감은 창문을 닫고 아래층 거실로
내려왔다.
그때까지도 이복녀 할머니는 소파에 불안한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경감은 그녀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를 몰라
곤혹스런 표정으로 서있다가 엉거주춤 서있는 불독처럼 생긴
이종창 형사에게 눈짓을 보냈다.
공항에 나간 마형사로부터 박지순의 집으로 전화가 걸려온
것은 오후3시경이었다.
15일 12시 45분 이후에 출국한 명단 가운데 김명기라는
이름을 하나 찾아냈습니다!
한 사람 뿐이야?
네, 전 항공사의 전노선을 조사했는데 김명기 한
명뿐이었습니다. 김명규라는 이름은 없었습니다. 김명기는 15일
20시 35분발 에어 프랑스 A505기편으로 출국했습니다.
행선지는?
프랑스 파리입니다.
파리?
네, 파리입니다.
김명기의 주소는 어디야?
부산입니다. 출입국 신고서에 적힌 것을 보면 명진상사라는
회사의 대표로 되어 있습니다.
주소를 불러봐.
경감은 마형사가 불러주는 김명기의 인적사항을 적은 다음
전화를 끊었다.
조금 후 그는 부산의 추동림 집에 잠복하고 있는 부하
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별일 없나?
남화씨를 조금 전에 병원에 입원시켰습니다. 너무 먹지 않고
헛소리만 하고 있습니다.
큰일이군. 그건 그렇고 지금 바로 어디좀 다녀와야겠어.
김명기라는 사람을 찾아가봐. 집은 Y동에 있는데, 그 사람에
대한 것을 자세히 알아봐.
경감은 부하에게 김명기의 주소를 일러주고 나서 서둘러
수사본부로 향했다.
수사본부에 돌아가 조금 기다리고 있자 공항에 나갔던
마형사가 나타났다.
그는 김명기에 대한 수사 자료들을 내놓았다. 거기에는 1월
15일 20시 35분에 출발한 파리행 에어 프랑스 A505기에 탑승한
탑승자들의 명단도 들어 있었다.
탑승자는 모두 2백 57명이었습니다. 도쿄를 거쳐가기 때문에
도쿄에서 또 손님을 태웠을 거라고 합니다.
탑승자 명단은 모두 컴퓨터 단말기로 찍었기 때문에 영어로
나와 있었다. 그 명단에는 분명히 KIM MYUNG-KI 라는 이름이
끼어 있었다.
경감은 명단 속에서 한국인 이름들을 모두 체크해 보았다.
한국인 탑승자는 김명기를 포함해서 모두 54명이었다.
김명기가 추동림이라면...... 동행이 있을 가능성이 있어.
53명 가운데 그런 놈이 있는 알아봐야 해.
그는 출입국 신고서에 적혀 있는 여권번호에 볼펜으로 밑줄을
그었다.
외무부 여권과에 이 번호를 알아봐, 지금 즉시! 이 전화는
진짜인가?
그는 출입국 신고서에 적혀 있는 김명기의 자택 전화번호를
가리켰다.
제가 걸어 보았는데 그 전화번호는 불통이었습니다.
오갑자 순경이 급히 들어오더니 경감 앞에 종이를 디밀었다.
그것은 컴퓨터 단말기에서 뽑아낸 김명기에 관한
인적사항이었다.
출입국 신고서에 적혀 있는 김명기의 주민등록번호를
컴퓨터에 한 번 넣어봤습니다. 하고 마형사가 말했다.
경감은 출입국 신고서에 적혀 있는 김명기의 인적사항과
컴퓨터로 찾아낸 김명기의 인적사항을 비교해 보았다. 그 두
가지는 서로 일치했다.
마형사는 김명기의 여권번호를 알아보기 위해 외무부 여권과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직원은 10분쯤 후에 다시 전화를 걸어달라고
말했다.
괜히 헛짚은 게 아닐까?
경감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자리를 차고 일어나 초조한
모습으로 실내를 왔다갔다 했다. 그가 움직임을 멈춘 것은 10분
후 마형사가 외무부 여권과로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였다.
마형사는 여권과 직원과 통화하고 나서 경감에게 통화내용을
보고했다.
그 여권번호는 김명기의 여권번호가 맞답니다.
복수여권이랍니다.
경감이 실망한 표정으로 다시 실내를 서성거리고 있는데
부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의 부하가 걸어온 전화였다.
어떻게 됐어?
경감은 다급하게 물었다.
김명기라는 사람은 이미 사망했습니다.
뭐라고?!
지난 해 12월 26일 새벽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해운대에서 사고를 당했는데 당시 사고를 낸 차는 도망쳤고,
범인은 아직 체포되지 않았답니다.
경감은 수화기를 귀에 댄 채 의자 위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그 사람 출국할 예정 아니었나?
미국에 갔다가 지난 11월 중순경에 귀국했었답니다. 오파상을
하기 때문에 수시로 외국에 나가곤 하는데, 여권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생전에 그 사람은 주민등록증은 물론 여권을 가지고
다녔는데, 부인이 나중에 유류품을 조사해 보니까 여권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죽기 전에 여권을 잃어버렸는지, 아니면
사고를 당한 후에 누가 그것을 빼내갔는지 확실히
모르겠답니다.
사고를 당한 지점이 정확히 어디야?
해운대 P호텔 바로 옆입니다.
거기라면 추동림의 집에서 가까운 곳이라고 경감은 얼핏
생각했다.
그 사람에 관한 자세한 인적사항과 그 사람의 사진을
보내줘.
전화를 끊고 난 경감은 잠시 혼란스러운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생각에 잠겼다. 마형사가 궁금한 표정으로 경감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김명기란 사람은 이미 죽었다는 거야. 지난 12월 26일에.
경감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추동림이 김명기의 이름을 도용해서 출국한 걸까요?
그랬을 가능성이 커. 김명기는 뺑소니 차에 치어 죽었는데,
복수여권을 가지고 다녔다는 거야. 그런데 그것이 없어졌다는
거야. 박지순 같은 전문가가 그 여권에 조금 손질만 가하면 다른
사람이 충분히 이용할 수가 있어.
그럼 추동림이 그 여권을 가지고 나갔을까요?
더 확인해 봐야겠지만 그랬을 가능성이 커. 만일 추동림이
김명기로 위장해서 이미 출국했다면 그는 박여인 살해범이
아니야. 박여인과 그 딸을 살해한 자는 따로 있어.
추동림이 이미 출국했을 가능성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확신으로 굳어갔다.
경감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었다. 생각 같아서는
그 자신이 추동림을 쫓아 파리까지 가보고 싶었다. 파리 뿐
아니라 지구 끝까지 따라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으로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경감은 얼른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5시가
막지나고 있었다.
그 비행기의 파리 도착시간을 알아봐!
마형사가 김포 공항으로 전화를 걸었다.
이윽고 전화를 걸고 난 그는 실망한 표정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조금 늦었습니다. 도착시간은 오늘 오후 4시였답니다. 그곳
시간으로는 아침 8시입니다.
한 시간 전에 도착했단 말이지.
경감은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난 포기하지 않을 거야. 포기하기에는 아직 일러.
위조여권을 알아냈으니까 그걸 추적하면 그를 어디든지 따라가
잡을 수가 있어. 세계는 좁아.
파리에 직접 가실 겁니까?
그 물음에 경감은 표정이 어두워지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다는 거 알면서 왜그래. 외국 출장을
보낼 만큼 우리 경찰이 부자라면 얼마나 좋겠나.
그럼 어떻게 추적하시겠다는 겁니까?
인터폴에 부탁할 수밖에 없겠지.
인터폴이 성의있게 추적해 줄까요?
국제 마약 관계라고 하면 신경을 써줄 거야.
인터폴(국제형사기구) 본부는 파리에 있다. 그 파리 본부에는
경감과 친분이 있는 간부가 한 명 있었다.
경감이 길베르 살레라는 이름을 가진 그 프랑스인 남자와
교분을 가지기는 몇년 전부터였다. 마약 밀수를 방지하기 위해
해마다 열리는 국제형사회의에 참석했다가 알게된 것인데
그때부터 그들은 그 회의가 열릴 때마다 만나게 되었고, 그러던
중 개인적으로 친분이 두터워지게 된 것은 2년 전 그 회의가
서울에서 열렸을 때였다.
그 회의는 어느 한 곳에서만 열리는 것이 아니고 해마다 세계
각국에서 돌아가면서 열리는데, 2년 전에는 서울에서 열리게
되어 살레도 참석했던 것이다.
살레는 도자기에 대해 깊은 안목을 가지고 있었고, 도자기를
모으는 것이 취미였다. 그러지 않아도 한국에 와서 도자기를
구경하는 것이 소원이었다는 그는 처음부터 회의보다는 한국
도자기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대충 회의가 끝나자 경감은 직접 도자기를 굽는 유명한
도요지 몇 군데로 살레를 안내했고, 박물관에 데리고 가서
국보급 도자기를 보여주기도 했고, 골동품 가게에서 살레가
탐내는 비싼 도자기를 싼 값에 구입할 수 있게 흥정을 벌이기도
했다.
살레는 일 주일 후 떠났는데 떠나면서 경감의 친절에 몹시
고마와했고, 그것을 계기로 그들은 가까운 친분 관계를 맺게
되었던 것이다.
경감은 망설이다가 결심한 듯 수첩을 펴놓고 거기에 적혀있는
파리 인터폴 본부 전화번호를 들여다보면서 다이얼을 천천이
돌렸다. 번호를 모두 돌리고 나자 다르르 다르르 하고 신호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찰칵하고 신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재빠른 프랑스 말이 튀어나왔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여자였다. 경감은 프랑스 말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영어로 살레 부장을 찾았다.
부장님은 출장가셨습니다.
여자는 프랑스 말 이상으로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
언제 돌아오십니까?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럼 연락은 가능하겠지요?
네, 수시로 전화가 오니까요.
여긴 서울입니다. 서울에서 노라는 사람이 급한 일로 전화를
걸었다고 전해 주시오.
미스터 노오, 오우케이.
장난치듯 말하고 여자는 전화를 끊었다.
그는 일어서서 바지에 손을 찌른 채 실내를 왔다갔다 했다.
그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던 마형사가
김명기라는 사람의 죽음을 캐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하고 물었다.
경감은 멈춰서서 마형사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은 마형사의
생각이 무엇인지 묻고 있었다.
출국한 자가 추동림이 맞다면...... 그는 왜 하필 죽은
김명기의 여권을 변조해서 출국했을까요? 우연히 김명기의
여권을 입수했다기보다는 의도적으로 그것을 입수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것으로 김명기가 사고를 당한
지점이 추동림의 집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라는 사실입니다.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너무 모든 것이 맞아 떨어지고
있습니다. 다시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추동림은 그의 집 부근에서
자동차 사고로 죽은 김명기의 여권을 변조해서 출국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여권을 손에 넣었을까요? 경찰은
아직 김명기를 치어죽이고 도망친 자를 검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여권을 손에 넣은 자가 바로 김명기를 치어죽인
범인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추동림이 김명기를 죽인 범인이란 말인가?
경감이 무거운 음성으로 물었다. 마형사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가능성이 많은 인물이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가 제1의 용의자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경감도 마형사의 말에는 동감이었기 때문에 그는 지체하지
않고 부산에 대기하고 있는 수사진에 전화를 걸어 김명기의
죽음과 추동림과의 관계를 상세히 조사해 보라고 지시했다.
1월 16일 아침 파리 드골 공항.
공항 터미널 빌딩의 대형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하늘은 짙은
회색빛이었고 그 아래로 보이는 것들은 온통 흰 눈에 덮여
있었다. 눈은 내리지 않고 있었다.
추동림은 홀 한쪽에 있는 스낵코너의 탁자 위에 성경책과 커피
한 잔을 올려놓은 채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앉아 있었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는 박과 홍이 역시 커피잔을 앞에 놓고 앉아
있었다.
동림은 홀 중앙에 세워져 있는 전자시계를 본 다음 손목시계를
현지 시간으로 고쳤다. 시간은 9시 10분이었다.
공항에 도착하여 입국심사를 받은 다음 짐을 찾아들고
메인홀로 나오자마자 그는 즉시 암호명 검은 장미에게 전화를
걸었었다. 검은 장미는 그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여자였다. 목소리만 듣고도 상대방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9시 30분 경에 메인홀 오른쪽에 있는 스낵코너에서 만나기로
해요. 성경책 가져오셨나요?
네, 가져왔습니다.
그건 표지가 무슨 색깔이요?
검정입니다.
그걸 탁자 위에 올려놓고 기다리세요. 난 표지가 빨간
성경책을 가지고 나가겠어요. 내가 가지 않더라도 빨간 표지의
성경책을 가지고 간 사람이면 안심하고 만나셔도 돼요. 일행이
있죠?
두 사람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여자의 목소리는 차가왔고 매우 사무적이었다.
동림은 식어버린 커피잔을 내려다보았다. 웨이터가 다가오자
그는 그것을 가져가라고 말했다.
박은 비스듬히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홍은 창백한
표정으로 계속 동림 쪽을 살피고 있었다.
파리에 올 때 그들은 교대로 번갈아가며 동림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스무 시간 가까이 함께 있는 동안 어떻게 훈련을
받았는지 몰라도 필요한 말 이외에는 일절 하지 않았다. 동림이
무엇인가 알아내려고 여러 차례 말을 걸어 보았지만 그들은 그의
물음에 고개를 내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들은 그야말로
잘 훈련된 사냥개였다.
동림은 시선을 돌려 회색과 흰색으로 대비되는 바깥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추운지 어깨를 웅크린 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고, 차들은 빙판길 위에서 굼벵이처럼 느리게
굴러가고 있었다. 회색 하늘 위로는 계속 비행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파리에 다시 오게되리라고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었다. 그리고 그곳은 그에게 있어서 다시는 오고 싶지 않은
아픈 추억이 있는, 그래서 잊고 싶은 곳이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의사와는 달리 지금 파리에 와 있었다.
9시 30분이 됐을 때 동림은 강한 시선을 느끼고 바로 옆테이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비어 있던 그 테이블에는 어느 새 검은
옷차림의 여인이 한 명 앉아 있었다. 그녀는 모든 것이 검은 색
일색이었다. 코트도 스커트도 스타킹도 백도 구두도 모두 검은
색이었다. 검은 머리를 가지런하게 빗어 뒤로 한데 묶고 있었고,
얼굴에는 검은 테의 둥근 안경을 끼고 있었다. 약간 마르고
날카로와 보이는 얼굴은 병자처럼 누르스름했다. 그녀는 동양계
같았고, 여학교 기숙사의 사감이라고 하면 어울릴 것 같은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마흔 안팎으로 보이는 그녀는 날카로운 눈으로 동림을
쏘아보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얼른 시선을 밑으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백속에서 서둘러 무엇인가 꺼내 들었다. 그것은 표지가
빨간 두툼한 책이었다. 그녀는 보라는 듯이 그것을 펴들고
들여다보았다. 표지에 있는 제호가 뚜렷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The Testament(신약성서)라는 영문 글자였다.
잠시 후 그녀는 성경책을 내려놓고 웨이터에게 커피를
주문했다. 그러고 나서 동림을 다시 바라보았는데 이번에는
처음과 달리 조금 부드러운 눈빛이었다.
그때 한 남자가 검은 옷차림의 여인 곁에 다가와 앉았다. 잿빛
머리의 서양인이었다. 그는 검은 가죽점퍼를 입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동림은 거칠고 황량한 들판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그의 얼굴은 삭막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던 것이다.
검은 옷의 여인이 잿빛머리에게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았는데
말소리가 너무 작았기 때문에 동림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잿빛머리가 무표정하게 동림을 바라보았다. 동림은 그의 눈이
꿈꾸는 듯한 눈이라고 생각했다.
박과 홍이 눈치를 채고 긴장하는 것 같았다. 잿빛머리는
여유있게 시가에 불을 당겼다. 여인은 백 속에 성경책을
집어넣었다.
이윽고 여인과 잿빛머리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감처럼
생긴 여인은 잿빛머리의 팔짱을 끼더니 동림의 곁을 스치듯이
지나갔다.
동림도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것을 보고 박과 홍도
움직였다. 동림은 슈트케이스를 왼손에 들었다. 자기도 모르게
그는 그것을 꽉 움켜쥐었다.
터미널 빌딩 밖으로 두 사람이 나가는 것이 보였다. 동림은
서두르지 않고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검은 옷차림의 여인과 잿빛머리의 사나이는 길을 건너
주차장쪽으로 걸어갔다. 주차장에는 많은 차들이 주차해 있었다.
동림도 길을 건너갔다. 조금 떨어져서 박과 홍도 길을 건너갔다.
그들은 조금 허둥대는 것 같았다.
저것들이 틀림없나?
박이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동림은 대답하지 않고 잠자코 걸어갔다.
이봐, 저 사람들이 맞는가 말이야?
바싹 따라붙으며 박이 다시 한 번 물었다. 동림은 홱 돌아서서
그들을 노려보았다.
귀가 먹었나?
홍이 험악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동림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나도 처음 보는 사람들이야. 나는 시키는 대로 하고 있을
뿐이야. 너희들이 모르는 건 나도 몰라.
하고 말했다.
동림이 갑자기 거세게 나왔기 때문인지 그들은 더이상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검은 옷차림과 잿빛머리는 주차해 있는 차량들 사이로
이리저리 걸어가다가 노란색 승용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앞자리에 앉았다. 여인이 창문을 열었다.
빨리 타세요!
동림이 가까이 다가갔을 때 여인이 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홍이 먼저 차 안으로 들어갔다. 동림이 두번째로 차에 올랐다.
마지막으로 박이 탔다.
잿빛머리가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그는 이미 엔진을 걸어놓고
있었다.
잠깐! 당신의 암호는?
동림은 여자 쪽을 쳐다보며 영어로 말했다.
여인은 힐끗 뒤로 돌아보고 나서 입을 열었다.
검은 장미. 당신은?
황금의 초생달.......
추동림이 응답하자 검은 옷차림의 여인은 잿빛머리의 사내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러자 잿빛머리는 차를 앞으로
전진시켰다.
공항을 빠져나온 차는 이윽고 고속도로로 접어들어 시내
쪽으로 달려갔다. 눈이 쌓여 얼어붙는 바람에 고속도로는 빙판
길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잿빛머리는 거칠게 차를 몰아갔다.
빙판길 위로 조심스럽게 굴러가는 차들이 옆으로 휙휙
쳐져나갔다. 그 바람에 차 안에 있는 사람들은 긴장한 모습으로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차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깔려 있었고 아무도 그 침묵을
깨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앞 자리의 여인은 여유를 보이면서 담배를 피웠다. 그녀는
뒤쪽에 앉아 있는 남자들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뒤에 앉아
있는 남자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문 채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잿빛머리가 갑자기 음악을 틀었다. 볼륨을 높이는 바람에 차
안은 째지는 듯한 음악소리로 가득 찼다. 그것은 미국 가수가
부르는 템포가 몹시 빠른 팝송이었다. 차 안의 사람들은 더욱
불안한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던 뒷자리의 남자들은 몸을 움직거리며 불안한 듯 서로를
쳐다보았다.
천천히 좀 가자고 하시오.
마침내 홍이 여인의 어깨를 건드리며 말했다. 여인은 음악을
끄고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뭐라고 그랬어요?
하고 한국말로 물었다. 홍은 되풀이해서 말했다. 거기에
덧붙여 박이 이렇게 말했다.
그런 식으로 달리다간 오줌 싸겠어요.
여인은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보이며 눈을 흘겼다.
그런 상스러운 말은 한국에서나 하세요. 여기는 파리란
말이에요.
파리라고 다를 게 있나요?
박이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여자가 발끈했다.
그런 식으로 나가면 차에서 내리게 하겠어요. 얌전히들 앉아
있어요.
그 말에 남자들은 잠잠해졌다.
여인은 잿빛머리에게 프랑스말로 뭐라고 재빨리 지껄였다.
그러나 잿빛머리는 그녀의 말을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여전히 똑같은 속도로 차를 몰아갔다. 그가
차의 속도를 줄인 것은 멀리에 에펠탑의 철탑이 보이면서 차들이
밀리기 시작했을 때였다.
차가 밀리고 있었기 때문에 시내로 진입하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얼마 후 차는 에펠탑 옆을 지나 세느강 가를 달려갔다.
공항을 출발한 지 한 시간 남짓 지나 그들이 탄 차는
차량통행이 별로 많지 않은 한적한 길가에 서있는 조그만 호텔
앞에 멈춰섰다.
이미 예약을 해놓은 듯 검은 장미는 프런트에서 열쇠를 받아
들더니 한국인들을 방으로 안내했다.
그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갔다.
이윽고 동림과 그의 감시원들은 한 방으로 들어갔다. 그들의
뒤를 잿빛이 따라 들어와 안으로 문을 걸어 잠궜다.
검은 장미는 방으로 들어오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잿빛은 마치 벙어리처럼 행세했다. 그러나, 귀머거리는 아닌
것 같았다.
한국인들은 그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그가 들은 체도 하지
않자 묻는 것을 그만두었다.
한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말이 없자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답답하고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박과 홍은 불안한 표정으로 잿빛을 흘끔흘끔 쳐다보곤 했다.
그러나 잿빛머리는 텔레비전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텔레비전 화면에는 헝클어진 금발 머리 여가수의
얼굴이 가득 나타나 있었다.
동림은 졸음이 밀려왔다. 그 상황에서 졸음이 온다는 것은
조금 이상한 일이었다. 극도의 긴장감과 피로를 이겨내지 못해
그런 것 같았다.
그는 소파에 몸을 묻은 채 졸고 있으면서도 아들 생각에
가슴이 미어지는 듯 했다. 아내에 대한 생각은 아들때문에
저만치 한쪽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는 아들이 납치당했다는 사실이 여기서는 아무 문제도
되지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가 지금 있는
곳은 한국이 아닌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파리였다. 그 사실에
그는 마치 자신이 절해고도에 홀로 유배되어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린 아들이 납치되었다는 사실은 이제 오로지 그 자신의 혼자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는 그래도 경찰이 그 문제에
관심을 가져주었고, 그 나름대로 현재 수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파리 경찰이 그 문제에 관심을 가져줄 리는 만에 하나도
없을 것이다. 만일 그런 문제를 이야기해 주고 도움을 청하면
오히려 미친 놈으로 취급할 것이다.
그는 실내에 있는 사람들을 한 명씩 찬찬히 뜯어보았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들 가운데 그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그 얼굴들은 하나같이 동물적인 욕망에 충실하려는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그의 눈에는 동물의 얼굴로
보였다. 그는 그를 지키고 있는 동물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월남의 정글에서 그를 억류하고 고문했던 자들도 하나같이
동물들이었다. 그때 그는 그들을 상대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
그들을 살해하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래서 그들을
살해함으로써 그곳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잿빛머리가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그는 곧 수화기를 내려놓고 동림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함께
나가자는 뜻으로 출입문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동림이 일어서자 박과 홍도 따라 일어섰다. 동림이
슈트케이스를 집어들자 세 명이 그것을 쳐다보았다.
잿빛머리가 먼저 밖으로 나갔다. 동림이 그 뒤를 따랐고
뒤이어 박과 홍이 나왔다.
잿빛머리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비상계단을 통해
3층으로 내려갔다. 이윽고 그는 308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차임벨을 누르지 않고 문을 노크했다. 일정하게 세 번
반복해서 노크하자 문이 열렸다.
잿빛머리는 먼저 동림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박과 홍이
따라 들어가려 하자 그들을 제지했다. 박이 눈을 부라리며 그를
밀어 젖히는 사이 홍이 안으로 뛰어들려고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잿빛머리의 손이 그의 목덜미를 움켜잡고 낚아챘다. 그러자
박이 그 육중한 몸으로 잿빛머리를 다시 밀어붙였고, 몇 번
몸싸움이 있은 다음 잿빛머리가 권총을 빼드는 바람에
조용해졌다. 잿빛머리는 거기서 기다리라는 뜻으로 손가락으로
복도를 가리켜보였다. 박과 홍은 문 앞에 버티고 서서 분을
이기지 못해 씩씩거렸다.
동림이 방 안으로 들어섰을 때 거기에는 검은 옷차림의 여인과
함께 동양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또 한 사람 있었다. 그는 말쑥한
차림에 차가운 인상이었다. 그는 금테 안경을 끼고 있었고, 기름
바른 머리를 깨끗이 빗어넘기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하고 그가 영어로 말했다. 동림은 잠자코 그가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가방을 이리 주세요.
검은 장미가 슈트케이스를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동림은
주저하다가 그것을 그녀에게 넘겼다. 그녀는 가방을 열고 안에
들어있는 것들을 들여보다가 그것들을 모두 밖으로 내놓았다.
그런 다음 탁자 밑에서 검은 색의 슈트케이스를 꺼내 그것을
열었다. 그것은 비어 있었다. 여인은 꺼내놓은 물건들을 그 안에
집어넣고서 가방을 동림에게 넘겼다.
금테 안경은 동림이 서울서부터 가지고온 밤색 슈트케이스에
귀를 댄 채 그 안팎을 손으로 두드려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동림을 한 번 쳐다보고 나서 주머니에서 필통처럼
생긴 플래스틱 통을 꺼냈다. 뚜껑을 열자 정교하게 생긴 각종
연장들이 나왔다. 그 중에서 그는 미세하게 생긴 톱날이
동그랗게 달려 있는 연장을 꺼냈다. 그것의 손잡이 끝에는 전기
코드가 달려 있었다. 그는 코드에 달려 있는 플러그를 벽에
부착되어 있는 소켓에 꽂았다. 스위치를 누르자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톱날이 빠른 속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금테 안경은
그것을 슈트케이스의 내벽에다 조심스럽게 갖다댔다. 그것이
닿자마자 플래스틱 내벽은 금방 갈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내벽 안쪽에 숨겨져 있는 물건이 다칠까봐 매우
조심하면서 아주 정교하게 내벽을 잘라나갔다. 이윽고 내벽이
모두 잘리자 그것을 드러냈다. 안쪽에 포장지에 싸인 것이
들어있었다. 포장지를 걷어내자 하얀 분말이 들어 있는
비닐봉지들이 나왔다. 그는 그것들을 모두 가죽가방에다 옮겨
담았다.
수고했습니다. 당신의 역할은 모두 끝났습니다.
금테 안경이 시가에 불을 붙이면서 말했다. 동림은 묵묵히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 방 한쪽 벽에는 문이 달려 있었다. 그것은 옆방과 통하게
되어 있는 문이었다. 금테 안경이 뒤로 손을 뻗어 그 문을
두드리자 곧 문이 열리면서 두 사람이 건너왔다. 서른 안팎으로
보이는 동양계의 남자들이었다. 금테 안경이 가죽가방을 구두
끝으로 건드리며 중국말로 뭐라고 말하자 그들은 잠자코 그것을
들고 옆방으로 도로 건너가 문을 닫았다.
이제 내 아들을 돌려주시오.
동림이 영어로 말하자 금테 안경과 검은 장미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내 아들을 돌려달란 말이요.
동림은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말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금테 안경이 검은장미를 돌아보며 물었다. 검은 장미는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동림은 갑자기 눈 앞이 캄캄해져왔다.
그들은 어디 있지? 나하고 함께 온 사람들 말이오.
금테 안경이 눈짓을 하자 검은 장미는 출입문 쪽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박과 홍, 그리고 잿빛머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동림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들 쪽으로 다가섰다.
나는 약속대로 물건을 운반해 줬어. 이제 내 아들을 돌려 줄
차례야. 서울에 전화를 걸어 내가 약속을 지켰으니 내 아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전해줘.
그 말에 홍이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나는 그런 전화를 걸 수 없어.
홍은 냉담하게 말했다.
뭐라고?
동림은 눈을 부릅뜨고 홍과 박을 노려보았다. 홍은 차가운
눈으로 동림을 마주 쳐다보았다.
나는 그런 전화를 걸 자격이 없어. 그건 당신이 알아서 할
일이야. 우리는 그런 문제에 관심 없어.
동림은 뚫어지게 상대방을 응시했다. 한참 동안 그러고 있자
상대방의 모습은 사라지고 그대신 시야가 뿌우옇게 흐려왔다.
그는 온몸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면서 비틀거렸다. 그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가까스로 버티면서 한 손을 홍의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안돼.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나는 약속을 지켰어. 빨리
그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약속을 지켰으니까 내 아들을 지금
당장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전화를 걸어.
우리는 전화번호를 몰라. 우리가 연락을 취할 수는 없어.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어.
언제 연락이 오지?
아마 오늘중으로 올 거야.
어디로 온다는 거야?
우리가 어디로 가든 그는 우리가 있는 곳을 알고 있어.
그러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동림은 바짝 타들어간 입술을 깨물었다. 홍이 그를 밀어내고
나서 다시 말했다.
그런데 당신은 일이 다 끝났다고 생각해서는 안 돼.
무슨 말이지?
동림은 숨을 죽이고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당신은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단 말이야.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는 약속을 다 지켰어. 더이상
내가 해야 할 일은 없어.
그렇지 않아.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어.
동림은 경직된 표정으로 홍과 박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게 뭐지?
그는 한참 지나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를 죽이는 일이야.
박이 내뱉듯이 말했다.
당신이 그 방면에 솜씨가 탁월하다는 거...... 우리는 알고
있어요.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검은 옷차림의 여인이 말했다.
동림은 너무 기막힌 나머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했지만 이미 너무 늦어 있었다.
방 안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그를 측은하게 동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냉담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당신의 그 탁월한 솜씨를 빌리고 싶어요.
여자가 다시 말했다. 동림은 머리를 흔들었다.
당신들은 약속을 어기고 있군.
동림은 허탈에 빠져 중얼거렸다.
약속 같은 건 들먹이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당신은 이미
우리 조직에 들어와 있다는 걸 알아야 해요. 우리 일을 해줬다는
건 바로 우리 조직에 들어왔다는 걸 의미해요.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약속이 아니라 명령에 복종해야 해요.
내 아들만 돌려줘. 아들만 돌려주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어.
충혈된 눈에 물기가 번지는 것 같더니, 갑자기 그는
발작적으로 홍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내 아들 내놔! 내 아들 어딨어? 어디 있느냐 말이야!
그가 온힘을 다 해 멱살을 움켜쥐고 흔들어댔지만 홍은 그대로
잠자코 서있었다. 그러자 박이 뒤에서 동림을 떼어냈다. 그는
동림의 덜미를 홱 낚아채 그를 동댕이쳤다. 동림은 한바퀴 굴러
벽에 가서 머리를 세게 부딪쳤다.
그래 봐야 소용없어. 애를 찾고 싶으면 시키는 대로 해!
박이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동림은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검은 장미가 전화를 받았다.
......아, 네네...... 무사히 끝났습니다...... 아무 일
없었습니다...... 여기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야기했습니다...... 네, 기다리십시오.
검은 옷차림의 여인은 전화기를 동림에게 건넸다.
받아봐요.
동림은 그것이 누구한테서 걸려온 전화인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는 갑자기 그것을 받기가 두려웠다. 그러나 그러서는
그것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또한 그자와
이야기를 나눌 필요도 있었다.
생각했던 대로 상대는 미스터 Y였다. 그는 가래가 끓는 듯한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수고했어.
약속대로 내 아들을 돌려줘.
돌려주고 말고, 당신 아들은 아주 잘 있지. 그런데 한 가지만
더 처리해 줘야겠어. 아주 간단한 일이야. 한국에서 해야 할
일이 아니고 거기서 처리해도 되는 일이야.
약속대로 내 아들을 돌려줘. 약속은 약속이야. 약속을 어길
생각은 하지 마.
약속이란 얼마든지 변경될 수가 있는 거야. 거기에 너무
연연하지 마, 이 바보 같은 놈아.
약속대로 내 아들을 돌려줘. 그렇게 해주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어. 제발 돌려줘. 제발 부탁이야.
그는 미칠 것 같은 심정으로 전화에 매달렸다.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피를 말리는 웃음소리였다.
한 가지만 더 처리해 줘. 그러면 아이를 돌려주지. 무슨
일인지는 검은 장미가 말해줄 거야.
그렇게 말한 다음 상대방은 전화를 끊었다.
1월 16일 저녁 부산 광복동.
부산 광복동에 자리잡고 있는 남화 의상실은 가게 주인집이
풍지박산 됐는데도 열려 있었다. 그러나 그전처럼 활기도 없었고
물건이 많이 걸려 있지도 않았다. 가게 문을 열어놓은 것은
가게를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쇼윈도에는
가게정리 반액세일 같은 종이쪽지가 붙어 있었다.
가게에는 아가씨 혼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녀 역시
남화의 남편인 추동림이 살인범으로 전국에 지명수배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다른 종업원들은 모두 가게를
떠났지만 그녀만은 끝까지 떠나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녀는
남화가 나가라고 하기 전까지는 그대로 남아 가게를 지키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8시가 지났을 때 거친 인상의 남자 두 명이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 동안 가게에 여러 차례 왔었던 형사들이었다. 처음
형사들이 가게에 들이닥쳤을 때 그녀는 무서운 나머지 울기까지
했었지만 지금은 별로 그런 느낌이 들지 않고 담담한 마음으로
그들을 맞을 수가 있었다. 그래도 손님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들에게 커피를 내놓았다.
커피를 마시고 난 그들은 남화가 타고 다니던 주황색 G카에
대해 집중적으로 캐묻기 시작했다.
그 차는 남화씨가 주로 타고 다녔다고 했지?
네, 그래요.
이수희는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출근할 때 그 차를 몰고 오나?
네, 직접 몰고 오세요.
그런 다음에는?
저쪽에다 주차시켜 놨다가 퇴근할 때 몰고 가셔요.
매일 그랬나요?
눈이 가늘게 찢어진 형사가 존대어를 사용해서 물었다.
네, 일요일만 빼고는 매일 그러셨어요.
지난 12월 25일 밤에도 직접 차를 몰고 갔겠군요?
이수희는 잠시 생각해 보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크리스마스날 밤에도 직접 운전하고 가셨어요.
틀림없어?
네, 틀림없어요.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가족들하고 함께
외식을 하고 조금 일찍 들어가셨기 때문에 기억이 나요. 그
다음날, 그러니까 크리스마스날 밤에는 저희들 하고 함께 저
카페에서 가서 식사를 했어요.
그녀는 골목 맞은편 건물 2층에 자리잡고 있는 카페 가로등을
손으로 가리켰다.
매월 말일이 봉급날인데 연말이라고 해서 지난 12월에는
25일에 월급을 주셨어요. 그리고 가로등에 가서 양식을
사주셨어요. 샴페인도 터뜨렸고요.
남화씨는 그날 밤에 몇 시에 퇴근했나?
목이 굵은 형사가 물었다.
언제나처럼 자정께에 퇴근하셨어요.
언제나 자정에 퇴근했나요?
눈이 가늘게 찢어진 형사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네, 사모님은 항사 자정 전후해서 퇴근하셨어요.
혼자 차를 타고 갔나요?
네, 혼자 가셨어요.
형사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이 굵은 형사가 먼저 밖으로 빠져나가고, 눈이 가늘게
찢어진 형사도 뒤따라 나가다가 돌아섰다.
그 다음 날은 어땠나요? 사장님은 그 다음 날에도 정상적으로
출근했나요?
이수희는 생각해 보고 나서 대답했다.
네, 사모님은 정상적으로 출근하셨어요.
왜 사장님이라 부르지 않고 사모님이라고 부르지요?
사모님은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걸 싫어하세요.
형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밖으로 사라졌다.
형사들은 택시를 잡아탔다.
해운대로 갑시다.
목이 굵은 형사가 말했다.
광복동에서 해운대까지 논스톱으로 달리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요?
택시가 부두길로 접어들었을 때 눈이 가늘게 찢어진 형사가
물었다.
40분 정도 걸릴 겁니다. 죽자사자 달리면 30분 정도
걸리겠지만.......
나이든 운전사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출발한 지 50분 정도 걸려 그들은 해운대 P호텔 옆에
도착했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9시 40분이야.
하고 목이 굵은 형사가 말했다.
그들은 김명기의 시체가 발견되었던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현지 경찰의 수사반을 통해서 사건 현장을 알아두었던 것이다.
해운대 바닷가에는 바람이 몹시 불고 있었다. 노란 가로등
불빛들도 차가운 바닷 바람에 떨고 있는 듯했다.
검시 보고서를 보면 김명기씨의 사망 시간은 26일 새벽 1시
전후로 되어 있어. 그 시간이라면 남화가 가게에서 차를 몰고
출발해서 해운대에 도착할 시간이라고 할 수 있어. 그녀가 25일
0시 40분경에는 여기에 도착했겠지. 그 시간에는 거리가 텅
비었을 테니까 논스톱으로 달려왔을 거란 말이야. 시간상으로 볼
때 그녀의 도착 시간과 김명기의 사망 시간이 일치해.
목이 굵은 형사가 담배 꽁초를 구두 끝으로 뭉개면서 말했다.
그 말은 시간상으로 볼 때 김명기가 남화의 차에 치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결정적인 단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 시간대에 해운데 P호텔 옆을 지나간 차가
남화의 차뿐만은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일차적인 건 그렇다치고, 코보는 보다 확실한 증거를 원해.
그걸 찾아내라는 거야.
눈이 째진 형사가 어깨를 웅크리면서 말했다.
그걸 어디 가서 찾지?
목이 굵은 형사는 차도 위를 내려다보았다. 차도 위에 마치
결정적인 증거가 굴러다니고 있기라도 하는 듯.
꼭 있을 거라는 거야.
그렇다면 직접 와서 찾아보지 그래.
그들은 추동림의 아파트 쪽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매서운 바닷바람과 함께 파도소리가 그들의 오른쪽 귀를 핥고
때리며 지나갔다. 어둠 속에서 허옇게 일어서는 파도를 보기가
두렵다는 듯이.
이윽고 그들은 S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의 얼굴을
알고 있는 경비원이 그들을 향해 거수경례를 보냈다.
그들은 남화의 차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단지 안에 주차해
있는 차들 가운데 주황색 G카는 그 차 한대뿐이었다. 그들은 그
차를 한 번 둘러본 다음 앞부분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여길 봐.
형사 한 명이 앙상한 손으로 범퍼 위의 철판 모서리를
쓰다듬었다.
그 부분은 얼른 보기에는 아무 이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완만하게 안으로 들어가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손으로 만져보면 그것이 보다 확실하게 느껴졌다.
이건 사람과 충돌했을 때 생긴 게 아닐까?
글쎄, 그런 것 같은데...... 하지만.......
그 다음 말은 굳이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 정도 가지고는 어떤 단정을 내린다는 것이 무리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목격자가 있어야 하는데.......
그 시간에 시내라면 몰라도 그런 곳에 목격자가 어디
있었겠어.
남화 그 여자 지금 거의 실성 상태니까 한 번 들이밀어
볼까?
선수치면 의외로 쉽게 불지 모르지.
의견을 모은 그들은 남화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그녀는 집에서 가까운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충격과 탈진으로
입원한 것이기 때문에 그녀에게는 절대 안정이 필요했다.
형사들이 병실 안으로 들어섰을 때 그녀는 링겔 주사를 맞고
있었다.
의사는 형사들에게 그녀의 안정을 해치는 짓은 삼가해 달라고
말했지만 그들은 그럴 수가 없었다. 용의자를 앞에 놓고 그녀가
일어나기만을 언제까지고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의사가 나가자 그들은 남화에게 말을 걸었다.
좀 어떻습니까?
남화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리고 형사들을 보자 상체를
일으키려고 했다.
우리 인하는 어떻게 됐어요?! 찾았나요?!
그녀는 경련을 일으키며 물었다. 형사가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눌렀다.
그대로 누워 계십시오.
인하는 어떻게 됐어요?! 소식 있나요?!
죄송합니다.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우리는 인하를 찾기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그녀는 뒤로 떨어지면서 낮게 신음을 토했다. 그리고 눈을
감아버렸다.
그들은 잠시 침묵을 지킨 채 그녀가 눈을 뜨기를 기다렸지만
그녀는 좀처럼 눈을 뜨려고 하지 않았다. 무엇인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리면서 계속 괴로운 신음소리만 내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내말을 좀 들어 주십시오. 이건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중요한 이야기라는 말에 그녀의 신음소리가 작아졌다. 형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말씀드려서 안 됐지만...... 지금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인하군 유괴사건과는 다른 것입니다.
형사는 조금 뜸을 들였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것은 김명기라는 사람이 차에 치여 죽은 사건입니다. 그
사람을 치어 죽인 운전자는 그때 도망쳤지요. 그리고 지금까지
잡히지 않고 있습니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던 신음소리가 사라졌다. 그녀의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도 멈춰 있었다.
김명기씨는 지난 12월 25일 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자정이
지났을 때였으니까 26일 새벽이라고 하는 것이 옳겠군요. 그
사람은 26일 새벽 남화씨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해운대
P호텔 옆에서 차에 치여 죽었습니다. 그리고 목격자가 없는 줄
알고 그 차는 그대로 도망가버렸고, 우리 경찰도 목격자의
신고가 없었기 때문에 사건이 미궁에 빠진 줄 알았지요. 그런데
조금 전에 우리 경찰에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목격자가 없는 줄
알았는데 있었습니다. 그 목격자는 그때 도망친 차가 주황색
G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차넘버를 정확히 일러줬습니다.
놀랍게도, 그 차는 그날 밤 자정께에 광복동을 출발해서 곧장
해운대로 달려오다가 사람을 한 명 친 다음 남화씨가 살고 있는
해운대 S아파트 주차장으로 들어갔다더군요. 그 아파트 단지에는
주황색 G카가 그 차 한 대뿐이었습니다.
그녀의 두눈이 마침내 열렸다. 그러나 그 두 눈은 형사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여기까지 찾아와서 이런 말을 하게 돼서 우리도 괴롭습니다.
하지만 덮어둘 수도 없는 일이고 법대로 처리해야만 하기 때문에
이렇게 찾아온 겁니다.
형사들은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이제 그녀가 반응을 보여야
할 차례였다.
그녀의 두 눈이 잠시 허공을 더듬었다. 그녀는 오른손을
움직여 왼쪽 팔에 꽂혀 있는 주사바늘을 잡아뽑았다. 그리고
상체를 일으키려고 했다. 형사가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있으라고
했지만 그녀는 듣지 않고 힘겹게 일어나 앉았다.
그녀는 한참 동안 얼빠진 모습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밖 어둠 속에서 나뭇가지가 바람에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뭇가지 하나가 창문을 가볍게 두드려대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의 표정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형사들은 긴장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악마가 마침내 신고했군요.
형사들은 그 말뜻을 얼른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녀로 하여금 계속을
말을 하게 하기 위해 형사들 쪽에서 그 침묵을 깼다.
네, 그 악마가 신고를 했습니다.
그 악마가 누구인지 그들이 알리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녀의 자백을 유도하기 위해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그날 밤 추동림씨가 차를 몰고가다가 사고를 낸 줄
알았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예요. 그분은 그때 집에 계셨어요. 그분은 언제나
인하하고 집에 계시고...... 그 차는 제가 운전하고 다녔어요.
그날 그 차를 운전한 사람은 그분이 아니고 저였어요.
마침내 그녀의 자백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매우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일단 입을 열자 막혔던 둑이 터지듯 술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P호텔 옆을 지나가는데 어둠 속에서 갑작스럽게
뛰어나왔기 때문에 미처 피할 사이가 없었어요.
그 다음 말을 잇기가 괴로운지 그녀는 잠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차에서 내려가 봤더니...... 그 사람은 이미 죽어
있었어요.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지나가는 차도 없었어요.
너무 무서웠기 때문에...... 그 사람을 거기에 놔두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집에 돌아와 그분한테 사실대로 이야기했어요.
그분은 자기가 대신 죄를 뒤집어쓰고 경찰에 자수하겠다고
했어요. 저는 그럴 수가 없었어요. 그렇다면 제가 자수하겠다고
했더니 그분이 말렸어요. 하지만 말렸다고 해서 자수를 못한 건
아니었어요. 그보다는...... 자수했을 때 닥쳐올 그 수난과
엄청난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수를
못했던 거예요. 자수하면 집안이 풍지박산되고 제가 그동안
쌓아올린 공이 모두 무너져 버릴거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인하를 누가 보살필 것인지...... 그런 여러 생각들이 제가
자수하려는 것을 막았어요. 더구나 저는 그때 임신중이었어요.
그녀는 소매자락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은 다음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표정은 처음보다 많이 정리되어 있었다.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이유야 어떻든 저는 그때 자수했어야 했어요. 그때
자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난 거예요. 저는 지금
천벌을 받고 있는 거예요. 사람을 치어 죽이고 도망친 죄값을
지금 톡톡히 받고 있는 거예요. 하지만 우리 인하는 아무 죄가
없어요. 왜 그 어린애한테 고통을 주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고통을 받아야 할 사람은 전데 왜 그애와 그분이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주고 흐느꼈다. 형사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고 나서 무표정하게 기다렸다. 그녀는 금방 울음을
그쳤다. 그리고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사고현장에 목격자가 없을 줄 알았는데......
목격자가 있었어요. 사고가 나고 이삼 일 지났을 때였어요.
저녁때 가게로 전화가 걸려왔어요. 어떤 남자한테서 걸려온
전화였어요. 그 남자는 제 차 번호를 대면서 조사할 게 있으니까
9시 반까지 K호텔 앞으로 나오라고 했어요. 저는 처음에는
경찰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K호텔 앞으로 차를 몰고 갔어요.
모자를 쓴 어떤 뚱뚱한 사람이 차 뒤에 올라탔어요.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어떻게 생겼는지 잘 알아볼 수가 없었어요. 그
사람은 그 동안 조사를 다해 두었는지 우리 집안에 대해 잘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사고현장에 제가 떨어뜨렸던 제 녹색 머플러를
보여주었어요. 저는 더이상 부인할 수가 없었어요. 그 사람은
수사를 모두 끝냈고, 자기 혼자만 그 비밀을 알고 있으니까 자기
말만 잘 들으면 봐줄 수도 있다고 했어요. 저는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어요.
해운대 달맞이 동산으로 끌려가 그 남자에게 강간당하는
부분에 이르자 그녀의 얼굴에는 증오감으로 파르르 경련이
일기까지 했다.
......그는 악마였어요. 당하고 나서야 저는 그 사람이
경찰이 아니란 것을 알았어요. 하지만 처음부터 그가 경찰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해도 그때 저로서는 어쩔 수 없었을 거에요.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저는 그 악마에게 매달려 제발 비밀을 지켜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는 약속을 지키겠다고 했고, 저는 어리석게도 그
말을 믿었어요. 그러나 그 악마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고 그것을
미끼로 우리를 괴롭히기 시작했어요. 그날 밤 그 일로 저는
유산까지 했어요. 그 악마는 제가 모르게 제 남편한테 전화를
걸어 협박했어요.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저를 경찰에
고발하겠다고 협박했어요. 그분은 저를 지키기 위해 그 악마가
시키는 대로 서울로 올라갔어요. 그리고 마약 밀수조직을 위해
일하게 되었던 거예요. 그 전까지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분이었어요. 그런 조직을 위해 일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그분은 집에서 아이하고 노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고
행복이었어요. 그런데 그런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되었던 거예요.
그 악마는 그분한테 헤로인을 운반하게 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나중에야 그것을 알게된 그분은 그 마약을 무기로 해서 그
악마로부터 우리 가정을 지키기 위해 그것을 빼돌렸어요. 그것은
2킬로그램으로 싯가 일천만 달러나 나간다고 했어요. 그분은
그것을 이용해서 우리 가족을 데리고 외국으로 나가 숨어 살려고
했어요. 그것이 우리 가정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악마는 헤로인을 돌려주면 모든 걸 없었던 걸로
해주겠다고 했지만, 그분은 그 말을 믿지 않았어요. 악마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어요. 다급해진 악마는 생각끝에 충무의 친정집에
숨어 있는 우리를 찾아내 우리 아이를 납치해 갔던 거예요.
우리는 헤로인을 무기로 삼아 우리를 지키려다가 오히려 역습을
당했어요. 그분은 이제 다시 악마의 손에 붙잡혀 꼼짝 못하게
됐어요. 그분은 인하를 찾기 위해 악마가 시키는 대로 할
거에요. 인하만 구할 수 있다만 그분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생각만 해도 무서워요.
그녀는 몸서리치면서 두 손을 꼭 마주잡았다.
좀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떨고 있는 그녀를 향해 형사가 말했다.
형사 한 명은 경감에게 보고하기 위해 병실을 급히 나갔고
다른 한 명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그곳에 남았다.
남화는 그녀가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상세히 털어놓았다. 의사가 들어와 그녀에게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녀는 듣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윽고 비밀을 모두 털어놓은 그녀는 이제 모든 것은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는, 모든 것을 체념해버린 것 같은 담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문득 생각난 듯 형사에게 물었다.
이제 저를 잡아가셔야죠?
그 말에 눈이 가늘게 찢어진 형사는 곤혹스런 표정이다가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게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구속 여부는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저를 잡아가 주세요. 저는...... 죄값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어요. 다만 우리 인하를 구해내지 못하고 구속된다는 것이
가슴 아플 뿐이에요. 인하만 아니라면 벌써.......
그녀는 말 끝을 맺지 못하고 다시 흐느껴 울었다.
부인이 사실대로 말씀해 주셔서 다행입니다. 하지만 너무
늦게서야 말씀해 주셨습니다. 일찍 자수했더라면 일이 이렇게
엉뚱한 방향으로 발전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한 다음 형사는 일어섰다. 그러나 그는
나가지 않고 그녀를 지키기 위해 창가에 기대섰다.
부산에 있는 부하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을 때 노경감은 파리
인터폴 본부의 길베르 부장과 막 통화를 끝내고 난 참이었다.
김명기씨는 남화씨가 운전하는 차에 치여 죽었습니다!
전화를 받자마자 그의 부하가 던진 첫마디였다.
확실해?
경감은 놀라서 물었다.
네 확실합니다. 본인이 모든 걸 자백했습니다.
그럴 수가......
경감은 아무래도 부하의 말이 믿기지가 않았다.
모든 건 그 여자가 일찍 자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파생된
겁니다. 사고 현장을 유일하게 목격했던 자가 하필이면
마약밀수조직인 트라이어드의 일원이었습니다. 놈은 남화씨를
위협해서 강간까지 했고, 그 바람에 그 여자는 유산을 했답니다.
추동림이 나서게 된 것도 결국은 놈의 협박을 받고 아내를
지키기 위해서였답니다.
경감은 부하의 말을 끝까지 침착하게 경청하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앉았다 일어섰다 하면서 부하의 이야기를
들었다.
대충 이런 내용입니다. 자세한 보고는 조금 후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남화씨를 어떻게 할까요? 체포할까요?
경감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나서
이마에 번진 땀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그의 입에서는 무거운
한숨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는 정신을 차릴 수 없다는 듯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가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그 여자를 지키고 있어. 도망치진 않겠지만...... 혹시
자살할지도 모르니까. 조금 후에 전화할 테니까 대기하고 있도록
해.
전화를 끊고 난 경감은 고민에 빠졌다. 그것은 남화를
체포하여 구속시킬 것인가 아니면 모른 체하고 그대로 내버려둘
것인가 하는 문제 때문이었다. 그녀가 현재 겪고 있는 고통과
극도로 쇠약해진 심신으로 봐서는 동정의 여지가 충분했지만
동정때문에 사람을 치어 죽이고 도망친 자를 그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것을 덮어둔다는 것은 엄연히
직무유기라고 그는 생각했다. 인하를 찾을 때가지만이라도
체포를 연기할까도 생각했지만, 그녀가 있다고 해서 인하를
찾는데 더이상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마침내 냉정하게 법을 집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입니까?
그의 표정을 살피고 있던 마형사가 물었다. 그는 지난 며칠
사이에 더욱 비쩍 마른 것 같았다.
남화씨가 범인이야.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김명기씨를 치어 죽인 범인이란 말이야.
아니. 그럴 수가......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이 더욱 퀭해지는 것 같았다. 다른
형사들도 경감을 주목했다.
경감은 그들에게 조금 전에 전화를 통해 보고받은 내용을
이야기해 준 다음
남화...... 그 여자를 어떻게 처리하지?
하고 물었다.
거기에 대해 아무도 얼른 대답하려 들지 않았다.
그 여자를 체포해야겠어.
형사들은 멀거니 경감을 쳐다보기만 했다.
재판을 받게되면 형이 무거울 텐데요.
마형사가 걱정스러운 듯 한 마디 했다.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경감은 차갑게 말했다.
그 여자가 감당해낼 수 있을까요?
그것도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그거야말로 그 집안은 쑥밭이 되는군요. 인하는 어떻게
되는거죠?
인하는 우리가 찾아내야 해.
찾아내더라도 그 아이는 갈 데가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야. 충무 외가에 보내면 될 거야.
정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우리가 보호해야겠지.
경감은 두 손으로 이마를 짚고 생각에 잠겼다가 마침내
부산으로 전화를 걸었다. 기다리고 있던 그의 부하가 전화를
받았다.
남화씨를 체포해. 정중하게 다뤄. 외부에 알려지지 않게
보안을 철저히 해.
관할서에 넘길까요?
아니야. 병실에 연금상태로 그대로 둬. 우선 건강을 회복해야
하니까 병원에 그대로 있게 해. 관할서에 연락하는 건 뒤로
미뤄. 모든 책임은 내가 질 테니까 병실에서 나가지 못하게만해.
여자만의 특수한 생리가 있을 테니까 여형사 한 명을
내려보내겠다.
수갑을 채울까요?
경감은 생각해 보고 나서 말했다.
한쪽 손에만 수갑을 채운 게 낫겠지. 수갑 한쪽은 도망치지
못하게 침대에 연결해 놔. 그리고 그 여자 집은 계속해서
지키도록 해.
전화를 끊고 난 경감은 단발머리의 여순경인 조미혜를
바라보았다.
조형사는 지금 바로 부산으로 내려가 줘야겠어.
형사들이 모두 흩어지자 경감은 마형사를 조용히 곁으로
불렀다.
나...... 아무래도 해외 출장을 다녀와야 할 것 같아.
인터폴 측에서는 뭐라고 하던가요?
국제 마약관계라고 했더니 살레 부장은 적극 협조하겠다고
했어. 그러면서 나보고 오라는 거야. 그러면 한결 일이
쉬워질거라는 거야.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자기들
입장하고 우리 입장은 아주 다른데.
한 번 신청해 보시죠. 밑져봐야 본전 아닙니까.
가게되면 우리 두 사람이 함께 가야 해.
그 말에 마형사는 긴장했다.
┌────────────────────────────┐
│ 2.이상한 동반자 │
└────────────────────────────┘

길베르 살레 부장은 메모지를 앞에 놓고 거기에 적인 내용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서울의 노인배 경감이
국제전화로 불러준 내용을 받아적은 것이었다.
그는 노경감이 부탁한 인물의 이름을 속으로 읽어보았다.
경감이 하나하나 알파벳으로 불러준 이름자는 KIM
MYUNG-KI 였다. 그 이름을 몇 번 중얼거려 보았지만 아무래도
프랑스인 이름처럼 부드럽지가 못하고 모나고 딱딱한 느낌이
든다. 한국인 이름은 모두가 그런 느낌이 든다고 그는 생각했다.
메모지는 여권번호와 생년월일, 그리고 황금의 초생달 이라는
암호명도 적혀 있었다. 그는 그것들을 수첩에 옮겨 적으면서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는다!
그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서울 노경감은 김명기라는 인물이 국제 마약조직인
트라이어드와 관계가 있으며 헤로인 2킬로그램을 소지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트라이어드라는 말을 듣는 순간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트라이어드와의 싸움에서 쓰라린 패배를 맛본 경험이
있었다. 3년 전의 일로 그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참담한 기분과
함께 분노로 가슴이 끓어오르곤 했다.
그때는 정확한 정보에 입각해서 대응했었다. 충분한 자금과
인력도 투입했었기 때문에 체포는 시간 문제라고 생각했었다.
적들은 엄청난 양의 헤로인을 운반하려 하고 있었다. 전유럽의
수사진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들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 그의 부하들이 적들을 덮쳤을 때 결과는 의외로
참담하게 끝나고 말았다. 헤로인은 이미 다른 곳으로 빼돌려져
있었고, 그는 부하 두 명의 목숨마저 잃어야 했다. 그 후 그는
그 참담한 패배를 만회하고 복수하려고 했지만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전혀 엉뚱한 곳에서 국제전화가
걸려왔던 것이다. 트라이어드라는 말과 함께.
그 한 마디를 듣는 순간 그는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작달만한 키에 단단한 몸집을 가닌 40대 후반의
사나이였다. 머리는 흑발이었지만 흰 머리가 섞이고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 나이보다는 더 들어보였다.
그는 통통한 오른손을 수첩 위에 올려놓고 범인의 모습을 머리
속에 그려보았다. 범인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사진이나 몽타즈 같은 것이 왔다면 몰라도 경감은 그런
것도 보내지 않았다. 어떻게 생긴 놈이라고 전화로 말해 주지도
않았다. 사진은 곧 보내주겠다고만 말했을뿐이다.
그러나 그는 어느 새 범인의 모습을 머리 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흔히 보는 동양인의 전형적인 얼굴이었다. 작은
눈, 납짝 코, 누르스름한 피부, 자그마한 몸집...... 그러나
그런 모습은 이내 다른 동양인들의 모습 속으로 흡수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윽고 그는 구체적으로 작전을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상대가 한국인이라는 것, 그리고 간단한
인적사항 정도였다.
황금의 초생달이라고? 흥!
그는 중얼거리면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의 오래 된 손목시게는 1월 17일 0시 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지금 암스테르담에 와있었다. 노경감의 전화를
받은 지 벌써 여러 시간이 지났다.
그가 파리 본부로 전화를 걸자 여직원이 서울의 노라는
사람으로부터 급한 전화가 걸려 왔었다고 전해 주었었다. 그때
그는 런던에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그가 예약해둔 암스테르담
호텔의 전화번호와 그가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시간을 일러준
다음 암스테르담으로 날아와 경감의 전화를 기다렸었다. 경감은
살레 부장이 지정한 시간에 정확히 전화를 걸어왔고, 그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협조를 부탁했다. 살레 부장은 그의 부탁을
쾌히 수락했지만 사실 그는 지금 중요한 일에 매달려 있는
입장이었다.
그것은 1981년 5월 성베드로 광장에서 일어났던 교황
암살미수사건의 범인 일당중 한 명으로 추정되는 인물을
추적하는 일이었다. 당시 교황을 향해 권총을 발사했던 범인은
현장에서 교황청 경호대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터키 출신의
메흐멧 알리 아그자라는 인물이었다.
경찰은 처음에 그 사건이 아그자 혼자 저지른 단독 범행인 줄
알았지만 조사 결과 두 명 이상의 공범이 있었음이 밝혀졌고,
수사가 진전됨에 따라 그 배후에는 여러 나라의 테러조직과
정보기관들이 난마처럼 얽혀 있음이 드러났다. 수사는 더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결국 아그자 한 명만 처벌하는 선에서
미궁인 채로 남겨두어야만 했다.
그러나 수사가 완전히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수사는
지지부진했지만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었고, 서방 세계의
수사기관들은 그 사건 수사에 대해서만은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고 있었다.
살레 부장은 그가 지금 추적하고 있는 인물을 다른 요원에게
넘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테러분자보다 마약 쪽에 더 구미가
당겼다. 그리고 그것은 노경감의 부탁이기도 했다. 아무리
바쁘고 중요한 일이 있다 해도 만사 젖혀놓고 경감의 부탁을
들어주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경감의 말대로라면, 그가 찾아내야 할 인물은 이미 파리에
잡입했다. 그의 파리 도착 시간은 16일 오전 8시라고 했다.
그렇다면 벌써 16시간이나 경과했다.
그런데 경감은 말 끝에 그 자를 절대 사살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산 채로 체포해 달라고 똑같은 말을 두 번이나 반복했다.
살레 부장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사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해둘 경우 이쪽의 희생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동양인들의 조직인 트라이어드 대원들은 잔혹하기로 정평이
나있는 놈들이다. 경감이 이쪽으로 와주면 좋겠는데, 그러면
한결 일이 부드러워질 텐데.......
따뜻하고 보드라운 감촉이 목 둘레에 와닿았다. 등판에 묵직한
것이 밀려왔다. 그는 어깨 위로 뻗어온 길고 가는 두 팔을
움켜잡았다.
주무시지 않고 뭐하는 거예요?
달콤한 목소리가 뜨거운 입김과 함께 그의 귀를 간지럽혔다.
금발이 그의 옆 얼굴을 덮어왔다.
음, 잠이 오지 않아.
그는 의자를 뒤로 젖힌 다음 여자를 앞으로 오게하여 무릎
위에 앉혔다.
그의 여자는 몸에 팬티 한 장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그녀는
잠자리에 들 때 언제나 벌거벗고 자는 습관이 있었다.
밖은 몹시 추웠지만 호텔 방 안은 난방이 잘 되어 벌거벗고도
조금도 추위를 느낄 수 없을만큼 따뜻했다.
여자는 알몸이었지만 그는 팬티 정도는 입고 있었다. 여자는
바위처럼 단단하고 시커먼 털로 덮인 그의 가슴에 어리광하듯
안겨왔다.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탐스러운 젖가슴을 주무르면서
그녀의 입에 키스했다.
무슨 일이에요?
그가 입을 떼자 그녀가 탁자 위에 놓은 수첩을 집어들어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갑자기 다른 일이 생겼어. 아주 급한 일이야.
지금 하는 일은 어떻게 하구요?
다른 사람한테 맡겨야 할 것 같아.
그건 말도 안 돼요!
그녀는 거세게 항의하면서 상체를 뒤틀었다. 그 바람에 그녀의
큼직한 젖가슴이 흔들렸다.
안느 바넥이 그처럼 거세게 항의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그를 도와 일해
왔던 것이다. 그녀는 어떤 때는 그보다도 더 열심이었고 남자
이상으로 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고 감당해냈고, 그래서 죽을
고비를 넘긴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이제 조금만 견디면 끝장이 나는데 여기서 손을 떼다니 말도
안 돼요! 지금까지 이 고생을 해왔는데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어요! 난 절대 포기할 수 없어요! 당신은 마음대로
하세요! 하지만 전 안 돼요!
그녀는 자기가 벌거벗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일어서서 두
손을 흔들며 말했다.
포기하는 게 아니야. 다른 사람한테 맡기자는 거야.
우리가 지금까지 쌓아온 공을 다른 사람한테 줄 수는 없어요!
단순이 다른 사람한테 넘긴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예요!
미련없이 내던질 만큼 난 그렇게 냉정하지가 못해요!
살레는 그녀의 아름다운 육체가 마치 춤추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성욕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가 격앙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몸에 손을 델 수가 없었다.
나도 당신과 마찬가지 심정이야. 하지만 이 일을 거절할 수가
없어.
혼자 하세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
그는 사정을 이야기했다. 서울의 노경감에 대해서는 그가
틈틈이 이야기해 주었기 때문에 그녀도 그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알고 있었다.
그의 설명이 끝나자 그녀는 갑자기 그때까지의 반항적인
태도를 버리고 양처럼 순하게 수그러들었다.
그는 커튼을 젖히고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언제 보아도 매력적인 몸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도발적인
육체미는 항상 그의 손길을 갈구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다가가 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품에 안겨왔다.
미안해. 하고 그는 말했다. 그녀는 고개만 뒤로 돌려 그에게
키스했다.
그녀는 그보다 키가 컸다. 그리고 그녀는 그보다 스무살이나
더 젊은 20대의 싱싱한 육체와 정신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녀가 인터폴에 들어온 것은 4년 전이었다. 파리대학 출신의
그녀는 추리작가가 되는 게 꿈이었는데 그 전에 수사계통에서
많은 경험을 쌓기 위해 인터폴에 자원했다고 훗날 털어놓았다.
엄격한 시험을 거쳐 들어온 그녀는 남자들 이상으로 열심히
뛰었고, 그래서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수사요원으로 현장에
투입되는 영광을 안았다.
그녀가 살레 부장의 직접 지휘를 받게된 것은 2년 전부터였다.
살레 부장은 언제나 그녀를 데리고 다녔는데 그것은 그녀가 곁에
있으면 항상 활력을 느끼게 되는 때문이라고 부하들 앞에서
솔직히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더 사실대로
말하면 그는 어느 새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첫눈에 반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 감정을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첫 부인과 별거중이었고, 대학에 다니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는 혼자서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 한 번 놀러온 바넥은 그 지저분함에 놀라 가정부를
자청했고, 그때부터 한 주일에 두번씩 그의 아파트에 들러
허드렛일을 처리해 주었다. 그녀가 들락거리게 되면서부터 그의
아파트는 사람이 사는 곳답게 깨끗해졌고 생기를 되찾게 되었다.
그것을 계기로 바넥은 아주 자연스럽게 그곳에서 자고가게
되었고, 그들은 역시 아주 자연스럽게 몸을 섞게 되었다. 먼저
사랑한다고 말한 쪽은 바넥이었다. 그제서야 그도 그녀를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별거중인 그의 아내는 얼른 이혼해 주지 않았지만 그는
그녀에게 이혼해 달라고 조르지도 않았다. 바넥도 살레도
결혼하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연인으로 만족했고,
상대방에게 어떤 부담도 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연인사이라는 사실은 그들만이 아는 극비사항으로 남아 있었다.
폭설이군.
그녀의 어깨 너머로 창밖을 내다보면서 그가 중얼거렸다. 창밖
아래로는 운하가 흐르고 있었고, 그 운하를 가로질러 다리가
놓여 있었는데 다리 위에 세워져 있는 가로등 불빛에 굵은
눈송이가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는 것이 마치 스크린처럼 보였다.
그녀는 암스테르담 출신이었지만 공부는 파리에서 했기 떄문에
파리상의 기질이 몸에 배어 있었다.
교통이 마비되면 큰일인데.
며칠 여기에 푹 갇혀 있으면 좋겠어요.
밖에서 흘러들어오는 희미한 빛에 그녀의 앞부분이 흐릿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는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채 그녀의 하복부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하복부를 최대한 앞으로 내밀면서 낮게 신음했다. 그는
손을 조금 더 밑으로 내려 보드라운 털을 어루만졌다.
나는 행복한 놈이야.
제가 더 행복할걸요.
그는 그녀를 번쩍 안아들고 싶었지만 그녀가 너무 무거웠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1월 17일 새벽 파리.
유무화는 소파에 앉아 졸고 있다가 전화벨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 일어났다. 그녀는 충혈된 눈으로 주위를 휘둘러 본
다음 발작적으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아, 나야
그것은 귀에 익은 남자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녀는 눈물이 왈칵 솟았다.
잘 있었어?
황표의 목소리는 잔뜩 술에 절어 있었다. 무화는 자신이 울고
있는 것을 눈치채이지 않으려고 숨을 죽였다.
여......여보세요......왜 말을 하지 않는 거지?
황표는 혀꼬부라지는 소리로 말했다.
유무화, 잘 있었어?
잘 있었어요.
그녀는 떨리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조그만 소리로 대답했다.
사랑하는 아가씨, 별일은 없었고?
없었어요. 어디 계셔요?
여기...... 로마야, 보고 싶어서 전화했지.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말이야.
왜 오시지 않는 거예요?
글쎄,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해둘까. 우리가 언제
헤어졌지?
떠나신 지 닷새 됐어요.
벌써 그렇게 됐나. 내가 없는 동안에 바람 피우지 않았나?
그녀는 거머리가 목에까지 기어올라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편으로 그가 더없이 불쌍한 사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실대로 말해 버리고 싶은 충동을 꾹 누르면서 그녀는
언제 오실 거예요? 하고 물었다.
글쎄 아직 모르겠어. 왜 내 질문을 피하지? 그 동안 바람
피웠어 안 피웠어?
무화는 어이가 없었다. 지금 그를 노리고 있는 자들이
대기하고 있는 마당에 철딱서니 없는 말만 늘어놓고 있다.
그녀는 방 안에 있는 자들을 둘러보았다.
방 안에는 두 사람이 대기하고 있었다. 잿빛머리의 서양인과
검은 옷차림의 한국 여인이었다. 잿빛머리는 소파에서 눈을 뜨고
있었고 검은 옷차림의 여인은 침대 위에서 상체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들은 그녀의 아파트에서 교대로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과 시선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소름이 끼쳤다.
그들에게 혹독한 고문과 갖은 수모를 당한 그녀는 이제 그들의
수족이나 다름없이 되어 있었다.
바람 피우지 않았어요.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당연히 그래야하고 말고. 난 너한테
투자를 많이 했어. 넌 그걸 잊어서는 안 돼. 내 말 알겠지?
그의 야비한 말이 그녀는 하나도 이상하게 들리지가 않았다.
그것은 당연한 말처럼 들렸다. 그녀는 자신 역시 그처럼
야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잘 알고 있어요.
너를 좋아하기 때문에 너를 도와준 거야. 너는 내 마음을
십분의 일도 이해하지 못할 거야.
죄송해요.
너를 안고 싶어 미치겠다. 내가 파리로 갈 게 아니라 네가
이쪽으로 와줘.
그건 안 돼요!
그녀는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그리고 자신의 목소리에 놀라 방
안에 있는 자들을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검은 옷차림의
여인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는 수화기 옆에 귀를 바싹
들이대고 상대방의 말을 엿들으려고 했다.
왜 안 된다는 거야?
황표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방안을 울렸다. 방안이 워낙
조용했기 때문에 그 목소리는 또렷이 들려왔다.
갈 수 없어요. 파리로 오세요. 로마는 싫어요.
잔말 말고 와! 오라면 오는 거야! 내가 한 마디 하면
벌거벗고라도 와야지.
검은 옷차림의 여인이 무화를 옆구리를 찌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가겠다고 그래. 장소를 알아내.
그녀는 무화의 귀에다 대고 재빨리 속삭였다.
알겠어요. 로마 어디에요?
무화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마지 못해 오겠다면 그만 둬. 마음에도 없는 짓하는 건 나도
싫어.
갑자기 그가 차갑게 말했다.
아니예요. 가고 싶어요. 만나고 싶어요.
갑자기 마음이 변했나?
그는 의심이 많은 사내였다. 그녀는 그가 전화를 끊을까봐
불안했다.
아니예요. 계신 곳을 말씀해 주세요. 날이 새는 대로 달려
가겠어요. 보고 싶어요.
로마에 오면 아주 큼직한 선물을 주겠어.
그 동안 선물을 많이 주셨는데......
아니야. 너한테는 자꾸만 선물을 주고 싶어. 난 가난뱅이가
아니야. 너한테 선물할 돈은 얼마든지 있어.
내일 가겠어요. 어디로 가야 만날 수 있는지 말씀해 주세요.
내가 있는 곳을 가르쳐줄 수는 없어.
그는 술에 취해 있으면서도 경계를 늦추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만나죠?
왜 내가 있는 곳을 그렇게 알려고 하는 거지?
아무래도 수상쩍다는 듯이 그가 물었다.
계신 곳을 알아야 갈 거 아니예요.
그건 그래. 그런데 난 좀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될 몸이야.
유럽은 사실 알고보면 험한 곳이야. 내가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걸 알면 놈들은 나를 가만 두지 않을 거야. 나를 노리고
있는 놈이 없다고는 할 수 없어.
그렇다면 조심하세요.
무화가 곁에서 나를 지켜준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녀는 가슴이 찔리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내가 그를 사지로
몰어넣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그녀는 소름끼치는 전율을
느꼈다.
지켜드리고 싶어요. 빨리 가서.......
마음과는 달리 불쑥 튀어나온 거짓말에 그녀는 적잖게 놀랐다.
거기 눈이 많이 왔지? 폭설이라고 하던데.......
네, 지금도 내리고 있어요.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교통편이 여의치 않을 거야. 아침 10시에 다시
전화할 테니까 비행기가 정상적으로 운항하는지 알아봐.
그는 그녀가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미꾸라지 같은 자식.......
하고 검은 옷차림의 여인이 말했다. 그녀는 잿빛머리에게
재빨리 뭐라고 지껄였는데 무화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마 이탈리아 말인 것 같았다.
그자가 뭐라고 했는지 자세히 말해봐. 난 알아들은 부분도
있었고 알아들을 수 없는 부분도 있었어.
여인이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무화는 그 눈이 무서웠다.
그녀는 통화내용을 상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넌 전화 받을 때 너무 긴장했어. 그렇게 받으면 상대방이
의심하게 돼.
무화의 말을 듣고 난 여인이 말했다.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아
무화를 쏘아보았다. 무화는 겁에 질려 시선을 밑으로
떨어뜨렸다.
그 자식이 의심했는지도 몰라. 갑자기 전화를 끊은 게
아무래도 이상해. 네가 너무 서툴렀어. 그렇게 주위를
주었는데도 조심하지 않았어.
그녀가 턱짓을 보내자 잿빛머리가 소파에서 일어섰다.
의심하지 않았어요! 10시에 다시 전화가 올 거예요!
무화는 바들바들 떨면서 필사적으로 말했다.
시끄러 ! 조용히 하라고 했잖아!
여인이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무화는 그 자리에 서서 입을
다물었다. 잿빛머리는 잠자코 다가오더니 주먹으로 그녀의
가슴을 갈겼다. 그녀는 아! 하고 낮게 신음을 토하면서 뒤로
나동그라졌다. 그녀는 너무 고통스러워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신을 저주하면서 두 손을 모아 싹싹 비볐다. 그녀에게는
잿빛머리의 사나이가 바로 신이었다. 그는 기계처럼 무자비했다.
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녀의 목을 비틀어 죽일 수 있는
그런 인간이었다.
살려주세요! 다시는 안 그러겠어요!
그녀는 검은 옷차림의 여인을 향해 손을 비볐다. 여인의
지시가 없는 한 잿빛머리는 계속 무화를 무자비하게 때릴
것이다.
너는 그에게 힌트를 주려고 했어. 애교를 떨어 그가 안심하고
말할 수 있게 해야 하는데 넌 전혀 그러지 않았어.
잘못했어요! 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않겠어요!
무화는 자신의 행위를 이해할 수 없었다. 파리 경찰에 모든
것을 털어 놓았으면 이런 고통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협박이 무섭기도 했지만 오유린의 생명이 위태롭게
될까봐 그런 것이었다. 그녀는 그녀가 만일 경찰에 신고하면
그들이 틀림없이 오유린을 죽이고 말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오유린을 구하기 위해 고통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그러한 희생정신에 대해 스스로도 놀라고
있었다.
오유린은 피를 나눈 형제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목숨을 걸고
신의를 지킬만큼 절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얼마든지 외면해
버려도 좋을 그런 상대였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녀를 버리지
않고 있었고, 오히려 그녀를 구출하려고 자신을 학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옷을 벗어.
검은 옷차림의 여인이 교활하게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무화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녀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제발...... 그것만은.......
무화는 떨면서 말했다. 그녀는 상상할 수 없는 치욕을 한 번
받은 적이 있었다. 그것도 다른 두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런데
이번에 또 그 치욕을 강요받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머뭇거리자 중년 여인이 잿빛머리에게 재빠른 어조로
뭐라고 말했다.
잿빛머리는 무화 앞으로 다가서더니 떨고 있는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녀의 블라우스를 양쪽으로 잡아당겼다. 단추가
떨어져 나가면서 불라우스 앞이 양쪽으로 벌어졌다. 그는 큼직한
손으로 그녀의 상체를 가리고 있는 것들을 거침없이 낚아챘다.
내의와 블래지어가 마치 살점이 뜯어지듯 떨어져 나와 그의
손아귀 안에서 구겨졌다. 그녀가 두 손으로 젖가슴을 가리자
그는 이번에는 그녀의 허리춤을 움켜잡고 찢으려고 했다.
그제서야 무화는 다급해서 소리쳤다.
벗겠어요!
진작 그럴 것이지.
중년 여인이 그것 보라는듯 야릇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무화는 흐느껴 울면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당신은 악마에요. 저주받을 거예요.
그녀는 옷을 벗다 말고 증오에 차서 말했다. 검은 장미는
냉소를 흘렸다.
나는 이미 저주를 받았어.
잿빛머리도 옷을 벗고 있었다.
옷을 모두 벗은 무화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표정으로
잿빛머리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나머지 몸둘 바를 몰라하는 그런 표정 같은 것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검은 장미가 두 사람의 행위를 자세히 보아두려는 듯 자세를
고쳐 앉는 것이 보였다.
잿빛머리가 무화의 가는 팔을 끌어당겼다. 그의 꿈꾸는 듯한
표정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냉혈밖에 없었다. 그는 무화를
침대쪽으로 끌고가 그 위에 눕혔다. 무화는 그가 그녀의 두
다리를 벌릴 때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냉혈은 침대 밑에 선
채로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은 장미는 눈을 크게 뜨고 성행위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실제로 하는 것보다도 더 큰 흥분을 그녀에게 안겨주고 있었다.
그녀는 목이 타는지 물을 마셔대면서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화는 죽은 듯이 누워 있으려고 했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처음 남자의 그것이 밀려들어 왔을 때 그것이 너무 컸기
때문에 고통스러웠지만 그의 행위가 가열됨에 따라 고통은
쾌감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녀는 그래서는 안된다고
버티었지만 그녀의 입에서는 어느 새 신음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신음소리와 함께 그녀의 육체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가장 침착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사람은 잿빛머리의 사내였다.
그는 차가운 눈으로 무화를 내려다보면서 기계적으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자유자재로 유연하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지만 얼굴 표정은 처음과 조금도 다름없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흥분할 줄을 모르는 기계적인 인간 같았다.
반면 무화는 시간이 흐를수록 몸의 움직임이 차츰 격렬해지고
있었고 신음소리도 더욱 커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온 몸에
번져오는 쾌감을 억제하려고 무진애를 썼지만 그 둑이
무너져버리자 걷잡을 수 없이 그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고,
이제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남자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옆에서 그들의 행위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은 이제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수치스러운 느낌 같은 것은 이미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검은 장미에게 보라는 듯이
신음하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검은 장미의 눈에 어느 새 질투의
불길이 일고 있었다.
처음 무화가 강간당할 때에는 흥미있게 관찰하고 있다가
그녀가 강간당하는 자세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남자에게
매달리면서 이상한 신음소리를 내자 같은 여자로서 질투를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만! 그만해!
검은 장미는 더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발딱 일어나 침대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무화는 그녀의 외침 따위에는 상관하지
않고 절박하게 몸부림치면서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만 두라니까!
검은 장미는 앙칼지게 쏘아붙이면서 높이 쳐들린 무화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철썩 후려갈겼다.
쌍년! 빨리 일어나지 못해?
그녀가 다시 한 번 후려갈기자 그제서야 무화는 쳐들고 있던
엉덩이를 내렸다. 잿빛머리는 뒤로 물러나 옷을 입었다. 그는
무표정하게 두 여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개 같은 년! 누가 너보고 기분 내라고 했어?
여인은 무참한 표정으로 일어나 앉은 무화의 뺨을 철썩철썩
갈겼다. 무화는 아무 저항없이 그녀가 때리는 대로 얼굴을
내맡기고 있었다.
죽여버릴 거야!
검은 옷차림의 여인은 갈수록 화가 나는지 계속해서 미친듯이
무화의 뺨을 후려갈겼다. 그래도 직성이 풀리지 않자 나중에는
그녀의 몸을 닥치는 대로 꼬집기 시작했다. 뺨을 때릴 때는
미동도 하지 않고 고스란히 매를 맞고 있던 무화도 그녀가
꼬집어대는데는 견딜 수 없었던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침대 위를 뒹굴었다.
검은 장미한테는 병적인 데가 있었다. 그녀는 계속 무화에게
욕을 퍼부어대면서 그녀의 흰 몸을 마구 꼬집고 할퀴어댔다.
무화는 마침내 울음을 터뜨리면서 그녀의 손길을 이리저리
피해다녀야 했다.
그녀의 몸은 금방 할퀴고 꼬집힌 상처로 벌겋게 되었다.
여인은 무화를 학대하고 그녀에게 고통을 가하는 데서 쾌감을
맛보는 것 같았다.
전화벨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살레는 침대 속에서 튕겨나왔다.
그 바람에 금발의 미녀도 침대 속에서 눈을 떴다.
16일 아침 8시에 도착한 승객 명단에 그 이름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부하 형사의 보고였다.
체크당하지 않고 입국했나?
살레 부장은 배를 쓸면서 물었다.
네, 무사통과한 것 같습니다.
같습니다라는 말은 사용하지 마. 그런 불투명한 말투는 듣는
사람을 곤혹스럽게 만든단 말이야.
알겠습니다. 김명기라는 한국인은 무사통과했습니다.
그자를 즉시 수배해. 어디에 투숙하고 있는지 알아내란
말이야.
알겠습니다.
내가 도착할 때까지 체포해서는 안 돼. 발견하면 감시만 하고
있어.
알겠습니다.
거기에도 눈이 많이 왔나?
네, 굉장히.......
곧 가겠다. 비행기로 못가면 열차편으로 가겠다.
바넥은 상체를 거의 드러낸 채 비스듬히 드러누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살레는 묵직하게 밑으로 처져 있는 그녀의
젖가슴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자가 파리에 입성한 것이 확인됐다는구먼. 그것도 아주
당당히 입성한 모양이야.
그는 침대 쪽으로 걸어가 그 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한
손으로 그녀의 젖가슴을 건드렸다.
언제 봐도 바넥 당신의 젖가슴은 탐스럽단 말이야. 나는
당신의 가슴이 제일 좋아.
꼭 아기 같군요.
그녀는 그의 콧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살레 부장은 다시 수화기를 집어들고 호텔 안내계에 오늘
비행기가 예정대로 뜨는지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안내계는
이미 확인해 두었는지
폭설로 공항은 폐쇄됐습니다.
하고 말했다.
할 수 없군. 역으로 가봐야겠어. 서둘러요.
그들이 준비를 끝내고 막 방을 나서려고 하는데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서울의 미스터 노한테서 전화가 왔었습니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본부에 있는 여직원이었다.
뭐라고 그랬어요?
파리로 오겠다고 했습니다. 출장허가를 받았답니다.
언제 온다는 거야?
도착 시간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살레 부장은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꼈다.
서울의 노경감이 온다는 거야. 파리까지 출장오다니 한국
경찰도 대단한데.
난 동양인은 싫어요.
엘리베이터 속에서 바넥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건 편견이야. 나도 그전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생각을
바꿨어.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 올 그 사나이는 보기드문
신사야. 그리고 난 그 사람 신세를 많이 졌어. 이번에 그 신세를
갚아야 해요.
부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저도 그 사람을 좋아하도록
노력해 보겠어요.
고맙군.
그는 바넥의 엉덩이를 두드려주었다.
황표는 아침 10시 조금 지나서 전화를 걸어왔다.
약속대로 나는 전화를 걸었어.
그의 목소리는 지난 밤과는 달리 많이 침울해져 있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더니 머리가 아파. 간밤에 내가 실수하지
않았나?
아니요. 비행기는 뜨지 않는대요. 어떡하죠?
할 수 없지 뭐. 로마에 오는 건 연기하도록 해.
싫어요!
무화가 큰소리로 말했다.
로마에 가고 싶어요. 저 보고 싶지 않으세요?
보고 싶어. 하지만 비행기가.......
열차로 갈 수 있잖아요.
열차로 여기까지 오겠다는 거야?
그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문제없어요. 여기서 초특급 열차를 타면 제네바까지
4시간이면 갈 수 있어요. 제네바에서 로마행 국제열차로
바꿔타면 돼요.
정말 그렇게 올 거야?
네, 정말 갈 거예요.
내가 그렇게 보고 싶나?
네, 보고 싶어요.
좋아. 기다릴 테니까 빨리 와.
빨리 가겠어요. 지금 바로 역으로 가겠어요.
로마에 도착하는 시간을 알 수 있어?
그건 모르겠어요. 제네바에서 열차를 바꿔타야 하니까 언제
도착할지 모르겠어요. 도착하는 대로 전화걸겠어요. 전화번호를
가르쳐주세요.
황표는 잠시 생각해 보는 것 같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럴 게 아니라 호텔을 예약해 둘 테니까 로마에 도착하는
대로 호텔에 투숙하고 있어. 그러면 내가 호텔로 연락하겠어.
어느 호텔이에요?
역에 내리는 대로 택시를 타고 포폴로 광장으로 가자고 해.
테베레 강가에 있는 광장이야. 그 광장에서 테베레 호텔을 찾아.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야. 미스 유 이름으로 예약해 두겠어.
다시 한번 말씀해 주세요.
무화는 황표가 말해 주는 것을 메모지에 급히 적었다.
기다리겠어. 꼭 와야 해.
황표가 전화를 끊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 무화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뭐라고 그래?
검은 장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면서 물었다.
무화는 황표와 나눈 이야기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그녀에게
보고했다.
기차 시간을 알아봐.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여인이 무화에게 지시했다.
무화는 역으로 전화를 걸었다.
제네바행 초특급 열차는 13시 25분에 있습니다.
안내계의 여직원은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다.
출발준비를 해. 난 나갔다 올 테니까 준비를 하고 있어.
그렇게 말한 다음 검은 장미는 밖으로 급히 사라졌다.
방안에는 무화와 잿빛머리의 사내만 남았다. 무화는 그에게
의미있는 눈짓을 보내보았지만 그는 개처럼 무표정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동림은 노크 소리에 놀라 일어났다. 아무도 그를 지키는
사람이 없었지만 그는 그때까지 꼼짝없이 호텔 방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문을 열자 검은 장미가 찬바람을 몰고 안으로 들어섰다.
1시 25분에 제네바행 초특급 열차가 있어요. 그걸 타도록
하세요.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그에게 그녀가 다시 한 번 반복해서
말했다. 그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잘 보관하세요. 그 속에 당신이 없애야할 인물의 사진이
들어 있어요.
그들은 방 가운데 서있었다. 그녀가 사진이 들어 있는 봉투를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잠자코 그것을 받아 호주머니 속에 집어
넣었다.
다시 말하는데 지시대로 움직여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결코 아들을 볼 수 없을 거예요. 조직의 명령이니까 나도
어쩔 수 없어요. 난 명령을 전하는 것뿐이에요. 조직엔 명령만이
있을 뿐이에요. 거기서 인간적인 것을 찾을 생각은 하지 마세요.
거기에 그런 것은 없어요. 명령을 어기면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에요. 그게 바로 조직의 속성이에요.
그는 꿈꾸는 듯한 눈으로 그녀의 말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문득 사랑하는 아들이 먼 하늘나라에 살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를 발견하면 헤로인 판매대금을 어디다 뒀는지 알아야
해요. 그걸 알아낸 다음에 그를 죽여야 해요. 아무튼 그를
발견하면 우리한테 먼저 연락해야 해요. 그때그때 지시를 받고
행동하세요. 여기를 나서면 우리는 따로따로 움직여야 해요.
그자를 납치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그게 여의치 않으면
적당한 장소에서 그를 제거할 수밖에 없어요. 그자는 지금 몹시
조심하고 있기 때문에 그자를 납치한다는 건 상당히 어려울
거예요. 한 대 피우시겠어요?
그는 이상한 듯 그녀를 쳐다보다가 담배를 받아들였다. 그녀가
라이터불을 붙여주었다. 그는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보면서
담배를 피웠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흰 눈뿐이었다.
파리는 눈 속에 묻혀 있었다.
이 중요한 일에 왜 당신을 끌어들인 줄 아세요?
뒤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서있었다.
당신이 한국인이기 때문이에요. 황표라는 인물 역시
한국인이에요. 그자는 외국말을 몰라요. 그래서 외국인이
그자에게 접근한다 해도 그자한테서는 아무 것도 알아낼 수 없을
거예요. 한국인의 장점과 약점을 알고, 그리고 말을 충분히 알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같은 한국인뿐이에요. 당신은 그런 장점을
지녔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그자에게 접근하기가 쉬울 거예요.
한가지 당신은 전혀 얼굴이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에요.
유럽에서 당신이 무슨 짓을 하든 당신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당신은 아무 제약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가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가 않아요. 우리는 항상
감시받고 쫓기고 있는 처지예요. 그래서 마음 놓고 행동할 수가
없어요.
그녀가 등 뒤로 가까이 다가서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그대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 섰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
같은 한국인으로서 당신을 동정해요. 유럽에까지 와서 같은
한국인끼리 이런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더없이 비참하게
느껴져요. 탈출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어요. 아들을 빼앗긴
당신의 심정이 어떤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요.
동림은 처음으로 그녀를 죽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의
그와 같은 말에 구역질이 느껴졌다. 이 여자는 미친 여자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기회가 닿으면 더 깊이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런
기회가 올 때까지 자기 관리를 잘 하세요. 당신은 시키는 대로만
하세요. 그러면 아들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는 비로소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납빛처럼 굳어 있었다.
나는 아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아요. 하지만
내 아들이 아직 죽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거요. 만일 내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나는
당신들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지 않을 거요.
나는 아마 미쳐버릴 것이다 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
말을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당신은 아들을 찾을 수 있어요. 확신을 갖고 임하세요.
달콤한 말만 계속 지껄이는군요. 필요한 말만 해요. 다른
말은 듣기 싫으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검은 장미는 갑자기 굳어진 표정으로
그를 살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요. 당신은 정말 살인 전문가인가요.
아니요.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보기에도 당신은 전혀 그런 사람 같지가 않아요. 당신은
그저 한 가정의 착한 아빠 같은 인상이에요. 그런데 왜 당신을
살인 전문가라고 하는 거죠?
모르겠소. 평가는 내가 내리는 게 아니니까.
사람을 죽인 적이 있어요?
그는 끄덕였다.
있어요.
몇 명이나 죽였어요?
여러 명.......
그는 얼어붙은 창문을 손톱 끝으로 긁어댔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건 살인이라고 할 수 없어요.
그럼 뭐예요?
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런 거예요.
그건 살인이 아닌가요?
그는 돌아서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건 살인이 아니고 정당방위야! 난 예수그리스도가 아니야!
나를 죽이려고 하는데 가만히 서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멍청이가
세상에 어딨어!
그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기 때문에 그녀는 불안을 느끼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알겠어요.
알긴 뭘 알아? 내 말을 들어보란 말이야. 난 살인 전문가가
아니야. 난 아무도 죽일 수가 없어. 나는 오히려 당할지도
몰라.
당신을 안내해줄 여자를 한 명 소개하겠어요. 멋진
아가씨예요.
동림은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수화기를 집어들고
부산집으로 국제전화를 신청했다. 그것을 보고 검은 장미의
안색이 굳어졌다.
무슨 짓을 하는 거예요?
그는 잠자코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다.
부산에다 전화 부탁한 거예요?
우리 집에 전화를 부탁했어요. 궁금해서요.
안 돼요! 국제전화는 금방 발신처를 알 수 있어요! 그런 바보
같은 짓이 어딨어요! 취소하세요!
그럴 수 없어.
그는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그녀가 전화기 쪽으로
재빨리 다가가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동림은 얼른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이거 놔. 놓지 않으면 팔을 분질러버릴 테다!
그가 사정없이 팔을 비틀자 그녀는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손에서 수화기가
굴러떨어지자 동림은 그것을 집어 제 자리에 도로 올려놓았다.
그녀는 화를 못이겨 바들바들 떨면서 그를 노려보았다.
가만 두지 않겠어. 두고봐요.
내 집에 전화걸겠다는데 왜 방해하는 거야? 어떤 놈도
방해해서는 안 돼. 전화거는 것까지 방해하면 모두 죽여버릴
거야. 내가 왜 당신들 말을 듣고 있는지 알아? 내 아들
때문이야. 내 아들을 찾기 위해서 그러는 거야.
그의 표정이 무서웠던지 그녀는 더이상 아무 말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자 교환이 부산이 나왔으니
통화하라고 일러주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동림의 부산 집에
잠복해 있던 형사였다.
내 아내를 바꿔주시오.
추동림씨, 남화씨는 여기에 없습니다.
어디에 있나요?
경찰에 체포됐습니다. 김명기씨를 치어 죽이고 도망친 혐의로
체포됐습니다.
그 사람을 치어 죽이고 도망친 사람은 납니다. 그날 밤 내가
운전하다가 사고를 낸 겁니다.
추동림씨, 남화씨가 모든 걸 자백했습니다. 경찰은 당신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제 모든 게 밝혀졌으니까
주저하지 말고 자수하십시오. 지금 어디 계십니까?
자수하고 안 하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요. 난 내 아들을 찾아야 합니다. 내 아들을 찾기 전에는
자수할 수 없어요. 내 아들 소식은 있나요? 경찰은 내 아들을
찾았나요? 거짓말하지 말고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확인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으니까.
아직 찾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인하를 찾을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단서를 하나 잡았습니다. 곧 인하군을 구출할 수 있을
겁니다.
항상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는군요.
추동림씨, 남화씨는 당신이 자수하리라 믿고 모든 걸 자백한
겁니다. 부인의 정성을 봐서라도 빨리 자수하십시오. 도대체
지금 어디 있는 겁니까? 이건 국제전화인 것 같은데 거기
파리입니까?
다시 전화하겠습니다.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한숨을 들이켰다.
아내가 경찰에 모든 것을 자백하고 체포됐다면 이제 갈데까지
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제 숨겨야 할 일은 없어졌다.
모든 것은 속속들이 드러났고, 우리 집안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말았다.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두 손을
펴고 그것들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한참 동안 두 손을 들여다보고 있자 여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라고 그래요?
그러나 동림은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얼빠진
표정으로 한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중얼거렸다.
빨리 여기를 나가는 게 좋을 거요.
그것봐요. 국제전화를 걸면 위험하다고 했잖아요.
그들은 서둘러 호텔을 빠져나왔다.
1월 17일 저녁 김포 국제공항.
파리행 KAL기의 출발 시간은 밤 9시 정각이었다.
한 시간 전에 공항에 나와 출국 수속을 마친 노경감과
마형사는 국제선 대합실에 있는 스넥코너에서 저녁 식사로
샌드위치에 곁들여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때 노경감을 찾는
아나운스먼트가 들려왔다. 경감은 급히 공항 경비대 본부로
달려가보았다. 거기에 그를 찾는 전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수사본부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조금 전에 부산에서 연락이 왔는데 추동림이 집으로 전화를
걸어왔었답니다. 파리에서 걸어온 전화였답니다. 발신처
전화번호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추동림한테 부인이 체포된
사실은 이야기하고 자수하라고 했지만 거절당했답니다. 추동림은
자수할 의사가 없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전화가 걸려온 정확한 시간은?
7시 55분경이었답니다.
경감은 벽시계를 얼른 올려다보았다. 8시 1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즉시 파리 인터폴 본부로 전화를 걸었다.
여긴 서울입니다. 살레 부장을 부탁합니다. 아주 급한
일입니다.
부장님은 아직 들어오시지 않았습니다.
귀에 익은 여자 목소리가 말했다.
지금 빨리 연락을 취하고 싶은데, 어디 계십니까? 아직
암스테르담에 계십니까?
아니예요. 지금 아마 파리행 열차 속에 계실 거예요.
눈때문에 공항이 폐쇄됐어요. 그래서 열차편으로 오신다고
했어요.
그렇다면 대신 좀 처리해 주실 수 없을까요?
잠깐 기다려주세요. 브리앙 차장님을 바꿔드리겠습니다.
브리앙 차장은 말투가 몹시 빨랐다. 그렇게 빠른 영어는
알아듣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경감은 속도를 좀 늦추어 달라고
말했고, 그제서야 브리앙은 자신의 말투를 고쳐 한 마디 한
마디를 신중히 말하기 시작했다.
살레 부장님을 통해서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그 인물에 대해서는 이미 수배지시가 내려졌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자가 조금 전에 파리에서 한국으로
국제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정확한 발신처는 알 수 없고 파리에서
걸어왔다는 것만 확인됐습니다. 전화를 걸어온 시간은 이곳
시간으로 오후 7시 55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파리 시간으로
오전 11시 55분이 되겠습니다.
그는 수신처의 전화번호도 가르쳐주었다.
알겠습니다. 즉시 발신처를 알아보겠습니다.
저는 우리 요원 한 사람과 함께 조금 후에 파리행
KAL기편으로 서울을 출발한 예정입니다. 출발 시간은 이곳
시간으로 저녁 9시입니다. 도착 시간은 파리 시간으로 18일 아침
8시 25분경입니다.
알겠습니다. 마중 나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경감은 마형사와 함께 공항 경비대 본부를 나와 출국장 쪽으로
향했다.
파리는 폭설로 공항이 폐쇄된 모양이야. 거기까지 스무
시간정도 걸리니까 그 동안에 정상화되면 다행이고 그렇지
못하면 다른 공항에 내리게 되겠지.
우리가 도착하기도 전에 추동림이 체포되면 너무
싱겁겠는데요.
그렇게 되면 우린 관광이나 하다가 오는 거야. 하지만
추동림은 그렇게 쉽게 체포되지 않을 거야. 국제전화를 걸고나서
그곳에서 멍청하게 경찰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을 인물이
아니거든.
경감은 곁눈질로 마형사를 쳐다보았다.
해외여행이 처음인 마형사는 꽤 흥분해 있었다.
해외출장 허가가 떨어졌을 때 경감은 적잖게 놀랐었다.
밑져봐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거의 기대를 걸지 않고 해외출장
신청서를 제출했던 것인데 그것이 밤새에 받아들여져 이렇게
서둘러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특별 케이스이긴 하지만
그런만큼 부담이 큰 것도 사실이었다. 귀중한 달러를 소비하면서
해외출장을 가는 것이니 범인을 반드시 잡아와야 한다는 것이
출장허가를 내주면서 강조한 상부의 말이었다. 그 말에 짓눌린
탓인지 경감은 흥분해 있는 마형사와는 달리 어깨에 무거운
지게짐을 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빈
손으로 돌아오게 될 때의 기분을 생각하면 해외 나들이라고 결코
흥분할 수도 없었고, 지금와서는 괜히 해외출장을 신청했다는
생각마저 들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저러나 출장 명령은
이미 떨어진 상태였고 이제 조금만 있으면 파리행 비행기에 탑승
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경감은 마형사를 따라 출국장 안으로 들어섰다.
같은 날 오후 파리.
폭설로 거리의 교통은 거의 마비 상태에 빠져 있었다. 차량
운행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차량 속도보다는 걸어가는
것이 더 빠를 정도로 차들은 느릿느릿 굴러가고 있었다. 브리아
차장은 신경질적으로 차를 길가에 밀어붙여 세웠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 게 빠르겠어.
그가 차에서 내리자 부하 세 명도 뒤따라 내렸다. 그들은
지하도로 통하는 계단을 뛰어내려가 막 도착한 전철에
뛰어올랐다.
브리앙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12시 50분.
국제 전신전화국으로부터 한 시간쯤 전에 한국 부산으로
전화를 건 발신처의 주소를 알아내자마자 즉시 출발한 것인데
눈때문에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다. 지하철로 그곳 정류장까지는
10분. 전철에서 내려 발신처까지 걸어가는데 또 10분이 걸릴
것이다. 빨라야 1시 10분쯤에야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매부리코에 곱슬곱슬한 헤어 스타일을 한 마흔 안팎의
깡마른 사내였다. 유태계 출신인 그는 아직 독신이었고, 살레
부장과 항상 의견 충돌을 빚으면서도 그와 호흡이 맞아 오랫동안
함께 일해온 부장의 파트너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10분 후에 브링앙 팀은 파리시 외곽 동남쪽에 있는 솨시
르롸역에 내렸다. 역을 빠져나온 그들은 서쪽으로 뻗은 길을
달려갔다. 그 길은 오를리 공항으로 통하고 있었다.
한 구역 못미쳐 그들이 찾는 호텔이 눈을 뒤집어쓴 채 길가에
서있는 것이 보였다. 레소레라는 이름의 그 호텔은 여관이라고
하면 적당할 것 같은 조그마한 삼류 호텔이었다.
호텔 앞에는 경찰차가 대기하고 있었고, 정문 앞에는 두 명의
정복경찰이 기관총을 든 채 삼엄한 경비를 펴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로비에서 서성거리던 두 명의 사나이가
그들을 쳐다보았다.
브리앙입니다.
안경을 낀 뚱뚱한 사나이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는 관할서의 형사반장으로 브리앙의 협조 요청을 받고 먼저
달려와 호텔을 봉쇄해 놓고 있는 참이었다.
로비 한쪽에는 투숙객으로 보이는 남녀 몇 사람이 불안한
표정으로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호텔이 봉쇄되는 바람에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안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브리앙이 관할서에 부탁한 것은 그가 도착할 때까지 호텔을
철저히 봉쇄해 달라는 것이었고, 그 이상 다른 말은 하지
않았었다. 관할서의 형사반장은 인터폴의 부탁대로 호텔을
빈틈없이 봉쇄해 놓고 있었다.
나간 사람 있습니까?
내가 온 이후로는 개미새끼 한 마리 빠져나가지 않았습니다.
형사반장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브리앙은 프런트로 다가가 교환을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호텔 교환원은 얼굴에 주근깨가 많은 30대의 노처녀였다.
11시 55분경에 코리아 부산에 국제전화를 신청한 사람이
있었지요?
네, 있었어요.
그녀는 노트를 펼치고 한 곳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403호 손님이 부탁했어요.
여자였나요, 남자였나요?
남자였어요.
어느 나라 말을 사용했나요?
영어로 부탁해 왔어요.
브리앙은 날카로운 눈으로 프런트데스크 맨을 쳐다보았다.
403호 손님은 한 시간 전에 이미 떠났습니다.
프런트맨은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브리앙은 손을 내밀었다.
숙박카드를 봅시다.
프런트맨은 숙박카드를 내놓으면서 다시 말했다.
어떤 여자분하고 함께 나갔습니다. 그 여자분도 동양인
같았습니다.
함께 투숙했나요?
아닙니다. 남자 혼자서 투숙했고, 그 여자는 11시쯤에 왔다가
함께 나갔습니다.
숙박카드에 적혀 있는 사람의 이름은 KIM MYONG-KI 였고
국적은 한국으로 되어 있었다. 여권번호를 확인한 다음 그는
그것을 프런트맨에게 돌려주면서 그것을 복사해 달라고
부탁했다. 403호에 투숙했던 인물은 살레 부장이 수배하라고
지시를 내린 그 인물이 틀림없었다.
그 사람이 투숙한 것은 어제 오후 5시경이었습니다. 한번도
외출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식사도 방 안에서 했습니다.
403호로 브리앙을 안내하면서 프런트맨이 한 말이었다.
유무화는 플랫폼을 걸어가면서 저만치 앞에 마치 탄환처럼
앞으로 불쑥 튀어나와 있는 주황색 기관차를 바라보았다. 기관차
뒤로는 객차가 길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녀는 기관차를 유심히 바라보면서 객차 쪽으로 이동했다.
객차의 옆구리에는 Geneve 라고 적힌 목적지 표시판이 붙어
있었다. 그녀는 3호차로 올라갔다. 그녀가 초특급열차를
타보기는 처음이었다. 그것은 최대 속도가 시속 380킬로나
된다고 했다.
한쪽 켠에는 일인용 좌석이 창문을 따라 배열되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두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좌석이 놓여 있었다. 통로는
그 사이로 나있었다. 일반 열차보다 폭이 좁아보였고 방이 아닌
개방식으로 되어 있었다.
무화는 승차권에 표시되어 있는 좌석을 찾아갔다.
그녀의 자리는 2인용 좌석의 안쪽이었다. 그녀의 옆자리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 와서 앉아 있었다. 남자였다. 그것도 늙은
남자였다. 무화가 자기 자리에 앉으면서 실례한다고 말했지만 그
남자는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먹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의 손에는 샌드위치 조각이 들려 있었다. 그는 동양인
같았다.
제네바행 초특급열차는 예정대로 1시 25분에 출발했다.
무화는 열차 안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아무리 살펴봐도 그녀를
주목하고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그녀는 문득 자신이 그
악마의 손아귀에서 해방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그럴 리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잿빛머리도 검은 옷차림의
여인도, 금테 안경의 남자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어딘가에 감시의 눈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자 온몸이
움츠러드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검은 옷차림의 여인의 말로는 열차에서 누군가를 만날
것이라고 했었다.
그 남자를 만나거든 적극 협조해 줘야해. 그 남자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안 돼. 그 사람한테 황표가 있는 곳을 가르쳐
줘. 그러면 그 사람이 모두 알아서 처리하게 될 거야. 그 사람은
전문가야. 살인 전문가야. 그 사람이 네 이름을 부르거든 놀라지
마. 그 사람의 암호는 황금의 초생달이야. 암호를 확인해. 다시
말하는데 그 사람이 시키는대로 해. 몸을 달라고 하면 몸도 줘.
거절하면 안 돼.
검은 여인이 마지막으로 다짐해준 말이 아직도 그녀의 귀에
맴돌고 있었다. 특히 그 남자가 살인 전문가라는 말이 전율할
공포감으로 그녀를 사로잡고 있었다.
열차는 일반 열차보다 진동이 심했다. 파리에서 마콩까지는 제
속도로 달리기 때문에 1시간 40분이 걸릴 것이지만
마콩에서부터는 일반 속도로 달리기 때문에 제네바까지 2시간
10분이 걸릴 것이라는 아나운스먼트가 들려왔다.
열차는 어느 새 파리를 벗어나 눈에 덮인 들판 위를 질주하고
있었다. 무화는 옆자리의 늙은 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 얼굴은 어느 새 눈을 감고 있었다. 가볍게 코까지 고는
것이 잠이 든 것 같았다. 얼른 보기에도 비싼 초특급열차의
고급스런 승객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차림의 늙은이였다.
잠들어 있는 모습이 몹시 피곤해 보였다. 머리도 콧수염도
잿빛이었다. 나이는 60도 넘은 성 싶었다. 몸에는 회색의 낡은
오버코트를 두르고 있었다. 어느 나라 사람일까. 얼굴 빛이 검은
것이 한국인은 아닌 것 같다. 중국인일까.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노인은 손에 가죽장갑을 끼고 있었다. 아까
샌드위치를 먹고 있을 때에도 손에 장갑을 끼고 있었다. 차 안은
난방이 잘 돼있어 장갑이나 코트 같은 것은 벗어도 좋을 만큼
따뜻한 온기로 차 있었다.
그녀가 쳐다보고 있는 것을 알고 있기나 한 듯 노인이 갑자기
손을 쳐들었기 때문에 그녀는 깜짝 놀라 고개를 얼른 돌렸다.
그녀가 다시 그를 쳐다보았을 떄 그는 코트깃을 세워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아마 몸이 편치 않은 모양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는 깊이 잠든 것 같지 않았다.
패스포트 좀 보실까요?
그녀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통로에 사복 차림의 사나이
두 명이 서있었다. 그들은 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노인은 눈을 뜨지 않았다.
동행입니까?
색안경을 낀 사나이가 노인을 턱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무화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색안경이 노인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노인이 비로소 눈을 뜨자 색안경은 프랑스 경찰임을 증명하는
마크를 꺼내보였다.
패스포트 좀 보실까요?
노인은 상체를 움직이더니 안 호주머니에서 패스포트를
꺼냈다. 표지가 빨간 색은 것을 보고 그녀는 노인이
일본인이라고 생각했다.
이름이 뭐죠?
경찰이 불어로 묻자 그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경찰은 영어로 바꾸어 물었다. 그제서야 그는
이쓰키 고로....... 하고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제네바......
그는 아주 간결하게 대답했다. 그러고 나서 심하게 기침했다.
실례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경찰은 그에게 도로 패스포트를 돌려주고 나서 물러갔다.
이쓰기 고로(五木五郞)는 불안한 표정으로 뭐라고 중얼중얼
했는데 무화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경찰이
사라질 때까지 그들의 움직임을 주시했는데, 그들은 동양인테만
접근해서 그들의 신분을 조사하고 있었다.
일본서 오셨나요?
그녀는 갑자기 누구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에 별로
생각지 않고 영어로 물었다. 노인은 눈을 꿈벅거리며 그녀를
잠시 바라보았다.
아니요.
놀랍게도 그의 입에서는 한국말이 튀어나왔다. 무화는 숨을
죽였다.
아가씨도 한국 사람이지요?
노인이 그녀만 들을 수 있게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그녀는
얼어붙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노인은 호주머니를
뒤적이더니 껌을 한 개 꺼냈다. 무화는 검은 장갑 위에 놓여
있는 껌을 겁에 질려 내려다보다가 조심스럽게 집어들었다.
그가 가죽장갑을 벗었다. 밖으로 드러난 손은 노인의 손이
아닌 젊은 사람의 손이었다. 그녀는 그 어울리지 않는 손과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 비로소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유무화씨...... 아가씨가 나를 안내해 줄 사람이요?
피로에 젖은 충혈된 눈이 그녀의 얼굴을 더듬었다. 그녀는
숨을 죽인 채 끄덕였다. 그리고 나서 바보스럽게
어떻게 제 이름을 아세요? 하고 물었다.
잘 알지요. 아가씨는 황금의 초생달이 빛나는 밤에 썩 어울릴
것 같군요.
그게 무슨 말이죠?
그녀는 놀라서 물었다.
그런 밤에 어울리는 여자가 있지요. 하마터면 나는 체포
될뻔했어요. 이제 위기는 넘긴 것 같지만 아직은 안심할 수가
없어요. 요즘 수사력은 세계적이고 속도도 아주 빨라졌어요.
그녀는 아무래도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전문적인 암살자로
보이지가 않았다. 그가 변장하고 있다는 것은 이제 확실해졌다.
사업 이야기나 합시다.
그러면서 그는 코트 주머니에서 봉투를 하나 꺼냈다.
봉투 속에서 나온 여러 장의 컬러 사진을 보고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황표를 여러 모양으로 찍은 사진이었다. 얼굴만 찍은
사진도 있었고 길가에 서있는 모습을 찍은 것도 있었다.
여자들속에 파묻혀 찍은 것도 있었다.
아가씨가 나에게 소개해줄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인가요?
그가 손가락으로 황표의 얼굴을 찍었다. 그녀는 다급하게
끄덕였다.
네, 맞아요.
이 사람을 잘 알고 있나요?
그의 목소리는 무슨 음모를 꾸미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목소리가 아닌, 마치 한가로운 잡담이나 나누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목소리였다.
잘 알아요.
그녀는 여전히 공포에 사로잡혀 대답했다. 이 사람은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위장의 천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더욱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이 사람에 대해서 아는 대로 말해 보시오.
무화는 얼른 입을 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녀는 거기에
대답하기 전에 그가 노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싶었다.
그 사람을 죽일 건가요?
그는 거기에 대답하는 대신 손톱 끝으로 창문에 두텁게 낀
성에를 긁었다.
어느 새 밖에는 눈부신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적설량도
출발할 때와는 달리 많이 줄어들어 있었다. 열차는 초원지대를
달리고 있었다. 그가 창문에서 손을 내렸다.
아직 뭐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아마 그렇게 될 거요.
상황이 달라지기 전에는.......
그녀는 자신이 살인의 동조자가 된다는 사실에 전율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자신은 황표를 죽이기 위해 초특급열차를 타고
가고 있는 셈이었다.
그 사람 이름은 황표라고 해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가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것을 보고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은 돈이 많나봐요.
그렇게 말해놓고 그녀는 자신이 아무 생각없이 지껄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몰라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
그 사람은 뚱뚱해요. 키는 중간 정도고 색깔있는 안경을 끼고
다녀요. 이마가 많이 벗겨졌고...... 그리고 머리를 바로 뒤로
넘겼어요. 나이는 50정도 됐어요. 자기 말로는 아직 50이 채 안
됐다고 했어요. 인상은 별로 좋지 않아요. 눈꼬리가 처지고,
눈빛이 깨끗하지가 않고 흐려 있어요. 얼굴빛은 검은 편이에요.
한 마디로 즉물적인 인상을 지니고 있어요.
황금의 초생달은 어느 새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있는 그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햇빛이 그들이
앉아 있는 자리에 비쳐들기 시작했다.
그 사람을 만난 적이 있나요?
네, 잘 아는 사이예요.
그가 고개를 돌려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눈은 그녀에게 무언가 묻고 있었다. 그녀는 잠자코 있었다.
그런데 왜.......
이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것 같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와 황표와의 관계를 알고 있다면 그런 질문을 하지 않을
것이다.
갑자기 그의 얼굴에 노기가 서리는 것을 보고 그녀는 몸을
움츠렸다. 자리를 차고 일어서고 싶은 것을 그녀는 꾹 참았다.
당신 같은 여자가 악마라니 믿어지지가 않는군. 사람은 겉만
보고는 몰라요. 당신은 검은 장미보다 더 악랄하겠지. 그러니까
잘 아는 사람을 죽이는데 앞장서고 있는 거겠지. 잘 아는 사람을
어떻게 죽일 수가 있지?
아니예요! 그렇지 않아요!
그녀는 놀라고 당황해서 말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그를
쏘아보았다.
당신이야 말로 정말 악마가 아닌가요?
난 악마가 아니야.
그는 머리와 손을 동시에 흔들었다.
그가 갑자기 그녀의 가는 팔을 움켜잡았기 때문에 그녀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난 악마가 아니란 말이야!
그는 속삭이는 소리로 부르짖었다.
당신이 살인 전문가라고 들었어요. 악마가 아니라면 어떻게
그런 짓을 직업으로 삼을 수가 있어요.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팔을 빼려고 했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내가 살인 전문가라고?
그 말 끝에 그는 억눌린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는 그녀의
팔을 놓았다.
그건 당신들이 지어낸 말이야. 나는 살인 전문가도 아무것도
아니야. 아주 평범하고 무능하기 짝이 없는 사람일 뿐이야.
잠깐! 나는 그 사람들과 한 패가 아니예요! 오해하지
마세요.
그는 혼란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녀는 다시 말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예요. 나는 유학생이에요.
유학생이라고?
그가 코웃음치는 것을 보고 무화는 발끈해서 파리대학
학생증을 꺼내보였다.
대학원에서 박사코스를 밟고 있는 중이에요.
자신이 그에게 왜 굳이 신분을 밝히려 드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말했다.
위조증명이겠지. 나도 위조여권을 가지고 있으니까.
아니예요. 정말이에요.
그녀가 정색을 하고 말했기 때문에 그도 정색을 하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뭘 전공하고 있소?
건축미술을 공부하고 있어요.
건축미술을 공부하고 있는 아가씨가 왜 이런 짓을 하고
있지?
그녀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몰라 한동안 망설이다가
말했다.
제가 왜 이런 짓을 하는지 그 이유를 정말 모르세요?
몰라요.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조직의 일원이 조직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데 무슨 이유가 있을 수 있나?
전 조직의 일원이 아니예요. 협박을 받고 움직이고 있는
거예요.
그것 참 안 됐군. 나도 안 됐지만.......
그의 빈정거림에는 절망적인 느낌 같은 것이 있었다.
무화는 한참 주저하다가 더이상 참을수 없게 되었을 때 마침내
이야기를 꺼냈다.
전 당신이 누군지도 몰라요. 이런 이야기를 하면 피해를 입게
된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말씀드리겠어요. 전 갈때까지
갔으니까요. 누구한테 모든 걸 털어놓고 싶었어요. 너무 기가
막혀서 혼자 간직하고 있기에는 너무 벅차서 죽을 것 같아요.
그녀는 숨을 돌리고 나서 말을 이었다.
지금 우리가 찾아가고 있는 황표라는 그 사람을 알게된 것은
3년쯤 전이었어요. 그때 그 사람은 관광차 파리에 왔었는데,
저는 아르바이트로 그 사람 가이드를 맡게 되었어요. 유학생들이
한국인들 관광안내를 해주고 용돈을 버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고
또 가장 손쉬운 아르바이트예요.
그녀는 이야기하는 동안 하나도 숨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의 누군가에게 진실을 털어 놓음으로써
조금이나마 자기 위안을 받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동림은 그녀가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거짓말은 있을 수 없고, 또 그런 거짓말을 해야 할 이유를
그녀로부터 발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무화의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눈물을
닦으려고도 하지 않은 채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공부밖에 모르는 유린은 결국 저때문에 그렇게 된
거예요. 그애는 저때문에 위험에 빠지게 된 거예요. 그런데 제가
어떻게 모른 체하겠어요. 제 양심상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요.
제가 구하지 않으면 그애는 죽을 거예요. 이미 희생됐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저는 그 애를 버릴 수가 없는
입장이에요. 제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그애를 구해내야 해요.
그애는 심신이 너무 약해서 고통을 건디어 낼 수도 없는
처지예요.
그녀는 그의 손이 가만히 다가와 그녀의 손 위에 낙엽처럼
얹히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그것을 뿌리치지 않고 가만히
두었다. 그의 손은 따뜻했다. 그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잊어왔던
따뜻함이었다.
그 따뜻함이 그녀의 손을 포근히 감싸왔다. 그녀는 어떤
두려움도 수치심도 일순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녀는
그녀가 악마들에게 어떻게 당했는가를 담담한 마음으로 털어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모순은 남아요. 아가씨의 선택이 최선의 것은
아니예요.
그녀가 말을 끝냈을 때 그가 한 말이었다.
그녀는 비로소 눈물을 닦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 아가씨를 살리기 위해 황가를 희생시킨다는 것은 옳지
않아요. 그건 모순이에요.
그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녀의 귀에는 그의 말이
엄숙하게 들렸다.
모순이란 거 알고 있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어느쪽인가 선택해야 되겠지. 하지만 그건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겠지.
신을 믿으세요?
난 신자가 아니요.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죠?
당신 선택대로 하시요. 잘 될 거요.
그는 그녀의 손에서 손을 떼었다. 이건 정말 이상한
인연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서울서 오셨나요?
그렇소.
언제 오셨어요?
어제 도착했소.
차창 밖으로 Montchanin 이라고 쓰인 입간판이 보였다.
그 간판 옆에서 젊은 연인들이 입맞춤을 하고 있는 모습이
얼핏 스쳐갔다.
나는 내 아들을 찾기 위해 온 거요. 세 살짜리 내 아들을
찾기 위해.......
그녀는 그의 말을 얼른 이해할 수 없었다.
아들이 어디 있는데요?
어디 있는지 몰라요.
흔들리는 그의 얼굴이 절망적으로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놈들이 내 아들을 납치해 갔소. 인질로 말이요.
놈들이라니요?
나에게 이 짓을 시키고 있는 놈들 말이요.
그는 품 속에서 한 장의 사진을 꺼냈다. 그것은 그가 아내와
아들과 함께 찍은 컬러 사진이었다. 그는 해운대 모래밭에서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아들의 손을 잡은 채 웃고 있었고 그의
아내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아이가 내 아들이요. 이 사람은 내 아내고요. 우리 집은
해운대에 있어요.
아, 해운대.......
그녀의 입에서 가벼운 탄성이 흘러나왔다. 해운대는 그녀의
머리 속에 가장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는 곳이었다. 그녀는
사진을 받아들고 거기에 나와 있는 사람들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그것은 가슴 뭉클하도록 아름답고 단란한 한 가족의
모습이었다.
아름다와요. 아들이 너무 귀엽게 생겼어요.
그는 당연하다는 듯 끄덕였다.
그의 아내는 옆모습을 보이고 있었지만 미인 같았다.
부인이 미인이에요.
아주 아름다운 여자지요.
그는 역시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이 사람이 당신인가요?
그녀는 흰 티셔츠 차림의 중년 남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변장한 늙은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렇소. 그게 내 진짜 얼굴이요. 나는 양쪽에서 위협을 받고
있어요. 조직과 경찰 양쪽으로부터 말이요. 내가 일본인으로
위장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열차 안에서 체포됐을 거요. 그래서
이렇게 변장하고 다니는 거요. 내 아내는 부산 광복동에서
의상실을 경영했지요. 아내가 출근하고 나면 나는 아들을 데리고
해운대 바닷가를 거닐곤 했어요. 그게 내 유일한 취미였고,
그때가 나는 제일 행복했어요. 나는 그 이상의 행복은 바라지
않았어요. 그 조그만 행복이 오래오래 계속되기를 바랐어요.
그런데 그렇게 되지가 않았어요. 그 조그만 행복도 나에게는
너무 과분했던 모양이지요. 우리 가정은 그야말로 재기 할 수
없을 정도로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어요. 내 어린 아들은
납치됐고, 내 아내는 경찰에 체포됐고, 나는 살인 청부를 맡고
이렇게 가고 있는 거요.
그의 목소리는 어느 새 침울한 어조로 변해 있었다. 그것이
비처럼 가슴을 촉촉히 적셔주는 것을 그녀는 느꼈다.
아가씨가 모든 것을 털어 놓았으니까 나도 숨기지 않고
털어놓겠소. 하긴 이렇게 된 이상 숨길 것도 없어요. 한국에는
지금 나를 체포하기 위해 비상망이 퍼져 있어요. 아까 그
형사들을 보고 유럽에까지 이미 수사의 손길이 뻗친 것을
알았어요. 그들을 본 순간 나는 그들이 나를 찾고 있음을
알았어요. 그건 그렇고 내가 이렇게 된 경위를 당신한테
이야기하겠소. 믿어도 좋고 믿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난
아가씨의 이야기를 믿기로 했어요.
저도 믿겠어요.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그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그녀의
가슴이 그의 어깨에 와 닿았다.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는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그의 목소리는
자꾸만 작아져갔다. 나중에는 거의 들리지 않게까지 되었다.
그녀는 더욱 바싹 그 쪽으로 몸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그가 이야기를 끝냈을 때 그녀는 마치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온 기분이었다. 모든 것이 갑자기 눈부신 빛 속에
노출되어 버린 듯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이었고, 그녀는
그와 함께 더 어둡고 긴 터널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생각과 행동에 감동한 나머지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는 정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런 이야기가 사실로 존재할 수 있다는데 대해 그녀는 분노와
슬픔을 동시에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다시 손을 맞잡고 있었다. 그들의 손은 땀으로 축축히
젖어 있었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오래도록 침묵을 지켰다. 그녀는
어떠한 말로도 그를 위로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힘이 될지 모르지만...... 아들을 찾을 수 있게
도와드리겠어요.
열차가 마콩에 도착했을 때 마침내 그녀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그는 그녀의 표정에서 그녀가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알았다.
계속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요.
그녀가 분노에 차서 말했다.
어떻게든지 손을 쓰지 않으면 안 돼요.
그는 계속 듣고만 있었다. 그녀는 옳은 말을 하고 있었다.
마콩에서부터는 열차의 속도가 갑자기 줄어들어 일반 열차와
같은 속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가 너무 오래도록 침묵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의
속마음을 알 수 없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계속 말을
걸었지만 그는 석상처럼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고, 줄기차게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그와 같은 표정에서 그녀는 지금까지의 모든 대화를 모두 부정해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언제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단 말이냐. 당신하고 나하고는 입장이 다르단 말이야.
우리가 서로 감정을 나누고 서로를 동정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야. 우리는 냉정해야 해. 나는 당신 같은 여자 몰라. 그의
침묵 속에서 그녀는 그와 같은 무언의 뜻을 읽을 수 있었다.
열차가 스위스 국경에 닿을 때까지도 그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스위스 경찰이 올라와 형식적으로 패스포트를 검사했다.
동림이 일본 여권을 보이자 경찰은 미소로 답례했다.
열차가 마침내 제네바역에 들어섰을 때 무화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말씀 좀 하세요. 제가 뭐 잘못했나요?
잘못한 거 없소. 아가씨는 나한테 너무 잘해 주었어요.
그는 사무적으로 말했다.
잘해 드린 것 없어요.
그녀는 애절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차가운 표정이었다.
내가 아가씨를 해칠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 두는 게
좋을거요.
승객들이 내릴 채비를 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대로 앉아
있었다.
북부 유럽 쪽에는 한파와 함께 폭설이 몰아쳤는데 남부 유럽의
제네바에는 눈송이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맨 마지막에 열차에서 내렸다.
플랫폼 한쪽에 검은 장미와 잿빛머리, 그리고 금테 안경을 낀
동양인이 서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동림과 무화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선생님이 저를 해치신다 해도 저는 선생님을 해칠 수 없을 것
같아요.
플랫폼을 나란히 걸어가면서 그녀가 말했다. 그녀가 그를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그는 갑자기 멈춰서서 그녀를 차갑게 쏘아보았다.
그럴 듯한 말로 나를 혼란시키려고 하지 말아요. 난 나대로
해나갈 거요. 나는 내 아들을 찾아야 해요. 당신은 당신 친구나
구해내도록 해요.
우리가 힘을 합치면 저자들을 이길 수 있을 거에요.
그녀의 몸이 그의 몸에 와 닿았다. 그녀는 애타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몸을 돌려 출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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